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잠해진 문묘 종사 요청

현종실록의 율곡 선생 이야기

 

잠잠해진 문묘 종사 요청

문묘 종사 찬성과 반대 격론이 폭풍처럼 한바탕 휩쓸고 지나가자 조정은 잠시 조용해졌다. 율곡 선생 등의 문묘 종사를 그렇게 끊임없이 요청했던 서인 쪽 관리나 유생들도 이제는 임금의 고집스러운 태도에 질릴 정도가 되었다. 그것을 반대했던 관리와 유생들도 문제가 더 커지기를 원하지 않았다. 집권당은 서인 쪽이었기 때문이다.

임금도 사실은 갈 때까지 가보았으며, 서인 관료들을 더 이상 자극하면 자신에게도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건강도 좋지 않고, 자연재해에 역병도 심해지는 상황에서 광해군이 당했던 일, 즉 임금 자리에서 끌려 내려오는 일이 자신에게 또 일어나지 말란 법이 없다. 이정도 했으면 적당한 선에서 물러나는 것이 현명하다.

1664년, 현종 5년 2월 26일(음력). 조정은 이제 조금은 여유로워졌다.

임금은 오래전에 관직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간 스승들이 그리워졌다. 그래서 송시열과 송준길에게 사람을 보냈다. 송시열은 당시 좌찬성(左贊成)의 관직을 가지고 있었고, 송준길은 대사헌(大司憲)의 관직을 가지고 있었다. 임금의 서신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현종실록)

“경들이 전야에 물러가 있은 지도 어느덧 5년이 흘렀다. 내가 날마다 경들이 돌아오기 바라기를 목마른 자가 물을 찾는 것보다도 더 간절하게 바라고 있다. 그런데도 내 성의가 미쁨을 받지 못해 떠나가려는 마음을 돌리지 못하고 있으니, 잊지 못하는 이 마음을 어찌 밥 먹으면서도, 숨을 쉬면서도 잊겠는가?”

이어서 임금은 “지금 나라 형세는 하나도 믿을 것이 없다. 홍제(弘濟 : 널리 구제함)의 정책을 경들이 오기를 기다려 세워야겠다. 조정 내부도 갈기갈기 찢기어 서로 화합하기를 바라기 어렵게 되었으니 조정을 화합시킬 책임도 경들이 오기를 기다려서 맡겨야겠다.”라고 하며 다음과 같이 한양의 조정으로 빨리 올라오라고 당부를 하였다.

“과인(임금)의 잘못을 경들이 아니면 누가 바로잡겠는가? 무너지고 흐트러진 모든 일을 경들이 아니면 누가 일으키겠는가? 더구나 내가 계속 병을 앓아 오랜 기간 학문을 폐지했다가 이제 겨우 조금 나아서 처음으로 경연을 열었다. 그러나 경연 석상에서도 공부가 성취되지 않고 뭇 신하들을 대하여도 계옥(啓沃 : 솔직하고 충성스러운 발언)의 말이라곤 들을 수가 없다. 이 시기에 경들을 생각하는 마음이야말로 풍년 들기를 바라는 것보다 더하다.”

당시는 자주 흉년이 들었기 때문에 임금이 말하는 “풍년 들기를 바라는 것보다 더하다.”는 말은 이 세상 어떤 것보다도,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도 더 절실하게 바란다는 뜻이었다. 이어서 임금은 이렇게 마무리했다.

“경들도 만약 그것을 생각한다면 어찌 차마 못 잊어하는 생각이 없겠는가? 그렇지 않더라도 선왕(효종 임금)이 베푸신 지우(知遇 : 인격이나 재능을 알아서 잘 대우하는 일)의 은총은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봄이 이미 깊어 날씨도 따뜻하니 경들은 즉시 마음을 돌려 되도록 빨리 올라와 옆자리를 비워두고 기다리는 나의 뜻에 부응하라.”

그리고 임금은 부호군으로 지방에서 쉬고 있는 원로 관료 이유태(李惟泰)에게도 이렇게 연락을 하였다.

“생각하면 전년에 그대가 조정에 왔을 때, 마침 내 병세가 심상치 않아 하루도 조용한 기회를 갖지 못했다. 이것이 자네를 예우(禮遇)하는 데 흠결을 남기게 되었다. 그러나 그대를 못 잊어 잠 못 이루는 마음이야 뭐라고 다 말하겠는가? 지금 나라 일이 위태위태하여 안정될 기약이 없으니 만약 제현(諸賢 : 여러 현인)들이 바로잡고 돕지 않으면 어떻게 이 어려운 고비를 넘겨 쓰러지지 않게 하겠는가? 지금 나도 병이 조금 나아 처음으로 경연을 열었다. 경전의 뜻을 토론하고 심오한 의미를 개진하여 나의 학문을 도울 사람이 그대 말고 누가 있겠는가? 되도록 빨리 올라와 이 갈망을 풀어 달라.”

이렇게 구구 절절히 자신을 도와달라는 연락을 원로들에게 보냈다. 하지만 임금의 서한을 들고 이들에게 갔던 가주서 조시원(趙時瑗)이 돌아와, 3월 10일(음력) 우찬성 송시열, 대사헌 송준길, 호군 이유태가 모두 병을 이유로 사양하고 돌아오지 않았다고 보고했다.(현종실록) 혹시나 했는데 임금의 실망이 커졌다.

이해 10월 16일(음력), 희정당에서 임금은 여러 대신들을 불러 지난날 이유태가 올린 상소문 책자를 들고 정책을 논의하였다. 그 가운데 향약 관련 내용이 나오자 영의정 정태화가 이렇게 말했다.(현종실록 참조)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 또한 일찍이 이 법(향약 관련 법안)을 쉽사리 행할 수 없다 하였습니다.”

임금은 수긍하였다. 이어서 오가작통법, 사창제도, 과거제도 등을 논하였는데, 모두 검토한 뒤에 임금이 이렇게 말했다.

“향약과 오가작통법(五家統)은 본래 동일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이(李珥)의 말을 보면 그 당시에도 쉽게 시행할 수 없다고 하였다. 지금에 와서는 이이의 시대와 더욱 멀어졌으니 시행할 수 없겠다.”고 하였다.

율곡 선생은 인조시대에 고위관직에 올라 다방면에서 업무 경험을 쌓았고, 지방관으로 있을 때는 지역의 향약 보급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러한 경험을 활용하여 나중에 여러 저작물을 남겼기 때문에 후대 조정에서 여러 정책을 입안하거나 개선할 때 율곡 선생이 말한 내용을 적지 않게 참고하였다. 그래서 이날의 율곡 선생의 이야기가 나오게 된 것이다.

이해 11월 13일(음력) 임금에게 올라온 충청 감사 이익한의 상소문에도 군정의 폐단을 논하면서 또 율곡 선생의 이야기가 나왔다. 그는 어린아이에게 군역을 부과하는 폐단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율곡이 이전에 제안한 제도가 ‘치도(治道: 다스리는 방도)를 제대로 아는 탁견으로 실로 오늘날의 폐단을 구할 수 있는 묘약’이라고 칭찬하며 다음과 같이 율곡의 문장을 소개하였다.

“군적(軍籍)에 있어서는 실제로 군병 얻기를 힘쓰고 구차스럽게 한정(閑丁)을 충당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이가 15세가 안 된 어린이는 이름과 나이를 별도의 장부에다 기록하고 나이가 들기를 기다려 군적에 올리게 해야 합니다. 품팔이 하는 자나 구걸하는 자는 일체 삭제해야 합니다. 여러 고을의 군부(軍簿 : 군인 명부)에는 우선 예전 인원수를 그대로 두고 몇 명이 충당되지 않았다고만 기록합니다. 그다음, 수령에게 명하여 백성들을 휴식시켜 기르고 모여들게 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아 장정을 얻는 대로 보충하게 하되, 시한을 한정하지 말고 모두 충당하게 합니다. 그리고 6년마다 으레 반드시 군적을 정리하여 갑자기 소요를 일으키는 걱정이 없게 해야 합니다.”

이익한은 이러한 군적 제도를 묘당(廟堂: 비변사備邊司)을 통해 특별히 거행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율곡 등에 대한 문묘 종사 요청은 이후 현종 7년(1666년)까지도 뜸했다. 현종 7년 겨울, 11월 26일(음력)에 충청도 유생들이 문묘 배향을 요청하였으며, 12월 7일에는 성균관과 경기도 유생들 수백 명이 또 문묘 배향을 요청했다. 그 다음해인 현종 8년(1667년)에는 1월, 2월, 3월, 4월에 각각 전라도, 함경도 등 유생들이 율곡과 우계의 문묘 배향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현종은 이들 모두 거절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이후 유생들은 더 이상 적극적으로 현종에게 율곡 등의 문묘 종사 청원을 하지 않았다.

혹시나 새 임금은 율곡 선생과 우계선생의 문묘 종사에 대해서 좀 더 적극적으로 받아줄까 하고 노력했지만 그러한 노력이 허사라는 것을 안 것이다. 임금은 율곡과 우계를 존경한다고 하지만 문묘 종사까지 받아줄 생각은 없다는 것을 확인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