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십보백보 – 누가 더 나쁜 신하일까?


경연, 왕의 공부 이야기 2

<오십보백보 – 누가 더 나쁜 신하일까?>

 

성종실록』성종 3년 임진 6월 6일자에 실린 기록이다.

강에 나아갔다. 임금이 ‘주장위환(譸張爲幻:속이고 현혹함)’이라는 글을 읽을 때에 이르러 시강관 임사홍이 말하였다.

: “자고로 ‘주장위한’을 걱정한 것이니, 조강을 할 때에 정자영이 말한 것이 진실로 옳았습니다. 진나라의 조고(趙高:진나라의 환관)는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하여 이세(二世:진시황의 막내아들 호해)를 현혹시켰으며, 한나라의 장우(張禹:성제 때의 정승)는 말하기를, ‘새로 배우는 소생(小生)들이 도를 어지럽히고 사람을 그르치니 신용하지 마소서.’라고 하여 성제(成帝)를 속였습니다.

당나라의 이임보(李林甫)는 ‘의장대에서 쫓아버린다.’라는 말로써 언로를 두절시켜 명황의 총명을 가렸던 것이 모두 이것입니다. 만약 이 두 임금으로 하여금 밝은 눈과 통달한 귀로 간신들의 그르친 바가 되지 아니하였다면, 어찌 나라가 어지러워져 망하는 화가 있었겠습니까? 무일편(無逸篇:무일은 안일하게 지내지 말라는 말로서 주공이 나이 어린 조카 성왕을 경계한 글이다)의 글은 실로 만세 임금의 귀감(龜鑑:거울삼아 본받을 만한 것)입니다.” 하였다.

위의 기사는 성종 3년 6월 6일의 주강에서 있었던 일이다. 임금이 『서경』주서(周書)의 무일편을 읽을 때, 임사홍이 나서서 말한 내용이다. 임사홍은 진나라의 조고, 한나라의 장우, 당나라의 이임보 등의 사례를 들어가면서 간신들이 임금의 눈과 귀를 가리고 현혹하여 끝내는 나라를 망쳤던 일을 경계할 것을 임금에게 당부하였다.

여기서 언급된 진나라의 조고는 진시황을 모시는 환관 책임자였는데, BC 209년 진시황이 여행 도중에 죽자 황제의 죽음을 감추고 음모를 꾸몄다. 당시 시황제의 큰 아들 부소는 분서갱유를 시행한 승상 이사의 조처에 반대하다가 북쪽 변방에 유배되어 있었다. 조고는 이사와 함께 부소의 제위를 막기 위해 가짜 조서를 유배지로 보내 부소를 죽게 했다. 그 뒤 다시 시황제의 막내아들 호해로 제위를 잇게 한다는 억지 조서를 꾸며 호해를 황제에 등극시키고 자신이 모든 권력을 독점하였다.

권력을 장악한 조고는 자신의 힘이 조정에서 어느 정도 힘을 발휘하는지 알기 위해 어느 날 사슴 한 마리를 이세 황제에게 바치면서 말했다. “이것은 말입니다.” 이세 황제가 웃으며 말했다.

“승상이 잘못 본 것이오. 사슴을 일러 말이라 하는구려.”

조고가 대신들을 둘러보며 묻자 어떤 사람은 말이라고 하며 조고의 뜻에 영합했다. 어떤 사람은 사슴이라고 대답했는데, 조고는 사슴이라고 말한 자들을 암암리에 모두 처형했다. 이에 모든 신하들이 조고를 두려워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지록위마(指鹿爲馬: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하다)’라는 고사성어가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장우는 한나라 성제 때의 승상이자 스승으로 성제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그는 성제를 믿고 안하무인격의 행동도 서슴지 않고 했지만, 그의 위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여 그 누구도 그를 저지하지 못하였다. 이때 유학자 주운(朱雲)이 성제에게 간언하였다.

“지금 조정의 대신들은 위로는 폐하를 올바른 길로 이끌지 못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에게 무익한 일만 하면서 녹을 축내고 있으니 도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에게 참마검(斬馬劍:말을 벨 수 있는 칼)을 주신다면 간사한 신하 한 명의 목을 베어 신하들을 경계시키겠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대신들이 놀라 술렁거리자 성제가 물었다.

“간사한 신하가 누구인가?”

주운은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장우입니다.”

성제는 자신의 스승을 간사한 신하로 폄하한 주운을 당장 끌어내라고 소리쳤다. 무관들이 주운을 끌어내려고 하자, 주운은 끌려 나가지 않으려고 난간을 붙들고 발버둥 치며 장우의 목을 베어야 한다는 말만 계속하여 반복하는 것이었다. 무관과 주운이 밀고 당기다가 그만 난간이 부러지고 말았다. 이를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하던 좌장군 신경기(辛慶忌)가 모자를 벗고, 인수(도장끈)를 풀고는 머리를 찧으며 말했다.

“이 자는 아주 곧고 아주 미쳤습니다. 다만 모두 진심으로 폐하를 위하여 하는 말입니다. 만일 그의 말이 옳다면 죽여서는 안 되고, 만일 그의 말이 옳지 않더라도 용인해야 합니다.”

신경기는 계속 머리를 바닥에 찧었고, 머리에서 피가 흘렀다. 성제는 그제야 화가 풀려 주운을 풀어주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부서진 난간을 새로운 것으로 바꾸지 말고 부서진 것을 붙이도록 하라. 직언을 간한 신하의 충성의 징표로 삼겠다.”

당나라 현종은 45년간 재위하면서 초기에는 어지러운 정치를 바로잡고 안정된 사회를 이룩함으로써 정치를 잘한 인물로 칭송을 받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정치에 싫증을 느끼고 양귀비를 총애하여 술과 여자에 빠져 들기 시작하였다. 그 무렵 이임보라는 간신이 있었는데, 그는 환관에게 뇌물을 바친 인연으로 왕비의 눈에 들고 현종의 환심을 사 출세하여 재상이 된 사람이다.

이임보는 황제의 비위만을 맞추면서 절개가 곧은 신하의 충언이나 백성들의 간언이 황제의 귀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한번은 비리를 탄핵하는 어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 주상은 명주(明主:밝은 군주)이다. 여러 신하들은 그의 말을 따르는 것만으로도 쉴 틈이 없으니, 말을 많이 할 필요가 없다. 너는 입장마(立仗馬: 궁문 바깥에 서 있는 의장용 말)를 보지 못했는가? 종일토록 소리도 못 내고 3등품의 사료를 먹고도 한 번만 울면 쫓아내는 것이다.”

라고 하였으므로, 모두 무서워서 감히 말을 못하였다는 것이다.

위에서 보듯이 진나라의 조고, 한나라의 장우, 당나라의 이임보 등은 역사에 기록된 대표적인 간신들이다. 임사홍은 이들의 사례를 들어 임금의 눈과 귀를 현혹하는 간신배들을 경계할 것을 왕에게 간언한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임금에게 충심으로 간신배를 경계하도록 간언한 임사홍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그는 과연 충신이었을까?

임사홍은 자신뿐만 아니라 두 아들이 부마(駙馬:임금의 사위)로서 왕실과 인연을 맺으며 세조에서 연산군까지 정치적으로 탄탄대로를 걸었던 인물이다. 그는 시문과 서예 솜씨로 당대에 이름을 날리기도 했으며, 중국어에도 능통하여 승문원에서 중국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그의 능력을 총애했던 성종은 그가 종친임에도 불구하고 문관으로 등용하여 도승지․이조판서 등에 임명하였다. 성종의 총애로 탄탄대로를 걷던 임사홍은 1478년 유자광 등과 함께 파당을 만들어 횡포를 자행하고 조정의 기강을 흐리게 한 죄로 사헌부와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의주로 유배당했다.

유자광과 임사홍은 성종대에는 크게 활약하지 못하면서, 복수의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성종이 죽고 연산군이 즉위하자, 임사홍은 막강한 권력자가 되어 다시 정계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쫓아냈던 이들을 향해 피비린내 나는 복수의 칼을 겨눴다. 임사홍은 연산군에게 폐비 윤씨 문제를 거론했고, 임사홍의 폭로로 시작된 이 사화가 바로 갑자사화이다.

자신의 생모가 참소(讒訴:해치려고 거짓으로 죄가 있는 것처럼 꾸며져 윗사람에게 일러바치다) 당해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연산군은 광분했고, 그 사건에 연루된 자들을 모조리 죽였다. 임사홍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갑자년 이후로도 자기를 비난한 자에게 일일이 앙갚음하고 이미 죽은 사람까지도 모두 참시(斬屍:관을 쪼개어 시체를 베거나 목을 잘라 거리에 걸던 일)하는데 깊이 관여하였다. 당시에 사람들이 임사홍을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온 조정이 그를 승냥이나 호랑이처럼 두려워하여 비록 두 신씨(愼氏: 당시 실세였던 왕비의 오빠들)라 할지라도 또한 조심스럽게 섬겼다.”

라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연산군이 1506년 중종반정으로 종말을 맞이하면서, 권력의 최측근 임사홍은 체포된 후 죽음을 면치 못하였다. 실록에서 대간(大奸: 매우 간사함)․대사(大詐: 큰 사기꾼) 등 부정적인 평가를 받던 전형적인 간신의 최후였다. 여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임사홍이 죽은 뒤 20여 일 후, 의금부에서

“임사홍은 충직한 사람들을 해치고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며 임금을 불의에 빠뜨려 종사를 위태롭게 하였으니 그 죄는 부관참시(剖棺斬屍: 무덤을 파고 관을 꺼내 주검을 베거나, 목을 잘라 거리에 내걸었던 형벌)하고 가산을 몰수해야 합니다.”

라고 하였고 중종은 이를 받아들였다. 자신이 주도했던 부관참시의 악행을 고스란히 돌려받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는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간신이라는 불명예가 더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