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석(金載石)1895~1971 – (제2편)


김재석(金載石)-(제2편)                                           PDF Download

 

1895(고종 32)~1971. 근대의 학자이다.

관은 울산(蔚山). 자는 경담(景潭), 호는 월담(月潭)이다. 그는 하서 김인후(金麟厚)의 후손이자 간재 전우(田愚)의 문인으로 순창과 전주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재야 유림이었다. 김인후로 이어지는 가학 전통과 간재의 학문을 계승하려는 그의 노력은 유학자적 면모를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는 당시의 엄혹한 역사 현실을 무시하거나 도피하지 않고 항일의병활동에 참여함으로써 유학적 가치를 실현하려는 지사적 유림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김재석은 타고난 자질이 비범하고 매우 총명했다고 전해진다. 8세의 어린 나이에 부친의 명에 따라 ‘구름’을 소재로 시를 지었는데 그 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구름 덮이니 하늘은 낮아지는 듯
雲浮天似低

그 구름 걷히니 다시 높아지네.
雲散天還高

본체는 항시 변함없으니
本體恒無變

본성을 회복하는 일 힘들다 마오.
復初莫說勞

 

첫 구절의 ‘구름 낀 하늘’과 둘째 구절의 ‘구름 걷힌 하늘’에 대한 묘사는 사실적이고 평담한 맛이지만, ‘구름 낀 하늘’과 ‘구름 걷힌 하늘’이 셋째 구절의 ‘본체’, 넷째 구절의 ‘복초’와 연결됨으로써 함축적이고 의미있는 도풍의 면모를 보이고 있다.

여기서는 그의 「월담유고(月潭遺稿)」에 수록되어 있는 「자경십도(自警十圖)」의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자경십도」는 「월담유고」권3, 「잡저」에 수록되어 있다. 김재석이 간재 전우의 학문을 계승한 성과는 「자경십도」에 담겨있다. 「자경십도」는 간재의 가르침에 따라 ‘소심존성(小心尊性)’의 의미를 밝힌 것으로, 모두 10폭의 그림(圖)과 설명(說)으로 구성되어 있다.

자경십도」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제1 사일(事一), 제2 삼외(三猥), 제3 삼요(三要), 제4 사극(四克)은 존심지방(存心之方) 즉 공부론을 밝힌 것이고, 제5 인체(仁體), 제6 지경(持敬), 제7 서학(恕學), 제8 위미(危微) 역시 ‘존심지방’의 의미를 미루어 밝힌 것이므로 공부론의 확장이며, 제9 총도(總圖), 제10 체용(體用)은 작가 자신의 생각을 덧붙인 것이다. 그러므로 엄격한 의미에서 제1부터 제8까지는 김재석 자신의 독창적 학문과 사유의 산물이라고 보기보다는 간재의 가르침을 도설로 풀어 설명한 것이고, 제9는 간재의 가르침에 김재석이 보충한 설명을 덧붙인 것이다. 제10은 김재석 스스로 지어 도합 십도(十圖)를 구성한 것이다.

「자경십도」의 내용은 대부분 ‘소심존성’의 성리학적 의미를 깊이 있고 체계적으로 발명하기 보다는 일상생활에서 유학자들이 견지해야 할 공부를 비교적 평이하게 설명하고 있다. 「자경십도」는 아마도 간재의 문집 곳곳에 보이는 ‘모모자경(某某自警)’이라는 글을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흔적을 간재의 문집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예컨대 제1 사일도(事一圖)의 내용은 「간재사고(艮齋私稿)」권32에 보이는 「원적사자경(圓寂寺自警)」과 그 취지가 매우 흡사하다. ‘사일도’의 오른편에 위치한 해설에서

“우리 인간은 천지로부터 지선(至善)의 본성을 품수받았고 성현으로부터 인의(仁義)의 가르침을 받들고 있으며 임금과 어버이에게는 낳아주고 길러주신 은혜를 입었다”

라고 했는데, 간재의 「원적사자경」에도 이와 유사한 구절이 보인다. 즉

“매일 이른 아침에 일어나면 반드시 먼저 천지와 부모와 임금과 스승께서 나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시고 가르쳐주신 은혜를 생각해야 한다”

고 했는데, 이 두 구절은 그 내용과 논리가 일맥상통한다.

김재석이 밝히고 있듯이, 「자경십도」에는 간재의 ‘소심존성설’을 해명한 도설이 있다. 예컨대 제1 사일도(事一圖)에서

“지금은 이기(理氣)와 의리(義利)의 분변에 밝고, 성심(性心)과 본말(本末)의 영역을 구분하며, 정성과 공경을 다하여 극복하는 공부가 성현과 군부의 마음에 이와 같음이 있어야 할 뿐이다”

라고 했다.

이 구절은 「자경십도」의 지향점이 어디에 있는지 잘 보여주는 구절이다. 특히 성(性)과 심(心)의 경계를 분명히 하고, 성을 지존무대(至尊無待)의 본체로 심은 지령불매(至靈不昧)의 묘용으로 그 관계를 확정한 것은 간재의 성사심제설(性師心弟說)의 요체를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성을 절대적인 본체로 간주함으로써 심보다 우선하는 지위를 부여한 것은 구한말 ‘심’을 위주로 전개되던 성리학, 특히 한주 이진상(李震相)과 화서 이항로(李恒老) 등의 입장에 대한 간재의 반격과 비판의 핵심이론이다. ‘사일도’의 이 구절은 간재의 ‘성사심제설’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입장은 「자경십도」 제3 삼요도(三要圖)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삼요도에서 김재석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심의 본체는 비록 선하지만, 그렇지만 성을 받들어 따라야 하는 것이지 갑자기 도체가 될 수는 없다. 기질의 본체는 비록 맑지만 마음을 가리지 않아야 하며 갑자기 영각(靈覺)이 될 수는 없다.”

삼요도는 간재의 성리학적 입장, 즉 기호 낙론의 입장을 잘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심은 성을 받들어 따라야 한다”는 주장과 “기질은 마음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우리는 삼요도에서 기호 낙론의 입장을 따르는 간재의 입장과 이를 충실히 따르고 있는 김재석의 생각을 확인할 수 있다.

김재석은 구한말에 태어나 일제에 의해 침탈되고 식민지로 전락해가는 조선의 역사를 직접 체험한 인물이다. 그 과정에서 그는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때로는 적극적으로 독립활동에 참여하며 주어진 역사가 아니라 스스로 주도하고 해석하는 역사를 살아왔다. 재야 유학자로서 그가 보인 우국충절은 당시의 역사적 현실에서 매우 값진 의미를 갖는다. 비록 그의 학문이 독창적인 성리학 체계와 의미를 구성하지는 못했지만, 그는 간재의 학술을 계승하고 기호 낙론의 전통을 고수하려고 노력하였다. 하서 김인후와 자연당 김시서로부터 그의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가학을 지키고 선조들의 규범과 가치를 끊임없이 발양하는 그의 행동은 향촌 사회의 모범을 수립하려는 사림 본연의 일이기도 하다.

끝으로 그가 생을 마치기 불과 몇 년 전에 지은 한편의 시를 은미하면서 그가 평생 추구했던 삶과 학문의 목표가 어디에 놓여 있었는지를 확인해 본다.

 

돌을 쪼아 옥 만들기를
先君期待意

선군은 기해댔건만
將石欲玉成

머리 하얗게 센 오늘까지도
白首今何事

본성 회복하는 일 밝히지 못했네.
復初尙未明

 

[참고문헌]

「월담 김재석의 생애와 학문」(간재학논총「제6집, 소현성)」,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민주현(閔冑顯)1808∼1882


민주현(閔冑顯)                                                             PDF Download

 

1808(순조 8)∼1882(고종 19). 조선 말기의 문신․학자.

관은 여흥(驪興). 자는 치교(穉敎), 호는 사애(沙厓). 아버지는 문행(文行)이 뛰어나서 호조참판으로 추증되었고, 어머니는 울산김씨(蔚山金氏)로 김인후(金麟厚)의 후손인 김방엽(金邦燁)의 딸이다.  민주현은 1808년에 동북현 사평리집에서 2남 1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학문은 주로 아버지로부터 배웠으며, 송치규(宋穉圭)·안수록(安壽祿)·장헌주(張憲周)·기정진(奇正鎭)·홍직필(洪直弼) 등을 두루 사사하였다. 7살 때에 아버지로부터 「십구사략(十九史略)」을 배우기 시작하였는데, 그 때 한 번 배우면 책을 덮고 암송하는데 한 글자도 틀림이 없으므로 그의 아버지는 마음속으로 매우 기특하게 여겼다. 14세 때에는 당․송․원․명과 우리나라 여러 시인 중 좋은 시를 뽑아 시집을 엮어 그 이름을 「박동집(泊董集)」이라고 하였다.

16세 때는 「시전(詩傳)」을 읽고, 18세 때에는 「주역」을 읽었으며, 19세 때에는 관례를 행하였다. 20세 때에는 양호영(梁灝永)의 따님을 아내로 맞아 혼례를 올렸다. 21세 이후 성리서를 잠심강구하여 종제 민삼현(閔三顯)과 함께 조계사와 영봉사에서 글을 읽었다. 29세 때에는 구례 향시에 응하여 백형 민갑현(閔甲顯)과 함께 나란히 합격하였다. 그 후 송치규(宋穉圭)를 찾아가 교유하였고, 안수록(安壽錄)과 장헌주(張憲周)의 문하에 드나들며 교유하였다. 39세에 장성의 탁곡에서 기정진(奇正鎭)을 찾아뵈었는데, 민주현의 식견이 남다름을 알고 기정진이 존경하고 우러러보게 되어 도의로써 교우를 허여하였다.

40세에는 홍직필 선생을 알현하였다. 44세의 늦은 나이로 경과정시(慶科庭試)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45세(1852)에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로 벼슬생활을 시작하였고, 이 해에 스승인 홍직필 선생이 상을 당하여 광주 구수동에 가서 곡을 하였는데 홍직필의 장례를 집행함에 있어서 알맞게 헤아리고 예절의 규정이 곧고 치우침이 없으니 사방에서 보는 이들이 칭송하였다.

46세(1853)에는 겸춘추관기사관(兼春秋館記事官), 1854년 조경묘별검(肇慶廟別檢)을 지냈다. 그 뒤 성균관전적․사간원정언․형조좌랑․사간원헌납․사헌부집의․봉상시정(奉常寺正)․병조정랑․사간 등을 거쳤다. 64세 때 경연특진관(經筵特進官)·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병조참판, 67세에 좌승지를 역임하였다. 여러 스승을 사사하였으며 66세에 다시 임헌회(任憲晦)의 제자가 되기도 하였다.

민주현은 향촌사회에서 올바른 예법이 보급될 수 있도록 앞장섰다. 특히 신암(申巖)과 더불어 12동지회를 결성하고 상가(喪家)에 만연된 허례허식과 낭비의 폐습을 고치지 위해 향음례(鄕飮禮)를 제정, 검소하고 실용적인 상장제례(喪葬祭禮)를 보급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이를 따르도록 권장하였다. 이때 저술된 「초학지남(初學指南)1권은 학동들의 교육지침서가 되었다.

민주현은 형제간에 우애가 심히 돈독하였고, 자식을 가르침에 의로운 방법으로 하였으며, 친하고 멂에 구애받지 않고 반드시 공경하고 예의를 다하였다. 행동엥 절제와 엄숙함이 따랐고 독서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학문하는 일을 특별히 여기지 않았다. 민주현의 모습을 알 수 있는 글이 있다.

“무릇 날마다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모두 나의 분수 안에 있으니 어찌 반드시 종일토록 독서한 연후에야 학문을 한다고 하겠는가? 선비라는 자는 마땅히 제때에 학문에 힘써서 자신의 덕을 쌓고 여력이 있으면 문장을 익혀 자신의 재주에 통달해야 하니 잘 쌓이고 이미 두터우면 절로 감동하는 것이 있을 것이다. 출사(出仕)하여 임금을 섬길 때는 계책을 내고 생각을 밝혀 나라를 걱정하고 공익에 힘쓰며 항상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윤택하게 하는 것을 뜻으로 삼아 그 뜻에 합치하지 않으면 몸을 거두어 물러나야 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민주현은 화순지방을 대표할 만한 선비이자 학자로 홍직필의 문인이며 도학과 절의가 출중하여 유림의 지표가 되는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재직시 국방과 교화에 대한 정책을 주장하였고, 만년에는 학문을 강론하면서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저서로 「사애문집」 6권이 전한다.

사애문집(沙厓文集)」은 조선 말기의 학자인 민주현(閔胄顯)의 시문집이다. 6권 4책으로 목활자본이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규장각 도서․장서각 도서․전남대학교 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1895년(고종 32)기우만(奇宇萬)이 편집한 것을 1933년에 간행하였다. 서문은 없고, 권말에 최익현(崔益鉉)의 발문이 있다.

권1·2에는 사부(辭賦) 1편, 시 234수가 있고, 권3에는 소 7편이 있으며, 권4에는 서(書) 50편이 있고, 권5에 잡저 13편이 있으며, 권6에는 서(序) 제2편, 기 11편, 제발(題跋) 3편, 명 제2편, 혼서 1편, 축문·제문 각 4편, 묘표 1편, 행장 제2편, 유사·묘지 각 3편이 있으며, 별책 부록에는 민주현의 인물 정보를 알 수 있는 연보·행장·묘갈명·묘지명·유사가 수록되어 있다. 사부는 「화도연명귀거래사(和陶淵明歸去來辭)」이다. 시에는 계절을 소개로 한 시, 선암사·송광사·계룡산 갑사·지리산 쌍계사 등을 소재로 한 기행시, 매화[梅]·대[竹]·국화[菊] 등을 소재로 한 영물시(詠物詩), 홍직필(洪直弼)·기정진(奇正鎭) 등 스승에게 올린 증여시, 이수광(李睟光)·이색(李穡)·권필(權韠)·김인후(金麟厚) 등 문인·학자들의 시에 대한 화운시(和韻詩), 만시(輓詩) 등이 있다.

소 가운에 「면성학정방례소(勉聖學正邦禮疏)」는 학문을 권장해 국가의 백년대계를 도모하고 인륜 도덕을 준수하자는 내용이다. 「청양병위이비완급소(請養兵威以備緩急疏)」는 국가가 무사할 때 미리 군병을 조련했다가 비상시에 대비하자는 상소문이다. 이 밖에도 과거의 폐단을 지적하고 그 시정을 요구한 「진과폐소(陣科弊疏)」와 문란해진 삼정을 바로잡아 백성의 부담을 경감하게 하자는 「삼정대책(三政對策)」 등이 있다.

잡저의 「책제(策題)」에서는 정법(政法)의 근본적 개혁을 경장(更張)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시대의 변화에 따른 정책의 변화를 역사적 고찰을 통해 역설하고 있다. 「몽양편(蒙養篇)」은 후세 교육을 위해 만든 오륜(五倫) 해설서이다. 경서와 심성에 대한 내용으로 「대학도설(大學圖說)」과 「심전설(心田說)」이 있다. 그밖에 「단사설(丹史說)」·「학자오요(學者五要)」·「직중쇄언(直中瑣言)」·「방원도(倣原道)」·「독강목당중종기(讀綱目唐中宗記)」 등은 저자의 해박한 지식을 보여주고 있다. 「수해(睡解)」는 잠을 소재로 한 수필이다. 기(記)의 「태허사기(太虛舍記)」·「연와기(然窩記)」·「봉강서원이건기(鳳岡書院移建記)」·「문천재기(文泉齋記)」·「지헌기(芝軒記)」·「임대정기(臨對亭記)」·「효자손공정려기(孝子孫公旌閭記)」·「유쌍회정기(遊雙檜亭記)」·「즉이당기(則以堂記)」 등은 화순 지방의 문화사를 이해하는데 참고 자료가 된다.

조선 말기의 정치적·사회적 사정을 살피고 유학자의 정치 참여 의식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자료이다. 19세기의 호남 인물인 민주현의 개인 문집으로 당시 국내ㆍ외적으로 혼란기를 맞이하여 유학자인 저자의 해박한 지식을 읽을 수 있을 뿐 아니라 학맥과 인맥을 통해 인적 교유망을 유추해 볼 수도 있다.

 

[참고문헌]

「사애문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민영목(閔泳穆)1826∼1884


민영목(閔泳穆)                                                             PDF Download

 

1826(순조 26)∼1884(고종 21). 조선 말기의 문신이자 정치인.

관은 여흥(驪興). 자는 원경(遠卿), 호는 천식(泉食). 달용(達鏞)의 아들로, 민태용(閔泰鏞)에게 입양되었다. 명성왕후의 11촌 조카이다. 민진원의 6대손으로, 나이는 많았으나 민승호, 민겸호에게는 1촌 조카가 되었다.  민영상은 그의 8촌 동생이고, 민영익은 12촌 동생이 된다.  민씨 척족세력의 거두의 한사람이었으며, 명성황후의 11촌 조카이다. 홍직필(洪直弼)의 문인이다.

본래는 인현왕후의 큰아버지인 민시중의 후손으로, 민시중의 차남인 민진주의 5대손 민달용(閔達鏞)의 아들이었지만, 민유중의 아들 민진후의 5대손 민태용(閔泰鏞)에게 입양되었다.  실제로는 명성왕후에게도 15촌 조카가 되나 민태용의 양자가 되면서 11촌 조카가 되었다.  민진후의 아들 민익수가 명성황후의 고조부였고, 다른 아들인 민우수가 양아버지 민태용의 고조부였다.

일찍이 성균관에 들어가 유생으로 수학하였고 1871년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그해 홍문관수찬이 되고 1872년에 부수찬(副修撰)이 되었다. 1872년 7월 김수현(金壽鉉)을 동지 정사(冬至正使)로, 남정익(南廷益)을 부사(副使)로 청나라에 파견할 때 서장관(書狀官)으로 연경에 다녀오고 나서 개화주의자인 박규수(朴珪壽), 오경석, 윤웅렬 등과 같이 서양의 기술 도입과 개국통상의 유용성을 강조하였다.  귀국 후 교리(校理)가 되고, 1873년에는 홍문관 응교로 재직 중, 그해 흥선대원군을 탄핵한 최익현의 상고가 올라오자, 다른 홍문관 관원들과 함께 자신의 과실을 탄핵하였다.  이어 최익현을 국문하고 죄줄 것을 여러 번 건의하였다.

1873년(고종 10) 겨울 청나라에 동지사가 파견될 때 동지하절정사(冬至賀節正使)에 임명되어 다시 연경에 다녀왔다. 이때 만청려(萬靑黎) 등 청나라의 외교관들과의 면담, 시문을 주고받은 내용을 북사담초라는 책으로 펴냈다.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개화주의자인 박규수(朴珪壽) 등과 같이 서양의 기술 도입과 개국통상의 유용성을 강조하였다.

1874년 고종의 친정 후 원손 우유선(右諭善), 1875년 이조참의를 거쳐 겸보덕(兼輔德)으로 재직 중 순종의 왕세자 책례식의 예모관(禮貌官)으로 참석하였다.  세자책봉식 후 당상관으로 승진, 여러 벼슬을 거쳐 1878년 이조참판이 되었다.  1879년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 광주부유수(廣州府留守), 1880년 공조판서를 거쳐 1881년 이조판서로 승진했으며, 곧 이어 군무변정기연사당상(軍務邊情譏沿司堂上)과 한성부판윤에 올랐으며, 평안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882년 여름 임오군란 때 변장 도주한 명성황후를 죽은 것으로 간주하고 장례를 치를 때 대호군(大護軍)으로 종척 집사의 한사람이 되었으며, 곧 이회정(李會正), 정범조(鄭範朝) 등과 함께 국장도감제조(國葬都監提調)의 한 사람으로 임명되어 장례를 주관하고, 흥선대원군, 이회정, 정범조 등과 함께 빈전에 상주기도 하였다. 그 뒤 8월에 되돌아온 명성황후를 맞이하였고, 명성황후를 영접한 관리들을 포상할 때 가자되어 종1품으로 승진하였다.

명성황후의 개화정책을 받들어 민규호 등과 함께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을 폐쇄적이라며 비판하였고, 개항론을 내세워 영국, 미국과의 조약 체결을 주장하였다. 1882년 8월 판의금부사로 특별 승진, 행예조 판서(禮曹判書)를 거쳐 11월 평안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가 부임하기 전에 경상도관찰사로 개정 임명되었다.

1883년 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가 되어 전권대사로서 조영(朝英) 및 조독수호조약(朝獨修好條約)을 조인하였다. 또한 그 해 1월 일본과 부산구설해저전선조관(釜山口設海底電線條款)을 체결하였고, 3월 규장각제학(奎章閣提學)을 거쳐 6월 조일통상장정(朝日通商章程) 및 해관세칙(海關細則)·일본인어채범죄조규(日本人漁採犯罪條規)·조선국간행리정약조(朝鮮國間行里程約條) 등을 조인하였다. 그리고 8월 인천일본조계조약을 체결하였다.
9월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을 거쳐 교섭통상사무아문독판(交涉通商事務衙門督辦) 숭록 대부(崇祿大夫) 행 의정부좌참찬 겸 규장각제학 세자시강원좌부빈객(行議政府左參贊兼奎章閣提學世子侍講院左副賓客)으로 조영수호조약의 체결에 참여하였다. 그해 12월 독판교섭통상사무에서 면직되고 경기해안방어 사무총관(京畿沿海防事務總管)에 임명되었다.

그 뒤 박문국당상(博文局堂上)이 되어 박영효(朴泳孝), 유길준(兪吉濬), 김윤식(金允植), 김만식(金晩植) 등과 같이 1883년 10월 30일 조선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漢城旬報)를 발간하였다. 민승호와 민겸호가 연이어 죽자 민태호(閔台鎬)․민영익(閔泳翊) 및 민응식(閔應植) 등과 함께 민씨 척족 세력의 대표적인 인물이 되어 사민체제(四閔體制)를 구축, 권력의 핵심인물로 부각되었다.

천수환 사건 때에 독판교섭통상공사를 맡아 사건해결에 노력하였다. 일본 선박 천수환(天壽丸)의 선장이 울릉도장과 결탁하여 울릉도에서 목재를 밀반출한 사건이 일어나자, 1884년(고종 21) 일본 서리공사 시마 부리다나에게 공함(公函)을 보내어 이에 대해서 항의하고 목재 밀반출을 중지시켰다.

1884년 3월에는 다시 독판교섭 통상사무(朝鮮督辦交涉通商事務)에 임명되어 청나라의 청국총변조선상무(淸國總辦朝鮮商務) 진수당(陳樹棠) 을 만나 인천항(仁川港) 중국 상인들의 거주지역에 관한 규정인 인천구화상지계장정(仁川口華商地界章程)에 참여하여 체결하였다.

1884년 4월 경기연안 해방사무(海防事務)에 임명되었다가 1884년 5월 좌부빈객과 병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5월말 다시 판돈녕부사로 전임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개화 정책에 찬성하였지만 나중에는 민태호, 민영익, 민응식과 함께 이른바 사민체제를 구축, 권력의 핵심인물로 부각되었다. 이로 인해 급진개화파의 눈 밖에 났고, 서재필, 김옥균, 윤치호 등의 공격을 받았다.

9월 총관기연해방사무로 부임하였다가 소환되었다. 1884년 10월 18일 갑신정변 때 병조판서로 재직 중 김옥균, 서재필 등 개화당 인사들에 의해 조영하(趙寧夏), 민태호 등의 수구당 요인들과 함께 경우궁(景祐宮)으로 입궐하던 중 고영석(高永錫)․황용택(黃龍澤)․윤경순(尹景純)이 이끄는 난군의 총에 맞고 참살당하였다.

갑신정변이 진압된 뒤 10월 29일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저서로는 ⌈북사담초⌋가 있다.

 

[참고문헌]

⌈일성록(日省錄)⌋, ⌈고종실록(高宗實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한성순보(漢城旬報)⌋, ⌈갑신일록(甲申日錄)⌋, ⌈음청사(陰晴史)⌋, ⌈속음청사(續陰晴史)⌋, 「개화당(開化黨)의 개혁운동(改革運動)」(김영호, ⌈한국사16, 국사편찬위원회, 1975), 「구미제국(歐美諸國)에 대한 통상수호조약체결(通商修好條約締結)」(이보형, ⌈한국사⌋ 16, 국사편찬위원회, 1975)

김한충(金漢忠)1801-18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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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1(순조 1)-1873(고종 10) 조선 후기 문인.

관은 부녕(扶寧), 호는 습정재(習靜齋), 홍직필(洪直弼)의 문인이다.

「습정재유고(習靜齋遺稿)」는 조선 후기의 학자인 김한충의 시문집이다.  2권 1책으로 석인본이다.  현재 서울의 김종원가(金鍾元家)에 소장되어 있다.  1938년 김한충의 증손 김형석(金炯錫)·김형돈(金炯敦)이 편집하여 간행하였다. 권두에 김병재(金炳梓)의 서문, 권말에 증손 김환정(金煥正)·김형돈의 발문이 있다.

권1에는 시 1수, 소(疏) 1편, 서(書) 제2편, 장(狀) 제2편, 문(文) 1편, 기(記) 28편이 있고, 권2에는 부록으로 비소시(匪所詩) 23수, 비소서(匪所書) 15편, 가장 제2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 가운데에는 임진왜란 때 충절을 세웠던 9대조 김익복(金益福)에게 200년 뒤에 시호가 내려지자 당시의 명공 석학들과 함께 축하하는 시가 있다.  소의 「청만동묘복향소(請萬東廟復享疏)」는 1865년(고종 2) 대원군이 만동묘를 철폐하자 다시 복원할 것을 청한 상소이다.  만동묘를 짓게 된 동기, 조정으로부터 전토·노비·사액을 받아 춘추로 향사하게 된 내력을 기술하고, 수백 년 동안 사기(士氣)를 배양하고 의리를 강구한 곳임을 역설하고 있다.

문의 「자경문(自警文)」에서는 사람이 우주 대자연의 섭리 속에 태어나 하늘로부터 받은 본성을 함양해 인생의 직분을 다할 뿐이라고 다짐하고 있다.  기의 「초산적소일기(楚山謫所日記)」는 저자가 만동묘 철폐령을 극력 반대하다가 평안북도 초산으로 귀양갈 때의 일기이다. 1866년 4월 5일부터 5월 3일까지의 기록인데, 서울을 출발해 초산에 도착하기까지 매일 듣고 본 것과 노정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부록의 「경정초산비소시(敬呈楚山匪所詩)」와 「경정초산비소서(敬呈楚山匪所書)」는 저자가 초산 적소에 있을 때 저자의 의리 정신과 기절을 찬양하는, 당시 석학들인 이원식(李源植) 등 18인의 시와 박제유(朴濟裕) 등 17인의 서찰이다. 한말 유학사 연구에 참고 자료가 된다.

 

[참고문헌]

「습정재유고(習靜齋遺稿)」,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강장환(姜長煥)


강장환(姜長煥)                                                             PDF Download

 

1806(순조 6, 병인) ~ 1871(고종 8, 신미) 조선 후기의 문신.

관 진주(晋州). 자는 선지(善之). 호는 주일재(主一齋)이다.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윤조(胤祖)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강성(姜珹)이다. 홍직필(洪直弼)의 문인이다.

1833년(순조 33) 문과 급제하여,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율봉도찰방(栗峰道察訪)․무안현감(務安縣監)․선전관(宣傳官)․충청도사핵어사(忠淸道査覈御使)․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등을 역임했다. 1855년(철종 6) 서장관(書狀官)으로 북경(北京)을 다녀왔다.

1856년에 간행된 친필본 ⌈조원록(兆轅錄)⌋ 1책이 있다. 철종 6년(1855)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인 강장환의 신년하례를 마치고 돌아오기까지 3달 22간의 일기와 견문기(見聞記)이다. 현재 고려대학교 등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국조방목(國朝榜目)⌋, ⌈진주강씨보(晋州姜氏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병욱(金炳昱)1808∼1885


김병욱(金炳昱)                                                             PDF Download

 

1808(순조 8)∼1885(고종 22). 조선 말기의 문신.

관은 안동(安東). 자는 문거(文擧), 호는 뇌서(磊棲)로 경상도 문경 출생이다. 아버지는 돈녕부도정 김석근(金襫根)이며, 어머니는 문희전씨(聞喜錢氏)로 전도석(錢道碩)의 딸이다. 또한 일제 시대 극작가와 연극이론가로 유명했던 김우진(金祐鎭, 1897~1926)의 조부이다.

7세부터 수학하기 시작하였으며, 10세가 넘어서는 민조영(閔祖榮)에게 나아가 성명(性命)의 학문을 배웠다. 18세가 되자 보다 많은 사우들과 교유하고 학문을 넓히고자 하여 부친에게 허락을 받고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에 올라와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중심인물이었던 김희순(金羲淳)과 김수근(金洙根)두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김수근의 아들이며 후일 국권을 흔들었던 김병학(金炳學)·김병국(金炳國)과 교유하였다. 김수근은 김병욱의 학문과 사상 형성과정에 매우 커다란 영향을 미친 스승이었는데, 김수근의 문하에 공부하면서 국가적인 중요한 문제점들을 파악할 수 있었으며 그의 해결방안에 대해 깊이 고민하였다. 김수근에 대한 존경심이 대단하였으니,

“내가 평생 다른 사람과 합치되는 것이 적어 도처어서 미움을 받았는데 오직 溪山(김수근)선생만이 나를 깊이 알아 매양 허락해주셨다”

라고 할 정도였다. 김수근으로부터 수업받은 내용을 살펴보면, 심성론적인 논변보다는 환곡이나 재정확보책 등 현실문제와 관련된 것들이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현실문제에 대한 김수근의 깊은 관심은 북학풍의 가학(家學)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1858년(철종 9) 궁중의 경사로 6품 벼슬에 등용되어 1860년에 사헌부감찰과 장악원주부를 거쳐, 1862년에 다스리기 어려운 곳으로 소문난 연풍(延豊)의 현감으로 임명되어 큰 치적을 남기며 숙폐(宿弊 : 오랜 동안 쌓인 폐해)를 일소하였다.

새로 부임한 감사와의 알력으로 사직하고 돌아오자 현에서 동비(銅碑)를 세워 덕을 기렸다. 1867년(고종 4) 문경현(聞慶縣)의 숙폐를 다스리다 토호로 몰려 황해도 문화현(文化縣)로 귀양갔다. 하지만 어려운 시국을 풀어나갈 방도에 대해 깊이 고민하였고, 그러한 고민의 성과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지속적으로 상소하는 등 세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삶의 자세를 견지하였다. 이때 귀양지에서 「태평오책(太平五策)」을 올렸는데, 고종으로부터 크게 칭찬을 들었고 귀양도 곧 풀렸다.

1882년 돈녕부도정에 임명되었다. 항상 지(知)·인(仁)·용(勇) 중에서 ‘용’이 학문의 관건임을 들어 자신이나 후진을 채찍질하였고, 삼정(三政)에 대한 그의 해박한 식견은 고금을 통틀어 막히는 데가 없었으며, 늘 개혁에 대한 열정을 지니고 있었다.
‘창고가 비어있고 의식(衣食)이 부족한데 어느 겨를에 예의와 염치를 돌보겠느냐’고 반문하면서 도덕과 문학에 지나치게 치중하는 조선 지식인들의 학문태도를 비판하였다. 조선의 문학과 명절(名節)은 중국과 비교해보아도 전혀 손색이 없지만 국가를 경영하고 민생을 제정하는 데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였다.

노성(老成)한 사람들은 입을 다물고 있고 신진들은 청담(淸談)만을 고상히 여길 뿐 세상의 일에는 전혀 어두워 삼정(三政)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설령 경제정책을 품은 사람이 등용된다고 해도 조정의 의론이 각각 다르고 조치가 일정하지 않아 능력을 발휘할 수 없는 현실이 민생파탄의 원인이라고 파악하였다.

이처럼 명절과 문학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민생이 제정된 후에야 배양될 수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대의(大義)를 밝히는 것이 중요한 일이기는 하지만, 일의 변화에 대비하지 못하면 일의 성패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며, 이는 병자호란과 정묘호란의 역사적 경험에서 알 수 있다고 지적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척사(斥邪)의 요체는 오도(吾道)를 밝히는 것이라고 하면서도 선왕의 도를 강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실학하는 선비를 구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과 일맥상통한다. 저서로는 「뇌서집」이 있다.

뇌서집」은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김병욱의 시문집. 6권 2책. 필사본.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을 비롯하여 여러 공공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1907년 김병욱의 아들 김성규(金星圭)와 장손 김호진(金灝鎭) 등이 편집·필사하였다. 서문은 없고 권말에 김성규의 발문이 있다.

권1·2에 시 434수, 권3에 서(書) 31편, 소 5편, 서(序) 3편, 기 3편, 발 제2편, 권4에 제문 9편, 가장(家狀) 1편, 논설 18편, 전(傳) 1편, 표 3편, 권5에 잡저 8편, 권6에 잡저 5편, 공문(公文) 19편, 부록으로 가장 1편이 수록되어 있으며, 그밖에 이 책을 정초(正草)하기 전 초록한 시고(詩稿)가 주필(朱筆)의 흔적이 선연하게 권말에 함께 묶여 있다.

서(書)에는 당시 국권을 잡고 있던 김병국(金炳國)·김병학(金炳學)과 국정에 대해 주고받은 편지와 민태호(閔台鎬)·민규호(閔奎鎬) 및 흥선대원군에게 보낸 편지도 있어, 당시 그의 활약상과 교유가 범상하지 않았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 내용들도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회복시킬 삼정(三政)에 대한 고언(苦言)들로 점철되어 있다. 그의 삼정에 대한 견해는 「정축재소(丁丑再疏)」·「유곡역취모의(留穀亦取耗議)」·「논적정(論糴政)」·「논군정징색지폐(論軍丁徵索之弊)」·「사창절목(社倉節目)」 등에 자세하게 언급되어 있다.

그는 환자[還上]를 빌미로 국민을 수탈하는 갖가지 명목의 세금들을 열거하고, 환자를 정부에서 취급하지 말고 마을별로 관장하면서 모조(耗租: 환자를 받을 때, 곡식을 쌓아둔 동안에 축이 날 것을 예측해 한 섬에 몇 되씩 덧붙여 받던 곡식)만을 정부가 거두어들일 것을 제시하였다.

또한, 군대의 위영제도(衛營制度)의 문란을 역사적으로 고찰한 여러 가지 혁신책들을 제시하면서, 정부의 집정자들에게 이러한 여러 역사적인 고찰과 그의 경략은 성인이 다시 난다고 하여도 내 말을 바꾸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에 찬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가장에는 그의 이런 견해를 집합한 「태평오책(太平五策)」이라는 역저가 있어 고종에게 많은 칭찬을 들었으나 불타고 없어졌다고 하였다.

「복사소견(鵩舍消遣)」은 그가 고향 문경에서 폐단을 일소하려다 토호(土豪)로 몰려 문화(文化)에 귀양가서 당시 삼정의 문란, 관리들의 수탈, 토호의 폐단, 당시 정객들의 인물평을 80여 조목으로 나누어 기록한 것으로, 당시 사회상을 이해하는 자료가 될 것이다.
「문경현구폐전말(聞慶縣捄弊顚末)」은 그가 문경의 유지들과 폐정을 척결한 전말을 적은 것이고, 임오군란의 시발을 분석한 「국변기략(國變紀略)」, 운요호사건(雲揚號事件)에서 일본의 침략을 예시한 「인항설(仁港說)」, 압록강 연안의 무창(茂昌)·여연(閭延)·우예(虞芮)·자성(慈城)을 군(郡)으로 승격해 변방의 경계를 튼튼히 할 것을 주장한 「복사군의(復四郡議)」가 있다. 「수불론(讎佛論)」도 그의 역저 가운데 하나이다.

 

[참고문헌]

「고종실록(高宗實錄)」, 「순종실록(純宗實錄)」, 「뇌서집(磊棲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노광두(盧光斗) 1772∼1859


노광두(盧光斗)                                                             PDF Download

 

1772(영조 48)∼1859(철종 10). 조선 후기의 문신.

관은 풍천(豊川). 자는 청지(淸之), 호는 감모재(感慕齋)이다. 함양(咸陽) 개평촌(介坪村) 출으로, 할아버지는 노정국(盧楨國)이고, 아버지는 호조참판에 추증된 노석규(盧錫奎)이며, 어머니는 밀양박씨로 내오(來吾)의 딸이다.  신성진(愼性眞)의 문인이다.

1814년(순조 14)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819년 전적이 되었고 그 뒤 지평(持平)·이조좌랑 등을 역임하였고, 1826년(순조 26) 자인현감(慈仁縣監)이 되어 많은 선정을 베풀었다.  1836년(헌종 2) 장령에 제수되어, 임금의 나이가 아직 어리니 이륜(彛倫)과 도덕으로 잘 보도(輔導)하여야 한다 하고, 경전(經傳) 중에서 절실한 것만을 뽑아 책을 만들어 올리니 충성이 지극하다 하여 특별히 동부승지에 승진되었고, 1851년(철종 2) 호조참판에 이르렀다.

말년에는 노광리(盧光履)와 함께 아버지의 글 중에서 요지를 뽑아 「가학십도(家學十圖)」를 만들었고, 후학을 양성하는데 전념하였다. <풍천노씨 가학십도 목판(豊川盧氏 家學十圖 木版)>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함양박물관에 있는 목판이다. 2015년 1월 15일 경상남도의 문화재자료 제586호로 지정되었다.

풍천노씨 가학십도」는 한 집안의 가승(家乘)로서의 가치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 책에 수록된 16명의 학문과 삶은 조선시대에도 칭송을 받았지만,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의미한 내용을 전해준다.   또한 가문에서 배출된 선조의 유훈과 행적을 도설로 정리하여 체계화한 구성은 매우 독창적인 것이다.  따라서 「풍천노씨 가학십도」는 구성과 내용에 있어 모두 가치가 크므로 경상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한 것이다.

이들에 대한 홍직필의 평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반드시 특별히 뛰어나고 재덕이 있는 선비가 그 사이에 태어남이 있을 것이니 그것이 노씨가 세상을 구제하는 아름다움이 된 까닭이 아니겠는가. 게다가 사암공(徙庵公)의 후손 노광두가 또한 일찍이 정당한 말을 올려 은총을 받아 발탁되었고 풍고공(風皐公)의 후손 노광리가 학문을 심고 문장을 쌓았으나 세상에 명예를 구하지 않았으니 이 두 사람도 한 지방의 여망(輿望)이었다. 노씨의 문중에 어찌 그렇게 어진 사람이 많다는 것인가.  이것은 아마도 선조들이 선(善)을 행한 보답인 것이다. 대체로 선이라는 것은 하늘이 사람에게 품부한 바이고 사람이 소유한 것은 인의(仁義)와 충신(忠信)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자신을 미루어 다른 사람에게 미치게 하여 여러 사람에게 베풀게 하는 것이니 모두 이치의 당연한 바로 하는 바가 없어도 하게 되는 것이다. 노씨 가문의 십 수세대가 밝은 조정에 나아가면 드러나고 물러가면 산수 속에 은거하면서 오직 시서(詩書)와 예악(禮樂)의 가르침을 계술하고 행하여 몸에 모아 간직하면서 덕으로 빛내지 않고 남에게 베풀면서 멈추지 아니하니 그 축척한 바가 두터웠다. 그러므로 대대로 전해오는 여러 후손의 아름다운 명성과 소문이 끊어지지 않고 행함이 더욱 오래될수록 더욱 드러나 이 <가학도(家學圖)>가 길을 가는 사람의 이목에도 살펴지게 된 것이다.”

저서로는 「감모재집」 2권 1책이 있다.

함양 노참판댁 고가(咸陽 盧參判宅 古家)는 개평리에 있는 주택으로 현재 소유자의 6대조이자 호조참판에 추증된 노석규(盧錫奎)가 1746년에 지곡면 오평마을에서 이곳으로 이거(移居)하였다고 한다. 노석규의 아들 노광두가 호조참판을 역임할 당시 흉년이 들어 백성들의 살림이 어려워져 함양, 안의 지방의 환곡에 대한 상소를 올려 이 지역에 대한 세금을 탕감하게 하였다. 이에 백성들이 감사의 뜻으로 노광두에게 많은 재물을 주었으나 노광두는 거절하였다고 한다.

노광두가 벼슬에서 퇴임하여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인근의 주민들이 소식을 듣고 노광두가 기거할 수 있는 사랑채를 지어 주기를 청했으나 이것만은 거절할 수 없었다. 그래서 백성의 부담을 들어주고자 초가집으로 건립하도록 하였는데 1823년의 일이다.  안채의 건립연도는 알 수 없으나 마을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증언과 노석규의 이거 시기를 보면 적어도 1745년경에는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1830년에 노광두가 가묘를 창건하였으며 1945년에 안채를 중수하였다. 노참판고택은 평촌천의 좌측에 있는 개평마을의 동쪽부분에 남향하여 자리잡고 있다. 고택은 남북으로 긴 대지에 북쪽인 뒤에서부터 사당, 안채, 사랑채, 대문채가 차례로 배치되어 있다. 현재 담장이 없어 별도의 영역은 구분되지 않고 있다.

안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평면은 좌측부터 부엌 1칸, 툇마루가 딸린 온돌방 1칸, 툇마루가 딸린 마루방 1칸, 툇마루가 딸린 온돌방 1칸이며, 배면에도 0.5칸의 툇칸이 있어 겹집구조이다.  공포양식은 장여수장집이며 상부가구는 도리가 다섯 개인 5량가이다.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1.5칸의 홑처마 우진각지붕이다. 평면은 좌측부터 툇마루가 딸린 온돌방 2칸, 마루 1칸, 툇마루가 딸린 온돌방 1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공포양식은 장여수장집이며 상부가구는 도리가 세 개인 3량가이다. 사랑채의 지붕은 초가였지만 시멘트일식기와로 바뀌었으며 현재는 기와집으로 교체되었다.

「감모재집」은 조선 후기의 문신 노광두(盧光斗)의 시문집. 2권 1책. 목활자본. 그의 아들 노기수(盧箕壽)의 편집을 거쳐, 1922년 증손인 노근영(盧近泳)과 노종한(盧鍾漢) 등이 간행하였다. 권말에 족손(族孫)인 노보현(盧普鉉)과 노근영의 발문이 있다. 현재 고려대학교 도서관·연세대학교 도서관·부산대학교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권1에 시 36수, 소(疏) 4편, 서(序) 10편, 기(記) 6편, 발(跋) 3편, 상량문 제2편, 제문 7편, 행장 3편, 묘갈명 4편, 봉안문 1편, 권2는 부록으로 연보, 사제문(賜祭文)·행장·묘갈명 각 1편이 수록되어 있다.

소 중 「사지평소(辭持平疏)」는 1821년(순조 21)에 올린 사직소로, 당시 환곡(還穀)의 폐단이 매우 심함을 특히 함양과 안의의 현황을 들어 지적하고 그 시정책을 제시하였다. 「사호조참판소(辭戶曹參判疏)」에서는 임금의 도리와 백성의 구제에 대한 방책을 언급하고, 아울러 언로(言路)를 넓혀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영모단기(永慕壇記)」는 임진왜란 때 이운(李蕓)과 함께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가 진주에서 전사한 참봉 안흥종(安興琮)과, 정유재란 때 그 원수를 갚기 위해 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 들어가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봉사(奉事) 안헌(安憲) 부자의 장렬한 전공을 기리기 위하여 만든 영모단의 기문(記文)이다.

[참고문헌]

「철종실록(哲宗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감모재집(感慕齋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명희(金命喜)1788~1857


김명희(金命喜)                                                             PDF Download

 

1788(정조 12)~1857(철종 8) 조선 후기의 학자.

관은 경주(慶州), 자는 성원(性源), 호는 산천도인(山泉道人) 또는 산천(山泉)이다. 김노경(金魯敬)의 아들이며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동생이다. 송계간(宋啓榦)의 문인이다.

1810년(순조 10) 진사(進士)가 되고 벼슬은 현령(縣令)에 그쳤다.     1822년(순조22) 동지 겸 사은사(冬至兼謝恩使)의 일행으로 가는 아버지를 따라 북경(北京)에 가서, 「해동 금석원(海東金石苑)」의 저자인 유희해(劉喜海)와 진남숙(陣南淑) 등과 교분을 맺고 귀국 후에도 그들과 편지·글씨를 교환했다.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서예가요 금석학자인 추사 김정희(金正喜)가 그의 형이며, 그의 형인 김정희와 함께 글씨가 뛰어났다. 김정희는 한국 금석학의 개조(開祖)로 여겨지며, 한국과 중국의 옛 비문을 보고 만든 추사체가 있다.  또한 그는 난초도 잘 그렸다.

특히 김명희는 ‘차 만드는 법’에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대둔사 승려인 향훈에게 채다와 제다에 이르기까지 6개 항목에 걸쳐 소상하게 「다법수칙(茶法數則)」을 써 주었다.  향훈에게 채다(采茶)와 제다법(製茶法)에 대해 6개 항목에 걸쳐 써준 내용이다.
이것은 초의의 「다신전(茶神傳)」과 함께 조선 차문화사의 대단히 중요한 글이다.  아무튼 김명희가 인용한 차 관련 서적들을 보면 ‘대관차론’, ‘복원별록’, ‘다소’, ‘다전’ 등 차의 고전들로서 차에 관한 지식이 상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김명희는 왜 향훈에게 차를 만드는 법을 소상하게 설명하려고 했을까. 여러 추측을 해볼 수 있지만 이는 결국 사찰에서 차 만드는 법이 제대로 전수되어 있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조선의 주류문화는 어디까지나 선비문화였고, 차문화의 전통을 그나마도 선비들에게서 찾아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신라나 고려조에는 사찰에서 선진 외래문화가 융성했지만 조선조에서는 사찰이 주류에서 밀려난 까닭에 차문화도 변방에 속했던 것이다. 그래서 조선의 차문화는 선비사회를 통해서 보지 않으면 쉽게 단절된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다법수칙」의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내용은 채다(採茶)와 제다(製茶)에 관한 여섯 항목의 짤막한 글이다. 글 끝에는 다음과 같은 후기가 적혀 있다.

“다법 몇 항목을 써서 견향(見香)에게 보인다. 이 방법에 따라 차를 만들어 중생을 이롭게 한다면 부처님의 일 아님이 없을 것이다. 산천거사.”

여기에서의 산천은 바로 김명희를 말한다.  김명희가 견향(見香), 즉 대둔사 승려 향훈(香薰) 스님에게 써준 것이다. 여기 적힌 방법대로 차를 만들어서, 이를 통해 중생을 이롭게 하고 나아가 부처님 전에 공덕을 쌓게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여기에 적힌 여섯 항목의 내용은 김명희가 직접 지은 것이 아니다.

서유구(徐有榘, 1764~1845)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권27에 실린 「만학지(晩學志)」권5, 「잡식(雜植)」조의 차 관련 내용 중에서 간추린 것이다.  김명희가 직접 중국 다서를 보고 베꼈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 원문을 대조해보니 서유구가 옮겨 적으면서 생략한 대목이나 원본과 다르게 적은 몇 글자가 동일한 것으로 보아, 서유구의 저술에서 추려 적은 것이 분명하다.  김명희의 「다법수칙」은 송대(宋代)와 명대(明代)의 5종 다서에서 한 두 항목을 초록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1, 2, 3, 5는 모두 찻잎 따는 요령과 시기를 다룬 채다(採茶)의 내용이고, 4와 6은 차덖기에 관한 내용이다.  그밖에 보관이나 찻물, 차 끓이기에 관한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이는 이 글이 단지 차를 따서 덖는 과정에 도움을 주려고 필사된 것임을 말해준다.

다법수칙」의 채다법(採茶法)와 초다법(炒茶法)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먼저 채다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하루 중에는 동트기 전에 찻잎을 따야 한다.

둘째, 찻잎을 딸 때는 손톱으로 끊어야지 손가락으로 짓무르게 하면 안 된다.

셋째, 일년 중에는 곡우(穀雨)를 전후한 시기가 채다의 가장 적기다. 시기가 좀 늦더라도 맛이 밴 뒤에 따야 향이 좋다.

넷째, 잎은 연녹색에 둥글고 도톰한 것이 상품이다.

다섯째, 채취한 찻잎은 맑은 물에 즉시 담궈두는 것이 좋다.

 

또한 초다법을 정리하면 이렇다.

첫째, 여린 잎을 오래 덖거나 한꺼번에 너무 많이 덖으면 안 된다.

둘째, 한 솥에 한꺼번에 덖는 분량은 4냥 이하가 적합하다.

셋째, 화기가 지나쳐서 태우면 절대로 안 된다. 넷째, 쇠솥의 날 비린내가 배거나 기름기가 스며도 안 된다.

다섯째, 찻잎을 덖을 때는 나뭇가지를 써야지 통나무나 잎을 쓰면 안 된다.

여섯째, 찻잎을 고루 섞어 주려면 손가락에 대나무를 깍지 끼워 쓰면 좋다.

일곱째, 차를 덖다가 향기가 올라 올 때 덖기를 멈추어야 한다.

여덟째, 곁에서 부채질을 해서 열기를 걷어내 주어야 한다.

이상은 김명희가 향훈 스님에게 준 「다법수칙」 6항목의 내용이다.

내용은 찻잎 채취의 방법과 시기를 적은 채다법과, 찻잎을 덖을 때 주의 사항을 적은 초다법으로 구분된다.  이 글은 향훈에게 채다와 초다의 방법을 일러주기 위해 김명희가 중국 차서의 내용을 옮겨 적은 것이다. 이는 앞서도 말했듯이 초의를 비롯하여 여러 승려들이 다투어 차를 만들고는 있었지만, 막상 이렇다 할 제다법이 정립되어 있지 않았던 당시 조선 차문화의 현주소를 말해준다.

정작 김명희 자신은 제다에 경험이 전혀 없었을 뿐 아니라, 차의 생태나 성질도 잘 알지는 못했다.  하지만 중국의 다서를 읽음으로써 그 과정을 체득했고, 이를 향훈에게 요령있게 가르쳐 주어 그가 만든 차 맛이 한결 더 높은 수준에 이르도록 기여한 공이 있다. 실제 김명희는 서유구의 「임원경제지」를 다시 인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그저 이론으로 섭렵한데 그친 서유구에 비해 김명희의 「다법수칙」은 바로 향훈에게 전해져서 실전에 적용되었다. 초의의 「다신전」과 함께 김명희의 「다법수칙」이 차문화사에서 의미를 갖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참고문헌]

「숭정3경술증광별시문무과전시방목(崇禎三庚戌增廣別試文武科殿試榜目)」

 

한경의(韓敬儀)1739∼1821


한경의(韓敬儀)                                                             PDF Download

 

1739(영조 15)∼1821(순조 21). 조선 후기의 학자.

관은 청주(淸州). 호는 치서(菑墅)이다. 영의정 상경(尙敬)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통덕랑(通德郎) 진철(震喆)이며, 어머니는 단양우씨(丹陽禹氏)로 상규(尙奎)의 딸이다.  큰아버지 진유(震愈)에게 입양되었다.   이장오(李章五)에게 사서를 배우고, 뒤에 조유선(趙有善)의 문인이 되었다.   나산 조유선은 김원행(金元行)의 문인이다.

향시(鄕試)에 네 번 합격하였으나 부친상을 당한 뒤로는 벼슬에 뜻을 끊고, 오직 경학에 열중하여 장현문(張玄聞)·이춘위(李春韡) 등과 함께 이택회(麗澤會)를 조직하고, 사서오경과 ⌈소학⌋·⌈심경⌋·⌈근사록⌋·⌈성리대전⌋·⌈강목⌋ 등을 강론하였다.

예악(禮樂)·도수(度數)·역상(易象) 등도 깊이 연구하여 후진양성에 전념하였고, 지행일치(知行一致)를 평생의 신조로 삼았다. 학행(學行)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시문(詩文)에도 능하였다. 뒤에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치서집⌋ 6권이 있다.

치서집(菑墅集)⌋은 조선 후기의 학자 한경의의 시문집이다.  6권 3책으로 목활자본이다.  1822년(순조 22) 아들 한흥교(韓興敎), 손자 한영희(韓永熙) 등이 편집하여 간행하였다.  현재 규장각 도서와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권1·2에는 시와 만사 227수, 서(書) 3편, 서(序) 3편, 기(記) 1편, 발(跋) 3편, 잡저 10편이 있고,  권3∼6에는 제문 19편, 행장 25편, 묘갈명 7편, 묘지명 13편, 묘표 5편, 부록으로 저자의 행장 등이 수록되어 있고, 끝에 허무(許懋) 등 300여명의 사림(士林)이 저자의 학문과 효행을 들어 관에 포증(褒贈)을 청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서(書)는 모두 고을사람들을 대신하여 관가에 건의한 민원서(民願書)이다.  「청수축본부내성(請修築本部內城)」은 송도(松都)의 지리적 여건과 역사적 사실들을 열거하고, 심도(沁都, 江華의 옛 이름)와 함께 국가의 막중한 요충지이므로 성지(城池)를 수축하고 관방을 엄격히 하여야 한다고 주장한 글이다.

청포유사과순룡부부서(請褒劉司果順龍夫婦書)」는 병자호란 당시 전몰한 유순룡과 남편의 뒤를 따라 자결한 그의 처 장씨(張氏)에 대하여 국가에서 그들의 충렬(忠烈)을 포양하여 줄 것을 건의한 글이다.

종정계서(從征契序)」는 1811년(순조 11) 홍경래(洪景來)의 난 때에 송영(松營)의 기사(騎士)로서 토벌에 가담하였던 18명의 계(契)의 내력과 그 취지를 기록한 것이다.  홍경래의 난은 1811년(순조 11)부터 1812년(순조 12)까지 홍경래와 우군칙 등을 중심으로 평안도에서 일어난 농민반란이다.

그밖에 「주역의 구괘(姤卦)」를 이용하여 천도(天道)의 소장(消長)과 억음부양(抑陰扶陽)의 뜻에 대하여 논한 「독구괘(讀姤卦)」와 경전 강마를 위하여 조직하였다고 하는 「이택회규약(麗澤會規約)」이 있다.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오희상(吳熙常)1763∼1833


오희상(吳熙常)                                                             PDF Download

 

1763(영조 39)∼1833(순조 33). 조선 후기의 문신.

관은 해주(海州). 자는 사경(士敬), 호는 노주(老洲)이다. 오진주(吳晋周)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대제학 오원(吳瑗)이고, 아버지는 대제학 오재순(吳載純)이며, 어머니는 영의정 이천보(李天輔)의 딸이다. 1781년(19살)에 그의 숙부인 예조판서 오재소(吳載紹, 1739~1811)에게 입양되었다.

어려서부터 형 오윤상(吳允常, 1746~1783)에게 수학하였는데, 오윤상은 당시에 김원행(金元行)과 김량행(金亮行) 등으로부터 경학으로 촉망받았던 학자였다. 자라면서 육적(六籍)에 더욱 힘을 썼고, 특히 중용에 각고의 노력을 하였으며 의심나는 것은 오윤상에게 질문하여 분명해질 때까지 그만두지 않았다.

그는 옛 성현을 스스로 기약하였고, 공부는 순서에 따라 정밀함을 다하고 침잠하여 깊은 이치를 밝히고 찾았으며, 특히 자득(自得)을 주로 하였고 헌장(憲章)을 삼가 지켰다. 그래서 천착하고 새로운 것을 내세우거나 섭렵하여 외면(外面)에 힘쓰는 것을 가장 경계하였다. 또한 학문을 하는 데는 마땅히 경학을 먼저 하고 예학은 그 뒤이며, 예의 쓰임은 더욱 일상에서의 실천이 절실하다고 하였다.

일찍이 이연평(李延平)의 ‘묵좌징심(黙坐澄心)’이라는 말을 좋아하여 간혹 눈을 감고 정좌하여 심(心)과 리(理)가 하나되는 묘리(妙理)를 체험하곤 하였다. 평소에 의리의 분변에 엄하여 천리와 인욕은 공과 사로 나뉘는 것이니 마땅히 한 칼에 두 동강을 내듯이 막힌 곳이 없어야 할 것이며, 만일 조금이라도 계고(計較)한다면 이미 그 속에 빠진 것이라고 하였다.

선유들 중에 특히 이이와 김창협을 존모하였는데, 김창협에 대해서는 ‘은미한 것을 드러내어 계왕개래(繼往開來), 즉 지나간 과거의 일을 계승하고 다가오는 미래를 여는 공이 있으니 마땅히 이이와 함께 공자의 사당에서 배향해야 한다’고 하였다. 교유도 적었고 문밖의 출입도 극히 드물었으나, 사우관계에 있어서만은 적극적이어서 김량행(金亮行)․심정진(沈定鎭)․박윤원(朴胤源)․이직보(李直輔)에 대해서는 존경해서 섬겼다. 특히 민치복(閔致福)과는 우의가 가장 돈독하였는데,

“형(오윤상)을 잃은 뒤로는 오직 민치복에 의지하고 받은 도움이 가장 많았다. 그리하여 내가 아는 바로 이 리의 본체를 실제로 통견함이 있는 자는 오직 민치복 한 사람 뿐이다”

라고 할 정도로 높이 평가하였다. 항상 학자들에게 먼저 명성과 실질을 분변할 것을 가르치면서

“모름지기 자기를 위하거나 다른 사람을 위하는 위기위인(爲己爲人)의 구분을 확실히 하여야만 거의 도에 들어가는데 헤매지 않을 것”

이라고 주장하였다.

특별한 사승 관계가 없는 그는 선배 학자들의 사상을 취사하는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그는 이이(李珥)·김창협(金昌協)·김창흡(金昌翕) 등과 이재(李縡)·김원행(金元行) 등의 성리설을 따르고, 한원진(韓元震)·임성주(任聖周)의 학설을 주기(主氣) 일면에 치우쳐 있다고 비판하였다. 그는 주리(主理)·주기(主氣)의 경향을 취하여 한편으로 치우치는 두 갈래의 관점에 모두 반대하면서 불리(不離)·부잡(不雜)을 말하여 절충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리(理)를 근본으로 보아야 한다고 한다.
또한 리와 기를 인식하는 방법에는 리로부터 기를 추론하는 것과 기로부터 리를 추론하는 두 방법이 있다고 하였다. 주돈이(周敦頤)의 태극설(太極說)은 리로부터 기를 추론한 것이고, 장재(張載)의 태허설(太虛說)은 기로부터 리를 추론한 것이지만, 그 궁극에서는 한가지로 이기일체(理氣一體)임을 강조하였다. 그는 이기의 혼일(渾一)한 상태를 말하면서 불리(不離)·부잡(不雜)의 양면성을 강조하지만, 리는 스스로 기에 즉(卽)하면서도 기가 아니고 형체가 없으면서도 유위(有爲)하는 묘(妙)가 있다고 하였다.
‘불리와 부잡’은 리와 기의 떨어질 수도 없고 섞일 수도 없는 관계를 의미한다. 즉 현상계는 이기가 함께 작용이지만, 그 중에서 주(主)와 본(本)이 되는 것은 리일 뿐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이기를 합하면서 리를 주로 하는 사상은 대체로 이재(李縡)의 사상을 계승한 것이다. 사단(四端)·칠정(七情)에 관해서는 김창협의 학설을 적극 지지하고, 성(性)에만 본연(本然)과 기질(氣質)의 구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심(心)도 본연과 기질로 나눌 수 있으며, 또한 기에도 본연이 있는데 그 본연의 자리를 신(神)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또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에서는 인심·도심이 성(性)의 올바름에 근원하거나, 혹은 형기(形氣)의 사사로움에서 생겨나는 차이가 있지만, 모두 발동한 뒤를 말한 것이라고 하였다. 또 마음이 감응하지 않을 때 진체(眞體)의 근본은 담일(湛一)하고 영소(靈昭)·활화(活化)하여 리와 합치된다고 하면서 심합이기설(心合理氣說)의 입장을 말하였다.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에서는 사람(人)과 사물(物)은 근본적으로 리가 같을 뿐만 아니라 신(神)도 동일하다고 전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동일하지 않게 나타나는 이유는 형기(形氣) 때문이라 하여, 호론의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을 반대하고, 낙론의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을 일원분수(一原分殊)에 의하여 설명하였다.

오희상과 교유한 적이 있는 홍직필은 오희상의 학문과 사상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즉

“마음을 비우고 뜻을 너그럽게 하여 자기의 견해를 세우지 않고 글로 인하여 의(義)를 따랐다.……또한 세상의 유학자들이 주기(主氣)의 의론이 참과 거짓을 구별하지 못하고 오류를 전파하여 장차 이단의 근거가 되어 리가 기의 주인이 되는 뜻이 어두워졌다. 선생은 ‘리’자를 발휘하여 정자와 주자 이래로 이 이치를 드러내어 힘들게 부식(扶植)한 참 이치가 이에 다시 밝혀졌으니 그 공은 성대하다고 이를 수 있다.……조예가 이른 것이 탁연히 400년 오도의 결국이었다.”

홍직필은 오희상의 학문을 400년 유학의 결국(結局)이라는 찬사로써 표현하였으며, 문인인 유신환(兪莘煥)은

“선생의 학문은 무적무막(無適無莫)하여 이미 높고 또한 낮으며 이미 넓고 또한 간략하였다. 선생의 도는 불리부잡(不離不雜)하였으며 이미 나타나고 또한 감추었으며 이미 흩어졌고 또한 합하여 심중에 쌓인 것이 바깥으로 발하여 아래에서 배워서 위에 도달했다”

라고 평가하였다.

한편 정치적 경력을 보면, 1800년에 서용보(徐龍輔)의 추천으로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가 되고, 장릉참봉(長陵參奉)·돈녕부참봉·한성부주부·황해도도사·사어(司禦) 등을 지낸 뒤, 1818년 경연관·지평 등에 임명되었으나 광주(廣州)의 징악산(徵嶽山)에 은거하였다. 이 동안 지평(持平)·장령(掌令)·집의(執義)·승지 및 이조·형조·공조의 참의, 1829년 세손부(世孫傅), 1832년 찬선(贊善) 등에 임명되었으나 환로는 그가 바라던 바가 아니었기에 모두 사퇴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이에 신하로써 임금을 섬김에 몸을 지키는 것이 최상이고 보은(報恩)은 다음이라고까지 말하였다. 그의 이와 같은 태도는 특히 양모인 한산이씨(韓山李氏)의 권고에 힘입은 것이었다.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여 이황과 이이의 양설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절충적인 태도를 취하였으며, 주리(主理)·주기(主氣)의 양설에 대해서는 주리설을 옹호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저서로는 ⌈독서수기(讀書隨記)⌋․⌈노주집(老洲集)⌋ 등이 있다. 시호는 문원(文元)인데, ‘道德博文曰文, 主義行德曰元’이라는 시법(諡法)에 의거한 것이다.

 

[참고문헌]

⌈정조실록(正祖實錄)⌋, 순조실록(純祖實錄)⌋, ⌈매산집(梅山集)⌋, ⌈한국유학사(韓國儒學史)⌋(배종호, 연세대학교출판부, 197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