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정신-

역사 속 유교 이야기

 

 

 

『대동야승(大東野乘)』을 통해 본 조선 시대 선비 이야기 Ⅲ

선비정신

 

 

 

이종란

 

 

선비정신과 지조

 

한국 문화와 선비정신

최근 세계에서 한국의 위상이 높아졌다. 그 요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가운데 하나가 독특한 한국의 문화일 것이다. 그 선봉에는 대중문화가 있다.

하지만 대중문화와 같은 표면적인 것만으로는 우리 문화의 저변을 알기 어렵다. 한국학을 연구하는 어떤 외국인 학자는 한국 문화의 핵심은 사상인데, 거기에는 홍익인간과 선비정신을 들 수 있다고 힘주어 말한다. 사실 선비정신은 이전부터 우리 정신문화의 핵심 가운데 하나로 자주 거론되곤 했다. 그렇다면 정작 선비정신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자신 있고 조리 있게 대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래서 그동안 대동야승 속에 깃든 선비들의 삶을 살펴보았는데, 이번에는 선비정신을 사례별로 분류하고 정리해보려고 한다.

 

10가지 선비정신

선비정신에는 무엇이 있을까? 학자마다 다양한 의견과 요소가 있을 수 있어, 어떤 견해만이 정답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우나 대체로 동의할 수 있는 10가지 덕목을 선택해 보았다. 바로 지조(志操), 대의(大義), 엄격한 출처(出處), 호학(好學), 넓은 도량, 멋과 여유, 안빈낙도(安貧樂道), 이치에 맞는 삶, 솔선수범, 품격 있는 기상(氣像)이 그것이다.

이 글은 이 열 가지를 모두 완벽하게 충족하는 선비를 다루지 않는다. 많은 항목을 공유하겠지만 모든 항목에 빈틈없이 완벽한 그런 선비는 드물다. 그런 분을 발굴하여 기술하는 일은 이 글의 본래 취지와 다르다. 선비정신을 종합적으로 다루기 때문이다. 대부분 몇 가지 이상을 충족시키나 다만 두드러지게 돋보이는 항목을 중심으로 몇 가지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해서 조선조 선비들은 대부분 기본적으로 몇 가지 항목들을 잘 지키고 있어서 일일이 다 거론하기는 쉽지 않다. 소개하는 인물이나 사례만이 꼭 거기에 해당한다는 오해가 없었으면 좋겠다. 더구나 대동야승의 글들이 모두 개인 저작이기 때문에 학맥과 정치적 위치와 친소(친함과 친하지 아니함) 관계에 따라 주관적 관점도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등장하는 인물을 반대편에서 다른 각도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등장하는 개인의 품성보다 선비들이 숭상하는 정신이 무엇인지 거기에 초점을 맞추면 이 글의 본래 의도와 들어맞을 것이다.

 

지조란 무엇인가?

선비정신으로 맨 처음 선택된 덕목이 지조이다. 국어사전에 지조는 ‘옳은 원칙과 신념을 지켜 끝까지 굽히지 않는 꿋꿋한 의지 또는 그러한 기개’라고 풀이하고 있다. 달리 절개(節介) 또는 절조(節操) 등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흔히 지조 또는 절개를 말할 때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지아비를 고쳐 맞지 않는다.”

라는 말을 자주 한다. 이 말은 소학에 등장하며 전국시대 왕촉(王蠋)이 죽으면서 한 말이라고 한다.

그래서 백이·숙제나 고려 말 정몽주·길재 조선의 사육신 등은 절개가 있는 선비의 대명사로 통한다. 하지만 지조는 외연이 커서 반드시 특정 왕조나 임금에 대한 충절(忠節)만을 가리키는 말은 아니다. 앞서 국어사전의 풀이를 보았듯이, 자신이 옳다고 믿는 신념을 지켜 굽히지 않는 꿋꿋한 의지나 기개가 있는 일도 지조다. 율곡 이이도 석담일기에서

 

“충신은 임금을 덕으로 사랑하고, 임금을 예법으로 공경하는 것이요, 비위나 맞추고 명령대로 순순히 따르는 것은 도리어 사랑과 공경에 해가 된다. 신하는 마땅히 분수와 의리를 중하게 알아야 한다. 만약 단지 임금의 은혜와 녹봉만 사모하며 충성을 바친다면, 다른 임금도 역시 은혜와 녹봉으로 유인할 수도 있다. 그래서 분수와 의리를 소중하게 아는 사람은 임금의 대우와 관계없이 다 능히 절개와 의리에 죽을 수 있지만, 은혜와 녹봉을 소중하게 아는 사람은 그 마음을 믿을 수가 없다.”

 

라고 하여, 분수와 의리를 중요하게 여겼다. 그것을 알고 올곧게 지키는 일이 지조다. 그래서 또 말하기를 “사람을 볼 때 먼저 그 대절(大節 : 커다란 절개)을 취한 뒤에 세세한 행위를 논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니 지조 또는 절개는 단순히 임금을 향한 외적인 충성만을 말하지 않았다. 이 글에서는 널리 알려진 충절의 선비는 앞서 많이 다루었기에 새로운 인물을 발탁한다는 취지에서 다른 선비의 사례를 소개하겠다.

 

지조가 있는 선비들

고려말 조선 초에는 옛 왕조에 지조를 지키는 선비들이 꽤 있었다. 정몽주나 길재 등이 있고, 원천석(元天錫, 1330~?)도 그 가운데 한사람이다. 심광세(沈光世, 1577~1624)의 해동악부(海東樂府)에 보면, 그는 고려 말에 벼슬하지 않고 원주에 숨어 살았다고 한다. 태종이 왕이 되기 전 사가에 있을 때 그를 가르친 인연이 있었으므로, 태종이 불러 벼슬을 내리고자 하여도 사양하였다. 또 이기(李墍 : ?~?)의 『송와잡설(松窩雜說)』에서는 그는 학문이 깊고 몸가짐이 곧았으며 젊은 나이에 아내를 잃었으나, 아이들에게 좋지 못한 일이 생길까 염려하여 재혼하지 않고, 첩도 두지 않고서 21년을 쓸쓸히 홀로 살면서 아이들이 장성하여 혼인할 때까지 기다렸다고 한다. 이렇게 그는 정치적으로, 개인적으로는 아내에게도 지조를 지킨 선비라 하겠다.

그런데 사람이 위급한 때를 당해서 조금만 뜻을 굽혀도 사는 방도가 있다. 어떻게 보면 구차한 삶이지만 생존을 위해서 필요한 일일지도 모른다. 현대인들의 삶 속에는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다. 하지만 조선 시대는 그렇지 않은 선비들도 꽤 많다. 권별(權鼈 : ?~?) 『해동잡록(海東雜錄)』에 등장하는 김진종(金振宗, 1496~1557)의 일화도 그러하다.

 

김진종은 천성이 방정·근엄하고 그릇이 넓고 커서 사람들이 충효대절(忠孝大節)이라 하였다.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파직되어 귀양 가게 되었는데, 어느 날 정순붕(鄭順朋 : 윤원형·이기 등과 함께 을사사화를 일으킨 장본인 가운데 한사람)이 그 아내를 시켜서 몰래 글을 보내어 말하기를,

“노비를 많이 주면 귀양 가는 것을 모면할 수가 있다.”

라고 하였다. 그가 듣고 깜짝 놀라서 말하기를,

“남아가 죽으면 죽었지 어찌 소인에게 사정하여 살길을 찾겠는가?”

라고 하였는데, 순붕은 곧 그의 처삼촌이다. 순창(淳昌)으로 귀양 가서 문을 닫고 11년 동안이나 바깥에 나가지 않았다. 결국 병으로 그곳에서 죽었다. 명종 말년에 영의정 이준경(李浚慶)이 백관을 거느리고 이때 귀양 간 여러 선비의 석방을 청하며 아뢰기를,

“김진종은 충효와 큰 지조가 있었으니, 지금 비록 죽었을지라도 그 관직을 회복시켜 주소서.”

라고 하니 마침내 왕이 허락하였다.

 

김진종은 뜻을 굽혀 뇌물을 바쳐 살 수도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다. 단지 노비가 아까워서가 아니라 뜻을 굽히는 일이 지조가 없고 구차하기 때문이다.

또 세조 때 단종의 복위를 꾀했던 사육신 모두 절개가 있다고 여기는데, 그들 가운데 하위지(河緯地, 1412~1456)에 대한 이런 고사가 송와잡설에 전한다.

 

하위지는 선산(善山) 사람으로 세종 때 과거의 장원에 뽑혔다. 문종이 승하하자 사직하고 선산으로 돌아갔는데, 단종이 우사간(右司諫)으로 불러 벼슬이 예조 참판에까지 이르렀다가, 단종이 폐위되자 성삼문의 모의에 참여하였다. 세조가 그의 재주를 애석하게 여겨 은밀히 타이르기를,

“네가 만약 처음 음모에 참여한 것을 숨긴다면 죄를 면할 수 있다.”

라고 하였으나, 하위지가 웃고 대답하지 아니하였다. 국문을 받을 때 그가 대답하기를,

“신하로서 이미 역적이란 이름을 둘러썼으니, 그 죄가 마땅히 죽을 것인데, 다시 무엇을 물을 것이 있습니까?”

라고 하였다. 세조는 화가 풀려 유독 그에게는 고문을 시행하지 않았다.

 

하위지는 자신의 이전 행위를 부인하면 죽음도 면할 수 있었는데도, 그는 구차하게 그러지 않았다. 지조를 목숨과 바꾼 것이다. 그의 지조는 모시던 군주와 동지들과 그리고 자기가 옳다고 믿는 신념을 배반하지 않았고, 목숨과도 바꾸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런 선비들만 지조가 있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지조는 임금에게도 있어야 하는 보편적 가치이다. 다음은 박동량(朴東亮 : 1569~1635)의 『기재잡기(寄齋雜記)』에 등장하는 고려말 이숭인(李崇仁, 1347~1392)에 대한 일화이다.

 

나라가 이미 바뀐 뒤에는 이숭인을 정몽주의 당이라 하여 영남으로 유배하였다. 황거정(黃居正)이 사자로 영남에 가서 하루 동안에 그에게 곤장 수백 대를 때리고 묶어서 말에 싣고 수백 리를 달리므로 드디어 공이 문드러져 죽었다. 그 일은 황거정이 윗사람(정도전을 말함)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일이다.

태종 때에 황거정이 좌명공신(佐命功臣)에 책훈되어 지위가 재상의 반열에 올랐다. 그때 어떤 사람이 그 사실을 태종에게 말하니, 왕이 크게 노하여,

“이숭인의 문장과 덕망은 내가 사랑하고 사모하여 그가 일찍 죽은 일을 한탄하였는데, 그를 죽인 일이 과연 이놈의 소행이었구나.”

라고 말하고, 드디어 훈호(勳號)와 벼슬을 삭탈하고 멀리 귀양 보내 그곳에서 죽게 하였다.

 

태종은 태조가 왕이 되기 전 글을 읽어 과거에 급제한 유일한 아들이고, 선비 교육을 받은 사람이다. 그라고 해서 지조가 훌륭한 가치라는 점을 모를 리 없었다. 이숭인을 죽인 일은 정도전이 살아 있을 때의 일이므로 그가 왕이 되기 전의 일이고, 죽은 사정을 자세히 몰랐을 것이다. 그래서 훗날 왕이 된 후 그를 죽인 일을 문책했는데, 자신이 정몽주를 죽인 일과 모순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일이 정권을 장악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결단에서 나온 일이라고 여긴다면, 훗날 이숭인을 죽인 사람을 문책하는 일은 덕과 지조라는 가치를 훼손할 의향은 없는 듯하다. 물론 황거정이 한때 태종의 정적이었던 정도전 사람이었음을 고려한다면 그에 대한 앙금이 없을 수는 없겠으나, 이 또한 덕과 지조 있는 선비를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된다는 명분이 작용했을 것이다. 지조 그 자체는 보편적 가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선비들이 모두 지조가 있었던 것만은 아니다. 이정형(李廷馨 : 1549~1607)의 『동각잡기(東閣雜記)』에 보면 지조 없는 선비들이 등장한다.

 

연산군이 한창 음탕한 짓을 할 때 문무 관리들을 가마를 매는 하인으로 충당하였다. 어떤 사람이 대간(臺諫)도 거기에 충당시킬 것인가를 물었더니, 연산군이 말하기를,

“대간도 충당시키지 않을 수 없다.”

라고 하였다.

이렇듯 연산군이 놀러 다니는 곳에는 가마를 메고 다니게 하고, 때로는 글짓기를 시험하여 상을 주니, 의관을 차려입는 선비의 욕됨이 지극하였다.

조광조(趙光祖)가 일찍이 중종에게 아뢰기를,

“연산군이 유생들에게 가마를 매게 하여도 선비라는 자가 부끄러운 줄을 모르고, 붓과 벼루를 소매 속에 넣고 다니면서 상을 받기를 바라기까지 하여 선비의 풍습이 크게 훼손되었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습니까?”

라고 하였다.

 

벼슬을 얻고 권세를 유지하며 상을 받기 위해서는 지조를 팽개친 선비들도 있었다. 옛 선비라고 해서 다 같은 선비가 아니었다. 이 또한 선비 가운데 군자와 소인이 섞여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지조는 지금도 필요한가?

현대 시인 조지훈(趙芝薰, 1920~1968)은 일찍이 「지조론」을 펼친 바 있다. 당시는 상대적으로 전통 시대와 거리가 가까워 그 말이 먹혔는지도 모르겠다. 21세기에 지조가 과연 통할까?

옛날의 지조란 대개 자신을 잘 돌봐준 주군에게 바치는 충성과 관련이 있다. 은혜에 대한 보답의 성격이 강했다. 지금은 옛날 사람처럼 모셔야 할 주군도 목숨 바쳐 섬겨야 할 대상도 없다. 각자가 삶의 주체가 되어 뜻을 이루기만 하면 된다. 회사나 조직에서 윗사람을 모시는 일도 지조 때문이 아니라 일종의 계약에 따른 약속일뿐이다. 그것을 어기면 자연히 그것에 상응하는 문책이 따른다.

하지만 지조의 현대적 의미는 자신이 올바르다고 믿는 신념과 가치를 고수하는 일과 관계된다. 지조가 없다고 말할 때는 옳다고 믿는 신념이나 가치가 아직 형성되지 않았거나 이미 형성된 그것들을 위반하는 경우를 말한다. 전자는 아직 배우는 학생들에게 해당하므로 비난하기도 어렵고 용서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는 비난받아야 마땅하다. 그가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정치가이거나 유명인사라면 더욱 그러 할 것이다.

문제는 우리 역사와 사회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거나 고루하여 편협 되고 잘못된 신념을 고수하는 일을 지조로 착각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이런 사람들이 의외로 많아 일을 그르치고 여론을 호도한다. 불행하게도 역사의 수레바퀴를 뒤로 굴리는 역할을 서슴지 않는다.

예로부터 지조 있는 분들은 구차하게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도 묵묵히 가치를 실현해 왔고 꿋꿋이 살아왔다. 그것은 그 만족과 즐거움이 자신의 내면에 있기 때문이다. 해서 올바른 역사·가치관을 바탕으로 삼아 지조가 있다면 남의 신뢰를 받기도 하지만, 때로는 가치관이 다르다는 이유로 세속의 잡인들로부터 비웃음과 따돌림을 당하기도 한다. 시류에 아부하는 사람들에게는 헛된 명성과 이익과 구차한 삶을 위해 지조를 헌신짝처럼 버리는 일이 다반사이다.

 

 

선비의 대의

 

공정과 상식이 통하는 사회

대선 때가 되면 각 후보 진영에서는 거창한 선거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운다. 가령 ‘정의로운 사회’나 ‘문민정치’ 또는 ‘나라다운 나라’ 또는 ‘공정과 상식이 통하는 사회’ 따위가 그것이다. 그것들은 일종의 대의명분(大義名分)이다.

대의란 마땅히 지켜야 할 큰 도리로서,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공자의 사상에 이른다. 그런 대의에 근거해 춘추를 저술했고, 논어에서도 의(義)를 자주 언급한다. 명분(名分)도 대의와 뜻이 유사한데, 사물의 명칭과 분수에 합당한 도리를 말하며 역시 공자의 정명(正名) 사상에 닿아 있다. 하지만 요즘은 대의명분이나 명분 그 자체가 어떤 일을 도모할 때 내세우는 표면상의 구실이나 이유라는 의미로 쓸 때가 많다. 원래는 좋은 뜻이지만 역사적으로 그것을 불순한 의도로 남용하여서 용어의 의미가 그렇게 변했다. 이런 용례는 한두 가지만이 아니다.

2022년 대선에서 ‘공정과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명분으로 내세운 쪽이 이겼다. 선거에서 이겼다고 끝날 일이 아니라, 깊이 고민해야 할 일이다. 왜냐하면 자기들이 내세운 대의명분을 스스로 부정하는 일이 생기면, 여론의 역풍을 맞게 되고 그것이 커지면 정권을 지탱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나라는 신령스러운 그릇과 같아 함부로 다룰 수도 없고, 본인들이 지킬 수 없는 말을 함부로 내뱉지 말아야 한다. ‘공정과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그저 정권을 잡기 위한 빈말이나 구실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대의와 청렴

청렴(淸廉)은 성품과 행실이 고결하고 탐욕이 없음을 말한다. 그렇지만 대개 물질적으로 탐욕이 없고 공정하게 처리하는 일에도 사용된다. 그래서 조선 시대 이상적인 관료의 모범으로서 청백리(淸白吏)가 있다. 이것은 일정한 기준에 의하여 의정부에서 뽑아 관리에게 주어지는 명칭이다. 여기에는 관직 수행 능력 외에 여러 기준이 있는데 그 가운데 청렴(淸廉)·근검(勤儉)이 있으며, 청백리는 모두 217명이 있다. 관리가 이 정도이니 관리가 아니면서 대의를 지키며 청렴하게 사는 선비는 수없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대의와 청렴은 개념적으로 다른 말이지만, 실제적 행위에 있어서는 동전의 양면처럼 분리되지 않는 덕목이다. 올바른 도리를 지키는 사람이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탐욕스럽게 될 수가 있겠는가? 게다가 큰 뇌물을 받아서는 안 되고 작은 뇌물은 받아도 된다고 여긴다면, 그것이 뇌물인 이상 이율배반이다. 그래서 해당 선비들은 털끝만큼도 사적인 탐욕을 부리지 않았다. 그가 만약 관리라면 사욕을 채우지 않고 공익을 위해 헌신하면 대의를 실천하는 일이 된다.

그러니 따로 크게 물려받은 재산이 없이 오로지 국가에서 제공하는 녹봉만으로 청렴하게 살림을 꾸려나가면서 가난한 친지나 이웃을 돌보다 보면, 그런 공직자는 늘 가난에 쪼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청렴에는 또 항상 청빈(淸貧)이라는 말이 따라붙는다. 이 글에서 소개하고자 하는 선비들도 청렴하면서도 청빈했고 대의에 충실했다. 아니 대의를 실천하려고 보니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 더 정확하다.

 

조선 시대 공직자의 대의

선비가 벼슬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 살 때는 대의를 실천할 일이 상대적으로 적고 어렵지 않다. 이것을 오늘날 식으로 말하면 대부분 개인윤리에 해당하는 문제이므로 갈등 요소가 상대적으로 적다. 하지만 남에게 은혜를 입었거나 신세를 졌을 때, 그것을 갚을 형편이 되었을때 되갚는 일도 대의 가운데 하나이다. 선비가 과거에 급제하거나 임금의 부름을 받아 벼슬길에 나아가면 지위와 녹봉이 주어지므로 은혜를 입는 일이 된다. 그 은혜를 대의로써 갚아야 하는 논리가 성립한다. 그래서 여기에 소개하는 선비들은 대개 관리들이다.

먼저 관리로서 대의에 충실한 선비 가운데는 이후백(李後白)이 있다. 이이의 석담일기에서 이렇게 전한다.

 

이후백이 인사를 맡은 기관장이 된 뒤로 공론을 숭상하고 청탁을 받지 않아 정사가 볼 만하였다. 비록 친구라 할지라도 자주 찾아가면 마땅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루는 친척이 찾아가 말끝에 관직을 구할 생각을 은근히 비추니, 이후백이 정색하며 사람들의 이름을 많이 기록한 종이 한 장을 꺼내 보였다. 모두 장차 벼슬을 시킬 사람들이었고, 명단에는 그 사람의 이름도 들어있었다. 이후백이 말하기를,

 

“내가 자네 이름을 기록하여 천거하려 하였더니, 지금 자네가 관직을 구한다 말을 하니 그렇게 된다면 공정한 도리가 아니다. 애석하다! 자네가 만약 그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벼슬을 할 뻔하였는데.”

 

라고 하였다. 그 사람이 그만 부끄러워서 돌아가 버렸다. 이후백은 언제나 벼슬 하나라도 시키려면 꼭 그 사람을 쓸 수 있는지 없는지 두루 물었고, 합당하지 못한 사람을 잘못 올렸다면 밤에 잠을 자지 않고,

‘내가 국사를 그르쳤다.’

라고 할 정도였다. 당시의 평론이

“이후백 같은 공정한 마음은 근래에는 비교할 사람이 없다.”

라고 하였다.

 

임용할 명단에 이미 올라와 있는 사람을 청탁했다고 그렇게 취소할 수 있는가? 하지만 누군가 일의 결과만 놓고 보면 그 일로 벼슬을 얻게 되었다고 오해할 수 있다. 이런 오해를 받으면 그 공정성은 훼손되고, 국가의 인사 정책이 신뢰를 잃는다. 얼마나 사려 깊은 행동인가? 대의는 누가 보더라도 떳떳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석담일기에서는 조광조(趙光祖)의 사례도 언급하고 있다.

 

조광조는 젊었을 때 김굉필(金宏弼)에게 배웠다. 자질이 매우 아름답고 지조가 견고·확실하였다. 세상이 쇠퇴하고 도가 미미해지는 것을 보고 분발하여 도를 실천하는 것을 자기의 사명으로 삼고, 행동을 법도에 맞도록 하였다.

그런 그를 속된 사람들이 웃고 손가락질하였으나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뛰어난 행실이 있어 추천되어 벼슬을 하게 되니 광조가 탄식하며,

“내가 벼슬과 녹봉을 구하지 않는데도 이 관직을 주니, 차라리 과거를 보아 임금을 모시는 것이 옳겠다.”

라고 하고, 드디어 과거를 보아 급제하여 조정에 들어갔다. 경연에서 늘 도덕을 숭상하여 인심을 바로잡고 성현을 본받아 지치(至治 : 세상이 지극히 잘 다스리는 상태)를 일으켜야 한다는 말을 반복하여 아뢰니, 그 말의 의미가 간절하였다.

광조는 마침내 죽음을 면하지 못하였다. 그는 죽음에 임하여 하늘을 우러러보고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임금 사랑하기를 아비처럼 했나니(愛君如愛父)

하늘의 해가 나의 충심을 비추리(天日照丹衷)”

 

이를 들은 나라 사람들이 모두 슬퍼하였다.

 

이 글은 조광조에 대한 율곡의 평가이다. 그는 사적인 욕심을 버리고 오로지 대의를 따라 나라와 임금이 잘 되기를 바랐다. 예나 지금이나 나라를 바르게 개혁하는 데는 언제나 반대 세력이 있어서 격렬히 저항한다. 조광조의 죽음은 개혁의 좌절을 의미한다.

또 나라가 위급한 때를 만나면 평소에 드러나지 않았던 충절과 대의가 발휘되기도 한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들도 그런 대의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이순신(李舜臣) 등도 그런 대의를 두고 왜적과 맞서 싸웠다. 잘 알다시피 이순신을 천거하고 그를 뒤에서 도와준 사람이 유성룡(柳成龍)이다. 김시양(金時讓, 1581~1643)의 부계기문(涪溪記聞)에서는 그에 대해 이렇게 전한다.

 

유성룡은 젊었을 때부터 문장과 학행(學行)으로 당시에 추앙을 받았다. 비록 오랫동안 정승의 지위에 있었으나 청빈하기가 가난한 선비와 같았다. 정치하는 것이 공평하고 밝으니, 사람들이 감히 사사롭게 벼슬을 구하지 못했다.

임진왜란 뒤 그는 영의정으로서 국정을 담당하여 쉴 새 없이 부지런히 경영하면서 마음을 태우고 정성을 다하였다. 국가에 이익이 될 만한 일이면 남의 말은 돌아보지 않았다. 악한 일을 제거하고 착한 일을 권장하여 차츰 자취가 드러나게 되더니, 마침내 이것으로 간사한 사람들의 참소를 입고 조정을 떠나 안동(安東)의 옛집으로 돌아가 10년 동안 벼슬하지 않고 지내다가 죽으니, 조야가 애석하게 여겼다.

 

나라가 위급한데도 자기만의 안위와 사사로운 이익과 명예를 탐하는 무리가 있었다. 관리는 물론이요 심지어 전장에서 싸우는 장수 가운데도 그런 자가 있었다. 이순신의 대의는 온 국민이 아는 바이지만, 그를 믿고 추천하고 후원한 유성룡의 그것이 없었다면, 이순신도 없었을 것이며 조선도 온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 한 사람의 대의가 이토록 중요하다.

이처럼 큰일을 두고 대의를 실천하는 일도 있지만, 자잘한 일에서도 실천하는 사례도 많이 있다. 다음은 그 가운데 하나이다.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의 필원잡기(筆苑雜記)에 보이는 사례이다.

 

판중추부사 조오(趙吾)가 합천(陜川) 수령이 되었을 때의 일이다.

여름에 농어가 많이 잡혀서 썩는 일이 있어도, 그것을 자기 집사람들에게는 조금도 맛보지 못하게 명하니, 사람들이 그 청렴에 탄복하였다. 누가 말하기를,

“그것이 썩어 땅에 버리는 것보다 차라리 집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먹는 게 낫겠는데, 이런 데서까지 청렴을 더럽히지 않으려 하는구나.”

라고 하였다.

조오의 집이 매우 가난하여 그가 예조 정랑이었을 때에는 이리저리 셋집을 전전하였으며 양식과 땔나무가 없었는데, 동료 가운데 쌀 3 말을 주는 이가 있어도 받지 않았다. 뒤에 공석에서 이 일을 자랑하니, 그 자랑을 비웃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평소 남의 청탁을 일절 들어주지 않았으며, 늙어서 시골집에 물러 나와서도 살림살이가 변변치 못했으나, 털끝만큼이라도 남에게 요구함이 없었다. 참으로 청렴하고 독실한 군자라 할 것이다.

 

공직자가 뇌물을 받지 않고 청렴하게 행동하는 것은 공정한 태도로서 공직자의 대의 가운데 하나이다. 이 같은 사례는 무수히 많다. 이렇게 대의를 지키는 일이 하나의 풍습이 되기도 하였다. 대의를 어기고 부와 명성과 벼슬을 얻은 일을 더러운 일로 여겼다. 다음은 그런 사례 가운데 하나이다. 박동량(朴東亮 : 1569~1635)의 『기재잡기(寄齋雜記)』에 보인다.

 

의정부의 종 정막개(鄭莫介)는 간사하고 교묘한 말재주로 박승문(朴承文 : 朴永文의 오기로 보임)·신윤무(辛尹武)를 일러바치고 당상관까지 되었었다. 권벌(權橃)이 지평(持平)으로 있으면서 단독으로 그를 죽여야 할 죄상을 임금께 말했다. 비록 임금의 허락을 받지는 못하였으나 이로부터 여러 사람이 모두 정막개를 천하게 여기고 미워하여 사람 축에 들지 못하였다.

그의 집이 사복시(司僕寺 : 궁중의 말이나 가마 따위를 관리하는 기관) 냇가에 있었는데, 붉은 띠를 띤 조복(朝服) 차림으로 일하고 아침저녁에 시장 거리에 나서면, 동네 아이들이 곳곳에서 떼를 지어 기왓조각을 던져 쫓으면서 큰 소리로,

“고변한(고자질한) 정막개야, 붉은 띠가 가소롭구나.”

라고 하였다. 막개가 그 괴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쫓겨서 돌아갔다. 아이들이 늘 그렇게 했고, 사람들도 침을 뱉으며 욕하였는데 마침내 굶어 죽었다.

 

정막개는 원래 의정부에 소속된 노비였다. 중종 때 전 공조판서 박영문(朴永文)과 전 병조판서 신윤무의 집을 자주 드나들다가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고 역모를 꾀한다고 고변(告變 : 정권을 뒤엎으려는 반역 행위를 고발함)하여, 박영문의 재산과 노비를 상으로 받고 상호군에 제수된(임명된) 인물이다. 남의 얘기를 엿듣고 그 진상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역모를 꾀한다고 고변하는 일은 대의에 어긋나는 일이다. 민심이 그것을 용서하지 않았던 사례이다. 만약 대의로 고변했다면 주어지는 상훈도 거부해야 마땅하다.

 

현대 사회와 대의

오늘날의 대의란 무엇일까? 철학이나 종교적 가치에 따라 다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어떤 사상을 막론하고 인류의 보편적 가치는 대의가 될 수 있다. 가령 인류의 생명과 인권을 지키는 일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집단이나 개인 사이 갈등을 일으킬 때 지지하는 가치에 따라 대의가 다를 수 있다. 조선 시대는 같은 문화권 속에서 유교적 가치관에 충실했으므로 가치 갈등의 소지가 적었지만, 현대에는 다양한 문화와 종교와 철학을 가진 사람들이 섞여 살아서 각자가 주장하는 대의가 다를 수 있다. 이는 절대적 가치가 존재할 수 없으니 대의 또한 그러한 까닭이다. 그러므로 공동체 안에서 모종의 정치력을 발휘하여 합의를 보든지,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는 다수 국민 또는 인류의 복지에 이바지하는 일이 대의가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조선 시대 선비들이 지킨 대의는 필요 없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시대를 막론하고 보편적 가치는 여전히 필요하므로 오늘날 우리가 이어나갈 여지는 충분하다. 가령 공직자의 대의 같은 것이 그것이다. 그래서 뇌물을 받거나 비리를 저지르는 일을 수치로 여겨야 한다. 이는 공직자만이 아니라 누구나 그래야 하는 가치이다. 특히 선거판에서 가짜 뉴스를 퍼트리거나 상대 후보의 약점을 침소봉대하는 일은 대의가 거리가 먼 비열한 꼼수이다. 일반 개인도 자기의 이익을 위해 조직이나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은 물론이요, 공동체의 안위와 이익을 돌아보지 않고 사리사욕만을 위해 입신양명하는 따위도 애초부터 대의와 거리가 너무 멀다. 대의란 공동체를 위한 가치이다.

 

엄격한 출처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

무슨 일이든지 때를 아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주식이나 부동산 투자는 물론이고, 농사를 짓거나 물고기를 잡을 때도 그렇다. 매사의 성패가 때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주역을 공부할 때 “때를 아는 일이 역을 배우는 핵심이다(知時, 學易之要).”라고 누누이 강조하였다.

우리 전근대 사회에서 선비가 공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란 벼슬밖에 없었다. 하지만 벼슬하는 일만이 능사가 아니다. 훌륭한 임금과 조정 아래에서는 자기 능력에 따라 벼슬하는 일이 순탄하지만, 폭군이나 나쁜 조정을 만나면 목숨까지 위태롭고, 관리로서 역량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다. 자기의 뜻과 포부를 펼치는 일은 고사하고, 서로 눈치 보며 목숨과 지위를 보전하든지 아니면 적극적으로 권력자에게 아첨하여 출세에 목매기도 한다.

바로 여기서 벼슬길에 나아가야 하느냐 물러나야 하느냐 하는 선택이 저절로 강요된다. 벼슬하려는 사람에게도, 벼슬하고 있는 사람에게도 해당하는 선택이다. 오늘날이라고 해서 다를 것은 없다. 많은 사람이 자기 직장에서 뜻과 포부를 펼칠 수 있는지 없는지 따져 본다. 연봉은 높아도 회사에서 노예처럼 부려 먹는 데 대한 불만, 내 뜻과 생각은 전혀 개입할 여지가 없고 오로지 주어진 일만 해야 하는 회의감, 상사의 인격적 모독, 내가 맡은 일에 비해서 턱없이 낮은 연봉 등을 고려해서 진퇴를 고민하는 직장인들이 많다. 나아가고 물러나는 문제는 자기 사업을 하지 않는 한 누구에게나 현재진행형이다.

 

선비들의 출처관

벼슬길에 나아가고 물러나는 기준과 방식을 통틀어 보통 출처관(出處觀)이라 부른다. 이 출처관은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고, 유교 경전에는 이런 출처관이 자주 보인다. 가령 논어의 “나라에 도가 있을 때 벼슬해서 녹봉을 받지만, 나라에 도가 없을 때 벼슬해 녹봉을 받는 일을 수치이다(「헌문」).”라거나 또 “나라에 도가 있을 때는 벼슬하지만, 나라에 도가 없으면 거두어들여 숨을 수 있다(「위령공」).”라는 표현이 그것이다.

하지만 물러나는 일만이 능사는 아니다. 논어에 이런 말도 있다. 곧 “나라에 도가 없을 때도 화살과 같고, 나라에 도가 없을 때도 화살과 같다(「위령공」).”라고 하는데, ‘화살과 같다’라는 말은 곧다는 뜻이다. 사실 사람이 곧으면 나라를 바로잡을 수도 있지만,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해서 나라가 어지러울 때 나아갈 수도 있고 물러날 수도 있다. 그것은 각자의 선택의 문제이다. 하지만 뜻을 펼칠 수 없으면 물러나는 것이 현명하다.

이처럼 선비들이 벼슬을 하느냐 마느냐 하는 기준은 자기 뜻을 펼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데 있다. 임금이 포악하거나 어리석거나 유약하여, 그 주위에 권신(權臣)이나 아첨하는 신하가 많으면 뜻을 펼치기 어렵다. 때로는 자신이 섬기던 군주의 자리를 누가 빼앗으면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신념에서 물러나기도 하고, 자기에게 공이 없어도 스스로 물러나기도 한다. 비록 임금이 못나도 자신의 능력을 믿고 임금을 설득해 정치를 잘할 자신이 있으면 나아가기도 했다. 반면 임금이 현명하고 훌륭한 나라를 만들려는 의지가 있으면 뜻을 펼치려고 선비들이 몰려나온다.

그런데 벼슬길에 나아가고 물러나는 기준이 오로지 녹봉과 지위와 권세에만 있다면, 탐욕스러운 소인일 뿐이다. 뜻있는 선비가 취할 바가 결코 아니다. 이렇듯 참된 선비는 나아가고 물러나는 출처관에 엄격했다. 이에 대해 이이는 석담일기에서 “선비의 출처는 구차스러운 일이 아니다. 임금의 일을 성취하여 백성에게 혜택을 주는 것이 군자의 소원이나, 그의 말이 쓰이지 않고 도가 행해지지 않아서 부득이 물러가는 것이지 물러나는 일만이 본래의 뜻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나아가고 물러날 때를 알았던 선비들

조선 전기를 통틀어 볼 때 선비들의 출처가 엄격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정변과 사화(士禍) 때문이다.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 연산군의 폭정, 중종 때의 기묘사화, 그리고 명종 때가 그렇다. 특히 명종 때는 더욱 심했는데, 당시 명망 있는 선비 가운데서 서로 대비되는 출처방식에는 벼슬에 나아가는 것과 산림에서 처사로 은거하는 것이 있었는데, 전자의 대표하는 인물은 이황(李滉)이고 후자의 그것은 조식(曺植)·서경덕(徐敬德) 등이다.

이황의 출처에 대해서 우선 자신의 말을 들어 봄이 좋겠다. 해동잡록에 수록된 그의 「도산기(陶山記)」에 나오는 말이다. “아! 나는 불행하게도 먼 시골에 태어나서 투박하고 고루하여 들은 것은 없었지만, 산림 중에 즐거움이 있다는 것은 일찍 알았다. 그러나 중년에 들어 망령되이 세상일에 나아가 바람과 티끌이 뒤엎는 속에서 여러 해를 보내면서, 스스로 돌아오지도 못하고 거의 죽을 뻔하였다.” 세상일이란 바로 벼슬길을 말한다. 벼슬하는 일이 그리 탐탁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바로 권신들의 횡포로 뜻을 펼치기 어려웠던 탓이다. 이런 퇴계의 이야기는 박동량(朴東亮 : 1569~1635)의 『기재잡기(寄齋雜記)』에도 보인다.

 

대사헌 이해(李瀣)는 퇴계의 형이다. 일을 추진하는데 과감하여 항시 공명을 세우기를 장담하였다. 이기(李芑)가 인종 초기에 새로 우의정에 임명되자 그가 탄핵하여 그것을 좌절시켰다. 그는 퇴계에게 글을 보내어,

“언제나 한가하게 물러서 있기만 하면, 일평생 배운 것을 언제 펼칠 것이냐?”

라고 책망하자, 퇴계가 답서를 보내어,

“고향으로 돌아와 분수를 지키십시오.”

라고 권고하기도 하였다. 훗날 형이 모함을 받아 죽자, 퇴계의 벼슬에서 떠나려는 뜻은 이때부터 더욱 굳어져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또 율곡의 석담일기에는 이렇게 전한다.

 

이황은 벼슬하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고 예안(禮安)에 물러나 있으며 나오는 일을 어려워하고 물러나기를 쉽게 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태산북두와 같이 우러러보았다. 이때 윤원형이 죽고, 사림은 교화의 정치를 바라고 있었으므로, 이황을 부르는 명령이 내리자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였다. 이황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 이황은 산중에서 도를 지켜 인망(人望)이 날로 무거워 명종이 여러 차례 불렀다. 그는 말세에 유학자가 일하기 어렵고, 임금의 마음 역시 잘 다스려 보려는 정성이 부족하며 대신 또한 학식이 없고 한 가지도 믿을 것이 없었기 때문에 작록을 굳이 사양하고 기어이 물러가곤 했다.

 

이것을 종합하면 우리는 이황의 출처관을 조금은 엿볼 수 있다. 형이 모함으로 죽고 또 권신들이 정권을 잡아 정치를 좌지우지하므로 자기의 뜻을 펼칠 수 없음을 알아, 웬만하면 정치에서 발을 빼려고 했으나, 임금의 부름을 뿌리치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응한 일로 보인다. 벼슬이나 권세가 탐나서 나온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 가운데는 권신 윤원형이 죽어 뜻을 펼칠 수 있는 희망을 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 또한 녹록하지 않아 끝내 도산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황과 대조적으로 아예 불러도 나오지 않은 이들도 있었으니 그 대표적 인물이 조식이다. 앞의 율곡의 책에서는 그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명종 때에 성수침(成守琛)과 함께 조식을 불러 단성(丹城) 현감에 임명했다. 이때 권신이 권세를 잡고 문정왕후를 미혹시켜 사림의 의기를 꺾었으므로 공론을 빙자하여 산림처사를 천거해 쓴다고 하였으나 유명무실할 뿐이었다. 그래서 조식이 벼슬에 뜻이 없어 상소하여 사직하고, 겸하여 폐단을 말하였다. 명종 말년에 경서에 밝고 몸을 수양한 선비를 천거하라 하여 조식은 이항(李恒)·성운(成運)·한수(韓脩) 등과 같이 천거 받아, 임금이 불러보며 정치할 방침을 물었으나 조식은 끝내 벼슬을 사양하고 돌아갔다. 조식이 시골로 돌아오니 청명한 명성이 더욱 퍼졌다. 삼가 생각해보건대, 조식은 세상을 피하여 홀로 서서 뜻과 행실이 높고 깨끗하니, 진실로 한 세대의 산림처사이다.

 

윗글은 조식이 처사로서 끝내 벼슬을 사양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당시 조식과 교유하며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은 처사는 또 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성운(成運)이다. 권별(權鼈 : ?~?)의 『해동잡록(海東雜錄)』 에 따르면, 그는 1545년 형이 을사사화로 화를 입자 속리산에 은거했고, 그 후 참봉으로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으며 누차 임관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그는 이지함(李之菡)·서경덕(徐敬德)·조식·성수침(成守琛) 등과 교유하며 학문에 전심했다고 전한다. 또 신흠(申欽 : 1566~1628)이 쓴 『상촌잡록象村雜錄』에서도 그는 나면서부터 아름다운 바탕이 있어 일찍이 세상에서의 틀을 벗어났는데, 그의 형 성우(成遇)가 을사년 난을 당해서 비명에 죽자 이때부터 더욱 세속의 공명에 뜻이 없어 속리산 아래에 숨어 살다가 나이 80여 세에 죽었다고 전한다.

성수침 또한 이정형(李廷馨 : 1549~1607)의 『동각잡기(東閣雜記)』에서 여러 번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숙배만 하고 취임은 하지 않았고, 유일(遺逸 : 산림에 숨어 사는 학문이 높은 선비)로서 여러 번 관직에 제수되어도 매양 병으로 사양하고 숨어 있어 지조를 닦아서 옛 도를 힘써 행하여 궁하게 살다가 몸을 마쳤으니, 실로 일국의 착한 선비요, 당대의 일민(逸民 : 학문과 덕행이 있으면서도 세상에 나오지 않고 사는 사람)이라고 전하고 있다.

화담 서경덕에 대해서는 더 소개하지 않겠다. 뒤에서 다른 주제로 따로 다루겠다. 이렇듯 당시의 시대적 환경이 이 선비들이 뜻을 펼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벼슬을 받아들여 이리저리 처세술을 발휘하며 자기 목숨과 지위를 보전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뜻있는 선비가 구차하게 취할 태도가 못 된다. 그래서 모두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들은 모두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처사로 산림에 머문 사람들이었다. 벼슬이 싫어서가 아니라 나아갈 때가 아니라는 판단에서였다. 특히 명종 연간에는 권신과 간신들이 국정을 좌지우지하면서 많은 선비가 억울하게 화를 당했기 때문이다. 나가 봐야 뜻을 펼칠 수 없다면 나가지 않는 것이 옳다!

 

율곡의 출처관

다음은 율곡 이이의 출처관이 보이는 글이다. 그의 석담일기에 보이는 율곡과 송익필(宋翼弼), 또 그와 유몽학(柳夢鶴)의 대화이다.

 

익필 : 숙헌(叔獻 : 율곡의 자)이 조정에 머문 지 두어 달인데 무슨 업적이 있었는가?

율곡 : 비록 나라의 정권을 맡은 사람이라도 두어 달 만에 효과를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인데, 하물며 말은 올리지만 시행하지 못하는 사람은 어떻겠는가?

익필 : 사람들이 숙헌이 이번에 오래 머무니 이전에 물러나려고 한 것과는 다르다고 의심하고 있더라.

율곡 : 물러가려 하나 혹시 임금의 마음을 돌릴 수 없을까 염려되고, 머물러 있고자 하나 내 말이 쓰이지 않으니 거취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익필 : 식자들은 임금의 마음을 결코 돌릴 수 없다고들 하던데.

율곡 : 내가 듣기에는 ‘성현은 그와 같이 단정적인 말을 하지 않는다.’라고 했네.

몽학 : (이이를 보고) 엎어지는 것을 붙들고, 위태한 것을 도우려는 뜻이 있으면 아무리 구차스럽다고 해도 물러갈 일이 아니지.

율곡 : 구차하다는 것은 자기를 굽히는 것이다. 자기를 굽히고서 엎어지는 것을 붙들고 위태한 것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은 나는 아직 듣지 못했다.

몽학 : 비록 크게 일하지는 못하더라도 때와 일을 따라 도와서 나라가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지 않게 하는 것도 역시 하나의 도리일 것이다.

율곡 : 그것은 나라의 정권을 맡은 대신의 일이다. 대신은 이미 중임을 맡았으니 마땅히 위태함을 보면 목숨을 바쳐야 할 것이요, 물러나지는 못할 것이나, 대신이 아니면 기미를 보아 일어설 것이요, 지조를 잃어서는 안 될 것이다.

율곡 : (어떤 사람에게) 내가 두어 달을 머무는 동안 어떤 사람은 오래 머문다고 의심하고 어떤 사람은 속히 물러날까 염려하니, 식견이 중용을 얻기란 어찌 어렵지 않은가?

 

선비가 벼슬길에 올랐어도 임금이 자기의 주장을 받아들여 뜻을 펼칠 수 없으면 사직하고 물러나는 일은 다반사이다. 이이 또한 그런 뜻에서 사직한 적이 몇 번 있었다. 이 글에는 그의 출처에 대한 세평이 간접적으로 들어있고, 이이 본인의 고민과 생각이 잘 나타나 있다. 정권의 성격이 확실하다면 출처를 결정하는 일이 어렵지 않다. 그렇지 않다면 그의 말대로 중용을 취한다는 게 참 어렵다.

 

선비들의 출처관을 본받자

선비들의 출처관(세상에 나서고 나서지 않는 것에 대한 생각)을 기준으로 현대의 다수 정치인을 보면 참으로 천박하다. 물론 민주국가라 누구에게나 참정권은 있지만, 대개는 자신의 욕심에 따라 대중의 인기를 끌어 모으고 그것을 이용하여, 때로는 비상식적으로 이름을 알려 정계에 진출한다. 어떤 이는 자신이 경영하는 사업체의 이득을 위해서, 어떤 이는 조직의 이익을 위해 진출한다. 그게 직능의 이해관계에 따른다고 양보해도, 우리나라는 특수 직종 출신에 편중되어 있다. 때로는 개인의 노력으로 명망을 가진 자가 섣불리 정치계에 발탁되었다가 명망도 훼손되고 추하게 몰락하는 모습도 자주 본다. 더 추한 경우는 정권의 얼굴마담으로 불려 나왔다가 아무런 역할도 못 하면서, 그저 족보에 관직 이름 하나 기록하는 인사도 있다. 본인의 하자 때문에 스스로 물러나는 일은 있어도 뜻을 펼치지 못해 그런 경우는 거의 없다.

 

배우기를 좋아함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입시 공부에 시달리는 우리나라 청소년들에게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라고 말하면 정신 나간 소리라고 비웃을 것 같다. 학교에 다니면서부터 공부하라는 소리를 줄곧 들어 왔으니 공부가 즐거울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런 강요가 아닌 아이의 호기심을 자극하여 배움의 즐거움을 맛보게 한 부모가 있다면, 그의 자녀들은 틀림없이 공부를 좋아할 것이다.

이와 달리 필자는 한 번도 공부하라고 강요받아 본 적이 없이 청소년기를 보냈다. 공붓벌레여서 그런 것은 전혀 아니다. 필자가 살았던 당시 시골에서는 학원도 과외도 없었고, 대학의 진학률도 낮고 그에 따른 경쟁도 적어서, 또 대학에 보낼 형편도 못 되어 어릴 때부터 공부를 강요하는 집은 드물었다. 그래서 농사일을 돕거나 자유롭게 자연 속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그 경험이 적어도 공부에 대한 거부감은 만들지 않았다고 확신한다. 훗날 상급학교에 진학해 공부에 흥미를 느꼈을 때, 수업 중간의 10분 휴식도 아까워 책을 봤던 기억이 있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이 나이가 될 때까지도 책을 손에 놓지 않고 연구한다. 이렇게 배우기를 좋아하는 동력은 배움의 즐거움이다.

 

왜 배우는가?

청소년들이나 대학생들에게 왜 배우느냐고 묻는다면 대부분 원하는 직장을 얻기 위해서라고 대답할 것이다. 요즘 같아서는 원하는 직장은 아니더라도 안정적 직장이라도 얻으면 좋겠다는 게 솔직한 대답일 것이다. 물려받은 재산이나 사업체가 없는 청년은 어딘가에 자기 노동력을 팔아야만 먹고살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진 게 없는 사람은 배워야 먹고 살 수 있다. 세계 3대 성인 가운데 한 사람인 공자도 보잘것없는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먹고 살기 위해 열심히 배웠다. 그래서 자질구레한 일도 마다하지 않고 배워서 성인이 된 분이다. 그것을 유학의 용어로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 아래를 배워 위에 달한다.)이라 부른다.

생각해보라! 일차적으로 남의 도움 없이 스스로 배워서 생계나 닥친 문제를 해결했을 때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그래서 논어 첫머리에도

“배우고 날마다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공자의 삶에서 우러나온 독백일 것이다. 가난한 청년이 배워서 생계도 해결하고 더 나아가 훌륭한 인격을 소유한 인물이 된 일이 어찌 기쁘지 않았겠는가? 필자는 생계 문제를 도외시하고 처음부터 인격 함양이나 고상한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 공부한다는 말은 현대 사회에는 공허한 말이라고 믿는다. 물론 인격의 향상과 무관하게 생계만을 위해 공부하는 일도 비루하지만, 그것에 전혀 신경 쓰지 않은 공부도 허황하고 무책임하다.

 

선비들의 배움

조선 선비들에게도 그런 고민이 분명 있었다. 이이의 격몽요결에 보면 그 흔적이 보인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이 없는 선비들은 오로지 과거시험에 급제하여 벼슬해야만 제대로 먹고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선생은 선비가 벼슬길에 나아가 큰 뜻으로 바른 정치를 할 능력과 재주가 없으면 높은 벼슬을 해서는 안 되고, 생계만을 위해서는 낮은 직책에 만족해야 한다고 하였다. 맹자도 그런 경우에는 야경꾼이나 문지기로 생계를 해결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렇더라도 대다수 선비는 호구지책보다 세상을 위해 큰 뜻을 세워 포부를 펼치기를 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학문과 덕을 쌓아야 하니, 배움이 문제가 된다. 논어의 첫 장도 또 같은 유가 계통인 순자의 첫 장도 배움에 관한 말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 배움의 진정한 의미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이다. 곧 자신의 덕을 이루기 위함이지, 남에게 팔려 재물과 명성과 권세를 노리는 ‘위인지학(爲人之學)’은 아니다. 이렇듯 배움의 가장 이상적 목표는 공자처럼 성인이 되는 일이다.

조선 시대만 해도 이렇게 자신의 덕을 향상하기 위해 배우는 문화 전통이 있었다. 그래서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비록 가난하게 살아도 자신의 덕과 인격을 함양하는 배움에만 즐기는 선비들도 있었다. 입신양명하는 출세에 의미를 두지 않고, 배움을 즐겨 성현이 되는 일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은 배움의 즐거움을 잘 모른다. 그들은 그것을 괴로운 일로 여기지만, 자신의 덕과 정신적 성장을 맛본 사람들은 그 즐거움이 증폭되어 배움에 더욱 빠져든다. 앞으로 소개할 선비들은 이렇게 배움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벼슬길에 나아간 사람도 있고 나아가지 않은 사람도 있다. 그것은 해당하는 사람의 출처관과 선택의 문제이지, 배움이 어느 한쪽만 선택해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배움을 좋아했던 선비들

조선 시대 대 학자로 불리는 분들은 하나같이 배움을 좋아했다. 그분들에 대해서는 대부분 잘 알고 있어서 다 소개할 필요는 없겠고, 특이한 사항과 아울러 숨은 인물을 발굴하는 차원에서 소개하겠다.

선비들의 공부 방법은 대개 독서와 수양이다. 이 둘은 동전의 양면처럼 분리되지 않는다. 하지만 모든 독서가 꼭 수양만을 위한 게 아니다. 전문 지식과 관련된 것도 있다. 그래서 배우는 내용이란 대개 유교 경전과 문장(문학)과 역사에 한정되지만, 천문(역법)·지리·문자(음운)·병법·산법(수학)·의술·기예(음악·글씨) 등에 능한 선비도 꽤 있다. 폭넓게 배우는 선비들은 이것들을 두루 섭렵하였다. 때로는 불교와 도교 및 복서(卜筮)에 조예가 깊은 선비들도 있었다. 호학과 관련지어 몇 가지 사례만 소개하겠다.

조선 전기 문신인 조수(趙須)는 일찍이 스스로 말하기를 “총명한 것이 많이 읽는 것만 못하다. 나는 모든 글에 있어서 반드시 백 번씩 읽었다. 그래서 비록 늙었으나 읽은 내용을 잊지 않고 있다.”라는 말이 해동잡록에 전한다. 배움을 좋아하지 않으면 하나의 책을 백 번 반복해서 읽는 일은 쉽지 않다. 좋아서 꾸준히 하는 일은 천재의 능력을 따라잡는 길인 것 같기도 하다.

또 평생 늙어 죽을 때까지 배운 이도 있다. 어숙권(魚叔權)의 『패관잡기(稗官雜記)』에 따르면 조선 전기 유순(柳洵)이 글 읽기를 좋아하여 늙어서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일찍이 보지 못한 글을 읽다가 탄식하기를, “늙은 내가 하마터면 이것을 알지 못하고 죽을 뻔하였다.”라고 하였다고 전한다. 배우기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알 수 있는 글이다.

또 책을 많이 읽은 사람 가운데는 조선 중기 문신인 유희춘(柳希春)이 있다. 김시양(金時讓, 1581~1643)의 부계기문(涪溪記聞)에서는 그가 곤궁하게 살아가면서도 만 권이나 되는 서적을 독파하였다고 전하고, 이이의 석담일기에서는 그는 널리 읽고 기억을 잘하여 경서와 사기를 다 외웠다고 전한다. 또 윤근수(尹根壽 : 1537~1616)의 『월정만필(月汀漫筆)』에서도 임금 앞에서 성리대전(性理大全) 인용하였는데, 반 장을 외어 나가도록 한 자도 틀리지 않았다고 전한다.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았다면 그 많은 책을 읽고 외우지는 못했을 것이다. 여러 글에 등장하는 점을 보면 그가 독서를 즐기면서 많이 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배움이란 굳이 글공부에만 한정하지 않는다. 우리는 세종 때 아악을 정리한 사람으로 박연(朴堧)을 잘 알고 있는데, 그가 처음부터 음악을 잘하는 사람으로 오해하고 있으나 실은 그렇지 않다. 성현(成俔 : 1439~1504)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대제학 박연은 영동(永同)의 유생이다. 어려서 향교에서 수업할 때 이웃에 피리 부는 사람이 있어서 독서 하는 틈틈이 피리를 익히니, 그 지역에서 모두 훌륭하다고 인정하였다. 그가 과거 보러 서울에 가다가 장악원의 노련한 악사에게 교습을 받는데 선생이 크게 웃으며

“음악이 촌스러워 절주에 맞지 않고 나쁜 습관이 이미 굳어져 고치기 어렵다.”

라고 말하니, 박연이 말하기를,

“그렇더라도 가르침을 받겠소이다.”

라고 하고, 나날이 왕래하여 배우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수일 만에 악사가 들어 보고,

“선비님은 가르칠 만하다.”

라고 말하고, 또 며칠 뒤 들어 보고,

“연주의 틀이 제대로 잡혔으니, 장차 크게 될 것 같다.”

라고 하더니, 또 며칠 뒤에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무릎을 치고 말하기를,

“나도 도저히 따라잡지 못하겠다.”

라고 하였다. 그 뒤에 과거에 급제하여 또 금슬(琴瑟: 악기 이름)과 여러 음악을 익히니, 정밀하고 절묘하지 않음이 없었다. 세종의 총애를 얻어 음악에 관한 일은 관장하였다.

 

우리는 흔히 박연을 음악가로만 안다. 그도 그럴 것이 교과서에도 그렇게 소개되기 때문이다. 이는 반만 맞는 말이다. 그는 유생으로서 과거를 준비한 선비였다. 대제학이란 직책은 원래 학식이 높은 학자에게 내리는 벼슬임을 생각해보면 잘 알 수 있다. 그는 애초 음악을 취미로 배웠고, 전문 연주자인 장악원의 악사가 볼 때는 촌스러운 초보자에 불과했다. 그러던 그가 자기보다 신분이 낮은 악사에게 배우는 일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피나는 노력으로 훌륭한 음악가가 되었다.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결코 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배움을 좋아하는 데는 그 내용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요즘 아이들은 운동이나 예능을 배우기 좋아한다. 단순 논리로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좋아하는 과목을 순서대로 말하라면 일등이 단연코 체육이다. 거꾸로 싫어하는 과목을 순서대로 말하라고 하면 아마도 수학이나 국어가 아닐까 싶다. 아이러니하게도 대학입시에서 국·영·수 과목의 비중이 제일 높다.

이처럼 선비들이 배우기 좋아하는 데도 우선순위가 있을 것이다. 유학에서는 자신의 덕을 쌓기 위해 배우는 일을 최고로 여기고, 이에 배움을 좋아한다는 것은 자신의 덕을 쌓는 일과 통한다. 그래서 앞서 소개한 박연의 일화처럼 누구에게서라도 덕의 향상에 도움이 된다면 배우려고 하였다. 다음은 정홍명(鄭弘溟 : 1582~1650)의 『기옹만필(畸翁漫筆)』 속의 일화이다.

 

조광조(趙光祖)는 8~9세 때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다. 하루는 말리는 육포를 고양이가 물고 갔는데, 김굉필은 여자 하인이 그것을 잘 지키지 않았다고 화를 내며 야단쳤다. 그 육포는 어머니의 반찬으로 드리려던 것이었다. 이때 그것을 본 조광조가 천천히 말하기를,

“선생님의 어버이를 위하는 정성은 진실로 지극합니다만, 하인이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선생님께서 그 일로 너무 화를 내시니 좀 온당치 못할까 합니다.”

라고 하였다. 김굉필이 놀라고 탄복하며 말하기를,

“네가 어린아이로 내게 와서 공부하는데 내가 도리어 너에게 배웠다.”

라고 하면서, 종일토록 데리고 칭찬하였다고 한다.

 

조광조가 선생께 바른 도리를 말하는 일도 대단하지만, 김굉필이 어린 제자에게 배우는 일도 배움을 좋아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조광조나 김굉필 모두 몸소 수양하여 도리를 실천하는 일을 학문의 으뜸으로 여기는 선비들이다. 김굉필은 소학의 가르침을 따라 몸가짐에서 한 점 흐트러짐이 없이 살았던 분이고, 유학 본래의 가르침대로 지치(至治)의 실현, 즉 말하자면 이상적인 나라로 만들려고 했던 분이 조광조이다.

하지만 책 읽기를 너무 좋아하여 일찍 죽은 선비도 있다.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의 필원잡기(筆苑雜記)에 보인다.

 

성간(成侃)은 어려서부터 널리 보고 많이 기억하며 읽지 않은 서적이 없었다. 사대부나 친구의 집에 희귀한 서적이 있다는 얘기를 들으면 반드시 구해보고야 말았다. 항상 장서각 속에 파묻혀 주변의 서적을 밤낮으로 다 열람하니, 동료들이 책을 너무 좋아하는 성벽이 있다고 놀렸다. 그러나 독서에 과로하여 몸이 여위고 파리하게 되어 나이 30에 숨을 거두었으니, 참으로 애석하다.

 

배움을 좋아하다 건강을 잃은 사람이 비단 한두 사람뿐이겠는가? 오래 읽으려면 몸도 건강해야 한다. 좋아하는 일도 건강을 잃으면 다 소용없는 일이 되고 만다. 만고의 명언이다.

 

배움을 즐겨라

배움을 좋아하는 일은 선비의 기본 자질이다. 이 세상에 배우기를 싫어하는 사람치고 현명한 사람은 없고, 성공한 사람도 없다. 공자 같은 이는 배워서 성인이 된 분이다. 배움이야말로 사람을 위대하게 만드는 마법이다.

그런데 배우는 일이 즐겁지 않다면 그것은 불행한 일이다. 그 까닭은 애초 배움을 잘못 선택한 데서 온 것도 있고, 억지로 하기에 힘들고 고단해서 그럴 수도 있다. 여기서 고단하고 힘들다는 생각이 드는 까닭도 대개 배우는 내용이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논어에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보다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보다 못하다(「옹야」).”라는 말이 있고, 우리나라 해병대 표어 가운데 하나에도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는 말이 있는데, 이 두 말에는 공통점이 들어있다. 억지로 하는 일보다는 즐기면서 하는 일의 성과가 크다는 사실이다.

사실 누구든 노는 일에는 지칠 줄 모른다. 즐겁기 때문이다. 문제는 현대인들은 생존을 위해 즐겁지 않은 일도 해야 한다. 그 대안 가운데 하나가 일과 취미를 병행하는 일이다. 더 좋게는 본업을 즐기는 방법은 좋아하는 일을 선택하면 된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선비들의 넓은 도량

 

 

정치보복

우리나라 현대 정치사를 되돌아볼 때 독재정권일수록 정치보복이 심했다. 지금도 인터넷 방송에서 오래전 인기를 누렸던 정치 드라마를 방영하는데, 일하다 쉴 때 필자의 소싯적에 있었던 일도 생각나서 가끔 본다. 독재정치의 특성이 그렇기는 하지만, 독재자가 정권을 잡았을 때 선거에서 진 상대 후보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은 것은 물론, 정당이 다르다면 이전 정권의 관계자를 괴롭히거나, 또 해당 정권을 비판하는 정치인이나 언론인 학자가 있다면, 반드시 정치공작을 통해 죽이거나 사회적으로 망신을 주어 매장하였다.

물론 누구든 범죄를 저질렀거나 잘못이 크다면 정식 절차를 거쳐 벌을 받아야 한다. 법 앞에 누구나 평등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재자는 법 위에 군림하면서 상대의 약점을 잡아 처벌하는 일은 비열할 뿐만 아니라, 없는 죄도 만들어 처벌하니 공정과는 거리가 너무나 멀고, 그 도량이 밴댕이 속보다도 작다고 할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런 일로 수많은 인재가 희생당했고, 그 희생은 거기서만 끝난 게 아니라 후대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게 불행이라면 불행이다.

 

군자와 소인의 도량

이러니 조선 시대라고 예외는 아니다. 도량이 좁은 왕이 다스리고 간신들이 득세할 때는 선비들의 목숨이 파리 목숨과 다를 바 없었다. 좋은 정치를 하려다가 간신의 모함을 받아 죽은 선비들, 국난을 당해 공을 세워도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고 오히려 임금의 의심을 받아 목숨을 잃거나 멀리 쫓겨나거나 숨어 사는 선비들이 한둘이 아니다. 가령 임진왜란 때 이순신의 처지와 의병장들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조선 시대를 통틀어 보면, 큰 인물이 될 만한 선비나 장수는 임금 노릇을 하는 데 위험 요소가 될까 봐 제거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모두 임금과 좌우 신하들의 도량이 넓지 못한 소인배였기 때문이다. 민담으로 전해오는 ‘아기 장수’ 설화 등이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그런 일은 큰 인물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무능력과 도량이 좁은 데서 나온다. 이렇게 도량이 넓은 사람과 좁은 사람을 흔히 군자와 소인으로 나누어 설명하기도 한다. 가령 논어에 보면 “군자는 두루 하면서 파당을 짓지 않지만, 소인은 파당을 지으며 두루 하지 않는다(「위정」).”라고 하여, 군자가 두루 한다는 것은 관용과 도량을 의미한다. 그래서 파당을 짓지 않는다는 뜻이다. 또 “군자는 의에 밝고 소인의 이익에 밝다(「이인」).”라는 말의 뜻도 소인은 사적인 이익에 민감하니, 어찌 너그럽고 도량이 클 수 있겠는가? 또 “군자는 태연하고 마음이 너그러우며 넓다(「술이」).”라는 말도 군자의 도량과 관용적 모습을 잘 말해주고 있다. 그래서 “군자는 남의 좋은 점은 이루어주지만 남의 나쁜 점을 이루어주지 않는데, 소인은 이와 반대로 한다(「안연」).”라고 하고, 또 잘못이 있을 때 “군자는 자기 탓을 하지만 소인은 남 탓을 한다(「위령공」).”라고 하여, 군자의 풍모를 잘 설명하고 있다. 이 밖에도 군자와 소인의 도량이 어떤지 보여주는 공자의 말은 무척 많다. 모두 선비들이 따르고자 했던 가르침이다.

 

도량이 넓었던 선비들

선비라고 해서 모두 도량이 넓지는 않았다. 소인도 섞여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자도 제자에게 “너는 군자의 선비가 되어야지 소인의 선비가 되지 말라(「옹야」).”라고 했는데, 선비 사회에도 군자와 소인이 섞여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군자가 되는 특징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다. 필자가 선비정신으로 꼽는 10가지 덕목도 거기에 해당할 것이다. 여기서 다루는 넓은 도량도 그 가운데 하나인데, 그것은 관용이나 포용 또는 넓은 아량을 포함한다. 대체로 해당 인물이 너그럽고 도량이 크다고 말한다.

흔히 조선 시대 도량이 넓은 선비로 손꼽히는 인물에는 황희(黃喜) 정승이 있는데, 대동야승에 소개하는 그의 일화는 무척 많다. 사람들이 워낙 많이 알고 있어서 여기서는 다루지 않겠다. 먼저 황희 정승 못지않게 넓은 도량의 자주 등장하는 인물에는 조선 전기 재상을 지낸 정광필(鄭光弼)이 있다. 이이의 석담일기에 따르면 그는 옛 제도를 그대로 지키려 하였고, 조광조는 삼대(三代)의 옛 정치를 복귀시키려 하여, 두 사람이 각자 자기주장을 고집하여 서로 반대되는 처지에 있었지만,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정광필이 사력을 다하여 조광조를 구원하니, 사람들이 그의 덕량(德量)을 추앙했다고 전한다. 그의 도량이 얼마나 넓었는지 이기(李墍 : ?~?)의 『송와잡설(松窩雜說)』에는 이런 일화가 있다.

 

정광필이 기묘 연간에 영의정으로 있었다. 중종이 재변(災變 : 재앙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변고)으로 인해, 사정전(思政殿)에서 여러 신하를 모아놓고 물으니, 좌우에서 차례로 재변을 그치게 할 방법을 말했었다. 한충(韓忠)이 말하기를

“성상(임금)께서 정신을 가다듬어 잘 나라가 다스려지기를 찾으시나, 비루한 사람이 감히 영의정 자리를 차지하였으니, 재변이 일어남은 반드시 원인이 있고, 잘 다스릴 수도 없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거기서 물러 나오자, 우의정 신용개(申用漑)는 정색하며 큰 소리로,

“풋내기 선비 따위가 눈앞에서 정승을 배척하니, 이 버릇은 그냥 두어서는 안 됩니다.”

라고 하였으나, 정광필은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손을 저어 말리면서

“그는 우리가 화내지 않을 줄 알고 이 말을 한 것이요, 만약 조금이라도 마음에 꺼리는 것이 있었다면 비록 시켜도 반드시 하지 않았을 것이오. 나에게는 진실로 해로울 게 없으니, 젊은 사람이 과감하게 말하는 기풍(氣風)을 꺾으면 안 되오.”

라고 하였다. 신용개도 그 말에 탄복하였고, 듣는 사람들도 대신의 도량이 있다 하였다.

 

정광필은 도량도 넓었고 선비다운 배포도 있었다. 정홍명(鄭弘溟 : 1582~1650)의 『기옹만필(畸翁漫筆)』에 보면, 그가 유배지에 있을 때 서울에 있던 하인이 좋은 소식이 있다면서 몇 가지 서신(書信, 편지)을 가져왔는데, “우선 그대로 두어라. 밝은 날에 뜯어보겠다.”라고 하고, 예전처럼 코를 골며 잠이 드니 사람들이 그의 넓은 도량에 탄복하였다고 전한다.

정광필처럼 젊은 사람에게 관대한 정승이 또 있다. 재상 황효헌(黃孝獻)의 일화가 권응인(權應仁 : ?~?)의 『송계만록(松溪漫錄)』에 전한다.

 

황효헌은 나이 40이 되지 않아 이조 참판을 파직당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포의(布衣)를 입은 모습은 마치 서생 같아서 보는 사람이 모두 그가 누군 줄 몰랐다. 저녁에 신륵사(神勒寺)에 투숙하였는데, 유생 서넛이 둘러앉아 그를 멸시하여, 공이 말석에 자리 잡았다. 한 유생이 먼저 말하기를,

“내가 얼마 전 금강산을 유람했는데 정말 명산이었소. 한 스님이 황모씨(黃某氏)의 시를 소매에서 꺼내 보였는데 정말 가작(佳作 : 대회에서 당선 작품에 버금가는 작품. 좋긴 하나 아주 좋은 것이 아님을 비유)이었소.”

라고 하였다. 효헌이 말하기를,

“나도 한번 가보았는데 과연 그대 말과 같았소.”

라고 하니, 유생이 말하기를,

“나이 젊은 서생이 어찌 그리 일찍 금강산을 구경하였을까?”

라고 하였다. 효헌이 말하기를,

“일찍 강원도 관찰사로 임명받았을 때 우연히 한번 가보았소.”

라고 하니, 유생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허둥지둥 달아났다. 효헌이 그들을 불러 말하기를,

“공들이 마음에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며 참으로 솔직하니 친구가 될 만하다.”

하고, 작은 술상을 차려 마음껏 즐기고 헤어졌다. 이후로 서로 내왕하며 매우 깊은 우정으로 사귀었다.

 

이렇게 사람의 도량이 넓게 되는 일은 해당하는 인물의 인품에 따른 것이겠지만, 모두 그것을 숭상하는 문화 속에서 받은 교육의 영향이 클 것이다. 도량이 큰 관용의 정신은 수양의 결과로 사람만이 아니라 만물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온다. 그 예화가 이제신(李濟臣 : 1536~1583)의 『청강선생후청쇄어(淸江先生鯸鯖瑣語)』에 보인다.

 

좌상 안현(安玹)은 충실하고 청렴하며 조심하고 검소한 당대의 명신이었다. 사사로이 주는 것을 받지도 않고 청탁을 통하지도 않았으며, 베옷과 나쁜 음식으로 일생을 지냈다. 하루는 손님이 찾아와 자리에 있었는데, 식사는 오직 누른 콩잎에 거친 장으로 끓인 국뿐이었으나, 그는 맛도 안 보고 거기에 밥을 말았다. 손님이 말하기를,

“국이 좋지 않으면 어떻게 하려고 맛을 보지도 않으시고 밥을 마십니까?”

라고 하니, 안현이 대답하기를,

“국이 만약 좋지 않더라도 그만둘 수 있겠소?”

라고 하였다.

그가 종기를 앓고 있을 때 의원이,

“지렁이 진액을 구하여 치료해야 합니다.”

라고 하였더니, 말리면서 말하기를,

“바야흐로 봄이 되어 만물들이 낳고 자라는데, 그것이 비록 미물일망정 어찌 나의 병을 위하여 생명이 있는 것을 죽일 수 있겠느냐?”

라고 하였다.

 

생명을 해치지 않고 사랑하는 마음은 유가에서는 인(仁)의 발현이라고 본다. 진정한 도량이란 유가 철학에서 볼 때 착한 본성인 인(仁)의 발로이다. 성리학자들은 ‘천지가 만물을 낳은 마음을 일컬어 인이다.’라고 하였다. 단순한 처세술이 아니라 진정한 도량이나 관용은 거기서 나와야 한다고 보았다.

한편 그 사람이 이렇게 어진 사람인지 어떤지 알 수는 없으나 자기를 버리고 떠난 아내에게 아량을 베푼 사람도 있다. 이징옥(李澄玉)은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는 과정에서 그를 김종서의 일당이라고 몰아 파면한 데 대한 반란을 일으킨 인물이다. 차천로(車天輅 : 1556~1615)의 『오산설림초고(五山說林草藁)』에서는 그에 대한 일화가 보인다.

 

이징옥의 아내가 교만하여 징옥을 배반하고 떠났다. 징옥은 그것을 억지로 말리지 않았다. 뒤에 징옥이 영남 절도사가 되었는데, 그 부인은 벌써 남에게 시집간 지 오래되었다. 징옥이 여러 고을을 합하여 크게 사냥하고, 아내의 새 남편 집 앞에서 많이 잡고 적게 잡은 것을 검사하여 보고, 새 남편 된 사람을 불러 사냥하여 잡은 새와 짐승을 모두 다 주었다. 이것은 주매신(朱買臣 : 한 무제 때의 정치가)의 고사와 비슷하다.

 

이 이야기는 보기에 따라 전 남편의 도량 아니면 배반한 아내에 대한 선의의 복수(?)라 말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비열하게 보복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나름의 풍모가 있다고 하겠다. 반면 사대부로서 군자답지 못하고 비열한 소인 같은 짓을 한 선비도 있었다. 김시양(金時讓, 1581~1643)의 부계기문(涪溪記聞)에 보인다.

 

노수신(蘆守愼)이 진도(珍島)에 유배 생활을 할 때 그곳 수령이 당시 재상들의 눈치를 살펴서 여러 이유를 가지고 그를 욕보였다.

“죄인이 어찌 쌀밥을 먹을 수 있단 말인가?”

라고 하면서, 기장쌀을 사다가 공급하였다. 어느 달 밝은 밤에 수신이 아이 종을 시켜서 피리를 불게 하였더니, 수령이 말하기를,

“죄인이 어찌 즐길 수 있단 말인가?”

라고 하고는, 그 아이를 옥에 가두었다. 나중에 노수신이 크게 등용되니, 그 수령은 드디어 때를 만나지 못하고 한평생을 마쳤다.

 

윤기헌(尹耆獻 : ?~?)의 『장빈거사호찬(長貧居士胡撰)』에서는 이에 대해서 이런 기록이 있다. 노수신을 괴롭히던 그 수령은 홍인록(洪仁祿)이라는 사람인데, 훗날 조정에서 홍인록을 공박하여 여러 해 동안 벼슬을 못 하게 하였다. 하지만 노수신이 힘을 다하여 주선하여 마침내 풍천부사(豐川府使)에 임명하였는데, 그(홍인록)가 늘 감탄하였다고 전한다. 노수신 역시 그런 소인에게도 넓은 도량으로 대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 역사에서 사화와 당쟁

지금까지 도량이 큰 몇 사람을 소개했다. 구체적 사례가 없어서 그렇지 대동야승에는 도량이 넓다고 소개하는 선비들은 매우 많다.

그런데 적어도 좀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의문을 품을 수 있겠다. 곧 선비들이 그렇게 도량이 넓으면서 왜 당쟁을 일삼았고, 사화를 일으켜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그런데 당쟁과 사화는 좀 구별해서 봐야 할 것 같다. 먼저 사화는 대체로 선비라고 부르기도 거북한 소인과 간신들이 일으킨 정변이라면, 당쟁은 생각을 달리해 보아야 할 여지가 있다.

당쟁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에는 식민사관도 한 몫 하지만, 그것이 있기 전에도 그 폐단을 지적한 이도 있다. 당쟁이란 요즘 말로 말하면 여야의 정치 갈등 현상이다. 동서고금 어느 나라 어느 시대나 다 있는 일이지 조선에만 있었다고 할 수 없다. 지배집단 내부 또는 지배집단과 신흥 세력 간의 알력과 갈등이 대개 정쟁으로 표면화된다.

필자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정쟁이 가속화되면 상대에 대한 도량과 포용력을 상실한다는 점이다. 요즘도 그 양상에는 변함이 없다. 자칫 도량의 발휘가 훗날 화근의 싹이 될까 봐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실각하면 죽음도 각오해야 하는 일이 특히 조선 후기의 정치사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사람 죽이는 일을 쉽사리 결정하는 정치가는 결코 도량이 넓다고 할 수 없고, 아무리 명분이 뚜렷해도 인자(仁者, 어진 사람 혹은 지혜로운 사람)라 하기에는 너무나 거리가 멀어 선비라 부르기도 민망하다.

 

멋을 아는 선비들

 

 

멋이란 무엇인가?

멋이 무엇인지 한마디로 말할 수 있을까? 국어사전에는 멋을 ‘차림새, 행동, 됨됨이 따위가 세련되고 아름다움’ 또는 ‘고상한 품격이나 운치’라고 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그 풀이도 형식적이고 더 따지고 들어가면 무엇이 아름다운지 세련된 것인지 설명하지 않고 있다.

우리는 어떤 사물이나 사람을 보고 ‘멋있다’라는 말을 자주 한다. 가령 부모가 골라준 옷을 입으라고 하면 아이는 ‘에이! 이상해. 안 입을래.’라고 하면, 부모는 ‘무슨 소리야 내가 볼 때는 얼마나 멋있는데.’라는 등 일상의 대화 속에서도 자주 발견된다.

여기서 우리는 적어도 멋에 대한 두 가지 쟁점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는 우리의 멋이 무엇인지 보편적으로 정의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이고, 또 하나는 멋이란 사람·문화에 따라 다를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사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20세기 초반에 중국문화와 다른 우리 문화의 특성 곧 민족주의의 근거를 탐구할 때 한국학을 추구하면서 논의된 주제 가운데 하나였다. 이 글에서는 그 논쟁을 소개할 여력이 없지만, 멋이 우리 민족의 고유한 무엇이냐 아니면 보편적인 무엇이냐 하는 논쟁도 있었다. 이는 멋에 대한 개념의 문제이기도 하다. 학술적인 ‘미적 가치’의 형식으로만 정의한다면 보편적일 수 있고, 우리 민족만의 특유한 미적 정서에만 한정한다면, 한국적인 미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렇더라도 같은 한국인 안에서도 앞서 소개한 일화처럼 부모가 생각하는 멋, 신세대가 생각하는 멋, 또 옛날로 보자면 양반의 멋, 서민의 멋, 선비의 멋, 장수의 멋이 다를 수 있다. 그것은 미적 가치로서 멋이 가진 특성이다. 가치는 상대성을 벗어나기 힘들기 때문이다. 우리말에 ‘제멋대로 산다’라거나 ‘제멋에 겨워서’라는 말이 바로 잘 말해주고 있다.

이렇게 멋이 미적 가치와 관련되며 상대적이어서 사람과 집단 또는 문화와 시기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점만 이해하자. 물론 그 공통점을 종합하여 한국의 멋이라고 할 수는 있겠다.

 

유교적 전통과 멋

멋이란 무엇일까? 멋을 보편적인 무엇으로 본다면 그것은 결국 멋에 대한 관념을 종합한 것뿐이다. 보편이란 결국 개별적인 것을 종합한 데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근대 이전에는 그 보편자가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믿었지만, 인류 인식과 과학의 진보는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 글에서는 조선 선비라는 특수한 계층이 지니는 개별적 멋이라 해도 좋다. 각 선비의 멋을 종합했다는 의미에서 그 집단 내부에 있어서는 보편성을 띨 것이다. 한국 전체의 문화에서 보자면 특수한 것이지만, 그것이 영향력을 끼쳤다면 널리 퍼진 멋이기도 할 것이다.

조선 시대 선비들의 멋을 다룰 때는 다른 분야도 그렇지만 유학을 떠나서 논하기는 어렵다. 유학이 나라를 다스리는 방도로서 예악형정(禮樂刑政) 곧 예법과 음악과 형률(刑律)과 정사(政事)를 자주 거론하는 것에서 볼 때, 그 가운데 예법과 음악이 들어 있는데, 행동의 고아한 품격은 예로서, 정서의 순화와 감정의 표현은 음악을 활용했다. 그래서 많은 선비들은 거문고나 피리 같은 악기 다루기를 좋아했다.

그것만이 아니다. 논어를 보면 “시(詩)에서 일어나고 예(禮)에서 서고 악(樂)에서 완성된다(「태백」).”라는 말이 있는데, 앞서 말한 예악과 더불어 시가 추가되고 있다. 그래서 선비들의 모임에선 시가 빠지지 않았다. 사실 악도 엄밀히 말하면 서양에서 말하는 음악(music)만을 말하지 않는다. 무용까지도 추가된 종합예술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공자 자신도 “남과 함께 노래 부르기를 잘했고 반복해서 부른 뒤에 조화를 이루었다(「술이」).”라는 말에서 조화를 이루는 일을 중요하게 여긴 것 같다. 논어의 다른 곳에서도 () 조화를 중요하게 여겼다. 그래서 이 조화는 중용의 “희로애락이 발동하여 절도에 맞는 것을 화(和)라고 부른다.”라는 말과 연결되는데, 사람의 감정과 정서의 표출이 때와 상항에 알맞게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보았고, 그것이 다름 아닌 중용(中庸)의 정신이다.

이 중용의 정신은 철학적으로 인간의 생각이나 행동에 거짓됨이 없는[眞實無妄」 또 생각에 사특함이 없는[思無邪] 성실의 도덕과 통한다. 곧 자연에서 사시의 변화가 성실한 일처럼 인간의 생각과 행동도 성실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나오며, 그것이 자연과의 조화를 생각하는 자연스러운 예술의 특성과 연결된다. 그래서 대체로 우리의 예술은 가능한 인위적인 과장과 기교, 주위와의 조화와 균형을 깨는 웅장함보다는 주위와 어울리고 절제되고 조화롭고 단아하며 은근한 멋을 숭상했다. 선비들의 이러한 멋은 대체로 정신적으로 여유 있는 삶 속에서 드러났다.

 

조선 선비들의 멋과 여유

흔히 선비의 멋은 묵향 그윽한 서실에서 서책과 벗하며 사는 늙은 선비의 성성한 백발에서 느낄 수도 있다고도 하는데, 꼭 그런 것에 한정할 수만은 없고 소개하는 사례는 매우 다양하다. 거기서 공통점을 찾는다면 선비의 멋을 정리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대동야승에 소개하는 선비의 멋이란 대개 해당 인물의 삶을 통해 드러난 것이지, 어떤 예술 작품을 통해 말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리고 그마저도 소박한 삶 속에 나타난 여유나 아량 등과 함께 거론되고 있을 뿐이다. 물론 어떤 작품 곧 시를 두고 평가하는 글은 자주 등장한다. 그걸 다루기에는 지면이 허락하지 않아서, 이 글에서는 선비들의 삶을 통해 드러난 멋과 여유만을 다루고자 한다.

전통적으로 멋의 특징을 객관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것에는 예술 작품 외에 정원이나 생활 주변을 꾸미는 일이다. 심수경(沈守慶, 1516~1599)의 견한잡록(遣閑雜錄)에는 정원과 누대(樓臺 : 누각과 정자)에 관한 사례가 보인다.

 

서울에서 이름 있는 정원이 한둘이 아니지만, 특히 이향성(李享成)의 세심정(洗心亭 : 마음을 씻는 정자라는 뜻)은 가장 경치가 좋다. 정원 안에는 누대가 있고 그 누대 아래에는 맑은 샘이 콸콸 흐르며, 그 곁에는 산이 있어 살구나무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아서 봄이 되면 만발하여 눈처럼 찬란하고 그 외 다른 꽃들도 많았다. 이향성은 시를 매우 좋아하여 늘 시객(詩客)을 맞아들여 시를 지으므로, 나(심수경)도 여러 번 가서 구경한 일이 있었다. 이굉(李宏)이 세심정을 구경하고자 그 집에 갔었는데, 주인 이향성이 마침 병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굉이 시 한 수를 지어 그 문병(門屛 : 밖에서 집안을 들여다보지 못하도록 대문이나 중문 안쪽에 가로막아 놓은 담이나 널빤지)에 크게 쓰기를,

 

섬돌 앞의 푸른 대는 속된 것 고치기 어렵고(階前綠竹難醫俗)

대 아래의 맑은 물로는 마음 씻지 못하노라(臺下淸川未洗心)

 

라고 하니 한때 세상에 전해져 웃음거리가 되었다. 임진년 초봄에 내가 어느 친구의 집에 가니 그 자리에 이향성의 여자 하인이 거문고를 타고 있기에, 내가 시 한 수를 지어 그 여자 하인에게 주며, 그 주인인 이향성에게 전하라고 하였다. 그 시에

 

거문고 소리 들을 만한데 타는 여자는 누군지(彈琴可聽誰家女)

스스로 세심대 하인이라고 말하네(自說洗心臺下人)

만 그루 살구꽃 피기를 기다려(要待萬株山杏發)

술병 가지고 봄놀이 감세(爲携壺酒去尋春)

 

라고 하였다. 그 후 전란으로 세심대의 경치도 다시는 감상하지 못하였다.

 

인공적으로 꾸미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살린 정원이 상상된다. 그 속에서 시와 음악과 술이 빠질 수 없다. 그 멋을 모르는 이굉의 시가 선비 사회의 웃음거리가 되었다는 설명이다. 이런 선비들의 멋을 달리 풍류(風流)라 일컫기도 한다.

대체로 위의 사례는 선비 사회에서 흔히 있는 일반적 사례이지만, 덕과 바른 행실과 음악과 문예가 조화를 이루어 멋이 드러난 분도 있었다. 다음은 남효온(南孝溫, 1454~1492)의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에 보이는 사례이다.

 

이정은(李貞恩)은 음률(음악)이 세상에 으뜸이어서 슬프게 연주하면, 지나가던 사람도 꼭 눈물을 흘릴 정도였다. 인품이 독실하고 돈후(敦厚)하며 스스로 겸손하고 식견과 도량이 있었다. 또 총명하여 학문을 하는 데도 그 이치를 먼저 터득한 후에 글 짓는 일을 다루어 스승을 수고롭게 하지도 않았고, 시를 지을 때도 그 격식을 먼저 다룬 후에 꾸몄으므로 사람들이 싫어하지 않았다. 그리고 덕을 닦을 때도 마음을 먼저하고 외모를 다음으로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알지 못하였다. 그의 행실은 지위가 높다고 남을 위엄으로 억누르지 않고, 가장 가난한 선비처럼 행동하였다.

 

이 사례는 덕과 인품과 행동과 예술적 재능이 잘 어울려 멋을 풍기는 경우이다. 이는 덕을 매우 중시하는 유학의 전형적인 멋있는 선비의 모습이 아닐지 모르겠다. 그런데 멋과 풍류를 아는 사람 가운데 안평대군(安平大君)을 제외하면 섭섭하게 여길 분들이 많을 것 같다. 워낙 교과서에 그의 작품이 자주 등장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성현(成俔 : 1439~1504)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 보면, 그는 왕자로서 학문을 좋아하고 시문을 잘하였으며, 서예가 천하에서 제일이었고 그림 그리기와 거문고 타는 재주도 훌륭하였다고 전한다. 게다가 정자를 곳곳에 짓고 선비들을 불러 모아 시를 지었으며 때로는 바둑과 장기를 두고 풍류가 끊이지 않았으며, 항상 술 마시고 놀았으며, 당시 이름 있는 선비로서 교분을 맺지 않은 이가 없었고 전한다.

이로 보면 그는 멋과 풍류를 지나칠 정도로 추구하였지만, 꼿꼿한 유학자의 멋과는 약간의 거리가 있어 보인다. 그래서 어떤 선비의 어머니가 “왕자의 도리는 문을 닫아 손님을 멀리하고 근신하는 길밖에 없는 것인데, 어째서 사람들을 모아서 벗으로 삼는가? 잘못될 것이 뻔하니 너는 같이 사귀지 말아라.”라고 경고하였는데, 뒷날 안평대군도 죽음을 면치 못했다.

반면 소박하면서도 여유를 가지고 느긋하게 멋있게 산 사람도 있었다. 권별(權鼈 : ?~?)의 『해동잡록(海東雜錄)』에 보이는 맹사성(孟思誠)의 사례가 그것이다.

 

맹사성은 정승이 되어서는 항상 문을 닫고서 손님을 만나지 않았는데, 여름에는 소나무 그늘에 앉아 쉬고 겨울에는 창포 방석에 앉았다. 그의 좌우에 다른 물건이라고는 모두 깨끗하고 간결하였으며, 단아하고 정중하게 지냈다. 선천적으로 음률(음악)을 잘 알아 언제나 피리를 쥐고 있었으며 하루에 3~4곡씩 부니, 사람들은 동구에 들어서서 피리 소리가 들리면 그가 반드시 집 안에 있는 줄 알았다.

 

정승이 되면 대단한 권력이다. 마음먹기에 따라 부귀를 탐할 수 있지만, 맹사성은 그것을 삶의 가치로 여긴 것 같지 않다. 꾸밈없이 소박하게 살면서 음악을 즐기는 삶 자체가 하나의 멋으로 보인다.

이와 유사한 선비 가운데는 또 김정국(金正國)이 있다. 해동잡록에 따르면 그가 친구에게 준 글에 그의 삶을 잘 표현하고 있다. 곧 “20년 동안의 구차스러운 살림 가운데 두어 칸 집을 짓고 두어 이랑의 밭을 일구어 겨울에는 솜옷 여름에는 갈포(칡으로 짠 베)를 입는다. 누울 자리 밖에 남은 땅이 있고, 신변에는 남은 갈포가 있으며, 바리 밑에는 남은 밥이 있으니, 이 세 가지 남은 것을 가지고 한세상 편안히 누웠으면, 천 칸 넓은 집이나 만 섬의 옥같이 흰 쌀이며 백 벌의 아름다운 비단옷도 썩은 쥐나 진배없이 보인다. 여유 작작, 이렇게 처신하여 조금도 한이 없다.”라고 하였다. 역시 소박하고 여유 있는 선비의 삶이 보인다. 그는 여기서 욕심을 조금 부린다면 늙어서 있어야 할 10가지 물건을 소개한다. 곧 “한가로이 살며 구차스러운 가운데에서도 없어서는 안 될 물건은 오직 책 한 시렁, 거문고 한 세트, 친구 한 사람, 신 한 켤레, 지팡이 한 개, 차 달이는 화로 하나, 등을 대고 따뜻하게 할 기둥 하나, 서늘한 바람을 끌어들일 창 하나, 잠을 맞이할 베개 하나, 타고 봄 경치를 찾아다닐 나귀 한 마리면 그만이다. 노후를 보내는 데 이 밖에 또 무엇이 필요하랴.”라고 하여, 노후의 멋있는 삶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정리하면 선비들의 멋이란 시를 짓고 음악을 즐기며 모여 풍류를 즐기는 일에도 있지만, 그보다는 덕과 학문과 행동과 삶이 일치된 삶 그 자체에서 더 우러나오는 무엇이었다. 어떤 하나의 예술 작품에만 표현된 아름다움이 이들의 전정한 멋은 아니었다.

 

우리 시대의 멋

우리 시대의 멋이란 어떤 것일까? 상품 선전에 동원된 모델의 모습이 멋있을까? 대중 예술의 꽃인 연예인 이른바 ‘스타’라는 사람들이 멋있을까? 이들을 우상으로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분명 멋있는 사람들임엔 틀림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계속 성장하므로 청소년기에는 그런 멋을 추구하다가 생각과 지식이 깊어지면 그 멋의 대상도 바뀐다. 대개는 품격과 교양이 있는 대상을 멋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런 대상도 문화적 산물이므로, 그것이 서구적일 수도 전통적일 수도 있다. 곧 가치와 문화적 취향에 따라 또는 교육이나 자본주의 문화에 의하여 오리엔테이션 된 미의식이 그 사람의 멋을 좌우할 가능성이 크다. 그 멋이 촌스럽거나 세련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는 기준도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결국 가치 의식과 철학의 문제로 남는다.

그래서 멋의 종류는 많겠지만, 그래도 필자에게 개인적으로 무엇이 멋있느냐고 묻는다면 해당 인물의 삶 전체를 통해 아름답게 우러나오는 멋이 최고라 하겠다. 조선 시대 선비들이 추구했던 멋도 거기서 제외될 수 없다.

 

가난해도 도를 즐김

 

 

가난과 도

가난을 좋아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것은 겪어 본 사람만이 뼈저리게 안다. 1970년대 우리나라 ‘새마을 운동’은 달리 말하면 가난 탈출 운동이었다. 그 결과가 농민의 도시 집중에 따른 산업노동자의 양산과 농촌 공동체의 붕괴와 고령화, 빈부의 양극화, 각종 개발로 황폐화가 된 국토이다. 물론 그 운동의 성과가 없지는 않아 비록 그 열매가 일부 계층에 쏠렸어도, 다수의 국민은 배고프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오늘날 국가 복지정책으로 절대적 빈곤에 시달리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다수 국민이 여전히 가난하다고 느끼는 점은 상대적 빈곤감과 박탈감 때문이다. 사회가 공정하지도 정의롭지도 않다고 생각하는 반증이다. 이제 뼈저린 가난은 텔레비전 화면에서 후원을 호소하는 국제구호단체가 보여주는 후진국의 동영상을 통한,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일이 되었다.

도란 무엇일까? 예전에 길거리에 가다 보면 ‘도를 아십니까?’라고 말하면서, 어느 종교 단체 소속 전도자가 접근하는 일이 가끔 있었다. 그들이 말한 도란 그 종교의 가르침이겠지만, 원래는 길이었다. 그 의미가 추상화가 되어 진리, 원리, 가르침 따위로 변했다. 가르침을 강조하면 자연히 종교로 연결된다.

도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다. 원래의 의미대로 보면 자연의 길과 인간의 길이 그것이다. 자연의 길을 합리적으로 탐구하면 자연과학이 되고, 인간의 길을 제대로 탐구하면 인문학이 된다. 사실 옛날부터 그것을 천도(天道)와 인도(人道)로 나누어 불렀다. 하지만 고대에는 자연과학이 크게 발달하지 못했고 그마저도 미신과 억측이 끼어들 소지가 많았다. 인문학 또한 그랬다. 하지만 논어에서 공자의 “귀신을 공경하되 멀리하고” “삶도 모르는데 죽음을 어찌 알랴?”와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말하지 않았다.”라는 태도로 말미암아, 그를 따르는 선비들은 자연히 합리적인 사고와 태도를 갖추게 되었다. 따라서 선비들이 추구한 도란 대체로 인도로서 인간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윤리적 성격이 강하였다. 그 도를 표현하는 형식이 예법이고 구체적 덕목으로는 인의예지(仁義禮智)와 오륜(五倫) 등이 있다.

이때의 도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도가 전근대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고, 그 질서 속에서 지배자의 권리와 피지배자의 의무를 규정하는 하나의 이념으로 작용했다고 평가한다. 오늘날에도 그 사회의 질서와 기득권을 유지하는 이념이 있으니 틀린 말은 아니지만, 어떤 학문 방법이든 모든 사례를 포괄하지는 못한다는 점에서 볼 때, 선비들이 추구하는 도가 몽땅 그런 역할만 했는지는 따져 보아야 할 문제이기는 하다.

 

안빈낙도

흔히 올곧은 선비라고 하면 청빈하게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마치 가난이 미덕인 것처럼 말한다. 세상에 가난 그 자체를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부유하게 되는 일을 굳이 싫어하지 않지만, 구차스럽게 억지로 가난을 모면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은 공자의 다음과 같은 말에 보인다.

 

“부자이고 귀한 신분은 사람들이 바라는 것이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면 누리지 않고, 가난과 천한 신분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내게 부당하게 돌아온 것이라도 그것을 떠나지 않는다(「이인」).”

 

부당하게 돌아온 가난일지라도 그것을 모면하기 위해 구차하거나 부당한 방법을 쓰지 않겠다는 말이다. 사실 부귀 그 자체는 싫어할 이유가 없다. 다만 그것을 획득하는 일이 정당 하냐 못하냐에 달려있고, 그것은 곧 나라의 정의와 관련된 문제였다. 그래서 또 말하기를, “나라에 정의가 살아있을 때는 가난하고 천한 것이 부끄러운 일이지만, 나라에 정의가 없을 때는 부자이며 귀하게 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태백」).”라고 하여, 이점을 분명히 하였다.

그래서 그(공자)는 결론적으로

“거친 밥과 물 마시며 팔베개를 베고 자도 즐거움이 그 가운데 있다. 정의롭지 못한 부자나 귀한 신분은 내게는 뜬구름과 같다(「술이」).”

라고 함으로써, 덕을 지닌 군자가 부유하고 신분이 귀하게 되는 일이 무척 어렵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이런 태도는 ‘가난을 편안히 여기고 도를 즐긴다.’라는 안빈낙도(安貧樂道)의 그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가난을 즐긴다는 ‘낙빈(樂貧)’이 아니라 그것을 편안히 여긴다는 점에 주의하자. 즐기는 대상은 가난이 아니라 도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세상은 덕 있는 사람이 잘살게 내버려 둘 정도로 호락호락하지 않다. 부귀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소인들이 주도권을 장악하기 때문이다. 모든 철학과 종교와 사상이 이러한 세상의 부조리에 대한 나름의 원인을 밝혀 왔는데, 대체로 그 공통적인 원인을 육신과 연결된 탐욕으로 본다. 부귀란 그것의 성취를 위한 수단이 되고 만다.

 

가난해도 도를 즐긴 선비들

부귀는 모든 사람이 바라는 것이어서 얻기도 어렵지만, 비록 얻었다 해도 그 또한 독이 든 사과일 수도 있다. 조선의 정치사에서 볼 때 무리한 방법으로 부귀하게 되었다가 정치적 실각과 함께 말로가 비참한 사람은 너무 많다. 때로는 그것을 누릴만한 그릇이 작아서 정변과 무관하게 낭패를 볼 때도 있다.

공부한 선비들은 역사적으로나 철학적으로 볼 때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비록 가난하고 신분이 낮더라도 자기의 분수를 지키며 자기 현실에 만족하는 안분자족(安分自足)의 삶이야말로 현실적 대안이었을 것이다. 이는 굳이 유가(儒家)만이 아니라 도가(道家)나 불교를 따르는 학인들도 그래 왔다. 이는 아마도 부조리한 인간 사회에서 인간답게 사는 방식의 보편성에서 나온 일일 것이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하늘을 우러러보아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사는 일이 결단코 쉽지 않기에 선택한 삶이다. 오늘날이라고 본질상 달라진 것은 없다.

이렇게 분수에 맞게 소박하게 사는 모습을 그린 일은 성리학이 조선에 정착하기 이전부터 보인다. 고려 때의 이규보(李奎報)의 시 가운데 심수경(沈守慶, 1516~1599)의 견한잡록(遣閑雜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인간사 요란한 비방을 피하려고(爲避人間謗議騰)

문 닫고 숨어 사니 머리마저 헝클어졌네(杜門高臥髮鬅鬙)

처음엔 방탕한 사내가 여인을 그리워하는 것 같더니(初如蕩蕩懷春女)

점차 고요하게 하안거(夏安居) 참여하는 스님을 닮아가네(漸作寥寥結夏僧)

옷을 당기는 아기의 재롱은 그나마 즐길 만 하고(兒戲牽衣聊足樂)

찾아온 손님 문을 두드려도 대답조차 할 것 없네(客來敲戶不須譍)

빈궁과 영달과 명예와 수치는 모두 하늘이 주는 것이니(窮通榮辱皆天賦)

어찌 메추라기가 봉황을 부러워하리(斥鷃何曾羨大鵬)

 

이 시에는 비유가 많이 사용되었다. 특히 장자에 등장하는 용어가 돋보인다. 부귀영달을 버리고 자족한 삶을 드러내었다. 흔히 정치에서 밀려난 후 그리는 정경이기는 한데, 분수에 편안함은 보이나 그가 도를 즐겼는지 어땠는지 그 여부는 알 수 없다. 이 글의 편찬자는 당시 그에게 대단한 비방이 있었다고 상상했다.

안빈낙도의 실천은 아무래도 유학의 가르침에 철저했던 조선 시대 선비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작자 미상의 기축록(己丑錄)을 보면 조선 중기 학자 최영경(崔永慶)의 사례가 나온다. 그는 여러 벼슬을 내리었는데도 부임하지 않았고, 집안에 양식이 자주 떨어져 누가 생계를 도모할 방책을 일러주었으나, 물리치면서 하늘 말이 “가난과 부자는 미리 정해 있는 것이니, 가난한 것은 나의 분수이다.”라는 것이었으니, 가난이 그 뜻을 빼앗을 수가 없었다. 당시 학자 민순(閔純)이 칭찬하여 말하기를, “배고픔과 추위가 뼈에 스며들어도 오히려 태연하고, 가슴속 마음이 시원하고 상쾌하여 항상 즐거워하니, 이는 안빈낙도하는 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여, 언제나 존경하는 벗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또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의 운암잡록(雲巖雜錄)에는 “높은 관리가 문밖에 와서 만나기를 원하더라도 그가 좋지 않게 여기는 사람이면 즉각 거절하고 만나지 않았다. 이것으로 남에게 원망을 많이 샀다.”라고 한다. 그런 태도 때문인지 그는 기축옥사 때 무고로 옥사하였다.

또 벼슬하지 않고 도를 즐기며 자족한 선비에는 처사 성운(成運)이 있다. 이이의 석담일기에서는 이렇게 전한다.

 

성운은 초야에 고요히 살며 시끄러운 세상을 사절한 지 40여 년이었다. 집에서 두어 마장(한 마장은 5~10리) 떨어진 곳에 경치가 좋은 곳이 있어서 거기에 작은 집을 짓고, 한가한 날이면 소를 타고 가서 쓸쓸히 홀로 앉아 가끔 거문고로 두어 곡 연주하며 유유자적할 뿐이었다. 누가 거문고 연주를 듣고자 하면 오히려 타지 않았다. 선(善)을 즐기며 학문을 좋아하였고 남과 다투는 일이 없었다. 살림살이에는 있고 없는 것을 묻지 않았으며 간혹 끼니를 굶는 일이 있어도 편안하게 생각하였다.

 

성운은 가난 속에서도 학문을 즐기며 음악과 함께 자적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누구보다 조선 전기에 가난했어도 학문을 즐기며 산 사람은 화담 서경덕(徐敬德)이었다. 그에 대한 일화는 무척 많고 여러 문헌에 보인다. 먼저 이이의 석담일기에서는 “서경덕은 개성 사람이며 천품과 자질이 총명하고 빼어나게 특출하였다. 젊어서 과거의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곧 그 뜻을 버리고 화담(花潭)에 집을 짓고 살았다. 오로지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면서 때로는 여러 날을 묵묵히 앉아 있었다. 언제나 마음 가득히 희열을 느끼며 세상의 득실·시비·영욕이 모두 마음에 들어오지 못하였다. 전혀 생업을 일삼지 않아 양식이 자주 떨어졌으나 굶주림을 참았다. 남들은 이것을 견딜 수 없었으나 그는 태연히 지나곤 하였다.”라고 하였다.

또 허봉(許篈 : 1551~1588)이 지은 『해동야언(海東野言)』에 따르면 서경덕은 “집이 가난하여 혹 며칠 동안 밥을 짓지 못하여서, 안자(顔子)의 가난에 머문 정도는 아니나 항상 태연하였다. 평생 남과 다른 특이한 행동은 없고 시골 사람들과 더불어 말하여도 일찍이 그 다른 점을 보지 못하였다.”라고 말하고, 또 “얼굴이 환하게 밝고 눈이 샛별 같았으며 경지가 좋은 곳을 만나면 일어나 춤을 추었다.”라고 하였다. 등장하는 안자는 공자의 제자로 가난해도 도를 즐긴 삶을 살았으므로 공자가 매우 칭찬한 안회(顏回)이다.

그리고 『오산설림초고(五山說林草藁)』의 저자인 차천로(車天輅 : 1556~1615)는 서경덕의 제자 차식(車軾)의 아들인데, 기록 자체가 상당히 신빙성이 있다. 곧 “화담이 내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사람의 학문에 유학이 가장 어렵고, 불교가 다음이고, 선도(仙道 : 도교)가 가장 아래다.’라고 하였다. 또 황해도 감사로서 화담 선생과 서로 아는 자가 있어 선생을 초청하여 음악 연주를 듣고 즐겼는데 선생이 취한 뒤에 일어나 춤을 추니, 사람이 모두 신선인가 여겼다. 하루를 머무르고 곧 돌아왔는데, 감사가 많은 노자와 종이·붓을 드렸으나, 선생은 모두 받지 않고 단지 쌀 다섯 되만 받을 뿐이었다.”라고 전한다.

그러니까 서경덕은 가난했어도 거기에 개의치 않고 배우기 좋아하고 유학의 도를 좋아하여 즐겼다는 뜻이다. 가난이 그의 학문하는 즐거움을 빼앗지 못했던 사례이다.

그렇다면 혹자는 이런 질문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안빈낙도의 삶을 위해서는 벼슬하지 않고 살아야 하느냐고 말이다. 꼭 그렇지 않다. 이에 대한 답은 이이의 석담일기에 보인다. 곧 “천하의 일에서 바른 것이 이기는 경우는 항상 적고 바르지 못한 것이 이기는 때는 항상 많다. 이러므로 군자가 비록 많아도 한 소인이 군자들을 헐뜯는 말이 임금의 귀에 몰래 들어가면 잘 다스려지는 나라를 혼란스럽게 바꾸어놓을 수가 있다. 하물며 소인은 많고 군자가 적으면 어떻겠는가?”라고 하여 군주제의 한계를 잘 말하고 있다.

비록 그래도 벼슬길에 나아가 재상까지 지낸 인물도 있다. 성현(成俔 : 1439~1504)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 보인다.

 

정갑손(鄭甲孫)은 용모가 여러 대에 걸쳐 재상을 지냈으나, 청빈하여 집에는 모아둔 재물이 없어 베 이불을 덮고 베 요를 깔고 거처하면서도 오히려 편안하고 즐겁기만 하였다. 늘 비분강개로 곧은 말을 하여 권력 있고 세력 있는 자를 피하지 않으니, 그에게 감화되어 탐욕스러운 사람도 결백하여지고, 나약한 사람은 뜻을 세우게 되었는데, 조정에서도 믿고 중히 여겼다.

 

정갑손이 도를 얼마나 즐겼는지 자세하지 않으나 적어도 가난을 즐겼고 바른 도리로 살았음을 알 수 있다. 결국 벼슬을 하든 안 하든, 가난하든 안 하든 각자의 의지와 행위에 달린 문제이지만, 예나 지금이나 올바른 사람이 부자가 되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임은 틀림없다.

 

당신은 무엇을 즐기는가?

가난을 감수하고서라도 즐기는 무엇이 당신에게 있는가? 학문이나 예술에 종사하면서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은 참 많다. 그들은 그것이 부자로 사는 방도가 못 됨을 알면서도 굳이 좋아서 선택했다. 훗날 가난이 괴로워 선택을 후회하며 다른 길을 모색하는 사람들도 있다. 오늘날은 선비들처럼 유학의 도를 즐기는 사람은 많지 않겠지만, 적어도 자기 평생에 걸쳐서 하는 일을 즐기는 사람들은 꽤 있다.

하지만 그 즐기는 일이 합리적인 근거와 예술적인 아름다움에 바탕을 둔다면 좋겠다. 허황하고 근거 없는 일에 빠져 즐겼다간, 나중에 인생도 망치고 후회할 일만 남을 테니까.

 

이치에 맞는 삶

 

 

점과 풍수지리

과학이 이처럼 발달한 21세기에도 점치는 일이 성행한다. 온·오프라인을 통틀어 합쳐보면 예전보다 더 늘어나고 있다. 왜 그것이 줄어들지 않을까? 현대인들은 정규·비정규 교육을 통해서 과학적·합리적 삶의 중요성을 익히 배워서 알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삶에 있어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게다가 종교 또한 그것을 부추기는 경향이 없지 않다. 다시 말하면 대중이 종교를 믿는 방식이 기복신앙의 형태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점치는 일이 지금까지도 왕성한 까닭은 인간의 삶이 불안하기 때문이다. 그 불안은 과거 농경사회보다 지금이 더 한 것 같다. 그래서 합리적으로 생각할 시간과 여유가 없이 다짜고짜 점이나 종교에 의지하려고 한다. 또 한편 자신의 삶을 합리적으로 꾸려나가는 능력 부족도 작용한다. ‘합리(合理)’란 이성에 부합하는, 달리 말하면 이치에 맞는 것인데, 그렇게 살려면 상당한 지식과 거기에 경험을 보태서 지혜가 있어야만 본인의 삶과 연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평생 입시와 각종 시험에 찌든 한국인들에게 그것을 기대하기는 무척 어려운 일이다.

미신과 관련해서 풍수지리를 빼놓을 수 없다. 서양 문화가 우리 사회를 주도하면서 풍수지리를 미신으로 여기던 때가 있었다. 그러다가 그에 대한 합리적 성격을 규명하면서, ‘알면 과학 모르면 미신’이라는 유행어가 번지기도 했다.

이처럼 풍수지리에는 합리적 요소와 비합리적 요소가 뒤섞여 있다. 가령 집터를 비롯한 궁궐터 등은 주변 환경과 조화를 이루어 자연재해를 예방하고, 더 나아가 다른 지역과의 교류와 영향 관계를 고려한다면, 인문지리학과 같은 성격이 드러난다. 하지만 묘지 선택의 결과로 말미암아 그 영향이 자손에게 미친다는 생각은 어떤 심리적 역할 외에는 전혀 근거 없어 보인다. 가령 서양인들은 공동묘지에 묘를 써도 제각기 운명이 다를 뿐만 아니라, 같은 터에서 잘 되고 못 되는 사람이 있다는 점은 그것이 근거 없음을 보여준다. 조선 후기 홍대용(洪大容)은 묘지와 자손의 연관관계가 근거 없음을 논파했다.

그렇다면 대동야승에 나타난 조선 전기 선비들은 어땠을까? 이런 점과 풍수지리와 선비정신은 어떤 관계 속에서 규명하여야 할까? 선비정신의 핵심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주제 가운데 하나임은 분명하다.

 

유학의 합리성

선비들이 점이나 풍수지리 따위에 어떻게 접근했는지 그 사례를 살펴보기 전에, 먼저 다수 선비의 의식을 지배하는 유학에서 그것들을 어떻게 보았는지 살펴봐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좀 더 문제의 성격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곧 점이나 풍수지리에서 추구하는 심리적 소망 또는 의지하는 내용을 유학에서 다루는 것과 같은 라인에서 취급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대개 공자와 주역 사상에 드러난다.

먼저 공자의 사상을 보면 앞선 글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귀신을 멀리하고 공경하라는 말이나 삶도 아직 모르는데 죽음을 어찌 알겠는가?”라는 말이나,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말하지 않았다는 논어의 말에서 그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곧 사후의 문제나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신비적이고 초자연적인 힘이나 미신 따위와 일정한 거리두기를 했다는 점이다. 오늘날 점치는 문제와 이것을 연결하면, 점치는 행위 그 자체는 미래 예측과 관계되기 때문에 문제 될 것은 없다. 다만 점을 칠 때 그 방법에서 무엇을 매개로 하느냐에 따라, 다시 말해 인과적 연관성에서 전혀 근거가 없거나 초자연적 무엇에 의지한다면, 그것이 공자가 생각하는 것과 거리가 있다는 뜻이다.

한편 과학적 사고가 팽배한 현대인의 시각에서 볼 때 약간의 이해할 수 없는 공자의 태도도 있다. 가령 “빠른 번개와 맹렬할 바람에는 반드시 낯빛을 고치고 의관을 정제하였다(「향당」).”라는 행동에서, 현대인은 그것은 자연현상일 뿐인데 공자의 태도는 이상한 행동이라 여길 것 같다. 공자의 이런 태도는 후대에 영향을 미쳐 자연적 이변에 대해 신하들은 물론 임금이 먼저 삼가고 행동을 조심했다. 이런 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여기에 과연 어떤 합리성이 들어 있을까?

또 하나 선비들의 합리성은 점치는 문제에서도 보인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점치는 그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미래 예측이기 때문이다. 선비 중에는 점을 친 사람도 있는데, 그것은 주역의 영향이다.

주역은 원래 점치는 책이다. 하지만 북송의 정이(程頤)가 언어를 통해 주역의 의미를 밝히고 도덕적 당위를 도출한 이래로, 주역을 공부함으로써 점을 치지 않아도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지혜를 키워왔다. 그래서 ‘주역을 제대로 공부한 사람은 점을 치지 않는다.’라는 말도 생겨났다. 사물의 인과관계를 잘 따져 보면, 미래의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 이성이나 직관을 통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점이라기보다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지혜를 알려주는 책으로 기능하였다. 주역이 현대에도 유용한 까닭은 바로 이런 점 때문이다. 이는 모두 주역을 합리적으로 이해하고 재해석했기 때문이다.

 

선비들의 삶과 합리성

유학이 기본적으로 합리성을 추구하지만 모든 선비의 삶이 철저하게 그렇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합리성의 근거가 되는 객관적 지식을 획득할 과학적 방법이 아직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앎이 어디서 기원하고 성립하고 근거가 있는지 어떻게 발전하는지 앎의 문제 그 자체만을 철학적으로 반성하고 따지는 문제는 조선 후기에나 등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합리성과 비합리성을 엄밀히 구분하는 일은 근대 이후에나 가능했던 일이고, 대동야승에 등장하는 선비들의 삶 속에는 그것이 뒤섞여 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 합리적인 모습을 중심으로 소개하겠다.

우선 선비들 가운데 점쟁이에게 점을 친 사람도 있다. 조선 전기 문신인 홍언필(洪彦弼)의 사례가 그것이다. 박동량(朴東亮 : 1569~1635)의 『기재잡기(寄齋雜記)』에 보인다.

 

홍언필이 갑자년(1504) 봄 시험을 볼 때 점쟁이에게 묻기를,

“올해 내가 장원이 되겠는가?”

라고 하니, 점쟁이가 말하기를,

“내가 보기에는 장원을 어찌 감히 바라겠소. 병인년에나 급제하겠소.”

라고 하였다. 그는 경서를 암송하는 시험에서 점수 20점을 얻고, 아직 남은 경서가 있었다. 급히 점쟁이를 불러 말하기를,

“내가 이미 시험에 합격했으니, 네 말이 망령된 것이다.”

라고 하자, 점쟁이가 한참 동안 있다가,

“급제를 못 할 뿐만 아니라 큰 액운이 당장 올 것이니 조심하시오.”

라고 하였다.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조정의 관리가 그를 죄인의 제자라고 하여 하옥시켰다가 귀양 보냈는데, 중종이 반정하자 바로 전시(殿試 : 궐내에서 보는 과거)를 보게 하였으니, 점을 잘 쳤다고 하겠다.

 

이 이야기는 선비가 점을 친 사례이다. 점쟁이가 무엇으로 점쳤는지 이 글에서는 알 수 없어서 점의 성격을 모르겠다. 견한잡록(遣閑雜錄)의 편찬자인 심수경(沈守慶, 1516~1599)은 자신의 점에 대한 태도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세상에 유생으로 점을 좋아하는 자가 많은데, 나는 평생 한 번도 점을 쳐 본 일이 없다. 이는 이순풍(李淳風 : 당나라의 천문학자)과 소강절(邵康節 : 북송의 數理 철학자) 같은 이를 만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점쟁이들은 길흉을 말하나 반드시 믿지는 못한다. 그들이 어떤 해에 길하다고 하면 혹 요행을 바라기도 하지만 끝내 그 징험이 없고, 또 어느 해에는 흉하다고 하면 헛되이 근심과 회의로 세월을 허비하여 끝내 그 징험이 없으니, 어찌 무익하고 해롭지 않은가? 유생으로 혹은 자기가 점을 잘 친다고 하면서 곧잘 사람의 길흉을 말하나 선비로서는 마땅히 할 일이 못 된다.”

이렇게 점을 신뢰하지 않은 선비도 있었고, 또 풍수지리를 반대는 선비도 있었다. 이정형(李廷馨 : 1549~1607)의 『동각잡기(東閣雜記)』에서는 “풍수설에 종사하는 사람이 임금에게 건의하기를, ‘궁성 북쪽 길에 담을 쌓고 문을 만들어 사람들의 내왕을 제한하고, 또 성안에다가 흙을 메워 산을 만들며 명당(明堂)의 물에다 오물을 던지지 말게 하소서.’라고 하니, 어효첨(魚孝瞻)이 상소하여 그 불가함을 힘을 다해 말하니, 세종이 보고 감탄하여 드디어 풍수의 설을 물리쳤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또 앞의 견한잡록에서는 “풍수지리설은 아득하고 거짓말이므로 족히 믿을 것이 못 된다. 그러나 더러는 그 말에 얽매어 그 어버이의 장사할 시기가 지나도 장사를 지내지 않는 자가 있고, 혹은 먼 선조의 묘를 파서 이장하는 자도 있으니, 극히 당치 않는 일이다. 어효첨은 부모를 집 정원 옆에 장사지냈으며, 그 아들인 정승 어세겸(魚世謙)도 그 부모를 장사 지내는 데 땅을 가리지 않았다. 그 집안의 법도가 이러하였으니, 진실로 탄복할 일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풍수지리에 얽매이지 않은 선비의 사례이다.

또 유생들은 무속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동각잡기에 보이는 사례이다.

 

세종이 일찍이 병으로 눕게 되었는데, 나인들이 무당의 말에 현혹되어 성균관 앞에서 기도하므로 유생들이 무녀(巫女)들을 몰아내었다. 임금을 모시던 환관이 매우 노하여 그 자초지종을 아뢰자, 세종이 병을 무릅쓰고 일어나 앉으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일찍이 선비를 양성하지 못할까 걱정하였는데, 지금 선비들의 기개가 이러한 것을 보니 내가 무슨 걱정할 것이 있겠는가. 이 말을 듣고 보니, 내 병이 나은 듯하다.”

 

 

결말은 선비들의 합리적 태도도 바람직하지만, 세종의 태도 또한 그다운 일이다. 사실 민간의 무속은 큰 폐단이 없다면 나라에서 금하지 않았고, 기우제 또한 나라에나 관리들이 지냈다. 어찌 보면 미신이지만, 순자에서는 그것을 꾸밈[文] 곧 문화로 인식했다. 문화로 보면 길하지만 어떤 신비로운 무엇으로 보면 흉하다고 했는데, 대단히 합리적인 사고이다. 조선의 기우제나 구식례(救食禮 : 일식, 월식 때 재난을 피하려는 의식)도 그런 관점에서 이해해야 할 것 같다.

이참에 자연 재앙을 대하는 선비들의 입장도 한번 살펴보자. 홍수나 가뭄 등의 천재지변은 물론이고 평소와 다른 어떤 이변이 있으면, 특히 젊은 신진 선비들은 하나같이 왕이나 대신들의 허물 때문이라고 공격했다.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이는 다분히 정치적이다. 왕권을 제한하거나 군권의 독재를 방지하는 제도가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재변은 그 제도를 떠나서 왕과 대신의 실정을 직접 비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는 한 대 동중서(董仲舒)가 기초한 역사적이고 철학적인 근거가 있지만, 지면상 생략하겠다.

아무튼 왕은 그 점을 미리 알아 스스로 삼가고 근신하며 죄인을 풀어 주기도 하고 신하의 바른말을 널리 구하기도 했다. 그것이 미신이라는 점을 속으로 알았어도, 그 또한 문화이므로 무시할 수 없었던 일이다. 그래서 이이의 석담일기에 “대신이 겨울에 우레가 친다고 사직하니, 대비께서 하교하기를, ‘대신이 무슨 죄가 있겠소. 과실은 임금에게 있소. 만약 어진 선비로서 길이 막혀 등용되지 않은 사람이 있거나 무고하게 죄를 입은 사람이 있거든 모두 풀어 주고 등용하도록 하오.’ 하였다.”라고 전한다. 또 “재앙을 만나 널리 바른말을 구하는 일은 장차 곧고 절실한 간언(諫言)을 들어서 급한 병을 고치려 하는 것이다.”라고 하여, 재앙의 인과적 이해보다 인사의 해결에 초점을 맞춘 것을 보면, 그것의 문화적이고도 기능적 측면에 무게를 둔 발언이다.

또 선비들은 종교적 미신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김시양(金時讓, 1581~1643)의 부계기문(涪溪記聞)에 보이는 사례이다.

 

어떤 한 사람이 노비·토지·집을 절에 시주하고 자손의 복을 빌었다. 그런데 자손이 빈궁하여 스스로 생존할 수가 없었다. 절과 소송을 일으켰으나 여러 번 패소하였다. 성종 때에 임금의 행차에 그가 나타나 꽹과리를 치며 직접 호소하였다. 임금이 친필로 판결문을 써 주기를,

“부처에게 재물을 바친 것은 복을 구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부처가 영험이 없어서 자손이 빈천하니, 재물은 본 주인에게 돌려주고 복은 부처에게 돌려주라.”

라고 하였으니, 위대하다. 임금의 말씀이여! 한마디 말로 소송을 결말짓게 하는 것은 송사를 없게 하는 뜻을 겸한 것이다.

 

성종의 합리적 판결도 대단하지만, 종교가 합리성을 떠나 기복적 미신과 결탁하면 그런 일이 벌어진다. 오늘날이라고 해서 없는 일은 아니다. 조선 시대 합리적으로 산 사람들은 일부 선비에 해당하지만, 그 정신이 오늘날까지 계승된다면 사람들의 삶이 훨씬 개선될 것이다.

 

주체적으로 살아갈 능력 구비

우리는 합리성을 존중하라는 교육을 받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합리성을 따지기 어려울 정도로 현실 문제가 복잡하기도 하고, 무엇이 합리적인지 판단도 미숙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어려운 일을 당하거나 곤란한 문제를 당했을 때 종교나 점 또는 무속의 힘을 빌려 쉽게 해결하려고 한다. 요행히 해결되는 일도 있지만, 해결되지 않고 장기적으로 거기에 더 빠져들어 낭패 본 사람도 적지 않다.

자기 삶을 누구에게 의존하지 않고 주체적으로 살아갈 능력이 필요한데, 그것은 다름 아닌 합리적 지식과 그것을 적용해 본 풍부한 경험에서 나오는 지혜이다. 인생 공부를 제대로 해야 지혜를 갖출 수 있다.

 

솔선수범

 

리더의 역량

현대는 그 어느 때보다 리더십이 강조되고 있다. 그것은 전근대사회보다 훨씬 많은, 다양한 조직과 활동이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전근대사회에는 없던 크고 작은 기업과 사회단체의 조직이 추가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리더의 자질과 역할은 그 조직의 성패는 물론 존망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다. 리더의 역량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가운데 솔선수범(率先垂範)이 있다. 솔선수범은 솔선과 수범으로 이루어진 용어이다. 전통적 의미로 솔선은 일찍이 사기에 보이는데 ‘앞장서다’의 의미이며, 수범은 한 무제가 세 왕을 책봉하면서 한 말로서 ‘법식을 내려 보이다’라는 본보기로서 모범의 뜻인데, 일찍이 남북조 시대 양나라 유협(劉勰)의 문심조룡(文心雕龍)에 보인다. 현대적 의미는 아마도 영어의 ‘leading by example’을 번역한 말일 것이다.

오늘날 교양인이라면 리더십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누구나 리더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작게는 가정이나 소모임에서 군대의 상급자로서 직장의 부서장과 동창회나 모임에서 책임을 맡을 수 있고, 더 나아가 정부나 학교나 지자체 조직의 기관장 또는 기업이나 작은 사업체의 대표가 될 수 있는 일은 매우 흔하다. 이렇게 크고 작은 조직을 이끄는 역량 가운데 중요하게 등장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이 솔선수범이다.

 

수신제가

그렇다면 리더십이 요즘에만 문제가 되고, 솔선수범 또한 현대의 리더에게만 요구되었던 역량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유학이란 달리 말하면 리더십에 관한 학문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일단 유교 경전 가운데 대학만 살펴봐도 금방 알 수 있다. 곧 “대학의 도는 밝은 덕을 밝히는 데 있고, 백성을 새롭게(또는 친애) 하는 데 있고, 지극한 선에 머무는 데 있다.”라는 강령에서 ‘밝은 덕을 밝히는 일’은 리더의 역량 강화이고, ‘백성을 새롭게 하거나 친하게 하는 일’은 역량 발휘의 영역이며, ‘지극한 선에 머문다’라는 말은 성과달성에 해당한다. 그것을 더 자세히 나타낸 8조목을 보면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수신(修身)은 역량 강화에 해당하고, 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는 역량 발휘의 영역이면서 동시에 달성해야 할 성과에 해당한다.

이러한 대학의 정신을 잘 요약한 말이 논어에 등장하는 ‘자기 몸을 닦아 남을 다스린다.’라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이다. 이를 학술적 용어로 바꾸면 안으로 성인이면서 밖으로 왕이 되는 내성외왕(內聖外王)이다. 내성(內聖)은 역량 강화 외왕(外王)은 역량 발휘의 영역이다. 조선 시대 선비들이 입만 열면 왕에게 ‘성군이 되십시오.’라고 한 것도 리더인 왕이 성인처럼 왕 노릇 하라는 주문이다. 그러니까 유학을 리더십의 학문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 일반 리더십과 유학에 있어서 역량 강화의 차이는 그 강조점에 따라 달라진다. 곧 솔선수범, 신뢰 구축, 동기부여, 의사소통, 영향력 확산, 긍정적 풍토조성, 자기 개발, 구성원 개발, 조직 전문성 개발, 성과달성을 고루 강조하는 것이 현대 리더십이라면, 유학에서 가장 먼저 요구되는 역량은 솔선수범, 자기 성찰, 포용, 신뢰 구축, 의사소통 등과 관련된다. 곧 리더의 도덕적 능력과 품성이다. 이를 한마디로 말한다면 수신(修身)과 관련된 일이다. 그래서 대학의 격물·치지·성의·정심도 수신에 수렴된다. 리더인 군주가 자기 몸을 올바르게 닦으면 구성원들이 감화되어 자기 역할을 제대로 할 것이라는 믿음이 작용한다. 이는 선비들의 리더십이 자기 가정과 마을 그리고 벼슬에 나아갔을 때 적용되지만, 그 기초가 되는 것 또한 수신이다. 자식들에게 효도하라고 말하기 전에 선비 본인이 먼저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와 잘 지내며 자녀에게 자애롭게 대하고 부인을 공경해야 하며, 사회적으로는 어른을 공경하며 벗들에겐 신뢰를 받고 정의롭게 행동해야 한다.

 

선비들의 솔선수범

선비들의 솔선수범은 먼저 가정에서부터 출발한다. 사실 가정도 하나의 작은 조직인데 현대 리더십은 별로 다루지 않지만, 옛날에는 대개 대가족제도였을 뿐만 아니라, 사대부 출신의 선비들은 하인까지 거느리고 있었으므로, 가정 내의 리더십이 절실히 요청되었다. 그래서 율곡 이이는 격몽요결에서 「거가(居家)」라는 장을 따로 두어, 선비가 집안을 다스림에 있어서 형제, 아내와 내 자녀, 그리고 형제의 자녀와 하인들을 이끄는 일과 치산(治山)까지 자세히 다루고 있다. 그래서 그 솔선수범은 벼슬하기 전까지는 대개 가정이라는 틀 속에 제한된다.

가정에서 형제들에게 솔선수범한 사람은 처사 성담수(成聃壽)가 있다. 이육(李陸 : ?~?)의 청파극담(靑坡劇談)에 이렇게 전한다.

 

성담수에게는 형제자매가 10여 명이나 있었다. 부모가 돌아가시자 3년 상을 마치고 형제들을 모이게 한 다음 재산을 분배하였다. 이때 담수는 괜찮은 물건을 보면 곧장

“아무개에게 주어라.”

라 말하고, 하인 중에 착실한 자가 있으면 곧장

“아무개에게 주어라.”

라고 말하고, 부수어지고 변변치 못한 물건을 보게 되면,

“이것은 부모님의 뜻이니 내가 가져야겠다.”

라고 말하였다. 시집간 누이동생에게 집이 없어서 부모가 살던 본집을 주고자 했는데, 여러 아우가 굳이 말리기를,

“부모님이 계시던 집은 장자에게 전해져야 합니다.”

라고 말하니, 담수는 말하기를,

“다 같은 부모의 자식으로 나만 홀로 집을 가질 수는 없다.”

라고 하고, 곧 가지고 있던 무명을 내다 팔아 누이동생의 집을 사는 자금으로 주니, 동생 인수도 또한 가재를 팔아 도와주었다. 두 형이 마음을 모아 철없고 어린 여러 동생을 차례로 장가들이고 출가시키곤 하니, 온 집안에 이간하는 말이 없었다.

 

수신제가라는 말이 무색하게 하는 선비의 행동이다. 솔선해서 형제간의 우애를 지키고 재물에 욕심내지 않음으로써 가정의 화목을 이끌었던 사례이다.

또 관리로서 천하고 소소한 일에도 앞장섰던 분도 있다. 임보신(任輔臣 : ?~1558)의 『병진정사록(丙辰丁巳錄)』에 보면 판서를 지낸 “김안국(金安國)은 성품이 부지런하고 치밀하여 천한 일도 꺼리지 않았으며 시종일관 변치 않았다. 언젠가 추수하는 일을 감독할 때는 이삭 하나도 떨어뜨리지 않고, 곡식 한 톨도 마당에 흘려두게 하지 않았으며, 쌀을 찧을 때는 싸라기와 쌀겨도 모조리 저장했다가 춘궁기에 굶주린 백성을 먹이게 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하늘이 만물을 낼 때 모두 쓸 데가 있도록 마련한 것이니, 마구 없애버리면 상서롭지 못하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이 비웃으니 공은 웃으면서, ‘성인은 마음이 세밀하니라.’라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중간급 조직 이상의 리더가 작은 일에 신경 쓰거나 간섭하는 일을 구성원들은 좋아하지 않는다. 옛날의 지체 높은 관리의 이런 모습은 좋아 보이지 않았던지 비웃은 이도 있었지만, 달리 생각하면 절약을 몸소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지체 높은 재상이 청렴하거나 바른 몸가짐을 보여주는 일은 모든 관리의 모범이 되어야 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그 사례 가운데 하나가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의 필원잡기(筆苑雜記)에 보인다.

 

문경공 허조(許稠)는 엄숙하고 방정하며 청렴하고 근신하여 언제나 성현(聖賢)을 사모하였다. 매일 첫닭이 울 때 일어나서 세수하고 머리 빗고 갓과 띠를 갖추고 단정히 앉아서, 날이 다하도록 게으른 빛이 보이지 않았다. 항상 나랏일을 근심하고 사사로운 일은 언급하지 않았다. 국정을 논의할 적에는 자기의 신념을 스스로 지키고 일 처리를 남을 쫓아서 이리저리 아니하니, 당시 사람들은 어진 재상이라 칭찬하였다. 가법(家法) 또한 엄하여 자제들에게 잘못이 있으면 반드시 사당(祠堂)에 고하고 벌을 주며, 하인들에게 죄가 있으면 법에 따라 다스렸다.

 

재상으로서 모범적 행동과 몸가짐을 앞장서 바르게 했다는 기록이다. 행동만이 아니라 재물을 탐내지도 않고 청렴하게 산 재상도 있다. 이 또한 필원잡기의 기록이다.

 

문정공 유관(柳寬)은 공정하고 청렴하여 비록 최상의 지위에 있었으나, 초가집 한 칸에 베옷과 짚신으로 생활하여 살림이 간단하며 소박하였다. 공무를 마친 여가에는 후생을 가르치기에 부지런하니,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와서 뵈려는 이가 있으면 고개만 끄덕일 뿐이요 성명은 묻지 않았다. 일찍이 한 달이 넘도록 장마가 졌는데, 삼대(대마의 줄기)처럼 집에 비가 줄줄 새었다. 그는 우산을 잡고 비를 가리며 부인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우산이 없는 집은 어떻게 견딜꼬?”

라고 하니, 부인이 대꾸하기를,

“우산이 없는 집에서는 반드시 미리 방비가 있을 것입니다.”

라고 말하니 그가 껄껄 웃었다.

 

청렴을 솔선해서 보여 준 재상의 이야기이다. 장마 때 집에 비가 새서 우산을 쓰고 지냈다는 일이 압권이다. 누가 와서 뵐 때 성명을 묻지 않았던 일은 청탁이나 뇌물 받는 일과 거리가 멀다는 뜻이다. 나라나 조직에 이런 리더가 있으면 잘 돌아가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유관은 세종 때 우의정을 지냈고, 앞의 허조 또한 세종 때 우의정과 좌의정을 지냈다.

전통적으로 선비들의 수신하는 교과서를 보통 대학이라 알고 있지만, 반만 맞는 말이다. 대학은 수신의 이론적 근거가 풍부한 책이고, 실생활의 행동 하나하나에서 몸을 바르게 하는 내용은 소학에 들어 있다. 그런데 흔히 도를 전수하는 계보인 도통(道統)의 관점에서 조선 성리학의 흐름을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진다고 말하는데, 길재에서 조광조까지는 이 소학의 실천을 모두 매우 중요시했다. 당시 김굉필을 ‘소학 동자’라고 일컫기도 하지만, 알고 보면 이들 모두 소학 내용의 실천을 생활화했다고 할 수 있다. 다음은 권별(權鼈 : ?~?)의 『해동잡록(海東雜錄)』에서 소개하는 김숙자(金叔滋)의 사례이다.

 

일찍이 길재의 문하에 유학하여 학문에 조예가 깊은 당대의 명유(名儒)가 되었다. 세종 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만년에 벼슬을 그만두고 남으로 돌아가 응천(凝川) 위에 초당을 짓고 산천에 취미를 붙이고 뜻대로 노닐면서 스스로 강호산인(江湖散人)이라 일컬었으며, 벼슬이 성균관 사예(司藝)에 이르렀다.

그는 평소에 항상 이른 새벽에 일어나 세수하고 의관을 바르게 하고 앉아, 비록 처자나 하인이란 할지라도 그의 게으른 모습을 보지 못하였고, 손님이 없을 때도 머리에서 관을 벗지 않았으며 허리에서는 가죽 띠를 풀지 않았다. 아름답고 화려한 의복이나 말안장을 좋아하지 않고 오로지 검소하고 튼튼한 것을 마련하였을 뿐이다. 말고삐나 안장의 끈이 끊어지면 삼으로 꼰 새끼로 대신하였다.

그의 사람됨은 행동이 조용하고 말이 적었으며 언행을 모두 법도에 맞게 하였다. 어버이를 효도로써 받들었고, 효도와 우애를 돈독하게 실천하였다. 그리고 사람을 가르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먼저 자녀나 배우는 자들이 소학에 따라 어버이를 사랑하고 어른을 공경하며, 스승을 존경하고 벗과 친하게 지내는 일에 마음과 힘을 다하게 하여 그 근원을 함양한 뒤에 다른 책으로 넘어가기를 허락하였다. 그래서 그의 가르침은 회초리로 때릴 필요가 없었고 배우는 이도 즐겁게 배웠다.

 

이는 비단 김숙자 한 사람의 모습으로만 보면 안 된다. 소학을 실천한 이들의 기본적 생활 태도가 그렇다는 말이다. 예의 김굉필이나 조광조의 등의 삶을 들여다보아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래서 이들의 학문과 조선이 5백 년 동안 유지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물론 후대에 성리학의 폐단이 없지는 않았으나, 그것은 이들의 잘못은 아니라 후학들이 그들처럼 학행이 일치된 삶을 살면서, 솔선수범하고 시대에 맞게 포용적이며 신뢰를 받고 영향력을 제대로 행사했는지의 문제일 것이다.

 

현대의 리더와 선비

현대의 최신 리더십은 리더의 역량을 골고루 발휘해야 하지만, 리더에게 고도의 자질과 역량을 요구하고 있다. 특이 이 자질에는 도덕적이고 공정하며 사적인 이익보다 조직의 이익을 우선하는 것으로 사실상 유학에서 말하는 성인과 같은 품성을 요구하고 있다. 곧 자기 성찰과 학습, 포용, 신뢰, 용기 등은 유학에서 말하는 군자의 상과 다를 바 없다. 그것은 냉엄한 현실에서 기업이나 조직이 살아남기 위해서 연구된 내용인데, 이는 왕조를 책임진 군주도 나라가 망하지 않게 경영해야 하는 맥락과 같은 선상에 있기 때문이다. 결국 도덕적으로나 업무적으로 탁월한 리더가 조직을 잘 이끌고 소기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점에 귀결하고 있다.

현대의 선비라면 바로 이런 리더여야 한다. 과거부터 전해온 한문 서적만 읽고 외며, 별로 하는 일도 없이 세상일과 무관하게 도덕군자인 양 점잖은 모습만 보이는 자는 진정한 선비가 아니다. 그가 무엇이 되었든 조직 내에서 어떤 역할을 하든 업무에 능통하며 도덕적이면 그도 선비이다. 오로지 정권이나 기업이나 정당이나 군대나 경찰이나 또 무엇이든 간에 해당 조직의 이익만을 위해 상대를 속이거나 소비자들을 우롱하는 일은 오늘날의 선비가 할 일은 아니다. 조직의 이익만을 위해서는 혹 능력 발휘를 잘할지 모르지만, 시민과 국민과 나아가 인류의 복지에 보탬이 되는 보편적 가치를 지향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현대의 선비인지 스스로 점검해 보시라.

 

품격있는 기상

 

선비다운 인물은 다 죽었다?

사회가 어렵거나 혼란할 때 또는 집단 사이의 이익으로 서로 갈등할 때, 나라에 큰 어른이 없다거나 참된 지식인이 없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이 말을 역으로 생각하면 이전에는 그런 어른이나 지식인이 있었다는 말이겠다. 사회적 스승이 없다는 점에서 비극이다!

흔히 난세에 영웅호걸이 난다고 했던가? 구한말이나 일제 강점기에는 수많은 애국지사와 우국지사들이 나온 것은 그 점을 말해주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선비정신의 전통이 많이 남아 있어서 그랬을 것이라 본다. 이른바 의사(義士)나 열사(烈士)나 지사(志士)라고 불렀던 분들은 모두 이때 나왔고, 선비 사(士)자를 붙인 것을 보면 선비의 표상으로 여긴 듯하다.

그렇다면 왜 오늘날은 그런 선비들이 없을까? 우리 현대사를 되짚어 보면 최근에 이를수록 그런 선비다운 인물이 점점 줄어드는 것처럼 보인다. 최근 몇 년 사이의 모습을 돌아보면 이른바 나라에 어른이라 할 수 있는 원로들이 특권층만 옹호하는 편향적이어서, 국가 공동체 전체의 이익과 안녕 그리고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는 사람이 드물다. 젊은이들은 그런 사람들을 나라의 어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아마도 과거 냉전 이념의 사고에 갇혀 있거나 그들 또한 기득권 집단에 속해서 그런지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은 언론에서조차 참다운 어른을 전혀 다루지 않아서이다. 장사에 도움이 안 되고, 또 그런 어른을 알아볼 식견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정당조차 외곽 조직에 이들을 편입시켜 이용하려고 하나, 어찌 뜻있는 선비가 그 장단에 놀아나겠는가? 게다가 선비는 자기의 덕을 쌓으면 그만이지 굳이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기에 자진해서 자신을 알리려는 구차한 짓도 안 한다. 더구나 현대는 자본주의 문화가 극도로 발달하여 모든 게 이윤추구와 연결되어 있어서, 제도교육 자체가 과거의 선비다운 인물을 배출하지 못하고 있는 점도 그 까닭 가운데 하나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선비가 모두 죽었다는 착시 현상을 일으킨다. 그렇다고 해서 참된 선비가 어디 없겠는가? 선비가 보이지 않는 까닭은 참된 선비의 기상이 먼저 어떤 건지 알아야 이해할 것 같다. 이글은 선비정신의 마지막 글로서 앞의 내용을 종합하는 성격을 띠며, 선비가 각자의 일과 사회에 대해서 어떤 마음과 자세를 지니는지 살필 것이다.

 

유교 경전과 선비의 기상

경전의 내용을 살펴보기 전에 도대체 기상(氣像)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국어사전에는 ‘사람이 타고난 기개나 마음씨 또는 그것이 겉으로 드러난 모양’이라 풀이하고 있다. 이 설명은 선천적인 성격과 그것이 드러난 것에 치중하고 있다. 물론 사람의 행위는 타고난 성격의 영향을 받지만, 그것이 절대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교육이 굳이 존재할 이유도 없고 수양도 필요 없다. 선천적으로 거칠고 난폭한 사람도 적절한 교육과 자기 수양을 통해 훌륭하게 된 분들이 많은 점을 보면, 타고난 성격이 사람의 모든 행위를 결정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이때의 기상은 사람의 마음씨와 그것이 겉으로 드러난 모양과 행위라 재정의할 수 있다. 바로 그 마음씨는 유전적 요소와 환경·교육적 요인이 통합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렇게 본다면, ‘선비의 기상’이란 타고난 기질과 성격에 큰 비중을 두기보다 공부와 수양을 통해 함양된 선비다운 기상에 큰 의미를 두어야 할 것 같다. 이것은 달리 ‘선비의 기개(氣槪)’라고 불러도 좋겠다.

논어에서는 선비의 기상이 대체로 군자의 특징을 나타내는 말에 자주 등장한다. 가령 군자는 “굳세고 질박하며 말이 어눌한 사람이 인(仁)에 가깝다(「자로」).”라는 말이나, “지혜로운 자는 미혹되지 않고 어진 사람은 근심하지 않으며 용감한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는다(「자한」).”라는 말이나, 또 “남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아보지 못함을 근심하라(「학이」).”라는 말, 그리고 군자의 “행동거지는 난폭하고 방자한 것과 거리가 멀며, 얼굴빛을 바르게 함은 믿음직스럽고, 말투는 비루하거나 이치에 어긋나는 것과 멀다(「태백」).”라는 등 이외에도 무척 많다.

맹자에서 선비의 기상과 관계된 대표적 내용은 호연지기(浩然之氣)와 대장부(大丈夫)가 있다. 호연지기는 일종의 도덕적 용기로서, 그것은 의(義)를 모아 바르게 길러 얼마든지 크게 배양할 수 있다고 한다. 그 호연지기를 잘 배양한 사람이 선비다운 기상을 발휘할 것이다.

또 선비의 기상으로 대장부를 설명하기를 “천하의 넓은 곳에 거처하고 천하의 바른 위치에 서며 천하의 큰 도리를 실천하되, 뜻을 얻어서는 백성과 공유하고 뜻을 얻지 못하면 홀로 그 도리를 실천한다. 부귀가 그를 음란하게 할 수 없고 빈천이 그 마음을 바꾸지 못하며 위협과 무력이 그를 굴복시키지 못하니, 이런 사람을 일러 대장부라고 한다(「등문공하」).”라고 하였는데, ‘뜻을 얻는다’라는 말은 군주의 신임을 받아 벼슬에 나간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호연지기는 대장부가 되는 일종의 조건이다. 대장부는 타고난다기보다 호연지기를 쌓아 배양함으로써 계발된다고 하겠다. 우리의 언어풍습에 지금은 많이 퇴색하였지만, 몇 십 년 전만 해도 남자들이 무엇을 결단할 때 ‘사나이 대장부가 그걸 못하겠는가?’라는 말을 자주 들었는데, 맹자의 이 대장부 사상이 전통문화에 깊이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하물며 성현의 가르침을 배워 따르고자 했던 조선 선비들이겠는가?

 

조선 선비의 기상

앞의 아홉 편의 글에서 나타난 선비정신은 그 모습과 행위 면에서만 본다면 선비의 기상이 이미 다 드러났다고 하겠다. 그래서 이글은 그것들을 정리하는 성격이 강하지만, 인물에 따라 좀 특이한 점을 사례별로 제시하겠다.

선비의 자질과 기개는 어떠하며 참다운 선비는 또 어때야 할까? 이에 대해서 연산군 때의 문신 김일손(金馹孫)의 말이 있는데, 허봉(許篈 : 1551~1588)의 『해동야언(海東野言)』에 기록하기를, “선비로서 병법을 모르면 참된 선비가 아니다. 훈고(訓詁 : 경전의 옛 뜻을 조사하여 밝힘)나 하는 선비는 고루하고, 사장(司章 : 문장을 짓는 일)을 하는 선비는 화사하며, 문학을 하는 선비는 과장을 잘하나 참된 선비는 실속 있어 활쏘기·말타기·글쓰기·셈하기가 그 분수 안에 있고, 재정(財政)이나 무기를 다룰 때도 그 최고의 기능을 발휘하지 않음이 하나도 없다.”라고 하였는데, 선비는 두루 여러 일을 잘해야 하지만 특히 병법을 몰라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다. 아마도 문보다 무를 천시하는 당시 풍조를 두고 한 말로 보인다. 논어에서는 “군자는 한 분야에만 쓰이는 전문가가 아니다(「위정」).”라는 전통 때문일 것이다. 일단 선비의 기상은 이런 여러 분야에서 드러난다.

먼저 윗사람의 기세에 눌리지 않고 바른말 하는 일을 꼽을 수 있다. 임보신(任輔臣 : ?~1558)의 『병진정사록(丙辰丁巳錄)』에 수록된 세조 때의 허종(許琮)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허종이 처음에 벼슬하였을 때 불교를 업신여기다가 세조의 노여움을 샀다. 세조가 위협하여 그 지조를 시험해 보았으나 그는 태연자약하여 바른 자세를 잃지 않았으므로 도리어 벼슬을 올려주었다. 이로부터 명성이 날로 떨치어 등급을 뛰어넘어 재상이 되었다. 그는 용모가 위대하고 풍채가 장엄하여 위엄이 가을 하늘과 겨울과 같아 바라보기에도 씩씩하였으나 가까이 대하여 보면 온화하였다. 평소에 성격이 호방하고 남다른 기상과 절개가 있고, 집안사람이 생업을 일삼지 않아 거처하는 방이 좁고 누추하였으나 태연하였다. 항상 녹봉을 받으면 즉시 친척 중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친족의 자제에게 친절하게 글 읽기를 권하고, 가르침에 게으른 일이 없었으며, 권세를 좋아하지 않아 집으로 사사로이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다.

 

세조가 그의 지조를 시험한 내용은 이정형(李廷馨 : 1549~1607)의 『동각잡기(東閣雜記)』에 보이는데, 세조는 불교 문제로 자기를 비판하던 이전의 일로 일부러 그를 끌어내려 곤장을 치게 했다. 그는 그때 꿋꿋하게 동요하지 않은 채 행동이 평소와 다름이 없고 음성이 우렁차고 분명하였다는 말에 보인다. 올바른 일에 기세가 전혀 꺾이지 않은 모습이다.

이런 선비의 기개는 죽음 앞에서도 발휘되었다. 연산군 때의 문신 이극균(李克均)의 일화인데 해동야언에 보인다.

 

우의정 이극균은 인동(仁同)으로 귀양을 갔었는데, 연산군이 관원을 보내서 사약을 내렸다. 관원이 함께 가지고 온 임금의 글을 펼치니 그가 말하기를,

“내게 무슨 죄가 있어서 이러는가?”

라고 하며 분개하는 기색이 등등하였다. 그리고 관원에게 말하기를,

“내 나이가 70이고 몸에는 병이 많으니, 내가 죽어도 무슨 한이 있겠는가? 다만 나라에 공로가 있고 내게 죄가 없으니 너는 마땅히 이 말을 돌아가 임금께 아뢰라. 그렇지 않으면 죽은 나의 혼이 너에게 벌을 줄 것이다.”

라고 하였다. 돌아와서 연산군에게 아뢰니, 연산군은 더욱 노하여 시신의 뼈를 부수게 하였다.

 

폭군 연산군의 성향을 아는 대신이 자기 말의 결과가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할 말을 당당히 하는 점은 선비의 기개가 없으면 결코 할 수 없는 일이다. 이렇게 왕이라 하더라도 뜻을 굽히지 않는 선비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맹자의 말대로 위협이나 위엄이 선비의 뜻을 바꾸게 못 하는 사례이다.

다음은 관리로서 책무를 다해 불의한 자들을 벌벌 떨게 한 선비의 기상이다. 이이의 석담일기에 나오는 사례이다.

 

장령 정인홍(鄭仁弘)이 어버이를 뵈려 시골로 돌아갔다. 인홍은 사헌부에 있으면서 위엄 있게 다스려 관리들의 사기가 진작되고 되었고 거리의 장사치들까지도 감히 금지하는 물건을 밖에다 내놓지 못하였다.

한 무부(武夫 : 무인 혹은 용감한 사람)가 시골에서 입경하여 어떤 이에게 말하기를,

“장령 정인홍은 그 형상이 어떻게 생겼는가? 그 위엄이 먼 외방까지 뻗치어 병사·수사나 수령 무리까지도 두려워하고 삼가 경계하니, 진실로 장부다.”

라고 하였다. 이 말을 이이가 듣고는 웃으면서 말하기를,

“정인홍이 사헌부의 관원이 되니 많은 사람이 꺼리고 미워하는데, 이 무부는 감히 칭찬하니 그가 바로 장부다.”

라고 하였다. 이때 그가 어버이를 뵈려 시골로 돌아가니, 성안의 방종한 자들은 모두 기뻐하기를,

“이제야 어깨를 펴겠다.”

라고 하였다. 이이는 말하기를,

“인홍은 강직하나 생각하는 계책이 두루 소상치 못하고, 학식이 밝지 못하니 용병(用兵)에 비유하면 돌격 장수는 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율곡의 인물평가는 꼼꼼하고 장단점을 뚜렷이 대비시키는 특징이 있는데, 누구든 일방적으로 후하게 평가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 정인홍에 대한 이 정도의 평가는 대단한 일이다. 요약하면 강직한 선비의 기개이다.

분야별로 더 소개할 인물이 넘쳐나지만, 이러한 선비의 기상을 종합적으로 잘 보여준 인물이 있다. 조선 초기 문신인 안경공(安景恭)에 대한 평가가 권별(權鼈 : ?~?)의 『해동잡록(海東雜錄)』에 보인다.

 

안경공은 타고난 성품이 간결하고 정중하며 마음가짐이 곧고 겸손하며, 행실이 공손하고 일에 임해서는 삼가고 상세하며, 말을 빨리하거나 갑자기 안색을 달리하는 일이 없었다. 또한 일찍이 힘 있는 세력에 붙어 우쭐대거나 기죽는 일이 없었고, 또 독특하게 주장하여 잘난 체하지도 않았다. 두 번이나 이조 판서를 맡았으나 사사로이 청탁하는 사람은 쓰지 않았다

 

자기 몸을 닦아 수양한 웬만한 선비라면 그 기상이 이랬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 소개한 인물만 그랬다고 오해하면 안 된다. 이는 성현의 가르침을 몸소 따르고 익힌다면 할 수 있고, 벼슬만 제외하고 현대에도 실제로 있을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와 선비의 역할

이상에서 살펴보면 선비의 기상은 너그럽고 온화하면서도 엄중하다. 또 바르다고 여기는 신념을 절대로 굽히지 않아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며, 가난하고 신분이 낮아도 위협이나 위세에 기죽지 않고, 한 가지 일에만 전념하여 세상을 잊지도 않으며, 말을 앞세우거나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늘 겸손한 모습을 보인 것 등이 선비의 기상으로 드러난다.

현대 사회에 이런 선비가 있을까? 필자는 있다고 믿지만 드러나지 않는 까닭은 마치 소인과 간신들이 조정을 장악했을 때 선비들이 피하고 숨어 사는 양상과 같다고 본다. 권력에 아부하고 권력자의 온갖 행위를 매체를 통해 빨아주어야 권력의 눈에 들어 발탁되는 일은 선비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또 참된 선비는 대중에게 아첨하지 않는다. 대중은 욕망에 따라 부침하기 때문이다. 곧 그들이 원하는 말을 해주는 대가로 그들의 주목을 받는 짓도 선비가 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중들은 당장에 이익을 주거나 돈을 버는 데 실용적이지 못한 선비의 주장 따위는 현실과 동떨어진 말이라 비웃는다.

그렇다면 선비로 자처하는 사람은 언제까지나 숨어 살면서 고고하게 살 것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지위가 높든 낮든 각자의 위치에서 앞서 말한 선비의 기상대로 살면 된다. 남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간에 그것은 자신이 쌓은 덕과 상관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구나 선비라 자부할 수는 있어도, 누구나 선비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공부와 노력에 달린 일이니까 그렇다. 게다가 선비는 남에게 보여주는 일에 힘쓰지 않으니 그를 알아보기도 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