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실록』과 율곡


『인조실록』과 율곡.

인조실록』
(『인조대왕실록仁祖大王實錄』)은 1623년부터 1649년까지 인조 시대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실록이다. 총 50권 50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6년에 걸친 인조 시대 국정 전반에 관한 사실을 편년체로 기록한 조선왕조실록 중 한권이다.

『인조실록』에서 ‘율곡’으로 검색하면 3건의 기사가 검색된다.

첫 번째 기사는 인조 2년, 즉 1624년 7월 19일(음력)자 기사로 「황해도로 하여금 이율곡의 『성학집요』를 인쇄하여 바치게 하다」라는 기사다. 율곡의 문집 『성학집요』를 지칭할 때 사용된 것이다.

두 번째는 인조 3년(1625년) 4월 11일 대사헌 정엽이 사망하였다는 졸기(卒記)에 나온다. 졸기란 나라의 일을 맡았던 관리나 왕실 관련 인물이 죽었을 때, 사망한 사실과 함께 그의 행적을 기록한 것이다. 정엽(鄭曄, 1563년〜1625년)은 율곡(栗谷) 이이(李珥)와 우계(牛溪) 성혼(成渾), 그리고 구봉(龜峰) 송익필(宋翼弼)의 문인으로 도승지, 대사헌, 우참찬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기사는 정엽을 소개하면서 “일찍이 위기지학(爲己之學, 자신의 도덕적 완성을 목표로 하는 학문)에 뜻을 두고 율곡 이이, 우계 성혼(成渾)의 문하에 참여하여 학문적인 조예가 더욱 깊었다. 가정에 있어서는 효성과 우애가 돈독하였고 부모를 섬기는 일이나 장례와 제사 등은 모두 『가례(家禮)』(주자朱子의 저술)를 따랐다.”고 하였다. 정엽의 스승으로 율곡을 지칭한 것이다.

마지막은 인조 9년(1631년) 8월 9일자 기사 「전 형조 참판 김장생의 졸기」이다. 사관은 김장생이 자질이 훌륭하고 효도와 우애가 깊으며 순수하고 지극하였다고 소개하고 이어서 “율곡 이이를 따라 성리학(性理學)을 수학하여 마음을 오로지 쏟아 독실히 좋아하였다. 독서할 적마다 반드시 의관을 정제하고 무릎을 꿇고 앉아서 매일 경전(經傳)과 염·락(濂洛) 의 여러 책들을 가지고 담겨 있는 뜻을 탐색하였는데, 마음이 흡족하지 못한 점이 있으면 밤낮으로 사색하여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반드시 그 귀취(歸趣, 일이 되어 나가는 형편이나 상황)를 얻고 난 다음에야 그쳤다.”고 칭찬하였다.

전체적으로 보면 『인조실록』에서 ‘율곡’이라는 호는 제자들 김장생과 정엽의 졸기를 기록할 때 스승으로서 소개할 때 사용되었으며 또 율곡의 저술 『성학집요』를 소개할 때도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율곡은 1584년(선조 17년)에 사망하였다. 그로부터 40여년이 지나고 임금도 선조→광해군→인조로 바뀌었지만 율곡은 조정에서 그의 저술을 출판하게하고 그 제자들이 사망할 때 스승으로 주목하는 등 여전히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 ‘이이(李珥)’라는 이름으로 『인조실록』을 검색하면 관련기사가 62건이나 발견된다. 인조는 재위기간이 1623년부터 1649년까지 26년간이었다. 율곡이 사망한지 4, 50년이 지났지만 일 년에 2번 이상씩 조정에서 율곡의 이름이 언급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퇴계와 비교해보면, 퇴계의 경우 ‘퇴계’라는 호칭은 『인조실록』에 1차례 기록되었으며, ‘이황(李滉)’이라는 이름은 10번 등장한다. 『인조실록』에서 율곡에 대한 기억은 퇴계 보다 여섯 배가 넘는다는 것이다.

물론 더 많이 기억된다고 더 훌륭하다는 것은 아니다. 또 이러한 기록이 율곡의 철학적 성과나 사상사적 성과가 퇴계 보다 더 뛰어나다는 증거가 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조의 조정은 퇴계보다 율곡이 더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인조실록』에서 율곡에 대한 기록은 이전의 광해군 시대와 비교해보면 이상하리만큼 많다. 율곡 관련 기사는 『광해군일기 중초본』에서 20건, 『광해군일기 정초본』 16건이 있다.(검색조건: ‘이이(李珥)’) 인조의 다음 임금인 효종의 시대를 보면 32건의 율곡 관련 기사가 검색된다. 『인조실록』의 62건에 비하면 1/2에 불과하다. 효종 다음 임금인 현종 때의 실록을 보면 『현종실록』 54건, 『현종개수실록』 93건으로 또 급증한다. 현종 시대(재위: 1659년∼1674년)는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년∼1689년)이 활동한 시대다. 이 시기에 율곡의 기록이 많은 것은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송시열은 현종의 스승이었으며 현종의 아버지 효종의 스승이기도 하였다. 또 그는 율곡을 최고의 스승으로 모시고 있었기 때문에 조정 안팎에서 활동하면서 율곡을 자주 언급하였다. 그는 조선 주자학의 대가이기도 하고 서인이 분당한 뒤에는 노론의 영수였다. 이언적, 이이, 이황, 김집, 박세채와 함께 문묘와 종묘 종사를 동시에 이룬 6현 중 한사람이다. 그는 앞서 졸기에 나온 사계 김장생의 제자이며, 김장생의 아들 신독재(愼獨齋) 김집에게도 학문을 배웠다.

다시 『인조실록』으로 돌아와 율곡과 관련된 기사를 살펴보면 당시 조정에서 율곡에 대한 기억이 급격히 많아 진 것과 동시에 율곡에 대한 평가가 질적으로 크게 변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율곡과 퇴계는 과연 서로 대립적이고 서로 쌍벽을 이루는 조선시대 최고의 두 유학자, 혹은 대표적인 두 사상가․철학자일까? 우리가 보통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이 두 사람은 조선 유학을 형성하는 양대 산맥의 최고봉일까? 『인조실록』에 나타난 율곡 관련 기록을 읽어보면서 당시 율곡에 대한 기억이 변하는 과정을 살펴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