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효종실록』

2. 『효종실록』

 

율곡 이이(李珥, 1536년∼1584년)가 마지막으로 모신 왕은 선조(宣祖, 1552년∼1608년)이다. 조선의 왕은 선조 이후에 광해군 → 인조 → 효종 → 현종으로 이어진다. 효종시기는 율곡이 사망한 뒤 65년이나 지난 뒤이다. 그 사이에 한반도는 남쪽은 남쪽대로 북쪽은 북쪽대로 전화에 휩쓸렸다. 남쪽에서는 일본이 침략하여 임진왜란(1592년, 선조 25년)과 정유재란(1597년, 선조 30년)이 일어났고, 북쪽에서는 청나라가 침입하여 정묘호란(1627년, 인조 5년)과 병자호란(1636년, 인조 14년)이 일어났다.
이렇게 시간이 흘렀지만 조정에서 율곡에 관한 관심은 여전히 식지 않았다. 『인조실록』을 보면 율곡과 관련된 기사가 63건 정도였다. 그런데 인조 시대와 통치기간이 비슷한 효종‧현종 시대의 율곡 관련 기사는 다음과 같이 90건에 이른다.(‘이이李珥’로 검색한 결과임)

『효종실록』 : 32건
『현종실록』 : 57건
『현종개수실록』 : 96건

『현종실록』을 다시 쓴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은 96건이나 된다. 참고로 퇴계 이황 관련 기록은 다음과 같다.

『효종실록』 : 22건
『현종실록』 : 19건
『현종개수실록』 : 34건

현종 시대만 하더라도 퇴계는 이미 문묘에 배향된, 즉 문묘 종사된 위대한 유학자로 평가되었고, 율곡은 그런 지위에 오르지 못했다. 문묘(文廟) 종사(從祀)란 문선왕(文宣王)이라 불리는 공자의 사당(문묘)에 이름을 올리고 배향되는 것을 말한다. 성리학의 실천과 발전에 큰 공을 세운 유학자만이 이런 명예를 얻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율곡은 왜 퇴계보다 더 자주 조정에서 언급되었을까? 달리 말하자면 왜 더 많이 기억되고 있었을까? 혹시 율곡의 사상이 새로운 시대에 더 적합해서일까? 아니면 단순히, 율곡의 문묘 종사를 절실히 원했던 율곡의 추종세력, 즉 서인 세력이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했기 때문이었을까? 『효종실록』에 실린 율곡 관련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효종실록』은 효종이 사망한 다음 해인 1660년(현종 1년) 5월에 시작하여 다음 해 2월에 완성하였다. 현종 초기에는 송시열, 송준길 등이 조정에서 힘이 있었기 때문에 『효종실록』에는 이들 서인의 입장이 강하게 반영되었다.
참고로 『현종실록』은 숙종 1년(1675년)부터 3년(1677년) 사이에 편찬되었다. 이때는 남인이 정권을 잡고 있었을 때였다. 송시열은 1674년경에 제2차 예송논쟁의 결과로 남인들의 공격을 받아서 권력을 잃고, 함경남도, 경상도 등지로 유배를 당하였다. 그런데 1680년(숙종 6년)에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다시 집권하게 되었다. 정권을 다시 잡은 서인들은 이미 편찬된 『현종실록』의 내용에 대해서 불만이 많았다. 그래서 숙종 6년에서 9년 사이에 다시 『현종실록』을 새롭게 편찬했는데, 이것이 『현종개수실록』이다. 그러니까 기존의 『현종실록』은 남인의 입장에서, 그리고 『현종개수실록』은 서인의 입장에서 편찬된 실록이라고 할 수 있다.

『효종실록』의 기록 가운데 율곡 이이(李珥)가 언급된 기사는 모두 32건이 있다. 이중에 효종 즉위년(1649년)과 효종 1년(1650년)에 실린 기사를 살펴보면 13건으로 거의 1/2에 육박한다. 그 기사들을 연도별, 일자별(음력)로 간략한 내용을 함께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효종 즉위년(1649) 11월 16일(음력, 이하 모두 음력임): 송준길이 상소하였다
2) 효종 즉위년(1649) 11월 23일: 이이와 성혼의 성전을 태학생들이 건의함
3) 효종 1년(1650) 2월 22일: 경상도 유생들이 이이 등의 문묘 종사를 반대함
4) 효종 1년(1650) 5월 1일: 이이 등 유학자를 헐뜯은 상소가 부당하다는 상소
5) 효종 1년(1650) 5월 20일: 유생들이 서로 배척하는 것에 대해 죄를 주다
6) 효종 1년(1650) 6월 3일: 영의정 이경여가 당파의 폐해 등을 아뢰다
7) 효종 1년(1650) 7월 1일: 경상도에서 과거를 아무도 응시하지 않았다
8) 효종 1년(1650) 7월 3일: 태학생들이 유직에게 벌을 내린 것을 논의하다
9) 효종 1년(1650) 7월 22일: 우의정 조익이 이황·이이·성혼 등의 덕을 아뢰다
10) 효종 1년(1650) 7월 23일: 사직 조복양의 관리임용·효행장려 등 내용의 상소
11) 효종 1년(1650) 7월 24일: 우의정 조익이 상소 문제로 면직을 청하다
12) 효종 1년(1650) 9월 15일: 함경도 유생이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를 청함
13) 효종 1년(1650) 9월 16일: 좌의정 조익이 북방과 영남의 유생들에 대해 아룀

효종 1년까지 기록된 기사를 보면 모두 13건인데 이 중 거의 대부분이 율곡과 성혼의 문묘 종사 관련 기록이다.
문묘 종사란 공자를 모시는 사당, 즉 문묘에 배향하는 것을 말한다. 문묘는 공자묘(孔子廟)라고도 부르는데, 위패를 모시고 제사 드리는 사당(祠堂)을 뜻한다. 현재 종로구 명륜동에 위치한 문묘의 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하여 4성(四聖, 안자·증자·자사·맹자)을 배향하고, 공문(孔門, 공자 제자) 10철(哲) 및 송나라 6현(賢)과 우리나라의 유학자, 즉 신라·고려·조선 시대의 동방 18현을 모시고 있다.
효종 당시는 조선의 유학자로 이미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 등 5현이 선정되어 종사되고 있었다. 율곡과 성혼은 아직 배향 인물에 들어가지 못했었다.
문묘 종사의 기준은 공자의 도, 즉 유학을 지키고 발전시키는 데 얼마만큼 공헌했는지, 그리고 송나라에서 일어난 도학(道學, 즉 성리학)의 실천과 발전에 어떠한 공을 세웠는지가 중요했다. 아울러 독창적인 자신의 학문 세계를 구축하였는지, 유학자나 선비로서 양심과 도덕을 실천했는지, 학식과 덕망은 훌륭한지, 학자로서 후세에 존경을 받고, 학문적 업적이 역사에 길이 남을 만큼 크고 높은지 등등 다양한 관점에서 많은 사람들의 긍정적인 평가가 중요했다.
일본 학자 야마우치 고우이치(山内弘一)는 문묘종사의 의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 적이 있다.

“『숙종실록』에 덧붙여진 사관의 글에 이런 말이 있다. ‘문묘 종사는 국왕에게는 성대한 의식과도 같은 것이지만, 종사되는 유학자 자신에게는 도덕성이 그것 때문에 증감되는 것이 아니다.’ 문묘 종사는 국왕이 ‘유학을 높이고 그 도를 중시하고, 문치를 아름답게 꾸미는 일’이며 나아가 ‘유도를 세상에 널리 알리고, 문치를 더욱 널리 표방하는 일’이다. 즉 유교에 근거한 문치정치 그리고 왕도정치를 표방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의식인 것이다. 하지만 문묘 종사라고 하는, 유학자에 대한 최고의 평가는 종사가 결정된 시대의 가치관에 기초한 평가이지, 그 당사자(배향되는 유학자 자신)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단지 역사적인 평가일 따름이다.”(「율곡사상의 평가와 그 역사성에 대해서」, 2006년 <율곡과 실학사상> 국제학술회의)

이러한 말을 언뜻 들으면 문묘종사가 그렇게 큰 의미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효종실록』의 기록을 보면 문묘 종사의 문제를 그렇게 간단히 평가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다. 효종은 이 문제를 다루면서 국가의 멸망까지 생각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많은 학자, 관리들이 자신의 명예와 목숨까지도 걸고 이 문제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문묘종사, 그리고 율곡 관련된 효종 즉위년의 기록부터 살펴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