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협(金昌協)


김창협(金昌協)                                                            PDF Download

 

김창협(金昌協, 1651년∼1708년)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학자이다. 현종 때 진사에 급제하였으며 숙종 때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이조정랑, 대사성, 대사간, 청풍 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아버지 김수항이 사약을 받고 사망하자 벼슬을 내놓고 산속에 들어가서 살았다. 부친의 누명이 풀려 이조참판, 대제학, 지돈녕부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끝내 사양하고 나오지 않았다. 주요 저서로 『농암집』·『논어상설(論語詳說)』·『사단칠정변』 등이 있다.

 

 

1651년(1세, 효종 2년)

1월 2일, 경기도 과천 명월리 외가에서 영의정 문곡 김수항(金壽恒)의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중화(仲和), 호는 농암(農巖), 혹은 삼주(三洲)이며, 본관은 안동이다. 증조할아버지 청음 김상헌(金尙憲)은 좌의정을 지냈으며, 할아버지 운수거사 김광찬(金光燦)은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했다. 어머니는 안정 나씨(安定羅氏)로 해주목사 나성두(羅星斗)의 딸이다. 영의정을 역임한 몽와 김창집(金昌集)의 동생이다. 조선 말엽에 형제간에 영의정을 지냈던 김병학(金炳學), 김병국(金炳國)의 6대 할아버지이다.

 

1659년(9세, 효종 10년)

외할아버지 나성두의 해주 부임지에 따라갔다.

 

1665년(15세, 현종 6년)

12월, 연안 이씨 정관재 이단상의 딸과 혼인하였다.

 

1668년(18세, 현종 9년)

2월, 할아버지 김광찬이 사망하였다.

다음해 5월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9월에는 장인어른 이단상이 사망하여 곡을 하였다. 그 다음해에 「순자성악변(荀子性惡辨)」을 지었다.

 

1671년(21세, 현종 12년)

봄, 강화도에 가서 작은아버지 김수흥을 뵙고, 송경, 천마산 등을 유람하였다. 『유송경기(遊松京記)』를 지었으며, 8월에 금강산을 유람하였다. 이때 「동유기(東遊記)」와 「동정부(東征賦)」를 지었다.

 

1673년(23세, 현종 14년)

11월, 부친 김수항이 연경에 사신 갈 때 송도까지 전송하였다.

다음해 3월, 동생 김창흡과 함께 안주로 부친을 마중갔다. 6월, 우암 송시열을 모시고 용문산에 모여 강학하였다. 8월, 수원에 가서 송시열을 만났다.

 

1675년(25세, 숙종 1년)

1월, 덕원으로 귀양가는 송시열을 진천에서 송별하였다. 윤5월, 풍덕 구암서원에 가서 율곡의 봉안의식을 구경하였다. 이어서 박연, 화담을 유람하고 돌아왔다. 7월, 부친을 따라 영암 유배지에 갔다. 8월, 영암 월출산을 유람하였다. 10월에 서울로 돌아왔다. 다음해 3월과 11월에 영암에 다녀왔다.

 

1677년(27세, 숙종 3년)

9월, 영암에 갔다. 10월에 부친을 모시고 도갑사를 유람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김창집, 김창즙과 함께 동복의 적벽, 창평의 물염정을 구경하였다.

 

1678년(28세, 숙종 4년)

2월, 김창흡, 김창즙과 함께 삼각산 중흥사에서 독서하였다. 그 뒤 김창흡과 함께 곡운에 가서 큰아버지를 만났다. 가을, 부친이 철원으로 옮기게 되자 용인에 마중 갔다가 그대로 따라갔다.

 

1679년(29세, 숙종 5년)

8월, 영평 응암에 집을 지었다. 10월, 부친과 삼부폭포를 구경하였다. 11월, 가족을 데리고 응암으로 들어갔다. 형과 백운산 보문암을 유람하였다.

 

1680년(30세, 숙종 6년)

2월, 은구암 기문을 지었다. 3월, 부친이 영의정에 임명되어 서울로 돌아왔다. 여름, 응암에 들어가 독서를 하였다. 가을, 별시 초시의 대책(對策)에서 수석을 하였다. 겨울, 광주(廣州)에 가서 우암을 방문하였다.

 

1681년(31세, 숙종 7년)

5현(율곡 이이, 우계 성혼, 귀산(龜山) 양시(楊時), 예장(豫章) 나종언(羅從彦), 연평(延平) 이통(李侗). 율곡과 우계 외에는 중국학자)을 문묘에 종사하자는 상소를 올려 윤허를 받았다. 우암 송시열에게 편지를 썼다.

 

1682년(32세, 숙종 8년)

10월, 아들 김숭겸이 태어났다. 11월, 증광별시 문과에 장원하여 성균관 전적이 되었다.

 

1683년(33세, 숙종 9년)

2월, 병조 좌랑이 되었다. 4월, 지평에 임명되었으나 바로 교체되었다. 6월, 도당록에 들었다. 부수찬을 거쳐 수찬이 되었다. 검토관으로 소대(召對, 임금의 부름을 받고 나아가 정치에 관한 의견을 올리는 일)에 불려갔다. 7월, 부교리가 되었으며 12월, 헌납이 되었다. 명성왕후가 사망하자 상소문을 올려, 백관들의 상복을 모두 옛 예절에 따라 행할 것을 청하였다.

 

1684년(34세, 숙종 10년)

1월, 교리가 되었다. 동료들과 함께 상소를 올려, 송시열을 불러들이기를 청하였다. 2월, 헌납, 교리가 되었으며 5월에 『신본심경석의(新本心經釋疑)』 간행에 대한 일로 왕명을 받들고 회덕에 가서 우암을 만났다. 6월, 이조 좌랑이 되었다. 8월, 암행어사가 되어 영남을 시찰하였다. 10월, 교리, 헌납, 이조 좌랑이 되었다. 12월, 우암에게 「심경석의(心經釋疑)』에 대한 질문 목록을 올렸다.

1685년(35세, 숙종 11년)

1월, 지제교가 되었다. 2월, 부교리, 헌납이 되었다. 3월, 함경북도 병마평사가 되었다. 5월, 금강산, 학포를 유람하였다. 6월에 경성에 도착하였다. 7월, 열진을 순찰하였다. 9월, 교리, 헌납이 되었다. 10월, 조정에 돌아와, 이조 좌랑이 되었다.

 

1686년(36세, 숙종 12년)

1월, 교서관 교리, 이조 정랑이 되었다. 2월, 수찬이 되었다. 3월, 이조 정랑이 되었다. 윤4월, 부교리, 헌납, 대왕대비존숭도감 도청낭청, 부교리가 되었다. 왕명으로 『주자대선차의(朱子大全箚疑)』를 교정하였다. 헌납이 되었다. 5월, 이조 정랑이 되었으며, 6월에, 장악원정, 집의, 동부승지, 우부승지가 되었다. 7월, 대사성이 되었다. 11월, 병조, 예조 참의가 되었다.

 

1687년(37세, 숙종 13년)

1월, 대사간이 되었으며, 2월에 대사성이 되었다. 5월, 태학의 학생들과 반수당에서 잔치를 가졌다. 8월, 사직하였다. 10월, 승문원 부제조가 되었다. 11월, 청풍 부사가 되었다.

 

1688년(38세, 숙종 14년)

1월, 월악산을 유람하였다. 3월, 김창흡과 함께 단양을 유람하였다. 수암 권상하와 함께 화양동에 가서 우암을 만났다. 우암과 파곡, 병천, 선유동 등을 유람하였다. 『화양제승기(華陽諸勝記)』를 지었다. 5월, 아들 김청상이 태어났다.

 

1689년(39세, 숙종 15년)

2월, 부친이 진도로 귀양 가고 작은아버지 김수흥이 장기로 귀양을 갔다. 3월, 진도에 갔다. 4월, 진도에서 부친이 사약을 받고 사망하였다. 이에 사직을 하고 영평에 은거하였다. 우암에게 편지하여 부친의 묘비문을 청하였다. 5월, 부친을 양주 율북리 설곡에 장사 지냈다. 아들 김청상이 죽었다. 우암이 사망하여 곡을 하였다. 9월, 응암으로 들어갔다. 12월, 졸수재 조성기가 사망하여 곡을 하였다.

 

1692년(42세, 숙종 18년)

2월, 응암의 구거 동쪽에 농암서실을 지었다. 옛 지명 농암(籠巖)을 농암(農巖)으로 바꾸고 자호로 삼다. 다음해 11월, 백운산사에서 독서를 하였다.

 

1694년(44세, 숙종 20년)

이해에 1689년 기사환국으로 집권한 남인이 물러나고, 소론과 노론이 다시 조정을 장악하였다. 폐비 민씨 사건을 후회하게 된 숙종이 기사환국 당시 사건을 주관한 남인들을 귀양 보내고 소론의 남구만(南九萬)을 영의정, 박세채(朴世采)를 좌의정, 윤지완을 우의정에 각각 기용하여, 소론 정권이 성립되었다.(갑술옥사甲戌獄事 혹은 갑술환국甲戌換局이라 불림) 노론측도 폐비 민씨가 복위됨으로써 송시열(宋時烈)·민정중(閔鼎重)·김익훈(金益勳)·김수흥(金壽興)·조사석(趙師錫)·김수항(金壽恒) 등이 복권되었다. 상황이 급변하여 조정에서는 김창협에게 이러저러한 관직에 임명하였다. 그는 이후 모두 사직하고 학문에만 전념하고자 하였다.

이해 1월, 양주 봉인사에서 독서하였다. 4월, 호조 참의가 되었으나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5월, 영의정 남구만에게 편지를 보내 토죄(討罪, 죄상을 들추어 꾸짖음)를 엄하게 하지 않는 일을 힐책하였다. 가족을 데리고 양주 금촌에 거주하였다. 승문원 부제조, 홍문관 부제학이 되었다. 사직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6월, 대사간이 되었다. 농암으로 들어갔다. 8월, 동부승지가 되었으며 이후 우부승지, 좌부승지가 되었으나 사직을 청하였다.

 

1695년(45세, 숙종 21년)

1월, 이조 참의가 되었으나 사직을 청하여, 교체되었다. 3월, 농암으로 들어갔다. 4월, 부제학이 되었으나 사직, 체차되었다. 7월, 개성 유수가 되고, 8월, 형조 참판이 되었으나 사직하였다. 9월, 농암에 들어갔다. 11월, 대사헌이 되었다. 양주 석실서원에 머물며 강학하였다. 12월, 사직을 청하여 교체되었다.

 

1696년(46세, 숙종 22년)

2월, 창계 임영(林泳)이 사망하여 곡하였다. 3월, 예조 참판이 되었다. 농암으로 들어가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철원에 가서 형 김창집을 만났다. 4월, 미음으로 돌아왔다. 5월, 홍문관 제학, 부제학이 되었으나 사직, 체차되었다. 7월, 인천부에 가서 장모 정관재 부인을 찾아뵈었다. 황주하(黃柱河)가 사망하여 곡을 하였다. 8월, 농암에 들어갔다. 원주에 가서 황주하의 장례에 참석한 뒤 청평, 한계를 유람하였다. 『동정기(東征記)』를 지었다. 9월, 이조 참판이 되었으나 사직하여 교체되었다. 11월, 수원 만의촌에 가서 우암 묘지의 개장(改葬)에 참여하였다.

 

1697년(47세, 숙종 23년)

2월, 동지경연사, 부제학이 되었으나 사직하였다. 3월, 미음으로 돌아왔다. 윤3월, 여러 사람과 도봉서원에 다녀왔다. 6월, 병조 참판, 부제학이 되었으나 사직하였다. 8월, 삼주로 거처를 옮겼다. 11월, 광주 수종사에서 지냈다.

다음해 7월, 대사헌이 되었으나 사직을 신청, 체차되었다. 10월, 도봉서원에 다녀왔다. 11월, 모친을 모시고 형 김창집의 강화부 부임지에 다녀왔다.

 

1699년(49세, 숙종 25년)

1월과 3월, 강화부에 다녀왔다. 아우 김창즙 등과 송도, 천마산을 유람하였다. 4월, 형을 따라 보문암을 유람하였다. 삼주로 돌아왔다. 5월, 형자 김호겸(金好謙)이 사망하여 곡을 하였다. 7월, 호조 참판이 되었다. 윤7월, 이조 참판이 되었다. 농암으로 들어갔다. 9월, 강화부에 다녀왔다. 10월, 부제학이 되었으나 바로 체차되었다. 12월, 이조 참판이 되었으나 사직하였다.

 

1700년(50세, 숙종 26년)

1월, 삼주로 돌아왔다. 3월, 농암에 들어갔다. 6월, 대사헌이 되었으나 사직하였다. 7월, 오씨의 부인이 된 딸이 사망하여 곡을 하였다. 10월, 아들 김숭겸이 사망하여 곡하였다.

 

1701년(51세, 숙종 27년)

1월, 석관촌 김창업의 별장에 잠시 거주하였다. 2월, 대사성이 되었으나 사직하였다. 3월, 백부(伯父, 큰아버지) 김수증이 사마하여 곡하였다. 11월, 부제학이 되었으나 사직하였다. 퇴계와 율곡의 사단칠정론, 율곡의 인심도심설을 논하였다. 그의 학문적인 입장은 퇴계와 율곡의 설을 절충한 것으로 평가된다.

다음해 동지돈녕부사, 부제학, 예문관 제학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여름에 만취대를 유람하였다.

 

1703년(53세, 숙종 29년)

2월, 이씨에게 시집간 딸이 사망하였다. 6월, 모친상을 당하였다. 다음해 2월, 권상유에게 편지하여 『사변록변(思辨錄辨)』을 논하였다.

 

1705년(55세, 숙종 31년)

8월, 삼년상을 마치고 삼주로 돌아왔다. 9월, 한성부 좌윤이 되었다. 11월, 대사간, 이조 참판이 되었으나 사직하였다.

다음해 대제학, 지성균관사, 형조 판서, 예조 판서, 대사헌, 지춘추관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직하였다.

 

1707년(57세, 숙종 33년)

4월, 대제학이 되었으나 사직하였다. 7월, 이유(李濡)의 녹천 별업에 거처하였다. 가을에 제자들과 도봉서원을 방문하였으며, 이희조와 수락산 옥유동을 유람하고, 10월에 삼주로 돌아왔다. 그 뒤 묘적산을 유람하였다.

 

1708년(58세, 숙종 34년)

윤3월, 형제들과 함께 금촌에서 물고기 구경을 하고, 묘적사를 유람하였다. 4월 11일, 삼주에서 사망하였다. 6월, 석실의 선영에 장사를 지냈다.

『숙종실록』(46권, 숙종 34년 4월 11일)에 다음과 같이 졸기가 실려있다.

 

“지돈녕부사 김창협이 사망하였다. 그의 자는 중화(仲和)이며, 영의정 김수항의 둘째 아들이다. 천성이 순수하고 청결하여 한 점 더러운 세속의 기운이 없었다. 문장은 그 맛이 진하여 구양수(歐陽修)의 정수를 깊이 얻었다. 개국이래로 이런 사람은 한 두 사람에 불과했는데, 김창협은 자립하였다고 할만하다. 시(詩)는 한나라, 위나라를 참고하면서 두보로 보완하였다. 필력은 고상하고 기운이 있어서, 천박한 문장을 일삼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은 선비가 끝까지 할 사업은 되지 못한다고 여겨 마침내 육경(六經)공부에만 정진하여 성리학에 깊이 빠져 널리 행하고 침식을 잊기까지 하였다. 견해가 정확하고 공부가 독실하여 요즘의 변통 없는 선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주자서(朱子書)에 공력을 쏟아, 송시열이 『주문차의(朱文箚義)』를 저술할 때에 그의 말을 많이 인용하였다. 만년에 도리가 막히고 유생들이 갈라지고 찢어지는 때를 당하니, 명분과 의리를 바르게 드러내고 사악함을 물리치는 것으로 자기의 임무를 삼았다. 세상의 도가 그 덕분에 유지되고 번성하여 유림의 으뜸이 되었다. 그를 따라 배우는 자가 매우 많았는데 가르치기를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후배들 가운데 문장을 바로잡을 자가 있으면 이끌어서 학문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젊어서 문과 갑과에 올라, 명망이 한 시대를 굽어보았다. 임금 앞에서 강론을 할 때는, 범조우(范祖禹)처럼 삼매(三昧)의 경지에 들었다는 평가가 있었다. 더욱 군주의 덕이 부족하면 잊지 않고 돌보았다. 일을 만나면 경계하고 바로잡아 임금의 노여움을 회피하지 않았다. 1689년(숙종 15년)의 화(禍)를 만나자, 다시는 세상에 뜻을 두지 않았다. 1694년 정국 변동 후에 여러 번 불렀으나 나오지 않았다. 궁벽한 산골에서 굶주림을 참아가면서 굳게 지조를 지키면서 한평생을 마쳤으니, 비록 뜻이 다른 자라도 높이 우러러 공경하여 스스로 미치기 어렵다고 여겼다. 대개 타고난 성품의 순수성과 문장의 고상함, 그리고 학문의 심오함을 논하면, 모든 것이 남보다 뛰어나 진실로 세상에 드문 대학자라고 할 수 있다. 이 날에 이르러 졸(卒)하니 나이가 58세다. 성균관 유생들이 학교를 비우고 나와 술과 과일을 올렸고, 학자들이 그를 ‘농암 선생’이라고 일컬었다. 문집 34권이 있어 세상에 행하여졌으며, 뒤에 문간(文簡)이란 시호를 내려 주었다.”

 

1709년(숙종 35년) 9월, 제자 김시좌(金時佐) 등이 문집을 간행하였다.

1711년(숙종 37년) 영암 연촌서원에 배향되었다. 1713년(숙종 39년) 가을에는 석실서원에 배향되었다.

1725년(영조 1년) 가을, ‘문간(文簡)’이라는 시호가 내렸다.

1854년(철종 5년) 5대손 김수근이 속집을 간행하였다.

1928년(년) 종9대손 김녕한이 원집을 세 번째로 출간하고, 속집을 두 번째로 간행하였으며, 별집을 증보하였다.

 

<참고자료>

『숙종실록』

「김창협 행력」, 『한국문집총간 인물연표』(http://www.krpia.co.kr/)

김창현, 「김창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