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을 괴롭힌 3가지 스트레스

현종실록의 율곡 선생 이야기

 

임금을 괴롭힌 3가지 스트레스

현종은 세자 시절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다. 이것이 임금의 첫 번째 스트레스였다. 이렇게 자기 한 몸도 간수하기 힘든데, 집권 초기부터 전국에는 자연재해가 빈번히 발생하였으며 또 전염병이 창궐하여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졌다. 당시 자연재해는 최고 통치자인 임금의 잘못에 기인한 것이라고 보았다. 이것이 임금의 두 번째 스트레스였다.

현종이 집권하던 시기인 1660년대는 유독 역병(전염병)이 심하게 돌았다. 기후도 불안정하여 극심한 가뭄으로 백성들은 기근에 시달리는 일이 많았다. 당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직원으로 조선에 표류해와 7년째 붙잡혀 있던 헨드릭 하멜은 자신의 표류기에 1660년경 조선의 고통스러운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1660년과 그 다음해 (조선에는) 비가 거의 내리지 않아 곡물과 작물 수확이 거의 없었다. 1662년 수확 철이 되기 전까지 기근이 계속되었다. 수천 명이 기아로 죽었다. 도로는 도적 떼가 들끓어 거의 이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왕은 여행자들을 보호하고 기근으로 길가에 죽어 있던 사람들을 묻어주고 또한 매일 발생하는 살인과 강도를 막기 위해 모든 길에 삼엄한 경비를 서도록 명령하였다.”(하멜보고서, 48쪽)

특히 하멜은 1662년 초가 아주 끔찍했다고 한다. 3년이나 흉년이 계속되었으며, 많은 사람이 굶어 죽었다.(앞의 책, 74쪽) 당시 여러 마을들이 약탈을 당했고, 국가가 관리하던 저장고의 곡물들도 털렸다. 이런 일을 벌인 범죄자들은 대부분이 양반 집에 소속된 하인들이었기 때문에 잡히지 않았다고 한다. 평민들과 가난한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도토리, 소나무 껍질 그리고 풀을 먹고 살았다고 하멜은 보고서에 적었다.(앞의 책, 48쪽.)

1662년은 현종이 임금으로 즉위한 지 3년 되던 해였다. 특히 힘들었던 봄 어느 날 궁중에서 어전회의가 열렸다. 관리들이 이렇게 건의하였다.(현종실록 3년 3월 23일 기사)

“오늘 급히 대신들을 불러 …… 재해를 소멸시켜 비가 오게 할 방책을 강구하시기 바랍니다.”

임금은 당시 건강이 좋지 못해 오랫동안 신하들과 만날 수 없었다. 다리에 병이 생겨 걸음도 제대로 못 걷는 형편이었다. 오랜만에 신하들을 만난 그는 자신의 무능함을 책망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차라리 죽어버려 이런 말을 안 들었으면 좋겠다.”

젊은 임금의 이 말을 듣고 관리들 모두가 놀라워했다.

현종은 이때 21살. 요즘이라면 성년식을 치르고 사회생활이나 대학생활을 처음 시작할 나이다. 임금은 스스로 음식을 줄이고 술을 금하겠다고 약속하고 관리들에게 널리 재해를 해소하는 방책을 건의하도록 하였다.

당시 자리에 있던 한 대신이 이렇게 건의를 하였다.

“바깥에서 이런 말들이 돕니다. ‘창덕궁은 정원과 연못 등의 경치가 상당히 좋기 때문에 임금께서 정사를 보시고 난 여가에 점점 오락이 빠지게 되실까 걱정이다.’ 임금께서는 꼭 이점을 가슴에 새기셔야 합니다.”

임금은 “자네 말이 옳다.”고 수긍했다. 자연 재해가 그것 때문에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 각종 질병들이 또 그것 때문에 생긴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현종으로서는 자신도 아프고, 백성들이 굶어 죽는 것이 몹시 괴로웠다. 불쌍한 백성들이 굶주리고, 병들고, 괴로워하는데, 궁궐의 신하들은 하루가 멀다고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고, 심지어 편당을 나누어 다투고 있었다. 소위 당파 싸움, 이것이 임금의 세 번째 스트레스였다.

1662년 1년 동안 율곡 선생에 대한 문묘 종사 건의는 모두 십여 차례 있었다.(현종실록 기록에는 6회, 현종 개수실록에는 14회가 기록되어 있다.)

예를 들면 이해 음력 11월 2일, 김포에 사는 진사 이영원(李榮元)이 상소하여, 이이와 성혼을 문묘에 배향하고, 송시열과 송준길이 살고 있는 곳에 각각 몇 칸의 서원을 지어 선비들이 모여 학업을 연마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상소를 하였다. 임금은 이에 “그대의 제안을 듣고 내가 아름답게 여긴다.”고 응답할 뿐이었다.(현종실록)

음력 11월 12일에는 강원도 유생이 또 율곡 등의 문묘 종사를 요청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현종은 “따르기 어렵다는 뜻을 앞선 임금이 이미 남김없이 다 말씀하셨다. 그대들은 번거롭게 하지 말라.”(현종실록)고 하였다.(현종개수실록에는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고만 기록했다.)

음력 11월 14일에는 유생 홍원보 등이 율곡 등의 문묘 종사를 또 요청하였다.(현종실록) 이들은 임금의 답변이 신통치 않자, 그 뒤에도 연속해서 다섯 차례나 더 상소문을 올렸다.(현종개수실록) 임금에게 그러한 요구는 소귀에 경 읽기라는 것을 절감하고 비로소 그친 것이다.

음력 12월 3일에도 성균관 유생 유연 등이 율곡 등의 문묘 종사를 요청하였다.(현종실록) 이들도 이후 다섯 차례나 더 상소문을 올렸다가 포기했다.(현종개수실록) 음력 12월 19일에도 경기도 유생들이 문묘 종사 요청 상소문을 올렸으나 임금은 허락하지 않았다. 이달 27일에도 황해도 유생 오복연 등이 상소문을 올렸다. 임금은 여전히 허락을 하지 않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 서인 측 유생들이 포기할 만하기도 한데, 다음해 1663년(현종 4년)에도 율곡과 우계에 대한 문묘 종사 요청이 끊이지 않았다. 이 해는 반대파들도 보다 못해 적극적으로 비판 의견을 개진하기 시작하였다.

음력 1월 4일, 황해도 유생 오복연 등이 상소하여 율곡 등의 문묘 종사를 청하였으나 임금은 허락하지 않았다.(현종실록) 이달 12일(음력. 현종실록에는 15일)에 개성부 생원 김상경 등이 또 문묘 종사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현종개수실록) 같은 달 22일에도 충청도 유생들이 상소하여 문묘 종사를 청하였으나, 결과는 같았다.(현종실록, 현종개수실록) 음력 2월 5일에도 같은 내용의 상소문이 함경도에서 전달되었으며, 2월 7일에는 전라도 유생들이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를 간청하였다. 현종은 언제나 처럼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현종개수실록)

이렇게 율곡과 우계를 존경하는 서인 측 유생들이 자꾸만 상소문을 올려서 임금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에 대해 서인들 관료 사이에서 반발이 나왔다. 대사간 남용익은 율곡 등의 문묘 종사를 요청하는 상소문이 그 뜻은 옳지만 상소한 시기가 잘못되었다고 지적하였다. 이러한 지적에 대해 같은 서인측 관료인 지평 원만리는 임금 앞에서 관직을 내놓고 비판하였다. 송준길의 제자이자 나중에, 숙종 때 소론(서인의 일파)의 거두가 된 남구만은 원만리를 비판했다. 서인 관료들 사이에서도 의견 충돌이 일어난 것이다.(현종실록, 현종개수실록 4년 2월 12일)

보다 못한 송준길이 임금에게 상소문을 올렸다. 송준길의 당시 직책은 대사헌이었다.

“전하께서는 여러 공경 대부와 예관·유신들에게 물어 문묘에 올려 제사지내는 예를 속히 의논하셔서 도학(道學)의 연원을 밝히소서. 요즘 유생들이 건의한 두 어진 신하(율곡과 우계)를 종사하자는 청은 실로 사림(士林 : 유학자들)의 공적이고도 공평한 의논입니다. 의심을 하여 뭇 사람들의 바람을 막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율곡 등의 문묘 종사를 긍정적으로 검토하여 많은 유생들의 공적인 요청을 들어달라는 것이었다. 임금은 이러한 송준길의 의견을 여러 고관들에게 알려 의견을 구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나중에 잠시 의견 조사를 멈추게 하였다.(현종개수실록 4년 4월 1일) 이러한 사실은 남인들 학자들이 편찬한 현종실록에는 나오지 않는다.

음력 4월 5일에도 평안도, 경상도 유생들이 상소문을 올려 문묘 종사를 요청하였다. 그리고 4월 11일에도 문묘 종사를 요청 상소문이 올라왔다. 이 날의 상소문은 조정의 사간원에서 올린 것이었다. 현종실록에는 간략히 한줄 정도로 기록하였으나 현종개수실록에는 사간원의 김만균 등이 올린 상세한 상소문이 다음과 같이 실렸다.

“문성공 이이(李珥)와 문간공 성혼(成渾)은 실로 우리나라의 위대한 선비입니다. 그런데 문묘에 종사하는 법전에서 아직까지 빠져 있습니다. 혹시 전하께서 어진 이를 좋아하고 덕을 숭상하는 정성이 부족함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까? 이이는 타고난 자질과 성품이 매우 훌륭하고 세상에 보기 드문 식견과 지략을 지녔으며, 규모가 바르고 크며 조예가 밝고 투철합니다.”

사간원에서 올린 글답게 직설적으로 임금에게 “정성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하고 물었다. 그리고 상소문은 1635년(인조 13년) 때부터 현재까지 몇 십 년 동안 많은 선비들의 문묘 종사 요청이 그치지 않고 있음을 지적하고, 다음과 같이 강하게 요청하였다.

“이는 바로 온 나라의 의논이 공통적이라는 것을 여기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하니 흔쾌히 (율곡과 우계의 문묘 종사) 결단을 내리시어 속히 많은 선비들의 요청을 허락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간곡한 요청에도 현종은 응하지 않았다.

같은 달 18일에는 대사헌 박장원 등이 임금에게 문묘 종사 요청 건의문을 올려 “전하의 고명하신 학문으로 그들(율곡과 우계)의 책을 읽어보시면 그들의 사람됨을 상상하실 수 있을 것인데, 어찌 결단을 내려 종사하는 법전을 속히 거행치 않으십니까?”라고 재촉하였다.(현종개수실록)

5일 뒤인 23일에도 이조 참판 유계가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를 청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율곡에 대해서 언급을 하였다.(현종실록 4년 4월 23일)

“이이는 조정의 의논이 분열되는 것을 매우 근심하여 매양 ‘동서(東西) 두 글자가 필시 나라를 망하게 하는 화의 씨앗이 될 것이다.’고 하면서 속히 동서 분열을 타파하고자 진심을 다하여 노력하였습니다. 그런데, 도리어 바른 사람을 미워하는 일단의 무리들에게 깊은 원망과 노여움을 사서 떼 지어 일어나 비난하여 반드시 쫓아내고야 말려고 하였습니다. 그때 성혼이 마침 부름을 받고 서울에 와 있었는데 개연히 상소를 하여 뭇 소인들이 떼 지어 참소하는 것이 사실과 다른 데 대한 정상을 낱낱이 진술하자, (소인들이) 모래를 내뿜던 입이 독까지 마구 내뿜듯이 하였는데, 이들이 두 신하를 무함하기 위해 갖은 방법을 다 썼습니다. 처음에 정여립(鄭汝立)·정인홍(鄭仁弘)·이홍로(李弘老) 등이 그 설을 주장하였는데 광해군 때 이르러서는 극에 달했습니다.”(현종개수실록 4년 4월 24일)

이렇게 말하고 “도학과 국가의 관계는 마치 사람에게 원기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원기가 떨어졌는데도 신체가 건강한 경우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도학이 존숭되지 않으면서도 국가가 잘 다스려진 경우는 아직까지 없습니다. 세상의 도가 더욱 떨어지고 인심이 착하지 못한 이런 시대에는 더욱 유학에 정통하고 총명한 선비를 격려하고 좋아하며 상을 주어서, (임금이) 미워하는 것을 명확히 보여줌으로써 기강을 하나로 통일하고 나라가 지향하는 바를 바르게 해야 합니다.”라고 주장하였다.(현종개수실록 4년 4월 24일)

임금은 이러한 상소문을 읽고도 이들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음력 5월 15일에도 성균관 유생들이 상소문을 올려 율곡 등의 문묘 종사를 요구하였으나, 임금의 반응은 여전했다. 임금의 이러한 태도를 보고 있던 문묘 종사 반대파들을 힘을 얻었다.

율곡 등의 문묘종사를 반대하는 남인측 관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인 측 관리들은 이를 공격했다.

현종 4년 5월 18일(음력), 지평 홍만용(洪萬容)이 “전적(典籍 : 성균관의 정육품 관직) 권진한(權震翰)이 정인(正人, 올바른 사람. 여기서는 율곡과 성혼 등을 말함)을 헐뜯는 논에 빌붙어 낭자하기 짝이 없게 선현을 모욕하였습니다. 이런 괴상한 무리는 의관(衣冠 : 의관을 단정하게 입은 사람, 즉 관리 또는 사대부)의 반열에 끼워둘 수 없으니, 사판(仕版 : 관리의 명부)에서 삭제해버리도록 하소서.”라고 건의하였다.(현종실록)

임금은 이에 따르지 않고 단지 그를 파직한 뒤에 조사해보라고 명하였다. 나중에 다른 관리도 나서서 관리 명부에서 권진한을 삭제할 것을 건의하니 임금이 따랐다. 현종실록을 기록한 사관은 다음과 같이 기록을 남겼다.

“권진한이 아직 급제하지 못했을 때의 일이다. 고향 사람 하나가 시론(時論)에 양신(兩臣 : 율곡과 우계)을 종사하라는 내용으로 상소장을 임금에게 올리려고 유생들에게 통문(通文)을 하였다. 그때 권진한이 글을 써서 말하기를 ‘어찌 이런 사악한 상소문에 참여하겠는가?’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관직에서 쫓겨났다. 권진한 같은 이야말로 이른바 ‘그 기상이 참으로 씩씩하도다’라고 칭찬할 만한 인물이라 하겠다.”

남인측 사관은 이렇게 권진한을 칭찬했으나 이런 칭찬이 가능했던 것은 현종실록 편찬시, 즉 숙종시대 초기에는 남인측이 서인 관료들을 몰아내고 권력을 잡았기 때문이다.

지평 홍만용의 탄핵 상소문으로 남인 관료들은 그동안 쌓였던 불편한 감정이 폭발하였다. 권진한을 탄핵해달라는 상소문이 올라온 이틀 뒤, (현종 4년 5월 20일) 진사 남중유(南重維) 등 26명이 문묘 종사를 반대하는 상소문이 임금에게 전달되었다. 이들은 이렇게 말했다.

“관학(館學 : 성균관) 유생들과 외방(外方 : 서울의 바깥 지방)에서 아첨하여 빌붙는 무리들이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종사(從祀)해야 한다는 청원을 처음 을해년(1635년, 인조 13년)에 내놓고 다시 기축년(1649년, 인조 27년)에 내놓았습니다. 그때마다 열성(列聖 : 선대의 여러 임금, 즉 인조와 효종)께서 반드시 엄히 배척을 가하시고 공의(公議)가 끝내 허락해 주지 않았으니, 이는 참으로 두 신하(율곡과 우계)의 학문이 조잡하고 천박하며 여러 흠집을 숨기기가 어려워 결단코 (국가와 유림의) 제사를 받는 반열에 외람되이 뛰어 오르게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이렇게 말을 이었다.

“어제 홍만용이 이러한 진실을 막아보려는 음흉한 계책을 몰래 품고는 감히 (반대파를) 저격(狙擊)하는 수단을 쓰면서 제멋대로 독계(獨啓 : 혼자 임금께 글을 올려 건의함)하여 다사(多士 : 많은 관리들)에게 죄를 주기를 청하였습니다. 그의 심술을 추적해 보건대, 신들을 윽박지르고 협박하여 학궁(學宮 : 성균관)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려는 데 불과합니다만, 홍만용도 사람인데 어떻게 한결 같이 이토록까지 임금을 속이고 사람을 함정에 빠뜨릴 수 있단 말입니까?”

그리고 홍만용의 할아버지, 아버지가 관직에 있었던 일을 언급하고 홍만용 집안이 “맛있고 살찐 고기로 당대의 명관(名官 : 이름있는 고관)을 먹여 조정(朝政)에 참여하려고 꾀하며 방자하게 탐욕을 부렸습니다.”라고 비난하며, 없는 사실을 날조하여 권진한 등 관리들을 탄핵으로 몰아갔다고 진정하였다.(이상 현종실록 참조.)

이에 다음날(5월 21일, 음력) 승지 이은상, 남중유 등이 율곡 등을 비난하고, 지평 홍만용을 헐뜯은 상소문에 대해서 논박하는 글을 이렇게 올렸다.(현종개수실록)

“두 신하(율곡과 우계)의 학문과 도덕을 성상(임금)께서 존숭하고 계시고 문묘에 종사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도 성상께서 모르지 않으십니다. 그러시면서도 요즈음 유생들의 상소에 대한 비답에 자못 너그럽게 장려하는 뜻이 부족했습니다. 지금 바른 사람을 추악하게 여기는 (남중유 등의) 상소문에서 두 신하를 무함하고 헐뜯기를 이루 말할 수 없이 하였습니다. (중략) 어찌 지혜로운 임금이 다스리는 세상에 이런 치우치고 사악한 무리들이 있으리라고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남인 관료들이 직접 나서서 율곡 등의 학문을 폄하하고 문묘 종사 요청 정면으로 비난한 일은 집권파인 서인 측 관료들에게는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사태였다. 임금이 이 일을 무시하고 지나친다면 이를 본받아 나중에는 “환퇴(桓魋)와 장창(臧倉) 같은 무리들이 반드시 뒤를 이어 일어날 것이니, 어찌 매우 두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라고 물었다.

환퇴는 공자를 해치려했던 인물이다. 장창은 맹자가 노 나라 평공을 만나려고 하였는데, 중간에 가로막아서 두 사람이 만나지 못하게 하였다. 어진 사람을 해치는 소인배로 이들의 이름은 언급한 것이다. 이러한 비유 가운데는 율곡과 우계를 공자와 맹자에 견줌으로써 그들의 학문과 도덕이 매우 높았음을 강변한 것이다.

임금은 이러한 상소문을 읽고 다음과 같이 명을 내렸다.

“남중유 등이 한때 대각(臺閣 :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제기한 탄핵 건의에 분개하여 이렇게까지 망령된 짓을 하였으니, 매우 가증스러운 짓이다. 소를 올리는 데 우두머리가 된 유생은 1년간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도록 하라.”

그리고 이날 임금은 지평 홍만용을 다른 곳으로 이동시켰다. 홍만용(1631-1692)은 지난해(1662년) 정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인물로 자신이 올린 탄핵 상소문으로 남중유 등의 비판을 받자 인피(引避)하여, 조정에 출근을 하지 않았다. 관료들이 출근을 하라고 연락하였으나 응하지 않자 직책에서 해임되었다. 나중에 홍만용은 이조좌랑, 이조정랑 등 중요한 직책에 다시 발탁되었으며, 1666년(현종 7년)에는 문과중시(文科重試)에 다시 도전하여 또다시 장원 급제하여 정3품으로 승진하였다.

5월 25일(음력)에는 성균관 유생 이적 등이 또 상소를 하여 근거 없이 율곡 등을 헐뜯은 남중유 등을 비판하고 율곡과 성혼의 문묘종사가 꼭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임금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들은 6월 1일(음력)에도 상소문을 올려 다시 문묘 종사를 요청하였다. 이들은 인조 임금과 효종 임금이 율곡 등의 문묘종사를 ‘불가하다’고 한 것이 아님을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현종개수실록, 4년 6월 1일)

“문묘에 종사하자는 청은 처음 인조 조에 일어났고 효종 조에 다시 일어났습니다. 인조께서 종사하는 것을 불가하다고 생각하신 것이 아닙니다. 단지 막중하고 막대한 거조를 가벼이 거행할 수 없다고 여기신 것입니다. 대신 관직을 추증하고 시호를 내리는 법전은 당시에 거행하였습니다. 효종께서도 종사를 불가하다고 생각하신 것이 아니라 막중하고 막대한 거조를 가벼이 거행할 수 없다고 여기신 것입니다. 대신 서원에 편액을 하사하고 제사를 내린 법전은 당시에 거행하였습니다. 그러나 두 어진 신하의 도덕과 공적에 대해 포상하고 숭상하고 보답하는 것이 여기서 그치고 말아서는 안 되기 때문에 오늘에 이르기까지 온 나라의 많은 선비들이 다시 전하에게 요청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하께서는 어떠한 조치로 많은 선비들의 바람을 채워주시겠습니까?”라고 물었다. 임금은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 “이이와 성혼에게 관직을 추증하고, 시호를 내리고 서원에 편액을 하사하고 제사를 내린 것이, 인조 조와 선왕 조에 여러 유생들이 종사하자는 요청으로 인해 이런 명이 있었는가? 조사하여 아뢰라.”고 하였다.

이후 담당 관리가 임금에게 “시호를 내린 일은 반드시 을해년 이전에 있었지만 종사하자는 요청으로 인하여 내린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라는 보고를 하였다. 임금은 다시 “담당관서의 보고서(該曹之啓)는 믿을 만한 것이 못되니 편액을 하사한 이유를 다시 조사해 아뢰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건 조사는 관련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고 하여 종결되었다.(현종실록 4년 6월 1일, 2일)

6월 3일(음력)에는 이조 참판 유계(兪棨)가 상소를 하여 남중유 등이 자신을 비판한 것에 대해 반박을 하며 사직을 요청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남중유 등은 상소 가운데에서 신을 헐뜯고 배척하였습니다. 그 뜻을 대략 들어보건대 ‘제가 임금님을 위협해 세상 사람들의 입을 막고 죄인으로 만들어 제압한다.’고 하니, 신은 깜짝 놀랐습니다. (율곡 등을) 문묘 종사하자고 청한 지 오래되었는데 오늘날에 이르러서 저만이 많은 사람들의 입질에 곤욕을 받을 뿐 아니라 선정신(先正臣 : 앞 시대의 고명한 대신들 즉, 율곡과 우계)들도 이로 인하여 모두 모욕을 받아 ‘학문이 거칠고 얕으며 가리기 어려운 흠이 있다.’고 말하고 있으니, 비록 나약한 신도 그들을 위하여 통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율곡과 우계에 대한 변호를 하고 자신은 남중유와 같은 변변치 못한 무리들을 상대하여 말을 허비하며 변론하고 사정을 밝히는 것은 도둑들과 의리를 논하는 일과 같기 때문에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고 서술하고 사직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임금은 그의 사직을 허락하지 않았다.(현종개수실록 참조)

6월 10일(음력)에는 경상도 생원 김강 등은 율곡 등의 문묘종사를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이들은 율곡이 한때 불교에 빠졌다는 것을 문제 삼았다.

“이이는 일찍이 집안의 갈등을 만나 선학(불교)에 종사했습니다. 이이의 상소문에서 그 사실을 스스로 말했을 뿐만 아니라, 이이의 비문에도 19세에 출가했다고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이이는 오로지 고상하게 스스로 지표를 세워 선현(앞 시대의 현인)과 다른 설을 세우는 데에 온 힘을 다하였습니다. 성혼의 재주와 학문은 이이에 훨씬 못 미칩니다.”라고 하며 율곡과 우계 두 사람의 학문을 폄하하였다.(현종개수실록)

이에 반발하여 6월 14일(음력) 경기도 유생 박지상 등이 다시 율곡 등의 문묘 종사를 요청하였다. 6월 20일에는 응교 이민적(李敏迪)과 수찬 이유상(李有相)이 임금에게 건의문을 올려 율곡과 우계의 도덕과 학문을 칭송하면서, 임금이 문묘 종사를 원하는 선비들의 청원을 따르기를 요청하였다. 아울러 현인을 모독한 김강(金鋼)의 죄를 다스릴 것을 요청하였다. 임금은 이에 따르지 않았다.(현종실록은 이 상소문에 대해서 간략히 소개하는데 그쳤으나 현종개수실록은 상소문의 상당 부분을 상세히 서술해두었다.)

이를 이어서 6월 21에는 이선악 등 성균관 유생들이 문묘 종사를 요청하였으며, 7월 3일에는 부제학 이경휘(李慶徽)가 임금에게 급한 보고가 있다고 청대(請對 : 급한 일로 임금에게 직접 보고하기 위해 대면을 요청함) 요청을 하여 임금과 대면하였다. 이 자리에서 이경휘는 율곡 등을 무함한 김강 등에 대해서 시비를 확실하게 판단해주고 이와 관련된 여러 상소문에 대해서 임금의 의중을 분명히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리고 율곡 등의 문묘 종사를 요청하였다. 그러자 임금은 큰소리로 이렇게 말했다.(현종실록)

“내가 언제 김강 등의 말을 옳다고 한 것이 있었는가? 김강을 옳다고 하지 않았다. 관학(館學 : 성균관)에서 소란스럽게 변호하는 것 역시 수고로운 것이 아니겠는가? (중략) (성균관에서, 인조 때나 효종 때는 그렇지 않았는데) 지금은 열 번 이상이나 상소문을 올리고 있다. 여러 번 소를 올리면 요청대로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러는 것인가? 너무도 외람스러운 일이다. 청대(請對)를 요청했기에 무슨 특별한 말이나 나올까 하고 들어 보았는데, 가소롭기만 하다.”

겨우 문묘 종사를 요청하려고 나에게 급한 보고가 있다고 말한 것인가, 라는 말이었다. 이경휘는 이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옳고 그름을 변별하는 일이야말로 치란(治亂 : 반란을 다스림)과 직결되기 때문에 감히 진달 드린 것입니다.”

임금은 “참으로 괴롭고 고달픈 일이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이경휘는 물러 나갔다.

이틀 뒤(7월 5일, 음력) 충청도 유생 김호 등이 율곡 등의 문묘 종사를 요청하였다. 그 뒤 7월 11일(음력)는 유학(幼學 :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유생. 혹은 관직에 오르지 못한 양반) 권대시가 상소문을 올렸다.

그는 평소에 동인 쪽 이야기만 듣고 서인 쪽 이야기는 잘 몰랐는데, 김강이 율곡 등을 비난한 것은 당론(黨論)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였다. 당론이란 편당에 휩쓸려 한쪽 당파의 주장을 따르는 일을 말한다. 이는 공정한 의견을 말하는 공론(公論)이 아니라는 뜻으로 당파 이익이 포함된 의견이란 말이다.

권대시는 김강의 의견이 그런 것인데, 자신은 처음에 그의 말을 듣고 율곡 등을 그렇게 보았으나, 스스로 율곡 등이 남긴 문장을 보고나서 자신이 동인들의 말만 들었는데, 이제는 서인들의 말이 바르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하였다.

임금은 이러한 상소문에 답을 반달 정도 하지 않고 있다가 갑자기 이렇게 하명하였다.

“나라의 기강이 아무리 해이해졌다 하더라도 어찌 오늘날처럼 심한 경우가 있었겠는가? 권대시가 감히 이쪽 편이니 저쪽 편이니 하는 설을 가지고 방자하게 마구 써내려 가면서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있으니, 국법을 무시하고 군상(君上 : 임금)을 모욕한 죄로서 이보다 심한 것이 없다. 나국(拿鞠 : 죄인을 잡아다가 국문鞠問하는 일)하여 엄히 다스리도록 하라.”(현종실록)

이에 승지 김익경(金益炅)이 나서서 이를 반대하였다. 김익경은 일개 유생이 존경스러운 현자를 위한 다는 명분으로 상소문을 올린 것인데 임금이 이런 조치를 내리면 일을 더 크게 만든다고 하였다. 즉 나국을 하면 사람들의 의혹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김익경이 강력하게 건의하여 임금은 없던 일로 하였다. 임금으로서는 관리들이 두 편으로 나누어 국론이 자꾸 분열되어 속으로 걱정이 많은데, 이를 공개적으로 까발리면 공론화되고, 그러면 자신은 결국 반쪽짜리 임금이 되는 것이다.

자신이 신하들의 의견을 듣고 취사선택하는 것은 서인의 당론을 따른 것도 아니고, 남인의 당론도 따른 것이 아니다. 백성들이 원하고, 유생들이 원하는 공정하고 공평한 의견을 따를 뿐인 것이다. 어느 한쪽에 자신이 서 있는 것도 아니고, 어느 한쪽을 위한 임금도 아니기 때문이다.

임금은 결국 7월 12일에 권대시를 잡아들였다.(현종실록) 그러자 사간 이정, 지평 이단석 등이 임금에게 이러한 조치를 거두기를 요청하였다. 임금은 이렇게 답하였다.

“(임금의) 명령을 환수하라고 청원하는 이 문서를 보고 내가 매우 탄식하며 애석하게 생각한다. 양신(兩臣 : 율곡과 우계)에게는 이쪽 편이니 저쪽 편이니 하는 붕당(朋黨)에 관계된 일이 없었는데, 지금 권대시가 이런 식으로 상소 속에서 언급하였으니, 이것이 그들을 높이는 것인가, 천하게 만드는 것인가? 그대들이 알지도 못하고 거꾸로 존현하는 것이라고 하다니, 매우 근거가 없다.”(현종실록 4년 7월 12일)

다음날(7월 13일, 음력) 대사간 이경억이 권대시의 상소문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였다. 임금은 허락하지 않았다. 이 와중에 평안도 유생 이창진 등이 율곡 등의 문묘 종사를 요청하였다. 또 이날 대사성 민정중이 상소문을 올려 김강의 죄를 논하고 율곡 등의 문묘 종사를 요청하였다.

임금은 장황하게 율곡 등의 종사를 요청하는 민정중의 상소문을 보고 다음과 같이 답변하였다.

“오늘 종사의 청을 따르지 않는 것이 어찌 두 신하(율곡과 우계)의 도덕이 보잘것없다 하여 그런 것인가? 또 김강 등의 상소가 어떻게 그 두 신하의 도덕을 속일 수 있을 것인가? 변무(辨誣 : 율곡 등의 무고를 변호함)의 말은 나도 사실 그 내용을 잘 모르겠다.”(현종개수실록 4년 7월 13일)

이날 하루 종일 조정은 안팎이 시끄러웠다. 권대시의 체포를 둘러싸고 한쪽에서는 상소문을 올리고 다른 쪽에서는 출근을 거부하며 임금의 조치를 기다렸다. 석방을 요청하는 상소문과 인피(引避)하여 출근을 하지 않는 관료들을 불러들이라는 어명이 분주하게 오르내렸다.

7월 19일(음력)에는 황해도 유생 최세익 등이 율곡 등의 문묘 종사를 청하였고, 이달 23일에는 강원도 생원 이모씨 등이 문묘종사를 요청하였다.

일이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 참다못해 응교 이민적(李敏迪), 부응교 민유중(閔維重), 부교리 이익(李翊), 부수찬 여성제(呂聖齊)·이유상(李有相) 등이 함께 집단으로 상소문을 올렸다. 이익은 송시열의 제자고, 민유중은 대표적인 서인 측 관료였다.

상소문 안에는 임금의 문제, 국가의 병폐, 그리고 민생 문제 등이 다양하게 담겨 있었다. 그 세목이 16가지로 근학(勤學), 입지(立志), 청심(淸心), 양기(養氣), 경천(敬天), 외민(畏民), 신하 관료들을 자주 접견할 것,(이상은 임금의 도덕 수양과 정치에 관련 된 항목) 그리고 사치를 금하도록 힘쓸 것, 금병(禁兵)의 수를 제한할 것, 지성으로 현인을 초빙할 것, 염분(鹽盆)을 혁파할 것, 제둔전(諸屯田)을 혁파할 것, 포흠(逋欠)을 탕척해 줄 것, 민간 부역을 고르게 정할 것, 인족(隣族)을 침해하지 말 것, 대간을 구임(久任)시킬 것 등이었다.(이상 현종실록. 현종개수실록에는 상세한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임금은 이러한 상소문을 보고 “으레 올리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근실한 정성과 (임금을) 못 잊어하는 충성심이 말에 흘러넘치니, 어찌 늘 간직하며 마음에 새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일들은 일시에 헤아려 정할 수 없으니, 묘당(비변사, 즉 중요한 일을 처리하는 관청)으로 하여금 논의해서 처리토록 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말뿐이었다. 임금은 이들의 제안이 서인 측 당론에서 나온 것이라고 본 것이다.

현종실록의 사관은 다음과 같이 한탄하였다.

“상이 대답은 이렇듯 너그럽게 내렸으면서도 실제로 채택해서 쓴 일은 없었다. 어찌 탄식을 금할 수 있겠는가?”

현종개수실록의 사관도 이 상소문의 요청이 실제로 채용되지는 않았다고 지적하였으나, 당일 임금과 관료들 사이에서는 상소문에 제시된 여러 제안들에 대해서 서로 논의하였으며 신하들 사이에 의견교환도 많았다고 전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원두표가 임금에게 “임금께서 만약 현자를 초빙하여 임용하려고 하신다면 어찌 어진 선비가 없겠습니까? 가령 송시열 등만 하더라도 선왕께서 그에게 모든 것을 맡겨 책임지고 성취하도록 하여 매우 융숭한 예우를 받던 사람인데 지금 모두 조정에 돌아올 뜻이 없습니다. 그들을 예를 갖추어 초치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라는 제안을 했다.(현종개수실록 4년 7월 26일)

이후 8월 2일에 개성의 유생들이 율곡 등의 문묘종사를 요청하였고, 8월 10일에는 청도의 이상경과 전라도의 유무 등이 상소하여 문묘 종사를 청원하였다. 또 21에는 함경도 유생 한희익 등이 문묘 종사를 요청하였다. 이후 한동안 뜸하다가 11월 20일에는 경상도 유생 이파 등이 김강 등이 이이와 성혼을 비방한 죄를 따져 물었다. 임금은 이에 대해 “꼭 소란을 일으킨 다음에 이기려고 하지 말고 그대들은 물러가 학업이나 닦아라.”(현종실록)라고 명하였다. 현종개수실록의 사관은 임금이 이들에게 “꼭 어지럽고 시끄럽게 한 뒤에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훈계하였다고 기록하였다.

현종은 등극한지 이제 4년째가 되었고, 나이도 만으로 22살이 되었다.

신하들과 나누는 대화를 보면 이제 의젓한 임금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동안 없었던 권위도 느껴지고 또 한편으로는 신하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한 나라의 중심을 잡아가려는 모습도 언뜻 보인다. 동인 쪽, 서인 쪽을 나누어 서인 편을 드는 권대시를 과감하게 잡아들여 국문을 하도록 하는 모습에서 서인 관료들의 지나친 세력화를 견제하려는 임금의 위기감도 느껴진다.

임금은 왜 권대시를 그렇게 미워하였을까? 임금은 왜 서인 측 관료와 서인 유생들이 그토록 갈망하는 율곡과 우계의 문묘종사를 그렇게 완강히 거부하였을까?

그 이유는 현종 임금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현종은 온 백성들의 임금이지 서인 측이나 남인 측, 혹은 관리들이나 유생들의 임금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는 또 자신이 그렇게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임금으로서는 백성들을 다스리는데 좋은 제안이나 의견이 있으면 듣고 받아들이는 것이지, 남인의 의견이기 때문에 혹은 서인의 의견이기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보이는 것이 너무 싫었기 때문에 권대시의 상소문에 분노했던 것이다.

서인 관료들은 이러한 임금의 생각에 이렇게 반발할 것이다. “그럼 왜 율곡이나 우계를 문묘에 모시자고 하는 데 그렇게 반대를 했습니까? 임금께서도 그들이 훌륭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까?”

임금은 자기 스승들이 송준길이고 송시열이고 서인 측 인물들이 많았기 때문에 당연히 율곡 선생과 우계 선생의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그들을 존중하는 마음이 뼈골 깊숙한 곳까지 박혀 있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반대를 했을까?

임금은 관리들의 권력이 한편으로 치우치면 정치, 행정이 엉망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임금 자신도 하나로 뭉친 그들 관리들에게 묶이게 되고, 백성들도 피해를 받을 수밖에 없다. 이점은 붕당론을 소개한 남궁집의 상소문에 잘 나타나있다. ‘당이 같은 자들은 서로 나쁜 일을 숨겨 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올바르고 훌륭한 자들은 임금 주위에서 사라진다. 남궁집은 이것이 붕당의 폐해라고 했지만, 한쪽 당이 모든 것을 장악했을 때도 마찬가지로 나타날 수 있는 폐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1당 독재의 폐해이다.

또 한 가지 서인 측 관료들이 추앙하는 율곡의 사상이 임금으로서는 걱정스러운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율곡은 인간의 감정을 논하면서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제창했다. 기가 발하면 리가 거기에 편승하여 움직인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감정만을 대상으로 말할 때는 문제되지 않으나 이를 인간의 세계로 확대한다면 임금의 권위를 흔드는 사상으로 발전할 수 있다. 리를 임금으로 보고 신하나 백성을 기로 본다면, 임금은 스스로 활동성과 작용성을 가지지 못한다. 주체성이 없다. 오직 신하나 백성들이 하는 일에 편승해서 움직일 뿐이다.

이는 남인 관료들이 섬기는 퇴계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과 비교하면 그 특징이 더 두드러진다. 이기호발설은 리와 기가 서로 발동, 즉 활동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임금도 주체적으로 움직일 수 있고, 신하나 백성들도 주체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 임금의 권위를 더 존중해주는 사상이다. 현종은 그러한 사상적인 차이를 퇴계와 율곡의 글속에서 읽었을 뿐만 아니라, 남인과 서인 관료들이 주장하는 바를 통해서 그러한 차이를 몸소 체득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극구 율곡과 우계를 조선의 대표적 유학자의 반열에 올려놓기 싫었을 것이다. 더 강해져야 할 왕권이 더 약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