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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행(金令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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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행(金令行, 1673∼1755)은 조선시대 문신이자 문인이다. 음보(蔭補)로 관직에 올라 정읍 현감, 임천군수, 영천군수, 첨지중추부사 등을 지냈다. 김창흡(金昌翕)에게 문장과 시를 배웠으며 김창집, 김창협 등 노론파 인물들과 가까워 숙종시대에 소론의 탄압을 받아 유배를 가는 등 고생을 하였다. 이러한 일로 그는 산수를 그리워하고 속세를 떠난 전원생활을 꿈꾸었는데 그의 문장에 잘 표현되어 있다. 문집으로 『필운시문고』가 있다.

 

1673년(1년)
9월 3일에 대사간, 관찰사 등을 역임한 김시걸(金時傑)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유(子裕), 호는 필운옹(弼雲翁)이다.

부친 김시걸의 자는 사흥(士興)이며, 호는 난곡(蘭谷)이다. 김광현(金光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현감을 지낸 김수인(金壽仁)이고, 아버지는 김성우(金盛遇), 어머니는 윤형성(尹衡聖)의 딸이다.

김영행은 어려서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에게 문장과 시를 배웠다. 김창흡은 좌의정 김상헌의 손자이며, 영의정 김수항의 셋째 아들이다. 김창집, 김창협의 동생이며, 이단상(李端相)의 제자이기도 하다.

김영행은 시가 두보(杜甫)의 것이 아니면 조잡하고 문장은 유종원(柳宗遠)의 것이 아니면 천박하다고 여기고 이들의 시와 문장을 본받고자 노력하였다. 나중에는 자신의 노력이 결국 옛사람의 껍데기를 흉내 내는 것뿐임을 깨닫고 그동안 지은 것들을 모두 불태워버렸다고 한다.

1684년(12세)
숙종 10년, 부친이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689년(17세)
해주오씨(海州吳氏) 충정공(忠貞公) 오두인(吳斗寅, 1624-1689)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오두인의 자는 원징(元徵), 호는 양곡(陽谷), 본관은 해주(海州)이며,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1648년에 진사시에 1등으로 합격하고 이듬해 별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1650년에 지평을 시작으로 중요한 요직을 두루 거쳤고, 형조 판서에 이르렀다.

이해(1689년, 숙종15년) 5월에 인현왕후(仁顯王后)가 폐위되자, 오두인은 이세화(李世華) 등과 함께 이를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렸다가 유배형을 받았다. 의주(義州)로 유배 가던 도중 파주에서 사망하였다. 1694년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저서로 『양곡집』이 있다.

이해, 기사환국으로 검열의 신분으로 조정에서 근무하고 있던 부친이 파직 당했다. 기사사화(己巳士禍)라고도 불리는 이 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숙종은 오랫동안 아들이 없었는데 소의(昭儀) 장씨가 왕자 윤(昀)을 낳았다. 왕은 크게 기뻐하여 그를 원자로 삼고 소의 장씨를 희빈으로 책봉하려 하였다. 그러나 당시 집권하고 있던 송시열 등 서인들(노론과 소론)은 왕비 민씨(閔氏, 인현왕후)가 아직 젊으니 좀 더 기다려 보자고 주장했다.

결국 숙종은 남인의 도움을 얻어서 서인의 요청을 묵살하고 장소의를 희빈으로 책봉하고 왕자 윤을 원자로 삼았다. 송시열은 이에 적극 반대하였으나 숙종은 서인 측의 왕비인 인현왕후 민씨를 폐출하고 부모의 봉작까지 빼앗았다. 아울러 상소를 올려서 반대한 노론파의 오두인, 박태보, 이세화 등을 유배시켰다. 김영행의 장인어른이 되는 오두인은 국문을 당하던 중에 사망하였다.

이듬 해(1690년) 6월에 송시열은 유배된 후에 사사되었으며, 숙종은 10월에 원자 윤을 세자로 책봉하고, 장씨는 희빈에서 왕비로 승격하였다.

1692년(20세)
함경남북도 지방을 유람하였다.

1694년(22세)
3월 29일, 유생 김인이 고변서를 올렸다. 신천 군수(信川郡守) 윤희(尹憘)와 훈국 별장(訓局別將) 성호빈(成虎彬) 등이 반역(反逆)을 도모하였는데 장희빈의 오빠 장희재도 참여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장희재가 지난해 숙빈 최씨의 인척에게 돈을 주고 임신 중인 최씨를 독살토록 사주하는 것을 자신이 목격했다고 고발했다.

4월 1일, 숙종은 갑자기 그동안 정권을 잡고 있던 남인을 대거 정계에서 축출하고 기사환국 때 축출한 서인들을 불러들였다. 이를 갑술환국이라고 한다. 장희빈의 오빠이자 우윤 겸 포도대장 장희재가 스스로 죄를 청하였으나 숙종은 편안하게 정사에 임하라며 인심시켰다.

그리고 4월 11일, 숙종은 돌연 장희재에게 직권남용의 죄를 묻고 관직을 박탈하고 체포하였으며, 다음날 폐비시켰던 민씨(인현왕후)를 왕비로 복위시키고, 동시에 왕비 장씨(장희빈)을 강등시켰다.

이러한 사건(갑술환국)이 발생하여, 그동안 정권을 잡고 있던 남인은 몰락하고 서인인 노론과 소론이 다시 집권하게 되었다.(이들 양파, 노론과 서인은 다시 분열되어 서로 견제하게 된다.) 덕분에 김영행의 부친 김시걸도 지평(持平)에 임명되어 다시 관직생활을 하게 되었다.

1697년(25세)
6월, 큰 아들 김이건(金履健)이 태어났다. 도봉서원의 벽에 서원의 유래 등을 적은 「서도봉원벽(書道峰院壁)」을 지었다.

1699년(27세)
이해 증광시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이 때 지은 책문은 관제(官制)·병제(兵制)·전제(田制) 등에 대하여 논한 것으로 그의 문집(『필운시문고(弼雲詩文稿)』)에 실려 있다. 5월, 작은 아들 김이적(金履迪)이 태어났다.

1701년(29세)
숙종 27년 6월, 부친상을 당하였다. 이때 문집에 들어 있는 「병중지애(病中志哀)」를 지었다. 이 글은 부친을 여의고 5개월 후 부친의 생신을 맞이하여 지은 것으로 부친이 전라도 관찰사로 재직 중 풍토병에 걸려 사망하기까지의 과정을 상세히 서술하고 부친 생전에 자신과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회고하며 애통해 하는 내용이다.

이해 6월 8일에 정언 조태일(趙泰一)이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김영행의 처벌을 임금에 건의하였다.

“대사간 김시걸(金時傑, 김영행의 부친)은 호남(湖南) 방백(方伯, 지방장관)으로 있을 때 그 아들 김영행(金令行)이 괴상하고 패악스러운 일을 많이 하였습니다. 역마(驛馬)를 강제로 징발하여 삼례역(參禮驛) 근처 정사(亭榭)에 놀다가 갈아탄 말이 좋지 않다고 성을 내어 하급 관리(下吏)를 채찍으로 치고, 우편관(郵官)을 꾸짖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관 도영성(都永成)이 막 장문(狀聞)하려던 차에 김시걸이 그 기미를 알고, 먼저 손을 써서 생트집을 잡아 계파(啓罷)하였습니다. 바라건대 김시걸ㆍ김영행ㆍ도영성을 모두 잡아다가 사실을 밝혀 처리하소서.”

그러나 숙종 임금은 이러한 건의를 따르지 않았다

조태일의 건의에 대해서 정언 이덕영(李德英)이 관직을 내놓으며 다음과 같이 반대하였다.

“김시걸(金時傑)의 경우 체직(遞職, 관리의 교체)을 먼저 의논하지 않고 곧바로 체포하여 조사(拿問)하자고 청한 것은 실로 옛날에 없었던 바입니다.”

이러한 이덕영의 반대에 대해서 조태일(趙泰一)도 관직 사임의 뜻을 밝혔다. 이에 조정에서는 이덕영을 체직시키고, 조태일은 그대로 관직에 있도록 하였다.

김영행의 행동을 조태일이 문제 삼은 것은 당파싸움의 일환으로 보인다. 그래서 임금은 한쪽의 일방적인 처벌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물론 그러한 트집을 잡힌 김영행도 어느 정도 잘못이 있었겠지만, 김영행은 노론계인 김창흡의 제자로 김창흡의 가족인 김수항, 김창집 등과 연루하여 지목을 받고 있었다.

1708년(36세)
1월, 셋째 아들 김이원(金履遠)이 태어났다.

1711년(39세)
1월, 모친상을 당하다.

1715년(43세)
음보(蔭補, 과거시험을 보지 않고 추천으로 관직에 오름)로 경녕전(敬寧殿) 참봉(參奉)에 임명되었다.

다음해 2월, 영소전(永昭殿) 참봉(參奉)에 임명되었다. 이해에 유승선(柳承宣)과 자신의 집에 나누어져 보관되어오던 『심경』을 합쳐서 「청정장암발구장 심경(請鄭丈巖跋舊藏心經)」을 편찬하였다.

1717년(45세)
가을에 아들 김이건 등과 함께 송도(松都) 박연(朴淵)을 유람하였다. 8월에 익위사(翊衛司) 시직(侍直)이 되었다. 이해 9월부터 10월 사이에 있었던 일을 기록한 「서연일기(書筵日記)」가 그의 문집(『弼雲詩文稿』)에 수록되어 있다.

1718년(46세)
윤8월, 부솔(副率)에 임명되었으며 다음해 양구 현감이 되었다.

1720년(48세)
8월, 중앙에 올린 송이버섯 중에 상하고 마른 것이 많다는 이유로 조사를 받았다.

1722년(50세)
7월, 양구 현감에서 파직되었으며, 옥사에 연루되어 한양 바깥으로 추방되는 형벌을 받았다.

이해에 임인옥사(壬寅獄事) 사건이 일어났다. 소론 측이 거짓으로 꾸며서 노론을 공격한 사건으로 노론측이 임금을 시해하려고 했다고 주장하여 당시 노론의 대표적인 관료들, 즉 김창집(金昌集), 이건명(李健命), 이이명(李頤命), 조태채(趙泰采) 등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화를 당하였다.

김창집은 김영행의 스승 김창흡의 형이다. 이 사화를 계기로 소론이 정권을 잡았으며 노론측 인사들과 가까운 김영행은 많은 피해를 입게 되었다.

1723년(51세)
1월 17일, 간원(諫院)에서 다음과 같이 건의하였다.

“지난번에 한양성 바깥으로 쫓겨난 죄인 김재로(金在魯)ㆍ전(前) 도승지(都承旨) 신사철(申思喆)ㆍ전 대장(大將) 장붕익(張鵬翼)ㆍ전 부사(府使) 김취로(金取魯)ㆍ전 사간(司諫) 김고(金橰)ㆍ전 현감(縣監) 김영행(金令行)ㆍ전 경력(經歷) 김희로(金希魯)ㆍ전 경력 강욱(姜頊)ㆍ별제(別提) 구정훈(具鼎勳) 등은 온 가족이 시골로 내려갔는데도 자신은 서울에 엎드려 있고, 혹은 가마를 타고 자취를 숨기며, 왕래하면서 계획을 짜고 있습니다. 혹은 첩에게 재물을 쓰는 데 인색하지 않고 혹은 상복의 몸으로 가만히 은밀한 자리에 참여하는가 하면 어두운 밤을 타고 회합하는 등 그 움직임이 은밀하여 여정(輿情)이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참으로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북쪽에서 자문(咨文)이 오는 것을 빙자하여 근거 없는 말을 지어내고 이리저리 전파시키며 안팎을 선동하니, 근래 서울의 소동은 모두 이로 말미암아 나온 것입니다. 대개 나라를 원망하고 난(亂)을 다행하게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먼저 민정(民情)을 동요시키려고 하니, 그 정상(情狀)의 헤아리기 어려운 정도가 지난달 16인과 더불어 크게 다름이 없습니다. 간악한 싹을 미리 꺾는 일이야말로 조금도 늦출 수 없으니, 북쪽으로 귀양 보내는 것이 오늘날 정사의 급무입니다.”(『경종실록』)

경종 임금은 이러한 건의를 무시하고 따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틀 뒤, 조정에서는 명령을 내려, ‘김재로(金在魯)를 이산군(理山郡)으로, 신사철(申思喆)을 장기현(長鬐縣)으로, 장붕익(張鵬翼)을 종성부(鍾城府)로, 김취로(金取魯)를 울산부(蔚山府)로, 김고(金橰)를 경성부(鏡城府)로, 김영행(金令行)을 기장현(機張縣)으로, 김희로(金希魯)를 위원군(渭原郡)으로, 강욱(姜頊)을 삼수군(三水郡)으로, 구정훈(具鼎勳)을 동래부(東萊府)로 귀양보냈다’.

사관은 이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였다.

“김영행에 이르러서는 그 언의(言議)가 반역의 무리들과는 전혀 상반되어 조태구(趙泰耉)의 신축년 사업을 칭송하고 사람들과 더불어 교류하였으니, 이에서도 그 허망한 일면이 이미 나타난 것이다. 또 풍설을 선동하였다고 말한 것은 더욱더 말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조정(朝廷)이 먼저 스스로 두려워하고 겁을 내어 백성의 뜻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도리어 그 허물을 엉뚱한 곳으로 돌리니, 어찌 심히 가소롭지 않겠는가? 사람들이 많이 억울하게 여기면서도 그 날카로운 칼날을 두려워하여 감히 입 밖에 말을 내는 자가 없었으니, 여기에서 시세(時勢)의 위험하고 두려움을 알 수 있다.”

김영행은 이해 1월, 기장현(機張縣)으로 유배되었으나, 5월에 바로 석방되었다.

1724년(52세)
홍주(洪州, 지금의 충청남도 홍성군)의 갈산(葛山) 조휘곡(朝暉谷, 지금의 소향리 향산동) 선영에 의추재(依楸齋)를 완성하다. 그는 노론 김창협, 김창집 당으로 지목되어 주위의 비방이 심해지고 당쟁의 피해를 입었다. 그래서 지인인 윤백욱·이병연 등과 함께 산수를 그리워하고 속세를 떠난 전원생활을 꿈꾸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전원속의 안식처를 완성한 것이다. 그의 문집에 들어 있는 「조휘곡의추재서사(朝暉谷依楸齋書事)」는 이러한 심정을 토로하며, 사묘(祠廟)와 거처를 조휘곡에 마련하게 된 경위와 그곳에 밭을 갈고 샘을 파, 세상사에 뜻을 끊고 은거하며 여생을 보낼 뜻을 서술하였다.

1725년(53세)
경종의 뒤를 이어 영조가 즉위하였다. 이에 김영행은 다시 조정에 나아가 우사어(右司禦)로 기용되었다. 이어 4월에, 사어(司禦)에 임명되었다.

4월 22일에 대사간 정형익(鄭亨益)이 이렇게 임금에게 건의하였다.

“사어(司禦) 김영행(金令行)과 전 위솔(衛率) 김시좌(金時佐)는 고(故) 상신 김창집(金昌集)의 일가 자제로서, 당시의 흉당(노론파 김창집 등을 탄압한 만든 소론파)에게 아첨하여 붙좇으면서 말할 때마다 반드시 역적 김창집이라고 하였으니, 그 마음 씀씀이와 처신을 차마 바로 볼 수 없습니다. 신은 이들을 사판(仕版, 선비 명단)에서 삭제하여 풍습을 다잡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임금은 “김영행과 김시좌는, 과연 상소에서 논한 바와 같다면 참으로 매우 놀라운 일이다. 모두 아뢴 대로 사판에서 삭제하는 벌을 시행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이에 김영행은 파직을 당하고 영원히 관직에 나갈 수 없는 처분을 받았다.

이러한 결정에 대해서 10월 19일, 동부승지 이봉익(李鳳翼)이 상소하여 임금에게 이렇게 건의하였다.

“신이 삼가 생각하건대 조정에서 사람을 등용할 때 열어 주고 막는 방도를 신중하게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봅니다. 아무리 미관말직이라도 혹 원망을 품은 사람이 있다면 참으로 성세(聖世)에서 너그러이 포용하는 은전에 흠이 될 것입니다. 전(前) 사어(司禦) 김영행(金令行)은 강화도에서 절의에 따라 목숨을 버린 신하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의 후손이며 고(故) 감사 김시걸(金時傑)의 아들인데, 그의 행실과 의론에는 어떠한 허물도 없습니다.

그리고 고 상신(相臣) 충헌공(忠獻公) 김창집(金昌集)과 비록 먼 일가이나 대대로 한 고을에 살면서 정의(情義)가 어긋나지 않았으므로 신축년(1721, 경종1)에 충헌공의 족당이 처참하게 무함을 받자 끝내 먼 곳에 귀양을 가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래서 성상께서 즉위하신 뒤에 즉시 수용하게 하셨으니 공의(公議)를 볼 수 있습니다.

충헌공의 이름을 함부로 불렀다는 이야기에 대해서는 참으로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더구나 김영행이 일찍이 산골짜기 고을을 맡고서 정성을 다해 백성을 구휼하여 도신(道臣)이 포상하여야 한다고 아뢴 적이 있기까지 하였는데 계속 관직의 길을 막고 폐한다면 어찌 애석하지 않겠습니까? (중략)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아울러 더욱 통촉하시어 소외되었다는 탄식이 없게 하소서. 신은 두렵고 간절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임금은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김영행과 박필언의 일은 그대의 말이 옳으니 모두 다시 등용하겠다.”고 하였다.

1726년(54세)
12월, 활인서(活人署) 별제(別提)에 임명되었다.

1727년(55세)
1월, 정읍 현감(縣監)에 임명되었다가, 11월에 제용감(濟用監) 판관(判官)이 되었다. 다음해 12월에, 지평(砥平) 현감에 임명되었다.

1730년(58세)
빈전혼전도감(殯殿魂殿都監) 낭청(郞廳)이 되었다.

다음해 8월, 와서(瓦署) 별제(別提), 돈녕부 주부에 임명되었다가 그 다음달에 사옹원(司饔院) 첨정(僉正)에 임명되었다. 10월에 영천(榮川, 지금의 영주) 군수에 임명되었다.

1733년(61세)
3월, 부인 오씨의 상을 당하였다. 도곡 이의현(陶谷 李宜顯, 1669-1745)이 다음과 같은 만시를 지어 보냈다.

 

聖代敦風化 성스러운 시대에 풍습을 돈독히 하고
珩璜叶古詩 생전의 거동은 옛 시에 어울렸다네
忠臣家有女 충신의 집안에 따님으로 태어나
壼則世堪師 규문의 생활은 세상의 본보기였네
處坎留嘉勖 어려울 때도 훌륭한 내조를 남기고
歸眞眎儉規 죽어서도 검소한 모범을 남겼다네
幅中多載美 시폭 안에 아름다움을 많이 담아
斟酌鼓盆悲 아내 잃은 슬픔을 짐작 하겠네

 

이의현은 영조 시대에 영의정에까지 오른 인물로 숙종, 경종, 영조 세 왕조에 걸쳐 활동한 정치가이자 문인학자였다. 명망 있는 가문에서 출생한 이의현은 농암(農巖) 김창협의 문하에 들어가 노론과 낙론(洛論)의 학맥을 계승하는 대표적인 인물이 되었는데, 정치적 야망보다는 학자적인 삶에 치중하였으며, 김영행과는 평생의 지우이기도 하였다.

김영행은 부인과 사이에 4남 4녀를 두었다. 큰아들 김이건(金履健)은 동지중추(同知中樞)의 자리에 올랐으며, 셋째 아들 김이원(金履遠)은 목사(牧使)를 지냈다. 넷째 아들은 일찍 요절하였다.

그는 부인과 사별하는 슬픔을 제문(「祭亡室文」)으로 표현하였는데 다음과 같다.

“(전략) 글로써 작별을 알리니, 아아 애통하도다. 나는 본래 천지간에 이 괴로운 처지를 하소연할 데 없는 불행한 사람이다. 스물아홉에 부친을 여의고 서른아홉에 어머니를 잃었다. 여섯 명의 형제들도 차례로 사망하고, 자녀들도 서로 연달아 죽은 자가 몇이나 되는지 모르겠다. 외롭고 의지할 곳이 없으며, 삶의 재미도 모두 사라져버렸다. 그래도 백발이 되도록 부부가 서로 의지하며 그것을 운명으로 삼아 살아왔다. 무릇 슬픈 일이나 기쁜 일이나 고통스러운 일이나 즐거운 일을 함께 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서로 너그럽게 깨우치기도 하고 그래서 때로는 지극히 슬픈 일을 잊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대는 지금 나를 버리고 갑자기 죽었구나. 이제 앞으로 나는 이 세상이 어떤 뜻이 있겠는가?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이 세상의 인연을 잊고 계속 향불이나 피우고 싶다. 남아 있는 아이들은 의지할 곳이 없으니 친구나 짝을 찾아가게 하고 나는 시와 술로 살고 싶다. 그러나 한 집안의 늙은 어른으로 반평생의 친구들도 늙고 쇠하여 거의 없어졌으니 장차 무엇으로 이 슬픔을 위로 받고 남은 생을 마칠 것인가? (생략)”

 

1735년(63세)
3월, 평시서(平市署) 영(令)이 되었다. 그리고 윤대관(輪對官)으로 입시(入侍)하였다. 다음해 1월에 임천(林川)의 군수에 임명되었다.

1740년(68세)
9월에 익찬(翊贊)이 되었으며, 4년 뒤에는 통정대부에 올랐다.

1745년(73세)
1월,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이해 12월 23일, 사망하였다. 금천(衿川) 구로리(龜老里)에 묻혔다. 1747년에 장남 김이건(金履健)이 문집(『弼雲詩文稿』)을 필사하였다.

김이건은 부친의 생전에 이미 부친의 시문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부친의 시문은 중년 이후의 작품만 남아 있었는데, 이는 부친이 만년에 젊어서 지은 시문을 보고 두보와 유종원의 격식을 스스로 답습한 것을 부끄러워하여 모두 불태워 버렸기 때문이다.

김이건은 그래서 벽지나 시축 등 여기저기에 남아 있던 부친의 초년 저작 백여 편을 찾아 모아 보관해 두었다. 그것들을 정리하여 1747년에 한 질의 필사본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현재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문집이다.

 

<참고자료>

『필운시문고』,『숙종실록』,『경종실록』, 『영조실록』

김익희(金益熙)


김익희(金益熙)                                                              PDF Download

 

김익희(金益熙, 1610-1656) 조선시대에 대사관, 형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이며, 고위 관리였다. 그는 김장생(金長生)의 손자이며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사에 맞서 결사 항전한 김익겸(金益兼)의 형이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화의를 반대하고, 왕을 따라 남한산성에 가서 전투를 감독하고 독려하는 독전어사(督戰御使)가 되었다. 평생의 지기인 우암 송시열과 함께, 명나라를 존숭하며 청나라를 배척하자는 척화파의 대표적인 인물이었으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혼란스러운 조선사회를 주자학과 그 명분론으로 재건하고자 노력한 인물이었다. 저서로 『창주유고(滄洲遺稿)』가 있다.

1610년(1세)
광해군 2년, 11월 20일(음력)에 태어났다. 본관은 광산(光山)이며, 자는 중문(仲文), 호는 창주(滄洲), 지재(止齋)이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아버지 김반(金槃)은 송익필의 제자로, 자가 사일(士逸), 호는 허주(虛舟)이다. 문원공 김장생의 둘째 아들이며, 문경공 신독재 김집(金集)의 아우이다. 김반은 아들 여섯을 두었는데 김익희는 차남이다.

1627년(18세)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다. 이 시험은 소과(小科) 혹은 감시(監試)라고 불리는 과거시험으로 생원진사시를 말한다. 이 시험에 합격한 자는 성균관에 입학하여 공부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관직에 나가기 위해서는 대과를 준비해야하는데 성균관에서 그런 준비를 할 수 있었다.

1633년(24세)
소과에 합격하고 6년만에 문과(增廣文科, 병과)시험에 급제하였다. 처음에 승문원에 들어갔다, 10월에 예문관 사관(史官)인 검열(檢閱, 정9품의 관직)이 되었다.

다음해 12월에 승진하여 예문관의 정7품 관직인 봉교(奉敎)가 되었다.

 

1635년(26세)
7월, 수찬에 임명되었다. 8월경에 재이(災異)를 당하여 상소문을 올렸다. 여기에서 임금에게 다음과 같이 10가지 건의를 하였다.

첫째, 성스러운 뜻을 세울 것. 둘째, 성학(聖學)을 발전시킬 것. 셋째, 무너진 기강을 다시 세울 것. 넷째, 검소한 덕을 밝힐 것. 다섯째, 대신을 공경할 것, 여섯째, 언로를 열 것. 일곱째, 벼슬길을 맑게 할 것. 여덟째, 선비들의 기풍을 바르게 할 것. 아홉째, 백성들의 고통을 돌볼 것. 열째, 군사 업무를 잘 정비할 것.

그리고 그는 이 상소문에서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문묘종사를 건의하였다. 율곡과 우계의 문묘 종사는 이미 1623년(유백증과 이경여), 1625년(해주 진사 오첨 등 40여명), 1635년(송시형 등 270명)에 건의가 있었다. 송시형은 송시열의 사촌 형이다.

이후, 종사관(從事官)으로 관서지방에 다녀왔으며, 인열왕후(仁烈王后)의 초상 복제에 대해 논하였다. 한 때, 감시(監試) 시험관(試官)으로서 일을 잘못했다는 이유로 파직되기도 하였으나 9월에 수찬, 12월에 부수찬으로 임명되었다.

1636년(27세)
2월, 정언이 되다. 부수찬이 되었다가 다시 정언이 되다. 3월에 청나라와 화의를 주장하는 주화파 우부승지 구봉서에 대해, ‘그가 추잡하고 야비한 일을 많이 행하였고, 국상을 당하였을 때 상복을 입고서 기생을 끼고 있었으며 축첩을 하였다’고 파직을 건의하였으나, 임금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해, 5월경에 수찬의 자격으로 임금에게 다음과 같이 상소문을 올렸다.

“쉽게 터지고 또 쉽게 억제하기 어려운 것으로 다른 것보다도 성내는 일입니다. 그런데 성내지 않을 일에 성을 내면 그 해가 가장 큽니다. 전하께서 티 없이 순수한 자질로서 마음을 밝게 가지시기에 노력한 지도 꽤 오래 되셨지만 말을 하고 사람을 대하는 데 있어 화평한 기상이라곤 전혀 없습니다. 이는 아마도 마음의 원천에 대한 함양 공부가 아직 미진한 점이 있어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잘못을 살피고 바로잡아 위아래가 다 허물이 없게 만드는 것이 바로 삼사(임금에게 직언하는 세 곳의 관아, 즉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가 해야 할 일인데 삼사는 그것을 모르고 오직 환심을 사려고 알랑거리며 구차스러운 행동만 하니 전하께서 그것을 개탄하시고 때로 그들을 격려하시는 것은 물론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된 것은 역시 전하가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전하의 뜻에 맞춰 주는 것을 좋아하고 거스르면 싫어하시며 부들부들한 것을 좋아하고 과감하거나 예리한 것은 싫어하십니다. 그리고 어떤 것을 수용하거나 버림으로써 싫고 좋고를 눈에 띄게 나타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각(臺閣, 즉 삼사)의 풍채가 날로 시들해져서 다만 미세한 것이나 지적하고 묵어빠진 것이나 주워모아 그때그때 책임이나 면하려고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그 마음 그 자세를 완전 바꾸시고 바른말이면 지성으로 받아들여 언로(言路)를 활짝 열고 갈고 닦고 하여 만분의 일이나마 성상의 덕화에 도움이 되도록 하십시요.”

임금은 그것을 좋은 뜻으로 받아들이고 특별히 길들인 말을 하사하여 칭찬하고 장려하였다.

7월에 부수찬, 헌납 등을 거쳐 다시 부수찬이 되었으며, 10월에 수찬, 11월에 교리로 임명되었다.

12월 2일, 청나라 태종이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수도 심양을 떠나 압록강을 건너 쳐들어왔다. 의주부윤 임경업 장군이 의주 백마산성을 지켰으나 청나라 군대는 길을 피해 서울로 들어왔다.

12월 14일 청나라 군대가 개성을 통과하였다. 궁궐의 일부 군대와 관료들을 강화도로 보내고, 이날 밤에 인조 임금도 강화도로 피난을 가려고 하였으나 청나라 군대가 이미 길을 막고 있어서 소현세자와 함께 남한산성으로 피했다. 청나라와 화해를 반대하며 척화(斥和)를 주장하였던 김익희 역시 왕을 따라 남한산성에 들어가 독전(督戰)어사가 되어 전투를 독려하였다.

같은 달 16일, 청나라 선봉부대가 남한산성을 포위하였다.

 

1637년(28세)
1월 1일, 청나라 태종이 남한산성 아래 탄천에 도착하여 20만 청나라 군대를 집결시켰다. 남한산성 안에는 임금을 비롯하여 1만 3천명의 군사가 있었으며 50일정도 지탱할 수 있는 식량이 있었다. 명나라에 연락하여 부탁한 구원병이나 의병들의 지원은 기대할 수 없었다.

김익희는 당시 대사간이었던 부친 김반 등과 함께 강화를 반대하고 “오늘날 우리가 반드시 저들에게 꺽이고 말 것이나, 차라리 바른 도리를 지키다가 죽는 것이 낫다”고 하면서 끝까지 항쟁할 것을 주장하였다.

1월 22일 강화도가 함락되고 어머니(徐氏夫人), 동생 김익겸, 그리고 누나가 사망하였다는 비보를 접하였다.

이달 말, 인조는 결국 성에나 나가 항복하였다. 그는 청나라 태종(숭덕제) 앞에 무릎을 꿇고 항복의 예(三跪九叩頭, 세 번 무릎을 꿇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려 절하는 예)를 올렸다. 청나라와 조약(朝淸和約)이 체결되었으며 청나라에서 인질을 요구했다. 소현세자는 자진해서 인질로 나섰다.

4월 10일경, 소현세자는 부인 강씨와 봉림대군(나중에 임금의 자리에 오른 효종임) 부부, 그리고 주전파 대신들과 함께 청나라 수도 심양으로 가서 볼모로 억류되었다.

1639년(30세)
어머니의 삼년상을 마쳤다. 3월에 홍문관 교리, 5월에 이조 좌랑에 임명되었다. 이조좌랑은 관리 인사권을 가진 중앙의 핵심 관직이었다. 가족을 잃은 슬픔으로 마음의 즐거움이 없어, 겨울에 스스로 외임(外任)을 요청하여, 영광(靈光) 군수가 되었다. 그러나 부친의 병환 때문에 관직을 버리고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다음해 4월에 부친상을 당하였다. 이후 큰아버지 김집에게 가 있으면서 지인 송시열, 송준길 등과 함께 학문 공부를 하였다.

1642년(33세)
삼년상을 마고, 다시 조정으로 들어가 성균관 사성(司成, 종 3품), 군기시(軍器寺) 등을 역임하다.

다음해 사간, 응교, 집의 등에 임명되었다.

 

1644년(35세)
5월에 부응교, 6월에 사간, 7월에 응교에 각각 임명되었다.

8월, 집의가 되어, 만언소(萬言疏)를 올렸다. 그 안에서 어진 인재를 얻을 것, 벼슬길을 밝힐 것, 장물죄를 엄히 할 것, 수령을 골라 임명할 것, 대동법을 시행할 것, 군사 제도를 정비할 것, 제사를 근엄히 할 것, 공도(公道)를 넓힐 것, 도학(道學)을 숭상할 것 등을 제안하였다. 아울러 송시열, 송준길, 이유태 등을 등용할 것을 진언하였다. 이에 임금은 이를 모두 수용하였다.

11월경, 송시열ㆍ송준길 등이 지평(持平)에 임명되었다. 12월에 김익희는 사간에 임명되었다.

이즈음, 김익희는 병조 정랑 성초객(成楚客, 1605-미상)의 문제를 논하여 파직시켰다. 성초객의 자는 봉혜(鳳兮), 호는 이력(履歷), 본관은 창녕(昌寧)으로 1633년 증광시에 생원 2등 19위로 합격하였고, 같은 해 증광시에서 병과 15위로 문과 급제한 인물이다. 그는 1636년, 병자호란 당시 어가를 호위하여 남한산성에 들어갔으며, 다음해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이 되었다. 1639년에는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이후에 사간원과 사헌부의 정언과 지평, 헌납(獻納) 등에 임명되어 대간으로 활동하였다. 1645년 초에 병조정랑에 임명되었으나 경솔하고 천박하며 급하게 승진을 도모하였다. 이에 사간원에서 근무하게 된 김익희가 탄핵하여 파직시킨 것이다.

1645년(36세)
2월, 소현세자가 9년만에 귀국했다. 하지만 4월경에 갑자기 숨을 거두었다. 6월에 소현세자의 동생 봉림대군이 귀환하여, 세자에 책봉되었다.

10월, 세자 책봉과 관련하여 책례도감(冊禮都監, 책봉 의례를 주관하는 임시 기구) 도청(都廳)의 직책을 잘 수행한 공로로 임금으로부터 말을 하사받았다. 다음 달에 사간, 집의에 임명되었다.

1646년(37세)
이해 소현세자 빈 강씨가 인조를 독살하려고 했다는 모함을 받고 사약으로 사망하고 그 세 아들은 제주도로 귀양 갔다.

2월, 관직 후보자 추천을 잘못하였다고 대사간 목성선 등의 탄핵을 받아 관직에서 해임되었다.

4월 안익산 등이 반란을 일으켜 서울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반란 주동자들이 잇달아 체포되어 난이 평정되었다.

6월, 임경업 장군이 국법을 어겼다는 죄를 뒤집어쓰고 심문을 받다 감옥에서 사망하였다.

이즈음 김익희는 사헌부 집의, 동부승지, 우부승지 등에 임명되었다. 7월에 문사랑청(問事郞廳)으로 안익신 사건을 처리한 공로로 포상을 받았다.

9월, 과거시험의 시제(試題)에 소현세자빈 강씨를 옹호하는 내용이 들어있어 이에 관여된 시험관 전원이 처벌되었다. 김익희는 이들 중 일부를 용서해주도록 건의하다 처벌을 앞장서서 방해한다는 이유로 파직되다.

 

1647년(38세)
승문원 제조를 겸하게 되었다. 다음해 관직에서 은퇴하고자 태안군수를 자청하여 그 자리에 임명되었다. 이내 향리로 돌아와 숲속에 집을 짓고 독서를 하며 스스로 즐겼다.

1649년(40세)
인조임금이 이해 5월에 사망하고, 효종이 등극하였다. 김익희는 호서지방(지금의 충청남북도)에서 올라가 대궐에 들어가 곡을 하였는데, 그 자리에서 바로 우부승지로 임명되었다.

이즈음 장령으로 있던 송시열이 임금과의 면담을 허락받지 못해 사직하였다. 이에 김익희는 왕명을 따라, 사직하고 떠나는 송시열을 만류하였다. 이일에 대해서 『효종실록』(6월 26일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임금이 ‘내가 병으로 접견하지 못하여 송시열이 갑자기 돌아갈 계획을 결정하였다고 한다. 누가 나를 위하여 그를 머물게 할 수 있겠는가.’하였다.

평소 송시열과 친한 동부승지 김익희(金益熙)가 성지(聖旨)를 가지고 뒤쫓아가서 타이르겠다고 청하였다. 그러자 상이 기뻐하면서 허락하였다. 송시열은 임금의 뜻이 매우 간절하다는 것을 듣고 돌아와 성 밖에 당도해서 상소하여 사죄하였다. 그러나 디시 또 돌아가기를 강력히 청했다. 임금은 다시 이렇게 분부하였다.

‘현자를 대우하는 나의 마음이 정성스럽지 못하다고 이를 만하다. 평소 존경하여 예우하는 뜻을 스스로 드러낼 방법이 없으니, 승지는 나를 대신해서 교서를 짓되 나의 지극한 뜻을 효유하여 산림에 있는, 세상에서 높이 뛰어난 선비들로 하여금 조정을 멀리하는 마음을 조금이나마 돌리게 하라.’

그리고 특별히 예조 낭관을 보내 송시열에게 유지(諭旨)를 전하게 하였으나 송시열은 이미 상소하고서 떠나버렸다. 그 상소에 송시열은 이렇게 썼다.

‘슬픔을 절제하여 몸을 보호하고, 예를 강구하여 상사(喪事)에 예를 다하시고, 학문을 밝히고 마음을 바르게 하며, 몸을 닦아 집을 가지런히 하고, 아첨하는 신하를 멀리하시고 충직한 신하를 가까이하며, 사사로운 은혜를 억제하여 공도(公道)를 넓히시고, 선임(選任)을 정미롭게 하여 체통을 밝히고, 기강을 진작시켜 풍속을 가다듬으며, 재용(財用)을 절약하여 국가의 근본을 견고히 하며, 좋은 스승을 골라 세자를 잘 보호하고 인도하도록 하며, 공안(貢案)을 바르게 하여 백성의 형편을 펴게 하고, 검소한 덕을 숭상하여 사치를 혁신하며, 무비(武備)를 닦아 바깥에서 무시하지 않도록 하십시요.’

임금은 이를 아름답게 여겨 받아들였다. 송시열은 임금의 지우(知遇)를 받아 예우함이 특별히 융숭했는데 한 번 입대(入對)를 허락하지 않았다 하여 관복을 벗어버리고 서둘러 돌아가니, 듣는 이들이 모두 너무 지나치다고 하였다.”

1650년(41세)
2월 청나라 사신이 갑자기 방문하고, 청나라가 군대를 이끌고 변경에 와서 압박하고 공갈로 협박하였다. 당시 척화파의 중심으로 활약하고 있던 김익희는 이러한 청나라의 움직임에 대응하고자 하였으나 별다른 방법이 없음을 알고 물러났다.

3월 청나라에서 친청파 김자점의 밀고로 조선의 조정내에 척화파들이 활동하고 있음을 감지하고 이를 확인하고자 사신을 보냈다. 사신은 ‘왕에게 불충스런 신하가 많다는 말을 익히 들었기 때문에 조사’를 하러 왔으며, 김자점이 쫓겨난 이유에 대해서 묻고 조사하였다.

7월, 김익희는 다시 대사간, 승지 등에 임명되었다.

11월, 청나라 섭정왕 다이곤이 사망하자 조선에 대한 태도가 달라졌다. 이에 척화와 북벌을 주장하던 김익희를 위시한 척화파들이 조정에 나아가 여론을 주도하게 되었다. 12월에 대사간이 되었다.

이즈음 광양에 유배되어 있는 김자점이 역모를 꾀한다는 고발이 접수되어 조사결과 사실로 판명되어 김자점을 사형에 처했다. 인조의 후궁이 조귀인의 오빠 조인필도 함께 처벌하여 궁궐내의 친청파가 완전히 제거되었다.

1651년(42세)
6월, 대사간이 되었다. 8월에 세자책례(世子冊禮) 교명문(敎命文)을 짓고, 그 공로로 말 1필을 하사받았다. 10월, 강원 감사가 되었다.

다음해 홍문관 부제학(정3품 당상관), 이조 참의 등에 임명되었다. 그 다음해에는 대사간, 부제학, 이조 참의, 대사성 등에 임명되었다.

1654년(45세)
효종 5년 1월, 도승지가 되다.

4월, 참찬관 자격으로 효종 임금에게 다음과 같이 건의하였다.

“현재 『국조보감』은 문종 시대까지만 수록되어 있습니다. 세조시대 부터 선조 시대까지의 사실을 민간에서 간혹 수집해 둔 것이 있으니, 이번 기회에 담당 기관을 설치하고 연속해서 편찬하여 전서(全書)를 만들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러한 건의를 받고 임금이 대신들에게 의논하게 하였더니, 대신들이 모두 찬성하였다. 그래서 국(局)을 설치하도록 하고 김수항(金壽恒)을 도청(都廳)으로 삼았지만, 결국 완성은 보지 못했다.

5월,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으며 8월에 동지경연을 겸하였다. 10월, 대사간이 되어 대사성을 겸하였다.

이즈음 동지경연으로 국방업무에 대해서 건의하였다. 병사업무에서 한민(閑民)을 없애고 사대부 자제라도 과거 응시에 부족한 자는 군역을 지게 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또 대사헌 자격으로 양병책, 양반 호포 부과 등 치국(治國)의 방략에 대해서 상소문을 올렸다.

1655년(46세)
1월, 대사헌에 임명되어 대제학 채유후 등과 함께 성균관 유생들에게 제술시험을 보게 하였다. 이즈음 대관들이 함부로 사람들을 가두는 처사에 대해서 비판하였다.

2월에 홍문관 부제학, 9월에 대사간, 부제학 등에 다시 임명되었다.

1656년(47세)
효종 7년 1월, 대사헌이 되었다. 대제학, 동지경연을 겸하였다. 이즈음 어머니가 청나라의 침입으로 병자호란 때 사망하였기 때문에 청나라 사신을 응대하기가 싫었으며 청나라 외교 문서도 대제학이 작성을 하여야 했기 때문에 사직하고자 청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했다. 외교문서는 결국 다른 사람이 대신 작성하고 김익희는 대제학 직을 계속 맡게 되었다.

2월에 형조 판서가 되었다. 5월에 대사헌을 거쳐 이조 판서가 되었다. 7월에 사직을 청하여 이조 판서 직에서 물러났다. 8월에는 대제학의 직에서 물러났다.

이해 12월 8일에 사망하였다. 향년 47세였다. 12월 9일자 『효종실록』에 다음과 같은 그의 졸기(卒記)가 실렸다.

“전 이조 판서 김익희(金益熙)가 사망하였다. 김익희는 김장생(金長生)의 손자이고, 김반(金槃)의 아들이다. 사람됨이 총명하여 일찍이 재능과 명망을 지녔으며 문사(文詞)를 잘하였는데 소장(疏章)에 아주욱 능하였다. 붓을 잡으면 그 자리에서 완성하였고 주대(奏對)할 때마다 경전과 『사기(史記)』를 인용하였으므로 상이 총애하고 신임하였다. 그래서 1년 내에 차례를 뛰어넘어 총재(冢宰)에 임명되고 겸해서 문형(文衡, 홍문관과 예문관에서 가장 높은 벼슬인 대제학)을 맡았었다. 그러나 지론(持論)이 지나치게 준엄하고 성질 또한 급하고 편협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이것을 단점으로 여겼었다. 이때에 이르러 졸하니 나이 47세이다.”

그의 묘지는 현재 대전 대덕연구단지내 국립중앙과학관 뒤쪽 야산에 가족들의 묘와 함께 조성되어 있다. 묘 앞에는 그의 업적을 기린 신도비(神道碑)가 세워져 있는데 송시열이 글을 짓고 김진규와 김수증이 글씨를 썼다.

그는 현대에 들어 다음과 같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인렬왕후의 장례 때에 일개 사서(司書)로서 고례(古禮)를 들어 복제가 잘못되었음을 날카롭게 지적한 일이라던가, 만언소를 올리어 대동법 실시를 강력하게 주청한 일, 병자호란시 피신하는 인조를 따라 남한산성에 들어가 독전어사(督戰御使)로 활약한 일, 대사헌의 수장으로 있을 때에 동료들이 법을 어기면 이를 용서치 않고 법대로 처리할 만큼 원리원칙에 충실했던 삶의 자세 등은 척화파의 도의사상과 실천면모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송인창, 2003, 188쪽)

 

<참고자료>

『국조보감』
지두환, 「창주 김익희의 정치활동」, 『한국학논총』37, 2012
송인창, 「창주 김익희의 도의사상」, 『한국사상사학』20권, 2003

홍세태(洪世泰)


홍세태(洪世泰)                                                            PDF Download

 

홍세태(洪世泰, 1653∼1725)는 무인 집안에 출생한 중인 신분으로 역과에 합격한 역관이었다. 하지만 그는 통역 보다는 학식과 문장이 뛰어나 글재주를 인정받아 시문을 짓는 일로 세상에 알려지고 쓰임을 받았다. 한때는 승문원 제조에 임명되어 청나라에 보내는 외교문서를 전담하였으며, 그의 시문은 당대 으뜸이란 평을 받았다.

그는 젊어서 김창협(金昌協), 김창흡(金昌翕), 조성기(趙聖期), 최창대(崔昌大) 등 양반 사대부들과 사귀고 스스로 중인들의 시를 모아 『해동유주(海東遺珠)』편찬하였다. 관직으로는 제술관, 의영고주부(義盈庫主簿), 남양감목관 등을 역임하였다. 1682년에는 일본 통신사를 따라가 일본에서도 문명(文名)을 떨쳤다.

1653년(1세)
효종 4년, 12월 7일, 무관 벼슬을 지낸 홍익하(洪翊夏)의 3남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강릉 유씨(劉氏) 유천운(劉天雲)의 딸이다. 자는 도장(道長), 호는 창랑(滄浪), 혹은 유하거사(柳下居士)를 사용하였으며,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나이 들어 이씨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부인과는 2녀를 낳았으며 아들은 여덟이나 나았으나 모두 자신보다 일찍 세상을 하직하여, 양자를 들였다.

1675년(23세)
식년시(式年試) 잡과(雜科)에 응시하여 한학관(漢學官)으로 뽑혔다. 이즈음 서울 삼청동에 살았는데, 이웃에 살던 김창협(金昌協, 農巖), 김창흡(金昌翕, 三淵), 김도수(金道洙), 이하곤(李夏坤)등과 사귀었다. 그들과 같이 시를 쓰고 낙송시사(洛誦詩社)에서 활동하였다.

 

1682년(30세)
통신사 윤지완(尹趾完)을 따라 일본에 다녀왔다. 부산, 쓰시마 등지를 지나면서 지를 지었다. 지은 시는 모두 유고집(『유하집』)에 실려 있다. 김창협은 나중에 친구가 일본에 간 것을 기념하여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농암집』제4권)

少年賓日到咸池 젊은 시절 바다 멀리 일본에 사신으로 가
海上停舟徐福祠 바닷가 서복 사당 그 앞에 배를 대고
織取扶桑五色繭 부상 나무 오색 고치 길쌈하듯 시를 지어
東皇與博錦囊詩 봄 신의 조화와 시재(詩才)를 겨루었지

 

홍세태는 당시 부사 이언강의 자제군관 자격으로 통신사에 참여하였다. 특별한 임무는 없었으나 일본에 가서는 제술관과 시문창화(시문을 서로 주고받으면서 시를 짓는 일)를 전담하였다. 후대의 통신사에 배치된 ‘서기’에 해당하는 일이었다. 홍세태는 일본에서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 히토미 카쿠잔 등과 교류하였다.

그는 후지산을 지나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玆山標日域 이 산이 일본 땅의 표지가 되니
嵂兀聳奇峰 가파르게 높이 솟은 기이한 봉우리로다.
逈擢鴻濛色 멀리서 보면 우뚝 솟아 몽롱한 빛이 있고
冥棲神聖蹤 어두운 곳에는 신성한 자취가 있다네
四時留白雪 네 계절에 항상 흰눈이 남아 있고
八葉列芙蓉 여덟 이파리 늘어선 부용과 같네.
時有五雲起 때때로 오색구름 일어나
去從東海龍 동해의 용을 따라서 가네.

 

1688년(36세)
봄, 상촌(象村) 신흠(申欽)의 손자인 신정(申晸)이 강화유수 재직 중에 사망하여 이해 봄에 여주에서 장사를 지냈다. 홍세태는 신정으로부터 특별한 대우를 받고 그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친 인연이 있어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였다. 그런데 장례식장에 농암 김창협이 말을 보내와, 그 말을 타고 찾아가 김창협을 만난 뒤,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농암집』제3권)

期君何太久 그대를 기다린지 얼마만인가
昨夕始登門 어제저녁 비로소 이곳에 왔네
馬鬣新觀葬 말 위에서 잠깐 장례식을 참관하고
漁舟後問源 고깃배 타고와 무릉도원 물었네
聊同江上望 강 위 경치를 함께 구경하고
且盡雨中樽 비 내리는 가운데 술잔 기울여
浮世參差事 허망하고 잡다한 세상일이야
寥寥未暇論 다 잊고 논의할 틈이 없네

다음해 해서(海西) 지방을 유람하였다.

 

1693년(41세)
개성에 있는 박연폭포(朴淵瀑布)를 유람하고 시를 남겼다.

2년 뒤, 아들을 잃고 그 슬픔을 그린 시를 지었다.

 

1696년(44세)
중국 연경에 다녀왔다. 친구 김창협은 이러한 그를 위해서 송별하는 시를 다음과 같이 지어주었다.(『농암집』제4권)

看君詩膽大於山 그대의 시적 담력 산보다 큰 걸 보니
未信身軀六尺孱 육척의 작은 몸집 믿기지가 않는구나
東土彈丸妨縱筆 탄환처럼 작은 나라 붓 놀리기 어려우니
故須夷夏壯游還 장한 뜻 품에 안고 중국 유람 다녀오게
……
燕市千秋說慶卿 연경에는 대대로 경경 얘기 전해오니
古今豪傑幾霑纓 눈물 흘려 갓끈 적신 고금 호걸 몇몇인가
知君詩律增悲壯 알괘라 그대 시는 한결 더욱 비장해져
便作高家擊筑聲 그 옛날 고점리(高漸離)의 격축 소리 같으리라
……
老驥雄心不盡無 준마는 늙었어도 장한 마음 남아 있어
側身關塞夢長途 변방의 멀고먼 길을 달려가는 꿈을 꾸네
金臺碣石愁雲外 시름겨운 구름 너머 연경으로 떠나가는
送爾悲歌擊唾壺 그대 위해 송별 노래 감격하며 부르노라

 

1698년(46세)
2월, 청나라 호부시랑(戶部侍郞) 박화낙(博和諾)이 와서 의주(義州)에서 조선의 시를 요구하자 조정에서 박세태를 추천하여 응대하게 하였다. 박세태는 이때 이문학관(吏文學官)이라는 직책에 임명되어 대응하였다.

이후 어머니 상을 당하여 사직하였다가 1702년에 복직하였다.

 

1702년(50세)
이즈음에 백연봉(白蓮峯) 아래에 서재를 지어 유하정(柳下亭)이라 편액(扁額)을 달고 거처하였다.

이후 1705년에 둔전장(屯田長), 1710년에 통례원인의(通禮院引義) 등에 임명되어 근무하였다.

 

1711년(61세)
일본 통신사로 가는 조태억(趙泰億)을 전송하면서 시를 지어 주었다.

 

1712년(62세)
청나라에서 관리들을 파견하여 조선의 관리들과 함께 백두산에 올라 국경을 새로 정하고 정계비(定界碑)를 세우고 돌아갔다. 박세태는 이러한 내용을 그 작업에 참관한 역관(譯官) 김경문(金慶門)에게 듣고「백두산기(白頭山記)」(『柳下集』)라는 이름으로 기록하였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장백산(長白山)을 우리나라에서는 백두산이라 하는데, 중국과 우리 두 나라에서 산 위의 두 강을 놓고 경계를 정했다. 임진년(1712년) 여름에 중국에서 오라총관(烏喇總管) 목극등(穆克登) 등 몇 사람을 보내서 직접 가 보고 경계를 정했다.

이 산은 서북쪽에서 오다가 뚝 떨어져 큰 평원(平原)이 되었고 여기에 와서 갑자기 우뚝 솟았으니 그 높이는 하늘에 닿은 듯하여 몇 천만 길이나 되는지 모르겠다. 그 절정에는 못이 있는데 사람 머리에 숨구멍 같이 되어서 그 주위는 20∼30리나 되고, 물빛은 새까매서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없다.

한여름에도 얼음과 눈이 쌓여서 바라보면 은으로 만든 바다와 같다. 산 모양은 멀리서 바라보면 독을 엎은 것 같고, 올라가 보면 사방은 높고 중간은 쑥 들어가서 마치 동이를 젖혀놓은 것 같다. 밖은 희고 안은 붉은 돌이 사면으로 벽처럼 에워쌌는데, 북쪽으로 두어 자쯤 터져서 물이 넘쳐나가 폭포가 되었으니 그것이 곧 혼동강이다. (중략)

목극등은 물이 두 갈래로 갈라진 사이에 앉아서 말하기를, ‘여기는 분수령(分水嶺)이라 할 만하니 비석을 세워 경계를 정해야 하겠다. 그런데 토문강(土門江)의 원류가 중간에 끊어져서 땅속으로 흐르므로 경계가 분명치 않다.’ 하고, 이에 비석을 세우고 쓰기를, ‘대청(大淸)의 오랄총관 목극등은 명령을 받들고 변경(邊境)을 조사하다가 여기에 이르러 자세히 살펴보니, 서쪽은 압록강이 되고 동쪽은 토문강이 되었으므로 분수령에 돌을 세우고 글을 새겨 기록한다. 강희(康熙) 51년 5월 15일이다.’ 하고, 우리나라 사람에게 이르기를, ‘토문강의 원류가 끊어진 곳에는 하류까지 연달아 담을 쌓아서 표시를 하라.’ 했다.” 하였다.

이 말은 내가 직접 그때에 목격한 역관(譯官) 김경문(金慶門)에게서 얻어들은 것이니 거의 믿을 만하다. 토문강은 두만강이다.

옛날에 윤관(尹瓘)이 속평강까지 국경을 넓히고 그 일을 기록한 비석이 아직까지 그곳에 서 있는데 김종서(金宗瑞) 때에 와서 두만강으로 경계를 정한 것을 나라 사람들이 분하게 여기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 윤관의 비를 가지고 따져서 경계선을 정하지 못한 것은 그 일을 맡은 사람의 잘못이라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함경도(咸鏡道)는 모두 말갈(靺鞨)의 땅이었다. 지금에 와서 경계를 정한 지가 오래되었고 우리 영토 안에 있는 폐사군(廢四郡)도 가끔 외적의 침범이 있어서 모두 이민을 시키고 비워두었는데 하필이면 다시 쓸데없는 땅을 가지고 외국과 분쟁을 일으킬 것이 무엇이냐? 지금의 국토는 금구(金甌)와 같이 완전하게 되었으니 아무튼 손상을 시켜서는 안될 것이다.”

 

1713년(61세)
서부주부(西部主簿) 겸 찬수랑(纂修郞)에 임명되어 『동문선(東文選)』의 편찬을 담당하였다. 중인들의 시집인 『해동유주(海東遺珠)』를 편찬, 간행하였다. 이 시집에는 박계강(朴繼姜), 유희경(劉希慶), 최기남(崔奇男), 최승태(崔承太) 등 총 48명의 시 230여 수가 수록되어 있다.

 

1714년(62세)
숙종이 사용하는 병풍의 <서호십경(西湖十景)>에 시를 지어 넣었다. 조씨에게 시집간 작은 딸이 죽어 제문을 지었다. 송라도(松羅道) 찰방(察訪)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다음해 제술관에 임명되었다.

홍세태는 딸 둘을 두었는데 큰딸은 이씨에게 시집을 갔다. 그 딸이 죽었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은 제문을 썼다.

“슬프도다! 나는 이미 여러 차례 자식을 잃은 슬픔을 겪어서 마음이 상한 지 오래다. 네 동생을 잃은 뒤에는 몸이 마르고 정신은 사그라져 넋이 다 망가졌다. 살려는 생각이 없었지만 죽지 않았던 것은 네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또 네가 죽은 것을 보았으니 내가 다시 이 세상에 무슨 미련이 있겠느냐? 마땅히 빨리 사라져야 시원할 것이다. 네 어미에게 듣자니, 너는 병이 위중해지자 흐느껴 눈물을 흘리며 어미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하더구나.

‘아버지를 못 보고 죽으려니 눈이 감기지 않아요. 어머니는 내가 죽으면 반드시 죽으려 할 텐데, 그러면 저 어린 다섯 아이는 어떡해요? 어머니 죽지 마세요.’

아아, 설사 목석과도 같은 사람일지라도 이런 말을 들으면 혼절할 텐데, 하물며 그 부모는 어떻겠느냐? ……아아, 너는 이제 가면 돌아오지 않겠구나. 잠시라도 머물러 위로는 부모를 모시고 곁으로는 아이들을 이끌며, 이 술과 음식을 맛보고 평소처럼 기쁘게 웃어 보일 수 없겠느냐?”

 

1716년(64세)
의영고(義盈庫) 주부(主簿)에 임명되었으나 바로 파직되었다. 다음해 충청도 수영(水營)이 있던 영보정(永保亭)을 방문하여 시를 지었다.

1719년(67세)
박세태가 재능은 많으나 궁핍하게 사는 것을 애석하게 여긴 이광좌(李光佐)가 추천하여 울산(蔚山) 감목관(監牧官)이 되었다. 이후 수년간 장기(長鬐) 목관(牧館)에서 지내면서 주변의 명승지를 유람하고 지를 지었다.

1722년(70세)
제술관에 임명되었다. 다음해 남양 감목관이 되었다. 7월, 청나라 사신에게 시를 지어 주었다.

1724년(72세)
11월, 그동안 상자에 보관 중이던 자신의 시문을 모두 꺼내 정리하였다. 번잡한 것을 버리고, 줄여서 부(賦) 3수, 시(詩) 1627수, 문(文) 42수를 총 10권으로 편집하고, 자서(自序)를 지었다. 그는 이렇게 자신의 문장을 모두 정리한 뒤, 부인에게 맡겼다.

1725년(73세)
1월, 사망하였다. 홍세태는 평생 가난하게 살았으며, 8남 2녀의 자녀가 모두 자신보다 앞서 죽는 불행을 당하였다. 이러한 불행은 그의 시에 깊은 영향을 미쳐 암울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1730년
사위 조창회(趙昌會)가 문인 김정우(金鼎禹) 등과 함께 박세태가 편집한 10권과 시 4권을 보충하여 14권으로 문집(『柳下集』)을 발간하였다.

1770년
조정에서 홍세태의 아들 홍광서(洪光緖)를 불러 군문(軍門)관련 직책에 임명하였다.

 

<참고자료>

고경식, 「홍세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6

박헌순, 「유하집 해제」, <한국고전종합DB>, 2000

장진엽, 『홍세태의 사행문학 연구』, 연세대 석사논문, 2012

김집(金集)


김집(金集)                                                                        PDF Download

 

김집(金集, 1574∼1656)은 형조 참판을 지낸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아들로 부여 현감, 이조 판서 등을 역임한 조선의 문신이자 유학자이다. 이황, 이이, 송시열 등과 함께 문묘와 종사에 동시에 모셔진 학자이며 부친의 예학을 계승하고 보완하여 더욱 체계화하는데 기여하였다. 선조, 광해군 시대에 서인의 지도자였으며 인조 시대에는 서인과 산림 세력의 중추로 활동하였다. 소현세자의 복권운동을 하였으며 북벌론을 제창하고 송시열, 송준길, 윤선거, 박세채 등을 배출하였다. 율곡 이이의 사위이기도 하다.

1574년(1세)
선조 7년 6월 6일(음력, 이하 별도 언급이 없는 날짜는 모두 음력임), 서울 황화방(皇華坊) 정릉동제(貞陵洞第, 지금의 중구 정동) 집에서 태어났다. 자는 사강(士剛), 호는 신독재(愼獨齋), 본관은 광산(光州 光山)이다. 할아버지는 대사헌을 지낸 김계휘(金繼輝)이며, 부친은 형조참판을 지낸 김장생(金長生)이다. 모친은 창녕조씨(昌寧曺氏) 조대건(曺大乾)의 딸이다. 3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581년(8세)
천곡(泉谷) 송상현(宋象賢)과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에게 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송상현은 부친 김장생의 친구이며, 송익필은 부친의 스승이다. 송상현은 이후 주로 지방에 가 있거나 외국에 나간 기간이 많고 임진왜란 때에는 동래부사로 임명되었다가 현지에서 전사를 하였다. 송익필은 나중에 집안 가문의 문제로 도망을 다니는 신세가 되어 김집은 이들에게서 장기적인 교육은 받지못했다.

1585년 경 부터는 우계 성혼의 문하에 출입을 하여, 성리학을 배웠다.

 

1586년(13세)
봄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정성을 다해 초상을 치루면서 잠시 병을 얻었다. 이에 부친 김장생은 김집이 ‘예를 너무 곧게 행하다가 병을 얻으면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걱정을 하였다.

1591년(18세)
이해 봄에 진사시(進士試)에 2등으로 합격했다. 이즈음부터 부친을 모시고 가정에서 성리학 공부를 하였으며 자신의 이름이 세상에 드러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후 임진왜란, 당쟁 등 세상의 변고를 여러 번 목격하고 벼슬에 대한 욕심을 갖지 않아, 대과에 큰 뜻을 두지 않았다.

1592년(19세)
봄, 좌의정을 지낸 기계 유씨(杞溪兪氏) 유홍(兪泓)의 딸과 결혼하였다. 정실인 유씨 부인에게 병이 있어 자손을 얻지 못하였는데, 나중에 율곡 이이의 서녀를 측실로 들였다. 4월 경(4월 13일, 양력으로 5월 23일),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당시 부친 김장생이 현감으로 근무하던 정산(定山)으로 피난하였다. 이때 형과 형수, 조카가 왜군에게 살해당했는데, 이 때문에 김집은 집안의 장남 역할을 하였다.

1593년(20세)
이해 8월(음력) 명나라가 일본군에게 휴전협상을 제안하여 전쟁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다음해 그는 파산(坡山)으로 가서 우계(牛溪) 성혼(成渾, 1535년∼1598년)을 만났다.

1596년(23세)
측실(側室, 副室)로 율곡 이이(李珥)의 서녀(庶女) 덕수 이씨(德水李氏)를 들였다. 이 부인과는 2남 2녀를 낳았다. 그동안 가족과 함께 전란을 피해 있다가, 다음해 4월경 아버지를 모시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599년(26세)
구봉(龜峯) 송익필이 사망하여 곡을 하였다. 다음해 광해군이 등극하였다.

1610년(37세)
성균관 유생들의 추천으로 헌능(獻陵) 참봉(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이 당시는 광해군이 권력을 잡고 있던 시기로 북인들이 득세하였다.

1613년(40세)
5월, 철원(鐵原)부사에 임명된 부친을 모시고 임지로 갔다. 이 때 북인세력에 의해 아버지가 근거 없는 모함으로 죄를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계축癸丑 옥사사건) 서울로 왔다가 연산(連山, 지금의 논산)으로 돌아갔다. 부친은 다행히 혐의가 없어 재난을 피할 수 있었다. 김집은 ‘천지는 암흑세계로 접어들고 윤리는 두절되어, 종적을 숨기고 뜻을 기르면서 평생을 마무리할 생각을 하였다.’(송준길의 「愼獨齋諡狀」) 이후 10여 년간 부친을 모시고 성리학 연구에 침잠하였다.

1622년(49세)
12월, 정실 유씨 부인의 상을 당하였다. 주위 사람들이 다시 정실부인을 얻을 것을 권하였다. 김집은 이에 “사람이 각각 운명이 있는 법인데, 운명이 좋지 않아서 먼저 사람과 평생 동안 고행을 하였는데, 이제 다시 장가를 든다고 해서 꼭 먼저 사람보다 났겠습니까?”하고, 정실부인을 다시 들이지 않고 오직 학문연구에만 전념을 하였다.

1623년(50세)
이해 인조가 반정으로 등극하였다. 이로써 그는 부친과 함께 신변의 위협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새로 집권하게 된 서인의 집권세력은 부친 김장생의 동문이나 제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3월, 조정에 천거되었다. 다음 달, 부친을 따라 서울로 올라가, 곧 6품관에 임명되었으며, 5월, 부여 현감(縣監)에 임명되었다. 김집의 첫 관직이었다.

1627년(54세)
7월, 병으로 부여현감을 사직하였다. 다음해 11월, 임피(臨陂, 지금의 군산시) 현령에 임명되었으나 그 다음 해 7월에 그만두고 연산으로 돌아갔다.

1630년(57세)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위솔(衛率), 전라(全羅) 도사(都事)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부친이 이미 연로하여 그는 벼슬보다 부친의 봉양에 더 마음을 두었다.

1631년(58세)
부친의 병환이 위독해졌다. 김집은 나이가 이미 쇠로하였으나 밤에도 잠을 자지 않고 음식을 들지 않으며 간호하였다. 그러나 이해 8월, 부친 김장생이 향년 84세로 사망하였다. 곡을 한 뒤, 문 밖에 여막을 설치하고 거적자리를 깔고 잤다. 이후 3개월 동안 죽을 먹고, 조석으로 식사를 올렸으며 상례와 관련된 모든 일을 손수 직접 주관하였다. 이후 3년간 상복을 입고 시묘살이를 했다.

나중에 제자인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1606∼1672)은 당시 사정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모든 규범을 준수하여 날마다 관대(冠帶)를 정제하고 새벽에 가묘(家廟)를 찾아가 뵙고, 다음에 서실(書室)로 가서 책상을 대하여 글을 보며 온종일 꿇어앉아 있어도 어깨와 등이 높고 곧았다. 사람을 접대할 때는 넘쳐흐르는 화목한 기운이 흐뭇하게 했으며, 상스런 말은 입에 내지 않고 태만한 기색은 몸에 나타나지 않았다”(『동춘당집(同春堂集)』)

1634년(61세)
선공감(繕工監) 첨정(僉正), 지평(持平)등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둔암(遯巖)서원이 설립되어 부친 김장생(金長生)이 배향되었다. 김집은 1658년에 배향되었다.

1636년(63세)
5월, 지평(持平)에 임명되었다. 이후 종친부(宗親府) 전첨(典籤)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사집의소(辭執義疏)」를 조정에 올렸다.

1639년(66세)
5월에 동부승지 겸 경연참찬관에 임명되었다. 경연에 참석하여 인조 임금에게 『시경(詩經)·상유편(桑柔篇)』을 강의하였다. 이 때 임금에게 올린 말(「經筵奏辭」)이 『신독재유고』권4에 실려 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군주의 한 마음은 만 가지 변화의 근원입니다. 근본을 맑게 하고 그 발(發)하는 바를 잘 살펴서 반드시 도심(道心)이 주장이 되게 하며, 인심(人心)이 항상 도심의 명령을 듣게 하면 천리가 유행하고 모든 사물이 절도에 맞지 않음이 없을 것입니다. 다스리는 마음에는 경(敬)이 중요한 것이고 위정(爲政)에는 성(誠)이 귀한 것입니다.”

6월에 교체되어 다른 직책을 맡았으나 곧 연산으로 돌아왔다. 12월에 동부승지가 되었다. 다음해 부호군(副護軍), 우부승지 등에 임명되었다가 교체되었다.

이즈음 그는 자신의 호를 ‘신독재(愼獨齋)’라 하였다.

그는 ‘학문하는 요점은 언행(言行)이 서로 돌아보고, 유현(幽顯, 그윽하고 나타남)이 일치하는데 있다.’고 생각하고 남송 채원정(蔡元定, 1135∼1198)의 ‘혼자 행동을 하더라도 그림자에 부끄럽지 않고(獨行不愧影), 혼자 자더라도 이불에 부끄럽지 않다(獨寢不愧衾)’라는 문장을 좋아하였다.

1643년(70세)
봄에 부친의 저서 『의례문해(疑禮問解)』를 교정하였다. 이어서 부친의 저서를 보완하여 자신의 저서 『의례문해속』을 완성하였다.

여름에 원손보양관(元孫輔養官)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이해, 제자인 송준길로 부터 다음과 같은 서신을 받았다.

“간이(簡易, 최립崔岦)의 『구결(口訣)』은 돌려드리고자 한 지 오래입니다만, 병으로 인해 직접 베끼지 못하다 보니 아직 다 베끼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분부를 받았으니 다시 서둘러 베낀다면 수일 안에 다 베낄 수 있을 것입니다. 베끼는 작업이 끝나는 대로 즉시 사람을 시켜 돌려드릴 생각입니다. 병중에 가끔 『주역(周易)』을 열람하고 있으나 의심스러운 곳이 많았는데, 『주역』을 읽으라고 하신 이 편지를 받으니, 깨닫고 계발되는 점이 말할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가르침을 받을 길이 없으니 한탄만 나올 뿐입니다. 『석담고(石潭稿』(율곡의 유고遺稿)는 산재(山齋)에 갖다 두었는데, 며칠 안에 찾아다가 돌려드릴 생각입니다.”(『동춘당집(同春堂集)』)

1644년(71세)
공조 참의, 좌부승지가 되었으나 모두 사양했다. 제자 송준길로부터 다음과 같은 글을 받았다.

“얼마 전에 돌아오는 인편에 주신 답장을 받아, 비석의 일로 과로하신 나머지 몸이 많이 수척해지셨다는 것을 살피고는 자못 염려되었습니다. 비록 불러 주지는 않으셨지만 마음은 그곳에 가 있은 지가 하루 이틀이 아닙니다. 그러나 가을 날씨가 서늘해진 뒤로 풍증(風症)이 더해져서, 왼쪽으로 입이 돌아가는 병과 몸의 한쪽을 못 쓰게 되어서 근심으로 날을 보내고 있다 보니 달려갈 수 없는 신세가 지극히 가엾고도 서럽습니다.”(『동춘당집』제10권)

 

1645년(72세)

10월, 동궁(東宮, 세자가 거처하는 궁궐) 보도(輔導, 도와서 올바른 곳으로 안내하는 직책)에 임명되었다. 몇 차례 상소하여 사양하였으나 반려되었다.

1648년(75세)
여름, 우계(牛溪) 성혼의 연보를 교정하였다. 12월에 부친이 지은 『상례비요(喪禮備要)』를 다시 간행하였다. 이후 학문 연구에 전념하여 송시열, 윤선거 등과 함께 태극설, 상례 등을 논하였다.

1649년(76세)
5월, 인조가 승하하고 효종이 등극하였다. 이해에 가선대부 예조 참판, 공조 참판, 대사헌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이해에 「봉사(封事)」, 「고금상례이동의(古今喪禮異同議)」, 『소학(小學)』」의 주석 등을 올렸다. 특히, 「고금상례이동의」에서 그는 『국조오례의』가 문제점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보았는데, 오류가 많고 빠진 것도 대단히 많다고 보고, ‘왕조례(王朝禮)’의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가을에 대사헌 자격으로 주강(晝講, 낮에 하는 강연회)에 참석하여 『중용 』서문을 강의하였다.

11월에 관직을 사임하고 연산으로 돌아갔다. 이즈음 김상헌 등과 함께 북벌론을 제창하여 청나라 만주족을 칠 것을 주장했다. 병력을 양성하고 공신들의 지나친 특권을 줄이도록 건의하였는데, 이 때문에 인조를 도와 반정에 성공한 공신들의 반감을 샀다.

1650년(77세)
다시 상경하여 조정에 들어갔다. 그러나 대동법(大同法)과 인사권 문제로 조정 내에서 불화가 있어 곧 상소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대동법 시행과 관련하여 그는 반대를 하고 훌륭한 인재를 등용하여 우선 근본을 바로 세우는 것이 급하다고 다음과 같이 임금에게 건의를 하였다.

“대동법은 백성을 편하게 하고 나라를 부유하게 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의도가 어찌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단지 정치의 요체가 서지 않고서 어찌 작은 세목에 대한 일을 먼저 행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이 법을 졸속하게 행하여 먼저 민심을 잃게 된다면 후회가 있을 것입니다.”

다음해 4월, 송시열에게 답한 편지에서 국상(國祥) 변복(變服)의 제도를 논하였다.

 

1652년(79세)
4월, 이조 판서가 되었으나 사양하였다. 이후, 정헌대부(正憲大夫), 숭정대부(崇政大夫), 조참찬(左參贊), 판중추부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사양하였다.

이즈음 권세를 잃은 김자점(金自點)에 청나라에 조선의 북벌 계획을 밀고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김집은 김상헌(金尙憲)과 함께 북벌 계획의 영수로 지목을 받았으나 이미 그는 야인이 되어 낙향을 한 상태였고, 조정에서 잘 대응을 하여 사태가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1655년(82세)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11권을 하사받았다. 임명된 관직을 사양하는 상소문(「辭判中樞府事第三疏」)을 올렸다.

1656년(83세)
윤 5월 13일에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임금과 왕세자가 측근들에게 제물과 제문을 보내 제사를 지내주었다. 송준길(宋浚吉)이 행장(行狀)을 지었다. 송준길은 또 다음과 같은 제문을 지어 스승의 죽음을 슬퍼하였다.

“아, 슬픕니다. 3월 그믐께 제가 호상(濠上)에 있을 때 선생님의 신상에 불길한 일이 있는 꿈을 꾸고는 놀라 일어나서 달려가 문안드렸지요. 그때 선생님께서는 이미 병을 앓고 계셨지만 정신이 쇠하지 않으시어 즐겁게 담소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름에 재차 가서 문안드릴 때에는 병이 이미 깊어 의원도 어찌해 볼 수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선생님은 그때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한스러운 바는 평일에 그대들과 함께 산수(山水) 사이를 유람하지 못한 것이다. 하늘의 도움으로 병이 조금 나으면 내가 고운사로 가려 하니, 그대도 그때 와서 함께 갔으면 한다.”라고 하시며, 마치 중추(仲秋)로 시기를 정하시는 듯 하셨습니다.

아, 이것이 어찌 선생께서 사망을 예시(預示)한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꿈에 나타나는 길흉의 조짐과 어떤 일에 앞서 나타나는 조짐은 운명으로 정해진 것이어서 인력으로 어찌할 수 있는 바가 아니고 보면 후사자(後死者)는 애통함이 없어야 할 것 같은데도 오래될수록 더욱 애통함을 그칠 수 없는 것은, 진실로 사문의 애통으로는 이미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음이 있고, 개인의 애통으로는 또 옛사람이 이른바 ‘무궁한 생각’이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으니 제가 어찌 가슴이 아프고 마음이 상하여 지극히 애통해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 전에는 동기처럼 가엾게 여겨 끊임없이 돌보아 주시더니, 지금은 무엇 때문에 모른 체하고 부르짖어도 대답이 없고 불러도 듣지 않으십니까. 아, 애통합니다. …… 아, 인생이 길어 보아야 백 년이니 누군들 죽지 않겠습니까만, 죽어도 그 명성이 썩지 않고 영원히 전해진다면 누가 그를 죽었다고 하겠습니까? (이하 생략)”

1659년에 ‘문경(文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같은 해 송시열(宋時烈)이 문장으로 신도비(神道碑)가 세워졌다. 1710년에 유고집(『愼獨齋先生遺稿』) 15권 7책이 간행되었다.

1658년에 연산(連山)의 둔암서원(遯巖書院)에 배향되었으며 이후에 임피(臨陂)의 봉암서원(鳳巖書院), 옥천(沃川)의 창주서원(滄洲書院), 부여의 부산서원(浮山書院), 광주(光州)의 월봉서원(月峯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1883년 고종 20년에 성균관 문묘에 종사되었다.

 

<참고자료>

『愼獨齋先生遺稿』, 『同春堂集』

김경희, 「김집」, <한국고전종합DB>

한기범, 『沙溪 金長生과 愼獨齋 金集의 禮學思想 硏究』, 충남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0

김장생(金長生)


김장생(金長生)                                                              PDF Download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은 조선의 학자이자 문신으로, 예조 참판을 역임한 황강공(黃岡公) 김계휘(金繼輝, 1526년∼1582년)의 아들이며,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의 아버지다.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에게 사서(四書)와 『근사록(近思錄)』 등을 배웠으며, 20세 무렵에는 율곡 이이(李珥)의 문하 들어가 성리학을 배웠다. 그는 특히 예학을 깊이 연구하여 아들 김집에게 계승시켜 조선 예학을 구축하고 예학파의 태두가 되었다.

또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조익(趙翼), 윤순거(尹舜擧), 윤원거(尹元擧), 최명길(崔鳴吉) 등 수많은 조선의 명사들을 배출하였으며, 『상례비요(喪禮備要)』, 『가례집람(家禮輯覽)』, 『전례문답(典禮問答)』, 『의례문해(疑禮問解)』등을 남겼다.

1548년(1세)
명종 3년, 7월 8일(음력, 이하 모두 같음), 서울 황화방(皇華坊) 정릉동(貞陵洞)에서 태어났다. 자는 희원(希元), 호는 사계(沙溪), 시호는 문원(文元)이며,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고향은 충청도 연산(連山, 지금의 논산)이다. 어머니 신부인(申夫人)은 우참찬을 지낸 평산신씨(平山申氏) 신영(申瑛)의 딸이다.

1549년, 김장생이 두 살 되던 해에, 부친 김계휘가 식년 문과에 을과로 합격했다. 김계휘는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뒤, 검열, 홍문관 정자와 박사, 이조좌랑 등 요직을 역임하였다.

김계휘는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율곡(栗谷) 이이(李珥) 등과 더불어 도의(道義)로 깊이 사귀면서 일세의 표상이 된 인물이다. 경세(經世)의 재간으로는 이들 중에 가장 높은 평가를 받았다. 기대승이 사망한 뒤 김계휘는 율곡과 함께 행동을 하였다. 율곡은 조정에서 항상 말하기를 “참으로 정승을 구하고자 한다면 중회(重會, 김계휘의 자)가 바로 그 사람이다”라고 하였다.(「黃岡行狀」)

1557년(10세)
부친이 김홍도(金弘度) 당으로 몰려 파직을 당했다. 당시 김홍도와 김여부(金汝孚)의 반목으로 옥사가 일어났다. 부친은 낙향하여 연산현의 벌곡 양산리에 정회당(靜會堂)을 세우고 후학들을 가르쳤다.

1558년(11세)
9월, 어머니(申夫人)이 사망하였다. 연산의 선산에 장사를 지냈다. 이즈음 부친은 반대세력의 모함으로 외지로 쫓겨나 있었다. 이 때문에 김장생은 이후 서울에 남아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손에 자랐다.

 

1560년(13세)
3년상을 지내고 상복을 벗었다.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에게 사서와「근사록(近思錄)」등을 배웠다. 송익필은 부친과 가깝게 지내던 인물이었으며 예학(禮學)에 특히 조예가 깊었다. 후에 김장생은 제자 송시열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내가 『근사록』을 구봉 선생께 배웠는데, 구봉 선생은 재지(才智)가 아주 영민하고 출중하여 글을 읽는 데 막힘이 없었다. 그래서 선생님은 다른 사람들도 모두 자신과 같은 줄 아시고 한 번 읽어주고 난 뒤에는 다시 자세하게 설명해 주지 않으셨다.

이 때문에 나는 처음에는 망연하여 마치 아무것도 배우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런데 물러 나와 정좌(靜坐)하고 보고 또 보고 하여 온갖 애를 다 썼으며, 글을 읽으면서 생각하고 생각하고서 읽기를 밤낮으로 그치지 않았다. 그런 다음에는 점차 환하게 깨우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천 번을 생각해 보고 백 번을 따져 본 뒤에, 그래도 분명하게 알 수 없는 다음에 선생님께 여쭈었다. 글을 읽는데 부지런히 애쓰기를 나와 같이 하는 자를 나는 아직까지 보지 못하였다.”(『사계전서』)

1561년(14세)
할아버지를 따라 근무지인 지례(知禮)에 갔다. 12월, 할아버지가 사망하여, 그 상여를 따라 연산으로 다시 돌아왔다. 부친과 함께 선영의 묘지 아래에서 살았다.

다음해 부친은 이조정랑에 복직되었으나 상중이어서 취임하지 않았다. 3년상을 마치고 관직으로 돌아가 사간(司諫)·집의(執義)·응교(應敎) 등 직책을 역임하였다. 김장생도 이즈음 부친을 따라 서울로 거처를 옮겼다.

1566년(19세)
첨지중추부사를 역임한 조대건(曺大乾)의 딸 창녕조씨(昌寧曺氏)와 결혼하였다. 부친은 이해 문과 중시에 40세의 나이로 장원 급제하여 동부승지(同副承旨)·대사헌(大司憲) 등에 임명되었다.

1567년(20세)
부친의 소개로 율곡 이이(李珥, 1537년∼1584년)의 문하에 들어가 수업하였다. 이때부터 성리학 요지를 모두 듣고 힘써 실천하였으며, 무거운 짐을 떠맡기를 자임하였다. 율곡이 해서(海西)로 돌아가자 뒤따라가서 그 문하에 머물면서 예전의 학문을 복습하고 익혔다. 또 새로 얻어들은 것은 갈고 닦았다. 그 가운데서도 김장생은 특히 예학(禮學)에 정밀하여 작고 세세한 점들을 빠짐없이 다 배웠고 크고 작은 일을 모두 실천하였다. 이에 율곡은 항상 그에 대해서 기대가 컸다.

이해 큰아들이 태어났으며,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을 보령(保寧)으로 찾아가 면담했다.

당시 김장생은 과거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는 “나는 기질이 우둔하고 어려서부터 배우지 못해, 과거 공부에 흥미를 가지지 못했다. 20살에 이르러 처음으로 각오를 다지고 고인의 학문에 뜻을 갖게 되었다.”(『사계전서』, 권5)고 하였다. 스스로 겸손하게 표현을 하였으나 어머니 상을 당하고 부친이 관직생활에 어려움을 겪은 것을 목격하고, 또 정치적으로 혼란한 상황을 경험하면서 그는 관직생활에 대해서 흥미를 갖지 못했다. 그는 오직 도학과 예학에만 전념하면서 젊은 시절을 보냈다.

1571년(24세)
부친이 이조참의, 예조참의 등에 임명되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후 황해도·전라도 관찰사를 거쳐 공조참판·형조참판과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등을 역임하였다.

1573년(26세)
이해(선조 6년) 10월 1일, 부친의 관리능력 평가 기록이 『선조실록』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전 참의 김계휘(金繼輝)를 가선(嘉善, 종2품의 가선대부)으로 품계를 올려 경상도 관찰사로 삼았다. 영남은 땅이 크고 사람이 많아 문서가 계속 답지하였는데, 김계휘는 입으로 묻는 말에 답하면서 손으로는 쓰면서 일을 물 흐르듯 처리하였다. …… 처음 경상도에 이르렀을 때 실무를 담당하는 관리인 아전이 각지의 군부(軍簿)를 올리니 김계휘는 한 번 열람하고 치웠다. 얼마 후에 아전이 한 고을의 장부를 잃어버려 그 고을에 있는 장부를 다시 올리게 하자, 김계휘는 서슴치 않고 아전에게 붓을 잡으라고 명하고서 그 장부를 입으로 부르는데 한 글자도 착오가 없었다.

또 백성이 소첩(訴牒, 청원이나 소송하는 서류)을 올린 날짜와 이름자를 모두 암기하고 있었다. 나중에 그것을 다시 올린 자가 있으면 출두시켜 꾸짖기를, ‘너는 몇 월 며칠에 이러한 소장을 올렸는데 이제 어찌 재차 올렸느냐’하였다.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관찰사는 신명(神明)하여 속일 수 없다고들 하였다. 그리하여 동헌 뜰에는 미결된 백성이 없고 탁자 위에는 적체된 문서가 없어 치적(治績, 다스리는 업적)이 여러 도(道) 중에 으뜸이었다.”

 

김장생의 예학은 바로 이러한 부친의 출중한 기억력과 비상한 업무 처리 능력을 이어받아 구축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다음해 6월, 김장생의 둘째 아들 김집이 태어났다.

1575년(28세)
큰 딸이 태어났다. 이해에 부친은 동서 분당 때 심의겸(沈義謙)과 함께 서인으로 지목되었다. 하지만 그는 당파 활동에 깊이 관여하지 않고 당쟁완화를 위해 노력했다.

다음해 김장생은 둘째 딸을 보았으나 안타깝게도 일찍 요절하였다.

 

1577년(30세)
4월, 율곡 이이가 살던 석담(石潭)을 방문하였다. 율곡이 구봉 송익필에게 보낸 편지 중에 “김희원(金希元, 김장생)이 이곳에 와 20여 일 동안 있으면서 차분히 강학(講學)을 하였는데, 그의 아버지가 불러 돌아갔다. 이로부터는 서로 도움을 주는 유익함이 없어졌다.”고 하였다.

6월, 우복룡(禹伏龍)을 방문하여 『근사록』, 『맹자』등을 강의하였다.

 

1578년(31세)
이조 판서 이후백(李後白)의 추천으로 창릉 참봉(昌陵 參奉)에 임명되었다. 이후백은 김장생이 “성인의 경전을 깊이 연구하였고 옛날의 훈계를 독신하였다.(沈潛聖經 篤信古訓)”는 내용으로 추천을 하였다. 그러나 1년이 못되어서 그 직책에서 교체되어 물러났다.

1580년(33세)
셋째 아들이 출생했다. 5월, 우계(牛溪) 성혼(成渾)이 거처하는 파산(坡山)을 방문하였다. 우계에 대해서 김장생은 나중에 송시열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내가 율곡 선생에 대해서는 마음속으로 기뻐하고 성심으로 복종하면서 항상 더할 수 없이 훌륭한 분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우계(성혼) 선생에 대해서는 약간 차이를 두고 낮게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우계 선생의 문하에 있는 사람들이 자못 불평하였다. 그 뒤에 오랫동안 왕래하면서 그분의 기상을 보고 의론을 들어 본 다음에야 율곡 선생께서 그 분과 도의(道義)의 교분을 맺은 것이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김장생은 스승인 구봉(龜峯) 송익필 선생에게 편지를 올려 인심도심(人心道心)을 논했다. 이러한 편지에 대해서 송익필은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학력(學力)이 증진되었다는 것을 알고는 몹시 탄복하였네. 다른 사람이 이론(異論)을 제기하자, 감히 자신의 견해를 옳다고 고집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재주가 크고 학문이 깊은 사람으로서는 그렇게 하기가 어려운 것인바, 참으로 그 태도가 몹시도 아름답네.”

 

1581년(34세)
가을, 잘못 기록된 종계(宗系)를 고쳐달라고 청하기 위해서 중국에 주청사(奏請使)로 가는 부친을 따라 중국에 가게 되었다. 이를 위해 편의상 직책이 돈녕부(敦寧府) 참봉(參奉)으로 변경되었다. 율곡은 중국으로 가는 김장생에게 시를 지어주고 전별하였다.

이해 11월 셋째 딸이 출생하였다.

 

1582년(35세)
4월 부친과 함께 중국에서 귀국하였다. 이 사행(使行)길은 왕복한 거리가 거의 1만 리 정도나 되었는데, 김장생은 아버지를 모시고 가면서 봉양함에 정성과 효성이 간절하고도 지극하였다고 한다.

귀국한 직후, 부친은 21일에 갑자기 사망하였다. 부친은 이때, 특진관(特進官, 예조참판)으로 경연(經筵)에 입시(入侍)하였다가 갑작스럽게 풍(風, 오늘날의 뇌졸중 혹은 뇌출혈)을 맞아 수레에 실려서 집으로 돌아왔다.

임금이 즉각 내시(內侍, 궁궐의 의사)를 보내 병세를 물었으며, 호피(虎皮)를 하사하였다. 나중에 선조 임금은 김계휘의 부음을 듣고 시신을 담는 관을 하사하였다.

율곡은 당시 경연의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을 하였다. “김계휘(金繼輝)는 현명하였는데도 크게 쓰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관직을 추증해 주고 상장(喪葬)을 돌보아 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임금은 이러한 건의를 듣고 대신들에게 물은 다음, 관원에게 장례 치르는 것을 돌보아 주라고 명령하고 김계휘를 이조판서에 추증하였다.

6월에, 부친을 고향인 연산 거정리(居正里)에 장사 지내고 부친의 묘 아래에서 시묘살이를 하였다.

선조실록 15년 4월 1일자로 부친의 졸기(卒記)가 다음과 같이 실렸다.

“예조참판 김계휘(金繼輝)가 졸(卒)하였다. 김계휘는 타고난 자품이 영특하고 마음가짐이 화평하였다. 세세한 행동과 예절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원대한 포부를 지녔기 때문에 수련을 쌓은 공부(道學)는 없었으나 소견이 고매하여 은연중 도리에 합치되었다.

총명하고 기억력이 뛰어나 전고(典故)에 숙달하였으며 인물을 알아보는데 밝았고 정사(政事)를 처리하는데 민첩하여 경국제세(經國濟世)의 재주를 지녔으므로 당시 명현(名賢)들이 모두 그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스스로 인정하였다. 당대 사람들도 공보(公輔, 임금을 보필하며 정사를 다루는 대신)로 삼을 만한 재기(才器)라고 칭송하였다.

그는 가정생활이 청렴하고 검소하였으며 30년 동안 현직(顯職, 높고 중요한 직위)에 있었으나 집안 살림이 마치 평민 시절과 같았다. 젊었을 때부터 문명(文名)으로 출신하였는데 권간(權奸, 즉 윤형원 일파)이 득세하던 때를 당하여 한번도 자신을 굽히지 않았으므로 십 수년 동안 배척되었다.

선조임금이 즉위한 처음에 제일 먼저 발탁되었는데 논의가 적절하였으므로 조정이 추중하였고 임금도 특별히 총애하였다. 마침 여론이 분열되었을 때에 어느 한쪽에 동조하거나 영합하지 않았으므로 다시 정승급 벼슬에 들어가지 못했는데 사람들이 이를 애석하게 여겼다. 이때 특진관으로 임금을 모신 강연에 입시하였다가 갑자기 중풍(中風)으로 쓰러져 사람들에게 들려 집으로 돌아와 그 길로 일어나지 못했는데, 임금이 무척 애도하였고 특별히 관곽(棺槨)을 하사하여 장사지내게 하였다.

김계휘는 당파로 배척을 받았지만 그의 청렴 검소하고 관후한 덕에 사람들이 심복하였기 때문에 소인들도 감시 몹시 노하거나 헐뜯지 못하였다. 그리고 넓은 학식과 뛰어난 기억력으로 귀신처럼 잘 알아내는 데는 조정에서 제일인자로 추대하더라도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의 아들 김장생(金長生)은 뒤를 이어 유학(儒學)으로 세상에 명성을 드러냈다.”

 

1583년(36세)
스승 송익필과 편지로 상례(喪禮)를 논했다. 최초의 예서(禮書)인 『상례비요(喪禮備要)』를 완성했다. 이해 율곡 이이에게 할아버지의 묘갈명(墓碣銘)을 청하였다.

1584년(37세)
1월, 율곡 이이가 사망하여 곡을 하였다. 이후 스승 율곡 이이와 구봉 송익필에 대해서 매월 1일과 15일에 복(服)을 입고 곡을 하였다. 그리고 스승의 기일에 목욕재계(齋戒, 신이나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부정을 타지 않도록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며 행동을 삼감)와 주변 청소를 하고 음식을 올렸다. 이러한 것을 늙도록 그치지 않았다.

6월, 부친의 삼년상을 마치고, 순릉(順陵) 참봉(參奉)에 임명되었다. 곧 평시서(平市署) 봉사(奉事)로 승진되었다.

 

1586년(39세)
봄, 이발(李潑) 등이 율곡 이이, 우계 성혼, 송강(松江) 정철(鄭澈) 등을 모함하자 벼슬을 그만두었다. 4월에 부인상을 당하였다.

다음해 사포서 별제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였다.

 

1588년(41세)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다. 김수언(金秀彥)의 딸 순천김씨(順天金氏)를 부실(副室, 첩)로 맞이했다.

다음해 여름, 중봉(重峯) 조헌(趙憲)이 귀양 가는 것을 전송하였다. 10월, 고양(高陽)에 있는 정철을 찾아보았다.

 

1590년(43세)
12월, 동례원(通禮院) 인의(引儀)에 임명되었다. 송강 정철과 당시 상황을 논하였다.

다음해 아들 김집(金集)이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봄에 정산(定山) 현감(縣監)에 임명되었다. 부임길에 파산(坡山)으로 우계 성혼을 방문하였다.

1592년(45세)
이해 임진왜란이 발생하였다. 차남 김집(金集)이 좌의정 유홍(兪泓)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5월, 큰아들 김은(金櫽)과 며느리가 일본군에게 해를 당한 소식을 들었다.

다음해 12월, 송강 정철이 사망하였다.

 

1596년(49세)
4월, 임기를 마치고 고향 연산으로 돌아왔다. 12월, 호조 정랑에 임명되었다.

1597년(50세)
봄, 명을 받고 호남에서 군량을 조달했다. 겨울에, 파직되어 연산으로 돌아왔다. 해서(海西)의 황주(黃州)와 봉산(鳳山) 지방에 임시 거처를 찾아 거주하였다. 이때 제자들과 함께 글을 읽으니 멀리서 배우러 오는 자들이 많았다. 12월, 단양군수(丹陽郡守)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율곡선생(栗谷先生)의 행장(行狀)을 지었다.

이 즈음 스승인 구봉 송익필이 모함을 당하여 쫓기는 신세가 되어 피신처를 제공하였다.

 

1598년(51세)
4월, 군자감(軍資監) 첨정(僉正)과 호조 정랑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6월, 우계 성혼이 사망하였다. 가을, 『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를 완성하였다. 9월, 남양부사(南陽府使)에 임명되었으나 빠른 승진이라 하여 취소되었다.

 

1599년(52세)
이해 1, 2월에 양근군수(楊根郡守), 익위사(翊衛司) 익위(翊衛) 등에 차례로 임명되었으나 사양했다. 6월, 안성군수(安城郡守)에 임명되었다. 7월, 예학에 밝아 김장생에게 큰 영향을 미친 구봉 송익필이 사망하였다. 김장생은 장례와 제사의 모든 것을 자신이 친히 주관하여 정성을 다하였다.

9월, 『가례집람(家禮輯覽)』을 완성하였다. 이 서적은 임진왜란 직후에 흐트러진 정치적 기강과 사회 윤리를 바로 잡고, 예의 보급에 의한 질서 재건에 크게 기여한 바가 있었다.

 

1601년(54세)
1월, 『소학집주발(小學集註跋)』을 지었다. 9월, 조정의 명령을 받고 서울로 갔다. 10월, 종친부(宗親府) 전첨(典籤)에 제수되었다.

다음해 봄에 벼슬을 그만두고 연산으로 돌아갔다. 8월, 양성당(養性堂)을 지었다. 부친의 가장(家狀)을 완성하였다.

1603년(56세)
5월, 익산군수(益山 郡守)에 임명되었다.

1605년(58세)
아들 김반(金槃)이 사마시에 합격했다. 10월, 벼슬을 그만두고 연산으로 돌아왔다.

다음해 신흠(申欽, 1566∼1628)이 종묘를 중건할 때, 고례(古禮)에 관해 묻자 편지로 답하였다. 신흠은 조선의 4대 문장가중 한 사람이며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인물로, 김장생의 외사촌이 된다.

1609년(62세)
이해 광해군이 등극하였다. 8월, 회양부사(淮陽 府使)에 임명되어 11월에 부임하였다. 다음해 10월, 철원부사(鐵原 府使)로 옮겨 임명되었다.

1613년(66세)
5월, 아버지 김계휘의 첩에서 난 아우들(庶弟)이 계축옥사(癸丑獄事)에 연루되자 벼슬을 그만두고 연산으로 돌아갔다. 정권 담당자들(大北派)은 김장생을 연루시켜 제거하려고 하였으나 피의자들은 죽음을 앞에 두고서도 김장생과의 연루를 극구 부인하여 위기를 넘겼다. 이후 10여년간 두문불출하면서 오직 경서를 연구하고 후학을 가르쳤으며 『상례비요(喪禮備要)』를 간행하였다. 이 당시 그에게서 배운 제자들은 그 아들인 김집을 비롯해 송시열, 송준길, 이유태(李惟泰) 등이 있다.

1617년(70세)
정홍명(鄭弘溟)의 요청으로 송강행록(松江行錄)을 지었다. 3월, 송이창(宋爾昌)과 함께 영동(永同) 지방을 유람하였다. 다음해 경서 연구 자료를 모아『경서변의(經書辨疑)』를 완성하였다.

1623년(76세)
1월, 「사단칠정변(四端七情辨)」을 지었다.

4월,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서인 일파가 광해군과 대북파 관료들을 몰아내고 능양군 이종을 옹립하였다. 이에 그동안 핍박을 받던 김장생은 다시 정치적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많은 지인, 제자들이 새로운 정권의 핵심세력이 되었다.

5월, 「사묘친제시축문(私廟親祭時祝文)」의 칭호에 대하여 상소하였다. 6월, 성균관 사업에 임명되어 원자(元子, 아직 왕세자에 책봉되지 않은 임금의 맏아들)를 보도(輔導, 보살피고 지도)하였다.

1624년(77세)
2월, 이괄(李适)의 난으로 공주(公州)에 피난온 임금을 일신역(日新驛)에서 맞이하였다. 3월, 경연에 입시(참석)하였다. 상의원 정에 임명되고 사업(司業)을 겸하였으며, 집의에 임명되었다. ‘사업(司僕)’은 당시 인조임금이 김장생을 위해서 성균관의 종 4품직으로 특별히 신설한 것으로 성균관의 유생들을 지도하는 직책이었다.

6월, 사직소와 함께 13條의 사항을 올렸다.

이정구(李廷龜) 등과 사친추숭(私親追崇)과 전례(典禮)에 대해 논의하였는데, 이때 논의한 왕복 서간등을 묶어 『전례문답(典禮問答)』이라 하였다.

8월, 특명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공조참의(工曹參議)로 승진하였다. 10월, 원자(元子) 강학관(講學官)을 겸하였다. 임금은 김장생을 이러한 직책에 임명하여 왕세자 교육을 맡게 하고 필요시 왕을 직접 접견할 수 있게 하였다.

김장생은 이즈음 임금에게 수차례 상소문을 올려서 정치의 요체와 방책을 제시하였다. 예를 들면 군주는 수많은 변화의 근본임으로, 대본(大本)을 세우며 국가 운영의 기본 방침을 잘 존중하여 효와 예를 다함으로써 여러 신하의 본(本)이 될 것을 요청하였다. 또 친히 정치에 참여하여 민폐를 혁신하고 군정(軍政)을 닦고 궁궐 안의 기강을 바로 잡도록 요구하였다. 특히 소학(小學)을 중시하고 효행과 예행을 솔선수범하여 예를 바탕으로 한 사회 질서의 재건을 시대적인 과업으로 제시하였다.

1625년(78세)
특명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가 되었으며,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 동문(同門)인 정엽(鄭曄), 심종직(沈宗直) 등과 함께 스승 송익필의 신원을 위해서 상소하였다.

다음해 1월, 외가 쪽 친척인 신흠에게 편지하여 계운궁(啓運宮) 상례에 대해서 논하였다. 3월, 황산(黃山)서원을 세웠다.

1627년(80세)

1월,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 후금 만주족이 침입해왔다. 양
(兩湖, 호서와 호남)호소사(號召使)에 임명되어 국가적인 위기에 대응하였다. 김장생은 의병모집과 군량조달의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고 2월에 공주에서 왕세자를 맞이하여 호위하였으며 3월에 강화도 행재소(行在所)에 나아갔다.

1628년(81세)
9월, 형조 참판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제자들과 학문을 연구하고 강론을 계속하였다. 다음해 9월, 정엽(鄭曄)의 「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의 서문을 지었다.

1630년(83세)
가을, 제자 송시열과 격치(格致), 사칠(四七) 등을 논하였다. 「독서강의서(讀書講義序)」를 지었다.


1631년
(84세)
8월, 사망하였다. 10월, 진잠현(鎭岑縣, 지금의 대전광역시 유성구) 성북리(城北里)에 장사를 지내다. 인조 임금은 김장생의 사망 소식을 듣자, 제사와 부의(賻儀)를 하사하고 이조 판서에 추증하였다.

인조실록』 9년 8월 9일자에 다음과 같은 ‘졸기(卒記)’가 실렸다.

“전 형조 참판 김장생(金長生)이 죽었다. …… 상(上, 인조임금)이 반정(反正)하여 덕이 높은 이를 구하였는데, 장령으로 부름을 받고 올라 왔다. 이때 상이 사묘(私廟, 방계傍系에서 왕위에 오른 경우 그 친족, 즉 종묘에 들어갈 수 없는 왕족의 사당.)에 직접 제사를 지내려 하는데, 예관(禮官)이 ‘상이 친손자로 할아버지의 왕통을 이은 이상 두 아버지를 모신다는 혐의가 없으니 축사(祝辭)에 마땅히 아버지[考]로 일컫고 아들로 일컬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의견에 대하여 김장생이 수천 마디의 말로 상소를 올려 그 설을 공격하여 깨뜨렸다. 이는 모두 선유(先儒)의 정론(定論)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추숭(追崇)하자는 논의가 일어나자 김장생이 여러 차례 소를 올려 옳지 않음을 힘껏 말하였으나 그의 의견은 쓰이지 않았다. 김장생은 조정에 있기를 즐겁게 여기지 않은데다가 나이도 많았으므로 자청하여 연산(連山)으로 돌아갔다. 이에 그를 형조 참판으로 다시 불렀으나 김장생은 사양하고 오지 않았다. 집에서 병으로 죽으니 나이 84세였으며, 학자들이 사계(沙溪) 선생이라고 불렀다.”

1634년에 그를 기리는 둔암서원(遯巖書院)이 설립되었다. 1636년에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가 1657년에 영의정(領議政)에 증직되고, ‘문원(文元)’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1717년에 문묘에 종사(從祀)되었다.

<참고자료>

『沙溪全書』

「김장생」, <한국문집총간 인물연표>

선병삼, 「율곡학인물들-김장생」, <율곡학 프로젝트>

한기범, 『沙溪 金長生과 愼獨齋 金集의 禮學思想 硏究』, 충남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0

김시민(金時敏)


김시민(金時敏)                                                              PDF Download

 

김시민(金時敏, 1681-1747)은 안동김씨 가문 출신으로 의빈부의 도사, 진산 군수 등을 역임한 조선시대의 관리다. 김창협(金昌協)과 김창흡(金昌翕)을 스승으로 모셨으며, 시문이 뛰어났다. 나이 들어서까지 관직에 나가지 못한 자신의 처지와 사회적, 정치적 혼란 속에서 자신의 뜻을 마음껏 펴지 못한 울분을 시문에 의탁하여 많은 시를 썼다. 학문적으로는 스승들의 입장을 따라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을 취했으며 명나라 왕양명의 문장과 사상에도 깊은 공감을 표시하였다.

1681년(1세)
숙종 7년, 10월 12일에 김성후(金盛後)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은 호조 정랑(正郞)을 지냈으며, 모친은 임천(林川) 조씨(趙氏) 조원기(趙遠期)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도정(都正)을 지낸 김수일(金壽一)이다. 김시민은 2남 2녀중 장남으로 동생은 도사(都事)를 지낸 김시진(金時愼)이다.

김시민의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는 사수(士修), 호는 동포(東圃), 동포거사(東圃居士), 초창(焦窓) 등을 사용하였다. 김시민의 집안은 소위 경화사족(京華士族) 안동김씨 가문으로 부친 김성후는 시를 잘 써서 이름을 날린 문인이다.

1694년(14세)
집안의 어른인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 등에게 문장과 학문(성리학)을 배웠다. 이 때문에 그는 낙론계의 철학관을 수용하여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은 동일하다는 입장을 취했다.

성장해서는 홍세태(洪世泰), 이병연(李秉淵), 신정하(申靖夏) 등과 교류를 하였는데 김시민 역시 부친처럼 시를 잘 썼다. 특히 당송시대의 유풍이 담긴 고시를 잘 썼다.

그의 아들 김면행은 이렇게 회상한 적이 있다.

“(부친은) 시 짓는 것을 좋아하였다. 어려서부터 시문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것이 많아 우리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과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 두 분 선조께서 자주 칭찬해주셨다. 만년에는 이사천(李槎川, 이병연李秉淵)과 나란히 쌍벽을 이루어 당대의 으뜸이 되어 마침내 나라 안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東圃集跋」)

 

1697년(17세)
해주최씨(海州崔氏) 최선(崔渲)의 딸과 결혼하였다.

1700년(20세)
이해 형을 따라 강화도에 가면서 「기행시도장(記行示道長)」을 지어 홍세태(洪世泰)에게 주었다.

1702년(22세)
최씨 부인상을 당하였다. 부인과는 슬하에 자식을 두지 못하였다. 이후 창원 황씨(昌原黃氏)로 현감(縣監)을 지낸 황만(黃)의 딸을 다시 맞이하였으나 역시 자식을 두지 못하였다.

1704년(24세)
부친이 근무하고 있던 석성(石城)지방에 갔다가 병에 걸렸다. 이 때의 병으로 그는 학문적인 뜻을 접게 되었다. 아들 김면행은 부친이 시를 즐겨 쓸 수 밖에 없었던 사정을 이렇게 전했다.

“사람됨은 실로 자상하고 결백하며 인륜에 독실하였다. 또 일찍부터 사문(師門, 스승의 문하)에 들어가 옛사람들의 학문(유학)을 사모하였다. 비록 중간에 병에 걸려 그 뜻을 끝까지 추구하지는 못했지만 그런 와중에도 하루도 잊은 적이 없었으니, 어찌 일개 시인이 되는 것을 기꺼워하는 사람이었겠는가?(「東圃集跋」)”

 

1707년(27세)
이해 봄에 증조할아버지 김광욱이 행주 덕양산(德陽山) 지은 귀래정에 가서 「춘유귀래정기(春遊歸來亭記)」를 지었다. 이 문장은 당시 둘째 큰아버지의 생신을 축하하고 친척들과 놀았던 모습을 기록한 것이다.

1708년(28세)
스승 김창협이 사망하였다. 김창협은 성리학 연구에서 일가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런 김창협을 스승으로 모시고 배운 김시민은 학문적으로 어떤 성취를 이루었는가? 그 아들은 그 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부친(김시민)은 학문에 대해서는 그다지 공을 들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간혹 훌륭한 문장이 있다. 예컨대 성(性)에 대해 논한 글 한 편으로 말하자면 학문이 심오하다고 이름난 자들도 혹 도리어 한 수 접어주는 바가 있었다. 단순히 고금의 시인들 가운데 보기 드문 사람이 되는 데 그치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이 어찌 터득한 바가 없으면서 그럴 수 있는 것이겠는가? 틀림없이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1713년(33세)

10월, 부친이 사망하였다. 부친상을 마치고 「제석감회(除夕感懷)」를 지었다. 한해가 저물 때 자신을 돌아보고 지은 시이다. 이후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1715년(35세)
김창흡에게 부친의 묘표를 부탁한 뒤에 그것을 받아 읽고 답서(「上三淵」)를 보냈다.

1717년(37세)
입양한 아들 김면행(金勉行, 1702∼1772)이 15세가 되어 관례(冠禮)를 행하였다. 김면행의 생부는 이조참판(吏曹參判)으로 추증된 김시서(金時敍)이다. 김면행은 1755년에 을해정시문과(乙亥庭試文科) 병과(丙科)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벼슬은 참판(參判)에 이르렀다.

1722년(42세)
친척인 김창집(金昌集, 1648∼1722)이 경종의 시해를 도모했다는 죄로 처형되었다. 이로 인해서 그의 형 김창협을 스승으로 모신 김시민은 세속과 더욱 멀어져 은거하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때 그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지금 세상일은 어떤가? 종묘사직을 어이할까? …… 귀밑머리 늙을 때 아니지만, 세상의 큰 변화를 많이 보았다. 구구한 소원이 있다면 평생토록 다툼을 보지 않는 것. ”(「時事」)

 

1725년(45세)
영조가 즉위하였다. 다음해 11월 모친상을 당하였다.

이즈음 김도수(金道洙, 1699-1733)가 김시민을 방문하여 만난 뒤,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내가 김시민 공을 배알했더니 그분은 의분이 복받쳐 이렇게 말씀하셨다. ‘선비의 삶은 구차하지 않아야 하며 독서와 구도(求道)가 아니라면 어디에 마음을 쓰겠는가? 무릇 문장은 부득이하여 쓰는 것이고 즐겨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알아주는 사람이 적고 모르는 사람들이 많으니, 나의 문장을 읽고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면 내가 또 어찌하겠는가?’ 그 말씀이 마치 슬픈 듯하였다. 공 집에는 작은 소나무 몇 그루가 있고, 노란 국화가 그 사이에 피어 있었다. 술잔을 들고 달을 바라보며 오로지 홀로 늙어가며 ‘도연명은 나를 알아주겠지’라고 하셨다.”(김도수 『춘주유고』, 김영주, 3쪽 재인용)

 

1732년(52세)
이해 여름에 주위 사람들의 추천으로 선공감(繕工監) 가감역이 되어 처음으로 벼슬을 하게 되었다. 10월에 선공감 감역으로 승진하였다.

이해에 「차남생학거운(次南生鶴擧韻)」을 지었다. 나이를 먹고 처음 벼슬을 하게 된 심정을 읊은 시이다.

1733년(53세)
3월, 사옹원의 주부가 되었다. 다음해 1월, 장례원의 사평에 임명되었다. 9월, 사직서 영, 종묘서 영 등에 임명되었다.

1735년(55세)
2월에 낭천(狼川) 현감(縣監)에 임명되었다. 다음해 병으로 사직하고 귀향하였다. 이 때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거사비(去思碑)를 세워서 그의 공적을 기념하였다.

김시민은 나이 들어서 그림을 수집하는 취미를 가졌다. 그러한 자신의 취미에 대해서 그는 다음과 같이 글을 썼다.(「一代六法序」)

“병중에 할 일이 없어 그림 수집에 마음을 붙였다. 모은 것이라고는 오직 지금 시대의 그림이고 옛 것은 모으지 않았다. 손님 중에 이를 이상하게 여겨서 묻는 자가 있었다. 그래서 내가 웃으며 답하였다. ‘내가 옛 그림을 수집하지 않고 지금의 그림만을 수집하는 것은 대개 특별한 뜻이 있고 또 의미가 있다네. 자네에게 들려줄까? 세상에 그림 수집벽이 있는 것으로 유명한 사람들은 대체로 지금의 것을 버려두고 옛 것을 쫓으며, 먼 시대의 것을 귀하게 여기고 가까운 시대의 것을 천시한다네. 심지어 해어진 비단조각에 그린 그림이나 떨어진 종이에 그린 그림, 불에 그을린 채색화나 좀먹은 묵화까지 천금의 값으로 머나먼 만리타국에서 사와서 수놓은 비단으로 표구를 하여 화첨이나 족자로 만들고는 사람들에게 과시하기를 이것은 당나라 때의 그림이다, 이것은 송나라 때의 그림이다, (중략)

그러나 오래 될수록 그리고 거리가 멀어질수록 더욱 그 참됨을 잃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에 허다히 미혹된다네. 지금 내가 소장한 그림은 위로는 선배, 어른, 중간은 동년배, 아래로는 후배나 천인 등으로 모두 나의 한 세대를 벗어나지 않지만 유명한 화가의 것들이지. 그 집에서 나온 그림을 얻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사람에게 청하여 그림을 그린 것이니 다시 참과 거짓이 서로 뒤섞일 염려가 있겠는가?’”

 

1739년(59세)

2월, 부인 황씨(黃氏)의 상을 당하였다. 3월, 사옹원 주부가 되다. 봄에 왕이 친히 농사짓는 과정을 묘사하고 풍년을 기원하는 「친경가(親耕歌)」를 지었다. 7월, 장례원 사의에 임명되었다.

1740년(60세)
의빈부의 도사에 임명되었다가, 7월에 진산(珍山) 군수에 임명되었다.

1747년(67세)
3월 20일, 평소 앓던 천식이 악화되어 사망하였다. 양주(楊州) 선영에 묻혔으며, 조정에서 이조 참의에 증직하였다.

1757년에 문집인 『동포집(東圃集)』(8권 4책)이 활자본으로 발간되었다. 아들 김면행의 부탁을 받은 이병연(李秉淵, 1671∼1751)이 편집을 하였는데, 실제 원고 중에 3분의 1정도는 삭제되어 발간되었다. 이병연은 김시민이 생전에 가깝게 교류하던 문인이다.

김시민의 시풍에 대해서 아들 김면행은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부친은 재능을 지니고 강직하게 살다가 결국 곤궁하게 노년을 보냈다. 세상에 쓰이지 않다 보니 유독 시에만 재능을 오롯이 쏟아 붓게 된 것이다. (중략) 그러다 보니 그 내용에 흥취가 넘치거나 호탕하고 분개하는 경향이 많았는데, 만년에는 더욱 정심(精深)하고 독실하며 경계가 진지하고 말이 핍절하여 혼연히 일가를 이루었다. 이런 이유로 공에 대해 논하는 세인(世人)들은 단지 그의 시가 경외할 만하다는 것만 알고 시보다 그 사람이 더 높이 쳐줄 만하다는 것은 알지 못하니, 그래서 나는 그가 종내 지우(知遇)를 받지 못한 데 대해 슬퍼하는 것이다.”(「東圃集跋」)

 

<참고자료>

김영진, 「김면행」,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김영주, 「동포 김시민의 문예관 연구」, 『동방한문학』44, 2010
안유경, 「율곡학맥 인물이야기 – 김시민」, <율곡학 프로젝트>
서인숙, 「동포집해제」, <한국고전 종합DB>, 2011

황윤석(黃胤錫)


황윤석(黃胤錫)                                                              PDF Download

1729년(영조 5)∼1791년(정조 15) 조선 후기의 문인이다.

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영수(永叟), 호는 이재(頤齋)이며 서명산인(西溟散人)․운포주인(雲浦主人)․월송외사(越松外史) 등으로도 불렀다. 1727년 4월 8일에 전라도 고창 흥덕현 구수동(지금의 고창군 성내면 조동)에서 만은(晩隱) 황전(黃廛)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미호(美湖) 김원행(金元行, 1702∼1772)의 문인이다.

황윤석은 5․6세 때 할머니 김씨 부인에게서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7세 때 「소학」․「사기」․「사서오경」․「제자백가」 등을 두루 읽기에 이르렀다. 이미 6세 때에 쉬운 글자를 맞추어 시를 지을 수 있을 정도로 그의 문학적 재주가 뛰어났다. 천성이 워낙 책을 좋아하여 외가의 서재에서 수일 동안 책을 읽느라 허기는 물론 집에 돌아갈 생각도 잊었다고 한다. 그의 학문에 대한 열정이 어렸을 적부터 남달랐음을 알 수 있다.
할아버지 구암(龜巖) 황재중(黃載重)이 농암 김창협의 문인이었다. 아버지 황전은 김창협 문인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이로써 낙론계열과 집안 대대로 교유하는 사상적 기틀이 만들어졌다. 황윤석은 기호학파 낙론계열의 학맥을 계승하며 주자․송시열․김창협․김창흡․김원행을 존숭하며

“우리의 가학은 진실로 우암(송시열)과 농암(김창협)의 학맥”

이라고 자처하였다. 또한

“우암은 주자의 정맥이고 농암과 삼연(김창흡)은 우암의 충신이다”

라고 하였는데, 송시열․김창협․김창흡으로 이어지는 학통의식이 강했다고 할 수 있다. 후일 김원행의 문하에 나아가 공부하게 되는 요인도 가문의 학문적 분위기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하겠다.

김원행은 김창협의 양손자로, 정통 노론계열 학통을 이으면서 석실서원(石室書院)에서 당시 많은 제자들을 강학하고 있었다. 황윤석은 36세 때 석실서원에 있던 김원행을 찾아갔는데, 이때 홍대용을 비롯한 김원행의 여러 제자들을 만나 이들과 교유하면서 서양과학을 접하는 등 학문의 폭을 넓힌 것으로 보인다. 이에 황윤석은 문학․경학․예학․천문․지리․의학․풍수 등 정치․경제․사회․농업 제반 분야의 학문에 접할 수 있었다. 스승 김원행이 ‘진정 호남의 호걸의 선비[眞湖南豪傑之士]’라 한 것과 서명응의 ‘박학지사(博學之士)’, 영조의 ‘박식자(博識者) 등의 평가는 바로 이러한 학문적 박학성에 연유한다.

황윤석의 행장에는

“옛날의 군자는 하나의 사물이라도 모르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라고 하여 학문하는 자가 격물치지(格物致知)가 되지 않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박학한 선비로 이름난 사람들을 찾아가서 배우고 토론하는 등 배움에 권태로움을 느끼지 않았고, 중국에서 새로 나온 서적이 있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꼭 입수하여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는 등 그의 박학에 대한 열의를 볼 수 있다. 황윤석이 남긴 다양한 분야의 방대한 저작물은 그가 어떤 자세로 학문에 임하였는지 잘 알 수 있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죽기 전까지 남긴 저서로는 「이재난고(頤齋亂藁)」․「이수신편(理數新編)」․「산뢰잡고(山雷雜攷)」․「자지록(資知錄)」․「역대운어(歷代韻語)」․「성씨운휘(姓氏韻彙)」․「성리대전주해(性理大全註解)」․「구경잡록(九經雜錄)․「소학강의(小學講義)」 등이 있다. 아버지 황전 역시 책을 매우 좋아하였는데, 누군가가 책을 팔러오자 밭 갈던 소와 책을 교환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황윤석은 10세 때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하여 죽기 이틀 전까지 계속하였다고 한다. 지금의 「이재난고」가 그것인데, 분량도 방대하지만 그 내용 또한 다양하여 그의 학문적 성향과 열정을 엿볼 수 있다. 천문(天文)․역학(易學)․견문(見聞)․기행(紀行)과 학술적 논설 및 그 시대의 생활상 등 조선후기의 모습을 잘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라 할 수 있다.
여기서는 그의 일기 내용 중의 과거 시험의 폐단과 관련된 내용을 소개한다.

황윤석이 경희궁 후정시(後庭試)에 응시한 1764년 4월 1일의 일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민홍열(閔弘烈)이 장원이었고 향유는 모두 낙방했다. 이날 초저녁에 임금이 새로 과거에 합격한 다섯 사람이 모두 경성에서 나오고, 향유 중에는 한 사람도 참여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내일 다시 경희궁에서 후정시를 열라고 특별히 명했다.”

지방출신인 향유(鄕儒)와 달리 서울출신인 경유(京儒), 경유 중에서도 경화사족(京華士族)의 정치적 위세는 과거시험의 공정성을 저해하는 요소였다. 과거시험에 경유들만 합격하고 향유는 한명도 합격하지 못하였으므로 임금이 향유들을 위한 과거시험을 다시 시행하라는 명이다. 이것은 향유들을 배려한 조치였다.

당시 조정에서는 임금부터 이미 경유(京儒)와 향유(鄕儒)의 구분을 뚜렷이 하고 있었다. 그만큼 경유들은 과거급제에 유리했고, 경화세족의 자제들은 급제가 당연시되었기 때문이다. 황윤석은 이러한 과거시험의 실상을 다음과 같이 탄식했다. 1766년 2월 16일 일기 중의 한 대목이다.

“지금 재상 이하부터 처음 벼슬한 집에 이르기까지 무릇 조금의 세력이 있는 사람은 거의 모두가 방(榜)에 게시한 명단에서 누락되는 경우가 없고, 권세가에 빌붙은 향유도 많이 합격한다. 그러나 이렇지 않는 사람은 낙방한다. 심하다! 과거의 폐단이 하늘을 찌름이.”

 

그해 3월의 정시(庭試) 결과는 합격한 향유는 한 사람도 없었다. 6명이 합격했는데, 모두 쟁쟁한 가문의 자손들이 합격했고, 향유는 모두 떨어졌다. 이것은 비단 향유만 겪는 설음은 아니었다. 노론 집권층 내에서도 인사권을 누가 쥐느냐에 따라 인맥에 의해 합격자가 결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과거장에서부터 경유들, 특히 경화사족들은 위세를 부리면서 특별하게 굴었다. 과거장에 시중을 드는 수종을 3․40인씩 데리고 들어와 우산과 장막을 둘러 자리를 맘대로 넓게 차지하는가 하면, 향유가 부득이 인접한 자리를 잡으면 칼을 뽑아 머리를 부수고 행패를 부리기도 했다. 그들은 시험 정보에 밝아 시험 감독관이 누군지 짐작했으며, 오늘날의 과외선생에 해당하는 독선생을 모시고 시험 답안지를 본격적으로 익혀 사륙변려문에 능하기도 했다. 합격자 예상에도 밝았으며, 과거시험장에서 글씨는 대신 써주는 서수(書手)를 데리고 와서 시험지를 대필하게 하였다. 그 모든 것은 한미한 가문에서 올라온 향유들에겐 불가능한 일이었다. 향유들은 오직 홀로 자기가 준비한 공부로 자기 손으로 답안지를 써서 제출하는 것 외에는 아무 방법이 없었다.

1766년 3월 3일 일기의 내용이다. 황윤석은 두호(杜湖)로 조정(趙晸)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 댁 자제가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일을 위로하니 조정이 웃으면서 이렇게 말한 것을 기록하였다.

“그 애는 초시도 매우 다행이라네. 과거시험을 주재하던 시험관이며 재상인 김상복(金相福)이 과거시험에서 서너 명을 선출하였는데, 대제학 정실(鄭實)의 아들 정지환(鄭趾煥)이 명성이 있어 장원이 되었네. 임금께서 합격자의 총 명단을 물리치시고 이전 대제학 황경원(黃景源)에게 2등으로 급제한 사람을 고쳐 내라고 다시 명하시니 곧 장원은 이한경(李漢慶)이 되었지. 그는 작고한 남인출신으로 참판 이제화(李齊華)의 아들이고 지금 명성이 있는 이성경(李星慶)의 동생이라네. 이런 과거시험에서 어찌 쉽게 합격하겠는가.”

이것은 명문세족의 집안출신이 아니고서는 과거시험에 합격하기가 어려움을 토로한 글로써, 과거제도의 많은 폐단을 지적하고 있다.

또한 1770년 9월 10일의 일기에는 과거시험장에서 생긴 불상사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경의궁(慶熙宮) 흥화문(興化門) 안으로 과거를 응시하러 갔다. 그런데 과거 시험장 문에 들어서서 서쪽 계단으로 내려오다가 뒷사람들에 의해 급히 떠밀려 넘어지면서 왼쪽 손바닥의 살갗이 벗겨져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부득이 상처의 아픔을 참고 견디며 이를 감싸고 수습하느라 시험의 답안지를 늦게 제출하게 되었다.
이처럼 황윤석의 일기인 「이재난고」 가운데 상당한 분량은 경화사족들과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가 할애되어 있다. 이것은 황윤석의 진로나 벼슬길과도 직결되는 문제였으므로 예민하게 수집․기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이재유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황윤석, 사환을 위해 떠돈 시간의 내면풍경」(이지양, 「고전과 해석」5, 고전문학한문학연구학회, 2008), 「이재 황윤석의 詩 연구」(김대하, 공주대학교 석사논문, 2012)

임윤지당(任允摯堂)


임윤지당(任允摯堂)                                                    PDF Download

1721(경종 1)∼1793(정조 17) 조선후기의 여성 성리학자이다.

본관은 풍천(豊川)이고, 이름은 알려지지 않고 윤지당(允摯堂)이라는 호만 전한다. 강원도 원주 출신이다. 아버지는 함흥판관을 지낸 임적(任適, 1685∼1728)으로, 권상하의 문인이다. 어머니는 파평윤씨로 호조정랑을 지내고 이조판서에 증직된 윤부(尹扶)의 딸이다. 조선의 6대 성리학자 중의 한 사람인 녹문(鹿門) 임성주(任聖周, 1711∼1788)의 여동생이다. ‘윤지당’은 오빠 임성주가 지어 준 당호이다.
동생 임정주(任靖周, 1727∼1796)는 「윤지당유고」의 「유사(遺事)」에서 ‘윤지당’이라는 호를 쓰게 된 내력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윤지당은 어렸을 때에 우리 둘째 형인 임성주가 지어주신 것이다. 주자의 ‘문왕의 어머니인 태임과 문왕의 부인인 태사를 존경한다’는 말에서 따오신 것이다. 그러나 그 뜻은 실제로 태임의 친정이었던 지중씨(摯仲氏, 임씨)의 ‘지’라는 글자를 취하신 것이다. 지임씨를 독실히 믿는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우리 이종형 한정당이 손수 도장을 새겨서 주니 이로부터 집안에서 윤지당이라고 불렀다.”

오빠 임성주가 유교에서 이상적인 여성상인 문왕의 어머니인 태임의 덕을 본받으라는 의미에서 윤지당이라는 호를 지어주었다는 것이다. 태임의 성씨가 임씨였기 때문에 임성주가 더욱 친근감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임정주는 윤지당이 어릴 때부터 학문을 할 수 있었던 집안 배경을 적고 있다.

“어릴 때부터 빠른 말이나 황급한 거동이 없었고, 천성이 총명하고 영리하셨다. 여러 오빠 형제들을 따라 경전과 역사 공부하는 것을 옆에서 배웠고, 때때로 토론을 제기하였는데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특히 둘째 형님(임성주)께서 기특히 여기시고 「효경」․「열녀전」․「소학」 등의 책을 가르치셨는데, 누님이 매우 좋아하셨다. 낮에는 종일토록 부녀자의 일을 다해내고 밤이 깊으면 소리를 낮추고 책을 읽으셨다. 뜻이 못소리를 따르는 듯하고 정신이 책장을 뚫을 듯하셨다. 그러나 학식을 감추어 비운 듯이 하셨기 때문에 친척들 중에서도 그러한 사실을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대부분의 조선시대 사대부의 여성들이 그렇듯이 윤지당도 남자 형제들 곁에서 경전(經傳)과 사서(史書)를 읽는 것을 어깨너머로 보고 듣다가, 천성이 총명하고 영리하여 오빠 임성주로부터 「효경」․「열녀전」․「소학」 등을 배우게 되었다. 낮에는 부녀자의 일에 전념하고 공부하는 티를 내지 않았으므로 가족들도 그녀의 학문 진취를 알지 못하였다. 윤지당이 어릴 때부터 학문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자신의 총명함도 있었지만 오빠 임성주의 가르침과 같은 집안의 학문적 환경이 뒷받침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임정주가 쓴 「유사」에는 윤지당의 정숙한 모습을 기술하고 있다.

“7․8세 때 어떤 일 때문에 외가에 가서 몇 달을 머물게 되셨다. 매일 저녁 어른이 잠자리에 드시면 비로소 잠옷으로 갈아입고 저고리와 치마를 잘 정돈하여 시렁에 올려놓고 잠드셨다. 깨어날 때는 반드시 어른들보다 먼저 일어나 침구를 거두고, 세수하고 빗질하고 평상복을 갈아입으셨다. 종일토록 어른을 모시고 앉아 있으면서 발자취가 마루 아래로 내려가시는 일이 없었다. 돌아오실 때까지 이와 같이 하기를 한결같이 하시니 보는 사람들이 모두 기특하게 여겼다.”

8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9세 되던 해 청주근처 옥화(玉華)라는 곳으로 이사하였다. 17세 때 조상들의 선영이 있던 여주에 와서 살다가 19세(1739) 때 원주의 선비 신광유(申光裕, 1722∼1747)에게 시집갔다. 남편과의 사이에서 딸 하나를 낳았으나 일찍 죽었고, 27세 되던 1747년(영조 23)에는 남편과 사별하여 과부가 되었다.

이후 윤지당은 원주에서 시동생 형제들과 한 집안에서 같이 살았다. 시동생들은 윤지당을 공경하였으며, 섬기기를 어머니와 같이 하였다. 큰 시동생이었던 신광우(申光祐)는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대사간을 역임한 엘리트 관료였다. 시댁의 경제적 환경은 여유가 있었으며, 이로써 윤지당의 학문 활동에 도움이 되었다. 독서와 저술에 힘쓰다가 1793년(정조 17) 음력 5월 14일 원주 자택에서 73세의 나이로 작고하였다. 윤지당이 작고한 지 3년 후인 1796년(정조 20)에 그녀의 문집이 「윤지당유고(允摯堂遺稿)」라는 이름으로 친정 동생 임정주와 시동생 신광우에 의해 간행되었다.

 

윤지당은 자신의 저술 배경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나는 어려서부터 성리학을 알았고, 이미 자란 다음엔 더욱 좋아하기를 입이 고기를 좋아하는 것처럼 되어 그만둘 수 없었다. 이에 서적에 실려있는 성현의 가르침을 마음을 다해 탐구한지가 수십 년이 되었다.……어느 해에 죽을 날이 얼마 안되어 갑자기 초목처럼 썩어 버릴까봐 걱정이 되었다. 마침내 가정일 틈틈이 글을 써서 뜻밖에도 모두 40편이 되었다.”

윤지당이 남긴 40편의 유고를 남겼으나 동생과 시동생이 유고를 정리하면서 35편으로 산정하여 간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윤지당은 역대 유명 인물들에 대한 논평을 즐겼던 것 같다. 「윤지당유고」에는 여러 인물에 대한 평가가 들어있다. 「최홍이녀(崔洪二女)」의 전기는 경상도의 한 모녀가 억울하게 죽은 남편과 아버지를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원수를 갚은 사건을 기술한 것이다. 이 전기에서 두 여인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두 여인의 일은 정절과 효성이 지극할 뿐만 아니라 용기도 있다. 비록 남자라 하더라도 그들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시경」에서 ‘저 자식된 이여, 목숨을 바쳐도 뜻이 변치 않네’라고 하였으니 바로 이 두 여인을 두고 한 말이라 하겠다.”

윤지당은 최씨와 홍씨 두 여인의 용기를 남자라도 미칠 수 없는 경우라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 윤지당은 이들의 행위가 순수한 성품에서는 남녀의 차이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내줌으로써 여성도 남자들과 같이 효와 의리를 실천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윤지당은 11편의 논(論)에서 역사적 인물에 대해 평가하였는데, 특히 왕안석(王安石)을 통렬하게 비판하였다. 왕안석은 송나라의 재상으로 개혁정치를 추구한 인물이다. 도의와 명분을 숭상하던 윤지당은 왕안석이 인의(仁義)를 저버린 채 부국강병만을 취하는 행동은 잘못이라고 보았으며, 왕안석이 일찍 죽은 것은 송나라를 위해서는 불행 중 다행이라고까지 말하였다. 이렇게 볼 때, 윤지당은 실용과 공리보다는 성리학적인 명분에서 내면의 도덕성을 가진 사람을 중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윤지당은 사마광(司馬光)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와 부정적인 평가를 함께 내리고 있다. 사마광을 사마온공이라 높이면서 “사마온공은 송나라의 어진 정승이다. 그가 평생에 행한 일에는 남에게 말 못할 것이 없었다고 하니, 그 어질고 현명했던 것을 알 수 있다”라면서 긍정적인 평가를 하였다. 그러나 그의 역사 서술과 관련해서는 비판하였는데, 즉 사마광이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 유비의 촉한을 대신하여 조조를 정통으로 인정한 것이나, 또한 조조가 헌제(獻帝)를 협박해서 재위를 찬탈한 인물인데도 한나라의 헌제를 도왔다는 이유만으로 긍정적으로 서술한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비판한 것이다.
윤지당의 학문적 내공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말해주는 일화가 있다.

“둘째 형님(임성주)께서 양근 군수로 계실 적에 <임성주의 아들> 협과 홉 형제가 별당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그때 누님께서 원주에서 오셔서 관사에 머물고 계셨는데, 조카들이 매일 아침저녁으로 문안인사를 드렸다. 하루는 누님께서 ‘오늘 공부는 어떠하냐?’라고 물으시니 조카는 ‘날이 더워 고통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부채질을 하느냐?’고 묻자,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누님께서는 ‘정신을 집중해서 책을 읽으면 가슴에서 자연히 서늘한 기운이 생기는데, 부채질할 이유가 있겠는가? 너희들이 아직도 헛된 독서를 면치 못했구나’라고 하셨다. 이 한 마디 말씀으로 미루어보면 누님의 존심양성(存心養性)하신 수양의 경지를 가히 알 수 있다.”

[참고문헌] 「윤지당유고」, 「녹문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임윤지당의 생애와 「윤지당유고」(최연미, 「서지학연구」17, 서지학회, 1999), 「<윤지당유고>를 통해 본 임윤지당의 생애와 사상」(전혜원, 전북대학교 석사논문, 2007)

조중회(趙重晦)


조중회(趙重晦)                                                              PDF Download

1711년(숙종 37)∼1782년(정조 6) 조선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익장(益章). 아호는 쓰지 않은 듯. 찾아볼 수가 없다. 단종 때의 충신인 조여(趙旅)의 10대 손으로, 아버지는 영조 때 도승지를 지낸 조영복(趙榮福)이고 어머니는 이만봉(李萬封)의 딸이다. 당시 노론 가운데 낙론을 대표하던 이재(李縡, 1680∼1746)의 문인이다.
조중회는 25세(1736) 때에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관직의 임명은 그 후 3년 뒤인 영조 15년(1739)에 세자시강원의 설서(說書)에 처음으로 관직에 임명되었다. 이후 파직과 체직 및 유배 등의 정치적 굴곡이 전혀 없지는 않았으나, 정조 3년(1779)에 병으로 사직할 때까지 비교적 순탄한 길을 걸었으며, 조정의 주요 관직을 두루 거쳤다. 더구나 영조 말년에는 육조(六曹)에서 호조와 형조를 제외한 나머지의 판서직을 모두 역임한 바 있는 실력 있는 정치가였다. 그러나 자신의 문집이 남아있지 않아서 그의 학문적 깊이나 성향을 파악하기가 어렵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영조와 정조 연간에 조중회에 관한 기사가 모두 134건이나 나오는 것으로 보아 학자라기보다는 정치가로서의 삶을 살아간 인물로 판단된다. 정조 6년(1782) 4월에 7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 이듬해에 충헌(忠憲)이라는 시호가 추증되었다.

그의 정치적 여정 중에서 주목할 만한 것으로는 사은겸동지사(謝恩兼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임명된 일이다. 그는 영조 27년(1751) 11월 7일에 사은겸동지사의 일원으로 연경으로 떠나 이듬해 4월에 돌아오게 되는데, 그의 나이 만 40세 때의 일이다. 조중회는 사신으로 임명되어 연행의 길을 떠나기 전에 33인이라는 적지 않는 지인들로부터 석별의 정을 담은 전별시문을 받게 된다.
전별시첩」은 1751년(영조 27)에 사은겸동지사의 서장관으로 연행을 떠나는 조중회를 송별하는 33인의 시문을 모아 엮은 책이다. ‘전별’의 사전적 의미는 ‘잔치를 베풀어 작별함’의 뜻이니 전별시란 작별을 위한 잔치 석상에서 석별의 정을 담아 지은 시를 말하는 것이다. 「전별시첩」에 실린 시문들은 바로 연행을 떠나기 직전인 그해 10월 말과 11월 초에 쓰여진 것이다.

조선에서 중국으로 파견되는 사신들은 본래 신라와 당나라간의 교류를 통하여 일찍이 개척된 해로로 통행하였다. 즉 황해도의 풍천이나 평안도의 선주에서 배를 타고 황해도를 건너 산동성의 등주로(登州路)를 통해 북경에 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15세기에 접어들면서 연행 노정은 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너 요동지방과 산해관을 거쳐 북경에 이르는 육로가 정착되었다. 19세기 후반에 쓰여진 것으로 보이는 「연행노정기(燕行路程記)」에는 이러한 육로의 연행 길이가 총 3,069리에 달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성에서 의주까지 1,050리, 의주에서 책문까지 120리, 책문에서 심양까지 445리, 심양에서 산해관까지 787리, 산해관에서 황성(皇城)까지 667리로, 총거리가 3,069리가 된다.

지금의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대략 1,200km 정도가 된다. 영조 41∼42년(1765∼1766)의 연행기록인 홍대용의 「을병연행록」을 보면, 연행사가 11월 2일에 한성을 출발하여 다음달 27일에 북경에 도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북경에 들어가는 데만 55일이 소요되었고, 하루 평균 59리(22.3km)를 이동한 셈이 된다.
육로의 연행노정은 우리나라의 북부지방을 거쳐 산동에서는 청석령(靑石嶺)․회녕령(會寧嶺)․소석령(小石嶺) 등의 높은 고개를 넘어야 하고, 압록강을 건넌 뒤에도 팔도하(八道河)와 태자하(太子河) 등의 큰 강을 건너야 하는 결코 순탄치 않은 길이었다. 당시에 말과 수레 및 도보에 의존하는 교통수단으로는 대단히 고단하고 위험한 길이었으며, 특히 음력 동짓달에 출발하는 동지사의 경우는 북경(연경)에 이르기까지 한겨울의 추위와 싸워야 했으므로 더욱 험난한 여정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 말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연행의 과정을 일기형식으로 작성한 각종 연행록이 현재 수백 종 전래되고 있다. 이들 연행록에는 우리나라의 사신들이 중국의 수도에 가서 그들이 해낸 일, 본 것과 들은 것, 느낀 것, 준 것과 받은 것, 체험한 일 등을 매우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연행록의 기사 중에서 연행 중에 겪은 어려움은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연행노정의 멀고 험난함과 함께 숙소의 불편함, 허술한 의복, 입에 맞지 않는 음식과 물 등도 연행의 어려움을 가중시켰다. 이러한 환경적 요인뿐만 아니라 조공국(朝貢國)의 사신으로서 겪어야 했던 수모와 심적 부담감도 적지 않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실제로 중국 측의 관리로부터 업신여김을 받거나 조선의 사신을 변방의 몽고와 같이 취급하여 대접한 사례가 각종 연행록에는 여러 군데 기록되어 있다.
연행은 대개 5개월 정도 뒤에는 다시 돌아와 헤어졌던 사람들을 만날 수 있게 되는데, 이와 같은 험난한 여정 때문에 먼 지방으로의 부임과도 같은 전별연이 베풀어져 석별의 정을 나눈 것으로 여겨진다.

전별시첩」에는 시문을 읽을 수 없는 마지막 장을 제외하고 모두 32장의 시문이 수록되어 있다. 이를 형식별로 나누어 보면, 7언시가 20장, 오언시가 4장, 문장이 8장이다. 이들 시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을 골라 내용을 소개한다.

남쪽 고을에도 눈바람부니 걱정되어 잠못이루는데
南城風雪耿無眠

가만히 셈해보니 살져 누린내 난지가 백년도 지났네.
黙筭腥膻過百年

진중하게 수레와 말을 몰아도 늦지는 말아야 하니
珍重使車驅莫緩

우두커니 서서 중원소식 돌아와 전해주길 기다리네.
中原消息竚歸傳

이것은 맨 첫 장에 수록된 목곡(牧谷) 이기진(李箕鎭)의 시이다. 이 시의 작가인 이기진은 조중회가 여행을 떠나기 2년 전 같은 계절에 동지사로 중국을 다녀온 사람이다. 험난한 여정과 한겨울의 추위를 이미 경험한 바 있는 그로서 아끼는 후배에 대한 걱정과 배려를 시에 담고 있다. 그러나 단순한 걱정뿐만 아니라, 신중하고도 조심스럽게 연행사절을 이끌되 너무 늦게 움직여 북경에 도착하는데 차질을 빚어서도 안된다는 충고도 잊지 않고 있다. 또한 마지막 구절에서는 무사히 연행에서 돌아와 재회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마계풀 자라나는 추운 겨울에 그대는 수레를 이끌고
薊野寒生學士車

눈 내린 아침에 의관을 갖추고 오랑캐에게 절을 하네.
朝衣推雪拜穹廬

옥하관의 밤을 밝히는 외로운 등불
玉河館裡孤燈夜

문득 예전에 대궐에서 올린 상소문이 생각나네.
應憶天門舊上書

이것은 병조판서 직을 수행하고 있던 진암(晉庵) 이천보(李天輔)의 시이다.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건국한지 9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이천보는 청의 조정을 오랑캐라고 표현하여 명나라를 흠모하고 북방 민족이 건국한 청나라에는 굴복하지 않겠다는 속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공문서가 아닌 사적인 시문이나 서간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여릉의 송백에 저녁 구름이 얽히고
驪陵松柏暮雲縈

천추에 남은 한이 가슴에 맺혀 평온하지 못하네.
遺恨千秋鬱未平

해마다 가죽과 비단을 실고 헛되이 달려가 절하니
皮弊年年空走拜

험한 일하는 사신들은 어느 곳에 있는지 알 수 없네.
不知何處有荊卿

이것은 조중회와 나아가 동갑인 녹문(鹿門) 임성주(任聖周)의 시이다. 오랑캐가 세운 청나라에 매년 조공을 바쳐야 하는 못마땅함을 노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연행을 떠나는 사람에게 주는 격려나 안부보다는 작가 자신이 그간 품어왔던 심정을 토로하는 듯한 내용이다.
전별시의 내용은 주로 험난한 여정을 출발하는 사신에게 용기를 가지라는 격려의 내용, 조선의 사신으로서 갖추어야 할 자세를 충고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한 북방의 오랑캐가 세운 청나라에 조공을 바쳐야하는 데에 대한 불만을 표현한 내용이 적지 않게 보인다. 이로써 명나라를 흠모하고 병자호란으로 당했던 굴욕이 오랜 원한이 되어 당시까지도 선비들의 가슴에 남아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영조실록」, 「정조실록」, 「조중회 贐行 <餞別詩帖>에 관한 연구」(김동환, 「서지학연구」45, 서지학회, 2010)

이기경(李基敬)


이기경(李基敬)                                                              PDF Download

1713년(숙종 39)∼1787년(정조 11) 조선후기의 문신이다.

이기경의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백심(伯心), 호는 목산(木山)이다. 아버지는 참봉 이익열(李翊烈)이고 어머니는 오대성(吳大成)의 딸이다. 1713년 1월 11일 나주 도림촌의 외가에서 태어났다. 50세 무렵 벼슬에 물러나 전주 오목대 아래에서 살며 후학을 양성하였기 때문에 호를 ‘목산’이라 하였다. 아버지는 자식의 성공을 위해 매일 50편의 시를 짓도록 명하였다고 한다. 1726년 이유(李瑜, 1690∼1752)가 전라도관찰사로 부임하여 호남 선비들을 상대로 백일장을 베풀었을 때, 이기경은 14세의 나이로 백일장에 나아가 모든 부문에서 장원하여 명성을 크게 떨쳤다.

그의 집안은 전주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호남의 명문가였다. 이기경은 20대 초까지 향리에서 학문을 탐구하다가, 한양으로 상경하여 도암 이재(李縡, 1680∼1746)의 문하에 나아가 학문을 익혔다. 과거에 급제한 이후에는 크고 작은 벼슬을 역임하면서 그 소임을 다하고자 일기를 쓰며 자신을 성찰하였다. 특히 언관(言官)으로 있을 때에는 진솔하게 올린 상소가 너무 과격하다고 하여 유배되기도 하였다.

이기경은 50세에 벼슬에서 물러나 전주 오목대(梧木臺) 아래에 거주하며 성리학을 탐구하는가 하면, 인근의 학자들과 담론을 나누면서 강학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동문인 순창의 양응수(楊應秀, 1700∼1767)와 고창의 황윤석(黃胤錫, 1729∼1791) 등 여러 학자들과의 학문적 교류는 관료생활로 탐구하지 못한 성리사상을 면밀하게 고찰하는 계기가 되었다.
홍직필(洪直弼, 1776∼1852)이

“호남의 학문은 김인후(金麟厚)와 기대승(奇大升)에게서 연유하여 박광일(朴光日)과 이기경에 이르렀다”

라고 한 것을 보면, 이기경의 학문은 호남을 대표한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영조가 벼슬에 나아가기를 어려워하고 향리에 물러나기를 쉽게 여긴 사람이라고 할 정도로 그의 진퇴관이 분명하였으며, 관직에 있을 때에는 소신이 남달라 영조가 지극히 총애하였다.

1759년(영조 35) 2월에 영조는 이기경을 호조참의에 제수하면서

“네가 제수하지 아니하면 누가 능히 하겠는가”

라고 하였으니, 영조의 신임이 두터웠음을 알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그에 대한 기사가 총 69차례 나온다. 이를 보면 이기경은 그저 전주지역만의 인물이 아니라 중앙무대에서 크게 활약한 관료이며 학자였음을 알 수 있다.

1779년(정조 3) 2월에는 영조의 탕평책을 가장 반대하였던 사람 중의 하나인 홍계희(洪啓禧)와의 친분이 두텁다는 이유로 함경도로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이정유서(二程遺書)」를 분류하는 등 성리학을 탐구하였으며, 「해상단방(海上單方)」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해상단방」은 집안에 처할 때 자세, 교제할 때 마음가짐, 그리고 벼슬에 나아가 해야 할 역할 등을 옛 성현들의 글을 인용하여 저술한 것이다. 1785년 73세 때에는 스승 이재의 「도암예설(陶庵禮說)」을 교정하였으며, 1787년 12월에 유배지에서 삶을 마감하였다. 그의 아들 이덕감이 상소하여 부친의 원통함을 호소하니 정조는 1788년(정조 12) 9월에 이기경의 죄를 씻어주었다. 이후 인봉소원(麟峯書院)에 배향되었고 유집으로 「목산고(木山藁)」가 전한다.

그는 관리자로 벼슬에 있을 때나 죄인으로 유배지에 있을 때 줄곧 일기를 썼다. 이러한 일기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관리자로 있을 때에는 책임의식을 다하고자 하는 것이었고 죄인의 신분으로 있을 때에는 자신에 대한 성찰의식을 갖는 것이었다. 생원 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면서 쓴 「취정일기(就正日記)」를 시작으로, 1746년(영조 22) 8월에 평안도의 태천현감이 되어 쓴 「태주일록(泰州日錄)」, 1755년(영조 31) 5월 세자시강원 필선이 되어 쓴 「서연일기(書筵日記)」, 1765년 3월에 충청도 동쪽으로 유람하면서 쓴 「동유일기(東遊日記)」 등이 있다. 이러한 일기는 이기경의 개인적 생활 및 소회 그리고 그 당시 사회상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여기에서 1755년(영조 31) 7월에 동지사서장관에 임명되었을 때 쓴 「음빙행정역(飮氷行程曆)」을 소개하고자 한다. 「음빙행정역」은 1755년 11월부터 다음해 2월까지의 청나라 북경을 연행한 일기이다. ‘음빙’이란 ‘얼음을 마신다’는 뜻으로 추운 지방에 간다는 의미이다. 즉 동지사서장관으로 서울을 출발하여 북경(연경)에 이르기까지의 여정, 북경 체류 기간 중의 활동, 다시 북경에서 귀국할 때의 여정에서 보고 들은 풍물과 체험 내용을 일기로 쓴 기행문이다.

일기는 청나라로 출발하기 일주일 전인 11월 3일부터 시작된다. 3일에는 여행 경비에 충당할 예산을 신청하는 문제로 국왕을 면대한다. 4일에는 의정부에서 외교문서의 오류를 확인하는 등 연행에 필요한 각종 사항을 재차 점검한다. 이후 일행은 11월 9일에 서울을 출발하여 개성(開城)에 도착, 이어서 평산(平山)․황주(黃州)․평양․의주(義州)를 거쳐 압록강을 건너 심양(瀋陽)에 도착한다. 그리고 사신 일행은 12월 29일에 청나라의 예부(禮部)를 방문하여 외교문서를 전달하고 상견례를 나눈다. 일행은 북경의 여러 지역을 관광하거나 청조에서 베푸는 다양한 의례행사에 참석한다. 이후 일행은 1756년(영조 32) 2월 16일에 북경에서의 모든 일정을 마치고 귀국길에 오른다. 4월 4일에 서울에 도착하고, 4월 5일에 국왕을 알현하여 업무를 보고한다.

이기경의 「음빙행정역」에는 당시 청 왕조의 정치․군사적 동향이나 북경을 중심으로 한 중국 사회의 여러 모습들이 잘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연행록인 「음빙행정역」에는 도처에 명나라에 대한 추모와 청 왕조에 대한 반감이 나타나 있다. 이는 같은 노론 낙론계 북학파들의 태도와 크게 다른 점이다. 홍대용․박지원․박제가 등의 북학파들이 청나라의 발달한 산업과 문화를 열심히 배워 도입하고자 한데 비하여, 이기경은 청나라에 대해 태생적인 거부감을 보였다. 그는 심지어 자신이 청나라의 사신으로 가서 황제에게 절했던 일을 훗날에 회고하면서

“지금까지도 오랑캐에게 절했던 일을 마음속으로 수치스럽게 여긴다”

고 토로하였다.

이기영이 연행을 다녀온 1755년 당시는 청나라가 강희(康熙)․옹정(擁正)의 치세를 지나면서 정치․사회가 안정되고 경제와 문화가 날로 번창하던 전성시대였다. 이러한 청 왕조의 번성기에 북경 일대를 여행한 이기경은 그 번화한 도시와 풍부한 물산 그리고 강성한 군대에 놀라기는 하였으나, 경멸과 혐오의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리고 이미 멸망한지 100년이 지난 명 왕조의 그림자를 찾는 일에 연연해하였다.
이기경은 청의 쇠망과 한족 왕조의 부흥 징조를 비과학적인 자연현상에서 찾기도 하였다. 1755년 12월 26일 옥전(玉田) 근방의 고수촌(枯樹村)을 지나면서 난세(亂世)에는 잎이 말라 없어지고 치세(治世)에는 다시 잎이 싹튼다는 영험한 ‘고수’의 가지를 꺾어보았다. 그 마른 가지에 물기와 생가가 있는 것을 보고 나서 그는

“이 고수에 곧 잎이 싹틀 것이며, 청조가 망하고 정통 한족이 일어날 것이다”

고 예측하였다.

북경 주변에 많이 건립되었던 황제의 호화로운 별궁이나 행궁(行宮) 및 불우(佛宇)를 보면서 이것이 국가 재정을 파탄시키고 민원을 야기하는 원인이라고 지적하였다. 또한 당시 청조는 재정이 고갈되어 상인들에게 가혹하게 세금을 징수하고, 이 때문에 파산하여 실업자가 되는 일이 많다는 등의 정보들에 매우 주목한다. 이기경은 건릉황제의 일탈적 행태와 각 지역의 반란, 재정 고갈, 민심 이반 등 각종 모순을 청 왕조가 몰락하는 징조로 파악하였다. 어떤 측면에서 그는 청 왕조의 멸망을 바라면서 그 징조를 찾아내는데 몰두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은 근본적으로 그의 중화주의와 화이관(華夷觀) 및 반청(反淸) 감정에 기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조선후기 존주론(尊周論)의 창시자였던 송시열의 학맥을 이은 이재의 촉망받던 제자였기 때문에 이러한 인식을 벗어날 수 없었다. 이러한 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그 다음 세대인 홍대용․박지원․박제가 등 노론 북학파 학자들에 의해 비로소 극복되고 있지만, 조선후기 지식인들의 정신세계와 의식의 일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참고문헌] 「정조실록」, 「순조실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목산 이기경의 삶과 사상에 대한 일고」(이형성, 「퇴계학논총」18, 퇴계학부산연구원, 2011), 「목산 이기경의 연행록< 飮氷行程曆>」(이영춘, 「한중인문학연구」44, 한중인문학회,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