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의 노년과 매화 사랑


퇴계의 노년과 매화 사랑

 

세 시대의 노인 폄하

한 사람의 노년을 보면 그의 인생이 더 잘 보인다. 젊은이들은 관심이 없겠지만, 살 날보다 살아 온 날이 더 많은 사람들 가운데는 이런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요즘은 평균 수명이 늘어나 옛날 기준으로 보면 장수하는 노인들이 많다.
정상적으로 오래 살다보면 나름의 지혜가 생기기 마련인데, ‘세상에는 다 좋은 것도 없고, 다 나쁜 것도 없다’는 것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권별(權鼈)의 『해동잡록海東雜錄』 등에 보이는 퇴계(退溪) 이황(李滉 : 1501~1570) 선생(이하 선생으로 약칭)이 스스로 지었다는 묘갈명(墓碣銘)에 “걱정 가운데 즐거움 있고, 즐거움 가운데 걱정 있다.”는 표현도 그런 종류이다. 왜 이런 말을 하느냐 하면 사람이 오래 사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뜻이다. 사람이 늙어서 새롭게 깨닫는 지혜도 없고 판단력이 흐려질 때는, 국가와 가족에게 누를 끼치고 사회에 악영향을 주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비록 젊었을 때 사회적으로 명망과 영향력이 있었더라도, 배움에 더 이상 진보가 없어 세상 변한 줄 모르고 옛 생각만 가지고 이리저리 길 때 안 낄 때 나대면서 사회적 이슈마다 참견하고 나무란다면, 젊은이들이 노인 공경은 고사하고 노인 모두를 ‘꼰대’로 매도하는 장본인이 되어서야 되겠는가? 세상에 대한 인식과 문제해결 능력이 젊은이들의 수준에 미치지 못하다면, 죽은 듯이 조용히 수양하며 덕을 쌓는 게 좋다. 노인들이 천대받는 원인 가운데 하나는 이렇게 노인 자신에게도 일정한 책임이 있다. 알아서 ‘뒷방 늙은이’가 되라는 뜻이 아니라 존경받는 삶을 모색하자는 뜻이다. 사회적으로 이미 천덕꾸러기가 되어 백세를 산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선생은 고명한 대학자이자 선비로서 훌륭한 가르침과 학술적 업적을 많이 남겼다. 그래서 많은 연구자들이 그것들을 밝혀내었고 또 현재에도 계속 연구하고 있어서, 이 글에서 새삼스럽게 그걸 소개할 생각은 없다. 다만 요즘 세상을 보면 경로의 가치가 땅에 떨어지고, 노인이 되레 폄훼의 대상이 되는 것이 무척 안타까워서, 선생의 삶 가운데 은퇴 후의 모습을 살펴보고 이 문제에 대한 나름의 대안을 찾아볼까 한다.
여기서 노인을 공경하지 않는 사회·경제·문화 그리고 역사적 배경과 맥락을 다 살펴 볼 수 있는 필자의 역량과 지면이 허락지 않는다. 단지 노후의 품격 있는 삶을 위하여 노인 자신의 수양과 관련지어 선생의 삶에서 몇 가지 가르침을 찾고자 한다.

벼슬 자체에 큰 뜻을 두지 않았다
『해동잡록』에 따르면 선생은 조금 자라서 말과 행동이 반드시 예법에 맞았고 더욱 돈독하게어버이를 사랑하였다고 한다. 닭이 울면 반드시 일어나 세수하고 양치질하고 의대를 갖추고 모부인을 살폈는데, 말소리는 부드러웠고 나지막하였으며 상냥스럽고 기쁜 안색으로 저녁에 어머니를 위해 잠자리를 보아 드릴 때까지 이와 같이 하였다. 잠자리를 펴고 이부자리를 개 드리는 일도 반드시 몸소 하였다고 전한다.
선생은 태어난 그 해에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는데, 어머니 박씨 부인은 늘 아이들에게 세상 사람들이 모두 과부의 자식은 교육이 없다고 비웃는데, 너희들이 글공부를 백배로 힘쓰지 않으면 어떻게 이런 비웃음거리를 면할 수 있겠느냐고 늘 훈계를 했고, 농사짓기와 누에치기를 해서 자식들을 길러냈다고 한다. 선생의 평생 학문과 몸가짐은 어머니의 이런 교육의 영향이 크다고 할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선생은 어머니와 형제의 기대에 부응하여 가문을 일으켜야 할 책임감도 크게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여타 사대부 가문의 자녀들처럼 일찍부터 글공부를 시작하였다. 여섯 살 때 이웃집 노인에게서 『천자문』과 『소학』 등 기초적 교육을 받고, 열두 살 때 숙부로부터 『논어』를 배웠다고 한다. 숙부는 가끔씩 선생의 총명함을 두고
“가문을 유지할 자는 반드시 이 아이다.”
라고 칭찬했으니, 그의 책임감을 더욱 부채질 했을 것이다.
선생은 34살 때 비로소 대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그것도 27살 때 형님과 어머니의 권유에 따라 가정 형편상 할 수 없이 경상도 향시(鄕試)에 응시했다고 한다. 아무튼 그로부터 12~13년 동안에는 비록 한두 번 물러난 적이 있었지만 줄곧 관리 생활을 하였다.
그러다가 49살 때부터 벼슬에 큰 뜻이 없어 항상 물러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나라에서는 선생을 놓아주지 않았다. 70살이 될 때까지 사직하고 관직에 나아가는 일이 거의 21여 년 동안 반복되었다. 그 기간에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간 일이 5회였고, 벼슬한 기간은 약 5년 남짓인데, 해당 기간의 약25%에 해당한다. 사실상 이 시기는 은퇴 기간이라고 보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사직 의사를 밝혀도 허락되지 않은 경우도 있었으니, 그 사이 총53회의 사직의 글을 올렸다고 한다.
또 선생은 벼슬이 높아질수록 사직하는 경향을 보였는데, 정3품 이상의 벼슬은 하나도 받아들인 적이 없다고 한다. 보통의 관리들은 품계가 높아지기를 바라는데, 그것은 그에 따른 권력이 따르고 부귀를 누릴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이로보아 선생은 벼슬을 권력과 부귀영화를 위한 도구로 삼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우리 현대사에서 정통성이 없는 반민족적 독재 정권이라도 불러만 주면 달려가는 것은 물론이요, 불러달라고 아첨하거나 곡학아세(曲學阿世)하는 소인배들과는 격이 달라도 너무 다른 모습이다.
선생이 비록 높은 벼슬은 아니지만 그마저도 사직하려는 데는 명종 대의 이른바 대윤(大尹)과 소윤(小尹) 등의 외척들이 주도하는 부도덕하고 파렴치한 정권과 일종의 거리두기라 하겠다. 정3품 이상의 벼슬은 더욱 정권 실세와 가까이 가는 길이기에 경계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애초부터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으면 될 터인데, 왜 사직과 출사를 반복하는가라는 혹자의 비판이 가능하다. 그에 대한 선생의 변명이랄까 입장이 보이는 글이 있다. 52살 때 남명(南明) 조식(曺植 : 1501~1571)에게 보낸 편지에서
“저는 집이 가난하고 어버이가 늙으셨기 때문에 억지로 과거를 보아 이득과 녹봉을 취하게 되었습니다.”
라고 말하고 있는데, 가문과 경제적 이유 때문에 벼슬길에 나아가게 되었음을 고백하고 있다. 비록 그러하였지만 정3품 이상의 벼슬을 사양하고, 또 49살 이후에는 관직을 떠나려고 한 것을 보면, 관직을 통해 출세와 권력을 탐할 생각을 갖지 않았던 것 같다. 맹자(孟子)도 부모 봉양과 처자 부양을 위해서는 임금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문지기나 야경꾼 정도의 하찮은 벼슬은 할 수 있다고 했는데, 당시의 사대부는 벼슬하지 않으면 살아가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여기자. 반면 궁핍을 견디며 제자 양성과 학문에만 종사한 선비들이 있었다는 점도 기억하자. 현실이 자신의 뜻을 펼치기에 녹록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이 사퇴와 복직을 반복한 데는 또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 이 점은 뒤에서 논의하기로 하자. 대신 율곡(栗谷) 이이(李珥 : 1536~1584)의 『석담일기(石潭日記)』에는 관직에서 물러나는 일과 머무르는 문제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이이 : (이황을 뵙고) 어린 임금이 처음 자리에 오르시고 국정 현안에 어려움이 많으니 분수와 의리를 생각해서라도 선생께서 물러나지 말아야 합니다.
이황 : 도리상 물러날 수 없지만 내 몸을 생각해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소. 몸에 병도 많고 일을 감당할 능력도 없소.
혹자 : (이이를 보고) 성혼(成渾)에게 참봉(參奉)을 시켰는데 왜 나오지 않소?
이이 : 성혼은 병이 많아 관직에 종사하지 못하오. 만약 강제로 벼슬을 주면 그를 괴롭히는 것이오.
이황 : (이이를 보고) 그대는 성혼은 후하게 대접하면서 나에게는 어찌 그리 박하게 대접하오?
이이 : 성혼의 벼슬이 선생과 같다면야 개인의 입장을 봐 줄 여지가 없습니다. 성혼이 낮은 벼슬에 분주해 봤자 나라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만약 선생께서 경연(經筵: 임금 앞에서 유교 경전 등을 강의하는 일)에 계신다면 나라에 이익이 클 것입니다. 벼슬이란 남을 위한 것이지 어찌 자기를 위한 것이겠습니까?
이황 : 벼슬은 참으로 남을 위하는 것이오. 그러나 만약 남에게 이로움이 없고 자신에게 병통이 절실하면 할 수 없는 것이오.
이이 : 선생이 조정에 계시면서 설령 아무런 계책이 없다 하더라도 임금께서 중하게 생각하여 의지하신다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기쁘게 힘이 되니, 이 또한 남에게 이익이 됩니다.
이황은 이이의 이런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황의 학문이 정밀하고 깊어 사람들이 대유(大儒)로 지목하고 어린 임금을 도와 태평을 이룩하기 바랐으나, 스스로 경세제민(經世濟民 : 세상을 경영하고 백성을 구제하는 일)의 재주가 없다고 했다. 그래서 나오기를 어려워하고 물러나기를 쉽게 여기는 것이 이와 같았다.

이 기록은 선조1년 곧 선생의 나이 68세 때 8개월 동안 재직할 당시이다. 선생은 몸에 병이 있고 능력이 없어 나라에 보탬이 없다고 떠나려고 하고, 율곡은 경연을 통해서라도 보탬이 있다고 만류하는 기록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관직을 사양했던 이유가 무엇일까? 연구자들은 대체로 선생이 병과 노쇠함과 능력 부족으로 인한 직책 감당의 부당성 등을 표면적 이유로 내세우고 있다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인다. 그렇다고 쳐도 마음 한 구석에는 정치력의 한계와 학문에 대한 열정이 크게 작용했던 것 같다. 특히 학문에 대한 열정 때문이라는 점에 설득력이 있는데, 학문의 결실이라 할 수 있는 저작이 대체로 50세 이후에 나오고, 특히 기대승(奇大升)과 사단칠정에 대한 논쟁이 50대 후반에 있었고, 「성학십도」는 68세 때 지었다.

고요하고 겸손한 성품
선생이 늦은 나이에도 제자 양성과 저술을 왕성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학문에 대한 열정, 곧 배움을 게을리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의 배움이란 주로 성현들이 남긴 서적을 읽는 것이지만, 제자를 가르치거나 그들과 논쟁하거나 토론하는 과정을 통해서도 이루어졌다. 교학상장(敎學相長)이란 말이 있듯이 스승은 제자를 가르치면서도 배우게 된다. 그들의 질문을 받고 대답해야 하고 때로는 토론하는 과정에서 미처 알지 못한 것을 제자를 통해 깨닫게 된다. 동서고금의 위대한 스승들은 대개가 그렇다.
이렇듯 제자나 동료들을 통해 배우려면 겸손해야 한다. 권위를 내세우거나 우기면 배우지 못한다. 기대승과의 사단칠정을 논쟁할 때도 상대를 존중하며 혹 자신의 잘못된 견해를 인정하여 수정하기도 하였다. 이런 예는 윤두수(尹斗壽 : 1533~1601)가 지은 『오음잡설(梧陰雜說)』에도 인다. 인종의 비 박씨가 편찮을 때 선생은
“예법에 형수[嫂]와 시숙[叔] 사이에는 상복이 없으니, 상감께서는 복을 입지 않는 것이 타당합니다.”
라고 했다가, 얼마 뒤 기대승이
“인종께서는 한 나라의 임금이셨는데 지금 상감께서 자연히 왕위를 계승하는 상복이 있는데, 어찌하여 형수의 예법을 인용할 수 있겠소?”
라고 하자, 선생이 말하기를
“명언(明彦 : 기대승의 자)의 말이 옳다. 내가 잘못 대답하였으니, 나의 죄를 면할 수 없다.”
고 했다고 전한다. 선생은 자신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부분이 있으면 금방 인정하였다. 사실 사람은 이래야 발전한다. 특히 남의 윗사람이거나 노인일수록 이래야 한다. 그들은 대개 자신보다 어리거나 아랫사람의 의견을 좀처럼 따르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선생은 성품이 고요하고 온화하여 남에게 모질게 대할 줄 몰랐던 것 같다. 어머니와 형의 권유로 과거시험을 볼 수밖에 없었던 일도 그렇지만, 윤근수(尹根壽 : 1537~1616) 『월정만필(月汀漫筆)』에 임형수(林亨秀)라는 사람은 동료들을 업신여기는 버릇이 있어, 아무리 선배일지라도 모두 버릇없는 말을 퍼부었지만, 오직 퇴계에 대해서는 존경하면서 감히 함부로 굴지 못하였다고 한 것을 보면, 그 점을 역으로 추론할 수 있다. 또 『오음잡설』에 선생이 서울에 올라왔을 때 대문에 대기자가 있을 정도로 찾아오는 손님이 너무 많아 조금도 틈이 없었는데, 나중에 영의정을 찾아 갔다가 왜 이렇게 늦게 왔냐고 묻자
“찾아오는 사람들을 접대하느라 시간이 없었습니다.”
라고 했다고 한다. 선생에게 찾아 와 봤자 청탁할 건더기도 없는데 왜 모여들었을까? 그것은 선생의 인품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또 『석담일기』에는 을사사화 때 이기(李芑)가 퇴계의 명성을 꺼려 임금에게 아뢰어 관작을 삭탈하니, 그것을 억울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기가 다시 아뢰어 복작(復爵)시켰다는 간단한 기록만 있다. 그 내막은 이중열(李中悅 : 1518~1547)의 『을사전문록(乙巳傳聞錄)』에 자세하다. 곧 이기의 조카 이원록(李元祿)이 원래 선생을 중히 여겨, 이기에게 힘써 간하기를,
“이 아무개는 마음이 고요하고 욕심이 없어, 시속(時俗)의 논의에 참여하지 않았었다.”
라고 하였으며, 윤원형·이기와 함께 을사사화를 주도했던 임백령(林百齡)도 이기에게 선생의 무고를 주장하였다고 전한다. 이로 보면 선생이 평소 욕심이 없었고 남에게 모질거나 모나지 않게 행동했음을 알 수 있다.

매화를 유달리 좋아하다
선생이 고요한 성품은 시끄러운 도시보다 산수가 좋은 전원생활을 좋아하고, 매화를 유달리 좋아하는 취향으로 드러난다. 『해동잡록』에 따르면 선생은 매화를 유달리 좋아해서 매화 시첩 한질이 있다고 하였고, 운명하는 그날 아침에도 모시고 있는 사람을 시켜서 매화 화분에 물을 주라 하였다고 전한다. 그것은 그가 평소에 매화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 수 있다. 매화처럼 고고하게 군자의 향을 풍기며 살고 싶었을 것이다.
사실 매화는 사군자의 하나로 선비들이 좋아하는 대상이다. 『해동잡록』에 실려 있는 「도산기」에 따르면 도산서당을 지을 당시 몽천(蒙泉)이란 샘을 만들고, 샘 위의 산기슭을 따서 추녀와 맞대고 평평하게 단(壇)을 쌓고, 그 위에 매화·대나무·소나무·국화를 심어 절우사(節友社)라 불렀다고 전한다. 그는 매화의 고고하고 맑은 향기를 좋아하여 이렇게 매화를 심어 놓고 그와 관련된 많은 시를 남겼다.
그런데 임종 당시 물을 주라는 매화의 출처는 어디서 왔을까? 다른 기록에 의하면 선조 초년에 부름을 받고 서울에 와서 8개월 동안 살았던 때 소유했던 것인데, 훗날 이것을 선생의 문인이 선생의 손자 이안도(李安道)를 통해 배에 실어 가져왔다고 한다. 이 때 그것을 가져온 것이 기뻐서 남긴 시도 있다.
단양 지방에 떠도는 설화와 문학 작품 속에 선생과 기녀 두향(杜香)의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두향도 매화를 좋아했고 훗날 선생과의 이별이 아쉬워 매화를 선물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때가 선생 48세 때이니 그 때부터 매화를 좋아했는지 알 수 없으나, 만년까지 그의 매화 사랑은 각별했다.
사실 매화는 선생이 좋아하는 것 가운데 하나라고 하겠다. 「도산기」를 읽어보면, 도산서당을 자리 잡고 꾸미는 것을 마치 신선이 사는 것처럼 했는데, 그만큼 자연과 산수를 좋아했다는 뜻이다. 선생이 이처럼 전원생활과 산수를 좋아 한 것은 몸의 병에 좋기도 했지만, 도의를 즐기며 심성을 기르기 위해서라고 한다. 몸을 더럽힐까봐 속세를 등지고 세상을 초월하여 신비한 무엇을 찾는 도가(道家)의 그것과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혹자는 심성의 수양을 위해 마음속에서만 깨달음을 얻고 바깥 사물에 기대지 않는다고 하면서, 공자의 제자 안회(顔回)처럼 누추한 빈민가에서도 즐거움을 잃지 않으면 될게 아니냐고 물었다. 그러자 선생은 그것은 그의 형편이 그랬던 것이고, 그 때문에 거기에 맞게 즐겁게 여긴 것을 귀하게 여기지만, 그도 좋은 산수를 만났더라면 그 즐거워함이 어찌 우리들보다 깊지 않았겠냐고 주장했다. 그리고 공자나 맹자도 일찍이 산수를 자주 칭찬하였고 아주 좋아했다고 덧붙였다.
현대의 노인들은 건강 상태도 좋아 경치 좋은 곳을 찾아 여행도 다니고 하고 싶은 일도 한다. 다만 외물에 정신이 팔려 자신의 본심을 잃는 완물상지(玩物喪志)가 없도록 경계해야 할 것이다. 방심하다간 추한 노탐에 빠진다. 비록 세상이 본인이 생각했던 대로 굴러가지 않더라도 자신의 인식과 판단에 문제가 없는지 반성하며, 올곧은 젊은이들의 주장에도 귀를 기울여야 할 것 같다. 행여 세상을 바른 데로 이끌 능력이라도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자신을 수양하고 채찍질 하여 후세와 자연에 누를 끼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그나마 남으로부터 공경까지 바라지 않더라도 욕이라도 덜 먹는 일이 아닐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