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나무를 베어버린 최영경


 

야사(연려실기술)를 통한 스토리텔링 4

매화나무를 베어버린 최영경

 

초에 이조전랑 자리가 빌미가 되어 발생한 심의겸과 김효원의 알력이 점차 확전되어 선배 사류와 젊은 사류로 나뉜 동서 붕당을 조성하기는 했지만, 당시의 정국은 연산군 때부터 명종 초년까지의 이른바 4대 사화를 겪으면서 입지를 갖지 못했던 사림들이 선조 치세를 통하여 막 기지개를 켜는 정국이라 상호 견제 중에도 상호 협조의 기풍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정여립 모반사건과 기축옥사(기축사화)를 거치면서 서인과 동인의 갈등과 대립은 건너올 수 없는 강을 넘게 된다. 일설에는 3년 동안 옥사로 사망한 사람이 무려 1천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1589년 10월, 황해도관찰사 한준(韓準), 안악군수 이축(李軸), 재령군수 박충간(朴忠侃), 신천군수 한응인(韓應寅) 등은 정여립과 대동계의 무리가 황해도와 호남에서 동시에 서울을 공격해 대장 신립(申砬)과 병조판서를 살해하고 병권을 장악하려는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고변한다. 조정에서는 즉시 선전관과 의금부 도사를 황해도와 전라도로 파견하고 정여립은 진안 죽도로 도망쳤다가 결국 자결로 생을 마감한다. 한편 이때 그와 같이 피신했던 아들 정옥남(鄭玉男)은 체포되자, 길삼봉(吉三峯)이 주모자라고 토설하는데, 나중에 길삼봉으로 지목되어 고문 끝에 옥사한 이가 바로 남명의 제자인 최영경(崔永慶, 1529∼1590)이다.

최영경이 길상봉이 아니라는 결론은 이미 조선시대에 그에 대한 신원 회복을 통해서도 밝혀졌지만 최영경이라는 인물이 실제 어떠했는지 자못 궁금하다. <연려실기술>에 실린 기록들을 추려보면 대강 이러하다.

○ 공은 날 때부터 특이한 자질이 있었다. 조금 자라서 상소리를 입에 담지 아니하고 걸음걸이도 법도가 있었다. 효성이 지극하여 친상을 당하자 애통함이 지나쳐서 거의 살아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고, 장사 할 때에는 힘을 다하여 유회(油灰)를 구하여 썼으며, 3년 동안 묘 앞에서 여막을 짓고 살면서 조석으로 상식(上食)할 때 반드시 어육(漁肉)을 잊지 아니하였다. 한번은 큰 비가 와서 냇물이 넘쳤으므로 시장에 갈 수 없어 묘에서 울고 있는데, 범이 산돼지를 잡아다가 상석(床石) 위에 놓고 갔다. 또 진주에 살 때에 제사 날을 당했는데도 어육이 없어 종일 슬피 근심하고 있었는데, 노루 한 마리가 후원에 들어왔으니, 이런 것은 다 그의 정성스러운 효도에 감동된 것이라 하겠다. 〈행장〉

 

○ 선조 6년 계유에 행실이 높은 선비를 천거하라는 명이 있어 최영경을 6품직에 제수하였다. 영경은 일찍이 조식(曺植)에게 배웠는데 청렴하고 개결함이 세상에 제일이었다. 의로운 일이 아니면 털끝만큼도 취하지 아니하였으며 어버이를 지극한 효도로 섬겼다. 부모가 죽으니 가산을 기울여서 장사하여 마침내 가세가 가난해졌다. 성중에 있으면서 남과 교제하기를 일삼지 아니하니, 그를 아는 자가 별고 없었고 그 마을 사람들이 모두, ‘고집장이 선비’라고 하였다. 안민학(安敏學)이 처음으로 방문하였다가 그 말을 듣고 특이한 것이 있음을 알고 성혼에게 말하기를,

“우리 마을에 이인(異人)이 있으나 모르고 있다가 지금에야 알았으니, 가서 보지 아니하겠소.”

하였더니, 성혼이 성중에 들어와서 일부러 찾아가 문을 두들기니, 한참 만에 맨발의 작은 여종이 나와서 맞이하므로 들어갔더니 뜰에 방초가 가득하였다. 조금 뒤에 영경이 나오는데 베옷에 떨어진 신을 신은 궁한 차림이나 그 얼굴은 엄중하여 남이 범할 수 없는 기상이 있었다. 앉아서 이야기하니 한 점의 티끌도 없었다. 성혼이 매우 기뻐서 백인걸(白仁傑)에게 (《괘일록》에는, “이이(李珥)에게 말했다.”고 하였다) 말하기를,

“내가 최영경을 보고 돌아오니, 홀연히 맑은 바람이 소매에 가득함을 깨달았다.”

하였다. 이때부터 영경의 이름이 사림(士林)에 널리 퍼졌다. 《석담일기》

 

○ 공의 기상은 천길 높이의 바위벽 같고 가을 서리와 따가운 햇살 같았다. 흉금이 깨끗하고 시원하여 옥으로 만든 병이나 얼음과 달 같았다. 바라보면 신선 같아서 그 기상과 풍모는 조남명(曺南冥)과 서로 견줄 만하였다. 《괘일록》

 

이상의 기록들을 보면 최영경이 고결하고 청렴한 처사로 극진한 효자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괘일록>에서 최영경의 기상이 천길 높이의 바위벽 같고 가을 서리와 따가운 햇살 같으며, 흉금이 깨끗하고 시원하여 옥으로 만든 병이나 얼음과 달 같아서 바라보면 신선 같다 하고 적어 두었는데, 이는 그가 극심한 국문 중에 보여준 의연한 모습들에 잘 드러난다.

 

○ 이전에, 영경이 진주 옥에 갇히자 거의 천여 명의 선비들이 옥문 밖에 모여들었다. 영경이 옥문을 닫고 들이지 아니하니, 그들은 밖에서 노숙해 가면서 수일 동안 흩어지지 아니하였었다. 어떤 이가 묻기를,

“선생이 옥중에서 여러 달 있으면서 털끝만큼이라도 뜻에 동요됨이 있는가.

하니, 답하기를,

“나는 죽고 사는 것은 잊은 지가 벌써 30년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식욕(食欲)이 가장 중한 것이야. 내가 잡혀서 들어오는 길에 동문을 지나다가 길가에 상추잎이 푸른 것을 보고는 그 잎에 밥을 싸서 한 번 먹었으면 하는 마음이 울컥 솟더라.”

하고는 크게 웃었다
. 《괘일록》

 

○ 이항복이 일찍이 말하기를,

“기축옥사를 다스릴 때에 여러 사람의 진술하는 모양을 보니 모두가 황급하여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데, 최영경은 고문을 받는 중에도 마치 자기 집 방 가운데 앉아 있는 것처럼 정신과 기색이 태연하였고, 말도 평상시 자기 집에서 손님과 수작하는 것같이 조리가 하나도 틀리지 않았으니, 그 기백이 다른 사람보다 매우 지나침이 있었다.”

하였다.
석실어록(石室語錄)》 《백사(白沙)》 《청음문답(淸陰問答》

 

○ 공은 남보다 뛰어나고 드높은 기백이 있어 흰 머리와 흰 수염에 형상이 엄하여 가히 사람이 바라보고 두려워할 만하였다. 이항복이 극구 칭찬하기를,

“죄수들을 문초하다가 참 큰 사람을 보았다.” 하였고,

좌상 김명원(金命元)도 칭찬하기를,

“비록 오랏줄에 묶여 있으나 늠연(凜然)히 공경하는 마음이 생겼다.”

하였다.《미수기언

이항복이 참 큰 사람을 보았다고 격찬할 정도로 생명이 타들어가는 절박한 상황에서도 의연한 최영경의 기상이 손에 잡힌다. 그러나 최영경이 이 거대한 정치적 소용돌이에 휩쓸린 데에는 평소의 언행과 처신이 무관하지는 않을 터이다.

 

○ 인조 갑자년에 김덕함(金德諴)이 아뢰기를,
“신이 사천(泗川)에 귀양 갔을 때에 그 고을에 사는 최영경의 족인(族人)이 말하기를, ‘영경은 항상 맨 머리로 망건도 쓰지 않고 안석에 기대어 눕기를 즐겨했는데, 감사가 찾아와도 병을 빙자하고 보지 않았으며, 두세 번 찾아 온 후에야 비로소 보면서 말하기를, 「아무 수령은 치적이 나쁜데 어찌 그를 쫓지 않느냐. 아무 수령은 치적이 좋은데, 네가 어찌 포상하지 않는가.」하였고, 진주 목사가 와서 봐도 또한 너라고 불렀다. 이와 같이 사대부를 억누르고 다른 사람을 능멸히 아는 것을 기특한 행실로 삼았다. 오직 제사 때는 반드시 보름 동안 재개하고 친히 제물을 보살폈다.’고 합니다.” 하였다. 《성옹집(醒翁集)》

○ 영경은 정구(鄭逑)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정구가 매화나무 백 그루를 사랑방 앞에 심어 놓고 그 집 이름을 ‘백매헌(白梅軒)’이라 하였다. 하루는 영경이 정구를 찾아 왔다가 마침 주인이 없으므로 종을 불러서 도끼를 가져오라 하여 매화나무 백 그루를 다 베어버리고 돌아갔다 한다. 《석실어록

 

벼슬하지 않는 처사가 관작의 고하에 따라 처신을 좌지우지 않는다는 것은 고결한 처사의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이와 같이 사대부를 억누르고 다른 사람을 능멸히 아는 것을 기특한 행실로 삼았다.” 하는 평가는 방외지사라면 모를까 조식에게서 경세지학을 배운 유자의 입장에서는 다소 과한 감이 없지 않으며, 정구의 집 매화나무 백 그루를 모두 베어버렸다는 기사는 그 진위를 우선 판단해야겠지만 이 또한 최영경의 방외지사풍의 성정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명종 연간에 실력자들이 반대파를 제거하고자 할 적에 이모는 신실한 사람이라고 하여 화를 면했다는 퇴계의 고사와는 사뭇 다른 기풍이 엿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