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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진원(閔鎭遠, 1664∼1736)


민진원(閔鎭遠, 1664∼1736)                                 PDF Download

 

민진원의 단암만록
민진원의 단암만록
진원(閔鎭遠, 1664년∼1736년)은 조선후기의 문신이자 외척이다. 숙종의 장인 민유중(閔維重, 1630년∼1687년)의 아들이며,  민진후의 동생이고,  인현왕후의 작은 오빠다.   28세 때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남인이 집권하여 잠시 관직에 임명되지 못하였다.  1694년 갑술환국 이후 복귀하여 병조좌랑, 전라도관찰사, 대사성, 이조판서, 좌의정등을 역임했다.  영조의 탕평책을 반대하였으며 노론의 영수로 활약하였다. ⌈숙종실록 ⌋과 ⌈경종실록 ⌋의 편찬을 주도하였다.

1664년(1세, 현종5년)에 태어났다.  본관은여흥(驪興, 경기도여주), 자는 성유(聖猷), 호는 단암(丹巖) 또는 세심(洗心)을 사용하였다.  증조할아버지는 민기(閔機), 할아버지는 민광훈(閔光勳)이며, 아버지는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이다.  민영익의 6대조이며, 명성황후의 종 5대조이다.  어머니는 좌찬성 송준길(宋浚吉)의 딸이다.  숙종의 부인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오빠이며 우참찬 민진후(閔鎭厚)의 동생이다.  송시열(宋時烈)에게 배웠다.

1691년(28세, 숙종17년)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기사환국(1689년) 이후 동생 인현왕후가 폐비되고 남인이 권력을 잡으면서 등용되지 못했다.

1694년(31세, 숙종20년) 갑술옥사(甲戌獄事)로 장희빈(張嬉嬪)이 폐위되고,  동생 인현왕후가 다시 궁궐로 돌아왔다.  남인이 권력에서 쫓겨나고 노론 일파가 다시 집권하였다. 민진원도 노론으로 활동하였는데,  윤증, 박세채등 남인을 공격하는데 참여했다.  다음해 예문관검열에 임명되었다.

1696년(33세, 숙종22년) 세자시강원 겸 설서(世子侍講院兼說書)가 되었다. 사서에 올랐으나 외척이라는 이유로 물러나게 되었다.  다음해 홍문록(弘文錄)에 뽑혔으며, 수찬(修撰)에 등용되었다.  중시(重試)에 을과로 또 급제하였다.

1698년(35세, 숙종24년) 병조좌랑에 임명된 뒤 사헌부의 지평, 부수찬 등을 역임하였다.

1701년(38세, 숙종27년) 사복시정(司僕寺正),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등에 임명되었다.

1703년(40세, 숙종29년) 전라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서원 난립으로 지방 재정이 악화되고 당파 싸움이 더욱 치열하게 되는 것을 목격하고 서원 건립을 억제하도록 하는 상소를 올렸다.

1705년(42세,숙종31년) 공조참의, 강화유수 등에 임명되었다.  장희빈사건으로 유배된 소론파 리더 남구만(南九萬)의 형을 감해 주도록 상소했다.

1706년(43세, 숙종32년) 강화부유수, 평안도관찰사 등에 임명되었다.  강화도에서 근무할 때는 행정구역을 개편하여 편의를 도모하였으며 주민을 순화 시키는데 노력하였다.  또 농한기 때에는 섬과 섬을연결시키는 둑을 만들고,  간척사업을 하였으며 , 주민들에게  전답을분배해 주었다.  아울러 강화도의 내성을 신축하고,  남문과 서문을 새로 건설하는 등 많은 일을 하였다.

1712년(49세, 숙종38년) 사은부사(謝恩副使)에 임명되어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1715년(52세, 숙종41년) 대사성의 직위에 있을 때, 노론파 정호(鄭澔)를 두둔하다 파직되었다.  당시 ⌈가례원류(家禮源流) ⌋의 간행을 둘러싸고 노론파와 소론파의 당쟁이 치열했다.  다음해 노론이 다시 권력을 잡자,  평안도시관(試官)으로 임명되었다.

1718년(55세, 숙종44년) 예조판서에 임명되고, 양전구관당상(量田勾管堂上)을 겸임하였다.  주청사(奏請使)로 다시 청나라 연경(燕京)에 다녀왔다.  이후 강화구관당상(江華勾管堂上), 이조판서, 호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720년(57세, 숙종46년, 경종즉위년) 형 민진후가 사망하였다.  숙종이 사망하고 경종이 즉위하였다.  민진원은 형을 대신하여 새 임금 경종의 외숙부로 실권을 장악하고 노론의 리더가 되었다.

1721년(58세, 경종1년) 공조판서 재직 중 실록청총재관(實錄廳總裁管)으로 ⌈숙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경종은 몸이 허약하고 아들이 없었다.  민진원이 이끌고 있던 노론파는 경종에게 동생 연잉군(훗날의영조)을 다음왕으로 지명할 것을 요구하였다.  경종이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자, 민진원은 많은 관료들 앞에서 경종이 효심이 없고 군주로서 자질이 부족하니 서둘러 연잉군을 왕세제로 임명하고,  정치에서 물러나야한다는 발언을 하였다.  소론파는 상소를 올려, 노론파가 임금에 대해서 너무 불충하고, 무례한 행동을 한다고 탄핵을 하였다.

1722년(59세, 경종2년) 노론파가 반란을 일으킬 음모를 꾸몄다는 소론파(김일경과 목호룡등)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주요 대신들이 체포되고,  사형을 당했다. 노론파 관료들이 실각을 하고,  민진원도 성주(星州)로 유배되었다.

1724년(61세,영조즉위년) 이해 영조(英祖, 1694~1776)가 즉위하고,  다시 노론이 집권하였다. 우의정에 올랐으며, 실록청총재관으로 ⌈경종실록 ⌋편찬을 주관하였다.  전 임금 경종의 병세가 위독하게 되었을 때,  조정에서 득세하고 있던 소론파가 경종의 병을 숨겼다.  한사람도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감히 말을 하고자 하는 자가 없었는데, 민진원은 분연히 일어나 이렇게 말했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변론함이 없다면, 우리 선왕(先王)의 인자하고 후덕한 마음과 우리 군주의 효성스럽고 공경스러운 덕이 장차 만세(萬世)에 드러나지 못할 것입니다.  게다가 명분(名分)이 바르지 못하면 화란(禍亂)이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또이렇게말했다.

“우리 대행 대왕(大行大王, 경종)께서 불행히 병이 있어서 전하(영조)께 막중한 직위를 맡기셨습니다. 그런데 몇몇 사람들이 자신에게 불리할까 염려하여 참벌(斬伐)을 마음대로 행하고 무함을 심하게 하여 숙종 때의 옛 정령(政令)을 거의 다 바꾸어놓았습니다.  그러면서 걸핏하면‘ 임금에게 뜻을 여쭈고 임금의 뜻을 취한 것이다.’ 라고 하였는데, 이는 모두 대행대왕께서 편찮아서 제대로 살피지 못하신 것입니다. 질병이 성덕(聖德)에 무슨 누가 되기에,  간교한 무리들이 기어이 숨기고는 은밀히 농간을 부린 자취를 감추었으니,  어찌 통탄스럽지 않겠습니까.  이 무리들은 모두 나라의 죄인들이니,  당장에 다 처벌을 한다 하더라도,  이는 나라를 위하여 흉적들을 정죄하는 것이지,  개인적으로 사사로이 복수하고자 하는것이 아닙니다.”

1725년(62세 영조1년)영조의 탕평책에 따라 소론의 리더인 좌의정 유봉휘(柳鳳輝)를 1722년에 일어난 신임사화 주동자로 책임을 물어탄핵, 유배시켰다. 억울한 죄를 얻어 사망한 송시열에게 증직(贈職)할 것을 상소하였다.  이후,  좌의정,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에 임명되었다.

1727년(64세,영조3년)영조의 탕평책에 따라 당색이 강한 이유로 파직되었다. (정미환국) 그는 영조를 추대하기 위해서 노력하다 처형된 노론파 대신들의 복권을 주장했으며,  노론파 축출을 위해 일을 꾸며낸 소론파 대신들의 처벌을 요구했다 .순안(順安)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당시 소론파는 민진원이 주관하여 완성한 ⌈숙종실록 ⌋이 고의로 기사를 누락하고, 왜곡 시킨 부분이 많다고 하며 전면적인 개정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노론파의 반대로 수용되지 못했으나 일부 내용이 수정된 ⌈숙종실록보궐정오 ⌋가 제작되었다.

1728년(65세,영조4년) 소론파 강경세력이 남인을 모아 삼남지역에서 대규모의 난을 으켰다. (이인좌의난)영조는 노론파 경세력의 리더였던 민진원을 다시 조정으로 불러들였다.  민진원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소론파와  남인파를 대거 숙청하였다.

1729년(66세,영조5년) 중추부판사에 임명되었다. ⌈가족제복론(加足帝腹論) ⌋을 편찬하여 올렸다.  당파 싸움을 없애려는 영조의 탕평책에 반대하여,  끝까지 소론을 배격하고 노론의 대표로 활동하였다.

1736년(73세,영조12년) 11월에 사망하였다. 원주(原州) 사포(蛇浦)에 장사를 지냈다가, 후에 다시 광주(廣州) 월라산(月羅山) 아래로 이장하였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작품으로 ⌈연행록(燕行錄) ⌋, ⌈단암만록(丹巖漫錄) ⌋등이 있다.   그는 글씨를 잘쓰고 문장에 능해 강릉의 송담서원비(松潭書院碑)를 비롯해 다수의 신도비(神道碑 )제작에 관여하였다.
생전에 민진원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죽거든) 비석을 세우지도 말고,  남에게 비문(碑文)을 요청하지도 마라.  단지 내 묘에 표지만 하게하라.”

몇 년 뒤에 자손이 그 말을 어기고,  그 행장(行狀)을 가지고 친척 중 한사람에게 묘표(墓表)를 청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묘표를 부탁한 사람과 부탁을 받은 사람이 잇달아 사망하였다고 한다.

<참고자료>
⌈미호집 ⌋(제18권봉조하단암민공묘표)
한영국, 민진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민진원, ⌈인천광역시사 ⌋. 2002

민정중(閔鼎重, 1628-1692)


민정중(閔鼎重, 1628-1692)                                 PDF Download

 

정중(閔鼎重, 1628-1692)은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에게 학문을 배웠다. 숙종의 부인 인현왕후의 부친 민유중의 친형이며,  동래부사, 병조참의, 공조판서, 한성부윤 등을 역임하였다.  내직에 있을 때는 맡은 바 직책에 충실하였고,외직에 있거나 유배를 당했을 때는 가 는곳마다 유풍(儒風)을 크게 일으켜 사람들로부터 신망을 얻었다.

민정중의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연곡서원(문화재청 사진)
민정중의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연곡서원(문화재청 사진)

1628년(1세, 인조6년)에 태어났다.  본관은 여흥(驪興, 경기도 여주)이며,  자는 대수(大受), 호는 노봉(老峯)이다.  증조할아버지는 민여건(閔汝健),  할아버지는 경주 부윤을 지낸 민기(閔機),  아버지는 강원도관찰사를 지낸 민광훈(閔光勳)이며,  어머니는 이조판서 이광정(李光庭)의 딸이다. 형제로 여양 부원군(驪陽府院君)  문정공(文貞公) 민유중(閔維重)과 민시중(閔蓍重)이 있다.

1649년(22세, 인조27년, 효종즉위년)에 정시(庭試)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며,  성균관 전적(典籍)으로 임명되어 벼슬에 나갔다.  그 뒤 예조좌랑, 세자시강원사서(世子侍講院司書)에 임명되었다.  직언(直言)을 잘하였는데,  임금이 그의 말을 훌륭하게 여기고 귀담아 들었다. 후에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을 거쳐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에 제수되고 교리(校理)로 임명되었다.

1652년(25세,효종3년) 임금이 대신들에게 어사(御使, 암행어사)에 합당한 자를 천거하도록 하자 홍처대 등과 함께 뽑혔다. 이후 전라도 어사로 파견되어 병영, 수영의 운영에 관한 보고를 올렸다.  그 내용은병조에 의해서 임금에게 보고되었는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전라도 어사 민정중(閔鼎重)이 보내온 보고 가운데에서 ’각도의 병영과 수영(水營)에 있는 우후(虞候, 무관직으로 각 도에 배치된 병마절도사 및 수군절도사 다음가는 관리)의 호를 평사(評事)로 고치고 시종신(侍從臣, 임금을 보필하는 문관)을파견하도록’ 청하였는데 그 뜻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만약 이대로 실시하여 그들에게 순찰하여 조사하는 책임을 맡기는 한편 압력을 가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고, 또 주장(主將)과 군대 운영에 관한 일을 상의하며 군무(軍務)에 숙달토록 한다면, 현재의 일이나 뒷날의 쓰임에 어찌 보탬이 되는 점이 없겠습니까? 다만 (중략)
‘첨사(僉使)나 만호(萬戶)를 문신으로 뽑아 보내야 한다.’는 것도 역대 조정에서그런 일이 있긴 합니다만, 그것은 일시적인 특명에서 나온 것이므로 후세에 정상적으로 행할 법은 못 됩니다. 백성을 어루만지고 결단 나버린 고을을 소생시키는 것이야 문관에게 책임지울 수 있을지 몰라도, 위급하게 되었을 때 힘을 얻는 면에서는 필시 무사(武士)보다 못할 것인데, 문신으로 무신을 바꾸는 일이 과연 사리에합당한지는 모르겠습니다.

이해 9월에 호서 지방의 대동법 시행에 관해서 탐문하도록 명을 받고조사하였다.  또 다음해 3월에 암행어사로 임명되어 정치에 소홀한 여섯 고을의 수령을 파직시켰다.
민정중은 매사에 충직하게 맡은 바 일을 잘 수행했는데, 특히 국방의일에 관심이 많았다.  사람들은 그가 ‘뜻을 세워 학문에 힘쓰고,  어진인재를 등용하며,  곤궁한 백성을 돌보고,  변방의 방비를 잘하는 것을 회복하는 일을 중요한 조목으로 삼았다. ’(이재李縡의 비명碑銘)고 하였다. 예를 들면 이해 3월 경연의 자리에서 현종 임금과 함께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효종실록⌋ 8권, 효종3년 5월 15일)

민정중 :우리나라 군정(軍政)이 문란한 것은 실로 장수를 엄선하지 않는 데에 원인이 있습니다. 장수가 적합한 사람이 아니다 보니, 군율(軍律)이 엄격하지 못하고척후가 치밀하지 못합니다. 그래 가지고서야 어떻게 적의 실정을 탐지하여 기습병(奇襲兵)을 출동시킬 수 있겠습니까?

임금 : 우리나라 장수들은 적들과 진지를 마주하고 있으면서 몸을 바쳐 용감하게싸울 뜻은 없고 자기 한 몸 보호하는 것 밖에는 아무 것도 걱정하지 않는다. 보좌관 용감한 군사들은 뽑아서 좌우에 두고 임시 군관을 뽑아 척후의 임무를 맡겨 적의 실정을 살펴오도록 요구하니 참으로 우습다. 내가 일찍이 오랑캐들의 군대를 다스리는 기술을 보니, 군무(軍務)를 연마하고 병법을 익혀 행진(行陣)은 엄숙하고무기는 예리하였다. 그리고 그중에 가장 친하고 믿을 만한 자로 하여금 적의 실정을 정탐하게 하고 동태를 살피게 하였다. 그들이 전쟁에서 승리하여 공을 세울 수있었던 것은 모두 이러한 작전 때문이었다. 우리나라는 과연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옛 사람이 이르기를 ‘밭갈이는 남자종에게 묻고 길쌈일은 여자종에게 물어야 한다.’고 하였는데, 노비에 관한 말이 비록 문관과 무관의 일에 대한 비유로 취할수 있는 것은 아니나 문(文)이라 이름 하였으면 글을 읽고 학문을 강론할 뿐이며,무(武)라 이름 하였으면 병법(兵法)을 익히면 될 뿐이다. 무인을 등용하는 도는 차라리 거칠고 사나운 것이 지나칠지언정 나약하고 옹졸해서는 안 되는데, 오늘날 군사를 담당하는 관청이 슬기로운 힘을 지닌 자를 뽑지 않고 단지 글자나 아는 영리한 자를 뽑다보니 모두가 서생들뿐이다. 그런데 급한 상황에 적을 상대할 때에 서생을 쓸 수 있겠는가? 이는 우리나라 풍습 중 하나의 커다란 병폐다.

민정중 : 인재를 얻는 도리는 오직 정성을 다해 찾는 데 있습니다. 세상에 비록 문무를 겸비한 제갈량 같은 인재가 있다 하더라도 찾지 않으면 오지 않을 것이니, 훌륭한 인재가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임금 : 어찌 나라가 작다고 인재가 없겠는가? 우리나라는 둘레가 수천리나 되는 땅인데 어찌 인재가 없다고 단정할 수 있겠는가? 내가 관무재(특별히 왕의 명령으로시행하는 무과)를 다시 설치하고 싶다만 보고 듣기에 번거로울까 염려된다.

민정중 : 관무재는 역대 조정에서 이미 그와 같은 규례가 있었습니다. 후세에 새로창설한 일이 아니므로 실행하기에 번거롭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금 마땅히 수시로시행하여 기예(技藝) 가진 자를 뽑고 군사(軍事)를 연습시켜 사기를 돋우도록 하소서.

임금 : 그렇다. 옛날 월나라의 구천(勾踐)이 오(吳)나라를 치려고 할 때에 성난 개구리를 보고 절을 하였다 하니, 아마 이는 그 개구리의 기상을 높이 샀기 때문일것이다. 옛 사람이 큰일을 경영하는 자는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경우가 없었다.
내가 보기에 육조의 판서들이 부임했을 초기에는 일 처리한 것이 조금 볼만했는데 여러 번 임명되자 점점 처음과 같지 않아 직무에 근면하고 최선을 다하는 실상이 없다. 요즘에 병조 판서 박서가 앞일을 잘 생각하여 추진하는 일이 많으니 진실로 매우 가상하다. 그러나 박서로 하여금 이 직책을 두세 번씩 맡게 하면 필시 오늘날처럼 직무에 최선을 다하지 못할 것이다.

1659년(32세,현종즉위년) 상소를 올려 인조 때 역적으로 몰려 죽음을 당한소현 세자(昭顯世子)의 빈(嬪) 강씨(姜氏)의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이재(李縡)가 지은 민정중의 비명(碑銘)에 이렇게 적혀 있다.

“처음에 강씨가 선왕 때에 죄를 받아 폐출되어 죽고 그 자녀는 어린데 모두 섬으로 귀양 갔기 때문에 나랏사람이 모두 슬퍼하였다.  그러나감히 말하지 못하였는데 공이 홀로 맨 먼저 논하니,  임금이 그 충직한 것을 알고 죄를 주지 않았으며,  모든 신하들이 다 놀랐다.  공이 임금에게 인정받은 것은 대개 여기에서 비롯 하였다고한다.”

이후 민정중은 병조참의에 제수되었으나 부친이 별세하여 사직하고 상복을입었다.

1662년(35세, 현종3년) 사간원 대사간으로 임명되었다.  그 뒤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 성균관대사성, 이조참판, 함경도관찰사,홍문관부제학, 사헌부대사헌 등을 거쳤다. 성균관대사성으로 재직할 때는 건물을 증축하고 학자들의 양성에 공을 세웠다.  함경도 관찰사로 근무할 때는 ‘변방의 요해지를 살펴 다니고 성곽의 무기를 수선하고 부세와 요역을 고르게 하였으며,  그곳 자제가 분발하여 학문에 힘쓰게하여’( 碑銘)  그 곳의 유풍(儒風)이 크게 일어났다.

1670년(43세, 현종11년) 이즈음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귀국한 뒤에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고 여러번 형조(刑曹)ㆍ예조(禮曹)ㆍ병조(兵曹)의판서와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과 의정부의참찬(參贊)이 되었는데,  일에 따라 맡은 바 책임을 다하였다.  다만 조정의 논의가 서로 많이 대립되고 어수선하여 조정에 머물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1675년(48세, 숙종1년) 허적(許積), 윤휴(尹鑴) 등 남인이 집권하였다.  이조판서의 자리에 있었으나 서인으로 배척을 받아 관직을 박탈당했다.  송시열이 귀양을 가게 되었는데, 민정중도 같은 죄를 받기를청 하였다.  이에 전라도 장흥(長興)으로 유배되었는데 현지에서 젊은이들에게 글을 가르쳐 현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1698년(숙종24년)에 강학 하던자리에 세워진 연곡서원은 그러한 민정중의 덕행과 학문을 기리기 위해서 세워진 것이다.  전남 장흥군 장흥읍 연곡길31에 소재하는 연곡서원은 전라남도 기념물 제18호로 지정되어있다.
1676년(49세,숙종2년) 윤휴의 일파중허견(許堅)과 이정(李楨) 등이모반하여 처형되었다.  민정중은 장흥에서 귀양살이 하던 중에 복권되어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이후 대광보국 숭록 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우의정(議政府右議政)에 임명되었다.  당시 문충공(文忠公) 김수항(金壽恒)이 영의정이었는데,  마음을 합쳐 정사를 돌보고 좌의정으로 승진하였다.  이후 4년정도,  정승으로 일하면서 어린 임금을 보좌하고,  정치의 체면을 세웠다.  사사로운 행위를 막고 아래에 머물러있는 어진 사람을 발탁하고 천재(天災)를 조심하며 백성의 고통을 살피는 데에 힘썼다.

1680년(53세, 숙종6년)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남인 일파가 대거 실권하고 송시열 등과 함께 귀양에서 풀려났다.  민정중은 우의정, 좌의정에 임명되었다.  그 이듬해부터 경기도 용인에 있는 충렬서원의 원장을 지냈다.

1684년(57세, 숙종10년)호포(戶布) 등 여러가지 일을 적극적으로 실행하려 하였으나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 반대하였다.

1685년(58세, 숙종11년)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판사(判事) 등에 임명되어 국왕을 보필하였다.

1689년(62세,숙종15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이 다시  집권하였다.  소의(昭儀) 장씨(훗날의장희빈)가 낳은 아들을 왕세자로 삼으려고하자,  송시열등 서인이 이를 적극 반대하였다.  이에 숙종은 송시열을 제주도에 유배시키고 그곳에서 사약을 받게 하였다.  아울러송시열을 따르는 사람들의 관직을 박탈했다.  당시 풍을 앓고 있던 민정중 역시 이일로 평안북도 벽동군(碧潼郡)으로 유배되었다.  조카  딸인현왕후(仁顯王后)는 폐위되어 궁궐에서 쫓겨났다.

1692년(65세, 숙종18년)에 유배지에서 사망하였다.  저서로『노봉집(老峯集)』, 『노봉연중설화(老峯筵中說話)』·『임진유문(壬辰遺聞)』등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양주의 석실서원(石室書院), 충주의 누암서원(樓巖書院), 장흥의 연곡서원(淵谷書院), 함흥의 운전서원(雲田書院), 벽동의 구봉서원(九峯書院), 정평의망덕서원(望德書院) 등 다수의 서원에 배향되었다.  1694년의 숙종이 마음을 바꿔,  민현왕후가 복위하였으며 그동안 권력을 잡고 있던 남인들은 다시 모두 실권하였다.  (갑술환국) 민정중도 관작을 회복되어, 나라에서 정중히장례를 치러주었다.  처음에 양주(楊州)에 장사지냈다가 나중에 여주 (驪州, 여주군 여주읍 하거리)로 이장하였다.

<참고자료>
⌈효종실록⌋
⌈민정중⌋, ⌈국역국조인물고⌋,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99
⌈민정중⌋,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민정중⌋,<문화원형 용어사전 –  암행어사>,  한국콘텐츠진흥원
한영국, ⌈민정중⌋,<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민유중(閔維重, 1630~1687)


 

민유중(閔維重, 1630~1687)                               PDF Download

 

유중(閔維重, 1630년~1687년)은 조선후기의 문신이자 외척으로 인현왕후의 친정 아버지이며 숙종의 장인이다.  명성황후의 6대 조할아버지이기도한 그는 예문관검열,  사헌부감찰, 병조정랑, 성균관대사성, 공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는데,  사위인 숙종의 지원으로 권력을행사하다 조야의 비판을 받고 실권하였다.  송준길과 송시열에게 배웠으며,  그들을 스승으로 모시고 그들의 예론(禮論)을 지지했으며,  경학에 매우 밝았다.

경기도 여주에 있는 민유중의 신도비(神道碑
경기도 여주에 있는 민유중의 신도비(神道碑

1630년(1세, 인조8년)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호조참의,  강원도 관찰사 등을 역임한 민광훈(閔光勳)이며,  어머니는 이조판서 이광정(李光庭)의 딸이다. 숙종의 부인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아버지이며,  고종의 부인 명성황후의 6대조 할아버지다.  대사헌 민기중(閔蓍重)과 좌의정 민정중(閔鼎重)의 동생이다.  본관은 여흥(驪興, 지금의 경기도 여주)이며,  자는 지숙(持叔), 호는 둔촌(屯村)이다.  송준길(宋浚吉, 1606∼1672)과 송시열(宋時烈, 1607∼1689)에게 배웠으며,  서인(西人)에 속했다가 서인이 소론과 노론으로 나뉘자 노론(老論)에 속했다.

1651년(22세,효종2년) 증광시 문과에 병과 15위로 급제하였다.  이후승문원을 거쳐 예문관검열이 되었으며,  세자시강원  설서, 성균관전적 등을 거쳐 사헌부감찰, 예조좌랑, 병조좌랑 사간원정언 등을 역임하였다.

1656년(27세,효종7년)에 병조정랑, 지평 등에 임명되었다.  9월 19일 재해에 대처하는 일에 대해서 장문의 상소를 올렸다.  처음 시작하는부분만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요즘 재이(災異)에 대한 보고가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그 가운데 큰 것을 열거할 것 같으면,  사나운 바람이 갑자기 일어나가 옥을 무너뜨리고 들판을 진동시키고 사람과 물건이 날렸다고 합니다. 또 우박이 갑자기 내려 백성이 죽거나 다친 이가 백여 명이라고 말한 것도 있고,  큰 비로 강물이 불어 농민이 빠져 죽은 자가 40여명 이라고 말한 것도 있습니다.  밭에 쌓아둔 곡식이 저절로 발생한 화재로 모두 탔다고 말한 것도 있고, 심지어 천둥이 치고 바람이 불며 벼락이 쳐서 성묘(聖廟)가 무너지고 부서졌으며,  방파제가 무너지고 뱃사공이 떠내려가 실종되기도 하였답니다.  그 동안에 목숨을 잃은 자를 따져보면 이미 수천여 명에 이른다고 까지 하였습니다.  그것을 듣자니 마음이 놀라고 말하자니 뼈골이 오싹합니다.  이는 실로 지난 역사에 없었던 바이고 국조(國朝)  3백 년간 듣지 못했던 바이며,  전하께서 즉위하여 나라를 다스린 이래 재앙이 일어나지 않은 해가 없었지만 또한 오늘날처럼 참혹한 경우는 없었습니다.(중략)
하늘이 바야흐로 노여워하여 갖가지 흉포함이 이르게하니,  반드시  나라가 망할 것이라는 근심과 보전하기 어렵다는 염려는 밝은 지혜를 가진 사람이 아니더라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돌아보건대 전하께서는 구중궁궐에서 묵묵히 계시면서 여전히 동요하지 않고계십니다.  군신들은 전하를 우러러 받드는 것이 풍조를 이루어 답답하고 비굴하게 굴면서 끝내 하늘을 감동시킬 한마디 말이나 재앙을 그치게 할 한가지 일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급하지 않은 업무와 시기적으로 적합하지 않은 역사를 날마다 경영하여 힘쓰기를 그치지 않습니다.  아,  하늘을 공경하고 재앙을 염려하는 것은 진실로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두려워하며 수양 반성하는 것이 바로 그 실질이고,  정전(正殿)을 피하고 반찬 가짓수를 줄이는 것이 바로 그 형식입니다. 실질을 보존하지 못하고 형식 또한 따라서 폐지하시어 이 양자를 잊어버리고는 조금도 경계하거나 조심하는 뜻이 없으니, 신이 감히 모르기는 하지만 천재와 시변이 정말 두려워하기에 부족하단 말입니까?”

효종은 이러한 상서문에 “말을 올린 정성이 가상하다” 고 답하였다.

1665년(36세,현종6년)에 전라도 관찰사로 임명되었다.  몇 달 뒤에다시 중추부첨지사가 되어 서울로 올라왔다.  이어 사간원대사간, 승정원승지,  이조참의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이즈음에 병조판서 김좌명(金佐明)과 다툰 끝에 관직을 떠나 광주에 은거하였다.

1671년(42세,현종12년) 이해에 형조판서, 대사헌, 호조판서 등에 임명되었다.

1674년(45세,숙종원년) 이해조선의 제19대 왕숙종(肅宗,1661-1720)이 14세의 나이로 등극하였다.  제2차 예송논쟁이 일어나 송시열과 그 당파인 산당(山黨)이 실각하였다.  민유중의 당색은 크게는 서인으로, 송시열과 송준길이 주축이 된 산당(山黨)에 속했다.  산당은 서인의 한 당파인 한당(漢黨)과 대립하고 있었다.  남인이 집권하게 되자,  사직하고 충주로 내려가 지냈다.  이후 탄핵을 받아 흥해(興海, 지금의 경상북도 영일군)에 유배되었다.

1680년(51세,숙종6년) 남인의 영수인 영의정허적(許積)이 왕이 사용하는 천막을 허락도 받지 않고 멋대로 사용한 일이 발각되었다.  이 일로 남인의 고위관료들이 실각되고,  마침 역모사건까지 발생하여 숙종이 남인들을 대거 몰아내고 서인들에게 권력을 넘기는 일이 발생하였다. (경신환국庚申換局) 민유중은 이 일로 다시 등용되어, 송시열의 측근이었던 친형 민정중을 도와 남인을 추방하는데 앞장 섰다.  공조판서, 호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역임하면서 인정권을 주도하였다.  서인은 이후에 노론(노장파) 소론(소장파)로 분열되었다.

1681년(52세,숙종7년) 이해병조판서 의직에 있었는데,  둘째 딸이 숙종의 계비로 간택되었다. 숙종은 원래 즉위한 뒤에 김만기(金萬基)의 딸을 왕비(인경왕후仁敬王后)로 맞이했다.  이해 10월에 왕비가 사망하여 다시 부인(계비繼妃인현왕후仁顯王后)을 맞이한 것이다.
숙종의 부인이 된 인현왕후은 민유중의 둘째 딸로 민유중이 두번째 부인으로 맞이한 송준길의 딸은 진송씨가 낳은 딸이다.  송시열과 김석주가 적극 추천하여 숙종의 두번째 부인이 된것이다.  덕분에 민유중은 국구(國舅,왕의장인)이 되었으며,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에 봉해지고 돈녕부영사(敦寧府領事)에 임명되었다.

1682년(53세,숙종8년) 금위영 창설을 주도하여 금위대장에 임명되었다.

1686년(57세,숙종12년) 친인척이 병권과 재정권을 독점 장악하고 국가 대사를 마음대로 처리하며,  관직을 독점한다는 비판의 상소가 쇄도하였다.  소론파 윤증은 숙종이 내린 관직까지 사양하면서 외척의 위세를 비판하였으며,  같은 노론파 이징명도 외척의 세도를 비판하며 인현왕후에게 주의를 주라는 상소를 올렸다.  덕분에 이징명은 국모의 명예를 훼손한 죄목으로 형벌을 받았다.  민유중은 사위인 숙종을 만나 자신을 모독한 자들에 대한 엄벌을 요구하였다고 한다.  이일로 그는 모든 관직을 내놓고 자택에서 두문불출하였다.
이해 ⌈숙종실록 ⌋ 8월 6일자에는 민유중이 숙종에게 올린 상소문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신이 지난번에 교리(校理)  이징명(李徵明)의 응지(應旨)에 대한 상소를 삼가 보았었습니다.  그가 첫머리에서, ‘과거의 역사에 지진의 재변은 외척이 세도를 부리는데에 말미암은 것이었다.’라고 말하고,   이어, ‘거처와  봉양이 습관의 변화를 초래한다.’는 등의 말로써 신을 지적하면서 심지어는 왕비를 경계시키고 외척을 주의 시켜야 한다고까지 청하였습니다.  어떤 일이 생기기 전에 미리 경계하도록 한 것은 엄격해야하고 또 간절해야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은 그 글을 보고 놀랍고 두려워서 마음과 뼈가 함께 섬짓 할 정도였습니다.  또 삼가들으니,  윤경교(尹敬敎)가 상소를 올려 ‘총애가 지나쳐서 교만이 생겼다.’고 말했다 하니, 신의 죄는 이지경에 이르러 한층  더 첨가 되었습니다.  신은 진실로 어리석어서 종전의 범죄가 어떠했는지를 스스로알지 못하였으며,  마침내 죽게 된 때에 이르러서 이렇게까지 좋지 못한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숙종은 “이징명이 거짓을 만들어 내고 있으니 참으로안타깝다.  그대에게 무슨 털끝 만큼이라도 인책해야 할 일이 있겠는가?  안심하고 사직 하지 말라.”고 하였다.   사관은 실록의 중간에 민유중에 대해서 이렇게 적었다.

“민유중(閔維重)은 조정에 벼슬한 지30년 동안 한결같이 청렴하고 근신 하였었는데, 국구(國舅)가 되고서는 더욱 더 조심하였으므로, 세상에서는 외척(外戚)이 있음을 알지 못하였다.”

어느 날 숙종이 사적(私的)으로 편전(便殿)에서 민유중을 만나, 외부의 일을 물어보았다.  민유중은 이렇게 대답했다.

“신은 늙고 병들어서 사람들과 접촉하는 일이 적으므로 무릇 조정의의논에 대해서는 참여하여 들은 것이 없습니다.  가령 한 두가지 들은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전하께서 만약에 신을 통하여 들으신다면 이는 바로 부정(不正)한 길입니다.  어찌 성조(聖朝)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숙종은 이 말을 듣고 기뻐하지 않고 헤어졌다. 이때부터 다시는 민유중과는 사적으로 만나지 아니하였다.
사관은 다시 민유중을 두둔하면서 이렇게 적었다.

“이징명의 상소의 뜻은 어찌 민유중이 참으로 잘못한 것이 있어서 그런 말을 했겠는가?  대체로 그 말을 엮어갈 적에 그런 말을 하게 되는 것은 문제삼을 것이 없다.  그런데도 임금이 이징명을 미워하는 것은 반드시  자신의 장인 어른이 되는 민유중을 위해서 그런 것만은 아닐것이다.”

1687년(58세,숙종13년)에 사망했다.  6월 29일 ⌈숙종실록⌋에 다음과 같은 졸기가 실렸다.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이 졸(卒)했는데,  나이가58세였다.  민유중은 성격이 강직하여 방정하고 총명하여 통달했었는데, 형 민정중(閔鼎重)과 함께 경술(經術)을 가지고 진출하여 사림(士林)들의 두터운 인망(人望)을 받았다.  조정에서 벼슬하면서는 언론이 준엄하고 단정하여 업적이 융성하게 나타났고 , 집에 있을 적에는 행의(行誼)에 독실하여 예법(禮法)으로 자신을 제어하였으니,  임금이 왕비(王妃)를 그의 가문에서 정하였음은 대개 그의 가법(家法)이 올바름을 살폈기 때문이다.  이때 민유중이 바야흐로 서전(西銓)의 장관(長官)으로 있으면서 위계(位階)가 보국(輔國)에 올랐으므로 순식간에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되었는데,  국가의 제도에 얽매여 기밀(機密)한 요직을  모두내놓고 마침내 등용하지 못하게 되므로 여론이 애석하게 여겼었다.”

숙종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여 3년간 녹봉을 주도록 명하였다.
시신은 여주 섬락리에 안장되었으며,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장흥의 연곡서원(淵谷書院)과 벽동의구봉서원(九峯書院)에 배향되었다.  문집으로 ⌈민문정유집(閔文貞遺集)⌋ 10권10책이있다.
민유중이 사망한 다음해 인현왕후가 아들을 낳지 못하던 중 숙종이 총애하던 소의 장씨가 아들을 낳았다.  숙종은 새 아들을 태자로 책봉하고 장씨는 희빈으로 승격한 뒤,  인현왕후는 폐비하였다.  송시열과노론계 관리들은 이를 극력 반대하였으나 숙종은 송시열을 제주도에 유배하고 사약을 내림으로써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켰다.  민유중으로서는 자신이 사랑하고 존경하던 주위 사람들이 비참한 상황에 몰리는 일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하직하였으니 참으로 복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참고자료>
⌈숙종실록⌋
한영국, 민유중,<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
이태진, 기사환국,<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선(李選:1632~1692)


이선(李選:1632~1692)                                           PDF Download

 

관은 전주(全州), 자는 택지(擇之), 호는 지호(芝湖) 또는 소백산인(小白山人)이며, 부친은 우의정 이후원(李厚源)이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기도한 그는 1657년(효종8)에 진사가 되고, 1664년(현종5)에 춘당대 문과(春塘臺文科)에서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에 올랐고, 예문관봉교(藝文館奉敎),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사간원교리(司諫院校理)를 거쳐 이조좌랑(吏曹佐郎) 등을 역임하였다. 사관(史官)으로 재직할 당시에 강화도(江華都)에 간직해 둔《열성실록(列聖實錄)》을 보수할 것을 청하였다가 우의정 허적(許積)의 비위를 거슬려 귀성(龜城)으로 유배되었다.

유배에서 풀려난 뒤에 1673년(인조15 )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로 재임할 당시 노산군(魯山君)의 묘소에 시제(時祭)하고, 1674년에는 노산군 부인의 묘소에 수묘군(守墓軍) 및 제전(祭田)을 지급할 것을 요청하여 현종(顯宗)의 재가를 받았다.
1675년(숙종1)에는 형조참의(刑曹參議)로 재임할 때 송시열(宋時烈)이 실세하고 남인(南人)이 득세하자 사직하였다.  그 뒤에 다시 개성유수(開城留守)가 되어 정충신(鄭忠信) 등에게 시호(諡號)를 내리고 그의 자손을 관직에 등용할 것을 청하였다. 예조참판(禮曹參判)으로 재임할 당시에 사신으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뒤 이어 이조참판(吏曹參判)이 되었다. 1679년에는 민유중(閔維重)과 이유(李濡) 등과  함께송시열을 섬기면서 군신의 의리를 저버렸다 하여 귀양을 보내자는 남인계 대사헌이 원정(李元禎) 등의 탄핵을 받았으나 무사했다.

1680년(숙종6) 경신대 출척(庚申大黜陟)으로 서인(西人)이 집권하자, 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 대사성(大司成), 대사간(大司諫) 등을 거쳤으며, 강화유수(江華留守)로 재직할 때 백골 징포(白骨徵布)와 아약충군(兒蒻充軍)의 폐해 및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피살당한 황보인(皇甫仁)과 김종서(金宗瑞) 등을 신원(伸寃)해 줄 것을 상소하였다.

1682년 이후 실록 청당상(實錄廳堂上), 도승지(都承旨), 경기감사(京畿監司), 공조참판(工曹參判), 개성유수(開城留守) 등을 거쳐1689년호군(護軍)으로 있을 때,  숙종(肅宗)이 후궁인 소의(昭儀) 장씨(張氏)가 낳은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려하자,  이를 반대하다가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정권을 장악한 남인들에 의해 송시열 당(黨)으로 지목되어 정언(正言) 송유룡(宋儒龍)의 탄핵을 받고 기장(機張)으로 유배되었다.

이선은현 기장군 철마면 웅천리의 남평문씨(南平文氏) 상익(尙翼)의 집에 기거하면서 ‘집승정(集勝亭)’과 ‘유란헌(幽蘭軒)’을 오가며 소일하였다.  이때 <송강가사(松江歌辭)>를 비롯한 송강정철(鄭澈)의 문집 일부를 재정리하고 4년간의 유배 생활 끝에 6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이런 연유로 ‘집승정’  “있는 곳”이라는 뜻의 ‘수리정(愁離亭)’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일부 다른 기록을 보면그 가

“이정자에 오르기만 하면 근심걱정이 멀리 떠난다.”

고 입버릇 처럼 되뇌였다하여 ‘집승정’을  ‘수리정’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그가 유배지에서 죽은 뒤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로 서인이 집권하자 관작(官爵)이 회복되었다.

그는 또 국조(國朝)의 고사를 많이 알아 국자감(國子監)으로 비유되기도 하였으며, 시호는 정간(正簡)이다.  저서로 노산군(魯山君)의 시제요청 등을 수록한《지호집(芝湖集)》이 있으며,  편서로는《황강실기(黃岡實記)》, 《시법총기(諡法摠記)》등이 있다.  끝으로 그 의문집인《지호집》에 수록되어 있는 작품중 인구에 회자(膾炙)되는 글 한편을 감상해 보기로 한다.  제목은 <세 고을 학생들에게 고함[告諭三邑諸生文]>으로 되어 있다.

스승이 없다 말하지 말라     莫曰無師
책에서 찾으면                            求之方策
많은 스승이 있나니                有餘師矣
벗이 없다 말하지 말라          莫曰無友
조용히 책을 펼치면                靜對黃卷
그곳에 벗이 있나니                有其友矣

이 글은 이선이 제주도에 순무사(巡撫使)로 파견되었을 때에 그 고을학생들의 학업을 격려하기 위하여 적어 준 글이다.   당시의 여건을 고려할 때 제주의 학습 여건이 얼마나 열악했는가를 이 글을 통해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겠다.  따라서 이 글은 이러한 환경을 탓하지 말고열심히 글 공부를 하도록 제생들을 다독이며 격려하려는 뜻이 한껏 담겨져 있는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물질 만능의 소용돌이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책이 없어서 공부를 못하는 세상이 아니건만 어쩐지 명구(名句)로 가슴에 와 닿는 듯한 여운이 남는 그런 작품으로 여겨진다.

<참고문헌>
《현종실록(顯宗實錄)》
《숙종실록(肅宗實錄)》
《철종실록(哲宗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국조인물지(國朝人物志)》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병성(李秉成: 1675~1735)


이병성(李秉成: 1675~1735)                                 PDF Download

 

관은 한산(韓山), 자는 자평(子平), 호는 순암(順庵)이며,  이산보(李山甫)의  5대 손으로, 아버지는병마절제도위 이속(李涑)이다.  김창흡(金昌翕)의 문인인 그는 1702년(숙종28) 진사시에 합격하여 군수(郡守)와 공조정랑(工曹正郞)을 역임하고 부사(府使)에 이르렀다. 시문(詩文)에 능하고 글씨를 잘썼다.  저서로는 ≪순암집(順菴集)≫이 있다.

그는 주자서(朱子書)를 주로 많이 읽어서 난해한 부분을 잘 해독해 내자, 주변의 사우(士友)들이 감복하였지만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는 평소에 저작한 글을 모아 두지 않았다.  그의 시문집(詩文集)은 맨처음 그의 형인 이병연(李秉淵)이 산정하고 편차한 고본(古本)을 그의 아들이 도중(李度重)이 다시 수집하여 이질(姨姪)인 유엄(柳儼)이 1741년(영조17)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있을 때 도움을 받아 간행한 것인데, 운각활자(芸閣活字)로 간행한 초간본 이다.  본집은 원집 6권, 부록 합3책으로 되어있다.

권수에 이의현(李宜顯)과 어유봉(魚有鳳)이 1740년에 지은 서문과 윤봉조(尹鳳朝)가 1741년에 지은 서문이 실려있다.
시 작품은 저작 연대와 지역에 따라 구성하고 있는데, 호서록(湖西錄)은 1692년 이후 보령(保寧)에 거주할 때 지은 것들이고,  악하록(嶽下錄)은 1698년 이후에 지은 것들이다. 후교이록(朽橋二錄)은 1712년 9월 이후에 지은 것들이고,  덕봉록(德峯錄)은 1717년 이후 양성현감(陽城縣監) 시절에 지은 것들이다.  그의 시(詩)는 간결하며 사람됨이 누속(陋俗)함을 초탈한 것과 같이 힘이 있고 아름다우며 전정(典正)하여 바탕이 넓다.  또한 시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가 심절(深切)하고 성격(聲格)이 청신(淸新)하며 만당(晩唐)의 시(詩)에 경도(傾倒)하였으나 깊이 사색하기를 좋아하여 그것을 나타낸 작품들도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정평이다.

서(書)는 대부분이 문안 편지들인데 <답박공미(答朴公美)>은 학문과 역사적인 인물에 대하여 언급한 것으로,  제갈공명(諸葛孔明) 주희(朱熹) 송시열(宋時烈) 등의 인품을 논하고 있으며,  서(序)는 교유하던 사람들과의 일화를 주로 한 것이 대분이다.  기문(記文)  가운데 <내암기(耐菴記)>는 자신을 경계한 글로 , 참으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을 고사를 인용하여 논한 글이며, <유용흥폭포기(遊龍興瀑布記)>는 가릉(嘉陵)에 있는 폭포를 돌아보고 감회를 적은 것으로 , 주위의 경관을 자세히 설명하고 폭포의 천연적인 아름다움은 인간의 정서 함양에도 커다란 도움이 된다고 하였다. <제이학통록유초후(題理學通錄遺草後)>는 <이학통록유초>가 발견되었는데 그것은 간행하기 전의 초고로 이황(李滉)의 수택이 분명하다고 지적하고,  9폭에 이르는 분량이 하나같이 정교하다고 칭찬한 글이다.  또 <회암서절요소발(晦庵書節要小跋)>은 주희의 글인 <회암서절요>내용을 설명한 것이다.  그의 글은 아결(雅潔)하고 깊은 뜻이 있으며 전아(典雅)한 맛이 느껴지게 하는 것이 특징이다. 부록에는 형 병연이 1740년에 지은 유사(遺事)가 실려 있다.  책 끝에 조유수(趙裕壽)가 1741년에 지은 발문과 지은 연도가 기록되어 있지 않은 유최기(兪㝡基)의 발문과 유엄(柳儼)이 1740년에 지은 발문이 수록되어다.  그중 유최기(兪㝡基)의 발문(跋文)에는

“그의 사람됨이 맑고 깨끗하며 식견이 명확한데다 의론(議論)은 현사(賢邪)의 구분이 엄격하였다.”

라고 적어 놓았다.  이러한 작품들을 통해 그의 성향이나 행적들을 대략적으로 가늠해 볼 수  있겠다.

그의 문집인《순암집(順菴集)》권5에는〈제월봉상인시권후(題月峰上人詩卷後)〉라는 글이 있다.  이 글에 등장하는 승려쌍식(雙式)은 서봉사(西鳳寺)의 승려로 시 짓기를 좋아하였는데, 그는 이의현(李宜顯)에게는 선사운파(雲坡)의 비명(碑銘)을 부탁하고,  자신이 직접 지은 시는 이병성에게 종종 보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병성은 1732년(영조8) 초가을에 쌍식의 시집(詩集)에 발문(跋文)을 기록해 주었던 것이다.  이는 그가 당시에 승려들과도 격을 두지 않고 교류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겠다.

<참고문헌>
《사마방목(司馬榜目)》
《순암집(順庵集)》
《전고대방(典故大方)》
《한국문집총간(韓國文集叢刊)》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근원(李根元: 1840∼1918)


이근원(李根元: 1840∼1918)                               PDF Download

 

기도 양평(楊平) 출신인 그의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문중(文仲), 호는 금계(錦溪)이다.  이양흡(李養翕)의 아들인 그는 1866년(고종3)에 27세의 나이로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를 벽계로 찾아가 문인이 되었고,  이항로의 별세 후에는 동문이었던 중암(重庵) 김평묵(金平默)과 성재(省齋) 유중교(柳重敎)를 사사(師事)하여 화서학파(華西學派)의 학통을 계승하였다.  그는 지평면 월산리에 금리정사(錦里精舍)를 열고 일직당(一直堂)을 세워 위정척사(衛正斥邪)의 정신을 몸소 실천하면서 일제(日帝)에 항거하는 의병 운동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였으며,  직접 의병(義兵)을 일으키는데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학문과교육에전념하면서정신적항쟁을하여많은애국지사를배출한유학자이다.

1884년에 변복령(變服令)이 선포되자,  그는<화이의복변(華夷衣服辨)>을 지어,  의복이 바뀌면 정신적 가치 기준도 달라지는 법이라고 역설한 바있고, 1910년에는 일제가 회유책으로 주는 은사금(恩賜金)을 거절했다가 헌병 분견소로 불려가서 1주일 동안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의 성리설(性理設)에 대한 시각은 유중교를 옹호하는 한편,  유중교와 이항로의 성리설이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음을 밝히는데 있었다.

이항로가 별세한 뒤 심설(心說) 논쟁 등의 문제로 유기일(柳基一)과 홍재구(洪在龜)가 유중교를 비난하자,  동문(同門)인 의암(毅菴)  유인석(柳麟錫),  항와(恒窩)  유중악(柳重岳) 등과 함께 유중교를 옹호하는데 앞장섰다.  그는 명덕(明德) 을리(理)로 파악하였으며, 심합리기(心合理氣)를 말하면서 심(心)에서 리(理)가 기(氣)의 주재(主宰)가 되는 것을 심의 본체 모습이라 하여 그 당위적 의미를 강조하였다.  학문 태도의 기본은 경(敬)과 의(義)를 기본 규범으로 삼는 거경론(居敬論)에 두었다.

화서학파의 도학적(道學的) 기본정신인 의리론(義理論)에 대해서는, ‘나아가서 나라를 부지하는 것[出而扶持]’과 ‘물러나서 나라를 부지하는 것[處而扶持]’이 동일한 선상에 있 는의리라고 보고 자신은 그 후자의 시각을 취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유인석에게 직접 몸이 병들어 나가지 못한다는 편지를 보내어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였다.  그 이듬해 1906년(병오) 사람인 정혁선(鄭赫善)이 그를 무함하여

“의병을 모집하여 일진회를 해치고 보름 후에 의병을 출동 시키려한다.”

고 고변하는 바람에 여읍병참(驪邑兵站)으로 소환되어 갔다.  이때 그는

“거의(擧義)는 오늘날의 당연한 일이다.  다만 지혜와 힘이 미치지 못할 뿐이다.  그런데 허명(虛名)을 잘못 입어 이지경을 당하였으니 실로 부끄러울 뿐이다.”

라고 하며 아들 준학(俊學)을 대동하고 가서 고변한 정혁선과 대질을하였다.  그 과정에서

“천하의 일은 있는 것을 속여서 없다고 할 수 없는데,  지금 무슨 증거나 꼬투리가있느냐?”

라고 호통을 쳐서 혐의를 벗고 돌아 왔던 일도 있다.
그 뒤 1910년(경술)에 일본은 은사금(恩賜金)이라는 명목으로 원로들을 회유하기 위한 정책을 폈다.  이 때 그의 나이가 71세였는데 의리를 들어 절대 받을 수 없음을 주장하자, 온갖 회유와 위협과 협박을 하고,  두 차례나 지평 감옥에 그를 구금시켰다.  동요하지 않았을 뿐만아니라 오히려 다음과 같은 잠(箴)을 지어 자신의 의지를 굳혔다.

“일본이 주는 금을 결코 받을 수가 없는 것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의리가 우주에 영원하기 때문이다.  한개도 취하지 않으니 마음이 금석(金石)처럼 단단하네, 이렇게 하는것은 병이 호덕(秉彝好德)의 마음을 지녔기 때문이다. .”

다시유인석에게 보낸 편지 한 편을 보기로 한다.

“지난 겨울 이별 한 뒤로 아직 서로 소식도 모른 채 벌써 봄이 되었습니다. 매우 그리워하고 있었는데 사우(士友)들이 오는 편에 새해들어 도체가 다소 불편하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염려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항와(恒窩) 도담환(痰患)을 오래 앓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합니다.  나도 신음하면서 한 해를 보냈으니 이것이 우리 모두 노쇠한 징후 일 것입니다.  어찌하면좋겠습니까.
면암(勉庵)이 결국 왜도(倭島)에서 세상을 떠나 이제 막 그 영구가 돌아 왔다고 합니다.  아, 슬픈 일입니다.  면암은 참으로 시작을 잘하고 마침도 잘하여 세상 일을 마무리 하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우리들의 처지에서는 우리 도가 더욱 고단해졌다는 탄식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이 한통의 편지에서 묻어나는 여러 가지 시대 상황은 가슴이 저려오는것을 느끼게 한다.  이제 노쇠함으로 인한 병고와 면암 최익현의 별세 소식을 듣고 가슴 아파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 지는 글이 아닐 수 없다.
흔히들 성문삼현(省門三賢)이라 일컫곤하는데 이는 성재(省齋) 유중교(柳重敎)의 문하(門下)에 출중한 세 사람의 제자를 지칭하는 말로,  의리(義理)에는 유인석(柳麟錫)을,  문장(文章)에는 유중악(柳重岳)을,  덕행(德行)에는 이근원(李根元)을 손꼽는 말이다.  그리고 그의 저서로는 《금계집(金溪集)》이 있고, 편서(編書)에는 《송서략선(宋書略選)》이 있다.  특히 그의 저술 가운데 <행자설(幸字說)>, <자경문(自警文)>, <지경설(持敬說)>, <명덕설(明德說)>, <신언설(愼言說)>, <삼명설(三命說)>, <화이의복변(華夷衣服辨)>, <출처설(出處說)> 등의 작품은 그의 사상적 측면을 엿 볼수 있는 귀중한 자료들이다.

그리고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신점리 526 용문산 입구에 조성된 국민 관광지 공원에 많은 시비(詩碑)들이 세워져있는데 그곳에는 이항로의 <차용문(次龍門)>이라는 오언율시(五言律詩) 1수와  함께 이근원의 칠언절구(七言絶句)의 시(詩)가 비석에 새겨 세워져 있다.  이근원의 시 작품 제목은<윤필암(潤筆菴)>으로 되어 있다.

큰소리로 노래 부르며 층층산을 올랐더니
高歌更上一層山
나무숲 사이로 솟은 바위들 까마득 하여라
渺渺千巖萬樹間
날은 저물고 하늘은 맑아 인적 드무니
日晏天晴人氣定
새 울고 꽃이지는 봄 정취만 한가롭다
鳥啼花落春心閑

늦은 봄의 정취를 한껏 느끼게하는 작품이다.  지은이의 드높은 기상도 엿볼 수 있을 듯하다.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에 근접한 봄날의 평온함을 읊고는 있으나 한편으로는 이 작품을 통하여 현실  속에서 자신의 내면과 외물과의 괴리감을 애써 미화하여 묘사한 것으로 여겨 지기도 한다.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높은 산을 올라가는 작자의 심정은 내면의 불만이나 시대의 아픔을 어쩌지 못하여 역으로 표출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일 수도 있다.  굽히지 않은 기상을 자랑하며 숲 사이로 언뜻 언뜻 보이기도 한다. 마침 날은 저물어 가고 인적이 드문 시각이 되자,  산새들은 자유롭게 노래하고 꽃도 제냥 피고 진다.
그래서봄을 맞이한 정취는 한가롭게 비쳐진다.  하지만 웬지 작자의 마음은 편하지만은 않은 듯한 여운을 남기고 있는 그런 작품이다.  지은이 이근원은 윤필암을 가면서 이 작품을 통해 정녕 말하고자 한것은 무엇이었을까?

<참고문헌>
《국역금계집(國譯錦溪集)》,친환경농업박물관, 2009.

나량좌(羅良佐, 1638~1710)


나량좌(羅良佐, 1638~1710)                               PDF Download

 

량좌(羅良佐, 1638~1710)는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관직에는 큰뜻을 두지않고 학문과 수양에 전념한 인물이다.  문장은많이 남기지 않았다.  윤선거(尹宣擧),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등에게 학문을 배웠는데,  윤선거가 송시열등 서인의 모함으로 죄를 얻자 적극 변호하다 유배형을 당하였다.

1638년(1세, 인조16년)에 태어났다. 부친은 해주목사를 지낸 나성두(羅星斗)이며,  모친은 판서 김남중(金南重)의 딸이다.  본관은 안정(安定),  자는 현도(顯道), 호는 명촌(明村)이다.  경기도 과천의 명촌리(明村里)에서 살았기 때문에 ‘명촌거사’  혹은 ‘명촌’ 을  호로 사용했다.

1657년(20세,효종8년) 부친의 소개로 윤선거(尹宣擧, 1610-1669)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시작했다.  부친은 당시 충청도 이산 현감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윤선거는 김집의 제자이며,  생원시에 급제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병자호란(1636년)이 일어났을 때는,  강화도로 피난을 가서 성문을 지키다가 점령 당하였는데,  아내는 자살하였고,  자신은 평민의 복장을 하고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나중에 이일을 후회하여 평생관직에 나가지 않고 성리학 연구에만 매진하였다.  소론(少論)의 영수로 활동한 윤증(尹拯, 1629-1714)의 아버지 이기도하다. 이러한 스승의 밑에서 나량좌 역시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오직 학문과 수양에만 전념하였다.  나량좌는 나중에 송시열, 송준길에게도 배웠는데, 스승 윤선거를 변호하면서 송시열과 극단적으로 멀어지게 된다.

1677년(40세,숙종3년) 40이 넘은 나이에 송준길의 추천으로 희릉참봉(禧陵參奉)· 동몽교관· 상의원 주부의 벼슬을 받았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1683년(46세,숙종9년) 평강현감에 임명되었으나 잠시 근무하다 사직하였다.

1685년(48세,숙종11년) 공조좌랑, 충청도도사, 종친부전부, 삭녕군수 등에 임명 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1687년(50세,숙종13년) 3월 19일 몇사람과 함께 스승 윤선거가 죄없이 모함을 받았다고 상소를 하였다.  임금은 이에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몹시 책망하였는데 상소의 내용은 주로 다음과 같았다.

“윤선거가 진심으로 세상을 근심했던 말들은 그 당시에는 비록 서로맞지 않았었더라도 오늘날에는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대개 윤선거가 친구와  절교하는 방법은 본래 송시열이 절교하는 것과는 같지 않았습니다.  이미 윤휴(尹鑴)와 절교 하였더라도 송시열과는 맞게 되지 않았을 것이므로, 진실로 절교를 했거나 안했거나 시비를 가릴 일이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데도 누구를 두려워하고 누구의 추궁에 몰려서 겉으로는 절교했다고 하면서 실지로는 절교하지 않은 것이라 할수 있겠습니까?  만일 송시열을 두려워하고 그의 추궁에 몰리게 된 것이라고 한다면,  구태여 무엇하러 여러 차례 송시열에게 너무 심하게 윤휴를 몰아 세우지 말라고 권하다가 도리어 송시열에게 의심을 받게 되었겠습니까?”

송시열(宋時烈, 1607-1689)과 윤휴(尹鑴, 1617-1680) 그리고 윤선거(1610-1669)는 서로가 잘 아는 사이였다.  남인에 속한 윤휴는 “진리를 주자만 알고 다른 사람은 알 수 없냐?” 면서 주자의 경전 주해에 반하여 새로운 해석을 하자 송시열이 그를 주자의 권위에 도전하는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아갔다.  윤선거는 송시열에게 윤휴와 관계를 끊겠다고 약속하며 사문난적으로 몰리는 상황에서 빠져 나왔으나 실질적으로 관계를 끊은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 나중에 알려져 송시열 일파의 지탄을 받은 것이다.  이에 나량좌는 스승 윤선거의 편에 서서 그가 죄없이 모함을 받았다고 상소를 한것이다.
이러한 상소를 올린 사람들은 모두 벌을 받았다.  죄목은 스승을 위한다고 변명하면서 사실은 그것에 가탁하여 국가 원로인 송시열을 욕보였다는 것이다.  나량좌는 평안도 영변으로 유배 되었으나 이듬해 풀려났다.  송시열은 당시 임금에게 석방을 건의하면서 이렇게 상소를 하였다.

“그가 스승을 위하여 변호를 한 것은 용서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물며 미친 듯이 크게 외치고 분노 하였는데,  그것은 웃을 일이지 노여워 할 만한 일은 못됩니다.  또 듣건대 그에게 늙은 어머니가 있다하니, 마땅히 불쌍하게 여기는 생각이 있어야겠습니다.”

1689년(52세,숙종15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자형인 김수항(金壽恒)과 매제인 이사명(李師命, 1647-1689)이 극형으로 사망하였다. 그는 혼자서 먼길을 달려가 이들의 상을 치르고 돌아왔다.
‘기사환국’이란 기사년에 즉 1689년에 서인들이 실권을 잡고 있던정 국의 상황이 크게 바뀐 사건이다. 숙종은 오랫 동안 아들이 없었다.  그러던 차에 소의 장씨(昭儀張氏)에게서 왕자를 보았다. 숙종은 몹시 기뻐하며, 그 왕자를 원자(元子)로 삼고 소의 장씨를 희빈으로 책봉하였는데 정권을 잡고 있던 서인들이 반대하였다.  그들의 영수인 송시열도 상소를 올려 적극 반대했다. 숙종은 자신을 지지해준 남인들의 여론을 등에 없고,  송시열을 제주도에 유배 시킨뒤,  사약을 내려 죽였다.  송시열의 의견을 따르던 서인들도 처벌을 하였는데,  김수항, 이사명도 그일로 희생이 된 것이다.
이후 서인들 대신 남인들이 실권을 잡게 되었다.

1696년(59세,숙종22년) 노학재(老學齋)를 짓고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학문에 매진하였다.

1706년(69세,숙종32년) 장령(掌令)에 임명되었다.  장령이란 사헌부(司憲府)의 정사품(正四品) 관직으로, 감찰(監察) 업무를 담당하는 관리다.  주위 사람들이 만년에 절개를 허물지말고 더욱 굳건히 지킬 것을 당부하여 그말에 따랐다.  이후 둔재(遯齋)라는 서재를 짓고 조용히생을 마칠 계획을 세웠다.

1710년(73세,숙종36년)에 사망하였다.  저서로는『명촌잡록(明村雜錄)』이있다. ⌈숙종실록(보궐정오) ⌋ 9월 28일자에 그의 졸기(卒記)가이렇게 실렸다.

“전(前) 장령 나량좌가 사망하였다.  그는 천성이 순박하면서도 진실되고,  품행이 순수하면서도 독실하였다.  일찍이 윤선거에게 배웠는데 스승의 말을 깊이 믿었으며, 스승이 죽은 후에는 무함(誣陷)을 받은스승을 위해 변론(辨論)하여 그 시비(是非)를 세상에 밝게 드러나게 하였다.  문장은 비록 조금 떨어지지만, 순수한 마음과 굳센 지조는 옛사람에게 양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지은 잡록(雜錄)에는 진실을 잃은 말이 많았으므로,  사람들이 이를 취(取)하지 않았다.  추천을 받아 사헌부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사망하였다.”

당시는 당파싸움으로 날을 지새던 시기였기 때문에 졸기를 지은 사관도 그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졸기의 내용에서 알아 볼 수 있다.

<참고자료>
최영성, 명제윤증과명촌나량좌, ⌈유학연구⌋15,2007.8
유병용, 나량좌,<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귀(李貴: 1557~1633)


이귀(李貴: 1557~1633)                                         PDF Download

 

선 중기 충청남도 공주에서 활동한 문신(文臣)으로,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옥여(玉汝), 호는 묵재(默齋),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할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이기(李夔)이고,  아버지는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된 이정화(李廷華)이며,  어머니는 안동 권씨(安東權氏)로 청송부사(靑松府使) 권용(權鎔)의 딸이다.

율곡 이이(李珥)와 우계 성혼(成渾)의 문인인 그는 1582년(선조15)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는데,  이듬해에 박근원(朴謹元), 송응개(宋應漑) 등동인(東人)이, 당쟁을 조장한다며 스승인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공격하자, 그가 상소를 올려 부당함을 지적하였다.  동서 분당 이후 정치권에서 이슈가 된 인물은 1589년에 있었던 역모사건의 주인공이 되는 정여립(鄭汝立)이었다.  정여립은 원래 이이의 문하에 있었으나 동인으로 당을 옮긴 인물로, 요즘으로 치면 당적을 바꾼 정치인 이라는 점에서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이귀는 스승을 배반한 정여립을 강력히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스승인 이이와 성혼을 비판하는 움직임에 대해서도 강력하게 대응하였다. 《선조수정실록》1587년 (선조20)  3월 1일조에 이귀가 진사 조광현 등과 함께 이이와 성혼을 옹호하는 수만언이나 되는 장문의 상소문을 올린 것이 수록되어 있다.  당시에 선조는

“이귀의 말이 만세의 공론이다.”

라고 하여 그를 적극 지지하였고,  결국 동인의 핵심 인물인 이발(李潑)과 이산해(李山海)는 사직을 하였다.

1592년(선조25)에 그가 강릉 참봉(康陵參奉)으로 있을 때 임진왜란(임진倭亂)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였고,  이어 이덕형(李德馨)과 이항복(李恒福)등의 추천으로 삼도소모관(三道召募官)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삼도선유관(三道宣諭官)이 되어 체찰사 유성룡(柳成龍)을 도와 군사를 모집하고 양곡을 거두어 개성으로 운반함으로써 한양 수복을 도왔다.  정도였다.  유성룡은

“장성현감 이귀는 신이 그의 사람됨을 몰랐었는데 지난번 비로소 만나 보니 취할 만한 사람 이었습니다. 근래 살펴 보건대 군사를 훈련시켜 진법(陣法)을 익히게 하고 굳게 지킬 계책을 세우고 있으니 만족할 만한 것이많습니다.”

라고 하여 이귀의 전공을 인정하였다.  1593년 이후 이귀는  장성현감(長城縣監), 군기시판관(軍器寺判官), 김제군수(金堤郡守)를 역임하면서 전란 이후의 혼란을 수습하는 데에 주력 하였다.

1603년(선조36)에 정시 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형조좌랑(刑曹佐郞)과 안산군수(安山郡守)와 양재도찰방(良才道察訪) 등을 역임하였다.  1609년(광해군1)에 함흥판관(咸興判官)을 거쳐 숙천부사(肅川府使)로 있을 때 수감 중인 해주목사(海州牧使) 최기(崔沂)의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1616년(광해군8)에 이천으로 유배되었다가 3년만에 풀려나고 1622년(광해군14)에 평산부사(平山府使)가 되었다.  이후 광해군(光海君)의 폭정이 계속 되자 이를 개탄한 나머지

1623년(인조1)에 김류(金瑬), 신경진(申景禛) 등과 함께 광해군을 폐위하고 선조의 손자인 능양군(綾陽君)을 추대하여,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성공 시킴으로써 정사 공신(靖社功臣) 1등으로 녹훈 되었다.  그의 두 아들인 이시백(李時白)과 이시방(李時昉)도 역시 반정에 참여하여 부자(父子)가 함께 공신으로 책봉 되었다.  그 뒤 이귀는 호위대장(扈衛大將)과 이조참판(吏曹參判) 겸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우참찬(右參贊), 대사헌(大司憲), 좌찬성(左贊成)을 역임하고,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에 봉해지면서 공서(功西)1)공서(功西): 조선 시대, 당파(黨派)의 하나인 서인(西人) 중,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에 가담하여 공을 세운서인(西人)으로, 김유(金瑬), 심기원(沈器遠), 김자점(金自點) 등이 주장하던 소당파(小黨派)를 일컫는다.의 영수가 되었다.

반정에 성공한 후 광해군은 교동도로 유배되고,  피의 숙청이 시작되었다. 광해군을 보좌한 대북 세력의 핵심들은 대부분 처형되거나 유배되었다.  이위경, 한찬남 등 대북파들은 많은 사람들이 보는 시장거리에서 처형되었고, 외척으로서 권세를 한껏 누렸던 박승종은 아들과 함께 도망하다가 스스로 목을 매어 자결하였다.  광해군 정권의 정신적 영수 정인홍도 고향인 합천에서 서울로 압송되어 왔다.  그는 이미 89세의 고령의 몸이었지만,  광해군 정권의 정신적 후원자였다는 점과 반정의 주역인 이귀 등 서인과의 오랜 악연 때문에 처형을 면할 수가 없었다.  광해군과 북인 세력의 빈자리에 인조(仁祖)와 서인(西人)  세력들이 들어서면서 완전한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다.

인조반정 이후 총53명이 정사공신(靖社功臣)에 책봉되었는데,  일등공신에는 이귀를 비롯하여 김류(金瑬), 김자점(金自點), 심기원(沈器遠), 신경진(申景禛), 이서(李曙), 최명길(崔鳴吉), 이흥립(李興立), 구굉(具宏), 심명세(沈命世)등 10명이 이름을 올렸다. 이들은 대부분 광해군 정권에서 정치적으로 소외 되었던 서인들이었다. 《당의통략》에서도

“문무훈신 김류, 이귀, 신경진, 구굉, 장유(張維),홍서봉(洪瑞鳳), 최명길, 심명세 등은 모두 예전에 이이와 성혼의 문인 및 이항복이 일찍이 천거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나아가는 데 가로막혀 금고에 처해져 유폐되었다가 중도에 일어나서 의거에 협력하여 도왔다.”

라고 기록하여 반정의 주체 세력들이 이이와 성혼, 이항복의 제자인 서인이었음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 나반정을 통해 권력을 잡은 서인 내에서도 정치적 분열이 일어났다.우선 훈서(勳西)와 청서(淸西)로 갈려졌고, 훈서는 다시 노서(老西)와 소서(少西)로 나뉘어졌다.  문제를 둘러싸고 대립하였다.  인조 초반 인조의 숙부인 인성군(仁城君)대립하였다.  이귀는 인조의 왕통 안정을 위하여 인성군의 처벌을 적극 주장하는 반면,  김류는 온건한 입장을 취한 것이다.  후금에 대한 대외 정책에서 이귀는 현실론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국가 체제가 제대로 정비되지 않은 시기에 후금과 정면으로 맞서는 것은 무모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는 주화론(主和論)의 주창자(主唱者)였던 최명길과 뜻을 같이한 것으로,  서인의 주류세력과는 대립되는 입장에 있었다.
한편 이귀는 그리고 그동안 남한산성(南漢山城)의 수축, 호패법(號牌法)의 실시, 무사의 양성, 국방 강화 등을 적극 건의하여 이를 실현시켰다.  이귀는 자신이 적극 참여하여 만든 인조정권의 안정을 위해 누구보다도 노력한 관료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1626년(인조4) 인헌왕후(仁獻王后)의 상기를 만2년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가 대간의 탄핵을 받고 사직하였다.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임금을 강화도(江華島)로 호종(扈從)하여 최명길(崔鳴吉)과 함께 화의를 주장하였다가 다시 탄핵을 받았다.  저서로는 《묵재일기(默齋日記)》와 《이충정공장소(李忠定公章疏)》가있고, 편저에는《한음공언행록(漢陰公言行錄)》이 있다.

묘소는 충청남도 공주시 이인면 만수리 계성산 능선에 있다.  묘소 앞에 1641년(인조19)에 건립된 묘비가 있는데,  이식(李植)이 비문을 지었다.  만수리 입구에는 신도비가 서있다. 신도비 앞면에는 영의정에 추증된 연평부원군 이귀의 신도비임을 나타내는 비명이 새겨져 있다. 조익(趙翼)이 비문을 짓고 오준(吳竣)이 본문 글씨를 썼으며 여이징(呂爾徵)이 전서 글씨를 썼다.
신도비는 충청남도 유형 문화재 제89호로 지정되어 있다. 영의정에 추증 되었으며, 인조(仁祖)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어 있다. 성봉서사(盛峰書社)는 1871년(고종8)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어 현재까지 복원되지 못하고 있다.  그의 시호(諡號)는 충정(忠定)이다.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백과사전》
《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남용익(南龍翼, 1628~1692)


남용익(南龍翼, 1628~1692)                               PDF Download

 

1655년 남용익이 참가한 조선통신사의 행렬도 (대영박물관 소장)
1655년 남용익이 참가한 조선통신사의 행렬도 (대영박물관 소장)
용익(南龍翼, 1628년~1692년)은 조선시대의 문신이며 학자다. 과거에 합격한 뒤,  문장과 글씨에 능하여 대제학,  이조판서등 요직을 두루거쳤다.  항상 근신하고 근면하였으며,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이단상(李端相) 등과 교류하였고, 1655년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와『부상록(扶桑錄)』을지었다.

1628년(1세, 인조6년)에 용인의 유곡(柳谷, 지금의경기도용인시처인구유방동)에서 부사 남득명(南得明)과 신씨(申氏)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운경(雲卿), 호는 호곡(壺谷)이다 . 증조할아버지는 무주현감(茂洲縣監) 남복시(南復始), 할아버지는 의빈부도사(儀賓府都事) 남진(南鎭)이다.  어머니 신씨는 평산 신씨(平山申氏) 신복일(申復一)의딸이다.  부인은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채성구(蔡聖龜)의 딸을 맞이 하였다.

1646년(19세, 인조24년), 이해에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1648년(21세, 인조26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남용익은어려서부터 글재주가 뛰어났는데,  이해의 정시문과에는 최연소로 급제하였다.  이후 승정원가주서(承政院 假注書), 시강원설서(侍講院說書),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등을 거쳐, 예조정랑, 병조좌랑, 홍문관 부수찬등 요직에 임명되었다.

1655년(28세,효종6년) 통신사의 종사관으로 뽑혀 일본에 파견되었다.  사절단은 총488명으로 구성되었는데,  4월 20일 궁궐을 떠나 양재역(良才驛) 방향으로 길을 잡아 부산으로 내려갔다.  6월 9일 대마도에 이르렀다.  대마도에 이르러 도요토미히데요시(豊臣秀吉)의 위패를 모신 법당에 절하기를 거절하여 음식 공급이 일시 중지되었으며, 이후 여러 협박을 받았으나 굴복하지 않았다.
9월 26일 그가 지은 ⌈부상일록(扶桑日錄) ⌋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이 일본 후지산을 지나는 장면이 보인다.

“오늘 여정이 길기 때문에 날이 밝기 전에 길을 떠나 새벽에 청견사(靑見寺)를 지났다.  절은 길가에 있는데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해, (우리나라와 달리마을의) 인가 사이에 섞여 있었다.  지붕이 옹기종기, 나무끝에 보이는데 행차가 바빠서 들르지 못하였다.  빙둘러서 한 언덕을 지나니 큰바다가 앞에 끝없이 펼쳐져 있다.  해가 이제 막 떠오르는데붉은 구름이 둘러쌌으며,  눈같은 물결이 깨끗하다.  바람에 나부끼는 돛은 뚜렷하게 비치고,  한가닥 폭포가 산기슭에서 흘러내린다.  우러러보니 후지산(富士山)이 말(馬) 머리에 도달해있다.  한 줄기 흰구름이 산허리 밑을 감추었고 정상에는 흰눈이 쌓여있다.  위 아래의 경치가 모두 살아있는 그림과 같고 밝은 거울과 같아 정신이 상쾌하였다. 산 아래를 빙 둘러지나서 후지가와(富士川)의 부교(浮橋)를 건넜다. 점심 때가 되어 요시하라(吉原)의 여관에쉬었다.”

10월 2일 드디어 통신사 일행은 일본의 수도 에도(江戶)에 도착하였다.  그날의 광경을 남용익은 이렇게 묘사하였다.

“에도(江戶)로 들어가는 길에 들어섰다.  가나가와(神奈川)에서 동쪽으로 70리거리다.   늦게 비가 올 징조가 있었으므로 행차가 정지하고전령이 왔다 갔다 말을 전하다가 한참 뒤에야 출발하였다.  바다를 옆에 끼고 수십 리를 나아갔다.  로쿠고바시(六鄕橋)를 건너는데 구경하는 사람들이 끊이지 아니하였다.  낮에 시나가와(品川)에 도착하였다. 관사를 새로 지어 아주 굉장하고 사치스러웠다.  그곳을 담당하는 관리들이 와서 기다리다가 이중으로 만든 찬합을 바쳤는데, 우리를 보호하면서 수행하는 왜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점심을 먹은 뒤에 관대를 다시 갖추고 전진하였다.
여기서부터 에도에 이르기까지 한쪽으로는 바다를 옆에 끼고 다른 한쪽으로는 인가가 촘촘하게 물고기 비늘처럼 연결되어 있다. 구경하는 자가 빽빽하여 담을 쌓은것과 같고,  배를 타고 바다에 떠서 구경하는 사람도 또한 한쪽에 둘러있었다. 오후 2시경에 에도에 도착하였다.  관문 스물여덟 곳과 네개의 큰 다리를 지났다.
겹겹으로 늘어선 점포와 수많은 인파,  번창한 모습은 이루다 기록할수 없다.  고위관료의 권속들은 아황색의 발을 드리우고 비단 장막으로 둘렀다.  또 붉은담요를 바닥에 펴고 여종들이 밖에 둘러섰으며, 수많은 사무라이들이 곳곳에서 관광하는데, 칼을 받들어 모시고 서있는 자들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혹자는 말하기를, ‘관백(도쿠가와쇼군)도 몰래와서 구경하였다.’ 고 한다.  숙소에 이르기 전 몇리쯤부터 목판으로 벽을 만들어 세웠는데, 질서 정연하고 아주 높으며 웅장한 것이 좌우 4~5리에 뻗쳐 있었다.  왜 그렇게 하였는지 물으니, ‘지난 24일에 화재가 나서 수 천여 가구가 불탔으므로 미처 수리하지 못한 곳에 이것으로 막아서 잿더미가 된것을 보이지 않게 하려는 것이라. ’하였다.   전날 우리 통신사 일행에게 곳곳에서 행차를 잠시 머물러 달라고 청한 것도 필시 이 때문이었던것 같다.  그들의 풍속이 과장되고 허탄하여 실속이 없음이 이와 같은것이다.”

일본통신사가 일본의 수도 에도에 들어가는 광경.
(1748년, 羽川藤永작품)

1656년(29세,효종7년) 2월 20일에 일본에서 귀국한 뒤, 호당(湖堂)  뽑혔다.  호당이란 인재양성제도의 하나로,  글재주가 있고,  장래가 유망한 젊은 관리 중에서 선발되었다.  장기 휴가를 받아 독서에 전념하도록 하는 제도였다.  이 해에문신 중시에 장원을 하였으며,  당상관으로 진급하였다.  또 형조, 예조참의 와승지에 임명되었다가 양주목사로 나갔다. 이해에 일본 통신사행을 기록한『부상록(扶桑錄)』을 썼다.

1666년(39세,현종7년) 진주사(進奏使) 부사의 신분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현종 연간에 대사간, 대사성을 거쳐 참판을 지냈으며,  경상감사, 경기 감사등 외직을 역임하고 형조판서에 올랐다.

1680년(53세,숙종6년), 이후좌참찬(左參贊),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을역임하였다.  이후대제학, 이조판서등 요직을 두루거쳤다.

1689년(62세,숙종15년), 소의장씨(昭儀張氏)가 왕자를 낳았다. 숙종이 새왕자를 원자로 삼으려하였는데,  그는 극력 반대하다가 함경도 명천(明川)으로 유배되었다.

1692년(65세,숙종18년), 2월에 유배지 명천에서 사망하였다. 1725년 ‘문헌(文憲)’ 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저서로 신라 시대부터 조선 인조 때까지 유명한 인물497인의 시를 모아 엮은 『기아(箕雅)』 가있다. 그리고 일본 통신사로 갔을 때의 일을 적은 『부상록(扶桑錄)』, 시문집으로 18권 9책의 목판본으로 발간된 『호곡집(壺谷集)』, 우리나라와 중국의 유명 시들을 골라 편집하고 평론을 곁들인 『호곡시화(壺谷詩話)』등이 있다.
남용익의 큰 아들은 충청도 관찰사를 지낸 남정중(南正重)과 1711년 (숙종37)에 통신사로 일본을 다녀온 둘째 아들 남성중(南聖重)이 있다.  손자는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使) 남한기(南漢紀)이고, 증손자는대제학 남유용(南有容), 고손자는 영의정을 지낸 남공철(南公轍)이다.

<참고자료>
⌈부상록․부상일기⌋
윤용혁, 남용익,<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저자미상, 남용익,<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박규진(朴奎鎭,1858-1934)


박규진(朴奎鎭,1858-1934)                                    PDF Download

 

규진(1858-1934)은 전라남도 화순 출신으로 조선시대 말엽과 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전통시대지 식인이다.  최익현(崔益鉉)과 정의림(鄭義林)에게서 한문과 성리학을 배웠으며,  나라를 잃어버린 암울한 시대에 살면서 은둔생활을 하는지식인들과 널리 사귀고, 화순지역의 유명정자와 서원에 많은 시를 남겼다.

1858년(1세, 철종 9년)에 태어났다.  본관은 함양(咸陽)이며, 호는 외당(畏堂)이다. 젊어서 면암(勉庵 ) 최익현(崔益鉉, 1834~1907)과 일신재(日新齋)  정의림(鄭義林,1845~1910)의 문하에서 공부를 하였다.   최익현은 이항로의 제자로 화서학파에 속하며,  정의림은 기정진의 제자로 노사학파에 속한다.   정의림은 정재규(鄭載圭),  김석구(金錫龜)와  함께 노사의 3대 제자로 알려졌는데, 특히 화순지역에 제자들이 많았다.  1868년 경에 기정진의 제자가 된 정의림은 1886년 경에 200명이 넘는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박규진은 이러한 정의림에게 학문을 배웠다.

1893년(36세, 고종30년) 겨울에 스승 정의림이 화순군 춘양면 칠송리(지금의회송리會松里) 칠송부락에서 원을 지었다.  그러한 건물을 짓게 된 이유를 정의림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난해 봄에 칠송마을에 강당터를 정하고 가을에 일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다음해 겨울 12월에 완공을 하였다.  아! 선비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위인(爲人)의 도리를 하고자 한다면 학문이 아니고 는불가능하다.  학문의도는 스승과 벗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니 스승과 벗에게 친히도를 묻는까닭이다.   배우는자는 또한 그 장소가 없을 수 없다. 상서(庠序)와  학교는 원래 윤리를 밝게하고 가르침을 세우는 곳이지만 삼대 이후에는 도를 따름이 전과 같이 않게 되었다.   또한 시장이 성곽 안에 있어서 다투고 싸울 일이 많아지고, 적막하고 한가한 취미는 적게 되었다.  이것이 이 서원을 일으키게 된 연유이다.”

 ( ⌈일신재집 ⌋4권,영귀정기)

 

그는 ⌈논어 ⌋에서 ‘영귀(詠歸)’라는 이름은 따 영귀정(詠歸亭) 이라하였는데,⌈논어⌋ 를 보면 공자가 어느날 제자들에게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랬더니 증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늦은 봄에 가벼운 옷을 입고 젊은이 대여섯 사람과 아이들 예닐곱 명 정도를 데리고 기수에 가서 목욕하고 기우제를 지낸 언덕에 올라 바람을 쐬고 시를 읊으면서 돌아오겠습니다.(莫春者, 春服既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詠而歸 。 )”

( ⌈논어 ⌋선진편)

 

공자는 이 말을 듣고 자신도 그렇게 하고 싶다고 맞장구를 쳤다.  이러한 고사에서 두글자를 얻어 영귀정이라 이름을 지은 것이다 .  정의림은 영귀정에 성인 아홉명의 영정을 모시고 본격적으로 젊은이들을 모아 가르쳤다.

박규진은 영귀정이 완성되던 날 그곳에 들려 다음과 같은 시를 짓고 기쁨을 함께하였다.

정자를 지으니 이름난 이 땅은 더욱 신비스럽구나.
(亭築名區地秘靈)

그 이름을 기수(沂水)의 맑은 물 한줄기에서 취했네.
(取諸沂水一原淸)

젊은이와 아이들을 데리고 바람을 쐬고 목욕하니 봄날이 길구나.
(冠童風浴春長在)

증점이 비파로 천기를 연주하니 만고의 소리로구나.
(曾琵天機萬古聲)

(⌈외당유고 ⌋)

 

이러한 글을 보면 박규진은 이미여러해 전부터 정의림의 문하에서 학문을 계속해 온 것으로 추정된다.  정자를 세운 그 뜻이 아주 오랜 공자시대의 그 뜻과 같음을 노래하고 그러한 전통이 자신이 사는 화순에서 이어짐을 대견스러워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1894년(37세, 고종31년)에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다.  화순군 능주면 우봉리에 사는 홍우용(洪祐鏞, 1872~1941)이 23살의 나이로 과거에 합격하여 장릉 참봉의 벼슬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그는 나라가 혼탁하여 관직에 나가는 일을 포기하고 낙향하였다.  홍우용은 박규진과 동문으로 정의림의 제자였다.

1905년(48세, 광무9년)에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  최익현, 정재규, 기우만등이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다 해 의병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  최익현은 다음 해에 의병을 일으켰다가 관군에 체포되어 대마도로 유배된 뒤,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박규진은 최익현에게도 배웠으니 스승의 죽음은 서쪽 멀리 떨어진 화순에도 들려왔을 것이다.

1910년(53세, 융희4년) 한일합방으로 국권을 상실하였다. 스승 정의림은 의병 운동의 실패와 국권상실의 절망감으로 일체의 외부활동을 중시하고 두문불출하다 10월 10일 별세하였다.  정의림은 사후에 그가 지은 영귀정 옆에 세워진 칠송사(七松祠) 배향되었다.  나중에 제자들 여러명도 이 칠송사에 배향되었는데 박규진의 이름은 배향 인물에 올려지지 않았다.  정의림의 제자들은 화순지역의 곳곳에 흩어져 강학활동을 열심히하여 많은 제자들을 양성했다. 특히 배석면(裵錫冕),  배치묵(裵致黙)과 같은 제자들은 100여명이 넘는 문도를 두었는데 박규진의 강학활동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1929년(72세, 일제시대), 이즈음 능주에 사는 홍우용이 금오산 아래에 정자를 짓고 이름을 우산정사(牛山精舍)라 하였다.  또 역락정(亦樂亭) 지었다.  박규진은 자연과 학문을 벗삼아 은거하는 홍우용을 찾아 그 정자를 방문하고 다음과 같은 시( ⌈외당유고 ⌋次牛山精舍韻)를남겼다.

사방에 물이 흐르고 가운데 봉우리 높게 서있네
(四圍水曲一高岑)

아름다운 나무가 숲을 이루니 땅 가득 그늘뿐
(佳木成林滿地陰)

도끼가 조금도 범하지 못하니 온통 새로 자란 나뭇가지
(少無侵斧多萌蘖)

많은 책들도 함께 있어 마음을 잡아 끄는구나.
(亦有藏書是貫心)

은둔하며 살다가 연기와 구름 잠긴 것만 보니
(幽居但見烟雲鎖)

한가한 이곳에서 세월 깊어 가는걸 어찌알리.
(閒處安知歲月深)

세상사 들리지않아 마음만은 즐거우니
(外事不聞中樂意)

현인과 군자가 서로 찾기 좋은 곳이네.
(賢人君子好相尋)

박규진은 또 전라남도 화순군 춘양면 우봉리에 있는 침수정(枕漱亭)에도다음과같은글을남겼다.( ⌈외당유고 ⌋謹次枕漱亭韻)

그윽한 정자가 작은 티끌도 허락하지 않고,
(幽亭不許上微塵)

물과 대나무가 맑고 한가로운 별세계의 봄이네.
(水竹淸閒別地春)

하늘의 밝은 달은 일생동안  읊조리던 자취요,
(霽月一生吟弄跡)

높은 풍격은 백세 동안 다스리던 몸이네.
(高風百世濟康身)

선현의 향기가 시로 남아 옛스럽고
(先賢芬馥題詩古)

후학들이 가슴에 품은 회포는 강연으로 새롭네
(後輩襟期講道新)

깨끗이 씻고 갈아 얻음이 있음을 알겠으니,
(澄汰磨礱知有取)

이 아름다운 이름은 단지 돌과 물 때문만은 아니라네.
(佳名非獨石流因)

1934년(77세, 일제시대)에사망하였다. 유집으로1994년에간행된 ⌈외당유고(畏堂遺稿) ⌋가있다.

<참고자료>
오인교, 南道정자기행(2553)-화순우산정사(牛山精舍),<한국매일>, 2015.10.6
이종범편, 화순역사인물을활용한컨텐츠개발용역결과보고서 , 2014.11.2
권수용, 근대기화순유학의부흥과정의림(鄭義林)의역할, 화순 역사인물을활
용한컨텐츠 개발용역결과보고서 ,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