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멸망하는 길


<역사속의 유교이야기 17>

나라가 멸망하는 길

 

람들은 누구도 자신이 살고 있는 나라가 멸망하여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고대에도 현대에도 나라의 멸망은 바로 자기 자신, 나아가 자기 가족, 친척, 그리고 자기 마을이 파괴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현자들이 오래전부터 나라가 멸망하는 일에 대해서 수없이 지적을 해왔다. 예를 들면 ⌈맹자⌋는 이렇게 말했다.

“나라 안에는 법도를 잘 지키는 신하와 보필을 잘 해주는 신하가 없고, 나라 밖에는 적국이나 외환이 없다면, 그 나라는 반드시 망한다.
(入則, 無法家拂士, 出則, 無敵國外患者, 國恒亡.)”

안으로 지혜로운 신하가 없고 법률이 무시되고, 밖으로 그 나라를 위협하는 세력이 없다면, 즉 무사태평하다면 반드시 망한다는 것이다.

관자도 나라의 지도자가 군비폐지를 귀담아 듣고, 나라 안 밖으로 차별 없는 사랑을 부르짖으며, 일상생활을 탐닉하고 사사로운 논의를 귀하게 여기며, 황금과 재물을 좋아하고, 사람들과 어울리며, 보고 즐기는 것에만 집착하며, 궁중에는 벼슬의 청탁이 횡행하고 아첨과 허물을 덮는 일이 만연하면 국가는 멸망의 길을 걷는다고 하였다. 양육강식의 사회에서 살았던 춘추전국시대 사람들의 생각이지만 오늘날의 상황에도 틀리지 않는 말이다.

조선이 일본에 군사적으로 압도당하여 멸망의 길에 놓이게 된 것은 선조 때의 일이었다. 당시 지식인들은 어떤 생각을 하였으며, 선조는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 선조 초년에 있었던 경연의 기록은 그러한 것들에 대한 대답을 해준다. 퇴계 이황이 참석했던 1567년 겨울 11월 17일(음력)의 기록이다.

 

“천지는 만물을 생성(生成)하는 것으로 근본을 삼습니다. 변화와 운행이 잠시도 쉬지 않고, 만물이 각기 성명(性命)을 바르게 가지니 이것이 이른바 인(仁)입니다.”

 

성명(性命)이란 본성과 본래 지니고 태어난 운명적인 것을 말한다. 세상의 모든 사물들은 그러한 본래적인 것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인자함(仁)이라는 것이다. 엉뚱하게 사물들에 대해서 말하면서 인간의 도덕적인 품성 중 하나인 인자함을 언급한 것은 사물과 인간을 하나의 범주에 넣어서 설명하려는 것으로 성리학의 큰 특징 중 하나다. 퇴계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세상은 처음 개벽한 이래 거칠고 소박할 뿐이었는데 복희(伏羲)에 이르러 팔괘(八卦)를 그리고, 신농(神農)이 온갖 풀을 맛보아 의약을 제조하였으며, 황제(黃帝) 때에 비로소 제도를 만들고, 요순(堯舜) 때에 인문(人文)이 크게 갖추어졌습니다.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제위를 물려주면서 ‘진실로 중(中)을 잡아야 한다.’고 하였고, 순임금이 우(禹)임금에게 위를 물려주면서 ‘인심(人心)은 위태롭기만 하고 도심(道心)은 은미하기만 하니 오직 정밀하고 전일하여야 진실로 그 중을 잡을 수 있다.’라고 하여 그 당시에는 제왕이 서로 전하던 법을 중(中)자로써 말하였습니다.”

퇴계가 말하는 복희, 신농, 황제, 요임금, 순임금은 중국의 역사에서 실존한 인물들은 아니다. 우임금은 하나라를 세웠다고 하는 왕인데, 중국의 역사는 이 하나라에서 시작하여 은나라(상나라), 주나라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왜 퇴계는 이들을 언급하였을까? 중국의 철학자들, 즉 공자, 맹자 이후로 주자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실존했던 인물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의 의견을 쫒은 것이다. 중국인들은 특히 요, 순, 우 등의 임금을 이상적인 정치가로 보았으며, 요순시대와 같은 사회를 중국 사회가 추구해야할 궁극의 목표로 삼았다.

퇴계는 다음과 같이 설명을 이어갔다.

“기자(箕子)가 무왕(武王)을 위하여 홍범(洪範)을 진술했는데 ‘임금은 그 극(極)을 세우는 것이다.’라고 하여 그 때에는 극(極)자로 말했습니다. 공자에 와서 비로소 인(仁)자를 말했는데 공자 문하의 제자들 역시 ‘인’을 많이 질문했으며, 맹자(孟子)에 이르러서는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아울러 말하여 그 뜻에 있어 부족함이 없게 되었습니다. ‘인’은 임금에게 있어서 매우 중대하니 한번 호령하고 한번 생각하는 때에도 모두 ‘인’으로 마음을 삼아야 합니다.”

기자는 조선으로 망명하여 기자 조선을 세운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은나라 말기의 인물로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새롭게 등장한 주나라의 창건자 무왕을 위해 공헌을 하여 무왕이 은나라의 폭군인 주(紂)를 벌하고, 기자를 조선에 책봉하였다고 한다. 그 기자가 말한 ‘극(極)’이 나중에 공자, 맹자에 이르러 인(仁)사상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이다.

퇴계는 또 이렇게 말했다.

“임금의 악덕 중에 욕심 많고 사나운 것이 가장 큽니다. 임금은 항상 본심을 단정히 하고 근원을 맑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백성들이 난을 일으킬 염려가 없게 됩니다. 한 사람이 나라를 안정시킨 경우는 바로 요임금과 순임금입니다. 후세의 임금들은 명령을 내리고 시행하는 과정에서 선을 행하면 망해가는 나라도 안정이 됩니다. 하지만 실로 조그마한 악이라도 있게 되면 아무리 굳건하던 나라도 역시 멸망하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한나라가 안정의 길로 가느냐, 멸망의 길로 가느냐는 그 나라 임금이 정치를 하는데 선한 마음을 가지고 하느냐, 악한 마음을 가지고 하느냐에 따랐다고 본 것이다. 그렇다면 선조가 퇴계로부터 이러한 가르침을 들은 25년 뒤, 즉 1592년에 조선이 일본의 군대에 멸망의 문턱까지 가게된 것은 선조가 그 마음속에 악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혹시 퇴계에게 물어본다면 ‘그렇다’고 대답할지 모른다. 선조의 마음가짐이 왕이 된 첫해부터 시작해 차츰차츰 헤이해진 측면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선조 1인에게 모든 책임을 물을 수는 없을 것이다. 선조를 둘러싼 신하들, 특히 정책을 검토하고 추진한 신하들에게도 책임이 있을 것이며, 더 크게는 당시의 대학자들 예를 들면 퇴계 이황이나 고봉 기대승 등과 같은 대학자들에게도 나라가 그렇게 되도록 한 책임이 없을 수 없을 것이다.

이들의 뒤를 이어 선조를 가르치게 된 율곡은 어떤 방도를 제시하였을까? 크게 보면 같은 성리학자로서 율곡도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었지만, 율곡 나름의 미묘한 차이를 드러낸다. 율곡의 문장을 읽는 묘미는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