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호와 김형찬의 저술 비교2 – 저작 의도와 주장

#4. 이광호와 김형찬의 저술 비교2 – 저작 의도와 주장

1.4 저자는 왜 이 책을 썼는가?

 

이광호의 『퇴계와 율곡, 생각을 다투다』에서 정리된 저자의 생각을 들을 수 있는 부분은 머리말과 해제, 그리고 맺음말(<퇴계와 율곡, 생각을 다투다>를 끝내며) 부분이다. 머리말에서 저자는 퇴계와 율곡이 서로, 사상적으로 차이가 있다는 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이 두 사람은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이 다르고, 서로 꿈꾸는 세계가 다르며 그에 따라 학문을 이해하는 관점과 방법도 달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퇴계가 하늘을 지향한다면 율곡은 땅을 지향하며, 퇴계가 이상을 지향한다면 율곡은 현실을 지향한다. 퇴계가 인간의 내면성을 중시한다면 율곡은 외적인 성취를 중시한다. 하늘과 땅, 이상과 현실, 내면과 외면은 서로 멀리 떨어진 것 같지만 인간의 삶에 어느 하나도 없어서는 안 된다.”(5쪽)
이광호의 이러한 지적은 퇴계와 율곡을 ‘다름’의 입장에서 주목한 것이다. 앞서 이 글의 머리말에서 이동준이 지적한 율곡과 퇴계의 차이점을 기억해보면, 퇴계는 리와 기를 이원적으로 보았는데 율곡은 기를 중심에 두고 ‘이기의 묘’라고 하여 리의 존재도 인정하였다. 퇴계와 율곡이 이기론에서 볼 때 서로 완전히 대척점에 서지는 않았다. 다만 현실의 정치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개혁을 주장하는 율곡과는 달리 퇴계는 큰 관심을 갖지 않고, 자신의 도덕적 수양과 학문에 몰두하였다. 이러한 차이점을 이광호는 매우 큰 것으로 평가하고, 퇴계와 율곡의 지향이 서로 완전히 달랐다고 지적한 것이다.
이러한 ‘대립적인’ 지적은 해제의 첫머리에도 등장한다.
“두 분이 주고받은 편지의 질문 항목(문목問目)과 답변을 읽고 번역하며 두 분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생각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두 분이 세상을 떠난 뒤 이 나라는 정치적으로나 학문적으로 당파가 나누어져 치열한 갈등과 대립이 전개되었다. 그 원인이 두 분 사상의 차이 때문인가? 나는 두 분이 주고받은 시와 편지를 읽으며 두 분의 생각의 차이가 심각할 정도로 다르다는 사실에 놀랐다. 같은 유학자이면서 어쩌면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12쪽)
‘퇴계와 율곡, 생각을 다투다’라는 책 제목처럼 저자는 두 학자의 차이점을 주목한다. 그런데 저자의 말을 곰곰이 살펴보면 퇴계와 율곡의 다른 점이 너무도 근본적이고도 본질적이다. 이러한 차이점을 전제하고 저자는 이 책의 저술한 동기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두 분이 주고받은 시와 편지를 왜 아직까지 한 번도 함께 모아 편집한 일이 없었는지 그 이유를 알기 어렵다. 두 분의 시와 편지를 모두 모아 번역하고, 거기에 퇴계가 사망한 뒤 율곡이 지은 만사와 제문도 함께 편집하여 번역하였다. 편지에서 주고받은 문답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자료도 상당수 추가하였다.”(9쪽)
해제에서도 퇴계와 율곡의 문답자료를 한 곳에 모은 이유를 그는 이렇게 소개했다.
“(퇴계와 율곡이) 주고받은 시를 찾아서 장리하고 주고받은 편지를 모아서 순서대로 정리하니 한 권의 책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수의 시를 주고받았는지, 몇 통의 편지를 주고받았는지, 그리고 몇 번이나 만났는지도 분명하지는 않다. 퇴계의 문집에는 자료가 비교적 자세하게 남아있는 반면 율곡의 문집에 남아있는 자료는 소략하다. 편집과정에서 의도적으로 삭제되고 왜곡된 부분도 있는 듯하여 아쉬웠다. 두 학파의 대립의식이 고조된 상황에서 편집되었기 때문에 그대로 싣기에 상당한 부담을 느껴 삭제한 것이 있는 듯하다.”(14-15쪽)
저자는 말미에 자신은 퇴계의 삶과 학문에 대한 연구를 중심으로 유학에 대한 이해를 축적해왔는데, 이것이 혹시 한계가 되어 율곡의 사상을 조명하는데 제약이 될까 염려되기도 한다고 하였다.
정리하자면 이광호의 『퇴계와 율곡, 생각을 다투다』는 퇴계의 입장에서 정리한 ‘퇴계와 율곡의 문답서’라고 할 수 있다. 율곡을 지지하는 후대의 학자들이 외면한 문답 자료를 새롭게 제시하였으며 율곡과 관련된 퇴계의 사상을 좀 더 심도 있게 살펴볼 수 있는 서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김형찬의 『율곡이 묻고 퇴계가 답하다』는 다소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는 퇴계와 율곡이 주고받은 문답을 읽고 난 느낌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
“당시 두 사람이 주고받았던 글들을 찬찬히 읽어보면, 본래 그들은 학문과 삶에 대해 진지하고 치열하게 문답을 주고받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유학과 성리학을 바탕으로 조선에서 이상국가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함께 고민했던 동지이기도 했다.”(15쪽)
저자는 책 제목에서 보듯이 ‘제자가 묻고 스승이 답하다’는 분위기를 강조한다. 그는 “이 책에서는 노학자와 청년학도로 만난 스승과 제자의 연을 이어가다가 학문적·정치적으로 대립되는 관계로 평가되기까지, 퇴계와 율곡의 삶과 생각을 따라가 볼 것이다”고 하며, “이를 통해 두 사람이 같은 이상을 가졌으면서도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된 이유는 무엇인지, 이들이 시대의 과제에 각기 어떻게 대처했는지 주로 철학적 관점에서 살펴볼 것이다”(9쪽)고 하였다. 퇴계와 율곡이 스승과 제자였으며, 같은 이상을 가졌다고 하였다. 두 사람 사이의 차이점 보다는 동질성에 주목한 느낌을 준다.
저자가 책이름으로 제시한 ‘율곡이 묻고 퇴계가 답하다’는 말은 1558년 봄부터 퇴계가 사망한 1570년 겨울까지, 13년 동안 오간 편지를 통한 문답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1장 ‘만남’에서 “퇴계와 율곡이 13년 동안 주고받았던 글과 두 사람이 남긴 주요 저술들을 통해 이들의 마음을 천천히 읽어 나갈 것이다. …… 처음에는 청년 율곡이 묻고 노학자 퇴계가 대답했지만, 나중에는 퇴계가 시대에 던진 물음에 율곡이 응답하였다”라고 말했다. 이 책에 사용된 문헌은 두 사람의 서신뿐 만아니라 그들이 남기 주요 저술들도 포함된다는 것이다. 특히 ‘퇴계가 시대에 던진 물음’이란 퇴계 사후에 율곡에게 남겨진 퇴계의 물음을 뜻한다.
이런 의미에서 제7장 ‘군왕의 정치와 신하의 정치’에서는 퇴계의 「무진육조소」(1568)와 율곡의 「동호문답」(1569)·「만언봉사」(1574) 그리고 퇴계의 『성학십도』와 율곡의 『성학집요』의 비교가 이루어진다. 저자는 이러한 비교를 통하여 퇴계는 군왕의 정치를 지향하고, 율곡은 신하의 정치를 지향하였으며, 퇴계는 군왕의 마음을 중시하고 율곡은 신하의 도통을 중시하였다는 결론을 내린다.(맺음말)
하지만 역시 저자는 퇴계와 율곡의 공통점을 중시하며 이렇게 지적한다.
“두 사람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후학들에 의해 이들은 서로 대립하고 비판하는 관계로 이해되었다. 현대 학자들에 의해 그러한 경향은 더 심화된 듯하다. 그러나 당시 두 사람이 주고받았던 글들을 찬찬히 읽어보면, 본래 그들은 학문과 삶에 대해 진지하고 치열하게 문답을 주고받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유학과 성리학을 바탕으로 조선에서 이상국가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함께 고민했던 동지이기도 했다.”(15쪽)
아울러 결론 부분에서도 그는 이렇게 말한다.
“두 사람은 학문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매우 대조적 혹은 대립적인 관계로 평가되어 왔지만, 어느 모로 보나 두 사람이 공유했던 영역은 그들의 차이점을 압도한다. 유학적 가치관, 성리학적 학문 기반과 세계관 그리고 정치적 이상 등이 모두 그러하다.”(243쪽)
저자는 이러한 두 사람 사이의 문답이나 이론 논쟁을 통해서 각각의 철학적 문제의식과 이론적 성과를 검토하는 작업이 자신의 저술에서 이루어지게 될 모든 논의의 토대가 될 것이라고 하였다. 나아가 저자는 자신의 책에서 퇴계와 율곡이 추구하고 구축한 철학을 통해서 1) 각기 제시하고자 했던 인간의 길과 국가의 길은 어떠한 것이었으며, 2) 그것이 두 학자가 서로 다른 길을 간 그들의 삶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추론해갈 것이라고 하였다. 아울러 덧붙여서 두 사람의 사상을 논하면서 ‘조선 선비의 정신’이 무엇인지 살펴볼 것이라고 하였다.(10쪽) 이상이 저자가 이 책을 집필하는 목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아울러 이 책을 집필하게 된 계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
“한 나라가 건국되고 500여 년 동안 존속하는 데 지배적인 철학·이념이 되었던 조선유학이 실제로 현실을 어떻게 반영하고 또한 현실에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지, 그 철학과 현실의 상호작용에 관한 관심에서 출발하였다.”(10쪽)
이 책의 관심이 단순히 율곡과 퇴계의 문답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두 학자의 사상을 넘어서 조선시대의 사상사에도 관심을 갖는 이유이기도 하다. 저자는 조선시대의 성리학이 단지 철학 사상에만 멈추지 않고 그 시대 사람들의 삶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퇴계·율곡과 같은 조선의 선비들은 사단칠정이나 인심도심을 논한 학자이기 이전에 성리학을 국가이념으로 삼아 조선을 건국하고 운영한 지식인 관료였다. 조선 선비들의 학술적 논의는 성리학적 이상을 몸소 익히고 실천하며, 당시의 현실 속에서 실현하려 애썼던 그들의 생각과 삶의 일부로서 이해되지 않는 한 단편적인 이해에 그칠 수밖에 없다.”(10-11쪽)
『율곡이 묻고 퇴계가 답하다』라는 책이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이 단순히 율곡과 퇴계의 성리학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목차 구성에서 저자가 제3장에 ‘사단과 칠정 : 퇴계와 고봉의 8년 논쟁’을 포함시키고, 제6장에 ‘사단칠정과 인심도심 : 율곡과 우계의 논쟁’을 포함시킨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독자들은 이러한 점을 유의하여 이 책을 읽어야 할 것 같다.

1.5 저자가 주장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광호의 『퇴계와 율곡, 생각을 다투다』는 기본적으로 번역을 위주로 하였기 때문에 퇴계와 율곡의 문답 내용에 대해서 저자의 주장이 명확히 드러나 있지는 않다. 각 문장(번역문)의 각주나 해설에 산재해 있다.
예를 들면 율곡의 첫 번째 편지에 대한 퇴계의 답변을 번역 소개하면서 저자는 <해설>(66쪽)에서 사마광의 격물설(格物說)을 두고 퇴계와 율곡은 관점의 차이를 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다고 지적하고 다음과 같이 그 차이점을 분석하였다.
“율곡은 …… 사마광의 말이 정자·주자의 설명과 위배된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퇴계는 학문과 수양에서 다른 사람의 학설을 비판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실천함을 통하여 자기완성을 성취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 율곡은 자연의 객관적 이법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면 퇴계는 자신의 내부에 있는 도덕적 이법에 대한 체험적 깨달음(體認)을 통한 자기완성을 설명하고 있다. …… 두 지성(율곡과 퇴계)은 주체적 도덕적 수양학의 추구와 객관적 자연학의 추구라는 방향설정 자체에서 차이를 보인다.”
저자는 사마광의 「치지가 격물에 달려 있음을 논함(致知在格物論)」을 번역, 소개하고 상세한 각주와 해설을 달았다. 사마광의 격물치지론은 격(格)자를 막는다고 해석하고 외물을 막을 수 있게 된 뒤에 지극한 도를 알 수 있다고 하는 것이었다.(104쪽)
이러한 사마광의 문장에 대해 저자는 각주 112번(103쪽-104쪽)에서 “사마광의 생각은 정자와 사량좌의 생각과 비슷하다. 욕심을 넘어선 …… 밝은 마음이 사물을, 물질을 넘어 진리의 드러남으로 볼 수 있는 지혜라는 뜻이다. 퇴계가 사마광의 학문과 덕성을 종중하는 이유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보면 경험적 객관세계에 머물게 되면 형이상의 진리를 알기 어렵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104쪽)고 하여, 율곡의 경험적 입장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지적하였다.
아울러 저자는 사마광 문장의 해설에서도 “욕망을 막고 천리를 보존하는 것을 중요한 방법으로 여기는 성리학의 입장에서는 충분하게 이해할 수 있지만, 외부 사물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중시하는 율곡의 입장에서는 격물치지에 대한 (사마광의) 이러한 해석을 지지할 수 없을 것이다”(104쪽)라고 하였다.
이렇듯 『퇴계와 율곡, 생각을 다투다』라는 책은 퇴계와 율곡의 문답 그리고 저자가 제공하는 보충자료와 각주, 해설 등을 읽어보고 또 원문과 번역문을 대조해보면서 읽어나가면 율곡의 사상과 입장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도움은 퇴계의 사상적 입장이 강하게 반영된 것이라는 점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저자 스스로도 <머리말>에서 말했지만, 저자 자신이 퇴계 전공자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머리말>과 <끝내면서>에서 퇴계와 율곡의 문답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면서 몇 가지 주장을 제시하였는데 여기에서 정리해보기로 한다.

1) 유학의 학문관은 도를 진리로 하는 지행(知行)의 학문관이자 지행을 통하여 성인(聖人)의 덕업을 이루며 성인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는 성학(聖學)이다. 그래서 퇴계의 대표작이 『성학십도』라면 율곡의 대표작은 『성학집요』이다.(6쪽)

2) 두 분(퇴계와 율곡)이 주고받은 편지의 질문 항목과 답변을 읽고 번역하며 두 분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생각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두 분이 세상을 떠난 뒤 이 나라는 정치적으로나 학문적으로 당파가 나누어져 치열한 갈등과 대립이 전개되었다. 그 원인이 두 분 사상의 차이 때문인가?(12쪽)

3) 우리나라의 유학을 현대적인 사상으로 재창조하기 위해서 넘어야 할 일차적 과제는 퇴계와 율곡의 사상에 대한 정당한 재평가와 새로운 이해이다. 두 분의 사상이 크게 달랐다는 것은 결코 약점이 아니다. 크게 다르면 큰 만남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21세기는 서구 과학 중심의 문화와 동아시아의 인문 중심의 유학 문화가 창조적 융합을 시도하는 세기가 될 것이다. 두 분이 주고받은 학술적 자료를 처음으로 한 곳에 모아 번역하고 소개하는 이 일이 21세기 동서 문화의 창조적 융합의 시작에 박차를 가할 수 있기 바란다.(8-9쪽)

4) 율곡의 관심은 천지를 넓게 바라보며 넓은 세상을 바로잡아 사람이 살만한 올바른 세상으로 만드는 데에 있었다. 율곡에게 유학은 이상적 경세의 이념이었다. 율곡에게는, 현실정치를 바로잡기 위하여 노력하기 보다는 마음과 인간 내면의 문제에 치중하는 듯한 퇴계의 삶과 학문이 바람직한 삶으로 보이지 않았다. …… 율곡이 퇴계를 ‘모방하는 태도가 많은 사람’, ‘환하게 관통한 지경에는 오히려 아직 이르지 못하였으므로, 본 것이 밝지 못한 점이 있고 말이 혹 조금 틀림이 있는 사람’이라고 평가한 것은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표현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13쪽)

5) 퇴계와 율곡 사이의 문답에서 율곡과 퇴계가 견해를 달리한 내용을 보면, 퇴계와 율곡이 같은 유학자이면서도 중시한 내용이 얼마나 다른가를 엿볼 수 있다. …… 퇴계는 주자를 매우 존경하지만 주자를 답습한 것은 결코 아니다. 『주자서절요』 가운데도 자신의 철학을 중시하는 퇴계의 태도는 유감없이 발휘된다. 율곡이 퇴계가 ‘의양지미(依樣之味, 모방하는 맛)’가 많다고 평한 것은 퇴계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아니라고 볼 수도 있다.(16쪽)

6) 퇴계의 학문적 성향을 매우 명확하여 애매하지 않다. 『성학십도』에 분명하게 드러나며 제자들의 질문에 대답한 수많은 답서와 많은 시, 그리고 여러 저술들에 드러나는 퇴계의 철학은 애매하지 않고 분명하다. 그러나 학문적 경향을 달리하는 율곡으로서는 이를 수용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경향이 다르므로 깊은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관심이 깊지 않으니 깊은 이해도 불가능하였다.(16-17쪽)

7) 퇴계는 자신이 이해한 유학의 견지에서 주자를 이해하고 자신의 입장에서 율곡과 토론하고 율곡을 가르치고 이끌고자 하였다. 그러나 율곡의 생각은 퇴계와는 달랐다. 율곡은 같은 유학자이지만 내성(內聖)보다는 외왕(外王)에 대한 관심이 앞섰다. 인간의 내면의 빛에 근거하여 자신을 돌아보기보다는 사회와 자연을 전체적으로 바라보며 배우고 이해하고 바로잡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율곡은 퇴계가 중시한 심학(心學)과 경학(敬學)이 마음에 다가오지 않았으며 심학과 경학에 대한 이해가 일치되지 않으면서 퇴계에 대해서는 존경하면서도 심복되지 않았다.(17쪽)

8) 퇴계와 율곡의 만남은 필자가 보기에 어긋난 만남이었다. 어긋난 만남이기 때문에 한국유학의 다양성이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다름이 조화로운 만남을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에 갈등이 증폭되는 경향이 우세하였다. 어떻게 하면 서로 다른 만남을 조화로운 만남으로 승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만남의 문제는 언제나 현실적인 것이며 남북이 분단된 우리나라에서 풀어야 되는 지상과제이다.(19쪽)

한편, 김형찬의 『율곡이 묻고 퇴계가 답하다』는 기본적으로 율곡과 퇴계 사이에 이루어진 문답을 중심으로 집필이 되었으나, 다루는 문제는 ‘문답’의 범위를 넘어서 퇴계와 고봉의 사단·칠정 논쟁, 율곡과 우계의 사단칠정·인심도심 논쟁, 퇴계와 율곡의 사상비교 등 매우 광범위하다. 그만큼 주장하는 바도 적지 않다.
여기에서는 우선 이 책의 결론 부분에 해당하는 제7장 ‘왕의 정치와 신하의 정치’에서 저자가 주장하는 바를 살펴보기로 한다.

1) 「무진육조소」와 「동호문답」·「만언봉사」의 비교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퇴계의 「무진육조소」가 군왕의 위상과 역할에 초점을 맞추어 기술된 데 반해, 율곡의 「동호문답」과 「만언봉사」는 군왕과 신하의 관계에 초점이 놓여 있다.’(224쪽) 이러한 차이는 ‘두 사람의 시국에 대한 인식과 그 기반이 되는 철학적 관점 그리고 각기 처했던 개인적 상황 등’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고 하였다.

2) 『성학십도』와 『성학집요』의 비교

퇴계의 『성학십도』는 ‘편찬 의도에서부터 수신(修身)과 마음공부에 집중’했으나, 율곡의 『성학집요』는 ‘제가·치국·평천하까지 아우르는 성학(聖學) 교과서를 염두에 두고’(237쪽) 편찬되었다. 그러나 율곡도 수신(修身, 수기修己)의 문제를 소홀히 하지는 않았다. 분량이나 논의의 깊이에서 다른 문제보다 가장 크게 비중을 두었다. 아울러 율곡은 ‘기질을 바로 잡는 일(矯氣質)’과 ‘뜻을 세우는 일(立志)’을 특히 강조하였다.
저자는 퇴계와 율곡 사상이 크게 다른 점으로 다음과 같이 군왕에 대한 인식을 들었다.
“퇴계는 군왕의 한 마음(一心)과 그 안의 본성(性卽理)의 공부·수양에 성학의 초점을 맞추고 그렇게 수양된 한 마음의 본성(性卽理)으로부터 도덕성이 발현되어 세상으로 확산되도록 하는 것을 이상적인 정치로 보았다. 하지만 율곡은 군왕을 정치에서의 ‘리’로 보고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관리들을 ‘기질’로 보았다.”(239쪽)
저자는 율곡이 이러한 입장을 가지고 ‘기질 변화를 공부와 정치의 관건’으로 보았으며, ‘사실상 왕통을 가진 군왕보다 도통을 가진 신하들의 역할이 더욱 중요’(241쪽)한 것으로 인식했다고 보았다.

맺음말 ‘왕의 마음과 신하의 도통’에서 저자는 퇴계와 율곡의 사상적 차이점을 종합적으로 다시 제시하였는데 주요 주장은 다음과 같다.

1) 글을 읽을 때 퇴계는 전체 맥락에서 필자의 의도를 이해하는데 주력하였고, 율곡은 분석적·논리적으로 내용을 파고들며 날카로운 비평을 가하였다.

2) 퇴계는 이해의 편의를 위해 전체의 맥락 속에서 차이점을 비교하며 쉽게 설명하는 방법을 사용하였지만, 율곡은 하나의 일관된 체계 속에서 자연·사회·인간 전체를 인과적으로 설명하는 방법을 선호하였다.

3) 퇴계가 일반 언어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영역에 대한 성찰을 통해 언어를 넘어서는 실상을 드러내고자 하였던 데 비해, 율곡은 형이상과 형이하의 영역, 자연과 인간의 영역을 하나의 체계로 정리하여 명료한 언어로 설명해 내고 싶어 하였다.

4) 퇴계는 상대가 왜 그런 주장을 하는지에 대해 이해하고 조언하며 설득하려 했던데 비해, 율곡은 자신의 생각을 교과서처럼 명쾌하게 정리하며 자기주장을 펼쳤다.

5) 퇴계가 자신과 같은 일반인은 성인과 같은 경지에 이르기 어렵다고 생각했던 데 반해, 율곡은 자신과 같은 사람도 노력하면 성인이 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을 보면, 두 사람의 성품과 성향이 본래부터 달랐던 점도 있었던 듯하다.

이러한 주장은 저자가 ‘율곡이 묻고 퇴계가 답’한 문답 서신을 읽고 논하면서 느낀 바라고 할 수 있다. 저자의 책 제2장(율곡이 묻고 퇴계가 답하다 1) 제4장(율곡이 묻고 퇴계가 답하다 2) 제5장(율곡이 묻고 퇴계가 답하다 3)에서 저자는 퇴계와 율곡의 문답 내용이 무엇인지, 그 사상적 배경이 무엇인지, 그 의미가 무엇인지 등 주로 세부적인 상황설명에 치중하였다.
하지만 가끔은, 드물지만 문답의 분석을 통해 퇴계와 율곡의 사상을 비교하여 주장을 제시한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퇴계는 도의 역할에 주목하고 율곡은 사람의 역할에 초점을 맞춘다. 하지만 두 사람을 비교할 때 분명하게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다. 두 사람은 모두 주자학을 자신들의 학문적 토대로 한다는 사실이다.”(168쪽)
“퇴계는 사단칠정논쟁을 하면서 사단과 칠정이 나뉘는 이유, 특히 사단이 사단인 원인을 ‘리(理)’에서 찾으려 했다. 사단이 순선한 이유는 바로 ‘리’의 순선함에 있었다. …… 이에 반해 율곡은 우주·자연·사회의 구조와 운영을 서로 떨어지지도 않고 서로 섞이지도 않는 ‘리’와 ‘기’의 엄밀한 협동작용으로 이해하였다. 특히 ‘리’는 본래 순선완전하기 때문에 더 이상 인간이 어찌 손써볼 방법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율곡은 가변적인 ‘기’를 정화함으로써 ‘리’가 그 정화된 ‘기’의 작용을 통해 온전히 그 순선·완전성을 실현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찾았고, 또한 그렇게 ‘기’를 변화시킬 수 있는 인간의 의지에 주목하였다.”(17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