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이일분수와 이통기국

5. 이일분수와 이통기국

 

가. 이일분수

‘이일분수(理一分殊)’에서 ‘이일(理一)’이란 ‘리는 하나’라는 뜻이다. ‘분수(分殊)’란 ‘나뉘어서 다르게 된다’라는 의미다. 여기에서 한자 수(殊)자는 ‘죽일 수’, 혹은 ‘다를 수’인데, ‘죽이다’, ‘끊다’, ‘결심하다’, 그리고 ‘다르다’는 뜻이 있다. 참고로 한자어 ‘특수(特殊)’가 있는데 이 단어의 뜻은 ‘특별히 다르다’는 뜻이다. 이일분수는 그러므로, ‘리는 하나이지만 그것은 나뉘어서 다르게 된다’는 의미이다.
‘이일분수’라는 개념은 정이(程頤)가 북송의 유학자 장재의 『서명(西銘)』을 소개하는 말에서 처음 나온다. 정이는 이렇게 말했다.

“『서명』은 이일(理一)이면서 분수(分殊)임을 분명히 한다.”(『이정전서』권46)

장재가 지은 『서명』은 한자로 253자가 되는 매우 짧은 글이다. 하지만 거기에 담긴 내용은 매우 심오하여 송나라 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면 첫머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나는 하늘(乾)을 아버지(父)라 부르고, 땅(坤)을 어머니(母)라 부른다. 나는 여기에 조그만 존재로, 홀연히 살고 있다. 그러므로 천지에 가득찬 기운을 나는 몸(體)으로 삼고, 천지를 거느리는 이치를 나는 내 본성(性)으로 삼는다. 백성들은 나의 동포요, 만물은 나와 함께한다. 위대한 임금은 내 부모님의 맏아들이요, 대신은 그 아들의 가신이다.”(원문: 乾稱父, 坤稱母, 予玆藐焉, 乃混然中處. 故天地之塞, 吾其體, 天地之帥, 吾其性, 民吾同胞, 物吾與也. 大君者, 吾父母宗子, 其大臣, 宗子之家相也.)

주자는 『서명』에 대한 정이의 평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늘로 아버지를 삼고, 땅으로 어머니를 삼는 것은 생명이 있는 것들로서 그러지 아니함이 없다. 이것이 이른바 ‘이일(理一)’이다. 그러나 사람과 사물이 생길 때 혈맥이 있는 무리들이 각각 그 어버이를 어버이로 하고 각각 그 자식을 자식으로 하면 또한 그 분(分)이 어찌 다르지(殊) 않을 수 있겠는가?”(『주자대전』하, 권2: 以乾爲父, 以坤爲母, 有生之類, 無物不然, 所謂理一也. 而人物之生, 血脈之屬, 各親其親, 各子其子, 則其分, 亦安得而不殊哉?)

이것이 ‘이일분수’ 논의의 시작이었다.
이러한 ‘이일분수’에 대해서는 그동안 학자들 사이에는 다양한 논의가 전개되었다. 여기에서는 한국 유학계에서 발표된 저술(안유경의 『성리학이란 무엇인가』)과 일본 학계에서 발표된 저술(오하마 아키라의 『범주로 보는 주자학』)을 서로 비교하면서 ‘이일분수’에 대한 그들의 설명을 소개하기로 한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유교의 차등적 윤리관 : 차별성의 부각
2) 존재론: 이 세계의 보편성과 다양성을 설명하는 형이상학적 이론
3) 달라짐의 원인은 기의 차이 : 동일성의 부각
4) ‘이일 분수’는 이와 기의 문제이다
5) 분수(分殊)는 분수(分守)다 : 봉건적인 신분조직 유지의 근거

1,2,3은 ‘이일분수’에 대한 한국의 유학연구자 안유경의 설명이며, 4,5는 일본의 유학연구자 오하마 아키라(大浜晧)의 설명이다. 상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유교의 차등적 윤리관 : 차별성의 부각

안유경은 우선 이일분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이일분수는 리가 하나라는 측면과 리가 다양하다는 측면을 동시에 설명하는 이론이다. 리가 하나라는 측면에서 말한 것이 ‘이일’이고, 하나인 리가 나누어져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측면에서 말한 것이 ‘분수’이다.”(안유경, 130)

이러한 이일분수를 설명하기 위해서 그는 하늘에 떠 있는 하나의 달(‘이일’)과 그 달빛을 반사하며, 수많은 강물 위해서 동일하게 빛나는 달(‘분수’)의 예를 든다. 즉 현상세계 속에 존재하는 수많은 다양한 모습은 하나의 리에 근원한다는 말이다.(131쪽)
저자는 이어서 정이가 ‘이일분수’의 논리를 가지고 유가의 차등적 사랑을 설명하였음을 상기하였다. 즉 ‘사람이라면 마땅히 사랑해야 하는 것이 “이일”이고 대상에 따라 차별적으로 대하는 것이 “분수”라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도덕원칙 안에서는 모두 하나될 수 있으나 내 부모와 내 자식, 남의 부모와 남의 자식 사이에는 분명한 선후와 차등이 있다.……(정이는) 유가의 사랑이 묵자의 겸애설과 구분되는 차등의 원칙에 입각해 있음을 밝힌 것이다.’(안유경, 132) 이것이 이일분수가 처음 제시된 이유였다.
안유경의 설명에 따르면, ‘이일’은 부모와 자식에 대한 사랑과 같은 보편적 도덕원칙이다. 반면에 ‘분수’는 사랑이라는 도덕적 실천과정에서 내 부모와 남의 부모, 내 자식과 남의 자식 사이에 순서와 차등이 서로 다른 것을 의미한다.(안유경, 134-135쪽)
안유경은 이러한 차등적 윤리관 덕분에 가정을 포함한 국가 사회에서는 계급과 등급에 따른 상하의 질서가 존재하게 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분수’에 기반한 차등은 국가사회를 유지하는 질서로 이어진다.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아버지는 아버지답게, 자식은 자식답게, 형은 형답게, 동생은 동생답게 등등 ‘분수’가 신분의 등급으로 해석됨으로써 봉건적 신분 위계를 지탱하는 근거가 된다.(135쪽)
2) 존재론: 이 세계의 보편성과 다양성을 설명하는 형이상학적 이론

안유경은 시선을 ‘태극’으로 돌려서 이일분수에 근거하는 주자의 존재론, 즉 이 세계에 대한 인식론을 설명한다. 즉 이일분수에서 ‘이일’은 우주의 보편법칙이자 만물의 존재근거가 되는 근원적인 원리를 말한다. 그런데 ‘분수’는 각각의 사물마다 서로 다른 모습을 띠는 개별적인 원리를 말한다. 따라서 ‘분수’의 측면에서 보면 이 세계는 천차만별로 다양하지만, ‘이일’의 측면에서 보면 반드시 하나의 공통된 원리가 존재한다.
예를 들면 책상, 사슴, 사람이 각각 서로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은 ‘분수’다. 하지만 책상, 사람, 사슴을 관통하는 하나의 공통된 원리가 들어있는데 이것이 ‘이일’이다. 결국 전체적인 측면에서 이 세계의 통일성과 보편성을 말하려는 것이 ‘이일’이고, 개개의 구체적 사물의 측면에서 이 세계의 다양성과 개별성을 말하려는 것이 ‘분수’이다. 즉 우주 전체를 하나의 원리에서 본 것이 ‘이일’이고, 개개 사물의 다양성과 개별성을 본 것이 ‘분수’이다.(136-137쪽)

주자는 이러한 근원성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태극이라는 개념을 끌어들였다. 태극의 개념으로 이일과 분수의 관계를 설명한 것이다. 근원적인 하나의 태극과 개개 사물 속에 갖추어져 있는 태극의 관계를 통해서 이일과 분수를 설명하였는데 양자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하였다. 즉 태극은 하나이지만 태극이 들어 있는 만물은 다양하다. 그렇지만 근원적인 하나의 태극과 태극이 들어있는 만물 사이에는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다. 우주 만물 전체에도 하나의 태극기 있고, 각각의 사물에도 하나의 태극이 있다.(138쪽)
주자에게 있어서 태극은 바로 리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근원적인 태극과 수많은 개개 사물 속의 태극은 ‘이일’의 리(전자)와 ‘분수’의 리(후자)라고 할 수 있다. 즉 리가 하나라는 설명이 ‘이일’의 리이며, 리가 사물마다 서로 다르다는 것이 ‘분수’의 리이다. 달에 비유하면 이일의 리는 하늘에 떠 있는 하나의 달이고, ‘분수’의 리는 강, 호수 등 수많은 물결 위에 비추어지는 달이다.(140쪽)
주자가 이렇게 설명하는 이유는, 안유경에 따르면 “우리의 인식이 주로 현상세계의 다양한 차별성에만 주목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드러나는 개별적 모습만을 볼 수 있을 뿐이고 그 이면에 흐르는 보편적 원리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141쪽) 주자는 이일분수를 통해서 인간의 리(성)이 우주 본체, 즉 근원적인 하나의 리에서 유래하였음을 밝히고, 우주본체인 리와 인간에게 내재된 개별적인 리의 내용이 동일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우주 본체인 리가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모든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주자에게 이 이일분수의 논리는 맹자 성선론의 논리적 근거가 된 것이다.(안유경, 142쪽)

3) 달라짐의 원인은 기의 차이 : 동일성의 부각

그렇다면 만물이 서로 달라지는 원인, 즉 ‘분수’의 원인은 무엇인가? 주자에 따르면 이렇게 분수가 생기는 것은 기 혹은 기질의 차이 때문이다. 기의 다양성 때문에 사물들 사이에서 ‘분수’가 발생한다.(안유경, 142쪽)
사물이 생겨날 때는 기가 모여서 형테를 이루고 이어서 리가 부여된다. 기가 모여 형체가 이루어질 때 맑은 기를 얻은 것은 사람이 되고, 탁한 기를 얻은 것은 사물이 된다. 아울러 사람도 맑은 기를 얻느냐 탁한 기를 얻느냐에 따라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 어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나누어 진다. 결국 삼라만상, 모든 인간과 사물은 하늘로부터 동일한 리를 부여받지만, 기의 차이에 따라 리가 달라질 수 있다. 책상‧사슴‧사람의 차이에 따라 책상의 리, 사슴의 리, 사람의 리가 서로 달라지는 것이다. 이것이 이일분수이다. 이일의 측면에서는 모두 동일한 하나의 리이지만, 분수의 측면에서는 리가 서로 다른 것이다.(144쪽)
주자는 인간의 본성(性)이 바로 하늘의 이치(理)라고 말했다. ‘성즉리(性卽理)’가 바로 그것이다. 리란 착한 것이다. 그러므로 맹자가 성선설로 주장하였듯이 인간은 누구나 착하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인간의 선한 본성이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내재되어 있음을 알지 못한다. 사람들 사이에는 나쁜 사람, 어질지 못한 사람도 있지만 인간은 누구에게나 인의예지라는 착한 본성이 온전히 내재되어 있다. 이 선한 본성을 회복하면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 주자가 이일분수를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간은 누구나 같고, 누구나 착하다는 것이다.(145-146쪽)

이상은 한국의 유학연구자가 설명하는 주자의 ‘이일분수’설이다. 다음에 소개할 내용은 똑같은 ‘이일분수’를 일본의 유학연구자 오하마 아키라(大浜晧, 1904-1987)가 설명하는 내용이다. 오하마는 중국철학연구자로 1934년에 규슈(九州)제국대학 법문학부 중국철학과를 졸업하고, 1939년에 동경제국대학 대학원을 수료하였으며, 1941년에 타이베이제국대학에서 교수를 역임하였다. 1948년 이후에는 나고야 대학 문학부에서 교수로 있다가 1968년에 정년 퇴임하였다. 그가 발표한 주요 저술은 다음과 같다.

• 『중국고대의 논리(中国古代の論理)『, 東京大学出版会, 1959
• 『노자의 철학(老子の哲学)『, 勁草書房, 1962
• 『장자의 철학(荘子の哲学)『, 勁草書房, 1966
• 『중국적 사유의 전통(中国的思惟の伝統『, 勁草書房, 1969
• 『사기와 사통(中国・歴史・運命 史記と史通)『, 勁草書房, 1975
• 『중국고대사상론(中国古代思想論)『, 勁草書房, 1977
• 『주자의 철학(朱子の哲学)『, 東京大学出版会, 1983
• 『중국의 역사관(史記と史通の世界 中国の歴史観)『, 東方書店, 1992

4) ‘이일 분수’는 이와 기의 문제이다

오하마는 ‘이일분수’에 대한 설명을 시작하면서 이일분수는 리와 기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고 지적하였다.(오하마, 148) 앞서 소개한 안유경의 설명은 ‘이일분수는 리가 하나라는 측면과 리가 다양하다는 측면을 동시에 설명하는 이론이다’라고 하여 리와 기의 관계가 아니라, 하나의 리와 다양한 리를 동시에 설명하는 이론이라고 하여 리를 중시한 것과는 자못 입장이 다르다.
오하마는 이어서 ‘이일’이라고 하는 것은 리의 일관성, 공통성, 그리고 보편성이며, ‘분수’라고 하는 것은 사물 각각의 신분과 역할에서 차이가 생기는 것을 말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주자는 이 이일분수를 자신의 이기 철학에 포함하여 이해하였다는 것이다.(149쪽) 주자는 이기론의 하나로 이일분수를 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오하마의 주장에 따르면, 천지 만물을 종합하여 그 궁극에 있는 것, 곧 근원에 있는 것은 보편적인, 하나의 리이다. 이러한 리가 사람에 내재할 때에는 사람마다 각각 하나의 리를 갖는다. 이때 각 사람이 각각 가진 리는 그 신분, 입장에 따라 다르지만 근원으로서의 리는 동일하다. 하지만 각 사람에게 리는 기와 함께 존재한다. 이일분수는 형이상과 형이하의 문제이며, 따라서 기와 리의 문제이다.(149쪽)
그는 왜 이일분수를 이기의 문제라고 보는 것일까? 오하마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천지와 사람은 동일한 기와 동일한 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천지의 작용과 사람의 작용은 동일하고, 천지와 사람간에 차이는 없다. 다만 사람에게는 사욕이 있기 때문에 천지와 사람이 다르게 되며, 천지의 작용과 사람의 작용도 다르게 된다. 사욕이 없는 성인만이 천지와 동일한 리, 그리고 동일한 기를 가지고 있다. 여기에서 보통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천지와 다른 차이점 즉 눈에 보이는 ‘분(分)’의 차이는 서로 다른 기의 작용에 의한 것이다.(오하마, 150-151쪽)
주자는 ‘이일’을 체(體, 본체), ‘분수’를 용(用, 작용)으로 인식했다. 체는 형이상(形而上)의 본체(體)를 말하며, 용은 형이하(形而下)의 ‘발용’(用, 작용)을 말한다. 성인(聖人)의 경우는 체와 용을 겸한다.(말하자면, 성인은 도덕적으로 완벽하기 때문에 현실에서의 행동이 천리(하늘에서 받은 리理) 그것과 똑같기 때문이다.) 즉 ‘이일’이지만 또 ‘분수’이기도 하다. 성인은 유일 절대의 리를 가지고 있으면서 때와 장소에 대응하여 방도를 달리하고 사고를 달리해도 리에 어긋나지 않는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과 사물의 무리는 리가 본래 하나였지만, 그 ‘분(分)’ 다르지 않은 적이 없었다. 즉 ‘분수(分殊)’로서 항상 달랐다.(152쪽)
오하마의 주장에 따르면, 주자는 ‘이일분수’를 리와 기, 형이상과 형이하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도덕과 연관시켰다. 어버이를 친히 여기는 사랑의 리를 백성에게 끼치게 하고 사물에 미치도록 하는 것은 ‘이일’이다. 하지만 친척과 친척이 아닌 사람, 가까운 사람과 먼 사람을 차이 나게 대하는 것은 ‘분수’이다.(153쪽) 분수(分殊)란 기 작용이 서로 다른 것이다. 리를 받은 것이 서로 다른 것이다. 그리고 도덕적 실천에서 순서, 차등, 얕고 깊음이 서로 다른 것을 의미한다.(154쪽)
오하마의 리와 분수에 대한 서론적인 설명은 여기까지이다. 그는 이기론을 동원하여 이일분수를 설명하고자 하였다. 즉 이일은 리요, 분수는 기라는 논리다. 엄밀히 말하면 ‘이일’은 리의 체요, ‘분수’는 기의 용이다. 이러한 설명방식은 앞서 살펴본 안유경의 설명과는 다르다. 오하마가 이렇게 설명을 시작한 것은 다음에 소개할 그의 ‘분수론(分殊論)’을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5) 분수(分殊)는 분수(分守)다 : 봉건적인 신분조직 유지의 근거

오하마는 ‘이일분수’의 문제를 ‘안분(安分)’의 문제로 바꿔서 설명한다.

“초목은 산에서 자라니 이것이 초목의 본분이다.(『주자어류』하, 권95. 「程子之書1」: 譬如一草木合在山上, 此是本分.) 초목이 있을 수 있는 장소에 있는 것이 본분이고, 본래의 구별이다. ‘분(分)’을 본분의 의미로 해석할 때, ‘분수(分殊)’는 사물의 본분이 각각 다르다는 말이 된다. 자연계에서는 이것이 분수이다.”(오하마, 155쪽)

오하마는 왜 갑자기 ‘이일분수’의 문제에서 ‘본분(本分, 본래의 직분에 따른 책임이나 의무)’의 문제를 가져왔을까? ‘본분’은 안분(安分, 자신의 몫에 편안하게 느낌)의 문제로 이어지며 그것은 또 ‘분수(分守)를 안다’는 관념으로 이어진다. 이일분수의 ‘분수(分殊)’는 리는 하나이지만 그것이 나뉘어져 서로 다르게 된다는 의미인데, 나누어져 다르게 된다(分殊)는 것은 어떻게 ‘본분(本分)’과 관련되는 것일까?
오하마의 설명에 따르면, 천분(天分)은 곧 천리(天理)이다. 아버지는 그 아버지의 분수에 편안하고, 자식은 그 자식의 분수에 편안하고, 임금은 그 임금의 분수에 편안하고, 신하는 그 신하의 분수에 편안하면 어찌 사사로울 수 있겠는가? 이것은 정자의 말이다. 이러한 말을 빌려서 오하마는, 주자는 분수(分殊)를 만물의 각각 본분(本分)에 있어서 서로 다름이라고 인식하였다고 한다. 아울러 주자에게는 리가 ‘봉건적 신분 위계 조직을 지탱하는 근거’(오하마, 156)라고 하였다. 나아가 오하마는 주자의 정치사상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주자는) 상하 질서가 존재하는 국가 관계에서 군신 관계를 최고로 중시한다. 군주의 마음을 천하의 가장 근본으로 삼는 것은 왜 그런가? 천하의 일은 천변만화(千變萬化, 수없이 변화)하여 그 실마리가 무궁하지만, 한결같이 군주의 마음에 근본하는 것이 곧 자연의 리이기 때문이다. ……군주의 절대성이 자연의 리이다. 임금과 신하‧백성의 구분을 무너뜨리는 것은 자연의 리를 거스름이 된다. 따라서 군신의 ‘분(分)’은 엄함으로써 주를 삼고, 조정의 예(禮)는 경(敬)으로써 주를 삼는다. 군신의 ‘분’은 털끝만한 혼란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이 아주 중요하다.”(156쪽)

여기에서 ‘분(分)’은 이제 ‘구분’의 의미로 사용된다. 오하마는 ‘이일분수’에서 ‘나뉨’의 뜻이 있던 ‘분(分)’을 신분상의 구분으로 해석하여, 그것이 군주의 절대성이라고 하는 자연의 리를 거슬리지 않아야 한다는 뜻으로 주자가 해석하였음을 지적하였다.(오하마, 156) 이러한 지적의 근거가 되는 주자의 말은 사실상 ‘이일분수’의 문제와는 관련이 없는 것들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오하마는 이일분수와는 관련이 없는 주자 사상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안분’의 문제를 논하고 있다.
‘분수(分殊)’의 문제는 나아가 예와 관련하여 국가사회의 질서 문제로 발전한다. 오하마에 따르면 예는 상하‧친소 등 자연히 나누어진 바에서 만들어지며, 인간성의 자연스러움에 따르는 것으로 외적인 강제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만물은 각각 있어야 할 자리에 있을 때 각각의 사물은 자연‧필연의 리를 얻는 것이라고 하였다.(157-158쪽)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한다.
“상하의 분수는 천리의 자연이다.(『주자대전』중,권59: 上下名分, 此是天理自然) 말하자면 분수(名分)는 자연‧필연의 리이고, 분수를 지키는 것은 예이다. 예는 타고난 인간 본성의 자연에서 나온다. 자연‧필연이고 타고난 인간 본성에 의거한 것이기 때문에 예를 어지럽힌다거나 그 경계를 넘어서는 안 된다. 예를 어지럽히고 경계를 넘어서는 것은 불의이다. 거기에는 화합도 없고 아름다움도 없다. 천리와 자연에는 인위적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엄함이 있다. 그러나 엄함의 가운데 아름다움이 있다.”(오하마, 159) 이것이 바로 주자 정치사상의 기본이었다고 오하마는 ‘이일분수’에 대한 설명의 결론을 지었다.

일본 학자 오하마의 이일분수에 대한 설명은, 한국의 학자 안유경의 설명과 비교해보면 서로 많이 다르다. 특히 오하마가 ‘분수(分殊)’을 ‘안분(安分)’의 문제로 환원하여 사회의 각 계층이 자기의 분수를 지킨다는 문제로 해석한 것은 다소 논리의 비약도 느껴진다. 하지만 리는 하나이지만 나뉘어서 다르게 된다는 것은 결국 사회 내부에 존재하는 다름과 차별, 그리고 계급적‧계층적인 문제와도 결부되지 않을 수 없다. 이 때문에 오하마의 주장에 수긍되는 점도 있다. 아마도 오하마는 일본 사회가 주자학을 받아들여서 일본화시키는 과정에서 경험한 사상적 축적을 ‘이일분수’의 문제에 대입시켜 설명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여기에서는 상세한 논의를 할 수 없지만 ‘안분’의 논의에는 고문사학파 오규 소라이(荻生徂徠, 1666~1728)의 사상적 영향이 감지되기 때문이다. ‘이일분수’의 문제는 이렇게 한일 유교사상사의 차별적 발전하고도 관련이 있어 흥미롭다.

나. 이통기국

‘이통기국(理通氣局)’이란 율곡이 제창한 개념이다. 이 말의 뜻은 ‘리는 통하고 기는 국한된다’는 것이다. 리는 원리적인 것이기 때문에 널리 통용이 되지만 기는 물질적인 것이라서 시간과 장소에 제약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은 중국의 정이가 제창한 ‘이일분수(理一分殊)’라는 개념을 율곡 자신의 용어로 정리한 것이라고 한다.(임옥균, 120쪽)
율곡은 ‘이일분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정의한 바 있다.(『율곡전서』권10, 「답성호원」)

“무릇 리는 하나일 뿐이다. 그것은 본래 치우침과 바름(偏正), 통함과 막힘(通塞), 맑음과 탁함(淸濁), 순수함과 잡박함(粹駁)등의 구분이 없다. 그러나 리를 등에 태운 기는 올랐다 내렸다 또 높이 오르면서 지금까지 쉬는 일이 없었다. 그것은 뒤섞여 고르지 못하나, 천지 만물을 낳는다. 어떤 것은 바르고 어떤 것은 치우치며, 어떤 것은 통하고 어떤 것은 막히며, 어떤 것은 맑고 어떤 것은 탁하며, 어떤 것은 순수하고 어떤 것은 잡스럽다.”(원문: 夫理, 一而已矣, 本無偏正通塞淸濁粹駁之異, 而所乘之氣, 升降飛揚, 未嘗止息, 雜糅參差, 是生天地萬物, 而或正或偏, 或通或塞, 或淸或濁, 或粹或駁焉.)

이 부분은 율곡이 리와 기를 소개하는 부분이다. 리는 하나이면서 어떤 구분이 없으나 기는 온갖 모습으로 다양하다. 하지만 기는 리를 태우고 부지런이 움직이며 천지 만물을 낳는다. 율곡은 리의 존재를 인정하기는 하지만 기를 중시한다. 인용문에는 이러한 입장이 잘 드러나 있다. 계속해서 율곡은 ‘이일분수’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한다.

”리는 비록 하나이지만 이미 기에 올라탔기 때문에 그 나뉨(分)이 만 가지로 다르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에서는 하늘과 땅의 리가 되고, 만물에서는 만물의 리가 되며, 사람에게서는 사람의 리가 된다. 그렇다면 이렇게 만 가지로 다양한 것은 기가 행하는 바이다. 비록 기의 행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리가 있어 주재(主宰)하는 것이니, 만 가지로 다양한 이유는 역시 리가 마땅히 그러한 것이다. 리가 그렇지 않은데 기만 홀로 그런 것은 아니다.“(원문: 理雖一, 而旣乘於氣, 則其分萬殊, 故在天地而爲天地之理, 在萬物而爲萬物之理, 在吾人而爲吾人之理, 然則參差不齊者, 氣之所爲也. 雖曰氣之所爲, 而必有理爲之主宰, 則其所以參差不齊者, 亦是理當如此, 非理不如此而氣獨如此也.)

‘이일분수’를 하나의 리와 다양한 리로 나누어 설명하는 방식은 앞서 소개한 한국의 유학연구자 안유경의 설명과 유사하다. 율곡은 기를 중시하는 유학자이기는 하지만 ‘이일분수’를 리와 기의 관계로 설명하고자 하는 일본학자 오하마하고는 확실히 설명 방식이 다르다. 기를 중시하는 율곡이 리의 역할을 주목하여 강조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계속해서 율곡은 이렇게 말한다.

“천지와 사람과 만물에는 비록 각각 그 리가 있는데, 천지의 리가 곧 만물의 리이요, 만물의 리가 곧 사람의 리이다. 이것이 이른바 “통체일태극(統體一太極, 모든 사물의 공통된 근원으로서의 태극)”이란 것이다. 비록 하나의 리라고 하더라도 사람의 본성(性)이 만물의 본성이 아니며, 개의 본성이 소의 본성이 아니다. 이것이 이른바 ‘각일기성(各一其性, 각각 그 본성을 하나로 가짐)’이다.”(天地人物, 雖各有其理, 而天地之理, 卽萬物之理, 萬物之理, 卽吾人之理也, 此所謂統體一太極也. 雖曰一理, 而人之性, 非物之性, 犬之性, 非牛之性, 此所謂各一其性者也.)

하나의 커다란 만물의 리가 있고, 그 리는 나뉘어서 각기 다른 사물의 본성을 구성한다. 즉 각각 하나의 본성을 가지고 있다. 하나의 전체적인 리가 있고 개별 사물에 그 사물의 리가 내포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역시 다양한 모습의 기 보다는 다양하게 나뉘어진 리에 주목한 설명이라고 할 수 있다.

‘이통기국’에 대해서 율곡은 지인에게 보낸 서신에서 이렇게 고백한 적이 있다.

“‘이통기국(理通氣局)’ 네 글자는 내가 발견하여 얻은 것이라고 여기면서도 또 내 자신이 독서가 많지 않아 벌써 이런 말을 다른 사람이 한 것을 미쳐 보지 못하였나 싶기도 합니다.”(『율곡전서』권10, 답성호원)

‘이통기국(理通氣局)’이란 단어를 중국에서 유명한 검색 사이트 바이두(百度, https://www.baidu.com)에서 검색해보면 율곡의 ‘이통기국’ 자료 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러니 실질적으로 이통기국의 사상은 율곡의 독자적인 사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사상이 완전히 독창적인 것은 아니다. 이미 중국에서 송나라 시대 성리학자들이 이기론을 제시하면서 이와 유사한 개념을 언급하였기 때문이다. 율곡이 이야기하듯이 율곡은 이러한 표현을 처음 발견한 것일 뿐이다.

먼저 ‘이통(理通)’에 대해서 살펴보면 율곡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리가 통한다는 것(理通)’은 무엇인가? 리는 본말(本末, 처음과 끝)이 없다. 선후(先後, 앞과 뒤)도 없다. 본말도 없고 선후도 없으므로 아직 반응하지 않았을 때도 ‘먼저’가 아니며, 이미 반응했을 때에도 ‘뒤’가 아니다.【이것은 정자程子의 말이다.】 그러므로 (리가) 기를 타고 운행하여 천태만상으로 매우 다양하다. 하지만 그 본연의 묘리(妙理)는 없는 곳이 없다.(理通者, 何謂也? 理者, 無本末也, 無先後也. 無本末無先後, 故未應不是先, 已應不是後.【程子說】 是故, 乘氣流行, 參差不齊, 而其本然之妙, 無乎不在.)

원문의 ‘삼차부제(參差不齊)’는 ‘길고 짧고 들쭉날쭉하여 가지런하지 않음’, 즉 다양함, 다채로움을 표현한 말이다. ‘리’라는 존재는 매우 다양한 현상으로 발현되며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곳이 없다는 말이다. 모든 곳에나 통하는 것이 리라는 말이다. 율곡은 리가 모든 곳에 통한다는 점에 대해서 계속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기가 치우치면 리도 역시 치우치게 된다. 하지만 치우친 것은 리가 아니라 기이다. 기가 온전하면 리도 역시 온전하다. 하지만 온전한 것은 리가 아니라 기이다. 맑고 탁하고(淸濁), 순수하고 잡스러운(粹駁) 것과 찌꺼기(糟粕)·재(煨燼)·거름(糞壤)·오물(汙穢) 가운데도 리가 있지 않은 곳은 없다. 리는 각각 그것들의 본성(性)이 되지만 리 본연의 묘함(妙)은 손상되지 않고 그대로이다. 이것을 말하여 리가 통한다고 하는 것이다.(氣之偏則理亦偏, 而所偏非理也, 氣也, 氣之全則理亦全, 而所全非理也, 氣也. 至於淸濁粹駁, 糟粕煨燼, 糞壤汚穢之中, 理無所不在, 各爲其性, 而其本然之妙, 則不害其自若也, 此之謂理之通也.)

율곡이 보기에 변화하는 주체, 즉 치우치거나 온전하거나 탁하거나 순수하거나 하는 등 다양성을 보이는 ‘주체’는 어디까지나 기이다. 하지만 기가 주체라고 해서 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리는 묘하게 손상되지 않으면서 모든 기의 작용에서 ‘본성(性)’이 되어 존재하는 것이다.
또 율곡은 ‘기국(氣局)’, 즉 ‘기는 국한된다’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기가 국한된다(氣局)’는 것은 무엇인가? 기는 이미 형적(形迹)에 간섭하기 때문에, 본말이 있고 선후가 있다. 기의 본체는 담일청허(湛一淸虛, 맑고 한데 어울려 있으면서 텅 비어 있음)할 뿐이다. 어찌 일찍이 (처음부터) 찌꺼기‧재·거름·오물 등의 기가 있겠는가? 오직 그것이 오르거나 내리고, 혹은 높이 날거나 하여 조금도 쉬지 않으므로 천태만상으로 다양하게 만 가지 변화가 생기는 것이다.”(氣局者, 何謂也? 氣已涉形迹, 故有本末也, 有先後也. 氣之本則湛一淸虛而已, 曷嘗有糟粕煨燼糞壤汚穢之氣哉? 惟其升降飛揚, 未嘗止息, 故參差不齊, 而萬變生焉.)

여기서는 변화하는 기에 대해서 설명했다. 만 가지 변화가 생기는 것은 기가 쉴 틈 없이 움직이고 변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의 본체는 맑고 텅 비어있는 것이다. 거기에 거름이나 오물 등의 기가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움직이고 변화하는 가운데 거름이나 오물이 형성되는 것이다. 이어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여기에서 기가 운행할 때에 그 본연을 잃지 않는 것도 있고, 그 본연을 잃어버리는 것도 있다. 이미 그 본연을 잃어버리면 기의 본연은 이미 있는 데가 없다. 치우친 것은 치우친 기며, 온전한 기가 아니다. 맑은 것은 맑은 기며, 이미 탁한 기가 아니다. 찌꺼기나 재는 찌꺼기나 재의 기이지, 맑고 하나이면서 텅 비어있는 그런 기가 아니다. 이는 리가 만물 가운데서 그 본연의 묘함이 있지 않는 곳이 없는 것과 다르다. 이것이 이른바 기는 국한된다는 것이다.”(원문:於是氣之流行也, 有不失其本然者, 有失其本然者, 旣失其本然, 則氣之本然者, 已無所在, 偏者, 偏氣也, 非全氣也, 淸者, 淸氣也, 非濁氣也, 糟粕煨燼, 糟粕煨燼之氣也, 非湛一淸虛之氣也, 非若理之於萬物, 本然之妙, 無乎不在也, 此所謂氣之局也.)

기는 한번 생성하여 변화되면 뒤로 돌아갈 수 없다. 이미 자기의 기질이 형성되고 그 본연의 모습을 잃어버리는 경우도 있다. 또 기는 리와 달리 모든 사물에 존재하지 않고 각각의 사물에 국한되어서 존재한다. 이것이 기가 국한된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통기국’의 사상은 율곡이 화담 서경덕(徐敬德, 1489년~1546년)의 유기론적(唯氣論的) 입장을 비판할 때 제시하였다. 서경덕은 오직 ‘기’만을 중시하는 유학자였다. 그는 리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리가 독자적으로 기능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았다.
이러한 서경덕의 주장에 대해서 율곡은 그가 ‘한 모퉁이만 본 사람(見一隅者)’라 비판하고 ‘이통기국(理通氣局)’을 들어 반박하였다. 기는 사물이나 현상마다 국한되어 개별적으로 존재하지만, 리는 만물 모든 곳에 통한다는 것이다. 서경덕은 ‘태허의 기(太虛之氣)’가 궁극적인 존재라고 하였다. 그러나 율곡은 ‘태극의 리(太極之理)’를 궁극적인 존재로 보았다.
율곡은 퇴계와 같이 리와 기를 엄격하게 구별하고, 리가 기보다 우월하다는 주장을 하였다. 그리고 리와 기는 결코 혼동할 수 없는 것이며, 리는 기의 중추요 근저(根柢)이며 주재(主宰)라고 보았다. 아울러 리의 본체는 통일적 원리이지만 그것은 모든 사건과 사물에서 운행되는 것이요, 삼라만상이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
다만 율곡이 퇴계와 다른 점은 퇴계가 리와 기를 각각 주체적인 것으로 보고 그것들이 각각 실질적인 동력으로 발용한다는 호발설을 주창한 데 대해, 율곡은 리와 기가 서로 떨어지거나 합하는 것도 없고, 어느 것이 먼저이고 어느 것이 나중이고 하는 것도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기가 발동을 하면 리는 거기에 편승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이 율곡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이다.

다. 이기지묘

앞서 소개한 ‘이통기국(理通氣局)’을 율곡이 독자적으로 제창한 개념이라고 하였는데, ‘이기지묘(理氣之妙)’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 두 개념은 모두 율곡 이기론의 대표적인 사상이다.
율곡 철학 연구자인 송석구는 ‘이기지묘’에 대해서 이렇게 소개하였다.

“이기지묘는 율곡에게 있어서 이기론의 궁극점이다. 그는 형이상자(形而上者)인 무형무위(無形無爲)의 리와 형이하자(形而下者)인 유형유위(有形有爲)의 기가 혼융무간(渾融無間, 서로 혼합되고 융합하여 간격이 없음)한 관계에 있으면서 그들 각자들의 기능을 발휘함으로써 존재가 현현(顯現, 드러남)한다고 보았다. 우주의 삼라만상이 이기의 조화가 아닌 것이 없다. 이 자연세계는 유형유위의 기화(氣化)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 기화의 주재는 언제나 리와 기에 승(乘, 편승)함으로써 존재는 나타나는 것이다.”(송석구, 115)

이 세계의 삼라만상은 리와 기의 조화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이다. 어느 한 쪽만의 역할이 아니다. 그리고 어느 한쪽만이 주체가 아니다. 묘하게 혼융무간(渾融無間) 리와 기가 각자의 기능을 발휘함으로써 생겨나는 것이다. 이것이 이기의 묘함이다.
율곡은 이러한 리와 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율곡전서』권10, 「답성호원」)

“리라는 것은 기를 주재(主宰)한다. 기라는 것은 리가 편승하는 것이다. 리가 아니면 기가 뿌리를 박을 데가 없다. 기가 아니면 리가 의지할 데가 없다. (리와 기는) 이미 두 물건도 아니고, 또한 한 물건도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이면서 둘이다. 두 물건이 아니기 때문에 둘이면서 하나이다.”(원문: 夫理者, 氣之主宰也, 氣者, 理之所乘也, 非理則氣無所根柢, 非氣則理無所依著, 旣非二物, 又非一物, 非一物, 故一而二, 非二物, 故二而一也.)

리와 기는 둘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둘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리는 기를 주재하고 기는 리를 편승하도록 한다. 율곡은 불교적인 표현으로 기묘하게 리와 기의 관계를 소개하고 있는데, 결국 리와 기는 하나의 몸체에 내재한 두 개의 개체라는 뜻이다. 이어서 그는 이렇게 리와 기의 묘합(妙合, 묘한 결합)을 설명한다.

“한 물건이 아니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리와 기가 비록 서로 떠나지 못한다 하더라도 묘합(妙合)한 그 가운데서 리는 본래 리요, 기는 본래 기이니, 서로 뒤섞이지 아니하므로 한 물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두 물건이 아니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비록 리는 본래 리요, 기는 본래 기라고 하더라도 서로 간의 구별이 모호하여 선후도 없고, 이합(離合)도 없어서 그것이 두 물건이 됨을 볼 수 없기 때문에 두 물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動)과 정(靜)이 끝이 없고, 음(陰)과 양(陽)이 시작이 없다. 리에 처음이 없기 때문에 기도 역시 처음이 없는 것이다.(원문: 非一物者, 何謂也? 理氣雖相離不得, 而妙合之中, 理自理, 氣自氣, 不相挾雜, 故非一物也. 非二物者, 何謂也? 雖曰理自理氣自氣, 而渾淪無閒, 無先後無離合, 不見其爲二物, 故非二物也. 是故, 動靜無端, 陰陽無始, 理無始, 故氣亦無始也.)

이러한 율곡의 ‘이기지묘’ 사상에 대해서 율곡학 연구자 황의동은 이렇게 그 의미를 평가한 바 있다.

”이 세상에 수많은 가치들, 주의나 주장들은 서로 대립한다. 서로 대립되는 두 가지 가치는 모순관계가 아니라 상호 보완관계다. 나와 다르다고 싸우거나 갈등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부족한 점을 보완해주는 고마운 존재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 나와 마주 서 있는 상대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이기지묘는 사랑의 철학이며 평화와 조화의 철학이다. 상대의 존재를 인정할 때 대화는 시작되고 소통이 가능하다. 대립과 반목의 갈등을 이기지묘의 철학으로 풀어야한다.“(황의동, 72-73)

이러한 황의동의 평가는 다소 논리 비약적인 측면이 있으나 동양철학에서 주기론과 주리론의 사상사적 대립을 염두에 둔다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평가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현실의 영역으로 확대하면 ‘이기지묘’의 사상은 단순한 이기론의 논쟁이 아니라 현실의 분쟁을 극복하고 화합하게 할 수 있는 화쟁(和爭)의 사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