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직 준엄한 김성일


야사(연려실기술)를 통한 스토리텔링 7

강직 준엄한 김성일

 

봉 김성일이 임진왜란 발발 전에 왜정을 살피러 일본에 통신사로 다녀온 뒤

“왜가 군사를 일으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는 보고를 했음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의 오판은 10만 양병설을 주장한 이이와 대비되어 씻을 수 없는 오욕을 그에게 안겨주었다.

통신사로 다녀 온 후에 정사인 황윤길은 일본이 많은 병선(兵船)을 준비하고 있어 반드시 병화가 있을 것이며 도요토미는 안광이 빛나고 담략이 있어 보인다고 보고한 반면 김성일은 침입할 정형을 발견하지 못했으며 도요토미는 사람됨이 서목(鼠目)이라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하였는데, 서장관 허성은 정사와 의견을 같이했고, 김성일을 수행했던 황진(黃進)도 분노를 참지 못하여 부사의 무망(誣罔)을 책했다고 한다.

상반된 보고를 접한 조정의 신료들은 정사의 말이 옳다는 사람도 있었고, 부사의 말이 옳다고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이때는 기축옥사를 거치면서 동서의 정쟁이 격화되어서 자당(自黨)의 사절을 비호하는 느낌마저 없지 않았고 요행을 바라던 조정은 반신반의하면서도 결국은 김성일의 의견을 좇아 각 도에 명하여 성을 쌓는 등 방비를 서두르던 것마저 중지시켰다.

김성일의 보고가 있은 그 다음 해에 바로 임진왜란이 발발하였으니 김성일의 오판은 틀림없지만, 동인이어서 반대 정파인 정사의 의견에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는 비방은 그가 통신사 사행 중에 보여준 행적을 가지고 미루어 보자면 지나치다 할 것이다. 정조 때 간행된 <국조인물고> ‘왜난시정토인(倭難時征討人)’ 조에 정경세가 쓴 김성일의 비명이 실려 있는데 여기에 통신사 사행 기간 중 행적을 살필 수 있는 기록들이 있다. 그 중 한 대목을 살펴보면,

 

평수길이 여러 달을 미루고 국서를 제때에 받지 않으므로 거짓말이 퍼져 잡아 두어 욕보이는 것이라 하였는데, 꾀하는 자가 말하기를,

“민부경(民部卿) 법인(法印) 산구전 현량(山口殿玄亮)은 관백이 신임하는 자인데 지금 마침 외국에 관한 일을 맡았으니, 좋게 사귀어서 꾀할 만합니다.”

하자, 황윤길이 옳게 여기고 예물이라 핑계하여 후하게 뇌물을 쓰려 하므로, 공이 말하기를,

“빈객과 주인 사이에는 본디 예물이 있으나, 사명을 전한 뒤에 행하면 예물이 되고 오늘 행하면 뇌물이 될 것입니다. 우리들이 성주(聖主)의 명명(明命)을 받들고 와서 위덕(威德)을 선양(宣揚)하여 조대(朝臺) 아래에서 머리를 땅에 대고 절하게 하지 못하였는데, 도리어 뇌물을 써서 권신(權臣)에게 아첨한다면 군명을 욕되게 하는 것이 심하거니와, 죽더라도 할 수 없습니다.”

하니 황윤길이 굽혔다.

 

국서를 받아야 사행을 마무리 할 수 있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를 미루고 있는 상황에서 정사인 황윤길이 변통책을 내어서 상황을 타개하고자 하였지만 김성일이 엄준한 경도의 원리로 이를 물리쳤다는 내용이다.

이처럼 존왕양이의 춘추대의관이 분명한 김성일이기에 사행 후에

“도요토미는 사람됨이 서목(鼠目)이라 두려워할 것이 없다”

라고 한 보고는 결코 당파의 사감이 개입되어 황윤길과 다른 의견을 낸 것이 아니요, 그의 눈에는 실지로 왜의 군장에 지나지 않은 인물로 보였을 것이다. 물론 ‘침입할 정형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그의 말은 1년 후에 발발한 왜란으로 오판이었음이 분명해진 것처럼, 주관적인 의리관이 객관 상황을 간과한 잘못은 틀림없지만 말이다.

강직준엄한 김성일의 풍모는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연려실기술>에서는 그가 선조 초년에 선조의 중망과 사림의 추앙을 받았던 노수신을 탄핵한 일화가 실려 있다.

 

공이 근시(近侍)로 있어 임금에게 가까운 귀인들을 탄핵하니,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꺼려서 전상호(殿上虎)라고 일컬었다. 일찍이 장령으로 있을 때 임금이 경연에서 묻기를,

“근래에 도무지 염치라고는 없으니 어째서 그러한가?”

하니, 대답하기를,

“대신이 뇌물 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니 소관(小官)들이 무엇을 본받겠습니까.”

하였다. 이때에 정승 노수신(盧守愼)이 수석(首席)에 있다가 나와 엎드려 아뢰기를,

“신의 일가 사람이 북방의 변장(邊將)이 되어 신에게 노모가 있다고 해서 조그만 초피 덧저고리[貂裘]를 보내왔는데 신이 물리치지 못하였으니, 성일이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대간은 직언하고 대신은 과실을 자백하니, 둘 다 옳은 일이다. 신하들이 서로 책려(策勵)하니 국사를 할 수 있겠다.”

고 하였다. 수신이 나와서 사과하니 공이 말하기를,

“옛 도를 오늘 다시 보겠네.”

하였다. 《보감(寶鑑)》 《명신록》

 

전상호(殿上虎). 이 세 글자가 김성일의 강직근엄한 성품을 잘 드러내주는 것 같다. 어전에서 젊은 신료는 대신이 뇌물을 받았다고 탄핵하고 늙은 대신은 자신의 죄를 자복했다는 이 기사는 김성일의 강직근엄함과 노수신의 온화정직한 성품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아름다운 광경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