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이 향약 시행을 반대한 이유


<역사속의 율곡학 스토리텔링 22>

율곡이 향약 시행을 반대한 이유

 

1573년(선조 6년) 9월 21일, 율곡은 경연의 자리에서

“향약(鄕約)을 오늘날 시행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라고 말하며 향약 시행에 대해서 완곡하게 반대의견을 제시했다.

그 다음해(1574년, 선조 7년) 1월 1일자로 기록된 「우부승지 이이의 시폐와 재변에 관한 만언소」에서도 율곡은

 

“향약(鄕約)을 널리 실시하는 것이 아름다운 일이긴 하나, 어리석은 저의 생각으로는 지금의 풍속을 가지고 향약을 실시한다면 좋은 성과가 없을까 염려됩니다.”

 

라고 주장하였다.

향약이란 지방 향촌에서 백성들끼리 정한 약속으로 향촌의 자치 규약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향약을 중앙의 조정에서 실시를 논한다는 것 자체가 사실은 그 취지를 훼손시킬 수 있는 위험한 일이다. 자치 규약이 아니라 강제 규정으로 변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율곡은 그러한 문제점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당시 조정의 대다수 관리들의 의견은 향약 시행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면 1573년 9월에 율곡과 같이 경연에 참가하였던 김우옹(金宇顒, 1540-1603)은, 만약 향약을 당장 실행하지 않는다면 일을 크게 그르치게 될 것이라고까지 주장하였다. 김우옹은 당시 34세로 38세였던 율곡보다 4살 젊은 관료였다. 김우용 역시 율곡처럼 선조의 두터운 심임을 받았는데, 서인 그룹에 가까웠던 율곡과는 다소 대립적인 동인 그룹에 속한 인물이었다.
김우옹은 1573년에 이황에게 시호를 내리도록 건의하고, 또 조광조를 모신 도봉서원에 사액을 내리도록 건의하기도 하였으며, 1579년에는 율곡을 비난하는 사람들의 주장에 반박하고 율곡을 두둔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그도 적극적으로 향약을 지지했는데 율곡은 왜 향약 실시 반대 입장을 취했을까?

선조가 왕의 자리에 오른 이후에 향약 시행에 대해서 관료들의 제안이 잇달았다. 예를 들면 황억(黃億)이 상소를 올려 여씨 향약(呂氏鄕約)을 시행하자고 하였다. 이에 대해 예조에서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여씨 향약의 법을 시행하면 모든 사람들이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계하게 되어 교화를 베풀고 풍속을 바르게 하는 데 반드시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흉년을 만나 백성들이 기근과 추위를 면하기에 급급하여 예의를 돌아볼 겨를이 없습니다. 그런데 억지로 모이게 하여 향약을 강론하느라 분주하게 되면 소요가 일어날 폐단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니 유능한 인물이 많은 곳을 택하여 먼저 그 가능성을 시험해 보도록 하되 급하게 몰아치지 말고 점차적으로 시행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선조 4년, 1571년 2월 28일 선조실록 기사)

흉년으로 백성들에게 예의를 가르칠 여유가 없으며 또 향약을 가르치기 위해서 백성을 모을 때 소요 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선조도 이러한 예조의 지적에 따라 향약의 실시에 대해서 선뜻 반기지 않았다.

그러나 예조의 반대 의견에도 불구하고 홍문관(弘文館) 관리들은 1572년(선조 5년) 10월 25일에 또 다음과 같은 의견을 제시하면서, 향약 실시를 재차 요청하였다.

“임금이 재앙을 당하면 마땅히 두려워하고 스스로를 반성하고 수양해야 하며, 의견을 구하고 간언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요즈음 헌부(憲府)의 상소에 대하여 성상께서 짜증과 불평스러운 말로 답하셨으니, 말을 받아들이는 도량을 넓히기를 청합니다. 또 간원이 향약을 시행하자고 청하였을 때 성상께서 해괴한 풍속이라 하여 고인의 법도를 회복하는 것을 괴이한 일로 여겼으니 매우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홍문관의 이러한 건의에 뒤이어, 향약을 시행하자는 관리들의 간언이 잇달아 올라오자 선조는 결국 마지못해서 향약의 실시를 허가하였다.

그러한 임금의 결정에도 율곡은 향약 실시에 대해서 반대를 하였는데, 그는 아직 그것을 실시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1574년에 임금께 올린 만원소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성상(임금)께서 처음 자리에 오르셨을 때는 백성들 사이에 희망에 차서 그런 대로 선을 지향하려는 생각들이 많았습니다. 만약 그때에 성덕(聖德)이 날로 풍성해지고 정치가 날로 향상되었더라면 오늘날의 인심이 어찌 이 지경에 머물러 있겠습니까? 오직 초년(初年)에 대신들의 보필이 적절하지 못했기 때문에, 전하를 천박한 법규로 그르치게 하고 민생을 비천한 지경으로 몰아넣었습니다.

대신들이 간혹 공명(公明)한 마음으로 공론을 제기하기도 하였으나, 깨끗하고 올바른 의견은 미약하고 저속한 견해가 고질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선한 말을 듣거나 선한 사람을 보면 남의 체면 때문에 흠모하는 자도 있고, 겉으로는 좋아하는 체 하면서 속으로 꺼리는 자도 있고, 혹은 버젓이 손가락질하면서 비난하는 자도 있었는데, 진심으로 선한 말과 선한 사람을 좋아하는 자는 아주 드물었습니다.”

율곡의 생각으로는 선조 초년에 임금을 보필하던 신하들이 정치를 잘못하여 백성들의 삶이 궁핍해졌다는 점, 그리고 진심으로 선한 말과 선한 사람을 좋아하는 자가 드물다는 점을 든 것이다. 선한 말과 선한 사람을 좋아하는 자들이 드물다는 것은 백성들 사이에서 보다는 백성들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관리들 사이에서의 사정을 말한 것이다.
그는 대신들 사이에 저속한 견해가 고질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선한 말을 듣거나 선한 사람을 보면 남의 이목 때문에 겉으로는 좋아하는 체 하지만, 사실은 속으로 꺼린다는 것이다. 혹은 버젓이 손가락질하면서 비난하는 자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한 말과 선한 사람을 좋아하는 자는 아주 드물었다고 하였는데, 요컨대 관리들 자신들이 향약과 같은 도덕적인 규약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1573년 9월 21일에 향약을 반대하면서 율곡이 지적한 이유가 바로 그러한 것이었다. 그는 ‘여러 분야의 정치가 원활하지 못하고 백성들이 고달프기’ 때문이라고 하였는데, 백성들이 궁핍해져 있고, 관리들이 그러한 제도를 실시할 만큼 성숙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1574년에 올린 만언소에서 그는

“지금의 습성을 가지고 향약을 실시한다면 좋은 풍속을 이룩하는 성과가 없을까 염려됩니다.”

라고 한 것이다. 관리들 자신들이 변하지 않는 상황에서 향약을 실시하게 된다면 향약의 취지가 변질되어, 소기의 성과를 이루기 힘들 것이라고 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