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격있는 기상 (10)

『대동야승(大東野乘)』을 통해 본 조선 시대 선비 이야기 Ⅲ

선비정신

 

품격있는 기상

선비다운 인물은 다 죽었다?

사회가 어렵거나 혼란할 때 또는 집단 사이의 이익으로 서로 갈등할 때, 나라에 큰 어른이 없다거나 참된 지식인이 없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이 말을 역으로 생각하면 이전에는 그런 어른이나 지식인이 있었다는 말이겠다. 사회적 스승이 없다는 점에서 비극이다!

흔히 난세에 영웅호걸이 난다고 했던가? 구한말이나 일제 강점기에는 수많은 애국지사와 우국지사들이 나온 것은 그 점을 말해주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선비정신의 전통이 많이 남아 있어서 그랬을 것이라 본다. 이른바 의사(義士)나 열사(烈士)나 지사(志士)라고 불렀던 분들은 모두 이때 나왔고, 선비 사(士)자를 붙인 것을 보면 선비의 표상으로 여긴 듯하다.

그렇다면 왜 오늘날은 그런 선비들이 없을까? 우리 현대사를 되짚어 보면 최근에 이를수록 그런 선비다운 인물이 점점 줄어드는 것처럼 보인다. 최근 몇 년 사이의 모습을 돌아보면 이른바 나라에 어른이라 할 수 있는 원로들이 특권층만 옹호하는 편향적이어서, 국가 공동체 전체의 이익과 안녕 그리고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는 사람이 드물다. 젊은이들은 그런 사람들을 나라의 어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아마도 과거 냉전 이념의 사고에 갇혀 있거나 그들 또한 기득권 집단에 속해서 그런지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은 언론에서조차 참다운 어른을 전혀 다루지 않아서이다. 장사에 도움이 안 되고, 또 그런 어른을 알아볼 식견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정당조차 외곽 조직에 이들을 편입시켜 이용하려고 하나, 어찌 뜻있는 선비가 그 장단에 놀아나겠는가? 게다가 선비는 자기의 덕을 쌓으면 그만이지 굳이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기에 자진해서 자신을 알리려는 구차한 짓도 안 한다. 더구나 현대는 자본주의 문화가 극도로 발달하여 모든 게 이윤추구와 연결되어 있어서, 제도교육 자체가 과거의 선비다운 인물을 배출하지 못하고 있는 점도 그 까닭 가운데 하나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선비가 모두 죽었다는 착시 현상을 일으킨다. 그렇다고 해서 참된 선비가 어디 없겠는가? 선비가 보이지 않는 까닭은 참된 선비의 기상이 먼저 어떤 건지 알아야 이해할 것 같다. 이글은 선비정신의 마지막 글로서 앞의 내용을 종합하는 성격을 띠며, 선비가 각자의 일과 사회에 대해서 어떤 마음과 자세를 지니는지 살필 것이다.

유교 경전과 선비의 기상

경전의 내용을 살펴보기 전에 도대체 기상(氣像)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국어사전에는 ‘사람이 타고난 기개나 마음씨 또는 그것이 겉으로 드러난 모양’이라 풀이하고 있다. 이 설명은 선천적인 성격과 그것이 드러난 것에 치중하고 있다. 물론 사람의 행위는 타고난 성격의 영향을 받지만, 그것이 절대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교육이 굳이 존재할 이유도 없고 수양도 필요 없다. 선천적으로 거칠고 난폭한 사람도 적절한 교육과 자기 수양을 통해 훌륭하게 된 분들이 많은 점을 보면, 타고난 성격이 사람의 모든 행위를 결정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이때의 기상은 사람의 마음씨와 그것이 겉으로 드러난 모양과 행위라 재정의할 수 있다. 바로 그 마음씨는 유전적 요소와 환경·교육적 요인이 통합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렇게 본다면, ‘선비의 기상’이란 타고난 기질과 성격에 큰 비중을 두기보다 공부와 수양을 통해 함양된 선비다운 기상에 큰 의미를 두어야 할 것 같다. 이것은 달리 ‘선비의 기개(氣槪)’라고 불러도 좋겠다.

논어에서는 선비의 기상이 대체로 군자의 특징을 나타내는 말에 자주 등장한다. 가령 군자는 “굳세고 질박하며 말이 어눌한 사람이 인(仁)에 가깝다(「자로」).”라는 말이나, “지혜로운 자는 미혹되지 않고 어진 사람은 근심하지 않으며 용감한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는다(「자한」).”라는 말이나, 또 “남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아보지 못함을 근심하라(「학이」).”라는 말, 그리고 군자의 “행동거지는 난폭하고 방자한 것과 거리가 멀며, 얼굴빛을 바르게 함은 믿음직스럽고, 말투는 비루하거나 이치에 어긋나는 것과 멀다(「태백」).”라는 등 이외에도 무척 많다.

맹자에서 선비의 기상과 관계된 대표적 내용은 호연지기(浩然之氣)와 대장부(大丈夫)가 있다. 호연지기는 일종의 도덕적 용기로서, 그것은 의(義)를 모아 바르게 길러 얼마든지 크게 배양할 수 있다고 한다. 그 호연지기를 잘 배양한 사람이 선비다운 기상을 발휘할 것이다.

또 선비의 기상으로 대장부를 설명하기를 “천하의 넓은 곳에 거처하고 천하의 바른 위치에 서며 천하의 큰 도리를 실천하되, 뜻을 얻어서는 백성과 공유하고 뜻을 얻지 못하면 홀로 그 도리를 실천한다. 부귀가 그를 음란하게 할 수 없고 빈천이 그 마음을 바꾸지 못하며 위협과 무력이 그를 굴복시키지 못하니, 이런 사람을 일러 대장부라고 한다(「등문공하」).”라고 하였는데, ‘뜻을 얻는다’라는 말은 군주의 신임을 받아 벼슬에 나간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호연지기는 대장부가 되는 일종의 조건이다. 대장부는 타고난다기보다 호연지기를 쌓아 배양함으로써 계발된다고 하겠다. 우리의 언어풍습에 지금은 많이 퇴색하였지만, 몇 십 년 전만 해도 남자들이 무엇을 결단할 때 ‘사나이 대장부가 그걸 못하겠는가?’라는 말을 자주 들었는데, 맹자의 이 대장부 사상이 전통문화에 깊이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하물며 성현의 가르침을 배워 따르고자 했던 조선 선비들이겠는가?

조선 선비의 기상

앞의 아홉 편의 글에서 나타난 선비정신은 그 모습과 행위 면에서만 본다면 선비의 기상이 이미 다 드러났다고 하겠다. 그래서 이글은 그것들을 정리하는 성격이 강하지만, 인물에 따라 좀 특이한 점을 사례별로 제시하겠다.

선비의 자질과 기개는 어떠하며 참다운 선비는 또 어때야 할까? 이에 대해서 연산군 때의 문신 김일손(金馹孫)의 말이 있는데, 허봉(許篈 : 1551~1588)의 『해동야언(海東野言)』에 기록하기를, “선비로서 병법을 모르면 참된 선비가 아니다. 훈고(訓詁 : 경전의 옛 뜻을 조사하여 밝힘)나 하는 선비는 고루하고, 사장(司章 : 문장을 짓는 일)을 하는 선비는 화사하며, 문학을 하는 선비는 과장을 잘하나 참된 선비는 실속 있어 활쏘기·말타기·글쓰기·셈하기가 그 분수 안에 있고, 재정(財政)이나 무기를 다룰 때도 그 최고의 기능을 발휘하지 않음이 하나도 없다.”라고 하였는데, 선비는 두루 여러 일을 잘해야 하지만 특히 병법을 몰라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다. 아마도 문보다 무를 천시하는 당시 풍조를 두고 한 말로 보인다. 논어에서는 “군자는 한 분야에만 쓰이는 전문가가 아니다(「위정」).”라는 전통 때문일 것이다. 일단 선비의 기상은 이런 여러 분야에서 드러난다.

먼저 윗사람의 기세에 눌리지 않고 바른말 하는 일을 꼽을 수 있다. 임보신(任輔臣 : ?~1558)의 『병진정사록(丙辰丁巳錄)』에 수록된 세조 때의 허종(許琮)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허종이 처음에 벼슬하였을 때 불교를 업신여기다가 세조의 노여움을 샀다. 세조가 위협하여 그 지조를 시험해 보았으나 그는 태연자약하여 바른 자세를 잃지 않았으므로 도리어 벼슬을 올려주었다. 이로부터 명성이 날로 떨치어 등급을 뛰어넘어 재상이 되었다. 그는 용모가 위대하고 풍채가 장엄하여 위엄이 가을 하늘과 겨울과 같아 바라보기에도 씩씩하였으나 가까이 대하여 보면 온화하였다. 평소에 성격이 호방하고 남다른 기상과 절개가 있고, 집안사람이 생업을 일삼지 않아 거처하는 방이 좁고 누추하였으나 태연하였다. 항상 녹봉을 받으면 즉시 친척 중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친족의 자제에게 친절하게 글 읽기를 권하고, 가르침에 게으른 일이 없었으며, 권세를 좋아하지 않아 집으로 사사로이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다.

세조가 그의 지조를 시험한 내용은 이정형(李廷馨 : 1549~1607)의 『동각잡기(東閣雜記)』에 보이는데, 세조는 불교 문제로 자기를 비판하던 이전의 일로 일부러 그를 끌어내려 곤장을 치게 했다. 그는 그때 꿋꿋하게 동요하지 않은 채 행동이 평소와 다름이 없고 음성이 우렁차고 분명하였다는 말에 보인다. 올바른 일에 기세가 전혀 꺾이지 않은 모습이다.

이런 선비의 기개는 죽음 앞에서도 발휘되었다. 연산군 때의 문신 이극균(李克均)의 일화인데 해동야언에 보인다.

우의정 이극균은 인동(仁同)으로 귀양을 갔었는데, 연산군이 관원을 보내서 사약을 내렸다. 관원이 함께 가지고 온 임금의 글을 펼치니 그가 말하기를,

“내게 무슨 죄가 있어서 이러는가?”

라고 하며 분개하는 기색이 등등하였다. 그리고 관원에게 말하기를,

“내 나이가 70이고 몸에는 병이 많으니, 내가 죽어도 무슨 한이 있겠는가? 다만 나라에 공로가 있고 내게 죄가 없으니 너는 마땅히 이 말을 돌아가 임금께 아뢰라. 그렇지 않으면 죽은 나의 혼이 너에게 벌을 줄 것이다.”

라고 하였다. 돌아와서 연산군에게 아뢰니, 연산군은 더욱 노하여 시신의 뼈를 부수게 하였다.

폭군 연산군의 성향을 아는 대신이 자기 말의 결과가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할 말을 당당히 하는 점은 선비의 기개가 없으면 결코 할 수 없는 일이다. 이렇게 왕이라 하더라도 뜻을 굽히지 않는 선비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맹자의 말대로 위협이나 위엄이 선비의 뜻을 바꾸게 못 하는 사례이다.

다음은 관리로서 책무를 다해 불의한 자들을 벌벌 떨게 한 선비의 기상이다. 이이의 석담일기에 나오는 사례이다.

장령 정인홍(鄭仁弘)이 어버이를 뵈려 시골로 돌아갔다. 인홍은 사헌부에 있으면서 위엄 있게 다스려 관리들의 사기가 진작되고 되었고 거리의 장사치들까지도 감히 금지하는 물건을 밖에다 내놓지 못하였다.

한 무부(武夫 : 무인 혹은 용감한 사람)가 시골에서 입경하여 어떤 이에게 말하기를,

“장령 정인홍은 그 형상이 어떻게 생겼는가? 그 위엄이 먼 외방까지 뻗치어 병사·수사나 수령 무리까지도 두려워하고 삼가 경계하니, 진실로 장부다.”

라고 하였다. 이 말을 이이가 듣고는 웃으면서 말하기를,

“정인홍이 사헌부의 관원이 되니 많은 사람이 꺼리고 미워하는데, 이 무부는 감히 칭찬하니 그가 바로 장부다.”

라고 하였다. 이때 그가 어버이를 뵈려 시골로 돌아가니, 성안의 방종한 자들은 모두 기뻐하기를,

“이제야 어깨를 펴겠다.”

라고 하였다. 이이는 말하기를,

“인홍은 강직하나 생각하는 계책이 두루 소상치 못하고, 학식이 밝지 못하니 용병(用兵)에 비유하면 돌격 장수는 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율곡의 인물평가는 꼼꼼하고 장단점을 뚜렷이 대비시키는 특징이 있는데, 누구든 일방적으로 후하게 평가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 정인홍에 대한 이 정도의 평가는 대단한 일이다. 요약하면 강직한 선비의 기개이다.

분야별로 더 소개할 인물이 넘쳐나지만, 이러한 선비의 기상을 종합적으로 잘 보여준 인물이 있다. 조선 초기 문신인 안경공(安景恭)에 대한 평가가 권별(權鼈 : ?~?)의 『해동잡록(海東雜錄)』에 보인다.

안경공은 타고난 성품이 간결하고 정중하며 마음가짐이 곧고 겸손하며, 행실이 공손하고 일에 임해서는 삼가고 상세하며, 말을 빨리하거나 갑자기 안색을 달리하는 일이 없었다. 또한 일찍이 힘 있는 세력에 붙어 우쭐대거나 기죽는 일이 없었고, 또 독특하게 주장하여 잘난 체하지도 않았다. 두 번이나 이조 판서를 맡았으나 사사로이 청탁하는 사람은 쓰지 않았다

자기 몸을 닦아 수양한 웬만한 선비라면 그 기상이 이랬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 소개한 인물만 그랬다고 오해하면 안 된다. 이는 성현의 가르침을 몸소 따르고 익힌다면 할 수 있고, 벼슬만 제외하고 현대에도 실제로 있을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와 선비의 역할

이상에서 살펴보면 선비의 기상은 너그럽고 온화하면서도 엄중하다. 또 바르다고 여기는 신념을 절대로 굽히지 않아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며, 가난하고 신분이 낮아도 위협이나 위세에 기죽지 않고, 한 가지 일에만 전념하여 세상을 잊지도 않으며, 말을 앞세우거나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늘 겸손한 모습을 보인 것 등이 선비의 기상으로 드러난다.

현대 사회에 이런 선비가 있을까? 필자는 있다고 믿지만 드러나지 않는 까닭은 마치 소인과 간신들이 조정을 장악했을 때 선비들이 피하고 숨어 사는 양상과 같다고 본다. 권력에 아부하고 권력자의 온갖 행위를 매체를 통해 빨아주어야 권력의 눈에 들어 발탁되는 일은 선비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또 참된 선비는 대중에게 아첨하지 않는다. 대중은 욕망에 따라 부침하기 때문이다. 곧 그들이 원하는 말을 해주는 대가로 그들의 주목을 받는 짓도 선비가 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중들은 당장에 이익을 주거나 돈을 버는 데 실용적이지 못한 선비의 주장 따위는 현실과 동떨어진 말이라 비웃는다.

그렇다면 선비로 자처하는 사람은 언제까지나 숨어 살면서 고고하게 살 것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지위가 높든 낮든 각자의 위치에서 앞서 말한 선비의 기상대로 살면 된다. 남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간에 그것은 자신이 쌓은 덕과 상관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구나 선비라 자부할 수는 있어도, 누구나 선비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공부와 노력에 달린 일이니까 그렇다. 게다가 선비는 남에게 보여주는 일에 힘쓰지 않으니 그를 알아보기도 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