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퇴(勇退)의 군자 성혼(成渾)


야사(연려실기술)를 통한 스토리텔링 6

용퇴(勇退)의 군자 성혼(成渾)

 

곡하면 우계가 나오고 우계하면 율곡이 병칭된다. 우계 성혼은 1535년생이고 율곡 이이는 1536년생이니 우계가 한 살 많다. 한 살 터울의 죽마고우로 인연을 맺어, 젊어서는 조선 유학 3대 논쟁의 하나인 사칠인심도심 논쟁을 벌였고, 죽은 후에는 문묘에 나란히 종사된 조선시대를 통해 빛나는 붕우지교의 선례이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이이만한 유학자가 몇 분이나 있을까. 그러다보니 성혼을 이이와 비교하다보면 성혼이 이이에게 여러 면에서 양보하지 않을 수 없는 형국이 종종 발생하게 된다. 이이의 조숙 영민함을 성혼이 어찌 앞지를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성혼의 신독 독실함은 이이보다 넉넉함이 있다. 이이가 그 친구를 평한 글이 <연려실기술>에 실려 있다.

 

이이가 일찍이 공에게 이르기를,

“군은 7번이나 임금의 명을 받았는데, 어째서 한 번도 사은(謝恩)하지 않는가?”

하니, 공이 말하기를,

“예로부터 어디 나같이 병들고 무능한 자를 부른 때가 있었는가.” 하였다.

이이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인재는 각기 그 때를 따르게 마련이다. 소열(昭烈 유비의 시호) 때에는 공명(孔明, 제갈량(諸葛亮))이 으뜸가는 인물이었으나, 만약 그를 공자ㆍ맹자와 동시에 태어나게 했다면 공명이 어찌 제일가는 인물이 될 수 있었겠는가. 오늘날 세상에 마침 인물이 적고 보니, 소명(召命)이 어찌 그대에게 내리지 않겠나.”

하였다.

석담일기

 

10살 때 아버지 청송을 따라 파산(坡山 파주) 별장으로 왔다. 12, 3살에 글의 이해력이 날로 진보하여 강의를 기다리지 않고도 남김없이 환히 알도록 통달하였다. 17세에 생원ㆍ진사 양시의 초시에 합격하였으나 병 때문에 복시(覆試)에 응시하지 못하였다. 이로부터 과거에 뜻을 끊고 오로지 학문에 정력을 기울였다.
이이가 일찍이 말하기를,

“만약 도달한 견해에 대해 말하면 내가 약간 낫다고 하지만 독실한 지조와 행동에 있어서는 내가 미칠 바가 아니다.” 하였다.

<우계행장(牛溪行狀)>

 

당시의 명유들을 평한 <경연일기> 등에서도 드러나듯, 이이의 직필은 막역지우를 논하는 데에서도 여실하게 드러난다. 잘 알려진 것처럼 선조에게 성혼을 추천한 이가 바로 이이이니, 성혼을 제일 먼저 알아준 이가 이이가 아니면 누구이겠는가? 그렇기는 하지만 성혼을 면대한 자리에서

“오늘날 세상에 마침 인물이 적고 보니, 소명(召命)이 어찌 그대에게 내리지 않겠나.”

라는 표현은 역시 율곡만이 감히 할 수 있을 법한 직언이다.

이이가 성혼에 대해

“만약 도달한 견해에 대해 말하면 내가 약간 낫다고 하지만 독실한 지조와 행동에 있어서는 내가 미칠 바가 아니다”

라고 하여 재주나 학문적 경지에서는 양보하지 않는 이이였지만 돈후한 군자풍은 자신이 도저히 넘을 수 없다고 자신을 낮추고 있다. 여기서도 율곡의 꾸밈없는 솔직한 성품을 느낄 수 있고, 성혼의 근면독실한 군자의 풍모를 충분히 가늠해 볼 수 있다.

성혼이 왜란 중 처신과 관련하여 비판을 받은 데에는 두 가지가 있었으니 난리 중에 임금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는 것이 하나요, 왜와의 화친을 주장했다는 것이 또 하나다.

특히 성혼은 어려운 처지에 놓인 임금을 돌아보지 않았다는 이유로 관작을 후에 추삭 당하는데, 선조가 몽진할 적에 피난길에 있었으면서도 임금을 찾아뵙지 않았고, 선조가 의주에 머물면서 불렀지만 역시 가지 않았고, 광해군이 이천(伊川)에서 무군사(撫軍司)을 설치하면서 역마까지 보내 출발을 재촉하였으나 병으로 사양하였다가 겨울에 명나라 군사가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온 뒤에야 비로소 행재소(行在所)로 달려갔다는 죄명이다.

성혼의 처신을 두고 반대 당파만이 아니라 서인 내에서도 의견이 분분한 것으로 보인다.

 

사계가 당초에 우계(牛溪)에게 여쭈어 들었던 바를 가지고 일찍이 말하기를, “의혹이 없지 않다.”고 하였는데, 이는 사계의 견해만이 그런 것이 아니고, 우계 문하의 황(黃)ㆍ오(吳) 등 여러 사람들도 또한 모두 의심하였던 것이다. 오늘에 와서 우계의 의리로써만 단정하고 다른 여러 의리를 모두 쓸어버릴 수는 없다. 그러나 만역 혹시 사계의 의혹으로 말미암아 드디어 우계의 출처(出處)가 의리에 어긋남을 면치 못했다고 이른다면, 선비에 죄를 얻게 될 것이다.

노서집

<노서집>은 윤선거의 문집으로 성혼을 동정적으로 평하고 있지만, 사계가 이이의 고족으로 스승의 친구임에도 불구하고 그 행적에 대해 의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면 당시 유자들의 평가의 취향을 대강은 가늠할 수 있다.

성혼의 출처에 대한 변호로는 <노서집>에 기록된 탄옹 권시의 변이 가장 좋은 것 같다.

 

탄형(炭兄 권시(權諰)의 호)은 임진 때의 일을 의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심히 높이고 믿어서 항상 말하기를,

“부름이 없으면 가지 않는 의리는 오직 우계만이 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은 배울 수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진퇴(進退)와 동정(動靜)을 한결같이 우계와 같이 한 연후에야 이렇게 처신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벼슬아치로 임명되어 나갔다가 물러갔다가 하던 자는 아무리 배우려 해도 되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이는 탄옹의 견해가 아니다. 권 좌랑이 박 승지 등 여러 어른과 상의하여 확정한 것이었으니, ‘우계가 그르다’는 이론(異論) 속에서 나와 우뚝 서서 돌아보지 않은 채 옛 도(道)를 붙들어 세운 것이었다. 포저(浦渚 조익(趙翼))도 실상 권ㆍ박의 의논과 같았다.

노서집

 

성혼이 난리에 임금을 찾아보지 않은 것이 의리에 합당한 지를 따지는 것은 경도와 권도가 교차하여 의리의 가부를 따지는 것이 용이하지 않다. 그러하기에

“처음부터 끝까지 진퇴(進退)와 동정(動靜)을 한결같이 우계와 같이 한 연후에야 이렇게 처신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여 성혼이 평시에 보여주었던 진퇴의 의리를 살펴본다면 그 정상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을 것이라는 권시의 변은 참으로 탁견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