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독서광, 율곡과 이덕무의 책읽기


조선시대 독서광, 율곡과 이덕무의 책읽기

 

한 권의 책을 교감하고 소통하며 읽는 것은 인문학의 시작이다. 특히 수백 년, 수천 년 동안 지속되어온 삶과 죽음, 전쟁과 평화, 사랑과 증오 같은 인간의 영원한 숙제를 담고 있는 고전 읽기야 말로 더욱 그렇다. 오늘날 우리는 고전을 통해 성현들을 만난다. 그리고 책을 읽는 동안 저자가 어떻게 생겼으며 어떠한 인물이었을까 상상한다. 그러다보면 미처 생각하지 못했거나 현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는 세계까지도 엿볼 수 있게 된다. 새로운 세계를 만나는 것이다.

조선시대 유학자들 가운데는 뛰어난 독서광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독서광이 바로 율곡이다. 율곡은 평생을 자신의 말대로 ‘나랏일이 아니면 독서하고, 독서하지 않으면 나랏일을 하는 삶’을 살았다. 평생을 정사와 독서, 오로지 이 두 가지를 위해 산 것이다.

율곡은 정계 은퇴를 만류하는 박순에게 책 한 권 제대로 읽을 수 없는 관직 생활을 한탄할 만큼 독서광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율곡의 일상생활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성혼의 증언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지난날 그믐에 율곡 마을에 있는 숙헌(叔獻: 율곡의 자)을 방문했다. 그는 책상 위에 『시전(詩傳)』국풍(國風)을 펼쳐놓고 있었다. 내가

“금년에는 어느 정도 책을 읽었는가?”

하고 물었더니, 숙헌은

“올해에 『논어』『맹자』『대학』『중용』의 사서를 3번씩 세 차례 읽었으니, 모두 계산하면 9번이네. 이제 또다시 『시전』을 읽기 시작해서 왕풍(王風)에 이르렀네.”

라고 대답했다.
이 말을 듣고 나서 나도 모르게 감탄하고 또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나는 항상 한가할 뿐만 아니라 집을 수리하고, 집안을 다스리며, 손님을 맞이하느라 늘 바쁜 숙헌보다 훨씬 일이 적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권의 책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있다. 이처럼 생활하면서 도리에 대한 소견(所見)이 있기를 바란다면 뒷걸음치면서 앞으로 나아가기를 바라는 어리석음과 다를 바 없다. 비록 고질병 때문에 스스로 독서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진실로 지극한 마음으로 좋아한다면 이와 같지는 않을 것이다. 길게 탄식해보지만 후회가 밀려온다. 다만 앞으로 다소 오래 살아서 행여나 오늘의 뜻을 이룰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성혼, 『우계집 속집』<잡기(雜記)>

 

율곡은 독서란 죽어야 비로소 멈출 수 있는 평생의 과업이요 의무라고 생각했다. 일하지 않으면 독서하고 독서하지 않으면 일하는 것, 그것이 바로 율곡이 생각한 선비의 삶이었다.

“공부는 늦춰서도 안 되고 성급하게 해서도 안 되며 죽은 뒤에야 끝나는 것이다. 만약 공부의 효과를 빨리 얻으려고 한다면 이 또한 이익을 탐하는 마음이다. 공부는 늦추지도 않고, 서두르지도 않으면서, 평생 동안 꾸준히 해나가야지 그렇게 하지 않고 탐욕을 부린다면 부모가 물려준 이 몸이 형벌을 받고 치욕을 당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이라고 할 수 없다.”

(『율곡전서』자경문)

라고 까지 말하고 있다. 자못 비장함마저 느껴지는 구절이다.

 

율곡 못지않게 독서광이었던 인물은 조선후기 정조 때의 북학파 문인 이덕무이다. 그는 자신의 쓴 자서전 『간서치전(看書痴傳)』에서 스스로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남산 아래 사는 어리석은 사람이 있었다. 어눌하여 말을 잘하지 못하고, 성품은 게으르고 졸렬해 세상 물정을 잘 알지 못했으며, 바둑이나 장기 따위는 더더욱 몰랐다. 남들이 욕을 해도 따지지 않고, 칭찬해도 뻐기지 않았으며, 오로지 책만 보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아 추위나 더위, 배고픔이나 아픈 것도 전연 알지 못했다. 어렸을 때부터 스물한 살이 되기까지 하루도 손에서 고서를 놓지 않았다. 그의 방은 매우 작았으나 동쪽, 서쪽, 남쪽으로 창이 있어 볕이 드는 방향을 따라 밝은 곳에서 책을 보았다.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책을 보면 문득 기뻐서 웃었는데, 집안 사람들은 그가 웃는 것을 보고 기이한 책을 구한 줄 알았다. 그는 두보의 오언율시를 특히 좋아해서 중얼거리는 것이 마치 병자의 앓는 소리와도 같았다. 그러다 심오한 뜻을 깨치면 너무 기쁜 나머지 일어나 방 안을 빙빙 돌곤 했는데, 그 소리가 마치 까마귀가 우는 것 같았다. 때로는 아무 소리도 없이 조용하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한 곳을 응시하기도 하고,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혼잣말을 중얼거리기도 했다. 사람들이 그를 ‘간서치(看書痴)’라 부른데도 그냥 기쁘게 받아들일 뿐이었다.”

간서치전(看書痴傳)』

 

간서치란 책만 보는 바보라는 뜻이다. 이덕무는 평생 읽은 책이 2만 권이 넘었고, 베껴 쓴 책이 수백 권에 이를 정도로 책 읽기를 좋아한 선비였다. 그래서 얻은 별명이 ‘책만 보는 바보’, ‘간서치’였다.

그는 집안이 가난했을 뿐 아니라 서얼 출신이었다. 책을 읽는다 한들 벼슬길에 오를 수 없는 신분이었다. 그는 책을 사 볼 여유가 없어 남의 책을 빌려 보았고, 책을 읽은 뒤에는 반드시 그 책을 베껴 썼다. 사람들은 비록 몰래 감추어둔 책이라고 할지라도 그에게 빌려주기를 꺼려하지 않으면서,

“이군(이덕무)은 진실로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라고 말하였다. 그를 좋아하는 사람은 책을 빌려달라고 부탁하기도 전에 먼저 스스로 빌려주면서

“이군의 눈을 거치지 않은 책이 있다면, 그 책을 무엇에 쓸 것인가?”

라고 말하였다.

 

지난 경진년과 신사년 겨울의 일이다. 내가 거처하던 작은 띠집이 몹시 추웠다. 입김을 불면 성에가 되곤 해, 이불깃에서 버석버석하는 소리가 났다. 내 게으른 성품으로도 한밤중에 일어나 창졸간에 『한서』한 질을 가지고 이불 위에 죽 늘어놓아, 조금이나마 추위의 위세를 누그러뜨렸다. 간밤에도 집 서북편 모서리로 매서운 바람이 쏘듯이 들어와 등불이 몹시 다급하게 흔들렸다. 한동안 생각하다가 『논어』한 권을 뽑아 세워 막고는 혼자서 그 경제의 수단을 뽐내었다.

(을유년 겨울 11월 28일에 적다)

 

그는 초가집이 통째로 얼어붙는 엄동설한에 『한서』이불과 『논어』병풍으로 겨우 얼어 죽는 것을 면할 정도로 몹시 가난한 선비였지만, 그는 현실의 삶에 갇혀 살지 않고 책 속에서 자신의 삶을 끝없이 확장시켰다. 책으로 벗을 만나고 날마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다. 그는 나이 사십이 넘어서야 정조가 만든 규장각의 검서원으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가 평생 읽은 2만 권의 책에서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그가 지은 책 『청장관전서』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백과전서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