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의 수제자,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율곡의 수제자,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조선 중기 이후 지방에서 학문을 연구하면서도 중앙의 정계에서 막후의 실력 행사를 했던 인물 혹은 학자군을 지칭하는 말로 ‘산림(山林)’이란 용어가 있다. ‘산림’은 학문적 능력을 갖추고 지방에서 후학들을 양성하면서 중앙 정계에 발탁되어 정치적 판단에 큰 영향을 미친 학자들을 가리킨다.

조선시대 고위 관료로서 관직에 참여하는 길은 과거에 합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16세기 사림파의 성장이 활발해진 이후 학문적인 능력을 바탕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길이 열렸다. 16세기 말 성혼(成渾), 정인홍(鄭仁弘) 등이 과거를 통하지 않고 조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기원이 되었다. 19세기의 학자 황현(黃玹)은 『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 광해군 시대에 활약한 정인홍을 산림의 연원으로 파악했다.

1623년 인조반정을 성공시킨 서인 세력은

“국혼을 놓치지 말고 산림을 높이 등용할 것
[勿失國婚 崇用山林]”

을 표방하면서 특히 산림의 지지를 얻는 데 힘을 기울였다. 인조와 서인 세력은 성균관에 산림직(山林職)인 사업(司業, 종4품)을 설치하고 신망 받는 학자를 안배하기 시작했다. 과거를 통하지 않고 학문과 덕행으로 등용된 이들, 이른바 산림의 본격적인 등장이었다.

산림은 공자의 학문 곧 도통(道統)을 잇고, 세도(世道: 세상의 도리)를 실현하는 인물로 간주되었다. 적어도 학문이나 사상 방면에서는 국왕조차 압도하는 권위가 있었다. 산림의 중용은 유학의 이상을 실현하려 했던 조선 정치의 또 하나의 분수령이었다.

김장생과 그의 아들 김집, 제자 송시열과 송준길은 모두 서인 산림으로, 17세기 조선의 정계와 학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신라부터 조선까지의 수많은 유학자 가운데 단 18명만이 배향된 문묘에 그들이 모두 올라있음은 그 학파의 영향력을 잘 보여준다. 산림은 이전에도 있었지만, 산림정치의 본격화는 인조대에 이루어졌으며 그 선두에 김장생이 있었다. 그럼 율곡의 수제자로 잘 알려진 김장생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김장생은 1548년(명종 3)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예조참판까지 지냈던 김계휘였고 모친은 우참찬을 지낸 신영의 딸이었다. 김장생의 5대조 김국광은 세조의 즉위를 도운 공신으로 성종대에 좌의정까지 역임했으며 광산부원군에 봉해진 대표적인 훈구 재상이었다. 그의 후손은 김장생의 부친 김계휘 대에 이르러 사림이 되었다. 김계휘는 서인인 심의겸․기대승․이이․성혼․정철 등과 절친했다.

김장생은 13세에 송익필에게 배웠다. 송익필은 성리학과 문장에 뛰어났는데 특히 예학(禮學)에 조예가 깊어, 학문이 고명했던 율곡과 성혼도 예에 관한 문제는 그에게 물었을 정도로 대가였다. 그러나 서얼이었던 부친 송사련이 안당 부자를 고변하여 멸문시킨 신사무옥 때문에 송익필은 사대부, 특히 동인에게 질시받았다. 그 후 그는 동인의 사주를 받은 안씨 일가의 제소에 따라 환천(還賤: 양민으로 해방된 노비가 다시 천인이 됨)되었다가, 기축옥사로 신분을 회복하기도 하였다. 이후 송익필은 유배와 사면을 거듭하다 말년에는 불우하게 여생을 마쳤다.

김장생이 율곡을 찾아 배움을 청했을 때 나이가 스물이었다. 율곡을 만나고서야 비로소 학문의 길에 들어섰다고 여러 차례 회고했을 정도로 그의 영향은 컸다. 김장생이 30세가 되었을 때, 율곡은 송익필에게 서찰을 보내어 더 가르칠 게 없다 했으니, 그즈음 학문의 일가를 이루었던 모양이다. 33세에는 성혼을 찾아 학문을 배웠다. 배움이 늦었던 이유는 율곡에게 받은 영향이 워낙 컸기 때문이기도 했다. 두 스승에서와 마찬가지로 성혼의 풍모와 논의에도 심히 감복했다. 이로서 김장생은 서인 학문의 기초를 세운 3인의 학문을 고루 섭렵하게 된 것이다.

뛰어난 스승들을 두루 섭렵했으니 참 명민했을 법하건만, 김장생은 스스로 ‘굼뜨고 미련하다[魯鈍]’고 자주 자평할 정도로 재주가 없었다. ‘문장이 졸렬하고 식견이 꽉 막혔다.’는 다소 조롱 섞인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의 문집 『사계유고(沙溪遺稿)』에 시가 단 세 수만 실려 있을 뿐이고, 그를 기리는 글들에 문장에 대한 의례적인 칭찬이 없는 것을 보면 확실히 문장에 대한 재주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문장이 졸렬하고 식견이 막혔다는 비난을 뒤집어 보면 약삭빠르지 않고 허식을 부리지 않는다는 말일 수도 있다. 그는 스승인 율곡이나 송익필처럼 천재성을 발휘하지 못했지만, 대신 꾸준한 독서로 단점을 보완해 나갔다. 송익필이 『근사록』을 가르칠 때, 남들도 자기처럼 알겠거니 하며 한 번 읽고 넘어가 버리자, 멍해진 김장생은 읽고 생각하고, 생각하고 읽는 일을 자나 깨나 반복했다고 한다. 성실한 독서만큼은 따를 자가 없으리라고 자부했으니, 하늘은 명민함 대신에 돈후함과 성실을 내려준 셈이었다.

김장생은 일찍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했다. 30대에 경학(經學: 경전의 고증과 해석)과 예학에 일가를 이루어 이름을 날렸고 그로 인해 천거되어 관직에도 올랐다. 그는 과거 출신이 아니었으므로 요직과는 거리가 먼 한직을 전전했다. 임진왜란 때 맏아들 부부와 손자가 왜군에게 죽임을 당하는 불행을 겪기도 했지만 그래도 생활은 평탄한 편이었다. 율곡의 수제자로서 명성은 높았지만, 관인으로서의 극적인 장면도 없었고 지방에 은둔하는 고고함도 없었다.

이처럼 착실한 학인 김장생이 서인의 산림으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계기는 생애 최대의 시련 때문이었다. 1613년(광해군 5)의 계축옥사에 그의 서제(庶弟) 두 명이 연좌되어 죽임을 당했다. 당시 광해군이 김장생의 연루 여부를 탐문했을 정도로 그는 주목 대상이었다. 사건 이후 그는 선대 이래 연고가 있던 충청도 연산(현재 논산군 연산면)에 내려가 두문불출하며 제자를 교육했다. 이후 김장생은 인조반정이 일어날 때까지 10여 년간 학문 연마에 몰두했고, 강학을 통해 수많은 문인을 길러냈다.

김장생이 생전에 거둔 문인은 아들 김집을 비롯해 송시열, 송준길, 이유태, 강석기, 장유, 정홍명, 조익, 윤순거, 임숙영, 최명길, 김류, 이시백, 이경석 등이었다. 아들 김집도 문하이지만, 문인들 사이에는 김장생을 ‘노선생’, 아들을 ‘선생’으로 불렀다고 한다. 문인 중에 일부는 인조반정을 주도해 국가 지도층이 되었다. 또 다른 일부, 특히 연산 강학 때에 형성한 그룹은 향후 서인의 체질을 바꾸는 역할을 했다.

선조 대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분화할 무렵 서인은 동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노장층이었고 관료적 성향이 짙었으므로 학문을 매개로 한 결속력은 미약했다. 서인 학문의 원조는, 동인의 원조인 서경덕․이황․조식 등에 비해 한 세대 뒤인, 율곡과 성혼이었다. 생전의 율곡은 사림의 분열에 반대하며 동인과 서인의 고른 등용을 위해 노력했지만, 사후 자연스럽게 서인학파의 대표자가 되었다.

그 후 도통을 정립하는 과정에서 서인 내에서는 시간이 흐르면서 율곡과 성혼의 행적을 두고 약간의 알력이 싹트기 시작했다. 김장생은 성혼이 임진왜란 때 선조에게 대일(對日) 유화책을 건의했던 일을 들어 비판한 적이 있었다. 당시에 별다른 의미를 둔 발언은 아니었지만, 훗날 노론과 소론이 각기 율곡과 성혼의 학맥으로 도통을 정할 때에 노론 측에서는 이 발언을 들어 율곡-김장생으로 이어지는 도통을 정립했다. 결과적으로 김장생은 서인-노론으로 이어지는 학맥의 정체성을 형성시킨 산파가 된 셈이었고, 후대에 노론에서는 이이-김장생-송시열로 도통을 정리하게 되었다.

유학의 여러 분야 가운데 김장생이 가장 뚜렷한 업적을 남긴 분야는 예학이었다. 예학은 치밀한 고증과 성실함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일가를 이루기 힘든 분야였고, 그런 점에서 김장생의 성실함은 예학 탐구에 잘 맞는 기질이었다. 김장생이 이룬 예학은 훗날 최고의 평가를 받았다. 19세기 실학자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덕치(德治)는 조광조, 도학(道學)은 이황, 학문은 이이, 의리는 송시열, 그리고 예학에서는 김장생을 동국제1인으로 꼽을 정도였다.

김장생은 스승인 이이와 성혼을 위해 서원을 세우고 1만 8천여 자에 달하는 이이의 행장을 짓기도 하였다. 스승 이이가 시작한 『소학집주』를 1601년에 완성시켜 발문을 붙였는데, 『소학』에 대한 관심은 예학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