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종 즉위식의 모습

현종실록의 율곡 선생 이야기

 

현종 즉위식의 모습

1659년은 조선의 제 18대 국왕 현종이 즉위한 해다.

이해 여름(6월 28일)에 그는 창덕궁에서 18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아버지 효종은 6월 23일(음력 5월 4일) 창덕궁 대조전에서 사망했다. 향년 39세였다. 이날 저녁 한양에 큰 비가 내렸다.

젊은 임금 현종이 부친의 죽음을 슬퍼하는 검정 곤룡포를 입고 평천관(平天冠)을 쓴 즉위 모습은 현종실록에 다음과 같이 생생히 묘사되어 있다.

많은 관료들이 동서로 나뉘어 차례대로 의식에 맞게 줄지어 서 있었다.

새 임금이 창덕궁 인정문(仁政門)의 어좌(御座)에 이르렀다. 그는 동쪽을 향하여 한참 동안 서 있었다. 이에 도승지가 꿇어앉아 어좌로 속히 오를 것을 청하였다. 하지만 임금은 응하지 않았고, 대신 김수항이 종종걸음으로 나아가 어좌에 오르시도록 요청하였다. 이 역시 임금은 따르지 않았다. 또 다른 관리가 총총히 걸어 나와 급히 예조 판서 윤강에게 앞으로 나아가 꿇어앉아서 임금께 다시 요청하도록 하였다. 그때까지도 임금은 따르지 않았다. 이번에는 영의정 정태화가 종종걸음으로 나와 두세 번 어좌로 오를 것을 요청 드렸다. 임금은 그제야 비로소 어좌에 올라 남쪽을 향하여 섰다. 영의정 정태화가 다시 다가가 어좌로 올라가 앉을 것을 청하니, 임금이 이렇게 말했다.

“이미 이 자리에 올랐으면 앉은 것이나 다름이 없지 않은가?”

임금은 이어서 흐느끼기 시작했고 좌우도 모두 울며 차마 쳐다보지 못하였다.

정태화가 임금께 의식대로 할 것을 요청했다. 임금이 비로소 앉아서 관리들의 하례를 받고 등극의 예를 마쳤다. 이어서 그는 기다란 곤룡포를 이끌고 인정문 동쪽의 협문으로 들어가 인정전 동쪽 뜰로 올라갔다. 그리고 궁전 밖의 동편 거느림채를 돌아 인화문(仁和門)을 들어갔다. 임금을 따라 이어지는 통곡의 소리가 궁궐 바깥까지 들렸다.

돌아가신 효종의 시신은 아직 궁궐에 있었다.

궁궐의 다른 한 쪽에서는 왕실 가족들이 모여서 통곡을 하고 있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돌아가신 효종 임금의 어머니가 상복을 몇 년간 입어야하는 지에 대한 문제로 관리들 사이에서 격론이 벌어지고 있었다. 소위 예송논쟁이 일어나고 있었다.

효종 임금의 어머니란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를 말한다. 효종의 부친 인조시대에는 장렬왕후라고 불렸던 여성이다.

현종 시대에는 이렇게 상복 입는 문제를 두고 서인과 남인 사이에 두 차례의 예송(禮訟, 예를 둘러싼 공개적인 논란)이 있었다. 이는 일견 단순한 논의였지만 국왕의 정통성과도 관련되었고, 또 집권 세력의 권력 유지와도 관련되었기 때문에 몹시 격렬하게 논의가 전개되었다. 현종이 즉위한 해, 즉 1659년의 예송은 1차 예송이라고 부르며 기해년이었기 때문에 기해예송이라고도 불린다.

당시 일반 양반(사대부)들의 집안에서는 장남의 어머니는, 장남이 사망할 경우 3년상을 지내며 상복을 3년간 입었다. 차남이 사망할 경우에는 1년상으로 끝났다. 서인 관료들은 자의대비도 1년간 상복을 입으면 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자의대비는 이미 장남 소현세자가 사망할 당시(1645년) 3년상을 치룬 적이 있었다. 소현세자의 동생에 해당하는 효종이 사망했으니 1년만 입는 것이 당연했다. 그리고 조선에서는 아들이 죽을 경우 대개 1년 상을 하였다.

그러나 남인 관료들은 임금은 일반 사대부들과 달리 특별한 존재이므로, 일반 사대부의 의례를 따를 필요가 없이 3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봉림대군으로 불리던 왕세자가 임금으로 등극하였으니 이미 적장자로서의 권위가 인정되었다고 봐서도 3년상이 당연하다고 주장했다.

두 집단의 주장은 서로 일리가 있었지만 새임금은 즉위 당시 아직 나이도 어리고 당시 집권세력이 서인들이었기 때문에 엉겁결에 서인들의 말을 따라 자의대비 상복 기간은 1년으로 하라고 결정하였다. 서인 측의 승리였다. 이때 서인들의 중심에 서서 예송 논란을 이끌었던 사람들은 송시열과 송준길이었다. 반대편, 즉 남인들의 중심은 윤휴와 허목이었다.

자의대비는 나중에 며느리인 효종의 부인, 즉 인선왕후가 사망할 때 또 상복 입는 문제로 논란의 중심이 된다. 자의대비(장렬왕후)가 이렇게 자꾸 자식들의 사망과 상복 문제에 관련되었던 것은 매우 어린 나이에 인조의 두 번째 부인(계비, 새 중전)으로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인조의 첫 번째 부인은 인열왕후 한씨(韓氏)였다.

장렬왕후가 인조의 계비로 정식 책봉될 때는 1638년(인조 16년)으로 당시 14세의 나이였다. 당시 인조 나이가 43세로 인조 보다 29살이나 어렸다. 그래서 그녀는 인조의 장남인 소현세자, 둘째인 봉림대군(효종)보다도 더 어렸다. 손자인 현종과 비교하면 16살 위였다. 이러한 이유로 자의대비는 아들인 소현세자나 효종, 그리고 며느리인 효종의 부인 인선왕후가 사망했을 때 입어야 하는 상복 때문에 문제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이다.

새 임금은 등극하고 나서 한 달 쯤 뒤부터 학질을 앓기 시작했다. 약방에서 약을 지어 올렸으나 먹지 않았다. 그 뒤 4개월 가까이, 어린 임금은 돌아가신 부친을 너무 지나치게 애도하여 몸이 상했다. 여름에 이르러서는 한 달이 넘도록 시름시름 앓았으며 기력이 쇠하여졌다. 아버지 효종이 승하하기 전부터 임금은 부친의 병간호와 나라 일에 대한 걱정으로 이미 몸이 쇠약해 있었다.

이후 현종은 1년쯤 뒤부터 안질과 종기로 고생을 하였으며 또 발에도 종기가 나서 침을 맞기도 하였다. 머리에 종기가 난 일도 있어 뜸을 떴고, 손과 발에도 가려움증이 있었고 상처가 생겼다. 머리, 발, 목 등 곳곳에 종기가 나서 뜸을 뜨고 침을 맞았다. 부스럼과 눈병도 자주 걸렸다. 감기, 습창으로 고생하기도 하고 입술에 부스럼이나 물집이 생기기도 했다. 안면에 종기가 생겼으며 가슴과 등에도 종기가 생겨서 고생하였다. 나중에는 온양 온천으로 행차하여 온천욕으로 몸을 다스리기도 하였으나 효과가 그리 길게 지속되지는 않았다.

임기 말, 20대 후반에는 턱 아래에 응어리가 생기고, 목에도 아픈 부분이 생겼다. 천식으로 매일 뜸을 떠야 했으며, 기관지나 폐도 쇠약해졌다. 29살(현종 10년) 때는 다리에 마비 증상이 있어 걷기가 불편해지기도 했다. 골반, 허벅지, 장딴지 부위 등 여기저기에 문제가 생기기도 하였으며 좌골 신경통의 증상도 생겼다. 턱 아래 좌우에는 알 수 없는 응어리가 생겨서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다. 피부가 수척해져 탕약도 잘 마시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림프절 종창과 갑상선종의 증상이 있었으며 맥도 허약해지고 구역질을 하였다. 임금은 이해 5월경부터 가을까지 식사를 거의 하지 못해서 몸이 몹시 수척해졌다. 얼굴 곳곳에 종기가 부어오르고 고름이 흐르기도 하였다. 이러한 증상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이해웅 등, 230-233쪽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