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철은 결코 소인이 아니다!


야사(연려실기술)를 통한 스토리텔링 5

정철은 결코 소인이 아니다!

 

강 정철은 〈관동별곡〉 · 〈사미인곡〉 · 〈속미인곡〉 · 〈성산별곡〉 등을 지은 가사문학의 대가로 국문학사에서 이름이 드높다. 그러나 무려 1천여 명이 죽었다는 기축옥사의 위관으로 있으면서 정여립 모반사건을 당쟁에 이용하였다는 비판적 평가 또한 만만치 않은데, 이는 기축옥사를 기축사화라고도 지칭하는 데에서도 알 수 있다.

<연려실기술>에는 인조반정의 주역이었던 이귀가 기축옥사의 위관을 담당한 정철에게 후배로서 옥사 처분에 대한 당부와 의견을 밝힌 글이 있다.

일찍이 정철이 역변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고양(高陽)에서 서울로 올라왔을 때, 이귀(李貴)가 신경진(辛慶晋)과 같이 정철에게 가서,

“옥사를 공평히 하여 인심을 진정시키시오.”

하며 간절히 말하고,

“돌아간 스승(율곡)이 평일에 대감을 소중히 아끼셨는데, 오늘날 사류(士類)의 기대를 저버리는 행동이 있다면 반드시 그 누(累)가 돌아간 스승에게 미칠 것입니다.”

하니, 정철이 답하기를,

“군들의 말이 옳다. 내가 마땅히 힘을 다해 보리라.”

하였다. 얼마 뒤에 정철이 정언신을 대신하여 우상이 되었는데, 그때는 이미 옥사가 죄 없는 사람에게까지 널리 번져가는 형편이어서, 정철이 진정시키지 못하고 낭패한 지경에 이르렀다. 이때부터 두어 달 동안 이귀가 가보지 않았더니, 한번은 정철이 노상에서 이귀를 만나자 서리(書吏)를 보내서 꼭 만나기를 청하였다. 이에 이귀는 성문준(成文濬)과 같이 가서 시국의 일을 말하면서,

“대감이 우리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여 이에 이르렀으니 후회한들 어찌하겠습니까. 오직 돌아간 스승에게 누가 미칠 것이 한스럽습니다.”

하니, 정철도 이귀의 말을 옳다고 하였으나 이미 어찌할 수 없었다.

연평일기(延平日記》

 

<연평일기>의 저자는 바로 신흠의 아들이자 병자호란 때의 척화오신(斥和五臣)인 신익성(申翊聖)이다. 그의 가계 당파로 봤을 때 정철을 변호했으면 변호했지 일방적으로 매도할 입장은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에, 이를 통하여 기축옥사에 대한 당시 사류들의 평가를 엿볼 수 있다.

정철에 대한 비판적 평가들은 역시 기축옥사의 위관으로 반대파들을 숙청했다는 입장이다. 게다가 아래의 기사는 서인의 영수로서 동인을 숙청한 것만이 아니라 국가의 명운이 걸린 막중한 옥사를 사사로이 이용했다는 혐의를 두는 기록들이다.

○ 임진년에 유성룡과 정철이 안주(安州)에서 만났을 때 정철이 묻기를,

“남들이 말하기를, 대감도 역시 내가 사감으로 최영경을 죽였다고 한다더군요.” 하니, 성룡은, “참 그렇소.” 하고, 웃으면서 말하기를, “그때에 근사(近似)한 형적을 보았으므로 일찍이 그런 말을 하였소.”

하여, 정철이 깜짝 놀랐다.

기재잡기

○ 젊어서 청백하고 곧은 것으로 이름이 나서 총마어사(驄馬御史)의 호칭이 있었으나 동서로 분당된 뒤에 이발(李潑)의 배척을 받아 오랫동안 산직(散職)에 머물러 있었다. 기축옥사(己丑獄事) 때에 우의정이 되어 그 옥사를 두드려서 만들었다는 비방이 있었다.

부계기문

 

<기재잡기>는 정철이 사감에 치우친 바가 있음을 유성룡과의 대화 내용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으며, <부계기문>은 당시 유자들이 정철이 기축옥사를 혹 정치적으로 활용했다고 보는 입장이 있다고 전한다. 두 기록 모두 정철의 기축옥사 처분이 적당하지 않다는 평가이다.

전해오는 그에 대한 기록들을 보면 정철의 예술가적인 성향을 엿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술을 즐기고 여색을 밝히는 모습은 정감이 풍부한 예술가들에게서 종종 나타나는 그대로이다. 정철과 막역한 지우였던 율곡도 주색을 삼가라고 충고한 적이 있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정철이 술을 즐기게 된 이유를 조헌은 그의 개인사를 들어가며 변호해준다.

 

○ 공에게 한 명의 형이 있었는데 을사사화 때 곤장을 맞다가 죽었고, 자형 계림군(桂林君)은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도망치다가 잡혀서 죽음을 당하니, 공이 술을 많이 마신 것은 사실 완적(阮籍)의 계책에서 나온 것이었으나 부모의 기일(忌日)을 당하면 한 달간 술을 끊었다. 얼음을 넣은 옥병같이 깨끗했으며 성심으로 공무에 몸을 바쳤다. 시정(市井)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정철ㆍ이이 두 분이 헌부에 계실 때는 각사(各司)에서 멋대로 징수하는 일이 없었다.”

고 하였다.

<중봉(重峰)의 병술년 상소>

절제하지 못하는 음주습관은 엄중한 몸단속을 하늘처럼 여겼던 조선시대 선비들의 기준으로 보자면 분명 흠이 될 것은 분명하다. 한편 기축옥사를 처분할 적에 정철과 손발을 맞추었고 임진왜란이라는 조선 초유의 국난을 슬기롭게 극복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던 이항복은 술 마시는 정철의 모습에서 그의 천진난만함을 보았다.

○ 최명길(崔鳴吉)이 일찍이 이항복(李恒福)에게 묻기를,

“정송강은 어떠한 사람입니까?”

하니, 항복이 말하기를,

“반쯤 취했을 때에 손뼉을 치면서 담소하는 것을 바라보면 천상(天上)의 사람 같으니, 어찌 속된 무리들이 방불이나 할 것인가.”

하였다. 명길이 뒤에 사람에게 말하기를,

“내가 송강을 보지는 못했으나 백사(白沙)의 높은 안목으로 존경하고 탄복함이 이와 같으니 그 언론과 풍채를 상상할 수 있다.”

고 하였다.

지천유사(遲川遺事)》

 

이항복의 평가를 기록한 최명길의 이 기록을 보건대, 취기가 오른 후의 정철의 천진무구한 모습이 손에 잡히는 듯하다. 바로 이런 자태가 고결하고 아름다운 가사문학으로 꽃피웠을 것이다.

정철에 대한 평가는 역시 그의 지우인 율곡 이이의 평이 여실한 것 같다.

○ 당시의 논의가 공(정철)을 헐뜯고 배척하므로 고향으로 돌아갈 때, 친구 중에 전별하는 자가 없고 유독 이이와 이해수(李海壽)만이 전별하는 자리에 있었는데, 해수는 말이 적은 사람이었다. 이이가 희롱하여 말하기를,

“계함의 강직과 개결에다가 대중(大中, 해수의 자)의 언어로 문식을 한다면 어디를 가도 통하지 않을 곳이 없겠다.”

하였다. 이이가 매양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계함은 강직하고 깨끗하고 충성스럽고 의로운 선비이지만, 그 병통이 좁은 데 있을 뿐이니 그 사람을 끝내 버려서는 안 된다.”

하니, 시배들은 수긍하지 않았다. 하루는 임금이 박순에게 묻기를,

“내 생각에는 정철이 재기(才氣)는 있는데 마음이 좁아서 사람들과 대부분 맞지는 않다. 그러나 만약 정철을 소인이라고 한다면 제가 반드시 불복할 것이다.”

하니, 박순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정철을 깊이 아십니다. 사람을 알기를 매양 이같이 한다면 누가 심복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석담일기

 

이이가 정철을 평하기를,

“계함은 강직하고 깨끗하고 충성스럽고 의로운 선비이지만, 그 병통이 좁은 데 있을 뿐이다.”

하였는데, 속이 좁은 병통은 강직하고 개걸한 것이 지나친 것일 터이다. 기축옥사에서 최영경이 죽은 것을 두고 정철이 사적인 감정으로 죽였다는 비판 또한 이러한 병통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