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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조(李賀朝:1664~1700)


이하조(李賀朝:1664~1700)                                 PDF Download

 

의 자는 낙보(樂甫), 호는 삼수헌(三秀軒)이며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증조는 이정귀(李廷龜)이며 조부는 이명한(李明漢)이고 아버지는 이단상(李端相)이다.  이단상은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과 깊은 학문적 교류를 가진 인물로 율곡의 계열로 분류된다.  이단상의 문하에 임영(林泳), 김창협(金昌協), 김창흡(金昌翕) 등이있다. 이가운데김창협은 그의 사위였으니 이하조에게는 자형(姊兄)이 된다. 이하조 의 형 이희조(李喜朝) 역시 송시열의 문하생이다.

이하조는 6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형 희조를 따라 공부 하였으므로 아버지의가 르침을 전혀 받지 못하였다. 그럼에도19세 되던1 682년에 사마증광시(司馬增廣試)에 합격하여 진사(進士)가 되었다.  그 뒤 대과(大科)는 단념한 채 학문에만 매진하였으며, 영지동(靈芝洞)에 집을짓고 삼수헌(三秀軒)이라 이름지었다.  이해에 형  희조와 함께 여강(驪江)으로 송시열을 찾아가 출처(出處)의 의리에 대하여 자세히 들었다.  송시열의 문인이 되어 성리학(性理學)과 경서(經書)를 주로 공부하였지만 시인(詩人)으로서의 면모를 보이기도 하였다.  때로 친구들과 산림을 유람하며 한아(閑雅)한 취미를 길러 시(詩)로 묘사하기도 하였다.

1686년 (숙종12) 3월에 형 희조와 우거하 고있던 민태중(閔泰重)과 학궁(學宮)의 제생 10여명이 파계(巴溪)로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을 찾아가《주자대전(朱子大全)》 의교정(校訂)하는 일을 도왔다.  이 시기에 간간히 시간을 내어 강산을 유람하며 시회(詩會)를 갖곤 하였는데 헤어질 때에 돌아오는 여름에 상당(上黨: 지금의 청주(淸州))과상산(常山)의 경계에서 모임을 갖기로 하였다.

기일(期日)이되어 우암은 손자 인주석(疇錫)을 대동하고 상당 남쪽경계에 성묘를 하였다.  이때 이희조가 기년상(朞年喪)을 당하여 서울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암이 그와 만나지 못하는 섭섭한 마음을 안고 파계로 돌아왔는데 이하조가 상산에서 뒤 따라와 서형이 머지않아 돌아올 것이라고 전하자,  산중에 오래 머물면서 그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그런데 조정에서 들려오는 여론이《주자대전(朱子大全)》에 차의(箚疑)하는 것은 망녕되게 국법에 저촉된다 하여조정의 논의가 매우 부정적이라는 것이었다.  이 소식을 듣고 우암은 탄식하며 산을 내려와  소장(疏章)을 올려 죄를 청하였다.  이 때문에 산속에서 이희조를 기다리고자 했던 계획이 어긋나게 되었음을 토로한 적이 있다.
우암이 82세의 나이로 이해 7월에 쓴 편지에 그 내용이 보인다.  이후로도 우암과 편지를 주고 받았는데 1688년(숙종14년) 이하조는 파계에서 모였던 일을 추억하였으며, 우암은 제자에게 답한 편지 글에서 그날의 모임에 대한 의미를 찾으며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안타까워 했다.

1694년(숙종20)에 시국이 안정되는 모습을 보이자, 친구들이 과거에 응시할 것을 권하였지만 응하지 않았다.  그 뒤에 세자 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의 제명(除命)에 응하였던 것은, 선대(先代)의 공음(功蔭)을 이어받아 벼슬하는 것이 세신(世臣)의 본분이며, 고을을 얻어 봉양하기에 편리하게 하려 한 것이었다. 시직(侍直)과 부솔(副率)주부(司僕寺主簿)가 되고 공조좌랑(工曹佐郎)이 되었다. 1698년(숙종24)에는 부평현감(富平縣監)이 되어 어진정사를 폈다. 이때에 정사를 보던 곳의 이름을《대학(大學)》의<청송장(聽訟章)>을취하여 ‘사무헌(使無軒)’이라고 하였다. 이 말은 공자(孔子)가 말한

“송사를 처결하는 것을 내가 남들처럼 할 수는 있지만,  반드시 처결해야 할 송사 마저도 일어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라고 한데서 인용한 것이다.

이런 내용으로 자형인 김창협(金昌協)에게 편지를 보내어 가르침을 구하였다.  김창협은 이에 대하여 처음에는 “송사를 없게한다.”는 말은 성인(聖人)의 일로서,  명덕(明德)을 밝히고 백성 을새롭게 한 뒤의 최고의 보람인 것인데,  어찌 그가 미칠 수 있는 경지 이겠느냐며 부정적인 시각을 가졌다.
그러나 그 뒤에 생각해보니 처남인 이하조가 어진 마음에서 출발하여 송사를 판결하지 않은 것이지,  단순히 편리를 추구하여 그런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처남이 어찌 송사가 없는 것이 오늘날엔 도저히 미칠 수  없는 성인의 일인 줄 몰라서 그렇게 하였겠는가 하며 반문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 말로 헌(軒)의 이름을 지어 자신의 뜻을 드러내었으니 훌륭한 일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700년(숙종26년) 병으로 경사(京師)에 돌아가 강도유수(江都留守)가 되었으나, 친분으로 인해 공정하지 못하다는 오해를 받을 소지가 있 는의혹으로 벼슬이 갈렸고,  병이 위독해져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였다.  7월 10일37세의 나이로 운명하였으며 처음에 영지(靈芝)와 7리 떨어진 비교적 가까운  독정리(獨井里)에 장사 지냈다가 1710년(숙종36년) 3월에 용인 문수산(文秀山) 선영(先塋)으로 옮겼다.

그는 안동(安東) 김창국(金昌國)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두었으나 일찍 죽었다.  그리하여당 형(堂兄)인 감사(監司) 이해조(李海朝)의 아들 숭신(崇臣)을 후사로 삼도록 하였으며,  네 명의 딸을 두었다.  숭신은 부사(府使)심징(沈徵)의사 위가되었다.

그의 자형인 김창협이 지은 뇌문(誄文)을 보면

“언의(言議)가 구차하지 않고 식견이 분명하고 발랐으며,  문사가 통창(通暢)하고 풍조(風調)가 울연(蔚然)하였다.”

라는 글이 보인다.  또 외사촌형인 서종태(徐宗泰)가 쓴 묘지명에 는

“세덕(世德)을 계승하여 집안에서 닦고 성대한 재능을 온축하였으니,  나와서 명예를 구하였으면 세상에 그 보다 앞설자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취를 거두어 스스로 진취(進取)하여 달려 나아가는 길에서 멀어진 것이 이미 고상하다.”

고하였다.

당시에 그가 지은 시문(詩文)이 1천여 편이 있다고 하며,  권상하(權尙夏)의 묘표에는 그의 유고 4책이 있다고 하였다.  지금 전해 오는 저서는《삼수헌고(三秀軒稿)》이다.  이유고는 자형인 김창협과 동생 김창흡이 산정한 고본(稿本)으로 이하조의 형 희조가 부록 등을 증보한 것인데,  친구인 나주목사(羅州牧使) 조정만(趙正萬)의 협조를 받아 그의 사후 13년이 지난 뒤에 발행한 5권 1책이다.

이인상(李麟祥: 1710~1760)


이인상(李麟祥: 1710~1760)                                 PDF Download

 

의 자는 원령(元零), 호는 능호관(凌壺觀) 보산자(寶山子)· 보산인(寶山人)· 종강칩부(鍾岡蟄夫)· 뇌상관(雷象觀)· 운담인(雲潭人)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증조부 이민계(李敏啓)는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낸 백강(白江) 이경여(李敬輿)의 서자(庶子)였다.  그가 9세 때에 아버지 이정지(李挺之)가 34세의 나이로 죽자,  어머니와 함께 어려운 생활을 하면서도 삼촌인 이최지(李最之)로부터 글 배우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고향에서 유년기(幼年期)를 보내고 22세 때 서울로 올라와서 26세에 진사시(進士試)에 입격(入格)하고,  이후 38세 때까지 관직생활을 하였다.  덕수장씨(德水張氏)를 아내로 맞이하여 4남 1녀를 두었는데, 그의 친구인 송문흠(宋文欽)과 신소(申韶)가 집을 마련해 주었고 송문흠은 이를 “능호관(凌壺觀)” 이라고 이름을 지어 주었다.
호(壺)자는 방호(方壺),  곧 방장(方丈)이라는 뜻 이므로 결국 자신의 집은 방장산(方丈山)의 경관을 뛰어 넘는다는 뜻을 갖는다.

38세 때인 1747년에는 중앙관직에 있다가 경상남 도함양군(咸陽郡) 의 사근찰방(沙斤察訪)으로 나갔다.  41세 때인 1750년에는 경기도 이천군(利川郡) 장호원읍(長湖院邑)에 위치한 음죽현감(陰竹縣監)에 부임하였다.  음죽현감으로 있으면서 강직한 성품 때문에 관찰사와 다투고서는 관직에서 떠났다.
42세 때인 1751년에는 친구 이윤영(李胤永)이 은거하고 있는 단양(丹陽)을 찾아가 은거하고자 하였으나 오래 있지는 못하였다.  다시 음죽현 서쪽설성(雪城)의 종강(鍾崗)에 칩거하여 여생을 보냈다.  그곳에 지은 정자는 “종강모루(鍾崗茅樓)”라고 이름을 지었다.  48세 때인 1757년에 부인을 잃고 51세 때인 1760년에 자신의 생을 마감하였다.

이인상은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문인 화가(文人畵家)이자 서예가(書藝家)로 알려져 있다.  그가 교류했던 인물들은 대부분 도암(陶菴) 이재(李縡)의 문인이다.
도암은 스스로

“정암(靜庵)과 율곡(栗谷)은 나의 스승이다”

라고 말하며 깊이 사숙(私淑)했던 인물이다.  또한 이인상이 사숙했던 인물로는 삼연(三淵) 김창협(金昌協)과 지촌(芝村) 이희조(李喜朝) 등의 노론계 학자들이었다.
율곡의 문하에 김장생이 있었고 김장생의 문하에 송시열이 있었으며 송시열의 문하에 김창협과 이희조가 있었다.  그 역시 노론의 학맥을 유지하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와 교유했던 인물로 “능호관기”를 써 주었던 송문흠을 비롯하여 시서화(詩書畵)에 능했던 이윤영(李胤永) 이있다.  송문흠은 그의 형 송명흠(宋明欽)과 함께 도암의 제자이다.  이윤영은 목은 이색(李穡)의 후손으로 이인상의 그림에 화제(畫題)를 많이썼다.  또한 신소(申韶), 오찬(吳瓚)과도 정치적 입장이나 문예적 인삶의 자세를 공유하였다.  이외에도 당대에 시서(詩書)에 명성이있었던 황경원(黃景源),  평안관찰사,  대제학,  좌의정을 지낸 문장가 였던 김종수(金鍾秀),  이조판서를 지낸 이최중(李最中)이 있었다.  또 광산 김씨 가문의 김순택(金純澤),  김무택(金茂澤) , 김양택(金陽澤),  김상악(金相岳),  김상숙(金相肅)과도 평생 동안 교유하였다.

이인상은 시서화(詩書畵)는 물론 전각(篆刻)에도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였다.  이미 당대에 많은 문인들이 그의 글씨와 그림에 대하여 인정하는 평가를 남겼다. 후대의 인물 김정희(金正喜) 역시 높은 감식안 으로 그의 예법(隷法)과 화법(畫法)에 문자기(文字氣)가 있다고 말하였다. 특히 김정희와 이윤영은 집안 대대로 인척관계를 맺고 있어서 그 교류하는 양상인 남다른 면이 있었다.

이인상은

“명나라는 부모의 나라이니, 부모의 원수는 의리에 있어 반드시 복수해야 한다.”

라고 하여 ‘반청의식(反淸意識)’을 가졌다. ‘대명 의리론(大明義理論)’를 견지함으로써 복수하려는 의리를 지키는 것이 사대부의 의무라고 생각하였다.  그의 고조부 이경여가 대표적인 반청주의자로서 심양에 억류되었던 사실이 있었던 것도 연결하여 생각해 볼 수 있다.
‘대명의리론’과 관련하여 옛것을 좋아하는 상징적문화  행위는 북벌(北伐論)이 쇠퇴하 는현실과 타협하지 않겠다는 생각의 반영으로 고동(古董) 수집과 감상에의 취향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그가 추구한 고(古)의 의미를 풀어보면, 역사적으로는 ‘선진(先秦)시대 이전’을 가리키고,  도덕적으로는 ‘세속적 가치와의 비타협’을,  정치적 차원으로는‘ 사대부적 처신과 의리의 강조’로,  문예적 차원으로는 ‘고문과 고동(古董)의 애호’로 드러났다.

그의 친구인 청천자(靑川子) 임경주(任敬周)에 따르면 이인상은 문(文)과 도(道)를 병행했던 까닭에,  문장가와 도학자 모두에게서 비판을 받았다고 한다.  문장가는 그에게 도에 힘쓰면 문에 전력할 수  없다고 말하였으며,  도학자는 그에게 외식(外飾)하는 문이 아니라 본질이 되는 도에 힘쓰라고 말했다고 한다.  임경주의 이러한 말을 참고하면 이인상은 문(文)과 도(道)를 모 두중시했던 이유로 도학가와 문장가 모두에게 공격 받을 수  있는 여지가 있었던 것이다.  즉 도학과 예술을 엄격히 구분하는 기준으로는,  도학에 전일하지 않는 인물로 간주되거나 문학의 독자성을 인정하지 않는 인물로 이해 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친구와 사귀며 편지를 주고 받을 때는 비교하는 마음을 일체 경계 해야하며,  잘난 체하는 마음을 일체 경계 해야하고,  잘못을 숨기는 마음을 일체 경계 해야한다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교우(交友)에서 경계 해야 할 마음가짐을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겠는데,  이는 곧 비교하는 마음,  잘난 체하는 마음, 잘못을 숨기는 마음이다.  이 세 가지를 전체적으로 말하자면 도의에 입각한 교우를 위해서는 사귐을 맺은 두사람 사이에‘ 진실한 마음을 수반한 상호 수평적 관계’가 전제 되어야함을 말한 것으로 이해 할 수 있겠다.

이인상과 그 친구들의 문예 취향(文藝趣向)은 이른바 동시대 경화사족(京華士族)과는 뚜렷한 거리를 두고 있다.  조선후기 경화사족은 일반적으로 서울에 거주하면서 많 은재력을 바탕으로 서화고동(書畫古董)과 서적(書籍)을 모으며 자신들의 품격있는 삶을 지향하였다.  그러나이 인상과 그 친구들은 경세적(警世的)인 성격을 띠고 있었음이 확연히 드러난다.  이인상은 서얼 출신(庶孼出身) 이었으나 사대부들과의 폭넓은 교유를 하였으며 아울러 사회적 약자들에게 까지 도관심을 나타냈었다.  일반적인 은일자(隱逸者)로 불리는 것을 꺼렸으며 현실과의 문제를 끊임 없이 고민했던 예술가 이자 문인이었다.

그의 문집으로는《능호집(凌壺集)》, 필사본《뇌상관집(雷象觀集)》, 또
다른 필사본으로《뇌상관고(雷象觀藁)》가 있다.

이이명(李頤命:1658~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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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지인(智仁)· 양숙(養叔), 호는 소재(疎齋)이다.  세종(世宗)의 서자(庶子)인 밀성군(密城君) 이침(李琛)의 후손으로, 영의정을 지낸 이경여(李敬輿)의 손자이며,  생부(生父)는 대사헌을 지낸 이민적(李敏迪)인데 지평 이민채(李敏采)의 양자가 되었다.  생부가 홍문관(弘文館)책을 읽게 한 적이 있었다고 전한다.  어머니는 창원 황씨(昌原黃氏)인데 의주 부윤 황일호(黃一皓)의 딸이다.

외조부는 박장원(朴長遠)이며,  장인은 김만중(金萬重)이다.  당색으로는 서인(西人) 이었다가 그후 노론(老論)이 되었다.
숙종(肅宗)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에 기용된 후 1680년(숙종6년)에 별시문과(別試文科)을과(乙科)에 급제하고 1686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재차 급제하여 당상관(堂上官)이 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때 사형당한 이사명(李師命)의 동생이라는 이유로 남인(南人)들에게 집중 공격을 받았다.  기사환국때 송시열(宋時烈)등과 함께 죽은 형이 정치적으로 신원(伸冤)되지 못하자,  대사간(大司諫)으로 있으면서 1698년 이를 문제삼았다가 공주(公州)로 유배되었다.
이듬해에 유배에서 풀려나 석방 되었지만 1701년이 되어서야 예조판서(禮曹判書)가 되었으며 그 뒤에 이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여러벼슬을두루거친후에1706년(숙종32년)에우의정(右議政)에제수되고, 1708년(숙종34년)에좌의정(左議政)과영의정(領議政)을역임하였다.

이이명은 숙종(肅宗)을 섬김에 다른 신하들 보다도 인정을 많이 받았다.
1710년(숙종36년)에 내의원(內醫院)것이 전후로 11년이나 된다.  그의 정성을 아름답게 여긴 숙종이
“내 병을 근심하는 자는 경(卿) 한 사람뿐이다.” 라고 까지하였다. 1717년 숙종의 임종 직전에 홀로 임금을 마주하였을 때 소론이 지지하는 세자(世子) 곧 훗날 경종(景宗)에게 불리한 말을 하고 노론이 지지하는 연잉군(延礽君) 곧 훗날 영조(英祖)를 지지하였다 하여 소론과 남인들로부터 불만을 샀다.  이 당시 노론의 영수인 이이명이 숙종과 독대한 내용은 숙종 이사관(史官)들을 교묘하게 따돌렸기 때 문에《실록(實錄)》에 전하지 않는다.  숙종이 승하(昇遐)하자,  그가 고부사(告訃使)의 자격으로 청(淸)나라 연경(燕京)에 가서 이 사실을 알리고 돌아왔다.

포르투갈 신부 사우레즈 등을 만나 교유(交遊)하면서 천주교(天主敎)· 천문(天文)· 역산(曆算)· 지리(地理) 등에 관한 책을 가지고 이듬해 돌아와 국내에 소개하기도 하였다.  당시 연경에는 네 군데의 천주교 회당이 있었고 신부들이 상주하며서 양과학과 종교를 전파하고 있었다.  이때에 아들 이기지(李器之)가 함 께동행하였는데, 사우레즈 등에게 서양식 계란 떡,  지금의 카스텔라를 대접받았다.  숙종의 주치의 이시필(李時弼)도 동행했었는데, 훗날 귀국하여 서양식 계란 떡을 만들어 보려하였으나 그 맛을 내는 것은 실패하였다고 한다.

당시 글루텐 성분이 적은 우리의 밀가루로 반죽을 만들었으나 제대로 부풀어 오르지 않은 까닭이었다. 노론(老論)의 영수(領袖)인 그가 실생활에 긴요하게 사용되는 벽돌을 이용한 온돌 개발과 풀무를 이용하여 열효율을 높이고자 했던것과 외발수레의 사용 등 청나라의 문물에 개방적인 태도를 취한 것은 특기 할 만하다.

노론을 주도하며 주자도통주의(朱子道通主義)에 기반을 둔 정치이념을 적극 실현하고자 하였고,  서양의 학술 사상(學術思想)을 국내에 소개하기도 했던 그는 또 일찍이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서양문물(西洋文物)과 지도(地圖) 입수에 심혈을 기울였다. 특히, 요동(遼東)과북 경(北京)에 이르는 지형의 군사 형세를 그리고,  관방(關防)에 관련된 내용을 기록한 국방 지도인<요계관방지도(遼薊關防地圖)>를 만들어 숙종에게 올렸다.  이 지도는 청나라에서 구입한《주승필람(籌勝必覽)》안에 들어있는 <요계관방도>와,  모사한<산동해방지도(山東海防地圖)>에 우리나라 관방의 중요 부분을 더하여 제작한 것이다.

그는 또 양반 사대부에게도 군포(軍布)를 징수해야 한다고 주청한 바있는데,  그의 주장은,  이들 역시 조선의 백성이므로 양민(良民)들과 동등하게 병역(兵役)을 적용하고,  병역 을징발하거나 군포와 호포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었다.  그러나 이 주장은 곧 남인(南人)과 서인(西人) 모두에게 지지를 받지 못하였다.

그런가하면 1721년(경종1년)에는 영의정 김창집(金昌集)과 충익공(忠翼公) 조태채(趙泰采)와  종부제(從父弟)인 충민공(忠愍公) 이건명(李健命)과 함께 어전에서 연잉군을 왕세제(王世弟)로 책봉할 것을 주청하다가 소론의 반대 로그 결정 이철회되자,  유봉휘(柳鳳輝) 등의 탄핵을 받고 남해(南海)로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이들 세명과 함께 이이명을 포함하여 노론 사대신(四大臣)이라고한다.  이러한 와중에 목호룡(睦虎龍)의 고변(告變),  즉 노론이 숙종 말년부터 경종을 제거하려고 음모를 꾸몄다는 고변을 계기로,  8개월 동안 국문(鞫問)이 진행되었다.  그 결과 다음해 인1722년(경종2년)에 체포되어 한강 나루에 이르러 사사(賜死)되었다. 그의 시신은 공주(公州) 죽곡(竹谷)에 장사 지냈다.  이를 역사에서는 신임사화(辛壬士禍)라고 부른다.  이때에 노론의 많은 인물들이 화를 입었다.  아들 이기지도 1721년에 죽음을 맞이하여 아버지보다 먼저 죽었다.

그 뒤 1725년(영조원년)에 적신(賊臣)을 주벌(誅罰)하고 군흉(群兇)을 귀양보내는 한편, 충성을 포상하고 죽음을 애도하는 은전(恩典)을 크게 베풀게 됨에 따라 그의 벼슬이 회복되었고 시호가 내려졌으며 과천(果川)의 사충서원(四忠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1727년(영조3년)에 임천(林川) 옥곡(玉谷)에 묘를 다시 써서 장사지냈다.

저서 및 작품으로는 《소재집(疎齋集)》20권과 <강역관계도설(疆域關係圖說)>· <동국강역도설(東國疆域圖說)>· <양역변통사의(良役變通私議)>· <전산촬요(田算撮要)>· <강도삼충전(江都三忠傳)>· <요계관방지도(遼薊關防地圖)>가있다.

이의현(李宜顯: 1669~1745)


이의현(李宜顯: 1669~1745)                               PDF Download

 

의 호는 도곡(陶谷),  자는 덕재(德哉)이며 본관은 용인(龍仁)이다. 파주 목사(坡州牧使)를 지낸 이정악(李挺岳)의 손자이며,  좌의정(左議政)을 지낸 이세백(李世白)의 아들이며,  김상헌(金尙憲)의 손녀 사위이다.  명망있는 가문에서 성장한 그는 김상헌의 증손인 김창협(金昌協)의 제자가 되어 수학하였다.
율곡의 문하생이었던 김장생(金長生)과 김장생의 문인이었던 송시열(宋時烈)과 송시열의 문하생이었던 김창협으로 학맥이 이어진다.

이의현의 어린시절은 남인(南人)과 서인(西人)이 경쟁하고 또다시 서인이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나뉘던 때였다.  그는 1694년 26세의 나이로 별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기 전까지 아버지와 여러 스승으로 부터 수학하였다.  아버지로부터 《훈몽자회(訓蒙字會)》, 《사략(史略)》, 《당시(唐詩)》, 《소학(小學)》등을 배웠으며,  당시 대사간(大司諫)이었던 이혜(李嵇)윤이건(尹以健) ,윤이성(尹以性)형제에게도 수학하였다.  11세에는 이모부(姨母夫)인 이수실(李秀實)에게 《사략(史略)》7권을 배웠다.  12세에는《효경(孝經)》, 《논어(論語)》, 《시경(詩經)》, 《사기(史記)》를 배우고,  당시(唐詩)한유(韓愈)의 시(詩)를 읽었다.

13세에는 우홍성(禹弘成)의 집을 왕래하며 공부하였다.
15세가 되던 1683년에는 김창협을 빈객(賓客)으로 모시고 관례(冠禮)를 올렸으며 그해1 0월에 관찰사를 지낸 함종어씨(咸從魚氏)  진익(震翼)의 딸과 처음 결혼을 하였다.  이후 황해감사(黃海監司)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 해주(海州)로 갔으며 그 뒤 평양(平壤)과 경기도 광주(廣州)에서 지내며 학문을 연마하였다.

21세가 되던 1689년에는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인하여 서인(西人)이 실권(失權)하고 남인(南人)이 득세하였다.  이때 아버지를 따라고양(高陽)의 원당(元堂)으로 이사했다가,  그 이듬해에 경기도 광주로 이사하여 시(詩), 산문(散文), 변려문(騈儷文) 등의 공부에 주력하였다.  그 뒤 기사환국 때 장희빈에게 쫓겨 났던 인현왕후(仁顯王后)가 1694년 갑술환국(甲戌換局)을 맞이하여 다시 중전(中殿)의 자리로  돌아온 것을 기념하여 베푼 별시(別試)가 있었다.

이때 아버지인 이세백과 김창협의 요청에 따라 과거에 응시한 결과 합격하였다. 그 뒤 벼슬길에 올라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을 비롯하여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 ,승정원 도승지(承政院都承旨),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등 청요직(淸要職) 을두루거쳤다.

35세 되던 1703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49세 되던 1717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모두 3년 동안의 상복을 입으며 효를 다하였다. 1720년에는 동지정사(冬至正使)가 되어 연경(燕京)에까지 가게 되었는데 이때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제수되었다.  이때 남긴《경자연행잡지(庚子燕行雜誌)》에 그의 학문과 문학세계를 보여 주는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이의현은 처음부터 과거에 급제하여 명성(名聲)을 얻는 길로 나가고싶어 하지 않았다. 스승인 김창협에게 이러한 뜻을 보일 때마다 초심을 잃지 말라는 스승의 말에 따라 매일 책을 보며 학문에 힘썼다고 한다.  벼슬길에 대한 그의 회의적인 심경이 잘 나타나 있는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더구나 1721년(신축)부터 이듬해인 1722년(임인)까지 계속된 옥사로 노론의 사대신(四大臣)으로 지목받던 김창집(金昌集), 이이명(李頤命), 이건명(李健命), 조태채(趙泰采) 등이 죽임을 당하는 등 노론세력이 소론에게 축출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의현도 김일경(金一鏡) 등에게 탄핵을 받아 벼슬에서 물러나게 되었으며 이듬해에는 운산(雲山)으로 유배되어 3년간을 보냈다.  이것을 역사에서는 신임사화(辛壬士禍)로 규정하는데, 장희빈의아들이소론의도움을받아경종(景宗)으로즉위한다음해부터 벌어진 사건이었다.  유배 기간 동안에 이의현은 학문에 대한 열정을 다시 되찾아 사서삼경(四書三經)을 포함한 여러 책들을 깊이 연구하였다.

경종이 죽고 노론(老論)의 지지를 받던 영조(英祖)가 즉위하자,  1725년에 그는 사면령(赦免令)을 받아 운산에서 돌아왔다.  그리하여 영조에게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영조는 그에게 홍문관(弘文館)과 예문관(藝文館)의 대제학(大提學)  벼슬을 주어,  이재(李縡), 이병상(李秉常)을 이어 세번째로 문형(文衡)의 자리에 오르게 하였다.  1727년 우의정(右議政)이 되었으나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실각하여 양주(楊州) 도산(陶山)으로 물러나 있다가 이듬해인 1728년에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다시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등용되었다.

그러나 이후로는 도산에 본거지를 두고 생활을하며 중국에 다녀 오기도하였다.  1735년영의정이 되었으나 이미 벼슬에서 마음이 멀어진 상태였으므로 다시 도산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인생의 말년이던 1740년에는 둘째 부인송씨(宋氏)에게서 난 외아들이 요절하는 슬픔을 겪었다.  이의현은 자신의 삶을 정리한 기록으로 1735년에서 1742년에 걸쳐 <자표(自表)>와 <자지(自誌)>를 남겼으며,  1744년에는 일생의 연대기인 《기년록(紀年錄)》을 완성하였다. 현재 전하고 있는《도곡집(陶谷集)》의 <유지(遺識)>에서 그의 저작물의 목록을 알 수 있다.  그의 저술은 다음과 같다.

<만부(漫瓿)> ,<장소록(章疏錄)>, <계의장첩등록(啟議狀牒等錄)>,    <응제록(應製錄)>, <금석록(金石錄)>, <일혜록(壹惠錄)>, <술덕록(述德錄)>, <지과록(志過錄)>, <잡술록(雜述錄)>, <간독록(竿牘錄)>, <여췌록(餘贅錄)>, <당후일기(堂后日記)>, <병정일록(丙丁日錄)>, <잠필록(簪筆錄)>, <연행일록(燕行日錄)>, <서천일록(西遷日錄)>, <사고(私考)>.

또한 자신의 일생을 16단계의 분기(分期)로 구분하고 16종의 시집을 (詩集)을 엮었다.  그 시집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형탑록(螢榻錄)>, <표직록(豹直錄)>, <앵천록(鶯遷錄)>, <오번록(鰲藩錄)>, <조갱록(蜩羹錄)>, <작얼록(鵲臬錄)>, <용곡록(龍谷錄)>, <연사록(燕槎錄)>, <우세록(牛歲錄)>, <복사록(鵩舍錄)>, <학귀록(鶴歸錄)> ,<호구록(狐丘錄)>, <여적록(驢跡錄)>, <홍추록(鴻樞錄)>, <태배록(鮐背錄)>.

이단상(李端相: 1628~1669)


이단상(李端相: 1628~1669)                               PDF Download

 

관이 연안(延安)인 그의 자는 유능(幼能)이며, 호는 정관재(靜觀齋)  또는 서호(西湖)이다.  그는 좌의정 이정귀(李廷龜)의 손자이며 대제학 이명한(李明漢)의 아들이자 금계군(錦溪君) 박동량(朴東亮)의 외손이다.

1648년(인조26)에 진사시(進士試)에 장원하고,  이듬해에 정시 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뒤에 설서(說書)· 대교(待敎)· 봉교(奉敎)· 부수찬(副修撰)· 교리(校理) 등을 역임하면서, 서연(書筵)에 나아갔다.  여러 차례 이조(吏曹)와 병조(兵曹)의 정랑(正郎)을 지내고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으로 지제교(知製敎)를 겸하기도하였다.

1655년(효종6)에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만전념케 했던 사가독서(賜暇讀書)를 거친 뒤 대간(臺諫)에 들어가 구애됨이 없이 정론(正論)을 폈다.

김홍욱(金弘郁)이 강빈(姜嬪)의 신원(伸冤)을 청하였다가 장살(杖殺)된 일에 대하여 그의 억울함을 극언(極言)하여 효종(孝宗)의 탄식을 불러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훗날 결국 김홍욱을 복관(復官)시키게 하는 단초를 마련하였던 일도 그 일환이며,  조정에서 영녕전(永寧殿)을 수개(修改)하려 하면서,  정전(正殿)을 10실(室)로 하는 제도를 신설하여 협실(夾室)에 있는 여러 조위(祧位)를 일체 정전에 봉안하고, 협실에 신주를 모시는 제도를 폐지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상소하여,

“이렇게 할 경우 고제(古制)를 조금이나마 남겨 준 조종조(祖宗朝)의 유의(遺意)에 크게 어긋날 뿐 아니라,  조위에 계신 열성(列聖)의 위령(威靈)들께서도 필시 정전의 합사(合祀)하는 반열에 끼이게 되는 것을 스스로 불편하게 여기 실듯합니다.”

라고 극언 했던 일도 그 일환으로 볼 수 있겠다.  이 사안에 대하여는 응교(應敎) 남구만(南九萬)과 한 동안 격론을 벌인 일이 실록에 수록되어 있다.

또 그는 일찍이 전라도 지방을 두루 살펴 기근이 심한 고을을 구제하게 한 바 있거니와, 효종(孝宗)의 승하(昇遐)로 정국(政局)이 변하자,  두문불출하고 학문에만 전념하다가 잠시 청풍부사(淸風府使)를 지낸적이 있으며,  이어 응교를 거쳐 인천 부사(仁川府使)를 역임한 일이 있다. 훗날 공교롭게도 그의 아들이 동보(李同甫)가 인천현감(仁川縣監)으로 부임하게 되자,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이 송별하는 서문을 써주면서 그의 선친이 이곳을 맡아 선정(善政)을 베풀었던 일을 언급한 바 있다.

“그분이 이 고을을 다스리자 1년이 되기도 전에 백성들이 덕스러운  정사를 노래하고 사모하여 지금까지 그치지 않고 있으니,  인(仁)을 행 한효과는 이처럼 신속하고 오래 보존되는 것이다.”

라고 하여 그의 선정을 기리는 한편,

“이제 동보가 이 고을에 가면 지난날 정관(靜觀) 선생의 교화를 받았던 부로(父老)들 중에 아직 살아있는 자가 있어 동보의 의표(儀表)완연히 똑같음을 보고는,  모두 기쁜 마음으로 서로 말하기를, ‘우리를 어루만져 주겠네! 선대부(先大夫)의 유업을 실행하겠네! ’라고 할것이다.”

하면서 그를 격려하였다. 특기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가하면송준길(宋浚吉)은그를천거하면서,“경연(經筵)을열때에문학(文學)을한선비가없어서는안됩니다.”라고하였고, 또“이단상은학문이해박하고식견이있는사람인데지금먼시골에서지내고있으니아까운사람입니다.”라고하였으며,예조판서조복양(趙復陽)도“조정의신하들중에경학(經學)이이단상만한사람이없습니다. 마땅히불러들여시강(侍講)하는자리에있게해야합니다.”라고한기록이《실록(實錄)》에까지수록되어있는것을보면그의학문과덕성이어느정도였는지짐작하고도남음이있다.

그러나이단상은이를사양하고양주동강(東岡)으로은퇴하였다. 그뒤
승지(承旨)와 병조참지(兵曹參知)에임명되었으나모두사양하였고, 1669년에부제학(副提學)으로서연관(書筵官)을겸했으나곧사양하고물러났다.

그는또시문(詩文)에도능했던듯하다. 《일성록(日省錄)》1797년(정조21)조를보면, 반열에참석했던조관(朝官)과유생의응제시권(試券)을채점하여내리고, 입격(入格)한사람들에게차등을두어상을내린기록이있다. 이때부제(賦題)로삼은“붉은구름한뭉치가태양곁에펼쳐졌네[紅雲一朶日邊開]”는부제학이단상이지은“남쪽나라귀한손이바다를건너오니[南國星槎渡海來], 붉은구름한뭉치태양곁에펼쳐졌네[紅雲一朶日邊開], 천추의큰의리를아는이없어[千秋大義無人識], 석실산앞에서통곡하며돌아오네[石室山前痛哭廻]”라는시에서인용한것이다. 이글은김수흥(金壽興)을풍자하여지은것으로, 명(明)나라의관상선(官商船)에타고있던임인관(林寅觀) 등95인이1667년(현종8)에일본으로가던도중표류하여제주(濟州)에상륙하게되었는데, 김수흥이이들을청나라로압송할것을주장하자, 이를안타깝게여겨지은것이다. 그의작품자체도그렇거니와그의작품중한구를부제로삼아임금이직접글을짓게하였다는것은주목할만한사실이아닐수 없다.

그리고《송자대전(宋子大全)》을보면,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은친구였던그에대하여“정관재가세상에있던날에는[靜觀臨世日], 사람들이봉황새를양지에서본듯했고[人覩鳳朝陽] 나무를칠 때꾀꼬리가벗을구하듯했건만[伐木鶯求友], 산에묻히자이젠구슬이빛을감추고말았네[埋山玉掩光]”라고읊고있다. 이글은그의아들동보(東甫)의부탁으로그의묘명(墓銘)을지어주면서그의요청에따라오언율시(五言律詩)로화답한것인데,
“평생을추억하니감개의눈물을금할수 없다.”라는설명이곁들여져있다.
그와의교분관계를충분히알수 있는부분이기도하다.
그는1680년(숙종6)에민정중(閔鼎重)의건의로이조참판겸경연,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과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에추증되고, 다시이조판서(吏曹判書)에증추되었으며, 그의문하에서는아들희조(喜朝)와 김창협(金昌協)·김창흡(金昌翕)·임영(林泳) 등의학자가배출되었다. 일련의기록을보면비교적평탄한삶을살았던인물로여겨진다.

끝으로《현종실록(顯宗實錄)》에는“신병(身病)을이유로사직하고양주(楊州)에물러나살면서여러차례불러도벼슬을사양하고나아가지않으니, 사람들이명리(名利)에담박하다고하였다.”라고적고있는데반해《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1669년(현종10) 조에는<전부제학이단상의졸기(卒記)>라는제목하에,“전부제학이단상이졸하였다.”라고쓰고,“그가강론한견해는대부분명확하고투철하였으므로한때의사류(士類)들에게존중을받았으나, 불행하게일찍졸하였으니, 애석하다. 임종할때유소(遺疏)로훌륭하고덕있는이를초치하고큰사업에더욱 힘쓰라고주상에게권하였으며, 또장식(張栻)의말을인용하여남을믿고맡길때는일신의편견을막고, 남을좋아하고미워할때에는천하의이치에공변되게할것을주청하였다. 이어약을하사(下賜)한은전(恩典)을사양하였다.”라는기록에서도그의인간상을엿볼수 있다.

그는양주의석실서원(石室書院)과인천의학산서원(鶴山書院)에배향되어있으며, 저서로는《대학집람(大學集覽)》, 《사례비요(四禮備要)》, 《성현통기(聖賢通紀)》, 정관재집(靜觀齋集) 등이있다.시호는문정(文貞)이다.

이기진(李起振:1869~1908)


이기진(李起振:1869~1908)                                PDF Download

 

관은 전주(全州). 자는 한여(翰汝) 또는 효백(孝伯), 호는명와(明窩)이다.
그는 충주의 하곡, 오늘날의 충주시 동량면 하천리에서 태어났다. 20대 초반에 유중교(柳重敎)의 가르침을 받아 화서학파(華西學派)에 입문하였고,  유중교 사후에는 유인석(柳麟錫)에게 배웠다.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일본군에게 피살되고 단발령(斷髮令)이 내려지자 유인석이 이끌던 의병진에 참가하였다.

을미의병 당시 홍선표(洪選杓)·정화용(鄭華鎔)등과 함께 유인석의 종사관으로 활약하였다.  충주성(忠州城) 전투와 제천(堤川)에서 패한 후 서행할 때 그의 활약상이 전한다. 소모대장(召募大將) 서상렬(徐相烈)의 시신을 수습하는 책임을 맡기도 하였는데, 후에 병고로 의병에 합류하지 못하게 되자, 고향으로 돌아가 국권 침탈의 시국을 개탄하면서 《화서집(華西集)》의 발간을 위한 기금마련에 주력하였고,  향리의 후진(後進)들을 교육하면서 족계적(族系的) 성향을 지닌 동약(洞約)을 시행하기도 하였다.
문집으로는《명와집(明窩集)》이 있다.  이상이 그의 대략적인 생애와 관련된 기록이다.

위의 내용에 대하여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그가 유인석의 문하에서 수학하던 그 무렵은 시대의 격변기였다.  이때 민심이 격앙되어 사방에서 의병(義兵)이 봉기(蜂起)하고,  유인석을 대장으로 하는 제천 의병이 출범하게 되었던 직접적인 원인은,  사실상 1894년에 동학 농민군이 일어난 것을 빌미로 삼아 일본군이 개입하면서 서울을 장악했다는 소문이나 돌고,  그 이듬해 여름에는 일본군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실시 되었다는 사실이 널리 유포된 데에 있었다는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이때 이기진은 병든 몸을 이끌고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의병에 가담하였다.  그리하여 유인석의 종사관으로서 활약하면서 충주성 수성전(守城戰)에 참전하였다.
한편 조선말기 정직과 지조있는 선비상을 지닌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선생은 나라의 위기 앞에 도의와 백성을 걱정하는 마음이 간절한 선비였다.  그의 학통을 계승하여 온 사람들을 역사에서는 화서학파(華西學派)로 규명한다.
화서는 의병봉기 계획을 추진하면서 유인석에게 주선해 줄 것을 권유하였고,  유인석으로 하여금 의병에 참여하게 하였다.  그러한 연유로 유인석 문하에 있었던 이기진도 자연스럽게 의병활동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전국의 병항전을 선도한 화서학파는 사실상 의병활동 의실천적 사상의 배경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기진은 또 충주성 전투에서 포수들을 독려하고,  빗발치는 포탄에 뺨이 문드러지는 부상을 입기도 했다.  의병진이 근거지인 제천을 빼앗기고 서북지방으로 이동할 때 그는 신병으로 뒤에 남아 있었는데 이때 소모대장 서상렬이 전사하자,  다행스럽게도 그의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  이 일에 대한 기록이 의암(毅菴) 유선생(柳先生)의‘서행행략(西行略)’에,

“선생이 주현구(朱鉉九)이기진을 보내 경암(敬庵)의 사실을 탐지하고 시신을 거두어 오게 했는데, 현구(鉉九)는 이 일을 성사시키지 못 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 뒤 이기진은 병으로 낙향한 이후에도 산봉우리에 진지를 구축하여 일본군과 관군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지금도 그 진지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고 한다.

1894년 동학 농민군이 크게 일어났을 때,  일본군의 위세를 보고 포도대장을 만나서 일본군을 토벌할 계책을 물었으나, 무기력한 답변만을 들었다.  단발령 이후에 병든 몸으로 의병진에 가담하여 활동 할 당시 그는 그때 일을 회상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바람을 맞으며 먹고 자는 고통,  부대 내의 갈등을 어루 만지는것,  마을마다 부역을 고르게 하는 것 등이 어려웠다.”

그는 말년에 병고로의병에 합류하지 못하고 고향에 남아서 시국을 개탄하면서 후학 양성에 앞장섰을 뿐만 아니라 향리에서 직접적인 교육과 향약운동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또 후손들에게 남긴 가훈에서암울한 현실에 대해 아래와  같이 표현했다.

“왜국 공사관이 우리 주상을 위협하고 우리 조정의 신하를 강제하여장차 백성을 옮겨 바다에 빠뜨리고자 하니 우리 인종을 모멸하는 화가 조석간에 박두하였다.”

고종(高宗)의 강제 퇴위 이후에 수많 은인민들이 봉기하였다 는소식을 듣고, 이기진은 의병을 일으키려는 이를 위하여 격문(檄文)을 짓기도 하였다. 이기진이 이등박문(伊藤博文)에게 보낸 격문에서는 일본은 금수와 같은 나라라고 하면서

“아는 것이라고는 식색(食色)을 탐하는것 뿐이요 숭상하는 것이라고는 빼앗으려는 욕심 뿐”

이다고 질타한 바 있다.  그는 1908년 향년40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거니와 기울어 가는 나라에 대한 탄식과 실천운동을 강조하였던 진정한 조선인의 한 사람이었음을 우리는 자랑으로 삼아야하겠다.

이기지(李器之:1690∼1722)


이기지(李器之:1690∼1722)                               PDF Download

 

의본관은전주(全州), 자는사안(士安),호는일암(一庵)이다. 조선경종(景宗) 때노론(老論)의영수(領袖)였던좌의정이이명(李頤命)의아들이며판서김만중(金萬重)의외손이다. 1715년(숙종41)에26세의나이로진사시(進士試)에합격하였다.

신임사화(辛壬士禍) 당시에4대신의한사람이었던그의아버지이이명이연잉군(延礽君)시절의영조(英祖)를세제(世弟)로책봉(冊封)할것을주장하다가목호룡(睦虎龍)의무고(誣告)를받아거제도(巨濟島)로유배되었으며, 이기지역시이사건에연루되어남원(南原)으로유배되었다가다시서울로압송되었는데심문을받던중고문으로인하여옥사하였다.
그뒤1725년(영조1)에비로소신원(伸冤)되고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으로추증(追贈)되었다.

1720 고부사행(告訃使行) (왕의 승하를 알리는 사신) 으로 북경에 갈 때 함께 자제군관(사신을 호위하며 보좌하는 군관의 신분이었으나 실제는 문인 학자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의자격으로수행하였다.  이때 서양 문물에 대한 새로운 경험을 일기 형식을 빌어 기록으로 남겼는데 섬세한 관찰력이 수반되어 여느 기록들에 비하여 변별력을 갖는다《이기지의 일암연기 연구》. 김동건. 22p~23p)

그의 아버지가 처음에는 연행에 대한 체험을 자세히 적어 보려 했다가 아들이 쓴 기록을 보고 더이상 쓰지 않고 접었다고 한다.  또한 그는 하루에 수십리, 수백리를 가는 일정을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기록으로 남겼다.  그는 또 북경에서 천주당(天主堂)을 방문하고 서양 선교사들과 처음으로 만났다.

후대의 다른 연행록의 저자들 보다도 천주당을 빈번하게 방문하며 선교사들과 돈독한 관계를 맺었다.  당시 천주당은 서양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서양 선교사들과 친밀한 유대 관계를 맺으며 서양의 음식을 처음 맛보기도하고,  그림과 천문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문물을 보고서 양선교사들과 필담을 나누기도 하였다.
그는 여기에서 보고들은 것을 자신의 연행록에 남겼다.  그의 연행록인 《일암연기(一庵燕記)》에는 서양화(西洋畵)에 대한 관심과 천문(天文), 역법(曆法), 북경 선교사 들과의 교류 내용 등 다른 연행록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자료들을 풍부하게 담고 있다.

북경에 머무는동안 이기지는 천주당을 방문했던 일을 표로 작성하여 기록으로 남겼는데, 그 기록에는 방문한 날짜와 선물로 받은 물건, 대화 내용 등을 꼼꼼하게 기록해 놓았다. 서양 선교사들이 대접하기 위해 내온 음식들에 대해서도 먹어 본 맛과 느낌을 적고, 만드는 방법에 대하여 질문했던 내용도 적혀 있다.  빵을 먹어 본 경험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부드럽고 달았으며 입에 들어 가자마자 녹았으니 참으로 기이한 맛이었다.  만드는 방법을 묻자, 사탕과 계란, 밀가루로 만든다 고했다.

새로운 문물에 대한 경이로운 느낌이 그대로 전해 오는 듯하다.  따라서 그는 빵을 맛 본 최초의 조선인 이었던 것이다.

그런가하면 청나라때에 명·청대의 유명한 서화(書畵)가 활발하게 거래 되었다.  그러다보니 모사품도 적지 않았고,  검증되지 않은 채로 무분별하게 연행한 사신들을 통해 조선으로 유입된 것들도 상당수 있었던 듯하다.  그는 서화에 대한 안목도 여느 중국인보다 뛰어났다.  지인이 어느날 상당한 수의 서화를 가지고 와서 그에게 보이자 그 서화들이 모두 모사 작품임을 식별해 냈다는 일화도있다.
이처럼 서화에 뛰어난 식견을 지녔던 그는 서양그림에도 특별한 관심을가졌다. 서양그림을 보고 서양화법(西洋畫法)의 사실적 묘사에 주목하면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그가 처음 대했던 서양화는 종교적인 내용의 그림이었다.  천주당 벽화의 정밀한 묘사와  입체적인 구도는 그가 그 동안 보지 못했던 새로운 화법이 었던것이다.

그는 서양 화첩을 보고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책을 펼치면 갑자기 벌레와  물고기가꿈 틀거리며 움직이거나 날아 올라 마치 손에 잡힐 듯 했으며, 원근과고저의 형상을 볼 수 있게했다.  솜씨의 교묘함이 조물주를 능가할 만하다.”

라고하여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교회 병풍에 그려진“두 날개가 있는것” 에 대해 물어 “천신이다.  사람들이 알지 못하지만 이 신이 몸을 지켜 준다.”는 대답을 듣기도 했다. 이는 모두 그의 기록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이다.  이런 기록들을 통하여 서화에 대한 뛰어난 안목을 지녔던 이기지를 새삼 떠올려 보게 된다.

그는 이것 말고도 다양한 분야에 대한 폭넓은 식견을 지니고 있었다. 천주당(天主堂)을 방문하여 서양 선교사들과 천문, 과학에 대하여 나눈 대화의 내용 또한 주목해 볼만하다. 특히 혼천의(渾天儀)를 보고 선교사와  나눈 대화기록을 보면 그가 얼마나 폭넓은 식견을 지녔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동양과 서양이 서로 다른 역법(曆法)의 우월성에 대하여 토론을 하면서 자신이 이해하고 있던 동양의 역법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그의 기록을 잠시 보면,

“내가 물었다.‘ 서양의 북쪽 끝에 하지(夏至)에는 낮만있고 밤이 없으며,  동지(冬至)에는 밤만 있고 낮이 없습니까?’ 하자,  그 사람이 깜짝 놀라 말이 없다가 연달아 명확하다며 칭찬하였다.”

라고 적고 있다.  그리고 서양 선교사가 내어준 종이로 만든 혼천의를 돌려 보면서 그 원리를 이해한 이기지는 동양 천문 우주관의 결점을 파악하고 확인한 후 그 느낌을

“비로소 만고의 비루함을 씻게 되었다.”

라고적어놓았다.

이기지는 연행하는 내내 천주당을 자주 방문코자 하였다. 그가 천주당에서 서양문물을 살펴보면서 단순한 호기심에 그치지 않고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서양인 선교사가 조선 사신 일행이 묵는 처소를 방문하고 자명종을 예물로 선물했다.  그는 자명종에 쓰인 서양숫자(로마자)에 대하여 자세히 물었다.
그리고 4일 후에는 선교사들 앞에서 써 보이자, 사람들이 이 모습을 보고 모두 놀라며 감탄했다고 한다.  그는 의문점이 있으면 직접방문하여 묻기도하고,  서양화 책을 빌려 달라고 부탁을 하는가 하면 자신의 관소에 선교사들을 초대하기도 하였다.  이기지는 이와  같이 서양 학문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과 열정을 아낌없이 발휘하였던 인물 이었음을 알 수 있다.

채지홍(蔡之洪, 1683~1741)


채지홍(蔡之洪, 1683~1741)                               PDF Download

 

지홍(蔡之洪, 1683~1741)은 조선시대 중기에 활동한 유학자로 권상하(權尙夏)에게 성리학을 배웠다.  스승의 영향으로 관직에 뜻을 두지 않았으며 동문인 한원진(韓元震), 윤봉구(尹鳳九), 이간(李柬), 윤혼(尹焜) 등과 함께 교류하며 후학을 양성하고 성리학 연구에 힘썼다. 경학,예학을 비롯하여, 역사·천문·지리·상수(象數) 등에 두루 통달하였으며, 실천적인 수양에 힘썼다.

황강영당과 수암사
채지홍의 노력으로 세워진 충북 제천의 황강서원(황강영당과 수암사)

 1683년(1세,숙종9년) 1월 14일, 청주(淸州) 금천리(金川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인천(仁川), 자는 군범(君範), 호는 봉암(鳳巖)ㆍ삼환재(三患齋)ㆍ봉계(鳳溪)ㆍ사장와(舍藏窩) 등을 사용하였다.  아버지는 첨지 중추부사 채영용(蔡領用)이며, 어머니는 유승주(柳承胄)의 딸이다.

1694년(12세,숙종20년) 소과(小科) 초시(初試)에 해당하는 공도시(公都試, 지방에서 열린 과거시험)에서 장원하였다.

1698년(16세,숙종24년) 식년시(式年試) 생원과에 합격하다. 다음해 상주 박씨(尙州朴氏) 박이경(朴履慶)의 딸과 결혼하였다.

1701년(19세,숙종27년) 가을에 청풍(淸風)의 황강(黃江)에 사는 한수재(寒水齋) 권상하(權尙夏, 1641-1721)를 찾아가 가르침을 청하였다.  이해11월,  큰 아들 채복휴(蔡復休)가 출생하였다.

1703년(21세,숙종29년) 속리산(俗離山)을 유람했다. 다음 해 둘째 아들 채익휴(蔡益休)가 태어났다.

1708년(26세,숙종34년) 9월, 스승 권상하를 모시고 화양동(華陽洞)에 가서 우암 송시열을 원향(院享, 서원에 사당을 모셔 놓고 제향 드리는 일)에 참여하였다.
이해 12월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1711년(29세,숙종37년) 과거 공부를 하여 출세할 뜻을 버리고 그 뜻을 담아 시( 歎詩)를 지었다.  가을에 스승 권상하로부터 삼환재(三患齋)라는 호를 받았다.
10월에, 권상하의 제자이자 동문인 한원진(韓元震)을 만나 교분을 맺었다. 친구들과 속리산을 유람하며 시를 짓고 이에 대한 글을 남겼다.

1712년(30세,숙종38년) 그간 과거 공부를 위해서 지은 습작들을 모두 없애 버렸다. 가을에 서재를 새로 짓고 사장와(舍藏窩)로 호를 삼았다. 다음 해 가을 동문 윤봉구(尹鳳九)와  교분을 맺고 호서(湖西, 충청도) 지방을 유람하였다.  도중에 이간(李柬), 윤혼(尹焜) 등을 만나 동물들도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가졌는지 하는 금수오상설(禽獸五常說)에 관해서 논하였다.

1715년(33세,숙종41년) 가을, 충청도 충주의 누암(樓巖, 지금의 충주시 가금면창동)에 가 서정호(鄭澔)를 만났다.  함께 ⌈중용⌋에 있는

‘치우치지 않고 기대지 않아, 지나침도 모자람도 없음
(不偏不倚無過不及)’

이라는 문장에 관해서 논했다. 다음해 아들 채백휴(蔡百休)가 태어났다.  ⌈주서차의(朱書箚疑)⌋를 교정하고, ⌈화양행(華陽行)⌋ 을 지었다.  이해 암행어사 황구하(黃龜河)와  관찰사가 학문과 수행이 뛰어난 선비로 조정에 추천하였다.

1718년(36세,숙종44년) 왕자사부(王子師傅)가 되었으나 바로 사직서를 올려 사양하였다.

1721년(39세, 경종1년) 1월, 부친과 함께 송호(松湖)로 이사하였다 . 8월, 스승 권상하가 사망하여 곡을 하였다.  9월, 시강원(侍講院) 자의(諮議)에 임명되었지만 취임하지 않았다.  이해 경종의 몸이 약해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하는 문제로 조정 안 팎이 시끄러웠는데, 신임사화가 발생하여 노론파가 실각하였다.  채지홍은 소론파의 죄를 논하여 배척하는 상소를 올렸다.  다음해 사헌부의 관리들(소론파)이 채지홍을 비난하는 건의 문을 다음과 같이 임금에게 올렸다.

“자의(諮議) 채지홍(蔡之洪)은 본래 시골 구석의 보잘것 없는 무리로서,  이름을 훔친 상신(相臣, 정승)의 문하에 아첨하고 빌붙어 인연(彙緣)을 맺은 뒤,  천거를 받아 발탁된 뒤 외람되 게궁궐의 관료에 끼게된 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비웃고 손가락질 한 것이 오래 되었어도 그치지 않고 있으니,  청컨대 태거(汰去,  죄가 있는 낮은 벼슬 아치를 그 직무에 서쫓아냄)하소서.”

1723년(41세, 경종3년) 1월, 구운산(九雲山)으로 이사하여 은거하면서 후학의 양성에 힘썼다.  봄에 황강(黃江)으로 가서 스승 권상하의 연보를 정리하였다.  겨울,신치운(申致雲)이 근거없이 스승 권상하를 모함하여 스승의 관작이 박탈되었다.  이에 모함에 대응하는 상소문을 올리기 위해서 제자들이 함께 모여 논하였다.  다음해 2월 보령(保寧)에서 이간(李柬), 윤봉구(尹鳳九), 한원진(韓元震), 헌상벽(玄尙璧) 등을 만났다.

1725년(43세,영조1년) 부인 박씨(朴氏)의 상을 당하였다.  3월에, 세자 익위사(世子翊衛司) 부솔(副率)에 임명되었으나 사직을 청하였다.  겨울에,  민진원(閔鎭遠)의 요청으로 경연관(經筵官)으로 임명 되었으나 또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몇 개월 뒤 부여 현감으로 임명 되었으나 역시 사퇴하였다.

1726년(44세,영조2년) 2월, 임금이 특명으로 불렀으나 사직 을희망하는 상소문을 올리고, 아울러 스승 권상하에 관해 무고함을 변호하였다.  이해 12월, 황강서원(黃江書院)이 준공되자, 동문들의 요청으로 서원의 일을 맡았다.  서원에는 스승 권상하와 스승의 스승인 송시열(1607∼1689)을 모셨다.
나중에 권상하의 제자인 한원진(1682∼1751), 윤봉구(1681∼1767), 권욱 등도 이곳에 모셔졌다.  권상하는 송시열이 사약을 받고 사망하자 그의 유품을 거두고,  유언에 따라 화양동에 만동비와 명나라 신종황제의 은혜를 기리는 대보단(大報壇)을 세웠다. 숙종이 나중에 권상하를 우의정과 좌의정을 임명하였으나 사양하고 관직에 취임하지 않았다.

1727년(45세,영조3년) 5월에 부여 현감(縣監)에 임명되었다.  그러나곧바로 사직을 청하고 하직인사를 하기 위해서 영조 임금을 알현하였다.  그 자리에서 임금이 이렇게 말했다.

“성인(聖人)이 이르기를, ‘어려서부터 배우는 것은 어른이 되어 행하고자 하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산 속에서 유학을 공부하 는사람이 또 어찌 세상을 잊을 수  있겠는가?  지금 내가 듣기에 경연관(채지홍)이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하여 부임한다 하는데, 외읍이 서울 안보다 못하니 반드시 아비를 모시고 와서 서울에 머물러 있으면서 경연에 출입하도록 하라.”

채지홍은 자신의 학문이 보잘것 없다는 이유로 사양하였다.  이어 마음을 바르게 하여 뜻을 성실히 하는 일이 중요함을 임금에게 건의하였다.  임금은 기쁜 마음으로 그 말을 받아들였다.  다음 날 임금이 다시 불러서 궁궐에 들어갔다.  경연의 자리에서 ⌈심경(心經)⌋을 읽고 있었는데, 특별히 채지홍을 불러 함께 하도록 한 것이다. 임금이 글뜻을 아뢰도록하니,  채지홍이 대답하였다.
그리고 다시 채지홍이 간언을 받아들이고 사사로움을 없애시라는 당부의 말을 올리니, 임금이 그 뜻이 절실하다고 칭찬하였다.  채지홍은 뒤에 ⌈효경(孝經)⌋을 강론하기도 하였다. 8월, 황산(黃山)을 유람하고 죽림서원(竹林書院)에 가서 이이(李珥), 성혼(成渾), 김장생(金長生)의 영전에 인사를 올렸다.

1728년(46세,영조4년) 3월,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났다.  소론 강경파와  남인 일부가 경종의 죽음에 영조와 노론이 관련 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일으킨 반란이었다.  반란이 일어난 주요 지역이 경상도(영남) 이었기 때문에 영남 란(嶺南亂) 이라고도 불렸다.  채지홍은 고을 선비들과 함께 격문( 상당산성격문(上黨山城檄文))을 붙여 반란자들을 회유하고 의병을 모집하였다.  6월에 청산(靑山) 현감(縣監)에 임명되었으나 부친상을 이유로 사양하였다.

1731년(49세,영조7년) 이인좌(李麟佐)가 반란을 일으키기 이전에 진천(鎭川)에 투숙한 사실을 듣고도 보고하지 않았다고 정언(正言) 민정(閔珽)의 탄핵을 받았다.

1733년(51세,영조9년) 3월, 도명산사(道明山寺)에 머물면서 조용히 책을 읽었다.

1735년(53세,영조11년) 2월에진천(鎭川)의봉암(鳳巖)으로이주하였다. 다음해역학십이도(易學十二圖)와 세심요결(洗心要訣) 을지었다. 가을에, 정호(鄭澔)가사망하여곡을하였다.

1739년(57세,영조15년) 섬촌(蟾村) 민우수(閔遇洙, 1694~1756)를 만나 성리학에 대해서 강론하였다.  민우수는 당시 46세로 은거하다 형조 좌랑에 임명되었다.

1740년(58세,영조16년) 2월, 호서지방의 여러명 승지를 유람하고 1백 여편의 시를 남겼다.  3월에 형조좌랑에 임명되었으나 상소문을 올려 사양하고,  교체를 요청하였다.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 등과 함께 금강산을 유람하고 동유록(東遊錄) 을지었다.  6월에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사어(司禦)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다음달 다시 공홍도(公洪道, 충청도) 도사(都事)에 임명되었는데,  취임한 뒤 다시  사퇴하였다.

1741년(59세,영조17년) 7월에 화양(華陽)의 채운암(綵雲菴)에 머물면서 ⌈독학전보(讀學塡補)⌋, ⌈성리관규(性理管窺) ⌋를 정리, 마무리했다. ⌈독학전보⌋는 35권 18책으로 자신이 40여 년간 여러 서적을 읽으면서 ⌈대학⌋의  3강령 8조목과 상통하는 문장을 골라 편찬 한 것이다.  이는 주희가 ⌈대학⌋을 잘 읽고 다른 경전으로 보완한다면 모든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한 말에 따른 것이다.
이해 10월 6일, 병으로 사망하였다.  1755년 윤봉구(尹鳳九)가 묘지(墓誌)를 짓고, 이후 김원행(金元行)이 행장을 지었다. 1783년 아들 채백휴(蔡百休)가 상산(常山, 진천鎭川) 지장사(地藏寺)에서 ⌈성리관규(性理管窺)⌋ 4권, 문집15권( ⌈봉암집(鳳巖集)⌋), 연보 등 2권 총합 21권을 목활자로 간행하였다.

<참고자료>
⌈국조보감⌋ 권58.
채지홍 행력, 한국문집총간 인물연표,  한국의 지식콘텐츠(www.krpia.co.kr.)
이순두, ⌈독학전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이민식, ⌈채지홍⌋,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서유본(徐有本, 1762년∼1822년)


 

서유본(徐有本, 1762년∼1822년)                      PDF Download

 

유본(徐有本, 1762년∼1822년)은 조선후기의 문신이자 유학자로,실학자 박지원(朴趾源, 1737∼1805)과 서학과 북학에 정통한 유련(柳璉), 서형수(徐瀅修) 등에게 배웠다. 영조, 정조시대에 대대로 고관을 지낸, 소위 경화세족(京華世族)의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당시 북경에서 전해지던 고증학, 천문학, 기하학, 역학(曆學), 상수학(象數學), 율려학(律呂學) 등 실용적인 학문에 관심을 가졌다.  정조에서 순조로 왕권이 넘어가는 시기에 집안이 몰락하면서 관직을 떠난 그는 부인 빙허각 이씨의 ⌈규합총서 ⌋, 동생 서유구의『임원경제지』가 완성되어 가는 것을 보면서 자신도 새로운 학문을 모색하면서 일생을 마쳤다.

1762년(1세,영조38년) 2월 6일, 조선후기의 명문 가문인 서씨 집안 서호수(徐浩修, 1736~1799)의 4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혼원(混原), 호는 좌소산인(左蘇山人)이다. 선조 임금의 사위 서경주(徐景주, 1579∼1643)와 목사 서정리(徐正履)가 그의 먼 조상이다. 그 뒤 숙종때에 이르러,  조상서 종태(徐宗泰)가 영의정으로 있었을때는,  서씨 성을 가진 참판급 이상 중신이 30여명이
나 될 정도로 위세를 떨친 집안이었다.
증조할아버지 서종옥(徐宗玉, 1688∼1745)은 1725년(영조1년)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이조좌랑, 대사성, 세자시강원보덕, 황해도관찰사,  대사간,  대사헌, 예조판서, 이조판서, 호조판서등을역임했다.

서종옥은 4남 1녀를 낳았는데 네 아들은 차례로 서명익(徐命翼), 서명응(徐命膺), 서명선(徐命善), 서명성(徐命誠)이다. 서명익의 호적상의 손자가 서유본이다 . 서명익은 아들이 없이 일찍 죽어서 서명응의 둘째 아들 서호수가 서명익의 양자로 들어갔다. 그러므로 서유본에게 사실상 친 할아버지는 서명응이다.
호적상 둘째 작은 할아버지가 되는 서명응(1716∼1787)은 영조때, 대사헌, 황해도관찰사, 수군절도사,  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하였다.  또 셋째 작은 할아버지 서명선(1728년~1791년)은 정조가 등극하는데 공헌을 한 공신으로 정조 재위 초기에 삼정승을 거친 인물이다.  1763년증광문과에 을과 급제하여, 이조참의, 대사성, 대사헌,승지등을 역임하고 선조 임금의 특별한 신임을 받아 예조판서, 병조판서, 이조판서등 요직을 두루거쳤다.
아버지 서호수(徐浩修)는 1764년 칠석제(七夕製)에 장원하고, 급제한 뒤, 홍문관 부교리, 도승지(都承旨), 대사성, 대사헌, 규장각직제학, 이조·형조·병조·예조 등의 판서를 두루 역임하였다. 학문으로는 당시 서학이라 불리던 천문학과 수학, 기하학에 정통했다.
서유본의 작은 아버지 되는 서형수(徐瀅修)는 1783년(정조7) 증광문과에을과로급제한뒤, 광주목사, 청나라사은부사, 이조참판, 경기관찰사등을역임하였다.
당시 중국 청나라에서 전해진 고증학과 경학에 두각을 나타냈던 그는 규장각 편찬사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하였으나 나중에 18년간 귀양살이를 하였다.  조카인 서유본은 그에게서 글을 배우는 등 영향을 많이 받았다.

1763년(2세,영조39년) 셋째 작은 할아버지 서명선이 이해에 증광문과 을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부교리(弘文館副校理)에 임명되었다. 영조 임금은 그의 부친(서종옥)을 추모하여 그 다음날 교리로 특별 승진을 시켰다.  둘째 작은 아버지 서명응은 이해에 부제학,  대사성, 이조참의, 판의금, 예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1735합격,  1751년에 호조좌랑, 의흥현감 등에 임명되었으며, 1754년에 증광문과에 합격하여 병조좌랑, 정언, 함경도 어사 등을 역임하였다. 이후 대사간, 승지,부제학, 이조참의,황해 감사 등을 거쳤다.

1764년(3세,영조40년) 동생 서유구(徐有榘)가 태어났다. 아버지 서호수는 아들 넷과 딸 둘을 낳았는데,  맨 위 장남이 서유본이고 그 다음이 서유구다.  서유구(1764년∼1845년)는 나중에 출세하여 이조판서, 대제학까지 올랐는데,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를 지은 실학자로 이름을 날렸다.  둘째 작은 할아버지 서명응은 이해에 대사헌, 한성 우윤 등을 역임하였다.  셋째 작은 할아버지 서명선은 홍문관 관원들이 올린 상소문으로 임금의 노여움을 사서 갑산부에 유배되었다.  하지만곧 풀려나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 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 등을 역임하였다.  이해에 아버지 서호수가 칠석제에서 장원을 하였다.

1765년(4세,영조41년) 아버지 서호수가 식년문과에서 장원급제를하였다.  곧 사헌부 지평으로 임명되었으나 남해에 유배되었다.  하지만 다음해에 홍문관 부교리로 특채 되었다.  둘째 작은 할아버지 서명응이 이조참판, 홍문관제학, 대사헌, 부제학, 도승지등에 임명되었다.

1767년(6세,영조43년) 둘째 작은 할아버지 서명응이 예조참판, 대사헌, 등에 임명되었다. 이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사양을 하였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갑산 부사로 좌천되었다.  하지만 다음해에 다시 예조참판으로 복귀하였다.  셋째 작은 할아버지 서명선이 중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후에 부교리, 승지를 역임하였다.

1769년(8세,영조45년) 둘째 작은 할아버지 서명응이 형조참판, 청나라 사신 동지정사, 한성 판윤, 홍문 관제학, 형조 판서등을 역임했다. 셋째 작은 할아버지 서명선이 강원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그는 잠시 다른 사건에 연루되어 파직 되었는데, 곧 이어 이조참의, 대사성, 대사헌, 승지, 부제학 등을 역임하고 이조참판이 되었다.

1773년(12세,영조49년) 이해 부인을 맞이했다. 부인은 대대로 명망이 높은 소론가 문인 이씨 집안 이창수(李昌洙)의 딸이다.  둘째 할아버지 서명응이 추진한 결혼이었다.  할아버지는 이미 오래전부터 아버지 이창수를 따라 ⌈소학 ⌋과 ⌈시경 ⌋을 읽고 총명한 이씨의 딸을 손자 며느리로 삼을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서유본보다 3살 많은 부인 빙허각 이씨(憑虛閣李氏, 1759년∼1824년)는나중에조선에서 유일한실 학자이자 경제학자로 이름이 알려진다.  그녀는 시집와서 7살 된 시동생 서유구를 직접가르쳤다.  장모, 즉빙허각의 어머니는 유씨(柳氏)인데,  유씨 집안 역시 실학과 고증학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집안이었다.  빙허각 이씨는 서유본과 사이에 4남 7녀를 두었으나 3남 5녀를 일찍 잃었다. 서유본은 그녀의 학문적인 재능을 인정해 주었고 평생을 학문적인 동지로 지냈다.

1775년(14세,영조51년) 둘째 작은 할아버지 서명응이 전년에 파직 되었다가 이해 10월에 병조판서로 복귀하였다.  11월에 이조 판서가되었다.  셋째 작은 할아버지 서명선이 세손(정조)을 핍박하고 세손의 대리청정을 반대하는 홍인한(洪麟漢) 등 일파를 탄핵하였다.  덕분에 세손의 대리청정이 시행되었는데,  정권을 잡은 세손에 의해 서명선은 공신으로 예조판서, 병조판서, 이조판서 등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1776년(15세, 정조즉위년) 둘째 작은 할아버지 서명응이 평안감사, 규장각 제학에 임명되었다.  정조 즉위의 일등공신이 된 셋째 작은 할아버지 서명선은 임금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수어사(守禦使), 총융사(摠戎使)를 겸임하고 군사권까지 장악했다.  또 우참찬,  판돈녕부사등을 역임했다.  아버지 서호수가 도승지에 임명되어, 임금의 측근이되었다.  진귀한 책들과 북학과 관련된 소식을 전했다.  서호수는 1770년에 ⌈동국문헌비고 ⌋편찬에 참여하였는데 , 규장각 직제학에 임명되어 규장각의 여러 편찬사업을 주도하였으며,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弘齋全書) ⌋의 기초가 되는 ⌈어제춘저록(御製春邸錄) ⌋의 간행을 주관했다. 후에 이조, 형조, 병조, 예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임금의 은밀한 부탁으로 청나라 서적의 수입을 추진하였으며,  청나라 사신을 다녀오면서 ⌈연행기(燕行紀) ⌋를 지었다.

1777년(16세, 정조1년) 셋째 작은 할아버지 서명선이 우의정에 임명되었다.  다음해에 좌의정,  그 다음해에는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1779년(18세, 정조3년) 모친상을 당하였다.  셋째 작은 할아버지 서명선이 영의정에 올랐다.  인정받은 그는1780년에 일시적으로 한직에 물러났다가 곧바로 좌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하고,  1783년에는 판중추부사가 되었다.  동생 서유구는 용주(蓉州, 지금의 용산 혹은 마포 부근)에서 작은 할아버지 서명응을 모시고 농학서 ‘본사(本史)’ 의 집필을 도왔다.  동생은 이즈음부터 ‘풍석(楓石)’ 이란 호를 쓰고 ‘풍석암서옥(楓石庵書屋)’ 이란 서재를 만들었다.

1781년(20세, 정조5년) 서유본은 동생 서유구와 함께 작은 아버지 서형수의 지도를 받아 본격적으로 과거 공부를 시작했다.  또 작은 아버지를 통해서 중국에서 유행하는 고증학을 깊이 있게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 홍문관, 예문관,  규장각 등에서 사용하던 관각체(館閣體)에 특히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였는데, 수준이 매우 높았다.  없으나 아버지와 친한 유금(柳琴,  1741년∼1788년)에게 학문을 배웠다. 유금은 아버지 서호수가 사은 부사(謝恩副使)로 북경에 갈 때 막객(幕客)으로 따라 간 사람으로,  본명이 유련(柳璉)인데 가야금을 좋아하여 유금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사람이다.  그는 또 서유본의 둘째 작은 할아버지 서명응에게 학문을 배웠는데, 수학에 밝았으며, 천문학과 율력, 서화, 금석, 전각 등의고증학적인 분야에 일가견을 갖춘 학자 관료였다. 특히 당시 조선에 전해진 기하학을 좋아하여 기하실(幾何室)이라는 호를 사용하였다.

1783년(22세, 정조7년) 작은 아버지 서형수(徐瀅修)가 이해에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광주 목사와 영변부사 등에 임명되었다.  서유본은 이해에 처음으로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이즈음 변려문(騈儷文) 공부에 힘썼다.  그는 나중에 의고문(擬古文), 팔가문(八家文) 등에 관심을 가지고 글공부를 하는데 모범으로 삼기도 하였다.
스승  박지원(朴趾源)은 이때 47세였는데, 1765년(29세)에 처음으로과거에 응시하였다가 낙방하여,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 연구와 저술활동에 전념하고 있었다.  박지원은 서유본이 문장에 관심이 많을 것을 보고 다음과 같은 시( ⌈연암집 ⌋贈左蘇山人)를 지어 주고 훈계하였다.

“세상 사람들을 살펴보니, 남의 문장을 칭찬하는 자는 꼭 ‘문장은 양한(兩漢)이요, 시는 성당(盛唐)이요.’ 하더군.  비슷하다는 말은 이미 진짜가 아니라는 뜻이네.  한나라, 당나라가 어찌 또 있겠는가? 우리 나라 습속은 옛  말투를 즐겨,  촌스러운 그 문장을 당연하게 여기네.  듣는 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도, 얼굴이 붉어지는 사람이 없더군 .……  잔재주 따위는 우선 버리게.  조용히 내가 한 말을 들어보게.  그 마음이 아마도 너그러워질 것이네.…… 걸음을 배우려다가 도리어 기어 다니고 ,(서시西施의) 찌푸림을 흉내 내면 단지 추해질 뿐이네.  이제 알 것이네.  그린 계수나무는 생생한 오동나무만 못하다는 걸.  초(楚)나라 사람들을 놀라게 하더라도 결국은 남의 의관(衣冠)을 빌린 것이네.…… 제 속이 속된 줄은 생각 안하고, 아름다운 붓과 벼루만 애써 찾더군.  문장 짓는데,  육경의 글자로만 점철하는건,  마치 사당에 몸을 의탁한 쥐와 똑같네. 훈고(訓詁)의 어휘를 주워 모으면, 못난 선비들은 입이다 벙어리가 되지.……  여름철 농사꾼이 허술한 제차림은 잊고, 갑자기 갓끈과 허리띠로 겉치장 한셈이네.  바로 눈앞에 참된 흥취가 살아있는데,  하필이면 먼 옛 문장을 취하는가? 한나라 당나라는 지금 세상이 아닐 뿐더러, 우리 민요는 중국과 전혀 다르네.  반고(班固)나 사마천(司馬遷)이 다시 태어난다 해도, 그들은 결코 모방하지 않겠지.  새 글자는 창조하기 어렵더라도,  자기 생각은 마땅히 다 풀어놓아야 할 터인데,  어찌하여 옛 방식에만 구속당하여, 허겁지겁 붙잡고 매달리는가?  지금 시대가 천박하다고 생각지말게.  천년 뒤에는 당연히 고귀하게 여길 걸세.……  한창 젊을 적에 노력한다면,  문장으로 천하를 호령할 수  있을 것이네.”

이러한 조언을 받 은서유본은 “나는 지금 사람이니 지금 문장을 쓰겠다. 옛 것을 모방해봐야 무엇 하겠는가?” 라고 하며 자신이 그동안 즐겨 배웠던 옛 문장체를 버리고 새로운 각오로 자신의 학문을 모색했다.

1786년(25세, 정조10년) 동생 서유구가 생원시에 합격하다. 스승 박지원이 음서로 관직에 나갔다.  이후 1789년에 평시 서주부(平市署主簿),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1791년에 한성 부판관, 1792년에 안의현감(安義縣監), 1797년에 면천군수(沔川郡守), 1800년에 양양부사등을 역임하였다.

1787년(26세, 정조11년) 이해 12작은 할아버지 서명응이 사망하였다. 향년72세였다. 서명응은 정조시대 최고의 학자로 평가되는 인물로 규장각의 창설을 주도한 공이 컸다.  또 서씨 집안에 ‘농학’을 가학으로 전수했는데, 저술로 ⌈보만재총서⌋가 있다.

1790세(29세, 정조14년) 동생 서유구가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 분관(分館)에 취임하였다.  다음해 셋째 작은 할아버지 서명선이 별세하였다. 향년64세였다.

1794년(33세, 정조18년) ⌈진주순난제신전(晋州殉難諸臣) ⌋을 집필하였다.  1592년 진주성 전투에 참여하였던 주요 인물13명, 부수적인 인물 20명,  모두 33명의 전기를 정리한 기록이다.  도입부를 잠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호남과 영남의 경계가 나뉘는 곳에 진주는 중요한 요충지로 위치한다.  이는 병법에서 말하는 반드시 지켜야 할 땅인 것이다. (중략)
바둑에서 한 점을 얻음으로써 전체 승부를 판가름하는 것과 같이 한성을 지킴으로써 천하의 안위가 달려있게 된다.  이것을 아는 자라야 비로소 병법을 더불어 말할 수 있다. 호남은 우리나라의 천부(天府)의 땅이고 나라의 근본이다. 임진년에 섬나라 도적들이 쳐들어와 봉홧불이 이르러 이 나라 수 천리를 돌고 잿더미가 된 속에서도 호남만이 무사했던 것은 진주 사람들이 길을 막았기 때문이었다.”

1797년(36세, 정조21년) 동생 서유구가 순창(淳昌) 군수에 임명되었다.  다음해 서유본은 성균관시에서 지은 주문(奏文, 임금에게 아뢰는글)으로 정조 임금의 칭찬을 받았다.  하지만대 과에는 계속 낙방을 하였다.

1799년(38세, 정조23년) 1월,  부친 서호수(徐浩修)의 상을 당하였다. 그는 아버지 서명응이 전한‘농학’을 계승하여 조선시대 농학의 고전이라고 불리는 ⌈해동농서⌋를 지었다. 이 책 은전8권으로 이루어졌는데, 농무(農務), 과류(瓜類), 채류(菜類), 과류(果類), 목류(木類), 초류(草類), 잠상(蠶桑), 복거(卜居), 목양(牧養), 조양(造釀),구황(救荒), 벽온(酸瘟), 치약(治藥), 단약(丹藥) 등으로 나누어 서술되었다.
서호수는 아들들에게 어느날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은 재주가 없어 아마도 이 귀중한 책들은 뒷날 깨진 간장독을 바르는데 쓰게 될 것이다.”

서호수는 자신이 흥미를 가지고 모은 서적들 중에는 천문, 역산(曆算), 음악, 기하학 등 특이한 분야의 서적이 많았는데,  자신의 네 아들 중에 그러한 자신 의학문을 이어줄 마땅한 자식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부친의 말은 서유본과 서유구, 그리고 서유본의 부인 빙허각에게 항상 경계의 말이 되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들이 남긴 책들을 모두 읽고 그 바탕위에 생활에 꼭 필요한 지식의 백과사전을 만들어 내는 일이 그 이후 서씨 가문의 목표가 되었기 때문이다.

1804년(43세,순조4년) 작은 아버지 서형수가 이조참판에 임명되었다.  동생 서유구가 형조참의에 임명 되었다가 ⌈정조실록 ⌋의편찬에 참여하였다. 이후 동생은 성균관 대사성, 홍문관 제학, 형조 판서,  전라도 관찰사, 호조판서, 병조판서,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렀다.

1805년(44세,순조5년) 가을에 음보(蔭補, 조상의 덕으로 얻은 벼슬)로 동몽교관(童蒙敎官)이 되었다.  서유본으로서는 처음 갖게 된 관직이었다.  이해 스승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이 향년 69세로 사망하였다.  작은 아버지 서형수(徐瀅修)는 경기 관찰사가 되었다.

1806년(45세,순조6년) 이해에 안동 김씨 세력에 의해서 벽파 계열인 우의정 김달순 등이사약을 받았다.  이 사건에 연루되어 작은 아버지 서형수가 관직을 박탈당했다.  당시 할아버지들과 부친이 모두 돌아가신 상황에서 작은 아버지는 가문의 중심이었다.  그의 관직 박탈은 바로 가문의 몰락을 의미했다.  정조 임금의 무한한 사랑을 받았던 서씨 가문은 순조 시대로 접어들면서 차츰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작은 아버지는 이후 전라도 홍양현 등지에서 18년 동안이나 유배 생활을 하게되었다.  1817년에는 추자도에 유배되었으며, 나중에(1823년)  전라도 임피현으로 옮겨져 그 곳에서 사망했다.
서형수는 조카들인 서유본과 서유구에게 큰 영향 을미쳤다.  그 는‘필유당(必有堂)’이란 서재를 만들었는데 그 이름은 ‘자손 가운데 반드시  학문을 좋아하는 자가 나올 것이라는 의미’ 였다. 서유본은 작은 아버지가 지은 필유당에 대해 필유당기(必有堂記) 에서 이렇게 썼다.

“대나무가 우거진곳의 서쪽에는 나무를 엮어 가리개를 만들고,  가리개 안쪽에는 땅을 정리하여 서재를 지었다.  조용하고 깨끗하여 마치  산 속에 있는 듯한 생각이 드는 곳이었다.  내 작은 아버지 서형수 선생께서는 그 안에 경사자집(經史子集)의 서적을 비치해 놓으시고 자제들이 그 곳에 모여 학문을 익히도록 하셨다. 그리고 그곳의 편액 을‘필유(必有)’라고 하였다.  옛날에 정기(丁覬)라는 사람이 만권의 책을구입하고는 ‘내 자손 중에 틀림없이 학문을 좋아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라고 했는데, 서재 이름을 이렇게 지은 뜻은 여기서 나온 것이다.”

이해 서유본 역시 자신에게 닥쳐올 후환을 피하기 위해 사직했다.  서울 외곽 인동호 행정(지금의 용산)으로 내려가 아내 빙허각과 함께 차밭을 일구며 생활을 꾸려갔다.  나머지 시간은 오로지 독서와 저술에 힘썼다.  원래 높지 않은 관직생활 이었기 때문에 그는 벼슬이나 정치에 대한 미련을 쉽게 버릴 수 있었다.

한때는 또 전라도에 내려가 그곳에서 남의 집을 빌려 살면서 경학을 연구하기도 하였다.  한편으로는 ⌈사기 ⌋공부를 하거나 작은 아버지 서형수의 필유당(必有堂)에서 동생 서유구 등과 고문을 짓 는공부를 하기도하였다.  그리고 부친이 남긴 과업을 이어서 기하학과 역학(曆學), 상수학(象數學), 율려학(律呂學) 등을 5년여에 걸쳐 연구하였다.

부인 빙허각은 갑자기 궁핍해진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밭일을 하면서 틈틈이 자신이 경험한 생활 지식과 집안에 소장하고 있던 실학 서적의 여러 내용을 종합하여 여성들에게 필요한 지식을 정리했다.  당시  서유본의 집안에는 수많은 책들이 소장되어 있었다.  돌아가신 작은 할아버지 서명응의 서재죽 서재(竹西齋)의 책들, 서유본의 서재불 속재(不俗齋)에 보관된 책들, 또 시동생 서유구가 모은 태극실(太極室)의 책 등이 있었다.  가정 백과사전 ⌈규합총서(閨閤叢書) ⌋(1809년)는 그러한 환경을 배경으로 완성 되었는데,  그 외에도 빙허각이 당시 지은 글들이 ⌈빙허각시집 ⌋, ⌈청규박물지 ⌋등에 담겨있다.  빙허각은 ⌈합총서 ⌋ 서문에 이렇게 썼다.

“나는 동호(東湖)의 행정에 살면서 집안에서 밥을 짓고 반찬 만드는 틈틈이 사랑에 나가 옛 글을 읽었다.  그 가운데 일상 생활에 꼭 필요한 내용과 산야에 묻혀 있는 모든 글 들을 구해 보았다.  손길 닿는 대 로펼쳐보고 견문을 넓히고 또 무료함을 달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문득 ‘총명함은 무딘 문장만 못하다.’라는 옛 사람의 말을 떠올렸다. 기록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잊어 버렸을때 도움이 되겠는가? 그래서 모든 글을 보고 가장 중요한 말을 가려 뽑아 적고 혹시 따로 내 생각을 덧붙여 다섯 편의 글( ⌈규합총서 ⌋)을 지었다.”

남편 서유본이 또 이렇게 썼다.

“내 아내가 여러 책에서 뽑아 모아 각각 항목별로 나누었다.  시골의 살림살이에 요긴하지 않는 것이 없다. 더욱이 초목, 새, 짐승의 성미에 대해서는 아주 상세하다. 내가 그 책 이름을 지었는데 ⌈규합총서 ⌋라고 하였다.”

동생 서유구도 이해 1월 18일 상소문을 올려 홍문관 부제학의 자리에 서물러나 낙향하여 은둔하였다.  서유본과는 달리 고위관직에 오래 있었던 서유구는 그 만큼 더 신변의 위험을 느꼈으며 더욱 철저하게 은둔생활을 하였다.  이후 터전을 옮겨다니며 20년 가까이 농사를 지으며 학문에 힘썼다.  그는 실학에 조예가 깊었고,  다양한 분야에 통달하여 문장도 잘 지었는데, ⌈금화경독기(金華耕讀記) ⌋, ⌈번계모여집(樊溪耄餘集) ⌋,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등을 저술하였다. ⌈임원경제지 ⌋는 113권 52책으로 백과 전서이며 생활과학 서적이다.  전원 생활을 하는 사람들,  특히 선비들에게 필요한 지식과 기술,  그리고 기예와 취미 관련 지식을 모두 모았다. 16개의 항목으로 나누어 800여종의 문헌을 참고하여 당시 알려진 생물과학의 거의 모든 분야를 집대성한 거작이었다.

1810년(49세,순조10년) 이해 여름부터 주희가 지은『의례경전통해집전집주(儀禮經傳通解集傳集註)』를 공부하였다.  이후 9년간 그 책의 요점을 뽑아 『주례(周禮)』와 『예기(禮記)』를 부기한『삼례소지(三禮小識)』 6권을 만들어 1819년(순조19년)에 편찬하였다.  그는 주희를 본받아 『의례(儀禮)』를 매우 중시하였다.

1820년(59세,순조20년) 『주자가례』를 연구하였다.  주희가 주장한 내용을 초기와 후기로 나누어 정리한 다음에, 그 차이점을 검토하여 주자의 정론(定論)을 확정한 다음『가례소지(家禮小識)』 2권을 편찬했다.  이외에도 역사서를 읽기 위해서는 역대관제(官制)를 명확히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관제연혁고(官制沿革考)』2권을 지었다.

1822년(61세,순조22년) 7월 14일에 갑자기 병을 얻어사망하였다.  동생 서유구가 묘지명( 백씨좌소산인묘지명伯氏左蘇山人墓誌銘)을 썼다.  부인 빙허각은 절명사(絶命詞)를 짓고 사람들과 모든 관계를 끊고,  머리를 빗지 않고, 얼굴을 씻지 않으며,  자리에 누워 19개월 만인 1824년 66세로 남편의 뒤를 따랐다. 문집으로 ⌈좌소산인문집(左蘇山人文集) ⌋ 8권 4책이 있다. 문집에는 시문, 서간문, 애제문(哀祭文),  잠명문(箴銘文) 등 문장 외에도 상제론(喪祭論), ⌈독명사 교사지(讀明史郊祀志)⌋, ⌈진주순난제신전(晉州殉難諸臣傳)⌋, ⌈김인의영가전(金引儀泳家傳 )⌋(정조시대 대표적인 천문역산가天文曆算家 김영金泳 전기) 등이 수록되어 있다.  그는 또 ⌈주자가례 ⌋, ⌈의례경전통해집전집주(儀禮經典通解集傳集注) ⌋등을 연구하여 ⌈삼례소지(三禮小識) ⌋ 6권과 ⌈가례소지(家禮小識) ⌋2권을 편찬하였다.

서유본은 관직에만 매달리지 않고 자유스럽게 자신이 하고자하는 공부를 추구했다.  청나라에서 전해진 북학이 조선 에알려지기 시작한 시대에 살면서 그는 새로운 학문의 수용에 열성이었고, 실용적인 생활의 지식을 모으고 집대성하는데 힘썼다.
그가 남긴 문장 중에는 조선후기 과학사의 연구에 중요한 것들이 적지 않다.  경학공부도, 실사구시적인 연구를 추구하였는데, 주희의 학설을 검토하여 옳고 그름을 분석하여 그 본 뜻을 추구하고자 하였다. 그는 고증학적인 입장에서,  당시 사람들이 십삼경주소(十三經注疏)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근거 없이 주희를 헐뜯고 평가하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참고자료>
-박지원, ⌈ 贈左蘇山人⌋, ⌈연암집 ⌋
-심경호, ⌈서유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심경호, ⌈좌소산인문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구만옥, ⌈서유본의학문관과자연학담론⌋, ⌈한국사연구⌋ 166,2014
-임유경, ⌈서유본의 <진주순난제신전(晋州殉難諸臣)>연구, <어문학> , 2004
-한민섭, ⌈조선후기가학의한국면- 서명응일가의문학을중심으로⌋, ⌈한국어문학국제학술포럼학술대회 ⌋, 2007.6

문달환(1851~1938)


문달환(1851~1938)                                                PDF Download

 

문달환(1911년, 채용신그림)
문달환(1911년, 채용신그림)
달환(1851~1938)은 전라남도 화순 출신으로 면암 최익현의 제자이다.  그는 스승이 1906년 태인에서 을사조약에 항의하여 의병을 일으키자 지원하여 종군하였으며,순창에서 관군들과 대치하였을 때 마지막까지 스승의 곁을 떠나지 않고 지켰다.  체포된 뒤 일본군사령부에서 가혹한 고문으로 다리가 불편해진 그는 석방된 뒤에 귀향하여 두문불출하고 학문에만 힘썼다.

1851년(1세, 철종2년)에 전라남도 화순군 춘양면 부곡리(富谷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남평(南平)이며,  자는 덕경(德卿), 호는 둔재(遯齋)이다.  심암(心庵)  문봉후(文鳳休)의 아들이며,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1833~1907)의 제자다.

1880년(30세, 고종17년) 이즈음에 화순(和順)  한천면 모산리에 거주하다 부곡리(富谷里) 부춘동 마을로 옮겨 살았다.  화순군지에 따르면 그는 “기상(氣像)이 준엄(峻嚴)하고 기개가 강개(慷慨)하여 영웅열(英雄烈士)의 전기를 즐겨 읽었다.”고 한다.

1905년(55세, 광무9년) 매국노 이완용 등이 어전회의에서 고종을 협박하여 일본과 을사조약을 맺어,  대한제국의 국권이 일본에 강탈 당했다.  당시 스승  최익현은 각 지방의 유림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세웠다.  고위 관료들에게 함께 거사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하였다.

1906년(56세, 광무10년) 최익현이 6월에 전라북도 태인(泰仁)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태인에는 임병찬(林炳瓚)이 살고 있었다.  태인의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강회를 개설하고 유생들을 모았는데,  문달환은 이때 참여 하였다.
의병들은 약 80여명이 대오를 짜서 태인 본읍으로 진군하였다.  군수는 저항을 못하고 도망쳤으며,  의병들은 무혈로 태인을 점령하였다. 그곳에서 무기를 접수하고 의병을 모아 다시 30여리를 행군하여 정읍으로 진격하였다.  정읍에서 관군과 대결하여 그들의 항복을 받아내고,  다시 내장사(內藏寺)와  구암사(龜岩寺)로 가 그곳을 점령하였다.  다음날 순창으로 진군하여 순창 군수의 항복을 받아냈다.  하지만전주와 남원에 있던 관병이,  전주 관찰사 한진창(韓鎭昌)과 순창 군수이건용(李建鎔)의 지휘 하에 일제히 공격해왔다.  조선 사람들끼리의 전투를 피하려고 하였던 의병들은 저항하지 않고 전장을 피하거나 최익현 주변에 남아 체포되었다.  마지막까지 최익현과 함께한 의병들은 문달환,  임병찬(林炳瓚) 등을 포함하여 12명이었다.  이 12명은 순창 12의사로 불린다.

6월 말에 체포된 의병들은 서울로 압송되어 일본군 사령부에 감금당해 심문을 받고 재판결과, 문달환은 태형 100대에 처해졌다.  약2개월  동안 옥고를 치른 뒤,  8월에 석방되었다.  당시 가혹한 고문으로 문달환은다리가 불편해졌다.  그의 병오일기丙午日記) 에는 이해 1월 16일부터 7월 7일까지의 일이 기록되어 있다.  최익현과 임병찬은 8월 하순에 대마도로 유배되었다.  대마도에서 최익현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전했다.

“글공부 하는사람은 나라를 방위할 책임도 없고,  80이란 나이는 종군할 때도 아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비상한 시기를 당하여 위로는 조정에서 아래로는 농촌에 이르기까지 벙어리ㆍ장님ㆍ앉은뱅이를 제외하고 모두가 말하기를, ‘제 집안에만 숨어있고 나랏일을 모르는척 하는 사람은 결코 인간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라고 한다.  내가 저지른 죄로 여러분에게 화가 미치게 되었으니 부끄럽기도 하고,  미
안한 마음이 적지않다.  글자의 고상함이나 시의 품격을 보지 않고 마음이 가는 대로 그 사실만을 서술하여 각자에게 오언 절구1절을 주니, 뒷날에 참고 하거라.”

최익현은 13명의 제자들에게 오언절구 1절씩을 주었는데 문달환 에게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절구를 주었다.

재난의 그물에서도 이미 벗어났고
(禍網尙可脫)
병세가 좋아진 것은 신이 도운 것같네.
(損疾神佑然)
나는 알겠네,  자네가 고향에 가는날
(深知還鄕日)
맨 먼저 조상의 묘에 절하겠지.
(藉手拜先阡)

제자가 자신 때문에 온갖 고초를 당하고 다리를 다친 것을 미안해 하면서 그러한 아픔이 어느 정도 아문 것을 기뻐하는 모습이 표현되어있다.  그리고 제자의 마음이 되어 고향인 화순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마치 자신도 같이 따라나서는 듯이 노래한 것이다.  최익현 자신은 이해 겨울 일본측의 온갖 협박과 회유를 뿌리 치고 단식에 돌입하였다.

1907년(57세, 광무11년) 1월 1일, 스승 최익현이 옥중에서 단식으로 순절하였다. 화순에서 부산까지 나가 스승의 영구(靈柩)를 모셔와 청양에 안장하였다.  귀향 한 뒤에는 두문불출하고 학문에만 힘썼다.

1909년(59세, 융희2년)에 이완용이 독단으로 기유각서를 교환하여, 사법권을 일본제국에 넘겼다.  그 이듬해 1910년,  한일합방조약이 체결되어 조선의 국권이 완전히 상실되었다.

1911년(61세, 일제시대)에 채용신(蔡龍臣, 1850~1941)이 와서 전신 초상화 2점과 반신 초상화1점을 그려주었다.  채용신은 궁정에서 역대왕들의 어진과 고종의 어진을 그린 유명한 초상화가로, 1906년에 충청남도 정산군 군수직을 사직하고 전라도로 낙향해 있었다.

1914년까지그는 여러 지역을 떠돌아 다니면서 항일투쟁을 하였던 사람들이나 우국지사의 초상화를 그려주었다.  이때 그린 문달환의 초상화는 현재 화순군 춘양면 부곡리249번지에 있는 춘산사(春山祠)에 보관되어있는데, 2011년에 전라남도 유형 문화재제314호로 지정되었다.

1927년(77세) 제자들에 의해서 춘산사(春山祠)가 건립되었다. 나중에 부춘사(富春祠), 부춘정사(富春精舍)라고 불린 이곳은 1937년에훼손되었다가 1945년에 다시 복구되었으며 춘산사로 개칭되었다. 정식명칭은 ‘충의영당및춘산사’이다.  춘산사가 지어진 때 감회를 문달환은 이렇게노래했다. ( ⌈둔재집 ⌋寄富春齋講所)

산속에서 당을 만들고 규약을 정했다는 말을 들으니
(比聞山塾講規成)
의리를 살피고,  글 공부하는 일을 가볍게 할수 없겠네.
(硏義攻文自不輕)
그곳은 천리와  인륜을 밝히는 진실한 곳이니,
(天理人倫眞實地)
공자와  주자의 지극한 뜻이 책속에서 밝아지네
(孔朱至意卷中明)

부춘정사(富春精舍)는 문달환이 만년에 제자들을 양성하고 자신의 학문을 닦는 곳으로 사용하였다.  아울러 화순 지역 문인들이 조용히 수양하면서 서로 소통하는 공간으로 활용되었는데,  문달환은 또 이런 시를 지었다.

조그맣고 깨끗한 오두막이 푸른산 가까이 있네.
(弊廬瀟灑近靑山)
책을 보며 이곳에서 살기가 딱좋겠구나.
(祗合看書住此間)
나라 위한 영웅들은 모두 백발이 되었지만,
(公道英雄皆白髮)
좋은 시절 그 뜻은 붉은 얼굴에 남아 있네.
(好時志業在紅顔)

1938년(88세)에 사망했다.  문집으로 ⌈둔재집(遯齋集) ⌋8권이 있으며, 화순군 능주의 춘산사에 최익현 등과 함께 배향되어 있다.  1990년,  그의 공훈을 기리어 대한민국 정부에서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자료>
⌈면암집(勉菴集) ⌋
문달환,<독립유공자공훈록>, 국가보훈처(http://www.mpva.go.kr)
오인교, 南道정자기행(1807)-화순부춘정사(富春精舍),<한국매일>, 2014.12.18
유치석, 문달환(文達煥),<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화순문달환 초상>,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