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심(崔秉心)


최병심(崔秉心)                                                            PDF Download

1874년(고종 11)∼1957년. 근현대의 유학자.

최병심의 본관은 전주. 자는 경존(敬存), 호는 흠재(欽齋)이다. 아버지는 최우홍(崔宇洪)이며, 어머니는 이천 서씨로 서학문(徐鶴聞)의 딸이다. 이병우(李炳宇)와 전우(田愚)의 문인이다.

최병심은 1874년 10월 5일 전주 교동(현재 한옥마을)에서 아버지 최우홍과 어머니 이천 서씨의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날 당시 어머니 서씨는 흰 용이 옥류천(玉流泉) 위를 나는 태몽을 꾸었다고 한다. 최병심은 이 곳에서 1957년 향년 84세로 세상을 마칠 때까지 지냈으며, 유학자로서의 높은 명성 때문에 전주에서는 ‘전주 최학사’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최근에는 이병은(李炳殷)․송기면(宋基冕)과 함께 전주의 ‘한옥마을 삼재(三齋)’라고 해서 새롭게 조명받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어려서 아버지 벽계공에게 글을 배우다가 16세 때 이병우에게 『논어』․『맹자』․『대학』․『중용』의 사서와 『주역』․『춘추』․『서경』 등을 배웠다. 23세 때 송병선(宋秉璿)을 알현하였는데, 당시 송병선은 『근사속록(近思續錄)』 한 권을 주면서 학업에 정진할 것을 장려했다고 한다. 『근사속록』은 송병선이 중국 송대의 주희가 편찬한 『근사록』을 모방하여 조광조․이황․이이․김장생․송시열 등의 말을 모아 엮은 책이다. 송병선은 서문에서 조광조와 이황은 주돈이(周敦頤)와, 이이는 정호(程顥)와, 김장생은 장재(張載)와, 송시열은 주희(朱熹)와 같다고 하였다. 주희는 주돈이․정호․정이․장재의 글을 읽고, 이들 가운데 일상생활에 절실한 것들을 뽑아서 『근사록』을 편찬하였으며, 그 편찬 목적에 대해 초학자들에게 광대한 성리학 이론을 안내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24세 때 태안으로 가서 전우를 스승으로 모셨는데, 당시 안면도 연천서당에 기거하고 있던 전우는 최병심을 보고

“우리 유학을 맡길 만하다”

라고 하고, 『서경』에 나오는 ‘흠명문사(欽明文思)’에서 ‘흠’자를 따서 호를 지어 주었다. ‘흠명문사’는 요임금의 덕을 칭송한 말로 ‘흠’은 몸을 삼감, ‘명’은 이치에 밝음, ‘문’은 문장이 빛남, ‘사’는 생각이 깊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최병심은 스승이 지어준 ‘흠’자를 스스로 ‘흠’자의 옛날 음인 ‘금’으로 고쳐 불렀는데, 그 때문에 주변 사람들도 ‘흠재’가 아닌 ‘금재’라고 불렀다. 이후 전우가 천안으로 거처를 옮기자, 최병심은 전주로 돌아와서 옥류동에 서당을 열고 이름을 옥류정사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평생을 후학양성에 매진하였다.

31세 때 명릉참봉으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37세 때 경술국치를 당하자 발산(鉢山)에 올라가 하루 종일 통곡하고 두문불출하였는데, 이때부터 기거하던 옥류동을 벗어나지 않았다. 39세 때 임자동밀맹단(壬子冬密盟團)에서 활동하였는데, ‘임자동일맹’은 이석용(李錫庸)이 조직한 항일의병대였다. 44세 때는 당시 도지사 이진호가 대지를 팔라고 하는 것을 거절하자, 토지수용령을 발동하여 가옥을 불태우고 집을 강제로 철거하였다. 45세 때는 망동묘에 가서 제향을 그만둘 수 없다는 것을 주장하다가 괴산경찰서에 7일 동안 구금되었다. 51세 때는 스승 전우의 문집 간행 문제로 오진영(吳震泳)과 논박하였으며, 64세 때는 『염재야록(念齋野錄)』 서문을 써준 일이 말썽이 되어 임실경찰서에 5일 동안 구금되었다가 단식으로 풀려났다. 조희제(趙熙濟)가 한말 독립투사들의 비밀 일을 엮은 『염재야록』 서문을 쓴 일로 조희제와 함께 임실경찰서에 옥고를 치른 것이다. 68세 때 일제에게 빼앗겼던 잠종장 땅을 23년 만에 돌려받았고, 광복 3년 후인 75세 때 성균관 부관장에 추대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의리를 지키고 강학에 힘쓰던 최병심은 1957년 윤8월 10일 향년 84세의 일기로 옥류동 염수당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최병심은 스승 전우를 모시기를 마치 부모를 섬기듯이 하였고, 스승과 친구들에 대한 의리가 지극하였다고 한다. 왜적에 대해서는 감옥에서나 집에서는 죽음으로 항거하여 끝내 굴복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옥류동을 백이와 숙제의 수양산에 비유했다고 하니 그 인품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최병심은 당시 열강제국의 침략에 따른 국난 속에서 자신의 거취를 은둔 강학의 행로로 정하고 그 길을 걸었다. 전우의

“선비는 난세에 처하여 의리를 지키지 않으면 의병을 일으켜야 한다”

라는 말처럼, 국가와 종묘사직이 무너진 상황에서는 두 가지 길밖에 없다고 여겼으며, 결국 의리를 지키는 길을 택하게 된다. 이에 산림의 선비로 자처하고 도학을 지키는 것을 평생의 신념으로 삼았다. 국가가 무너진다면 도를 지켜 훗날을 기약해야 하고, 도가 지켜진다면 국가도 회복할 수 있다는 신념 아래, 강학하고 교육하면서 의를 지키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고 여겼다. “도란 넓고 넓어서 밖이 없는 법이니 나라가 도 가운데 있지 않겠는가.” 결국 국가가 무너진다면 도를 지켜 훗날을 기약해야 하고, 도가 지켜진다면 국가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유학자가 행해야 할 것 중의 하나가 강학임을 자임하였으니, 이에 많은 제자들을 길러낸 것도 그 하나의 예라 할 수 있다.

“이적이 중국을 어지럽히고 난적이 나라를 팔아먹는 것은 모두 우리 유학자들의 도학이 밝혀지지 않고 옮음을 행함이 닦여지지 않아서 극에 달하였기 때문이다. 지금 비록 국가가 이미 기울어지고 인류가 멸망하게 되었지만, 우리들이 의리를 강론하여 사사로움을 없애버리는 공과 후학들에게 도를 가르치는 마음은 마땅히 더욱더 정성스럽게 해야 할 것이니, 조금이라도 게으름을 용납해서는 안될 것이다.”

도가 지켜진다면 국권의 회복도 가능하다는 세계관이 자리하고 있다. 최병심은 이러한 세계관을 철저히 지켰으니, 이로써 전주에 옥류정사를 개설하고 많은 문하생들을 배출하였다. 그의 『문집』의 부록에 실려 있는 문인록인 「옥산연원록」에 기록된 인원만 해도 277명이 된다.

최병심은 1912년 호남창의대장 이석용이 전라남도와 전라북도에 걸쳐 일본군과 항전을 계속하여 독립밀맹단을 조직하고 각 지역을 분담하여 활동할 때, 전주지역을 맡아 이석용의 의병활동을 지원하였다. 이석용이 쓴 『호남창의일기』, 「불망록」에는 최병심이 이석용을 지원한 기록이 나와 있는데, 여기에는 최병심이 기유년 10월 전5냥, 경술년 3월 전5냥, 신해년 2월 전20냥, 신해년 12월 전3냥, 임자년 4월 전2냥, 경술년 봄에 모시두루마기 1벌을 지원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최병심의 항일의식을 여실히 보여준 사건은 이른바 한전(韓田)사건이다. 여기서 한전이란 우리나라 땅이란 뜻이다. 1918년 옥류정사가 항일사상의 본거지로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간파하고, 일제가 옥류정상 일대 1,800평을 잠업시험장으로 조성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강탈하려 하자, 최병심은 결사 항거하였다. 이에 일제가 집 일대에 불을 질렀으나 최병심은

“불에 타 죽겠다”

고 버티었다. 도리어 당황한 일본경찰들에 의해 그가 구출되었으나, 결국 그 후 토지는 일제에 압류되고 말았다. 최병심은 이 싸움을 22년 동안이나 계속하였다. 그것은 한낱 자기 소유의 땅 한 필지를 찾기 위한 투쟁이 아니라, 그 땅에 담겨진 조상의 얼과 그 조상들이 더불어 살았던 조선의 강토를 찾는 싸움이었다. 1941년에 이르러서야 한전사건이 해결되어 이 땅이 반환되었다.

한전사건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한전사실추록(韓田事實追錄)」으로 전해지고 있다.

“정사년에 전라북도 도지사인 적신 이진호가 잠업을 위한 뽕나무 밭을 넓힌다는 핑계로 병심이 대대로 터를 잡고 살아온 땅을 팔 것을 청하였다. 병심이 의리를 들어 허락하지 않자 이진호는 군인 수백 명을 동원하여 집을 둘러싸고 가족들을 때리고 묶은 뒤 집을 불사르고 밭을 빼앗고 쫓아냈다.”

이처럼 최병심은 격변하는 역사적 상황 속에서 후학들에게 투철한 항일정신과 유학의 본질인 도학과 의리정신을 불러넣었음은 물론, 자신도 일생을 항일투쟁으로 일관하였다. 그 결과 호남지역을 대표하는 유학자로서 추앙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그의 항일사상은 마침내 정부로부터 인정을 받아 독립운동가로 기록되고 국가유공자로 포상되었다. 정부는 1990년 8월 15일에 최병심의 공로를 기려 그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참고문헌]: 「금재 최병심의 학문과 사상」(이상호, 『간재학논총』10, 2010), 「최학자 금재 최병심 선생의 발자취를 찾아서」(김명엽, 『열린전북』104, 200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