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야승(大東野乘)』을 통해 본 조선 시대 선비 이야기 Ⅱ


『대동야승(大東野乘)』을 통해 본 조선시대 선비 이야기 Ⅱ

 

한국인에게 효도란?

이야기를 시작하며

‘역사 속 유교 이야기’ 시리즈에서 다루는 ‘『대동야승(大東野乘)』의 선비 이야기’의 이번 주제는 조선 시대의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핵심 윤리를 다룬다. 그 가운데 가장 영향력을 지닌 가치가 ‘오륜(五倫)’을 중심으로 『소학(小學)』에서 제시하는 것들이다. 그와 관련된 10가지 주제를 골라 그 사례를 소개한다.
이 글의 서술 방식은 윤리적 가치나 철학적 원리의 연역을 자제한다. 사상이란 그것을 표방하는 논리에서 본다면 매우 추상적이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현실에서는 매우 구체적이고 경험적이며 다양한 모습을 드러난다. 이 글은 유교의 가치가 현실에 어떻게 적용되고 받아들여지고 있는지, 그 사상의 목적에 비해 인간의 삶과 에너지가 어떤 식으로 표출되는지, 조선 시대 선비들의 삶을 통해 그 역동성을 살펴본다. 철학자 칸트의 말처럼 생활 감정이나 실감으로 보장되지 않는 이론(가치)은 공허하며, 이론으로 방향을 부여받지 못하는 삶은 맹목적이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면서 필자로서 가장 조심해서 다루고 자제했던 점은 정통 유교의 관점에서나 현대의 가치관으로 과거를 비판하는 일이다. 이른바 문명의 이름으로 동서고금의 다양한 문화현상을 성급하게 재단하지 않듯이 우리 조상들의 그것도 존중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고, 그 시대의 문화와 삶을 읽어내는 것이 되레 유익한 일로 보인다.

낯설지 않은 효도

한국인에게 효도는 낯설지 않다. 조선 시대에 유교가 사실상 국교의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서양 여러 나라에서 기독교 풍습이 전혀 낯설지 않은 것과 같은 맥락이다. 전근대 사회에서 유교든 기독교든 나름의 장단점이 있었는데, 그 단점만 크게 부각하여 비판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이 효도 또한 편견 없이 들여다볼 것을 제안한다.
효도를 포함한 오륜이 크게 강조된 것은 아마도 조선을 건국한 이념이 성리학(性理學)을 사상적 배경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성리학은 추상적인 철학이어서 현실에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사대부나 민중의 현실을 이끌어나갈 실천적 교과서가 필요했는데 그것이 바로 『소학』이다.
조선에 성리학을 정착시킨 장본인들은 모두 하나같이 『소학』의 가르침에 충실했다. 길재(吉再, 1353~1419), 김숙자(金叔滋, 1389~1456), 김종직(金宗直, 1431~1492), 정여창(鄭汝昌, 1450~1504), 김굉필(金宏弼, 1454~1504)을 비롯하여 조광조(趙光祖, 1482~1519), 김안국(金安國, 1478~1543), 김정국(金正國) 등의 선비들은 그 가르침에 충실했을 뿐만 아니라, 그 보급에도 앞장선 인물들이다. 조정에서 간행한 『삼강행실도』와 『오륜행실도』도 이 『소학』의 가르침을 보급하기 위해서였다. 윤리적 가치를 실천하는 현장에서 『소학』을 단순히 어린아이들이 배우는 교과서 정도라고 생각하면 큰 오해이다.
『소학』의 내용 가운데 효도에 관한 몇 가지 고사가 있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에는 추운 겨울에 얼음을 깨고 물고기(잉어)를 잡아 봉양한 왕상(王祥)의 효도, 도적도 감동한 강혁(江革)의 효도, 며느리가 이가 빠진 시어머니에게 젖을 먹여 봉양한 이야기, 아비의 병세를 알기 위해 대변을 맛본 유금류(庾黔婁), 부모의 상을 당하여 몸이 상할 정도로 슬퍼하고 죽을 먹고 삼년상을 치른 하자평(何子平) 등이 그것이다. 조선조 선비들이 삶이 어땠는지 알려면 이 효도의 사례를 꼭 기억해두면 좋겠다.
현대 한국인들에게 효도가 낯설지 않은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전통이기도 하지만, 과거 1970년대 유신정권에서 학교 교육과 언론을 통해 충효(忠孝)를 무척 강조하였고, 또 각종 드라마나 영화 또는 대중가요, 소설, 전래동화의 주제가 되기도 하였으며, 한자나 한문을 배우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접하는 가치이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특이하면서도 감동적인 효도의 사례

『소학』을 보면 효도의 방법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부모가 살았을 때, 돌아가셨을 때, 그리고 돌아가신 이후의 제사 등에 대해서 매우 구체적으로 성현의 말과 그 사례까지 소개한다. 조선 시대 사대부 선비들은 그 내용을 잘 지켰다고 확신한다. 『대동야승』에 소개하는 인물의 프로필을 보면 부모께 효도하고 형제들과 우애하며 청렴하게 살았다는 진술이 거의 예외 없이 등장하는 점이 그 근거이다. 하지만 이런 소개는 거의 누구나 하는 일이어서 어쩌면 형식적인 언급이 되고 만다.
해서 『대동야승』에 자세히 등장하는 사례는 특별한 경우이다. 오늘날도 평범한 일은 뉴스거리가 되지 않는다. 뉴스는 물론 드라마나 영화의 소재가 되는 것은 일상적인 일과 거리가 먼 이례적인 경우이다. 앞으로 소개하는 일도 그렇다.
먼저 남효온(南孝溫, 1454~1492)이 쓴 『추강냉화(秋江冷話)』에 이런 이야기가 등장한다.
“청주 사람 경연(慶延, ?~?)은 그의 아버지가 겨울에 병이 들어 생선회가 먹고 싶다고 하여서 냇가에 나가 얼음을 깨고 그물을 쳤다. 고기를 잡지 못하자 울며 말하였다. ‘옛사람은 얼음을 깨뜨려서 고기를 잡았다는데, 지금 나는 그물을 치고도 고기를 못 잡으니 내 정성이 하늘을 감동하게 하는 일이 막혔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두건과 버선을 훌렁 벗고 얼음 구멍에 서서 하룻밤을 새웠더니 검은 잉어가 잡혔다.”
이와 유사한 이야기는 권별(權鼈 : ?~?)의 『해동잡록(海東雜錄)』에도 전한다.
“강릉 사람 이성무(李成茂)는 어머니가 병들어 물고기를 먹고자 하였는데, 냇가에 나가니 홀연히 얼음이 깨지고 고기가 튀어나왔다. 그것을 어머니께 가져다드렸고,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서 그 자손에게 세금을 면제해 주도록 했다.”
이 이야기들은 앞서 소개한 ‘양상’의 조선판 고사이다. 이와 유사한 이야기는 얼마든지 있다. 가령 율곡 이이(李珥, 1536~1584)의 『석담일기(石潭日記)』에 소개하는 송인수(宋麟壽, 1499~1547)의 고사도 그러하다. 그 이야기는 이렇다.
“송인수는 충성과 효도가 모두 지극하였다. 어릴 때 어머니를 잃었는데 그때는 예법을 아직 배우지 않아 감정에만 치우쳐 너무 슬퍼하였다. 그가 엎드려 울었던 자리는 눈물에 젖어 썩기까지 했다. 제비가 여막(盧幕)에 집을 지어 부화한 새끼가 모두 흰색이었는데, 사람들은 그의 효성이 지극하여 감응된 것이라 하였다. 그 후 조정에 서게 되니 명망이 일대에 높았다.”
또 『해동잡록』에는 이런 이야기를 전한다.
“정승우(鄭承雨)는 양주(梁州) 사람이며 왜구들에게 잡혀가 비전주(肥前州)에서 팔린 몸이 되었다. 그때 어머니가 70여 살이었는데, 그는 어머니의 생사를 늘 걱정하여 고기를 먹지 않았다. 왜구들이 그것에 감동하여 양식을 주어서 돌려보내니 모자가 서로 만나게 되었다. 또 동래 사람 김득인(金得仁)은 9년을 묘막에서 지냈는데, 왜구가 거기에 와서 보고 감동하여 칭찬하고 쌀과 미역을 주고 갔다. 성종 때에 정문(旌門: 효자·충신·열녀를 표창하기 위해 그 집 앞에 세운 붉은 문)을 세우고 벼슬을 주었다.”
이 이야기는 도적도 감동하였던 ‘강혁’의 이야기와 유사하다. 이 외에도 고려 때 몽골군에게 붙잡혀간 어머니를 되찾아온 김천(金遷)이라는 효자 이야기도 있다. 효도라는 보편적 가치에 비록 도적이라 할지라도 감동했다는 이야기다.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의아하지만 이런 효자도 있었다. 『해동잡록』에 보인다.
“개성 사람 김구손(金龜孫)은 어머니가 돌아가자 아버지가 후처를 얻었는데 춥지 않게 맛있는 음식으로 정성껏 받들었고, 아버지에게 난 종기를 빨아서 낫게 했다. 뒤에 아버지가 죽자 묘 옆에 여막을 짓고 지내면서 아침저녁으로 상식(上食: 상을 치를 때 죽은 이의 영전에 올리는 밥)이 끝나면 집에 가서 계모를 3년 내내 보살펴주었다. 효성이 위에 알려져서 정문을 세우고 세금을 면제해 주었다.”
치료를 위해 종기를 빠는 일은 흔히 전통 의술에 있는 일이다. 친모는 물론 계모까지 잘 보살피는 일도 효도 가운데 하나인데, 앞의 ‘왕상’의 고사에도 등장한다. 이보다 더 심한 이야기도 등장한다. 엽기적이지만 참고 읽어 보기 바란다. 앞의 책에 나온다.
“연안(延安) 사람 김자렴(金自廉)은 어머니가 죽고 상이 끝났는데도 오히려 조석으로 상식을 올렸다. 아버지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종기를 빨고 똥을 맛보기도 했다. 특별히 나라에서 절충장군(折衝將軍)을 제수했다.”
대변을 맛본 일은 앞의 ‘유금류’의 고사에 나온다. 그가 그랬던 까닭은 의원이 “병이 심하거나 그렇지 않은 정도를 알려면 오직 대변이 달고 쓴 것을 맛보는 방법밖에 없다.”라는 말에 근거하고 있다. 기독교인들이 『성서』를 믿듯이 선비들 가운데는 『소학』을 그렇게 믿었을 것으로 판단되는 대목이다. 이 외에 『해동잡록』 속에는 무수한 사례가 등장하는데, 특이한 것 몇 가지를 소개하겠다.
“만경(萬頃) 사람 김맹방(金孟倣)은 아버지가 종기로 앓았는데 종아리 살을 베어 약으로 드리니 병이 나았다. 그 아들 인호(仁好)도 어머니가 종기를 앓자 또한 종아리 살을 베어 드렸다. 성종이 불러 보고 서부참봉(西部參奉)을 시켰다.”
“평양 사람 김경리(金景利)는 아버지가 미친병에 걸려 몇 달이 되어도 낫지 않자 오른쪽 손가락을 잘라 약에 타서 드리니 병이 바로 나았다.”
“김윤손(金允孫)은 그의 아버지가 호랑이에게 물려갔는데, 호랑이를 쫓아가 목덜미를 껴안고 입을 틀어막아 때려죽이고 아버지를 살렸다.”
“충주 사람 하숙륜(河叔倫)은 어머니가 문둥병에 걸렸는데, 엉덩이 살을 잘라 술에 타 드리니 병이 나았다. 후에 병이 재발하여 다시 손가락을 잘라 태워서 드리니 병이 완전히 나았다. 중종이 명하여 정문을 세웠다.”
“창성(昌城) 사람 김을시(金乙時)는 성안에 불이 나서 그 집에까지 번졌다. 아버지가 병으로 일어날 수 없자 김을시가 타오르는 불길 속에 뛰어들어 아버지를 업고 나오다가 부자가 다 불에 타 죽고 말았다. 나라에서 쌀을 내리고 정문을 세웠다.”
심지어 이런 일도 있었다고 전한다.
“고려 때 운제현(雲悌縣) 사람 차달(車達)은 삼 형제가 같이 어머니를 모셨다. 그의 아내가 어머니에게 불순하였으므로 아내를 버렸다. 두 동생이 모두 아내를 얻지 않고 어머니를 섬기니, 임금이 명하여 모두 부역을 면제하도록 하였고 『고려사』에 실려 있다.”
이 정도에 이르면 그 사례 속의 정성이나 끈질긴 면에서 『소학』의 그것을 능가한다. 이것이 엽기적이고 지나친 효도로 보이나, 필자가 보기에는 당시 뚜렷한 의학적 대안이 없었던 시대적 배경 속에서 취할 수밖에 없었던 행위로 보인다. 『소학』 속의 중국인들보다 더 철저하고 치열했던 점은 우리 한민족의 끈기와 저력, 강인한 에너지의 소산으로 보고 싶다. 그 힘이 적절한 방향으로 인도된다면, 세계의 중심에 설 날도 머지않았다.

효도는 유교만의 전유물인가?

혹자는 이런 지나치게 보이는 효도 행위를 두고 유교적 이념에 세뇌된 사람들의 비뚤어진 효도라고 비판할지 모르겠다. 나라에서 벼슬도 주고 세금도 면제하고 정문(旌門)도 세워주니 빗나간 효심의 발로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 지적이 완전히 틀렸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이는 어쩔 수 없이 당대의 가치가 현실에 적용될 때 나올 수밖에는 없는 일이다. 긍정적 결과와 함께 부정적 그것도 마찬가지이리라. 마치 오늘날 자본주의 체제에서 경제활동의 자유가 주어지다 보니, 부동산투기처럼 노동보다 불로소득을 통해 재산을 증식하려고 하여 온갖 폐단이 속출하는 일과 유사하다.
또 혹자는 유교가 사회질서 유지를 위해 효도를 인위적으로 너무 강조하여 이런 일을 초래했다고 비판할 수 있겠다. 이 논리도 다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공자가 춘추시대 사회질서 유지를 위해 인(仁)을 강조하고, 그 실천 방법으로 효제충신(孝弟忠信)을 말했으니, 공자 사상의 의도를 보면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더구나 송 대 성리학이 태동하는 배경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효도를 유교가 강조했다고 해서 유교만의 전유물일까? 특히 『소학』의 등장으로 인해 강조된 것일까? 필자는 유교, 특히 성리학의 전유물은 아니라고 본다. 다시 『대동야승』에서 그 사례를 살펴보면 이미 신라 시대의 효도 이야기가 등장한다. ‘손순매아(孫順埋兒)’의 고사가 그것이다. 이는 『삼국유사』에 나오지만 『해동잡록』에도 보이고, 성리학이 들어오기 이전의 고려 때의 효자 이야기도 『소학』과 무관하다.
더구나 왜구도 효도를 가상히 여겼다는 점은 어떤 문화를 초월한 보편적 가치임을 암시한다. 왜구가 유학을 알았는지 알 수 없지만 말이다. 게다가 기독교 모세 십계명 가운데 다섯 번째 계명도 ‘네 부모를 공경하라’이다. 이렇게 보면 표현과 방식의 차이는 있어도 부모를 공경하는 일, 곧 효도는 문화를 초월하여 어느 지역에나 있을 수 있는 행위와 가치임을 알 수 있다.

우리에게 효도란 무엇인가?

현대 한국인들에게 효도란 무엇일까? 요즘 세태를 보아 참 껄끄러운 질문임은 분명하다. 지금 나이가 60세 이상인 분들은 이 효도에 관해서 스스로 ‘끼인 세대’라 부른다. 이들은 부모를 나름대로 잘 모셨지만, 정작 본인들은 자식들이 그렇게 모실 것이라 기대하지 않는다고 한다. 가끔 인터넷 여론을 보면 효도가 전근대적 유교의 케케묵은 유산, ‘꼰대’들이나 떠드는 쓸데없는 주장쯤으로 치부한다.
효도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문화와 방법은 달라도 부모의 자식 사랑이 전제된 자식의 부모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없거나 미숙할 경우 불효이다. 풍기 군수였던 주세붕(周世鵬, 1495~1554)은 아버지가 생전에 홍시를 즐겼으므로 자기는 종신토록 차마 홍시를 먹지 못했다고 한다. 『해동잡록』 속의 사례이다. 이처럼 사람이 늙으면 자연히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이 간절하다. 사람에 따라서는 그때 겨우 효자가 되기도 한다. 왜 그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