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종실록』과 『현종 개수실록』

『현종실록』의 율곡 선생 이야기

 

『현종실록』과 『현종 개수실록』

현종(顯宗, 1641년 ~ 1674)은 조선의 제18대 임금이다.

1659년 6월 28일(음력 5월 9일)부터 1674년 9월 17일(음력 8월 18일)까지 약 15년간 국왕의 자리에 있었다. 현종의 앞 임금은 그의 부친 효종이며, 뒤 임금은 아들 숙종이다.

현종 시대는 율곡 이이(李珥, 1536년 ~ 1584년) 선생이 사망한지 이미 70여년이 지난 때였다. 하지만 조정에서는 여전히 율곡 선생에 관한 논의가 벌어지거나 율곡 이 남긴 가르침을 회상하는 관료들의 발언이 그치지 않았다.

『현종실록』(http://sillok.history.go.kr/)을 ‘李珥(이이)’라는 한자 이름으로 검색해보면 모두 57건이 검색된다. 현종의 재위 기간이 15년이었기 때문에 연평균 4건 정도 언급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남인 관료 학자들이 주동이 되어 편찬한 『현종실록』이 이 정도이며, 율곡을 스승으로 모시던 서인 관료 학자들이 주로 편찬한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을 살펴보면 율곡 관련 기사가 모두 96건이나 된다. 연평균 6건이 넘는다.(『현종개수실록』이란 『현종실록』을 다시 수정, 편찬한 실록이라는 뜻이다.) 현종 시대에도 율곡의 영향력이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참고로 부친 효종 시대를 살펴보면 『효종실록』에 32건의 율곡 관련 기록이 보이며, 아들 숙종 대(『숙종실록』)의 율곡 관련 기록은 총 192건이다.

현종 시대는 대부분의 기간 동안 서인 관료들이 집권을 하였다. 하지만 현종 말년에 예송 논쟁 과정 중에 서인들이 세력을 잃고 남인이 권력을 잡게 되었다. 이 직후에 현종이 사망하여 실록 편찬의 권한이 남인 관료들 손에 들어갔다. 이 때문에 숙종 임금 초기에 편찬된 『현종실록』은 다분히 남인들의 정치적 입장이 반영되었으며 반대파인 서인들은 상대적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거나 업적이 폄하되고 또 서인들에게 불리한 기록들이 실록에 게재 되었다.

그러나 숙종 6년(1680년)에 남인이 실각을 하고 다시 서인들이 권력을 잡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를 경신환국(庚申換局)이라 한다. 권력을 다시 잡게 된 서인 관료들은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편찬된 『현종실록』을 비판하고 이를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고쳐 쓴 『현종개수실록』을 편찬하였다.

『현종실록』과 『현종개수실록』을 서로 비교 연구한 전윤주(2018)는 양자 간의 차이를 분석한 뒤 다음과 같이 정리한 바 있다.

1) 서인들은 남인이 편찬한 『현종실록』 중에서 자신들에게 불리한 내용을 삭제하고 유리한 내용은 역사적 사실로 만들고자 하였다.

2) 서인들은 『현종실록』의 기록을 자신들의 입장에서 바로잡기 위해 내용을 추가하거나 축약 또는 삭제의 방법을 사용하였다.

3) 서인 측에 우호적인 인물은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적대적인 인물들은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또 『현종실록』이 사실을 기록하지 않고 잘못된 점을 바로잡기 위해 인물의 졸기(卒記 : 사망한 사람에 대한 평가 기록, 혹은 사관이 공직자들에 대해서 사후에 쓴 기록)를 수정하기도 하였다.

4) 『현종개수실록』은 기록의 양을 늘리고 사론의 양을 줄이는 방법으로 개정되었다. 사론 중에는 단어와 문장을 변화시킨 경우가 가장 많으며, 해당 기록들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날짜와 순서를 정리한 경우도 있었다. 또 없던 사론을 추가하거나 ‘校(교정하다)를 통해 수정한 경우도 있었다.

『현종실록』과 『현종개수실록』은 이러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서인들이 스승으로 모신 율곡 선생의 기록을 살펴볼 때는 주의해야한다.

『현종실록』은 아무래도 율곡 선생을 평가 절하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에 『현종개수실록』은 매우 높여서 다소 과대평가를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두 기록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율곡 선생은 당시 선비들이나 학자 관료들 사이에 그리고 국왕이 기본적으로 존경을 해야할만한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서인 관료들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위한 『현종실록』도 율곡 선생을 근거 없이, 심하게 비판하거나 깎아 내린 경우는 거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