김창립(金昌立,1666-1683)


 

김창립(金昌立,1666-1683)                                  PDF Download

 

1666(현종 7)~1683(숙종 9). 조선 후기의 학자이다.

관은 안동(安東). 자는 탁이(卓爾), 호는 택재(澤齋)이다. 택재라는 호는 김창립이 셋째 형인 김창흡(金昌翕)의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중택재(重澤齋)라는 서실을 짓고 독서하였는데,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다. 증조부가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이고 할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김광찬(金光燦)이며, 아버지는 영의정을 지낸 김수항(金壽恒)으로 여섯 째 아들이다.

김수항은 김창집(金昌集), 김창협(金昌協), 김창흡(金昌翕), 김창업(金昌業), 김창집(金昌緝), 김창립(金昌立) 등 여섯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이들은 모두 자질이 뛰어나 세간에서 소위 육창(六昌)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이처럼 김창립은 당대에 손꼽히는 문벌이었던 안동김씨 가문이라는 명문을 배경으로 갖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영특한 기질이 나타나 기재(奇才)로 불렸으며, 특히 시를 잘 썼으나 병으로 18세에 요절하였다.

그는 15세에 발분하여 문장과 학문에 크게 힘을 썼다. 나이 16세에 민정중(閔鼎重)이 관례(冠禮)를 주관하면서 자(字)를 탁이(卓而)로 지어 주었고, 17세에 이민서(李敏敍)가 딸을 시집보내어 사위로 삼았다. 18세에 세상을 떠났는데, 1683년에 한양에 천연두가 창궐하였는데, 마침 명성황후의 장례에 참석하였다가 감염되었다. 이 병으로 인해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사망하였으니 같은 해 12월 26일이었다.

김창립은 셋째 형인 김창흡의 문하에서 시를 배웠는데, 김창흡은 당시 조선 시단의 구태의연한 면모를 일신하여 새로운 시의 세계를 열기 위해 노력한 시인으로서 당대의 중추적 인물이었다. 김창립은 시를 배움에 있어 당시의 일반적인 학자들과는 약간의 구별되는 성향이 있었다. 택재유타(澤齋遺唾)의 부록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그의 뜻이 과거에 응시하여 명성과 이익을 취하는데 있을 뿐만이 아니었다. 읽은 책이 많지는 않았지만 시경에 힘을 쓴 것이 가장 전일하여 항상 외우고 감상하였으며, 초사(楚辭)나 사마천의 사기, 고악부(古樂府), 당나라의 여러 시를 탐독하고 여기에 빠져 있었다. 이런 까닭에 그의 말에서 나오는 것이나 글로 지어진 것이 절대로 세속의 틀을 답습하지 않았다.”

이러한 김창립의 뜻밖의 죽음은 가족과 주변에 큰 충격을 주었다. 가문의 배경이나 개인적 능력을 고려해 볼 때 크게 성공할 것으로 기대했으나, 죽음으로 인해 그 기대를 충족하지 못하자 이에 대한 실망감이 문집의 발간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그가 죽은 뒤 7년째에 기사년(己巳年)의 화(禍)가 일어났다. ‘기사년의 화’는 숙종 15년인 기사년(1689)에 남인이 다시 정권을 잡게 되자, 아버지 김수항(金壽恒)이 진도(珍島)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음을 당하는 기사환국(己巳換局)을 말한다. 조선 숙종 때 소의(昭儀) 장씨(장희빈)의 아들 윤(昀)을 왕세자로 삼으려는 숙종에 반대한 송시열 등 서인이 이를 지지한 남인에게 패배하고, 정권이 서인에서 남인으로 바뀐 일이다.

화를 당한 날에 선친(김수항)이 김창흡에게 말하기를,

“너의 아우 무덤에 내가 묘지명(墓誌銘)을 지으려고 한 지 오래 되었으나 너무나 슬퍼서 글을 짓지 못하였다. 지금은 내가 어쩔 수 없으니 네가 묘지명을 지어야 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내가 눈물을 흘리며 명을 받았으나 슬픔이 심하여 글을 지을 수 없었다. 그 뒤 7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다음과 같이 묘지명을 지었다. “아우(김창립)는 사람됨이 아름답고 총명하며 준수하고 명랑하여 어려서부터 예지가 뛰어났다. 어려서 여러 형들을 따라 공부하면서 이미 ⌈시경⌋의 국풍(國風)과 대아(大雅), 소아(小雅)의 원류(源流)를 들어보고 고금 성률(聲律)의 높낮음에 대해 취사선택할 줄을 알았는데, 이해력이 풍부하여 스스로 터득한 바가 많았다. 이에 평소 좋아하는 잡기(雜技)를 모두 버리고 오로지 문장에다 힘을 쏟았는데, 이미 형들인 김창협과 김창흡 등을 스승으로 삼아 마을의 동지 5-6명을 인솔하여 주야로 어울려 서로 갈고 닦는 것을 일삼았다. ⌈시경⌋․⌈초사(楚辭)⌋․⌈문선(文選)⌋과 옛날 악부(樂府)로부터 당나라 중기 여러 학자들의 작품에 이르기까지 모두 연구하고 심취하여 시가(詩歌)로 발로되었다. 특히 사마천의 ⌈사기⌋를 좋아하여 매양 읽다가 경경(慶卿)과 고점리(高漸離)가 축(筑)을 타며 슬프게 노래하는 대목에 이르면 대뜸 탄식하고 강개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여기에서 경경은 형가(荊軻)이다. ⌈사기⌋에 “고점리는 축(筑)을 잘 탔는데, 형가와 친구였다. 형가가 진시황(秦始皇)을 저격하러 길을 떠나자 연(燕)나라 태자 단(丹) 등이 역수(易水)에 나와 전별하였는데, 고점리는 축을 타고 형가는 노래를 부르자,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형가는 진시황을 저격하였다가 미수에 그쳐 죽었고 고점리는 성명을 바꾸고 머슴살이를 하였다. 진시황이 고점리를 잡아다 눈을 빼고 곁에 두고 축을 타게 하였다. 고점리가 축 속에다 칼을 넣어 두었다가 틈을 타 진시황을 찔렀으나 맞지 않아 피살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평소 동료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너희들과 같이 날마다 술을 마시고 이소(離騷: 옛 초나라 굴원(屈原)의 서정시)나 읊조리면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 그것으로 족하다.”

라고 하였으니, 대체로 그의 뜻은 세상의 부귀공명을 하찮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 간혹 태학(太學)에 나가 노닐면서 누차 과시(課試)에 합격하였으나 만족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아우는 선량하고 사람을 널리 사랑하였다. 집에서는 효도하고 사람과는 신의가 있었으며, 특히 친구 간에 독실하였다. 이로 인해 그와 노니는 자들은 너나없이 진심으로 사모하였고, 그가 죽었을 때 동기간을 잃은 것처럼 통곡하였는가 하면 심지어 상복(喪服)을 입기도 하였다.

1683년(숙종 9년) 정월에 아우가 벽에다 큰 글씨로 ‘나의 나이 18세이다.’라고 썼는데, 이는 스스로 격려하는 말이었다. 그런데 결국 그해 12월 26일에 죽고 말았으므로 사람들이 예언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가 죽은 뒤에 동지들이 상자 속에서 글 수십 편을 찾아내어 김창흡의 산정(刪定)을 거치고 나서 그가 강습한 서실의 이름을 따라 택재유타(澤齋遺唾)로 이름을 붙였다. 그의 묘소는 석실(石室) 선영에서 몇 리 떨어진 양주(楊州) 율북리(栗北里)에 있는데, 동쪽으로 수십 보 떨어진 곳에 선친의 묘소가 있다.

⌈택재유타⌋는 김창립의 시집이다. 단권 1책이다. 그의 동문인 홍유인(洪有人)․유명악(兪命岳)․최동표(崔東標) 등이 그가 죽은 지 1년 만인 1684년(숙종 10)에 유고집을 모아 발간을 추진하였으며, 김창흡이 그것을 산정하여 이듬해에 간행하였다. 초인본은 서사활자를 사용하여 간행하였으며, 이 중간본은 1700년(숙종 26)에 강화부에서 운관활자로 다시 간행되었다.

⌈택재유타⌋는 서(序), 시(詩), 부록(附錄), 발문(跋文)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로 망부석(望夫石), 조야제(鳥夜啼), 소년행(少年行), 취귀(醉歸), 독대학(讀大學), 분오곡(奮五穀), 칠석사(七夕詞) 등 85수가 수록되어 있으며, 부록으로 행장(行狀), 묘표(墓表), 묘지명(墓誌銘), 김창립전(金昌立傳)이 첨부되어 있다. 그리고 이 유고집의 서문과 발문을 쓴 인물들이 당대를 대표하는 명사들이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김석주(金錫胄)의 서문과 권말에 김창흡, 송시열(宋時烈), 남용익(南龍翼), 김만중(金萬重)의 발문이 있다.

김창립은 과거에 응시하기 위하여 배우는 시를 거부하고 ⌈시경⌋의 시나 고풍시(古風詩)를 따르려고 노력하였다. 10세 때에 처음 한시를 지었고, 한시에서 추구하는 바가 남달라서 주위의 기대를 모았으나 일찍이 죽는 바람에 완성을 보지 못하였고, 이로 인해 가족과 친지로부터 깊은 애도를 받았다. 이 시문집이 비록 단권(單卷)이고 수록 내용도 풍부하지 않으나 문집으로서의 엄연한 가치를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김재석(金載石,1895-1971)


 

김재석(金載石,1895-1971)                                  PDF Download

 

1895(고종 32)~1971. 근대의 학자이다.

관은 울산(蔚山). 자는 경담(景潭), 호는 월담(月潭)이다. 「행장(行狀)」에 따르면 그의 자와 호는 모두 간재(艮齋) 전우(田愚)가 친히 지어준 것으로, 석담(石潭) 즉 율곡 이이를 흠모하라는 뜻이 담겨있다고 한다.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의 후손으로 순창군 복흥면 사창(社倉)에서 아버지 김병대(金炳大)와 어머니 행주 기씨(幸州奇氏)의 장남으로 1895년 9월 24일에 나주 여황면 흑석리의 외가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기주현(奇周鉉)의 딸이다. 할아버지 김상기(金相璣)는 1906년 최익현(崔益鉉)과 함께 을사늑약에 항거하는 유림들의 의병활동을 도모하다 일본경찰에 체포되기도 하였다. 후에 고종은 그의 공적을 평가하여 독립의군부초토영참서관(獨立義軍府招討營參書官)을 제수하였다. 아버지 김병대는 효행으로 유명했으며, 약간의 나이에 송병선(宋秉璿)을 사사하고, 그 후 전우와 기우만(奇宇萬:기정진의 손자)을 따라 배웠다. 어머니는 기고봉(奇高峰)의 후손인 기주현(奇周鉉)의 딸이다.

김재석은 전우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이규헌(李圭憲)․정도현(鄭道鉉) 등과 교류하였다. 스승인 전우가 순창의 훈몽재(訓蒙齋)에서 강의할 때 10세의 나이로 소학 전편을 틀리지 않고 외워 전우로부터 친필 훈화(訓話)를 받았다. 이것이 바로 김재석과 전우와의 첫 만남이었다. 어린 김재석이 당시 최고의 유학자로 추앙받던 전우를 만난 것은 그의 인생에서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그리고 ⌈소학⌋은 이후 그의 언행과 삶에 커다란 영향을 기친 것으로 보인다. 이후 김재석은 전우의 가르침을 가슴에 새기고 평생 전우의 학문에 복응한다.

어린 시절 김재석의 종학(從學) 활동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11세였던 1905년 가을에는 백헌(柏軒) 김관수(金觀洙)가 사대부 자식들을 데리고 서정병사에서 공부하자 김재석 역시 그를 따라 배웠다. 전우의 문인이었던 김관수가 당시 김재석에게 강조한 것은 선조의 덕행에 대한 계승과 조술 그리고 지행(知行)과 독서명리였다. 김재석의 학문과 행적을 살펴볼 때 김관수의 가르침 역시 어린 김재석에게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당시 김재석이 전우의 학문과 처사를 이해하기에는 어린 나이였지만, 김관수의 가르침을 이해하기에는 결코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행장」에는

“공은 타고난 기운이 순정하고 재주가 비범하여 장로들이 모두 원대한 인물이 되기를 기대했다. 글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문리가 일찍 통하였고 총명함이 보통을 넘었다”

라고 하였는데, 이러한 평가는 결코 상투적인 미사구어가 아닌 것 같다.

김재석의 일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건은 할아버지 김상기의 항일운동인데, 이로 인해 김재석의 집안은 커다란 고초를 겪고 가사를 탕진하는 지경에 이른다. 이러한 상황과 분위기는 김재석에게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김재석 역시 25세인 1919년에는 무력을 통한 항일운동에 참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재석이 무력 항일투쟁에 참여했던 직접적인 원인은 고종이 일제의 음모에 의해 독살되었기 때문이다. 고종의 승하는 당시 유림들의 분노를 사고 있었다. 대한 제국의 백성으로 고종의 원수를 갚기 위해 행동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해 보였다. 아마 기미년 가을에 읊은 것으로 보이는 시에는 당시의 분함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이슬 내린 가을 하늘 풀벌레 소리 요란한데(露下天高虫語亂)

수없는 상념으로 잠 못 이루네(百船懷抱不成眠)

제국의 도읍 그 치욕을 언제 씻을까(帝秦大恥何時雪)

가을바람 한강변에 서서 눈물만 흘리네(灑淚秋風漢水邊)

할아버지의 유지를 받아 내외의 동지들과 항일단체를 조직하여 이를 지원하기도 하고, 상해의 임정산하의 요인이 국내에 들어오면 몇 년이고 집에 숨기고 숙식이나 자금을 제공하는 등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항일운동을 도왔다. 김동수(金東秀)․김일두(金一斗)․정계원(鄭啓源) 등을 숨겨준 것도 그중의 하나였다. 또한 신채호(申采浩)와 뜻을 함께 하여 아주 친밀하게 지냈다.

1926년 할아버지를 여의고, 2년 후인 1928년 12월에는 아버지마저 작고한다. 그리고 1945년 해방의 기쁨도 잠시뿐, 민족의 분열과 외세의 개입 그리고 동족상잔의 비극이 몰려오게 된다. 56세에 6.25 전쟁으로 순창 사창에서 완산으로 이사한다. 그 후 김재석은 주로 시문(詩文)을 지어 음미하거나 비문(碑文)과 행장(行狀)을 지어 재야 유학자들의 활동을 선양하는 일에 종사한다. 지금 전하는 그의 문집에 수록된 상당수의 묘갈명과 행장들은 아마도 이 시기에 찬술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971년 6월 18일 오안사의 인봉신장(麟峯新莊)에서 향년 77세로 생을 마쳤다. 전라북도 정읍시 산내면 매죽리 묘덕촌 뒤 선영에 묻혔다. 저서로는 월담유고가 있다.

월담유고(月潭遺稿)는 근대의 유학자인 김재석의 시문집이다. 모두 8권 4책으로 연활자본이다. 1976년에 아들 김종섭(金鍾燮)과 오병근(吳炳根) 등이 편집하여 간행하였다. 권두에 권용현(權龍鉉)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김종섭․오병근 등이 지은 후지(後識)와 친척인 김천수(金千洙)의 발문이 있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권1에는 시 283수가 수록되어 있다. 시는 문체별로 정리되어 실려있는데, 5언은 모두 121수로 5언 절구 78수, 5언 율시 22수, 5언 고시 21수이다. 7언은 162수인데 7언 절구 65수, 7언 율시 95수, 7언 고시 2수이다. 권2에는 서(書) 58편이 실려있고, 권3에는 잡저 5편, 서(序) 20편, 기(記) 21편, 발(跋) 10편이 있다. 권4에는 명(銘) 1편, 찬(贊)·혼서(昏書) 각 2편, 상량문 13편, 축문 15편, 제문 14편이 있으며, 권5에는 비문 13편, 묘지명 1편, 묘표 14편이 있다. 권6에는 묘갈명 93편, 권7에는 행장과 가장 39편, 서사(書事) 3편, 전(傳) 3편이 있다. 권8에는 저자와 관련된 부록이 수록되어 있다.

서(書) 중에서 「답김성옥(答金聖玉)」은 광복이 되던 해에 교우인 김성옥에게 보낸 것이다. 일제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난 기쁨이 감동깊게 묘사되어 있다. 문집의 핵심은 권3에 수록된 잡저에 있다. 「수록(隨錄)」은 그의 학문적인 연구 결과가 집약된 글이다. 그 중에는 을사조약이 체결된 뒤 고종의 명으로 중국에 밀파되어 독립군 결성의 책임을 맡았던 이재륜(李載崙)의 활동상이 실려있어 주목된다. 이 밖에 1919년과 이듬해에 걸쳐 당시 계화도에 머물러 있던 전우를 찾아가 나눈 문답을 정리한 「화도기행(華島紀行)」이 있다. 「자경십도(自警十圖)」는 전우의 소심존성(小心尊性)의 뜻을 밝혀 존심의 수행법을 10폭의 도표로 그린 것이다. 이처럼 월담유고는 115명의 묘갈명과 39명의 행장이 수록되어 있어 20세 후반기 문인들의 행적을 알 수 있는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또한 을사늑약 체결 당시 고종이 최익현에게 밀지를 내린 독립운동과 관련된 비화가 담겨 있어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는 데 참고 자료가 된다.

김유(金瀏,1814-1884)


 

김유(金瀏,1814-1884)                                            PDF Download

 

1814(순조 14)~1884(고종 21). 조선 후기의 유학자이다.

관은 경주(慶州). 자는 사량(士亮), 호는 귤은(橘隱)으로 김지관(金志瓘)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이 과거공부를 열심히 하였으나 중간에 뜻을 바꾸어

“문장학(文章學)과 같은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일이며 과거의 일은 명(命)에 있을 뿐이다”

라고 하고 과거의 일을 단념하였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에게 사사하였고, 돌아온 후에도 1년에 한두 번씩 찾아가 학문을 문의하기를 40여 년간 계속하였다. 그는 스승으로부터 들은 바를 기록하여 편집하고 성리학에 전심하였으며, 후생을 교육하는 데에도 힘을 썼다. 실학자로도 이름이 높다.

여수 지역의 대표적 유학자로 조선조 말 여수시 삼산면 거문도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성리철학의 깊은 이치를 깨우칠 정도로 학문이 높았으나 벼슬을 마다하고 거문도에 낙영재를 짓고 후학들을 가르치며 학문에 전념했다.

여수항에서 쾌속선으로 두어 시간 포말을 가르다 보면 세 개의 섬으로 형성된 아름다운 거문도(巨文島)를 만날 수 있다. 이 섬은 예부터 문장가들이 많다하여 ‘거문도(巨文島)’라 했다. 행정 구역상으로 거문도는 여수시 삼산면에 속해있다. 이 섬에는 ‘거문도’라는 지명의 유래를 입증해주는 사당 한 채가 자리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조선시대 거유(巨儒) 귤은 김유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후학들이 세워놓은 ‘귤은당(橘隱堂)’이다. ‘귤은당’의 주인인 김유는 1814년 동도(거문도는 원래 동도와 서도, 고도로 형성됨)의 유촌리에서 출생한 당대의 선비로, 조선조 6대 성리학자로 손꼽혔던 장성의 노사 기정진의 수제자이기도 하다. 이 섬은 당초 서양에서는 ‘하밀톤’으로, 중국에서는 ‘거마도(巨磨島)’ 등으로 불렸던 것을, ‘거문도(巨文島)’라고 지명 이름을 바꿔놓은 사람이 바로 김유이다. 김유가 타계한 1년 뒤인 1885년 영국 함대의 거문도 점거를 계기로 많은 내․외국인들의 섬 출입이 빈번해졌다. 이때 청나라 수군 제독 정여창이 김유의 제자들과 대화를 나누는 중에 그들의 필담에 감탄하여, 이 섬은 문장가가 많은 곳임으로 삼도(三島)를 클거(巨) 글월문(文) ‘거문도(巨文島)’로 명명해 줄 것을 조정에 건의함으로써 이때부터 거문도라 부르게 된 것이다.

오늘의 ‘거문도’를 있게 한 김유는 고려 말 경주김씨 김상촌(金桑村)의 후손으로 세조 때 난(亂)을 피해 이 섬으로 들어와 뿌리를 내렸다. 이 섬에는 김유와 관련된 옛 이야기들이 많이 전해오고 있다. 조선의 큰 선비를 낳게 했다는 서도(西島) 수월산(水越山) 밑에 높이 30m 가량의 붓 모양을 한 문필암(文筆岩), 등대 곁 80평 가량의 넓다른 신선바위, 그리고 김유의 죽음을 슬퍼하며 용이 승천했다는 서도 농냉이 바위에 6m 깊이로 파인 웅덩이 등이 그것들이다.

김유는 유년시절 기정진에게서 학문을 닦은 뒤 고향에 돌아와 선배인 만해(晩海) 김양록(1806~1885)과 함께 낙영재(樂英齋)를 지어 영재교육에 힘썼고, 완도 청산도에도 서당을 열어 거문도와 청산도에서 제자들을 수없이 길러냈다. 당시 김유 밑에서 공부를 하기위해 영·호남 지방에서 유생들이 이곳 거문도로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특히 김유는 해외 이방인들이 면접을 요청할 때 제자들로 하여금 해안에서 글방까지 좌우로 늘어서게 하고, 예를 갖추어 손님을 대하고 필담(筆談: 붓으로 글을 써서 대화를 나누는 일)으로 그들의 머리를 숙이게 했다. 따라서 해외 인사들도 선생의 예절과 학문의 해박함에 감탄하여 당초 지명이었던 ‘거마도’를 ‘거문도(巨文島)’로 바꿔 부를 정도였으니, 그의 인품이 얼마나 뛰어났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절해낙도(絶海落島)의 청빈한 선비가 해외 인사들과 학문을 겨루어 지명마저 바꿔 놓은 것은 김유선생의 놀라운 업적이 아닐 수 없다. 김유는 거문도뿐만 아니라 청산도와 여호도에도 글방을 열고 제자를 가르치는 등 평생 동안 선비다운 기품을 보여줬다. 김유는 숨을 거두는 마지막 날까지도 완도 청산재(靑山齋)에서 제자들에게 강론을 하다가 1884년 71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저서로는 귤은재유고(橘隱齋遺稿)가 있다.

김유가 타계하자 이곳 제자들은 낙영재에서 매년 9월 9일 제례를 지내다가 해방 후 고도에 새로 귤은당을 지어 그의 정신을 기려오고 있다. 낙영재는 1906년 사립 낙영학교로 개편되어 서도국민학교의 전신이 되었다. 귤은당의 유물로는 현감존문장(縣監存門狀)을 비롯하여 순영존문장(巡營存門狀), 영조기증선(英祖寄贈扇), 친필주선(親筆珠選), 해상기문(海上奇聞), 귤은제집(橘隱諸集) 등이 현재까지 보존되어 있다.

1854년 러시아 함대가 거문도를 무단으로 침범했을 때 통상 교섭을 원한다는 그들의 뜻을 단호히 거절하였다. 이 내용이 김유의 문집에 「해상기문」이라는 이름으로 전하고 있는데, 이 문서는 우리나라와 서양이 최초로 작성한 외교 문서라고 전해지고 있다.

기정진과 김유 문하에서 수학했던 거문도 유촌마을 출신의 귤당(橘堂) 박규석(朴圭錫) 경사(經史)와 문학(文學)에 뛰어났으며, 스승인 김유가 타계하자 선생의 유고를 모아 귤은재문집을 펴냈으며, 낙영재(樂英齋)를 이어받아 후학 양성에 힘썼다. 김유와 함께 러시아 함선에 올라 필담을 나눈 만회 김양록도 모두 여수시 삼산면 거문도 출신이다. 이 외에도 1937년에 발간된 조선환여승람에는 여수의 대표적 유학자 겸 유림들로 정상백을 포함한 59명이 실려 있다.

귤은재유고는 조선 후기 유학자인 김유의 시문집이다. 모두 4권 2책으로, 그가 죽은 후 17년 뒤인 1901년(광무 5)에 사촌 동생 김준(金濬) 등이 편집하여 간행한 것으로 보인다. 권두에 1901년에 스승 기정진의 손자인 기우만(奇宇萬)이 쓴 서문이 있다.

권1에는 시 130수가 들어있고, 권2에는 詩 230수, 권3에는 잡저 20편이 있다. 이들 중에 「노문집지서(蘆門執贄書)」는 스승인 기정진에게 처음으로 찾아가면서 가르쳐 주기를 구하는 글이고, 「문음양승강(門陰陽升降)」은 역학에 있어서의 음과 양이 승강(升降)하고 소장(消長)하는 이치를 설명한 글이다. 「일속산방설(一粟山房說)」이란 천태산(天台山)에 은일한 황자중(黃子中)이 정사를 짓고 일속(一粟)이라고 이름한 데 대하여 석씨(불교)의 설과 같다고 논란한 글이며, 「태극권설(太極圈說)」은

“태극도를 그리면서 원도(圓圖)로 표시하는데, 이 원도의 ‘원’이란 어떠한 것이냐”

하는 문제를 문답식으로 쓴 글이다. 「소도원설(小桃源說)」은 선경(仙境)이라 하는 도원(桃源)의 유무에 대하여 논한 후에

“다스리는 관원이 정치를 잘하여 온 백성이 안락하게 살게 되면 이것이 소도원이다”

라고 하고 있다. 그 다음에는 「부선설(鳧船說)」이란 20인 정도가 탈 수 있는 조그마한 목판복개(木板覆盖)의 반철갑(半鐵甲) 전선(戰船)을 만든 모형을 자신이 창안하여 도식(圖式)은 없이 그 설명만을 가한 것으로 과학적이요, 실용적인 배 만드는 조선의 모형설이다.

다음에 서(序) 8편, 기(記) 14편, 발(跋) 2편, 명(銘) 2편, 제문(祭文) 6편이 있다. 권4에는 1874년에 김유 자신이 쓴 가행록서(家行錄序)와 양세가행록(兩世家行錄)이 있고, 부록으로 만회김처사만시(晩悔金處士輓詩), 1879년에 쓴 동백기(冬柏記), 기정진이 쓴 사량가덕후(士亮家德後) 1편이 있다. 부록으로 1901년에 기우만(奇宇萬)이 쓴 행장(行狀), 이어서 사촌 동생 김준(金濬)이 쓴 발문이 있다.

김영행(金令行,1673-1755)


 

김영행(金令行,1673-1755)                                  PDF Download

 

1673(현종 14)∼1755(영조 31).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유(子裕), 호는 필운옹(弼雲翁)으로 아버지는 관찰사 김시걸(金時傑)이다. 아버지 김시걸은 자가 사흥(士興)이며, 사람됨이 효우(孝友)에 도탑고 선행을 즐기고 의리를 좋아하며 겉보기는 온화하고 평이한 듯하나 속은 실로 강직하며 더욱이 강상윤리의 대도를 지키는 것이 매우 확고하였다. 두 아들이 있었으니 김영행(金令行)과 김정행(金正行)이다. 김영행의 아들로는 생원(生員) 김이건(金履健)과 김이선(金履選)․김이원(金履遠)․김이억(金履億)이 있다.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의 문인이다.

조상의 은덕으로 벼슬을 얻어 현감이 되었다가, 1723년(경종 3) 소론 김일경(金一鏡) 등에 의해 노론 김창집(金昌集)의 일당이라 하여 파직되어 경상도 기장현(機張縣)에 유배되었다. 이것은 소현세자빈 민회빈 강씨 일족의 억울함을 상소하여 신원, 복권시킨 일을 말한다. 민회빈 강씨(愍懷嬪 姜氏)는 소현세자의 부인이다. 병자호란으로 남편 소현세자와 함께 도르곤에 의해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다가 귀환했다. 민회빈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상소를 처음 올린 김홍욱(金弘郁: 1602~1654)은 국문을 받던 중 장살되었는데, 이는 민회빈의 무죄가 알려지는 것을 인조(仁祖)가 부담스러워했기 때문이다. 인조는 자신의 반청(反淸)노선에 반기를 드는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였다. 결국 귀국한 지 두 달 뒤인 4월 23일 인조의 어의 이형익의 시침을 받고, 3일 후 소현세자는 34세의 나이로 의문의 죽음을 맞게 된다. 때문에 당대에도 신독재 김집, 송시열, 김홍욱, 송준길 등은 그녀가 억울하게 죽었다고 주장하였다. 그 뒤 여러 번 억울함을 신원하는 상소가 올려졌으나 거절되었고, 숙종 때 송시열이 다시 그녀의 억울함을 주장하여 신원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 뒤 숙종 때 송시열, 김수항 등의 신원 상소로 복관되었다.

그 뒤 1725년 영조가 즉위하자 풀려나 우사어(右司禦)로 다시 기용되고, 이어서 임천군수(林川郡守)를 거쳐 첨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시문을 모은 ⌈필운시문고(弼雲時文稿)⌋가 전한다.

필운시문고는 조선 후기의 문인 김영행의 시문집이다. 모두 9책이고 필사본으로 1747년(영조 23) 아들 김이건(金履健)이 편집하여 간행하였다. 이 책의 권두에는 김이건의 발문이 있다. 그에 따르면, 김영행은 김창흡(金昌翕)에게 시를 배워 당시(唐詩)에 가깝다는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어릴 때에 시는 두보(杜甫)의 것이 아니면 조잡한 것으로 여기고, 문장은 유종원(柳宗遠)의 것이 아니면 비루하게 여겨 이를 본떴다. 뒤에 이것이 옛사람의 껍데기를 흉내낸 것임을 깨닫고 모두 불태워버렸다고 한다.

필운시문고 제1∼4책은 「필운시고」로 시 623수와 부록으로 송창유고(松牕遺稿)가 실려 있다. 제5∼9책은 「필운문고」로 제문 29편, 문(文) 3편, 가장(家狀) 2편, 변방(辨謗)·유사·책문(策問) 각 1편, 청정장암발구장심경(請鄭丈巖跋舊藏心經), 서연일기(書筵日記), 잡저 3편, 장(狀) 16편, 서(書) 19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필운시문고의 시는 19세 때인 1691년(숙종 17)의 작품부터 실려 있다. 평생의 지우 윤백욱(尹伯勗)․이병연(李秉淵)과 숙부나 아들과 조카들에게 준 시가 많다. 시의 내용도 원로에서의 가족이나 친지 걱정이 주류를 이룬다. 가정사를 다룬 작품도 고풍(古風)에 가깝게 되어 사우(士友)에게 널리 읊조려진 경구(警句)가 많았다는 아들 이건의 지적대로, 시가 쉬우면서도 고풍을 풍긴다. 또한 노론 김창협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기 때문에 김창협의 당으로 지목되어 당쟁의 화가 잦았다. 윤백욱과 이병연 등의 산수벽(山水癖: 자연을 좋아하는 습관)에 경도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필운시문고의 「송창유고」는 요절한 사촌 동생 김이정(金履禎)을 대신하여 김이건이 숙부의 시 37수를 모은 것이다. 제문은 대부분 가족과 친척들에 대한 것이다. 필운시문고의 문에는 1697년 도봉서원의 벽에 서원의 유래와 의의를 적은 「서도봉원벽(書道峰院壁)」, 1701년 병을 앓으면서 엄부(嚴府)의 행적을 회상한 「병중지애(病中志哀)」, 오랜 친구에게 보낸 편지글 「서증채문규선면(書贈蔡文揆扇面)」 등이 있다. 「변방」은 1713년 아버지의 막내아우인 김시보(金時保)의 비방을 변명한 것이고, 유사도 1742년 김시보의 언행을 기술한 글이다. 필운시문고의 책문은 1699년 증광시에 응시하였을 때에 지은 글이다. 관제(官制)․병제(兵制)․전제(田制) 등에 대하여 논하였다.

「청정장암발구장심경」은 1716년 유승선(柳承宣)과 자신의 집에 나누어져 보관되어 오던 심경(心經)을 합치고 발을 구한 내용이다. 「서연일기」는 과거에 오르지는 못하였으나 뛰어난 문사와 식견으로 경연(經筵)에 입시하는 벼슬에 추천되었을 때인 1717년 9월부터 10월 사이의 일을 적은 것이다.

⌈필운시문고」의 잡저에는 주위의 비방이 심하여지자 밭을 갈고 샘을 파 세상사에 뜻을 끊고자 하여 지은 의추재의 경과를 적은 「조휘곡의추재서사(朝暉谷依楸齋書事)」과 꿈에 들은 아버지의 훈계를 적은 「기몽(記夢)」, 5대조 김상헌(金尙憲)의 규식을 변통하여 혼란해진 묘제를 시정하고자 정조(正朝)․단오․한식․추석의 묘제(墓祭)에 관련된 규식을 정한 「묘제식례(墓祭式例)」 등이 있다.

「필운시문고」의 장에는 자신에게 욕한 유생의 처리문제, 흉년이 들어 진휼방법을 보고한 것, 소의 도살을 금하였는데 이를 위반한 일을 변명한 것, 수어청(守禦廳) 토지를 도지 주고 그 세금징수에 관한 문제, 사사로이 군정(軍丁)과 전선(戰船)을 쓴 데 대한 변명 등의 내용으로 되어 있다. 지방 관리의 여러 정사를 살필 수 있다. 서(書)는 대개 가족과 신상의 문제, 선대의 제사나 묘지에 대한 글들이다.

참고할만한 문헌으로는 「경종실록(景宗實錄)」, 「영조실록(英祖實錄)」, 「한국계항보(韓國系行譜)」(조용승, 1980) 등이 있다.

김시민(金時敏,1681-1747)


 

김시민(金時敏,1681-1747)                                  PDF Download

 

1681(숙종 7)∼1747(영조 23).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학자이다.

관은 안동(安東). 자는 사수(士修), 호는 동포(東圃) 또는 초창(焦窓)이다. 경기도 양주에서 살았다. 아버지는 호조정랑을 지낸 김성후(金盛後)이며, 어머니는 임천 조씨(林川趙氏)로 관찰사 조원기(趙遠期)의 딸이다.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과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의 문인이다.

김시민은 어려서부터 지극한 효심으로 부모를 공경하고 조심하며 아무리 작고 하찮은 일이라도 자존(自尊)하지 않았다. 14~5세 무렵에 집안 어른인 김창협의 문하에 들어가서 ⌈대학⌋과 「서명(西銘)」․「태극도(太極圖)」 등의 글을 배웠는데 듣는 대로 이해하여 김창협으로부터 타고난 자질이 도에 가깝다는 평을 들었다.

오랜 병을 앓던 부친의 증세가 심해지자 직접 약을 달이고 상분(嘗糞: 사람의 대변의 맛을 보아 그 건강한 정도를 살펴보는 의학적 행위를 말한다)의 정성을 다하였다. 부친이 돌아가시고 3년의 시묘 살이 동안 잠시도 띠를 풀지 않아서 한여름에는 흐른 땀으로 최질(상중에 입는 삼베옷)을 두른 곳의 피부가 모두 문드러질 정도였다. 또 모친인 조부인이 70세의 나이로 쇠약해져 병이 들자 다른 곳에서 자다가도 곧장 일어나 옷을 갖추어 입고 문안하였다. 그의 행동에 대해 사람들이 의아해하자, 조부인이

“이 일은 정성과 효심이 감응해서 그러한듯하다. 내가 밤사이 기침을 하다가 기도가 한참 막혔는데 이제 괜찮다”

라고 한 일화가 있다. 새벽마다 사당에 참배하고 물러날 때마다 눈물을 흘리며

“선조의 영령이 양양(洋洋)하실터인데 이곳에 계시지 않음은 내가 하는 일이 마땅하지 않아서인가? 아버님께서 살아계신다면 어찌하실까?

내가 체득한 것은 털끝 하나라도 버려두지 않으리라”라고 하며 실천적인 삶을 영위할 것을 다짐하였다.

김창협 등의 영향으로 출사보다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뜻을 둔 김시민은 52세인 1732년에 음보로 선공감역(繕工監役)을 맡아 태묘(太廟)를 수리한 공으로 사옹원주부․장예원사평․사직종묘령을 역임하였다. 이때의 공으로 현감직에 제수된 그는 외롭거나 의지할 데 없는 이들을 먼저 규휼하는 유화(儒化)를 실천하는 목민관을 자임하였다. 1735년 낭천현감 재임 당시에 큰 흉년을 규휼하는 공을 세워 벼슬을 올리는 승서(陞敍)하라는 명이 있었음에도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이 때문에 그가 고을을 떠날 때는 그곳의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거사비(去思碑)를 세워 공적을 기념하였다. 진산군수(珍山郡守)로 부임했을 때는 학궁(學宮)을 짓고 고을의 재정을 개선하고 선비를 양성하였는데, 그가 임지를 떠난 후에도 진산의 유림들이 공을 제사하여 받들었다.

김시민의 교우 관계의 주요 인물들은 이종사촌인 신정하(申靖夏) 형제를 비롯하여 대체로 김창협과 김창흡의 문하생들인 이하곤(李夏坤) 등 당대의 시명(詩名)을 떨치던 인물이 주축이다. 그보다 10살이 많기는 하지만 서로를 깊이 알고 온 집안이 교유하며 천고에 큰 마음을 나누던 이병연(李秉淵)과의 만남은 그의 시 세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또 홍중성(洪重聖)을 비롯하여 시인 홍세태(洪世泰)와 정래교(鄭來橋)등과도 교분이 깊었다.

김시민이 김창협과 김창흡에게 수학하였기에 학문과 문예 창작의 방면에서 그들의 영향력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김시민이 활동하던 17세기 후반과 18세기 전반을 지배하던 철학적 화두는 인물성동이(人物性同異) 논쟁이었다. 이에 대해 김창흡은 천하의 사람과 만물이 품부 받은 본성에는 차이가 없다는 ‘인물성동론’을 주창하였다. 김시민도 이 논의에 동조하여 인성과 물성의 같은지 다른지를 두고 벌어진 어유봉(魚有鳳)과 이현익(李顯益)의 논쟁에 가담하여 ‘인물성동론’을 주장하였다. 사람과 사물의 본성이 동일하다는 김시민의 철학 논리는 고(古)․금(今)의 가치를 우열의 논리로 이해하는 당시의 문예이론에 대한 반성으로 나타났다. 이에 개별 사물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우열을 가늠하는 결정론적인 태도를 보이기보다는 객관적이고 사실적으로 사물의 본질을 관찰하고 분석하고자 하는 경향을 보였다. 한 예로, 그들이 정선(鄭敾)이 그린 진경산수(眞景山水)를 높이 평가한 것도 우리 산수를 중국 산수인 양 왜곡하거나 비사실적으로 그리지 않고 높은 수준의 예술적 성취를 이룩했기 때문이었다.

사실이 왜곡되는 번잡한 세속의 삶은 서호(西湖: 중국의 항주)로의 도피를 시도하게 할 만큼 힘들었기에 그는 불교사상에 대한 탐닉과 죽림칠현(竹林七賢)과 도연명(陶淵明) 식의 고아하고 청렴한 은둔적 삶에 빠져들기도 하였다.

부조리한 현실을 비판하고 사물의 본질을 동일시하는 학문 태도는, 당대 지식층의 무조건적인 옛 것을 좋아하는 취향에 반발하며 우리 시대 우리 사람의 문예작품의 가치를 진실한 것, 훌륭한 것으로 평가하게 하였다. 김시민은 평소에 앓던 천식이 악화되어 1747년 3월 20일에 사망하였다. 사후에 이루어진 문집 간행은 그의 벗이자 평생의 지기였던 이병연이 유고를 정리하고 후사인 김면행(金勉行)이 조명리(趙明履)와 한원진(韓元震) 등에게 행장과 묘도문을 부탁하며 이루어졌다. 유고의 간행을 도맡은 이병연(李秉淵)은 시에 대한 뛰어난 조예로 온갖 시체에 능하며 김창협이나 김창흡 등을 비롯한 당대의 거유들에게 전송될 정도이던 김시민의 작품의 삼분의 이를 산삭하는 준엄한 편찬 태도를 고수하여 문집의 완성도를 높였다.

이처럼 그는 경사(經史)에 밝았고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특히 고체시(古體詩)는 독자적 경지에 도달하였다. 뒤에 김상훈(金相勛)․홍중주(洪重疇) 등 130여명이 그의 덕망과 효행을 나라에 주청하여 이조참의를 추증받았다.

저서로는 동포집이 있다. 이 책은 모두 8권 4책으로 목판본이다. 1761년(영조 37) 아들 김만행(金晩行)에 의하여 편집하여 간행되었다. 현재 규장각 도서 등에 소장되어 있다.

권두에 윤봉조(尹鳳朝)와 한계진(韓啓震)의 서문 2편이 있고, 권말에 1757년 신경(申暻)이 쓴 발문과 1761년에 김원행(金元行)이 쓴 발문 2편이 있다. 권1∼6에는 시 899수, 권7에는 서(書) 18편, 잡저 17편, 권8에는 제문 11편, 가승(家乘) 7편이 있다. 부록으로 한원진(韓元震)이 쓴 행장, 이병연이 쓴 묘지명, 조명리(趙明履)가 쓴 묘갈명, 김재노(金在魯)가 쓴 묘표, 이병연과 홍중주(洪重疇) 등이 쓴 20편의 만사(挽詞)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중에 정시(程詩) 11수는 모두 다 역사적인 고사를 가지고 읊은 시들이다. 그의 시는 뛰어난 경지를 이루었으며, 이병연과 함께 당대에 시명을 떨쳤다. 권7의 서(書)에는 시사(時事)․문후(問候)․예제(禮制) 등에 관한 내용이 많다.

이어서 잡저 17편이 있는데, 대부분 서문이나 발문이다. 잡저의 「제왕문성공집후(題王文成公集後)」는 왕수인(王守仁)이 경학에 있어서는 송나라 제현(諸賢)들 이후에 제일인자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주자설을 절대적으로 신봉하던 당시 유학계의 사정으로 보아 혁신적인 것이며, 양명학에 관하여 새로운 연구를 개척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참고할만한 문헌으로는 ⌈동국집(東國集)⌋, ⌈영조실록(英祖實錄)⌋ 등이 있다.

김승학(金承學,1881-1965)


 

김승학(金承學,1881-1965)                                  PDF Download

 

1881(고종 18)∼1965. 독립운동가이다.

관 배천(白川). 자는 우경(愚敬). 호는 희산(希山). 일명 김탁(金鐸)이라고도 불렀다. 평안북도 의주(義州) 출생이다. 고향에서 한학을 수학하다가 24세에 상경해 한성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탐구하였다. 졸업 후 2년간 교육계에 종사하였다.

1907년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이 체결되자 서울 종로에서 며칠 동안 반대연설을 하다가 체포되어, 평리원(平理院) 구치감에서 3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정미7조약은 1907(융희 1)년 7월 24일 대한제국과 일본 제국 사이에 체결된 불평등 조약이다. 조약이 체결된 해가 정미년이었기에 ‘정미7조약’이라고 부르며, 제1차 한일협약과 제2차 한일협약(을사조약) 등과 구분하기 위해 제3차 한일협약이라고도 한다. 1907년 고종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여 을사늑약이 대한제국 황제의 뜻에 반하며 일본제국의 강압으로 이루어진 불평등조약임을 알리려 하였다. 헤이그 특사사건을 빌미로 일본 정부는 이토 히로부미를 대한제국 경성에 파견, 한국 측이 을사보호조약을 위반했다고 하여 고종에게 압력을 넣어 퇴위시키고 1907년 7월 20일 덕수궁 중화전에서 고종의 양위식을 강행하였다. 이 사건을 빌미로 일본은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7월 20일 양위식을 강행하였다. 그리고 이어 순종이 즉위하고 4일 후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이 체결되었다.

김승학은 1910년 이후 만주로 건너가, 봉천강무당(奉天講武堂)에서 군사교육을 받은 뒤에는 의병투쟁에 가담하였다. 1919년 각계각층의 대표 560여 명이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 모여 대한독립단을 조직할 때 참여하여 독립단총재부에서 활동하였다.

동시에 대한민국임시정부 평북독판부(平北督辦府) 국내특파원으로 선발되어 백의범(白義範)․백기준(白基俊)과 함께 국내에 잠입하여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에 연통제(聯通制)를 조직하고 88개소에 달하는 독립단 지단(支團)을 설치, 운영하였다. 민국독립단(民國獨立團)의 재무부장의 일을 맡아 무장 준비에 만전을 기하였다. 이처럼 많은 군자금을 모금하고 수백 명의 애국청년을 독립군에 가입시키는 등 여러 활동을 하였다.

1921년 상해(上海)로 가서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사의 사장이 되어 민족정기를 앙양하며 독립사상을 고취하였고, 그해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세계혁명단체대표자대회에 참석하였다. 1922년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 선전부장에 취임하여 양국간의 친선을 도모하였고, 임시의정원의 평안도 대표의원의 일을 맡아보았다. 1924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학무부차장이 되어 학무부총장의 직무까지 겸임하였다. 1926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명의로 참의부참의장(參議府參議長)이 되어 참의부의 재건운동에 힘썼다. 1928년 중국 몽강현(濛江縣)에 무관학교를 설치하고 군인 2백명을 육성했으며, 참의부의 기관지인 정로(正路)도 간행하였다. 정로는 1945년 11월 1일 창간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기관지이다.

그리고 길림(吉林)에서 정의부(正義府)․신민부(新民府)․참의부(參議府)의 삼부통일대표회의에 참의부대표로 참석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표인 홍진(洪震) 등과 협의 끝에 한국독립당과 군민의회(軍民議會)를 조직하였다. 이 회의에서 그는 군민의회의 민사위원과 한국독립당의 최고간부직을 겸하게 되었다. 이 회의를 마치고 돌아오는 도중에 중일군경합동대(中日軍警合同隊)에게 붙잡혀 신의주와 평양 등의 감옥에서 5년 3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다시 중국에 건너가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광복 후에 귀국해 한때 당정(黨政)에 관여하기도 하였다. 광복 후 귀국하여 독립신문사 사장․대한독립촉성회(大韓獨立促成會) 부위원장․한국독립당 감찰위원장․한국독립운동사 편찬위원장․건국공로자 심사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한편 1920년부터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여 참교(參敎)․지교(知敎)․상교(尙敎)․정교(正敎)를 지냈고 대형(大兄)의 호를 받았다.

이처럼 김승학은 여러 계열로 흩어져 있던 독립운동 단체를 하나로 모으기 위해 애썼다. 독립신문 주필이었던 이광수가 친일로 변절하면서 독립신문도 휘청거릴 때 이를 맡아 정상화하였으며, 김구선생의 권유로 ⌈독립운동사⌋를 집필하면서 당시 항일에서 친일로 변절한 이들의 행적을 소상히 기록하여 우리의 독립운동 역사를 바로잡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하였다.

그의 묘는 지금의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에 있으며 봉분 높이는 1.2m이고 둘레는 10m이다. 선생은 돌아가기 전에 유언을 통해 이승만을 비롯한 친일파들이 묻혀있는 국립묘지의 안장을 거부하였다. 그래서 당시 국가보훈처에서 서삼릉 지역의 땅을 제공하여 그곳에 묻히게 된 것이다.

저서로는 한국독립사(韓國獨立史) 등이 있다.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

또한 김승학은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을 역임한 백암(白巖) 박은식(朴殷植)이 ⌈한국통사⌋와 ⌈한국독립지혈사⌋를 쓸 당시 자료를 수집해 저술을 돕기도 했다. 증손자 김병기는

“당시 박은식과 증조부는 나라 잃은 역사, 피 흘린 투쟁의 역사를 쓰면서 나중에 나라를 찾으면 한국독립사를 쓰자고 약속했다”며 “일제의 추궁을 피해 깊숙이 숨겼던 자료는 백범 김구에게 전해졌다가 다시 증조부에게 전달됐다”

고 말했다. 해당 자료는 1965년 김승학이 쓴 한국 최초의 독립운동사인 ⌈한국독립사⌋의 기본 자료가 되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이배용 원장은 “김승학선생은 일제의 고문에도 자료가 어디 있는지 실토하지 않고 잘 보존하였다”라고 하면서 “이번 기탁은 그 정신을 후손에게 길이 알리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감사의 말을 전했다. 이배용은 “특히 삼의사 국민장 행사요령 등은 지금껏 잘 알려지지 않은 귀한 자료이다”라고 하면서 “독립운동사의 지평을 넓히고 후손들이 역사를 기억할 수 있도록 하는 나침반 역할을 할 것이다”고 강조하였다.

또한 1964년 발간한 ⌈한국독립사⌋의 서문에서 이승만이 친일파를 다시 중용하는 일에 대해서

“건국 이래 이 국가 백년대계(독립유공자 표창과 친일파 청산)의 원칙을 소홀히 한 것은 고사하고, 도리어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독립운동자를 박해하던 민족의 반역자를 중용하는 잘못을 범했다”라고 하면서, 이것이 전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시정 중 가장 큰 과오이니 후일 지하에 돌아가 수많은 선배와 동지들을 어떻게 대할까 보냐”

라고 토로하였다. 그는

“이 중대한 실정으로 말미암아 이승만은 집정 10년 동안 많은 항일투사의 울분과 애국지사의 비난의 적(敵)이 되었다”

고 평가했다. 친일 세력이 해방 후에도 사회의 주도세력이 되면서 역사학계도 조선 후기 노론과 일제 식민사학을 계승한 학자들이 주도해 현재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참고할만한 문헌으로는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大韓民國獨立有功人物錄)⌋(국가보훈처, 1997), ⌈3·1독립운동(獨立運動)과 임시정부(臨時政府)의 법통성(法統性)⌋(이현희, 동방도서, 1987), ⌈대한민국임시정부사(大韓民國臨時政府史)⌋(이현희, 집문당, 1982),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1985) 등이 있다.

김수근(金洙根,1798-1854)


김수근(金洙根,1798-1854)                                  PDF Download

 

1798(정조 22)∼1854(철종 5).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관은 안동(安東). 자는 회부(會夫), 호는 계산초로(溪山樵老)이다. 김원행(金元行)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김이직(金履直)이고, 아버지는 목사 김인순(金麟淳)이며, 어머니는 신식(申○)의 딸이다.

김수근에 앞서 증조할아버지 김원행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하면 다음과 같다. 김원행의 자는 백춘(伯春), 호는 미호(渼湖)로, 당숙인 김숭겸(金崇謙)에게 입양되어 종조부 김창협(金昌協: 1651~1708)의 손자가 되었다. 이재(李縡)의 문인이다. 당시의 학문은 송시열(宋時烈)을 종장(宗匠)으로 받드는 성리학이 주조를 이루고 있었으며, 그 학파 내에서도 낙론(洛論)과 호론(湖論)의 대립이 있었다. 대립의 발단은 김창협과 권상하(權尙夏)의 학설에서 시작되었다. 권상하의 제자인 이간(李柬)은 김창협의 학설을 이어 이재와 함께 낙론의 중심이 되고, 권상하의 제자 한원진(韓元震)은 권상하의 학설을 이어 호론의 중심이 되었다. 김창협의 손자이자 이재의 문인인 김원행은 자연히 낙론을 지지하는 대표적인 학자로 활동하였다. 그의 사상은 대체로 김창협의 학설을 답습하여 주리(主理)와 주기(主氣)의 절충적인 입장에 서 있었다. 그는 심(心)을 리(理)라고도 하지 않고 기(氣)라고도 하지 않으며, 리와 기의 중간에 처하여 이기(理氣)를 겸하는 의미를 지닌 것으로 여겼다. 이것은 바로 이황의 주리설과 이이의 주기설을 절충한 김창협의 학설을 계승한 것이다. 그의 학통을 이은 제자로는 아들 김이안(金履安)과 박윤원(朴胤源)․오윤상(吳允常)․홍대용(洪大容)․황윤석(黃胤錫) 등이 있다.

김수근은 1828년(순조 28)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음사(蔭仕)로 동몽교관(童蒙敎官)이 되었으며, 1833년 시제에서 수석하여 전시에 곧바로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얻어 이듬해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835년(헌종 1) 규장각대교(奎章閣待敎)가 된 뒤 1837년 대사성, 1840년 이조참의, 1845년 우윤(右尹), 1847년 충청도관찰사, 1850년(철종 1) 이조참판․공조판서, 1851년 우참찬․대사헌, 다음해에 이조판서와 홍문관대제학․선혜청당상, 1853년 병조판서, 1854년 형조판서․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하였다. 당대 세도가의 출신으로서, 동생 김문근(金汶根)은 철종의 장인으로 영은부원군(永恩府院君)에 봉하여졌고, 두 아들 김병학(金炳學)과 김병국(金炳國)도 모두 정승에 올랐다. 철종 묘정(廟庭)에 배향되고 거제의 반곡서원(盤谷書院)에 배향되었다. 편저로는 삼연선생연보(三淵先生年譜)가 있다. 시호는 정문(正文)이다.

⌈삼연선생연보⌋는 김창흡(金昌翕)의 연보로서‚ 김수근이 1854년(철종 5)에 간행한 것이다. 1책(91장)으로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김창흡은 본관이 안동, 자가 자익(子益)‚ 호가 삼연(三淵)으로 김상헌(金尙憲)의 증손이며 김수항(金壽恒)의 아들이다. 1673년에 진사가 되었으나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아버지가 죽음을 당하자 영평(永平)에 은거하여 그 후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둘째 형인 김창협(金昌協)과 함께 이단상(李端相)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하고 숙종 연간의 호락논쟁(湖洛論爭)에서는 형인 김창협과 달리 낙론에 속하였으나 그 사상적 경향은 역시 이황과 이이를 절충하는 태도를 보였다. 익호는 문강(文康)이다.

이 책은 원래 김창흡의 4대손인 김매순(金邁淳)이 연보를 엮고 행장과 묘지를 붙였던 것에 김창흡의 방계 5대손인 김수근이 1854년 그의 선조의 문집을 간행하면서 약간의 내용을 보충하여 같이 간행한 것이다. 김창흡의 연보에 더하여 김양행(金亮行)이 지은 행장‚ 김매순이 지은 묘지로 이루어졌으며 김수근이 붙인 발문이 있다. 연보에서는 김창흡의 생애와 함께 그가 저술한 서(書)․제문(祭文)․상소문(上疏文) 등도 다수 수록하였다. 사후의 사실까지도 특히 자세히 정리하여 본서가 편찬되기 직전인 1853년에 유생들이 그를 석실서원(石室書院)에 배향하기를 청한 것까지 기록하였다. 연보의 마지막 부분과 묘지의 가족관계 기록 중 일부는 본서 간행시에 보충하였던 것이다. 김창흡의 생애는 물론 당시의 정치적 학문적 상황을 이해하는데 참고가 될 자료이다.

참고할만한 문헌으로는 ⌈순조실록(純祖實錄)⌋, ⌈헌종실록(憲宗實錄)⌋, ⌈철종실록(哲宗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청선고(淸選考)⌋, ⌈조선도서해제(朝鮮圖書解題)⌋ 등이 있다.

김성원(金聲遠,생년 미상-1592)


김성원(金聲遠,생년 미상-1592)                        PDF Download

 

생년 미상(?)∼1592(선조 25). 조선 중기의 학자이다.

관은 경주(慶州). 자는 경구(景久), 호는 송산(松山)으로 증조부는 형조판서 김정(金淨)이다. 세상 사람들이 그를 충암(沖菴) 선생이라고 불렀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유학자이며 의병장인 중봉(重峯) 조헌(趙憲)의 문인이다.

어려서부터 독실한 행실이 있었고, 크고 작은 일에 관계없이 반드시 조헌에게 물어 그의 남다른 사랑을 받았다. 스승은 그를 특별히 사랑하여 “너는 성품이 지극할 뿐만 아니라 조명현의 후손이니 더욱 힘쓰라.”라고 하였으므로 김성원이 마음을 다하여 그를 따랐다. 스승인 조헌은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조헌이 의병을 일으키자 그를 따라 금산전투에 참가하였다. 이때 늙은 부모가 살아 있었으므로 가족이 전투에 참여하지 말 것을 말렸으나 김성원이 듣지 않았다. 그리고 이어서 말하기를, “백성은 아버지와 스승과 임금에게서 생육(生育)되었으므로 한결같이 섬기고 죽어야 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인데, 더구나 임금이 난리를 피하여 피난을 갔으니 어찌 사사로움을 돌아볼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금산군의 서쪽 경계에서 적과 하루 종일 싸워 적이 거의 패배할 단계에까지 이르렀으나 아군의 후원세력이 없어 조헌과 함께 전사하였다.

당시 금산(錦山)의 왜군이 충청도 일대로 세력을 넓힐 기세라는 소식을 듣고, 곧장 금산으로 가서 왜군에게 함락된 금산의 10리 밖에 이르렀다. 당초 호남 순찰사 권율(權慄)과 합세하여 적을 협공할 계획이었으나, 권율로부터 그 기일을 미루자는 편지를 받았다. 그러나 왜군은 이미 조헌이 거느린 의병의 약점을 알고 역습해 왔다. 그의 군사는 역전 분투하여 왜군에게 많은 손해를 주었으나 많은 수를 대적하지 못하여 조헌과 7백의사가 전멸했다. 그러나 이를 통해 호남 방어의 근거지였던 금산을 회복하게 된다.

처음에 김성원이 집을 떠날 때 집안사람들이 울며 말하기를,

“혹 불행한 일이 있게 되거든 의대(衣帶)에 표시하여 가족들이 알게 하십시오.”

라고 하니 김성원이 화를 내며 말하기를,

“평생 동안 배우고 익힌 것이 충(忠)과 의(義)뿐이므로, 장부가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면 모래밭에 주검을 버려야 할 뿐이거늘 어찌 거두어 묻는 일에 마음을 두겠는가?”

라고 하였다. 김성원이 죽을 때에 나이가 스물 여덟이었는데, 그의 주검을 찾지 못하여 의총(義塚), 즉 의국열사의 시신을 수습하여 하나의 무덤에 함께 묻었다. 그 앞에 윤근수(尹根壽)가 쓴 큰 비석이 있는데, 김성원의 이름을 특별히 드러내었다.

그가 데려갔던 종 몽해(夢亥)가 죽은 시체들 속에 몸을 감추어서 살아남았는데,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주인이 군전(軍前)에 나아가니 조야(趙爺)가 일찍이 그 곁에 두고서 크고 작은 일을 자문하였다. 일이 급하게 되자 장하(帳下)의 선비 중에 조야를 만류하여 도피하기를 청한 자가 있었으나 조야가 우리 주인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우리들에게는 오늘 죽음이 있을 뿐이니 의리에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적이 과연 장하에 난입하므로 우리 주인이 몸으로 조야를 막아 가리고서 활을 당겨 적 여섯을 쏘아 죽이니 적이 감히 전진하지 못하였다. 다시 활을 쏘려 하자 활시위가 끊어지고 활이 부러졌으나 오히려 발을 돌리지 않으니, 적이 드디어 우리 주인을 베고 조야까지 베었다.”

라고 하였다.

예전에 중국의 주희는 난공자(欒共子)의

“백성은 아버지와 스승, 임금에게서 생육되었으므로 한결같이 섬겨야 한다”

라고 한 말을 ⌈소학⌋의 글에 실었다. 난공자는 춘추시대 진(晉)나라 난성(欒成)의 시호이다. 난성이 애후(哀侯)를 보좌하였는데, 무공(戊公)이 도성을 공격하여 애후를 죽이고 난성을 불러 상경(上卿)을 삼으려 하자,

“생육시켜 준 은혜에 보답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은 사람의 도리이다”

라고 사양하여 응하지 않고 싸우다가 죽었다. 그러나 예로부터 지금까지 두 가지 도리를 다하기를 바랄 수 없으므로 스승을 좇는 도리는 쓸데없다 하여 드디어 폐기하게 되었으니, 그 이치가 또한 절로 그러하다. 김성원으로 말하면 스승을 섬기는 도리에 부족한 것이 없었으니, 그 임금과 아버지에 대한 것을 알 수 있다. 아! 아름답다.

참고할만한 문헌으로는 ⌈선조실록(宣祖實錄)⌋,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등이 있다.

김상현(金尙鉉,1811-1890)


상현(金尙鉉,1811-1890)                                  PDF Download

 

1811(순조 11)∼1890(고종 27). 조선 말기의 문신이다.

관은 광산(光山). 자는 위사(渭師), 호는 경대(經臺) 또는 노헌(魯軒)이다.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9대손이며, 김상악(金相岳)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김기진(金箕晉)이고, 아버지는 김재곤(金在崑)이며, 어머니 풍양 조씨(豊壤趙氏)는 유경주(兪擎柱)의 딸이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연천(淵泉) 홍석주(洪奭周), 대산(臺山) 김매순(金邁淳)의 문인이다.

특히 김매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스승인 김매순은 본관이 안동(安東). 자는 덕수(德叟), 호는 대산(臺山)으로 1795년(정조 19)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사인을 거쳐 초계문신(抄啓文臣)이 되었고, 그 뒤 예조참판을 거쳐 1821년(순조 21) 강화부유수를 역임하였다. 그는 당대의 문장가로 홍석주(洪奭周) 등과 함께 명성이 높았으며, 여한십대가(麗韓十大家)의 한 사람으로 꼽혔다. 또한 성리설에 관하여 일가견을 가지고 있어서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을 둘러싼 호락논쟁(湖洛論爭)에 이간(李柬)과 낙론(洛論)을 지지하였다.

김상현은 약관 때부터 영민하고 준수하여 글을 잘한다는 소문이 파다하였다. 어렸을 때 광주(廣州)에 살면서 정약용에게 배움을 받았다. 그가 조금 자라자, 정약용은 그를 보내면서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노론의 명가(名家)인데, 왜 나를 스승으로 삼으려고 하는가? 그러면 자네 친구들에게 조롱을 받게 될 것일세. 북촌(北村)에 김매순이 있으니, 그분이 정말 자네 스승일세. 자네는 그분을 스승으로 섬기게”라고 하였으므로 이에 김매순의 제자가 되었다고 한다.

1827년(순조 28) 17세의 나이로 증광 생원시에 3등 2인으로 합격하여 인릉참봉, 사재감 봉사, 군자감 봉사, 직장, 주부, 청양현감, 증산현감을 지냈으며 가는 곳마다 유학의 도를 숭상하고 학문을 진흥시켰다. 영평군수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1859년(철종 11) 별시 문과에 갑과(甲科) 3인으로 장원급제하여 통정에 승진, 공조참의, 동부승지, 좌부승지, 병조참의, 대사간을 지냈다. 1864년(고종 2) 안동부사와 좌부승지, 이조참의를 거쳐 1866년(고종 4) 가선에 승진, 한성좌윤, 형조참판, 도총부부총관, 동지경연, 의금부, 돈녕부, 춘추관, 성균관사, 개사성, 이조참판, 홍문관제학, 도승지, 제용감 제조 등 주요 직책을 역임하였다. 그 후 경기, 평안감사, 양관대제학, 도승지, 제용감 제조를 역임했다.

1882년 시강원우부빈객(侍講院右副賓客)과 우참찬․좌참찬․판돈녕부사 등을 지냈으며, 1885년 고종에게 세 차례나 치사하기를 청하여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그 뒤 제술관 등을 지내고, 1887년에는 소과의 시관(試官)을 맡아보았다. 문장에 능하여 왕실에서 필요한 전문(箋文)․죽책문(竹冊文: 대나무 간책에 새기는 옥책문)․옥책문(玉冊文: 제왕·후비 등의 호를 올릴 때 쓰는 德을 읊은 글)․행장․악장문(樂章文) 등을 저술하였다. 문집으로는 경대집(經臺集)과 번유합고(樊悠合稿)가 있다. 1891년(고종 28) 문헌(文獻)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번유합고는 조선 후기의 학자인 김재화(金在華)와 김재곤(金在崑) 형제의 시집이다. 모두 2권 1책으로 활자본이다. 현재 규장각 도서와 장서각 도서 등에 소장되어 있다. 김재곤은 김상현의 아버지이다. 아버지의 시집에는 아들 김상현의 시에 차운한 것이 많으므로 함께 기술하였다. 아버지는 세상일에 뜻을 두지 않고 강산을 두루 유람하면서 시문에 심취하였다. 어려서부터 문장에 능했으며 고결한 성품으로 사림의 존경을 받았다. 기호지방에 거주한 듯하며, 정약용의 아들 정학연(丁學淵) 등을 비롯해 그 지방의 명사들과 어울렸다.

이것은 1879년(고종 16)에 김재곤의 아들 김상현이 편집하여 간행하였다. 권말에 김상현의 발문이 있다. 김상현의 발문에 따르면, 김재화는 이의산(李義山)의 시의 기교가 뛰어난 점을 좋아했고, 김재곤의 시는 왕완정(王院亭)의 신운(神韻)을 주로 하였다고 한다.

권1은 김재화의 시집인 「번천시략(樊泉詩略)」으로 시 145수, 권2는 김재곤의 시집인 「유유옹시략(悠悠翁詩略)」으로 시 157수가 수록되어 있다. 「번천시략」에는 1802년(순조 2)부터 1832년 사이에 지은 시들이 수록되어 있다. 자연을 읊은 것, 속리산․금강산․화양서원(華陽書院) 등 명승지를 유람하면서 지은 것 등이 있다. 또한 김재곤․이가운(李家運)․이탁중(李度中)․신명하(申命河)․이종인(李鍾仁)․이교영(李敎永) 등을 상대로 하여 지은 것 등이 있다. 이 가운데에는 김재곤과 김상현의 시에 차운(次韻)한 것이 여러 편이 있다.

「유유옹시략」에는 용문사(龍門寺)․신륵사(神勒寺) 같은 유명한 절이나 명승지를 유람하면서 지은 시가 상당수를 차지하며, 자신의 심정을 친구에게 읊은 것이 여러 편 있다. 「독사유감(讀史有感)」․「동야희아배논사(冬夜喜兒輩論史)」등의 시에서는 허무한 회고조를 보이고 있으며, 또한 자손을 경계하기 위해 지은 것이 있다.

이 밖에 정숙보(鄭叔葆)․이공무(李公茂) 등의 시에 차운한 것, 이탁중․조철영(趙徹永)․신백현(申百顯)․이탁성(李度誠)․안업(安業)․유한준(兪漢雋)․정희순(鄭羲淳) 등과 화답한 것이 있다. 저자가 이 시기에 한문 학계의 변화를 보여주는 시사(詩社)와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시로 「구일음기정진현(九日吟寄鄭晋賢)」을 비롯해 여러 편이 있다. 이 책은 조선 후기 한문학을 연구하는 데 참고자료가 된다.

참고할만한 문헌으로는 철종실록(哲宗實錄), 고종실록(高宗實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일성록(日省錄), 국조방목(國朝榜目) 등이 있다.

김사우(金思禹,1857-1907)


 

김사우(金思禹,1857-1907)                                  PDF Download

 

1857(철종 8)~1907. 조선 후기의 한학자이다.

관은 안동(安洞)이며, 자는 인부(仁父), 호는 용암(勇菴)이다.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 주성리(主城里) 인곡마을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김호벽(金好壁)이다.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학문이 뛰어나 향리에서 후학들에게 한문을 가르쳤다.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 체결 이후에 통분을 금하지 못하고 병으로 죽었다. 효학(孝學)을 겸비한 학자로서 당시 학계에 명망이 높았다. 간재의 학문은 스승인 임헌회(任憲晦)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임헌회는 홍직필(洪直弼)의 문인으로서 홍직필이 이재(李縡)의 문인에게서 학문을 닦았다. 스승인 전우는 자신의 생각과 조금이라도 의견을 달리하는 점이 있으면 주저하지 않고 그 잘못을 지적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김창협(金昌協)에게서 사상적인 영향을 받았지만, 농암사칠의의(農巖四七疑義)를 지어서 그 불합리함을 지적하였고, 기정진(奇正鎭)의 「외필(猥筆)」을 반박하는 「외필변(猥筆辨)」을 썼다. 또한 이항로(李恒老)에게는 「화서아언의의(華西雅言疑義)」로 반박하였고, 이진상(李震相)에게는 「이씨심설조변(李氏心說條辨)」으로 반박하였다. 또한 의리정신을 숭상하고 조선조의 조광조(趙光祖)․이황(李滉)․이이(李珥)․김장생(金長生)․송시열(宋時烈)을 동방의 오현(五賢)이라고 칭하였다. 묘소는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 주성리(主城里)에 있으며, 저서로는 용암유고(勇菴遺稿) 3권이 있다.

용암유고는 조선 말기의 학자 김사우의 시문집이다. 모두 7권 3책으로 활자본이다. 1984년에 김사우의 손자 김덕회(金德會)․김명회(金明會) 등이 편집하여 간행하였다. 서문과 발문은 모두 김세기(金世基)가 썼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과 전북대학교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권1∼3에는 서(書) 202편, 권4에는 잡저 64편, 권5․6에는 잡지(雜識)로 경설(經說) 7편, 권7에는 서(序) 7편, 기(記) 3편, 명(銘) 1편, 발(跋) 1편, 제문 10편, 시 81수, 부록으로 행장․행장발(行狀跋)․묘갈․제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서(書) 중의 「상간재선생(上艮齋先生)」․「답전선생(答田先生)」 등은 대부분 학문에 관해 토론한 글이다. 심성(心性)과 학문, 주기(主氣)와 허령심(虛靈心), 만물일체(萬物一體)와 이기(理氣), 체발(剃髮)과 의리(義理), 달덕(達德)과 이심(理心), 성사심제(性師心弟), 인심과 도심 등 성리학 전반에 걸쳐 논의하고 있다. 「사문문답(師門問答)」은 지각과 마음, 각식(覺識)과 심지(心智), 지각과 성(性), 기정진의 견해 등을 다루고 있어, 당시 전우학파의 주기적 입장을 살필 수 있다.

잡저의 「명도식인편설(明道識仁篇說)」․「생지위성주설(生之謂性註說)」․「용력어인설(用力於仁說)」․「대학정심설(大學正心說)」․「달덕설(達德說)」․「취정록(就正錄)」 등에서는 선현의 학설을 훈고(訓詁)하여 이기의 문제를 다루었다. 「추담별집부록(秋潭別集附錄)」은 전우가 저자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시의(時義)에 대해 써 보낸 글들을 모은 것이다. 창의(倡義)와 도학(道學)의 문제를 논변한 내용으로, 전우학파의 처세와 갈등을 고찰할 수 있다.

잡지에서는 중용과 사서(四書)의 의의를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 시 가운데 「유화양구곡운(遊華陽九曲韻)」․「덕산구곡(德山九曲)」․「십이난화(十二蘭畵)」․「십송화(十松畵)」 등은 도학자의 심성 수양을 의탁한 내용으로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