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종의 덕1:도회(韜晦)

효종의 덕1:도회(韜晦).

 

알려진 것처럼 효종은 애초에 왕위에 오를 왕은 아니었다. 둘째 아들인 효종 위로 장형인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1645)가 있었기 때문이다.

소현세자가 누구던가? 제16대 왕 인조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한준겸(韓浚謙)의 딸인 인열왕후(仁烈王后) 한씨이다. 16세(1627, 인조 5년) 강석기(姜碩期)의 딸인 민회빈(愍懷嬪) 강씨와 혼인하여 3남 3녀를 두었다.

소현세자는 24세(1625, 인조 3년) 정월에 왕세자로 봉해졌다. 2년 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이원익(李元翼), 신흠(申欽) 등과 함께 전주에 내려가 분조(分朝)의 업무를 담당하기 위해 무군사(撫軍司)를 설치했고, 전쟁이 끝나자 강화도로 피신했던 인조를 호위해 한양으로 돌아왔다.

34세(1635, 인조 13년) 모친인 인열왕후가 죽어 상을 치르다가, 다음해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와 함께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 이듬해 2월 세자빈과 함께 인질이 되어 청나라의 수도였던 성경(盛京, 지금의 선양瀋陽)으로 끌려갔다. 그 뒤 소현세자는 1640년과 1644년 봄에 인조의 병문안을 위해 잠시 귀국했을 때를 빼고 9년 동안 청나라에 억류되어 있었다. 1644년 청나라가 산해관을 넘어서 명나라의 수도인 북경을 점령하자, 그해 가을에는 북경으로 옮겨졌다. 마침내 44세(1645년, 인조 23) 음력 2월에 억류에서 풀려나 귀국했다.

소현세자는 청나라에 인질로 억류되어 있으면서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외교 창구 역할을 했다. 병자호란 당시 조선은 청나라에게 명나라와의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청나라가 명나라를 정벌할 때 지원군을 파병하겠다는 등의 약속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히려 친명배청의식이 강화되어 청나라와 자주 외교적 마찰을 빚었다.

이런 와중에 소현세자는 청나라 황제의 행사와 사냥 등에 참여하며 청나라 고위인사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고 조선인 포로의 속환문제와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병력 지원요구 등 여러 정치, 경제적 현안을 맡아 처리했다.

북경에 있을 때에는 독일의 예수회 선교사이자 천문학자인 아담 샬(Adam Schall, 1591-1666)과 교류하며 천구의와 천문서, 천주상 등을 선물로 받기도 했다. 당시 소현세자와 아담 샬이 주고받은 편지 내용은 라틴어로 번역되어 전해지는데 그 편지에서 소현세자는 서학의 보급에 강한 의지를 드러내기도 했다.

1645년 음력 2월 귀국한 소현세자는 그해 음력 4월 26일에 창경궁의 환경전에서 갑자기 죽었다. 고양의 소경원(昭慶園)에 매장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소현세자가 병이 갑자기 위독해져서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진원군 이세완(李世完)의 아내가 염습에 참여하고 나와서 ‘시신이 온통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에서 모두 피를 흘리고 있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것 같았다’는 증언을 남겼다는 내용도 기록하고 있다.

소현세자가 청나라에 억류되어 있을 때 포로로 잡혀간 조선 사람들을 모집해 둔전(屯田)을 경작해서 곡식을 쌓아 두고는 그것으로 진기한 물품과 무역을 한 것을 인조가 못마땅하게 여겼고, 인조에게 총애를 받던 소용(昭容) 조씨가 세자와 세자빈을 헐뜯어 소현세자가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소현세자가 죽은 뒤 인조는 영의정 김류 등 대신들이 반대에도 불구하고 세손인 이석철이 아니라 소현세자의 동생인 봉림대군(효종)을 세자로 삼았다. 이듬해인 1646년(인조 24)에는 소용 조씨를 저주하고 임금의 음식에 독약을 넣었다는 혐의로 소현세자의 세자빈 강씨를 죽였다. 1647년에는 소현세자의 세 아들을 모두 제주도로 유배 보냈다. 당시 12세와 8세였던 이석철과 이석린은 이듬해 제주도에서 죽었고, 4세였던 이석견도 효종 때인 1656년(효종 7)에야 유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연려실기술>에 효종이 대군으로 세자에 책봉되기 전 그의 사부인 윤선도와 나눈 대화가 실려 있다. 소현세자가 죽은 후 세자로 책봉될 수 있었던 일례를 보여준다.

“임금(효종)이 일찍이 잠저에 있을 때, 사부인 윤선도(尹善道, 1587-1671)에게 처신하는 방도를 물었다. 윤선도가 아뢰기를, “‘공자와 왕손은 꽃다운 나무 밑이요, 맑은 노래 아름다운 춤은 지는 꽃 앞이로다.[公子王孫芳樹下 淸歌妙舞落花前]’ 하였으니, 이 어찌 천고의 명작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이것은 도회(韜晦 세상에 재주와 덕을 감추고 어리석은 듯이 처세하는 것) 하라는 귀띔이었다. 임금이 늘 여러 부마들에게 이르기를, ‘그때 선도가 나를 아껴서 한 말인데 나를 깨우치는 데 도움이 많았다.’고 하였다.”

효종이 조심하고 삼가며 자신의 말과 행동을 잘 돌아봤을 것 같다. 훗날 효종 스스로 말하길, ‘내가 잠저에 있을 때에는 술을 즐겨 취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그러나 세자의 자리에 오른 뒤에는 끊고 마시지 않았다’는 말도 의미심장하다.

국왕이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봉건왕조시대에 군주가 신하의 생사여탈의 권한을 휘두르며 막강한 권력을 행사한 것은 분명하지만 신하들은 신하들대로 힘을 행사했다. 어려서부터 좋은 교육과 본보기를 보고 자란 명문가의 자제 출신의 신하이든, 한미한 가문이지만 능력이 출중하여 높은 성적으로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환로에 들어선 신하이든, 그들은 늘 임금과 협력과 긴장 관계를 조성하고 있었다. 임금 또한 신하들의 의견을 경청하면서도 자신의 국정 운영 방향을 고수해가지 않을 수 없었다.

<공사견문>에 효종이 신하를 평가하는 글이 실려 있다.

“임금(효종)이 일찍이 현종에게 이르기를, ‘내가 형님인 소현세자와 함께 심양에 볼모로 잡혀 있을 때 신하와 백성들이 나에게 어진 덕이 있다고 잘못 알고 마음으로 따랐다. 내가 보니 여러 신하 가운데는 혹 마음속으로 (나를 친히 대하면 소현세자 측으로부터 공격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걱정하여 스스로 나를 소원하는 자도 있었고 혹은 나에게 간곡히 하여 뒷날의 복을 기대하는 자도 있었다. 내가 그때는 비록 아부하는 것을 물리치지 못했지만 임금 자리에 오른 뒤로는 늘 그때 아부하지 않고 바르게 몸을 가지던 자들이 관직에 추천되는 것을 보면 번번이 가상히 여겨 낙점을 찍었다. 만일 오늘날 종실 중에 전날 나처럼 인망을 얻는 자가 있다면 지난날 나에게 아첨하던 자가 반드시 지난날 나에게 남몰래 후하게 했던 그 행동을 그 사람에게도 할 것이니 그것을 믿을 수 있겠는가. 지난날 몸가짐을 바르게 하던 자는 아무개 아무개이고 아첨으로 나의 환심을 사려던 자는 아무개 아무개이니 너는 모름지기 내가 사람을 쓰고 버리는 뜻을 알아두라 했다”

사람은 누구나 칭찬에 약하다. 그래서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하지 않던가. 그러나 칭찬의 외피를 걷어내면 개인의 영달을 위한 아첨이 그 안에 도사리고 있을 수 있다. 아첨하는 사람은 오늘 갑에게 아첨하다가도 내일 갑을 해치는 말을 서슴없이 할 수 있다. 효종은 이 이치를 자신을 이어 재위에 오를 현종에게 알려주고 있다. 효종의 체험이 녹아든 말일 것이다.

<조야첨재>에 실린 이야기다.

“갑오년(1654) 봄에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석강(夕講)할 때에 노기(盧杞)가 안진경(顔眞卿)을 죽이고 이규(李揆)를 내쫓는 일에 이르러서 임금(효종)이 이르기를, “소인은 대단히 간교하여 반드시 임금의 마음을 헤아려서 그 술책을 쓰는데 노기가 덕종(德宗)을 어린아이같이 놀렸으나 덕종이 그것을 깨닫지 못했으니 그 어두움을 알 만하다. 역사를 읽는 자는 장차 이것을 보고 경계하여야 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은 힘써서 뒷사람들로 하여금 지금의 우리 보기를 오늘날에 우리가 덕종을 보는 것처럼 하지 말도록 하라 했다.”

간신의 뇌간을 꿰뚫어보는 효종의 위엄이 느껴진다. 세상에 재주와 덕을 감추고 어리석은 듯이 처세하는 도회(韜晦)를 하면서도 정사(正邪)를 분명히 살펴야 한다는 말이다.

궁중의 암투는 치열하다. 효종도 이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공사견문>에 실려 있는 내용이다.

“후궁 이씨는 본관이 경주인데 숙녕옹주를 낳았으나 임금이 생전에는 이씨 직위가 숙원(淑媛)에 그쳤고 생활비 공급도 호조에서 나오는 것 외에는 조금도 특별히 더 준 것이 없었다. 현종이 동궁에 있을 때 궁중의 남는 물자로 이씨의 생활비의 부족을 보태어 줄 것을 여러 번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고 이르기를, ‘네가 다른 날에 은혜를 베풀도록 남겨두는 것이다.’ 하였다. 이는 아마 임금이 그로 하여금 당대에는 위엄을 두려워하게 하고 후사에게는 은혜를 받도록 한 것일 것이다. 앞의 일을 염려하고 뒷일을 생각함이 이렇듯 깊었다. 숙종 때에 안빈(安嬪)으로 봉하였다.”

과연 효종이 이씨를 진정으로 아껴서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 그리했는지, 아니면 숙종이 장희빈을 왕비로 삼을 정도로는 사랑하지 않아서 그리했는지는 모르겠다. 효종이 앞일을 준비하는 마음만은 분명히 살필 수 있다. 이 또한 도회(韜晦)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참고 자료

<두산백과: 소현세자(昭顯世子)>
<연려실기술>

송시열이 본 효종

송시열이 본 효종.

 

릉(寧陵)은 조선조 제17대 임금인 효종대왕(1649-1659)과 인선왕후 장씨(1618-1674)의 쌍릉이다. 원래 9개의 조선 왕릉(건원릉·현릉·목릉·휘릉·숭릉·혜릉·원릉·수릉·경릉)으로 이루어진 양주의 동구릉(東九陵) 경내의 태조 이성계 무덤인 건원릉 서쪽에 있었으나, 1673년(현종 14년) 경기도 여주군에 위치한 영릉(英陵,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합장릉)으로 옮겼다.

이러한 천장(遷葬, 무덤을 옮김)에는 사연이 있다.

현종 14년 5월에 종실 영림부령 익수가 소를 올려서 영릉의 석물에 틈이 생겨서 빗물이 스며들 염려가 있을 뿐더러 능의 봉분을 만든 제도가 매우 소루하여서 해마다 수리하는 일이 있다고 했다. 현종이 크게 놀라고 근심하며 익수를 불러 보고 그 사실을 물은 다음 대신과 육경 삼사의 여러 신하들에게 익수와 함께 가서 봉심할 것을 명했다. 이에 능을 옮길 계획을 정하여 겨울 10월에 영릉 곁에 받들어 모시기로 했다.

처음 효종이 돌아가셨을 때 능을 어디로 정할지 대신 간에 논의가 있었다. 이시백 <시장>에 따르면 이렇다.

윤선도가 풍수의 방술을 따라 수원부(水原府) 청사 뒷 산등성이가 능을 잡을 만하다고 극력 주장했는데, 모든 지관이 전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현종이 그 말을 받아들이자 대신과 중신과 삼사에서 서로 잇달아 소를 올려서 ‘오환(五患, 풍風ㆍ수水ㆍ화火ㆍ충蟲ㆍ목木)의 침해를 받을 수 있고, 군대의 진영을 철거하는 것은 가장 불가하다고 했다. 현종이 이러한 소는 받아 올리지 말라고 전교(傳敎, 명령을 내림)했다.

이시백이 간략한 상소문을 올려 극력 반대했다. ‘수원은 지세가 평탄하고 넓으며 농토가 비옥하여 실로 세 개의 도로 왕래하는 요충에 해당되며 사방으로 통한 곳으로 선유들이 논한 오환이 이보다 더 심한 곳이 없습니다.’ 그리고 영릉(英陵, 세종의 무덤) 옆 홍제동(弘濟洞)이 쓸 만하다고 논했다. 임금이 답하기를, ‘홍제동에 과연 대단히 특이한 상서가 있다면 영릉을 모신 지 200년 후인 지금까지 모신 여러 능보다 홍제동이 배나 낫단 말인가. 또 이곳은 길이 멀어서 자식의 인정상 쓸 수 없다.’ 했다.

그때 임금이 수원으로 굳게 정하고 일을 이미 시작하니 도성 안팎에서 답답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에 이시백이 다섯 번이나 차자를 올려 극론하였고 여러 신하가 역시 극력 반대하니 임금이 깨달아 능자리를 다시 건원릉 내에 잡았다.

영릉(寧陵)을 건원릉에서 영릉(英陵) 옆으로 옮기는 것을 송시열은 동의하는 입장이 아니었던 같다. <연려실기술>에 전재한 김수흥에게 보낸 편지 내용이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경자년에 친히 영릉을 봉심하였을 때에 고쳐 봉분하지 않고 그대로 틈이 난 곳만 보충하게 했는데, 임금(현종)이 결정한 일이며 여러 신하들은 다만 순종하여 응낙했을 뿐이었소. 그런데 오늘에 이르러서도 임금께서는 한마디도 반성하는 말은 없고 오로지 여러 신하들만 책망하시니 이것이 어찌 성인이 스스로 반성하고 자신에게 허물을 돌려서 자신을 책망하고 다른 사람을 가볍게 책망하는 도리이겠소. ……”

“또 임금께서 경자년 이후로 계속 불편하셔서 선왕의 능에 성묘를 폐지하였소. 그러면서도 온천에는 해마다 행행하시니 식자들의 마음에 의심이 없을 수 없는 일이오. 경자년 이후로 만일 다시 친히 봉심하는 일이 있었다면 어찌 오늘의 일이 있었겠소. 그런데도 스스로 반성하시는 말씀이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니, 역시 임금의 덕이 부족한가 하오. ……”

“새 능이 과연 길하다면 얼마나 다행한 일이겠소. 당초에 수원에 모시자는 말이 한두 사람의 입에서 나왔었는데 지금 와서는 모두들 잘못을 나에게 돌려서, ‘만일 그때 수원에 모셨다면 어찌 이런 일이 있었겠느냐.’고 하오. 이 일이 과연 산지를 잘못 정한 소치라면 내 마땅히 만 번 죽음을 당하더라도 달게 여기겠소. 당초에 나는 진실로 수원을 그르다고도 하지 않았으며, 또 영릉(寧陵)이 길하다고도 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내가 풍수에 관하여 아는 바가 없었기 때문이었소. ……”

“지금 영릉을 좋지 못한 땅이라고 하여 고쳐 장사하려고 한다면 누가 감히 반대하겠소. 또한 주자(朱子)의 말과 같이 능을 택하는 데에는 거리가 멀고 가까운 것을 가릴 것이 아니며 다만 서울 가까운 곳에서만 구차히 일을 끝내고자 할 일이 아닌 것 같소. 당초에 임금께서는 홍제동은 멀어서 좋지 않다 하셨는데 가까운 영릉도 성묘하지 않으면서 어찌 홍제동이 멀다고 탓하겠소.”

송시열이 현종에게 올린 상소에는 송시열의 입장이 더욱 분명하다.

“옛 능의 신혈(神穴)이 극히 평안하오니 이것은 음양의 기운이 순조롭고, 온갖 신(神)이 상서를 모은 소치이기도 하지만 어찌 성상의 효성이 돈독하고 지극하여 신령한 응함이 저절로 따르게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생각하옵건대, 주자는 부친의 분묘를 두 번 옮겼으나 산릉에 대해서는 경동(警動)할 수 있다고 경계했습니다. 이것은 제왕가의 일이 범인과 다름을 의미합니다. 이번에 능의 흙을 한 자쯤 파헤쳤을 때 벌써 광 안에 이상이 없음을 알았으나 일을 맡아 보던 여러 신하들이 서로 망측한 사람들의 말을 두려워하여 손질하여 원래대로 봉분하자는 말을 끝내 하지 못했습니다. 새 능이 길하다는 것은 옛날부터 일러 오는 바이지만 또한 어찌 지극히 편안한 땅에 그대로 모시는 것만 같겠습니까?”

현종이 송시열의 상소에 비답한 내용이다.

“경의 상소를 살펴보니 나도 모르게 놀라움으로 땀이 흐른다. 경이 선왕조에서 받은 은혜는 보통 신하들과 비할 바가 아니므로 내 생각으로는 선왕의 능에 대한 일은 경이 반드시 물불을 가리지 않을 줄 알고 있었는데 경은 나의 바람에 매우 어긋난다. 능 안에 빗물이 스며들어서 고여 있는 형상이나 석물에 흠이 생긴 것은 경도 듣고 보아서 잘 알 것이다. 현궁(玄宮)에 흠이 없는 것은 겉모양만 보고 알 수 있는 일이 아니니 어찌 다시 봉분하자는 의논이 있을 수 있으랴. 이에 나는 의혹하여 경의 의견을 이해할 수가 없다.”

현종은 송시열의 상소를 보고 효종에 대한 충성이 아니라고 평했다. 송시열은 기해예송에서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가 효종을 위해 기년복(1년)을 입어야 한다고 해서 관철시켰으나 후에 갑인예송에서는 노론이 대공복을 주장하다 된서리를 당한다. 그리고 효종에 대한 충성에 문제가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효종이 내린 특은을 고려하면 기년(일년)복이 아니라 당연히 삼년복을 주장해야 할 터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말이다.

송시열이 효종을 진심으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송시열이 쓴 지문(誌文, 죽은 사람의 이름과 나고 죽은 날, 행적과 무덤이 있는 곳, 좌향 따위를 적은 글)이 <연려실기술>에 있다. 공식적인 글이라 속내를 모두 알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행간의 함의를 통해 추정은 할 수는 있다.

“임금은 총명하고 슬기로운 성품으로써 위태로운 국운을 구제할 뜻이 있어 왕위에 있은 지 10년 동안에 하루도 게으르게 지내지 않았다. 이 나라 백성들이 바야흐로 공이 이루어지고 정치가 안정되는 날을 발돋움하고 목을 빼고서 기다렸으나 갑자기 승하하셨다. 아! 천명이로다. 참으로 그야말로 ‘왕업을 창시하여 절반도 못 이루고 중도에서 돌아가다’는 옛말과도 같으니 천명이로다.”

<공사견문>에 잠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사는 집)에 있을 때와 세자가 되었을 때 효종이 술을 대하는 입장이 달랐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날 신하들이 술을 끊지 못하는 폐단에 미치자 임금(효종)이 말하시기를, “내가 잠저에 있을 때에는 술을 즐겨 취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그러나 세자의 자리에 오른 뒤에는 끊고 마시지 않았다. 금년 봄에 대비께서 염소 고기와 술 한 잔을 주시기에 내가 마시지 않을 수 없었으나 그 맛이 몹시 나빠 쓴 약과 다름이 없더라, 했다.”

술을 본래 먹지 않았던 것이 아니고 세자에 오른 후부터 술을 끊었다고 한다. 형님인 소현세자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이어서 세자에 오른 사정도 있었겠지만, 왕위에 오른 후 북벌을 준비하며 10년 동안 하루도 게으르게 지내지 않았다는 송시열의 말이 과장은 아닐 성싶다.

“삼대(三代, 하·은·주) 이후로는 정치가 학문에 근원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도덕정치가 천하에 분열되었지만 임금(효종)께서는 학문과 덕을 닦아서 인륜을 밝혀 나라를 다스린 까닭에 점점 왕도가 순수하게 되었다. 삼대 이후로는 오직 공리만을 숭상하였기 때문에 천리와 인륜에 부끄러운 일이 많았으나 오직 임금께서는 도의를 위주로 하고 공리를 계교하지 않은 까닭에 거룩한 뜻이 굳게 정하여져서 높기가 청천백일과 같았다.”

<공사견문>에 효종이 90에 가까운 늙은 내시를 가까이 두고 각별하게 대한 기록이 있다.

“늙은 내시 김언겸(金彦謙)은 나이 90에 가까워 한낱 식지 않은 시체에 불과하나 임금(효종)이 항상 내부에 두고 날마다 어선(御膳)을 내렸다. 이는 김언겸이 일찍이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모시고 심양에 있을 때에 소현세자에게 잘못이 있으면 울면서 간하여 종일 먹지 않고 이튿날에 또 간하였는데 임금이 일찍이 이와 같이 하는 것을 보았으므로 항상 두터이 대접한 것이다.”

효종이 자기 형님의 시종 내시를 각별히 모셨다는 내용이다. 늙은 시종 내시에게 왜 특별히 은혜를 내렸겠는가? 형님을 극진히 모셨기 때문이다. 효종이 왕위에 오른 뒤에도 소현세자를 극진히 사모하고 그리워했다는 일례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무술년에 제주에서 바친 말 가운데 몸이 희고 갈기는 검으며 몸이 크고 걷기를 잘하는 것이 있었다. 보는 사람들이 용종(龍種)이라고 했다. 이때 여러 부마 가운데서 익평위(益平尉)가 가장 어른이고 동평위(東平尉)는 새로 부마가 되어 특별한 사랑을 받았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 말이 익평위에게 돌아가지 아니하면 반드시 동평위에게 돌아갈 것이다.’ 했다. 임금이 말을 본 뒤에 숭선군(崇善君)에게 특사했다. 정태화가 이를 듣고 기뻐서 말하기를, ‘사랑하는 사위에게 주지 아니하고 서제(庶弟)에게 주었으니 참으로 지극히 거룩한 일이다.’ 했다.”

유학의 도덕정치는 효제에 근거한다. 왕이 효도하고 우애하면 백성들이 효도하고 우애한다고 봤다. 효종이 학문과 덕을 닦아서 인륜을 밝혀 나라를 다스린 까닭에 점점 왕도가 순수하게 되었다 하는 송시열의 말을 이 일화에서도 대략이나마 살필 수 있다.

<공사견문>에 신하의 마음을 읽어내는 효종의 말이 나온다.

“임금(효종)이 잠저에 있을 때 동궁으로 책봉하라는 명이 있음을 듣고 평소에 잘 알던 문관 아무개에게 말을 전하기를, ‘이제부터는 다시 조용히 서로 만나 볼 기회가 없을 것이니 한 번 보고 싶다.’고 했다. 그 문관이 미복으로 어둠을 타서 가 뵈었다. 임금이 만년에 현종에게 이르기를, ‘내가 그를 청한 것은 미처 깊이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신하된 자가 어찌 감히 세자의 집에 남몰래 찾아올 수 있겠는가. 내가 뒷날에 스스로 깨닫고 그 마음씨를 의심하여 요사이 그가 하는 짓을 보니 훗날 결코 바른 도리로써 너를 인도할 자가 못 되리라. 모름지기 너는 알아 두라.’ 했다.”

송시열이 “삼대 이후로는 오직 공리만을 숭상하였기 때문에 천리와 인륜에 부끄러운 일이 많았으나 오직 임금께서는 도의를 위주로 하고 공리를 계교하지 않은 까닭에 거룩한 뜻이 굳게 정하여져서 높기가 청천백일과 같았다.” 했는데, 이 일화가 효종의 그와 같은 마음자세를 보여준다.

“경전에 실리어 있는 글로써 임금의 덕을 형용한다면 무(武)하고 문(文)한 것은 요(堯)를 본받았고, 효도와 공순과 도리를 다한 것은 순(舜)을 본받았고, 검소하고 부지런하고 착한 말을 좋아하고 술을 미워하는 것은 우(禹)를 본받았고, 음악과 여색을 가까이하지 아니하고 허물을 고치는 데 인색하지 아니함은 탕(湯)을 본받았고, 백성을 보기를 상(傷)한 것 보듯 함은 문왕(文王)을 본받았고, 드날리고 분발하여 할 일을 미처 하지 못할까 두려워함은 무왕(武王)을 본받았으니, 한(漢) 나라 이후의 제왕에게 비교한다면, 넓고 큰 도량은 한 고조(漢高祖)와 같고, 중후하고 곧고 부드러움은 광무(光武)와 같고, 신의가 드러난 것은 소열(昭烈)에 가깝고, 화살과 쇠기둥을 놀리면서 영웅호걸을 자나깨나 생각하다가 뜻을 펴지 못하고 돌아간 것은 애석하나 송 효종(宋孝宗)과 같으니, 이것은 시세가 그러한 것이었다.”

송시열이 효종을 요임금, 순임금, 우임금, 탕임금, 문왕, 한고조, 광무제, 소열제, 송효종에 비견 한 것이 어찌 완전히 똑같다고 생각해서일까마는 효종의 학문과 도덕을 보건대 그런 특장들을 가지고 있다는 말일 것이다. 안연을 두고 성현의 기상이 있지만 순일한 경지에는 아직 이르지 못했다는 평이 있는데, 송시열이 효종을 그렇게 보는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안연이나 효종이나 모두 연부역강(나이가 젊고 기운이 왕성함)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