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서 통치의 기본을 배우다


경연, 왕의 공부 이야기 1

<역사에서 통치의 기본을 배우다>

 

성종실록』성종 2년 신묘 윤 9월 27일의 이야기다.

야에 임금이 보경당에 나아가서 입직한 경연관 박효원(朴孝元)을 불러서 『국조보감(國朝寶鑑:조선의 역대 임금들의 정치 활동 가운데서 모범이 될 만한 사실을 뽑아 적은 역사책)』을 강(講)하였다. 강의가 ‘태조가 말하기를, 「내가 만약 평강(平康:몸이 평안한 것)하였으면 한 필 말을 타고 피하였을 것이다.」하였다.’ 한 데에 이르자 임금이 말하였다.

성종 : 태조께서 만약 평강하였다면 한 필 말을 가지고 피할 수 있었겠는가?

박효원 : 하늘의 뜻과 사람의 마음은 이미 정해져 있는데, 태조께서 피하려 할지라도 어찌 가능했겠습니까? 이는 태조께서 겸양하는 말씀입니다.

민개(閔開)의 상소에, ‘당나라 현종이 하나의 몸으로 요숭(姚崇:650~721.현종대의 재상)과 송경(宋璟:663~737. 현종대의 재상)을 써서 개원(開元:당 현종의 연호. 713~741)의 다스림을 일으켰고, 이임보(李林甫:당 현종 때 재상)․양국충(楊國忠:양귀비의 6촌 오빠)을 임명하여 천보(天寶:당 현종의 연호. 742~756)의 난을 일으켰습니다.’ 한 데에 이르자 박효원이 말하였다.

박효원 : 『시경』에 이르기를, ‘처음은 잘하지 아니하는 이가 없으나, 끝까지 잘하는 이는 드물다.’ 하였습니다. 만약 현종이 처음과 같이 끝까지 조심하여 정성이 한결같이 사이가 없게 하였다면 어찌 앞뒤의 다스림이 상반되었겠습니까? 군자와 소인을 쓰고 안 쓰는 것과 나라가 평안해지는 것과 어지러워지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전하께서는 이 점을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

성종 : 소인을 쓰는 것은 화를 자초하는 것이고 나라를 패망하게 만드는 것이니 소인은 진실로 쓸 수 없다.

박효원 : 소인을 쓰지 말아야 하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으나, 소인을 분별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당나라 현종이 이임보와 양국충이 나라를 패하게 만들 소인이라는 것을 미리 알았다면 어찌 썼겠습니까? 마음이 밝지 못하여 사람을 알아보는데 어두워 간신을 충신으로 여긴 것입니다. 『중용』에 이르기를, ‘사람을 뽑아 쓰기를 몸으로 하고 몸을 닦기를 도(道)로 한다.’라고 하였으니, 몸을 닦지 아니하고 사람을 아는 자가 있지 아니합니다.

 

조선시대 왕들은 날마다 나라 안에서 일어나는 온갖 일을 몸소 점검하고 처리해야 했다. 이뿐만 아니라 시간을 정해놓고 유학의 경전과 역사서를 중심으로 공부하고, 또 그 시간을 이용하여 정책을 의논하고 토론하였다. 이처럼 왕이 군주로서 덕성을 수양하기 위해 공부하고, 여러 신하들과 정책토론을 하게끔 제도적으로 마련한 공간이 바로 경연이다.

국왕의 하루는 일어나자마자 죽이나 미음 등으로 간단한 요기를 한 다음, 웃전에 문안을 드리는 것과 함께 시작된다. 문안을 마친 왕은 신료들을 만나 국정에 관한 업무를 시작한다. 약식 조회인 상참이 끝난 뒤에는 경연을 열었는데, 세종 이후 상참과 경연의 구분이 없어지면서 상참의 연장으로 경연을 했다.

그러다가 영조 이후에는 상참 전에 경연을 먼저 해서, 국왕은 해가 뜰 무렵 조강으로 일과를 시작했다고 한다. 경연이 끝나면 아침 식사를 하고, 이어서 문무 관료들과 조회를 하면서 업무 보고를 받는 등 국정을 돌본다. 정오에는 주강을 하고, 요즘 시간으로 오후 2시에 석강에 참석하는데, 이 세 차례의 경연을 삼시강(三時講)이라고 한다.

그러나 경연이 제도상으로 이처럼 완비되어 있었지만, 아무리 경연에 열의를 갖고 임했던 왕이라 하더라도 매일 경연을 열지는 않았다. 왕의 분주한 일과를 생각하면, 그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실제로는 며칠에 한 번 경연을 여는 때도 있었고, 오랫동안 경연을 거른 때도 있었다.

 

1471년 윤9월 27일, 성종은 이른 저녁에 경연관인 박효원을 보경당으로 불러 역대 왕의 행적을 기록한 『국조보감』의 내용을 강의 들었다. 박효원은 당나라 현종이 처음에는 정사를 바로잡아 ‘개원의 다스림’을 일으켰으나, 후기에는 간신배를 중용하여 ‘천보의 어지러움’을 일으킨 이야기를 거론하며, 나라를 망칠 수 있는 간신배를 군자로 착각하여 등용하지 말라는 당부를 하고 있다.

당나라 현종은 당나라를 전성기로 이끈 황제였다. 그는 할머니 측천무후 일파를 몰아내고 당나라의 골칫거리였던 돌궐을 평정해 국토를 넓혔으며,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부역도 완화하였다. 현종 대에는 사회가 안정되고 인구도 늘어 당시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은 실크로드를 통해 전 세계로 수출된 비단과 향료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였고, 시인과 예술가들이 최고의 대접을 받던 문화도시였다.

그러나 현군이었던 현종도 점차 정치에 싫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개원 30년, 연호를 ‘천보’로 고친 현종은 재상이던 이임보에게 모든 정치를 맡겨놓고 술과 여자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의 타락은 양귀비를 만나면서 그 도를 더해갔다. 결국 현종의 치세 말기에 양귀비의 양자가 되면서 현종의 사랑을 받았던 절도사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켜 당나라는 큰 피해를 입었고 천하는 어지러워졌다.

박효원은 이처럼 처음에 현군이었던 현종이 뒤에 가서는 이임보와 양국충 같은 간신배들을 중용하고 양귀비의 미색에 빠져 안녹산의 난이라는 큰 전란을 겪게 되었던 역사적 교훈을 들어 군자와 소인을 분별하는 안목을 기를 것을 당부하였다. 그리고 『중용』을 인용하여 몸을 닦아야, 즉 수련을 해야 간신배를 구분할 수 있다고 성종에게 당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