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중의 사치 풍조를 바꿔야 한다


궁중의 사치 풍조를 바꿔야 한다

 

율곡은 ⌈만언봉사⌋에서 선조 임금에게 절약과 검소를 실천하도록 요구하면서 ‘사치 풍조를 바꿔야 한다(革奢侈之風).’고 요구했다. 여기에서는 그 ‘사치 풍조’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율곡은 왜 사치 풍조를 바꾸자고 했을까?

혁사치지풍(革奢侈之風)’에서 동사로 사용된 ‘혁(革)’자는 ‘개혁하다’, ‘바꾸다’는 뜻 외에도 ‘고치다’는 뜻도 있다. 그러므로 ‘사치 풍조를 고쳐야한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사치 풍조를 고치자는 말은 이미 사치 풍조에 젖어 있다는 뜻이며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율곡은 ⌈만언봉사⌋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오늘날 백성들이 궁핍하고 그들의 재물이 바닥난 것이 너무 심하다. 그러니 공물(貢物)을 경감해 주지 않을 수가 없다. 만약 비용지출을 선대 임금들처럼 하지 않으면, 수입에 맞추어 지출할 수 없게 된다.”

(이종란 역해, ⌈만언봉사⌋, 율곡연구원, 2016년, 173∼174쪽 참고. 이하 같음)

 

율곡은 백성들의 상황이 몹시 궁핍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공물을 경감시켜주자고 한다. 또 비용지출을 더 줄여서 해야 한다고 하였다. 여기서 비용지출이란 당연히 궁정 내부의 비용지출을 말한다. 그는 당시의 심각한 상황을 “사치하고 문란한 풍속이 오늘날보다 심한 적은 없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음식은 배를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려 놓고 서로 과시하기 위한 것이 되었고, 옷은 몸을 가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화려함과 아름다움을 서로 경쟁하기 위한 것이 되어버렸다. 음식 한 상 차리는 비용으로 굶주린 사람의 몇 개월 양식을 마련할 수 있고, 옷 한 벌의 비용이 헐벗고 추위에 떠는 사람 열 명의 옷을 장만할 수 있다.”( ⌈만언봉사⌋)

 

이렇게 음식과 옷의 사치와 낭비는 반드시 궁중에 한한 일은 아니겠으나 율곡의 지적은 궁중 내부를 향한 것 같다. 예를 들면 ‘음식 한 상 차리는 비용’이 굶주린 사람 몇 개월 양식이라고 하고, ‘옷 한 벌의 비용’으로 사람 열 명의 옷을 장만할 수 있다고 하였으니, 그러한 음식과 옷은 궁중의 음식과 옷을 말하는 것이다.

율곡은 이전에 제출한 동호문답에서도 궁중에 진상(進上)하는 공물(貢物), 즉 지방의 특산물이 너무 많다고 이렇게 지적한 바 있다.

 

“요즘 궁중에 올리는 물건은 반드시 모두 궁중에 올리기에 적합한 것은 아니다. 자질구레한 물건도 다 바치려고 바다와 육지에서 생산되는 것을 빠짐없이 긁어모으고 있으나, 임금의 밥상에 올릴 만한 것을 제대로 고른다면 몇 가지가 안 된다. 옛날에 훌륭한 왕(聖王)은 한 사람이 천하를 다스렸지 천하가 한 사람을 받들게 하지 않았다. 궁중에 올리는 물건 하나하나가 모두 바치기에 적합하더라도 그 수를 줄여서 백성들의 힘을 펴게 해줘야 한다. 더구나 급하지도 않은 수요 때문에 백성에 해를 끼쳐서야 되겠는가?”(⌈동호문답⌋)

 

실지로 임금의 필요는 많지 않으나 그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욕심을 내서 지방의 특산물을 모조리 긁어모으고 있는 현실을 비판한 말이다.

율곡은 이러한 발언이 자칫 임금을 받드는 신하의 도리가 아니라는 비판을 초래할 수 있어, 다음과 같이 변호하는 글을 ⌈동호문답⌋에 같이 실었다.

 

“충성스러운 신하는 큰 도리를 가지고 임금을 사랑하지 작은 정성으로 하지 않는다. 만약 나라가 잘 다스려져 편안하고 백성들의 생활이 넉넉하고 인구가 번성하면 우리 임금의 소득도 많아질 것이다. 어찌 자질구레하게 물건이 늘거나 줄어드는 것이 우리 임금에게 손해나 이익이 될 수 있겠는가? 옛날에 순임금이 칠기(漆器)를 만들자 여러 신하들이 다투어 간하였다. 이는 천자의 귀한 몸으로도 칠기를 쓸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면 순임금 시대의 여러 신하들이 그 임금을 사랑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는가? 아니다. 순임금은 천하의 성스러운 임금이 되었고 순임금의 신하들은 천하의 훌륭한 신하가 되었다.”(⌈동호문답⌋)

 

율곡은 ⌈만언봉사⌋에서 궁중의 사치가 백성들의 고통을 초래하는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열 사람이 농사를 지어도 한 사람을 따로 먹여 살리기가 부족한데, 농사짓는 사람은 적고 먹는 사람은 많다. 열 사람이 길쌈을 해도 한 사람의 옷을 따로 마련하기가 부족한데, 길쌈하는 사람은 적고 옷을 입는 사람은 많다. 그러니 무슨 수로 백성이 굶주리고 헐벗어 추위에 떨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만언봉사⌋)

 

농사짓는 사람은 적고 먹는 사람은 많다는 것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무위도식(無爲徒食)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뜻이다. 또 율곡은 길쌈, 즉 옷을 짜는 일이 쉽지 않아 10명이 달려들어 옷을 짜도 한사람 입히기가 힘든데, 옷은 짜지 않으면서 입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그 결과 백성들이 고통스러워한다. 이는 생산하는 사람에 비해 소비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며, 그만큼 궁중의 소비가 극심하다는 뜻이다. 율곡은 임금에게 이렇게 건의했다.

 

“만약 전하부터 먼저 절약과 검소에 힘써 이 병폐를 해결하지 않으신다면, 아무리 형법이 엄하고 명령을 부지런히 내린다 하더라도 도로무익(徒勞無益, 수고롭기만 하고 실익이 없음)이 될 것입니다. 저는 언젠가 한 원로(元老)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성종(成宗)께서 병환으로 누워 계실 때 대신이 문안하러 들어가니, 침실 안에서 덮고 계신 다갈색 명주 이불이 다 해어져 가는데도 새것으로 바꾸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자들은 지금까지도 성종임금을 흠모(欽慕)하는 생각을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만언봉사⌋)

성종(成宗, 1457년∼1495년)은 제9대 왕으로 1469년부터 1494년까지 재위하였다. 선조는 제14대왕으로 1567년부터 1608년까지 재위하였으니 선조보다, 약 100년 전에 임금이었던 인물이다. 그는 유교 사상에 조예가 깊어 초야에 있던 유학자들을 적극 등용하고, 성리학에서 지향하는 왕도정치를 구현하고자 하였다.

율곡은 성종 때의 검소한 생활을 예로 들며 선조에게 절약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도록 부탁하였다. 임금부터 먼저 그렇게 하여 사치스러운 병폐를 해결하지 않으면 아무리 형벌이 엄하고 왕명을 부지런히 내려도 헛수고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결국 율곡이 말한 절약과 검소는 선조 임금 본인에 대해서 하는 말이요, 음식이며, 의복이 너무 사치스럽다는 것은 궁정내부의 생활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율곡은 거기에서 더 나가 구체적으로 궁중에서 어떻게 절약할지 하는 방법을 임금에게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

 

“이 폐단을 개혁하려면 마땅히 대신과 해당 관청에서 궁중에 올리는 물건의 목록을 모두 가져다가 긴요한 것인지 아닌지를 검토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단지 궁중에 올리기에 적절하여 꼭 남겨두어야 하는 것만 취하고, 그 나머지 긴요하지 않은 물건은 모두 없애야 합니다. 비록 궁중에 올리기에 합당한 것일지라도 수량이 너무 많은 것은 또한 그 수량을 줄이도록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주상의 백성을 사랑하는 은혜가 아래까지 미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나라 문왕(文王)이 정당한 것만 올리게 하였던 미덕이 오로지 문왕에게만 해당되지는 않을 것입니다.”(⌈동호문답⌋)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선대 임금들의 비용지출의 규모와 사례를 상고하도록 명하시어, 궁중의 비용지출을 선대 임금들의 옛날 검약하던 제도를 그대로 따르도록 하십시오. 이렇게 조정 안팎에 모범을 보여 민간의 사치 풍습을 고쳐서, 사람들이 성대한 음식상을 차리거나 화려한 옷을 입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도록 만드소서.”(⌈만언봉사⌋)

 

⌈만언봉사⌋의 건의를 보면 우리는 율곡이 당시 궁중의 비용 지출 규모가 앞선 임금들의 시대보다 더 많아졌다고 판단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지출을 앞 시대의 규모로 축소하고 궁중 안팎으로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면 민간에서도 음식상을 성대히 차리지 않고 화려한 옷을 입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율곡은 특히 음식과 의복의 사치를 염두에 두고 있다.

건물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다. 왜 건물의 사치에 대해서 언급이 없었을까?

참고로 임진왜란 때(1592년) 평양에서 한음도정(漢陰都正) 이현(李俔)이 올린 간언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전하께서는 사직이 폐허가 된 것을 통감하시어 즉시 스스로를 탓하는 전교를 내리시고 통렬하게 자책하셔야 합니다. 사치스러운 토목공사, 여러 궁가(宮家)의 침탈행위, 조정이 깨끗하지 못했던 것, 일본에 대한 실책, 상과 벌의 시행이 적합하지 못했던 것, 이단을 숭상하여 믿은 것, 언로가 두절된 것, 아첨하는 궁인과 신하들이 많았던 것, 왕의 개인 금고가 가득 찼던 것, 부역(賦役)이 번거롭고 가혹했던 것 등 갖가지 죄과를 열거하여 …”

 

당시 궁중은 의복과 음식의 사치 외에도 다양한 분야에서 훨씬 더 많은 사치와 낭비가 있었다. 율곡은 아마도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나 상세히 언급은 피한 것 같다.

임금이 절약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사치스러운 풍조를 바꾸도록 요청한 것은 율곡이 백성을 편하게 하는 정치의 방법으로 제시한 것이다. 율곡은 이러한 요청을 하면서 마지막 문장으로 다음과 같이 썼다.

 

“하늘이 내려 준 재물을 아껴서, 백성들의 힘을 펴게 해 주십시오.  (以惜天財, 以舒民力焉)”

 

백성들에게 받은 세금은 하늘이 내려준 것이다. 왜냐하면 통치자(임금이나 대통령)에게 백성은 하늘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 재물을 아껴서 백성들의 힘(民力)을 펼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 ‘서(舒)’라는 한자에는 ‘펴다’, ‘넓히다’, ‘느긋하다’, ‘여유롭다’, ‘쉬다’는 뜻이 담겨 있다.

백성들이 여유롭고 쉬면서, 힘을 축적하고 있었다면 임진왜란 때 왜군이 그렇게 쉽게 쳐들어오지 못했을 것이다. 평소에 궁중에서 음식이며 의복이며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고, 그것을 본 관리들이 너도나도 자기만 생각하는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백성들은 피폐해졌다. 조선은 안에서 무너지고 있었던 것이다.

율곡이 사망하고 8년 뒤, 즉 1592년(선조 25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모두 불타 없어져 버렸다. 그 때 누가 그 궁궐들을 불태웠는지 아직 ‘범인’을 찾지 못하고 있다. 왜군들이라고 하기도 하고, 조선의 백성들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구태여 범인을 찾을 필요가 있을까? 모든 문제는 궁중 안에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선조는 전쟁 후에 경복궁을 복구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전쟁으로 백성이 흩어지고 힘이 빠졌으며, 나라 재정이 무너진 상태에서 가능할 리가 없었다. 그래서 계획을 포기하고 창덕궁만 다시 짓기 시작했다. 당시 주로 머문 곳은 정릉동(지금의 정동, 즉 덕수궁 자리)에 있는 월산대군(月山大君, 1454년∼1488년, 성종의 형)의 집이었다. 그곳을 임시 궁궐(행궁)로 삼아 거처하다 사망했다.

선조가 살던 행궁은 나중에 경운궁(慶運宮)으로 이름이 정해졌는데, 일제가 침략하여 덕수궁(德壽宮)으로 이름을 바꾸고 조선의 마지막 왕인 고종이 살게 하였다. 나라를 빼앗기고 백성을 빼앗긴 왕에게 오래오래 살라고 ‘덕수궁’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이다. 일본에게 이렇게 두 차례의 침략과 치욕을 당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한다. 거기다 또 잊지말아야할 것은 우리 내부의 통치자들이 국민의 세금으로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기고 민심이 이반되면, 나라가 안에서부터 무너진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