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의 율곡 이야기


조정의 율곡 이야기.

 

인조실록』에는 다른 왕조실록과 마찬가지로 조정에서 일어나는 대화들이 하나하나 꼼꼼히 기록되어 있다. 임금을 둘러싼 고관들의 대화, 그리고 각 기관에서 올라오는 상소문, 상주문(보고서)들이 편년체로, 즉 일자별, 시간별로 소개되어 있다. 그 기록 가운데 율곡 이이(李珥)가 언급된 기사는 모두 62건이 있다. 그 기사들을 연도별, 일자별(음력)로 간략한 내용(대화의 주제)과 함께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인조 1년(1623년) 3월 16일: 이원익·이정구 등 관직 임명
2)인조 1년(1623년) 3월 25일: 성혼의 관작 회복
3)인조 1년(1623년) 3월 27일: 이이의 문묘 종사 논의
4)인조 1년(1623년) 5월 7일: 서북 인재의 등용 등 논의
5)인조 1년(1623년) 5월 7일: 사묘(私廟)에 대한 전례 논의
6)인조 1년(1623년) 5월 29일: 김장생·장현광·박지계를 임명
7)인조 1년(1623년) 6월 12일: 유공량에게 형편을 물음
8)인조 1년(1623년) 7월 6일: 사우(師友)의 도에 대하여 논함
9)인조 1년(1623년) 윤10월 28일: 주강에 『대학』을 강함
10)인조 1년(1623년) 11월 2일 : 춘천 부사 신응구의 졸기
11)인조 2년(1624년) 3월 21일: 붕당의 제거와 대간의 폐를 논함
12)인조 2년(1624년) 5월 15일 : 가뭄 대책을 논의함
13)인조 2년(1624년) 8월 9일 : 붕당의 폐단 등에 대해 논함
14)인조 2년(1624년) 9월 6일 : 이귀가 대관 교체의 취소를 건의함
15)인조 2년(1624년) 10월 11일 : 어영청의 군사조직과 조련법 개선 논의
16)인조 2년(1624년) 10월 22일 : 이이 등의 서원 사액에 대한 논의
17)인조 3년(1625년) 2월 22일 : 이이와 성혼의 문선왕묘에 종사 청원
18)인조 3년(1625년) 3월 11일 : 변법에 관하여 논의함
19)인조 3년(1625년) 3월 25일 : 특진관 이귀의 건의
20)인조 3년(1625년) 4월 11일 : 전 대사헌 정엽의 졸기.
21)인조 3년(1625년) 8월 8일 : 왕의 마음의 공부를 간청함
22)인조 3년(1625년) 8월 26일 : 대간 포용 등에 대해 건의함
23)인조 4년(1626년) 5월 7일 : 국경 방어에 대한 계책 건의
24)인조 6년(1628년) 5월 5일 : 당쟁의 폐를 논함
25)인조 7년(1629년) 3월 18일 : 이귀의 건의 등
26)인조 7년(1629년) 3월 21일 : 임금이 『서전』의 내용을 물음
27)인조 7년(1629년) 윤4월 12일 : 이귀가 3권의 책을 만들어 올림
28)인조 7년(1629년) 5월 6일 : 임금이 『서전』을 강하고 그 내용을 물음
29)인조 7년(1629년) 7월 23일 : 속오군의 충원 등을 논함
30)인조 7년(1629년) 10월 17일 : 『격몽요결』을 인쇄하여 올림
31)인조 8년(1630년) 1월 23일 : 속오군 등 국정에 대해 논의함
32)인조 8년(1630년) 1월 27일 : 낭관, 왕세자 책봉 등에 관해 논함
33)인조 8년(1630년) 9월 7일 : 강릉 유생들이 서원 사액을 건의함
34)인조 8년(1630년) 10월 30일 : 주강에 『서전』을 강의함
35)인조 9년(1631년) 8월 9일 : 전 형조 참판 김장생의 졸기
36)인조 9년(1631년) 10월 17일 : 선비가 공관(空館)한 원인을 논함
37)인조 10년(1632년) 2월 6일 : 태학의 교육 과정 개편 등을 진언함
38)인조 10년(1632년) 7월 1일 : 복제 등을 정할 것을 건의함
39)인조 10년(1632년) 9월 13일 : 붕당의 폐해를 논함
40)인조 10년(1632년) 10월 9일 : 복색에 대하여 의논함
41)인조 12년(1634년) 7월 20일 : 인목 왕후의 부묘에 대해 논의함
42)인조 13년(1635년) 5월 11일 : 성혼과 이이의 문묘 종사를 건의함
43)인조 13년(1635년) 5월 11일 : 채진후 등이 문묘종사 제안을 반대함
44)인조 13년(1635년) 5월 12일 : 윤방과 김상용이 문묘종사의 상소 올림
45)인조 13년(1635년) 5월 13일 : 문묘 종사 건으로 상소를 올림
46)인조 13년(1635년) 5월 13일 : 문묘 종사에 대한 임금의 답변을 논함
47)인조 13년(1635년) 5월 13일 : 심지원 등이 문묘 종사를 건의함
48)인조 13년(1635년) 6월 6일 : 조익이 임금의 무성의에 사의를 표명함
49)인조 13년(1635년) 6월 6일 : 이이 등의 문묘 종사 문제로 의견 대립
50)인조 13년(1635년) 8월 3일 : 심지원 등이 정사의 바른 도를 건의함
51)인조 13년(1635년) 8월 9일 : 윤방이 문묘종사에 대한 의견을 개진함
52)인조 13년(1635년) 9월 26일 : 민여기 등이 문묘 종사를 건의함
53)인조 13년(1635년) 12월 21일 : 사서 김익희가 상례에 대해 건의함
54)인조 14년(1636년) 10월 19일 : 이이·성혼을 문묘에 제사하도록 건의함
55)인조 14년(1636년) 10월 21일 : 한극술이 정거문제로 상소함
56)인조 16년(1638년) 7월 19일 : 감사의 구임에 대해 의논함
57)인조 16년(1638년) 7월 22일 : 수군과 인재 등용에 대해 의논함
58)인조 19년(1641년) 2월 12일 : 대제학 이식의 『실록』 관련 건의
59)인조 22년(1644년) 8월 23일 : 대신과 정사를 논의함
60)인조 22년(1644년) 12월 23일 : 장령 이만영이 유백증 등을 논죄함
61)인조 22년(1644년) 12월 28일 : 서경우가 이만영의 논의를 변호함
62)인조 23년(1645년) 10월 9일 : 김집과 송시열을 부름

이상의 연도별 율곡 관련 기사를 살펴보면 인조 등극 초기인 인조 1년(10건), 2년(6건), 3년(6건)에 율곡과 관련된 많은 언급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인조 5년인 1627년에는 후금(후일의 청나라)이 침입한 해였다.(정묘호란) 이해는 조정에서 율곡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그 전인 인조 4년과 그 1년 후인 인조 6년에는 율곡에 대한 기록이 각각 1건씩 있었다. 전란 상황으로 어수선한 시기에 율곡에 대한 기억은 잠시 뒷전으로 밀려난 것이다.
전후 상황이 어느 정도 마무리된 인조 7년과 8년에는 율곡에 대한 언급이 다시 늘어나 6건과 4건으로 증가하였다. 이후 2건(인조 9년), 4건(인조 10년), 0건(인조 11년), 1건(인조 12년)으로 소강상태를 보이다 인조 13년인 1635년에는 다시 율곡 관련 기록이 12건으로 급증하였다. 이해는 특이하게도 조정에서 율곡의 문묘 종사에 대한 논의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문묘 종사(文廟 從祀)’란 무엇인가? ‘문묘(文廟)’는 문선왕(文宣王) 공자(孔子)의 묘우(廟宇, 신위를 모시는 사당)를 말한다. 공자는 유교를 집대성하기는 하였으나 왕의 자리에 오른 적은 없었다. 하지만 후대인들은 그를 존경하여 ‘대성지성 문선왕(大成至聖 文宣王)에 추증하여 약칭으로 ’문선왕(文宣王)’이라 부른다. 그래서 문묘는 ‘공자묘(孔子廟)’라고도 부른다. 우리나라에 있는 문묘는 현재 명륜동 성균관대학의 입구 쪽에 있다.
‘종사(從祀)’란 ‘제사를 지내다’, ‘위패(位牌, 신위)를 모시다’, 혹은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다’는 뜻이다. ‘배향(配享)’을 하다는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따라서 문묘종사는 문묘배향(文廟配享)이라고도 한다.
문묘에는 공자의 위패와 함께 중국과 한국의 유명 유학자들의 위패도 함께 모신다. 현재 성균관에 있는 문묘 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하여 안자, 증자, 자사, 맹자를 배향하고 있으며, 공문(孔門, 공자의 제자) 10철(十哲, 10인의 현자)이라고 하여 열 명의 제자들의 위패도 모시고, 송조(宋朝, 송나라) 6현( 六賢, 6명의 현자)의 위패도 함께 모셔두고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東方) 18현인(十八賢)의 위패도 함께 모시는데, 여기에 현재는 율곡도 함께 들어가 있다.
율곡을 문묘에 모시자는 논의가 이렇게 빈번하게 일어났다는 것은 큰 시각에서 보면 중국 중원의 문명과 문화, 즉 유교문화를 중심으로 발달된 중국문명의 영향력이 강했다는 이야기다. 문명의 나라 명나라와 오랑캐의 나라 청나라 사이에서 조선이 명나라에 더욱 기울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리고 새로 밀려오는 서구 문명보다는 중국에서 전해진 유교문명의 부활을 통해서 조선을 더욱 평화롭고 안정된 나라로 만들자는 정치적 선택이기도 하였다. 결과적으로 이 선택은 잘못되었지만 당시 지식인들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인조를 둘러싼 지식인들이 광해군을 몰아낸 것도 이러한 선택의 한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인조 14년, 즉 1636년에는 율곡 관련 기사가 2건으로 줄었다. 이해 12월에 대청제국으로 간판을 바꿔 단 여진족들이 북쪽에서 침략해 들어왔다.(병자호란) 이 때의 전쟁에 패배한 결과 인조는 1637년 1월 말경 삼전도(현재의 서울특별시 송파구 삼전동 부근)까지 밀고 들어온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 앞에 끌려 나가 항복의 예를 올리는 치욕을 당하였다. 그래서 1637년에 조정은 율곡에 대해 이야기할 여유가 없었다.
이후 조정에서는 율곡에 대해서 1638년(인조16년)에 2회, 3년 뒤인 1641년(인조 19년)에 1회, 또 그 3년 뒤인 1644년(인조 22년)에 3회, 그 다음해에 1회의 언급이 있었다. 인조 시대, 율곡에 대한 기억은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럼 이하 각 장면별로 어떤 내용으로 율곡이 언급되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