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호와 김형찬의 저술 비교1 – 저자 소개와 목차

#3. 이광호와 김형찬의 저술 비교1 – 저자 소개와 목차

1. 이광호의 『퇴계와 율곡, 생각을 다투다』와
김형찬의 『율곡이 묻고 퇴계가 답하다』

 

1.1 퇴계와 율곡을 다룬 이 두 책

이광호 교수(이하 호칭생략)의 『퇴계와 율곡, 생각을 다투다』는 홍익출판사에서 2013년에 출판하였다. 김형찬 교수(이하 호칭생략)의 『율곡이 묻고 퇴계가 답하다』는 2018년에 바다출판사에서 출판하였다. 두 책은 5년 간격을 두고 출판되었지만 퇴계와 율곡을 다룬다는 공통점이 있고, 제목이 서로 매우 유사하다. 다만 이광호의 제목은 퇴계와 율곡이 경쟁관계인 듯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고, 김형찬의 제목은 제자와 스승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게 한다. 이러한 제목의 분위기가 본문의 흐름에서는 어떻게 드러나는지 이 두 책을 읽으면서 살펴나가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이광호의 책은 저술 형식이 아니라 ‘편역’, 즉 원문을 그대로 번역하지 않고 적절히 편집하여 번역한 책이고 김형찬의 책은 직접 쓴 저술이다. 이렇게 편역과 저술이라는 차이가 있으나 두 권 모두 율곡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서적으로 보아 함께 소개하기로 한다.

1.2 저자 소개

『퇴계와 율곡, 생각을 다투다』의 저자 이광호(1948∼)는 서울대학교 철학과에서 학사와 석사, 박사를 마치고 한림대, 연세대 등에서 교수로 재직한 바 있다. 그는 『주자의 격물치지설에 대한 고찰』로 석사, 『이퇴계 학문론의 체용적 구조에 관한 고찰』로 박사를 받았다. 그는 이러한 박사학위 논문과 관련하여, 유학의 ‘학문론’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유학을 ‘진리를 인식하고 실천하는 보편적인 현대의 인문학’으로 정립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고 한다.
또 그는 퇴계의 저술인 『성학십도』를 번역한 바 있으며, 주자의 제자 섭채(葉採)가 지은 『근사록 집해』를 번역하기도 하였다.
논문을 보면 퇴계와 관련하여 「퇴계 이황의 성학에 대한 현대적 성찰」(『퇴계학논집』, 2012), 「남명과 퇴계의 학문관 비교」(『동방학지』, 2002) 등을 발표한 바 있다. 율곡과 관련해서는, 국회 전자도서관이나 리스(RISS)를 검색해보면 발표된 논문이 없다.
한편 『율곡이 묻고 퇴계가 답하다』의 저자 김형찬(1963∼)은 고려대 국어국문학과와 철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고려대에 철학과 교수로 재임하고 있다. 그는 『이기론의 일원론화(一元論化)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조선유학의 자연철학』(공저), 『논쟁으로 보는 한국철학』(공저)이 있으며 <동아일보>학술전문기자를 지내면서 연재한 칼럼집 『오래된 꿈』(생각의 나무, 2001)이 있다. 율곡 관련 논문으로 「기질변화(氣質變化), 욕망의 정화를 위한 성리학적 기획 – 율곡 이이의 심성수양론을 중심으로-」(『철학연구』38, 2009)를 발표한 바 있다.

이광호와 김형찬 두 학자 모두 한문에 조예가 깊고 유교철학, 특히 성리학과 주희의 사상에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 이광호는 김형찬 보다 15살 위이며 학술적으로 본다면 한세대쯤 위라고 할 수 있다. 이광호는 자기소개에서 한국고전번역원에서 한문교육과정 4년, 한림대학교 부설 태동고전연구소에서 한문교육과정 5년을 마쳤다고 하였다.
한문에 대한 이러한 각별한 애정이 그의 책에 잘 표현되어 있다. 그의 책은 주 내용이 퇴계와 율곡의 한문 시, 편지 등의 번역으로 되어 있는데, 치밀한 번역과 꼼꼼한 역주와 해설이 돋보인다. 동양철학, 혹은 유교나 한국철학을 전공하고자 하는 학생들이나 후배 학자들에게는 여러 면에서 매우 도움이 될 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실지로 이광호의 저술은 뒤에 출판된 김형찬의 책 『율곡이 묻고 퇴계가 답하다』에도 깊은 영향을 미친 것 같다. 김형찬의 책에 이광호의 견해에 대한 언급이 보이고,(32쪽) 이광호의 ‘다투다’는 관점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견(169쪽)도 보이기 때문이다.
김형찬의 책은 매끄러운 한국어 표현이 돋보인다. 신문사 기자로 활동한 경력 덕분인지 그가 사용하는 단어는 군더더기가 없고 깔끔한 느낌을 준다. 철학을 전공한 학자들은 가끔 추상적인 어휘를 남발하여 독자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그의 책은 매우 정제된 느낌을 갖게 한다. 이광호의 책과 김형찬의 책은 서로 매우 보완적이며, 두 책을 한권으로 묶어도 서로 잘 어울릴 것 같다. 다만 효과적인 독서를 위해서는 김형찬의 책을 먼저 읽고 이광호의 책을 나중에 읽는 것이 좋다. 이광호의 책은 독자들이 이해하기에 좀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1.3 목차 소개

이광호의 『퇴계와 율곡, 생각을 다투다』는 다음과 같이 모두 3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1장 율곡과 퇴계가 주고받은 시
제2장 율곡과 퇴계가 주고받은 편지
제3장 퇴계가 사망한 뒤 율곡이 퇴계를 위하여 지은 글

모두 율곡과 퇴계의 한문 문장을 번역한 것으로 제1장은 시문 4편을, 제2장은 서신 14편을, 그리고 제3장은 만사, 제문, 유사 등 문장 5편을 번역하였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은 단연 제2장이다.
제2장의 목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율곡의 첫 번째 편지-별지, 퇴계의 답서를 부록함(1558년)
2. 퇴계의 첫 번째 답서(1558년)
3. 퇴계의 두 번째 답서-별지(1558년)
4. 퇴계의 세 번째 답서-별지(1558년)
5. 퇴계의 네 번째 답서(1558년)
6. 퇴계의 다섯 번째 답서(1564년)
7. 퇴계의 여섯 번째 답서(연도 미상)
8. 율곡의 두 번째 편지(1567년)
9. 율곡의 세 번째 편지(1568년)
10. 율곡의 네 번째 편지(1570년)
11. 퇴계의 일곱 번째 답서(1570년)
12. 퇴계의 여덟 번째 답서-문목에 답함(1570년)
13. 율곡의 다섯 번째 편지-문목(1570)
14. 퇴계의 아홉 번째 답서-물음에 답함(1570)

12, 13번 항목에서 ‘문목’이란 ‘질문 항목’을 말한다. 이와 같은 서간문은 크게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다. 1558년의 서간문과 그 이후의 서간문이다. 1558년은 율곡이 23세로, 예안(안동)으로 퇴계 선생을 방문한 해이다. 그는 그 전해 가을에 성주목사였던 노경린(盧慶麟, 1516-1568)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고 겨울 내내에 성주 처가에서 지냈다. 다음해 봄에 율곡은 강릉의 외가에 가는 길에 퇴계 선생을 만났다.
퇴계 선생은 당시 58세로 율곡보다 35세 위였다. 율곡은 21세 때 한성시에 합격을 하였지만 아직 크게 두각을 나타낸 때는 아니었다. 1번부터 5번까지의 서간문은 이시기에 써졌으며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젊은 율곡의 입장과 그러한 젊은이에게 기대를 걸고 무엇인가 도움을 주고자 하는 퇴계의 입장이 잘 드러나 있다.
1558년 겨울에 율곡은 별시에서 『천도책』으로 장원 급제하고, 6년 뒤인 1564년에는 생원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어서 명경시에 급제한 뒤에 호조좌랑에 임명되었다, 이즈음 율곡의 이름은 ‘구도장원공’이라고 하여 아홉 번이나 장원을 한 인물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율곡은 이미 과거를 준비하는 수험생이 아니라 어엿한, 촉망받는 관리가 되어 있었다. 그는 호조좌랑을 거쳐, 1565년에 예조좌랑, 사간원 정언 등에 임명되었으며, 1566년에 이조좌랑, 1568년에 사헌부 지평, 홍문관 부교 등에 임명되었다. 1569년에는 『동호문답』을 지어 임금에게 올렸다. 1570년은 퇴계가 사망한 해였다. 따라서 1564년 이후의 서간문은 율곡이 학문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도 성장함에 따라 퇴계와의 관계가 미묘하게 달라지는 분위기를 보여준다.

이광호는 이러한 서간문 외에, 서간문에 등장하는 문헌 중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17편의 보충자료를 제공하였다. 예를 들면 보충자료 13은 『중용』1장의 번역문과 원문을 제시하였으며, 보충자료 17은 「성호원에게 답함」이라는 율곡의 문장을 실었다. 323쪽에 이러한 보충 자료목록이 첨부되어 있다. 이 책에는 또 「퇴율 비교논문 목록」과 상세하고도 정성스러운 색인이 첨부되어 매우 도움이 된다.
이 책은 본문이 번역 위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거기에는 저자 이광호의 생각이나 주장이 잘 드러나 있지 않다. 각주나 해설 등에 산재되어 있어 다소 산만한데, 「머리말」, 「해제」, 「끝내면서」를 읽어보면 저자의 주장이 잘 표현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은 먼저 「머리말」, 「해제」, 「끝내면서」를 잘 읽어보고 저자의 저술 의도를 잘 파악한 뒤에 율곡과 퇴계의 문장을 원문과 비교하면서 천천히 한편씩 읽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김형찬의 『율곡이 묻고 퇴계가 답하다』는 다음과 같이 모두 7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 만남
2. 율곡이 묻고 퇴계가 답하다 1
3. 사단과 칠정 : 퇴계와 고봉의 8년 논쟁
4. 율곡이 묻고 퇴계가 답하다 2
5. 율곡이 묻고 퇴계가 답하다 3
6. 사단칠정과 인심도심 : 율곡과 우계의 논쟁
7. 군왕의 정치와 신하의 정치

이 중에 제3장과 제6장은 퇴계와 율곡이 묻고 답하는 내용이 아니라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퇴계와 고봉의 논쟁(3장), 율곡과 우계의 논쟁(6장)을 추가한 것이다. 이 책의 뒷 표지를 보면 ‘조선유학 500년 퇴계·율곡·고봉·우계 그들은 무엇을 묻고 어떻게 답했는가. 퇴계, 율곡, 고봉, 우계는 조선을 성리학의 이념 위에서 기획하고 만들고 운영해온 지식인들의 후예였다’라는 책소개가 있다. 이것을 보면 저자는 율곡과 퇴계의 대화를 넓혀서 고봉, 우계까지를 포함한 조선시대 지식인들의 유학 사상을 독자들에게 소개하기 위해서 이 책의 목차를 이렇게 구성했음을 알 수 있다.
실지로 이 책의 핵심내용은 다음과 같은 부분이다.

제2장, 율곡이 묻고 퇴계가 답하다 1 (1558년)
제4장, 율곡이 묻고 퇴계가 답하다 2 (1570년, 『중용』관련 문답)
제5장, 율곡이 묻고 퇴계가 답하다 3 (1570년, 『성학십도』관련 문답)

저자는 율곡의 질문과 퇴계의 답변을 위와 같이 3개의 장으로 나누어 소개하였다. 제2장은 1558년 율곡이 관직에 나가기 전 시기에 이루어졌던 문답, 제4장과 제5장은 율곡이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한 이후의 문답이다.
제2장과 제4장 사이에는 역사적으로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다. 율곡은 1564년부터 관직생활을 시작했는데, 그 이듬해(1665년, 명종 20년) 20여년간 정권을 장악하고 전횡을 하였던 권신 윤원형(尹元衡)이 실각하고 나라 안의 정세가 바뀌었다. 이전에 을사사화(1545년)로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쓴 사람들이 풀려나고, 사림이 다시 정계로 복귀하기 시작하였다. 1567년에 선조 임금이 즉위하였다. 이해에 퇴계도 새롭게 변한 분위기 속에서 상경을 하여 일시적으로 대제학에 취임하기도 하였다.(1568년) 이즈음 퇴계는 젊은 선조에게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지어 올렸고, 율곡은 「동호문답」(1569년)을 지어 올렸다. 이와 같은 상황의 변화가 있고난 뒤에 ‘율곡이 묻고 퇴계가 답하다 2’가 있었던 것이다.
제4장은 『중용』관련 문답을, 제5장은 『성학십도』에 대한 율곡의 질문과 퇴계의 답변을 상세히 소개하였다. 이러한 소개는 이미 제3장에서 이루어진 퇴계와 고본의 사단·칠정 논쟁을 바탕으로 하여 이루어지고 있어서 매우 체계적이고 설득력이 있다. 뒤이어 소개되는 제6장의 율곡과 우계의 논쟁은 퇴계 사후에 율곡의 철학사상이 어떻게 변화, 완성되어 가는지 그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퇴계 사상이 율곡의 학문적인 발전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가늠해보는 것도 흥미롭다.
마지막으로 제7장은 율곡과 퇴계의 문답을 넘어서 율곡과 퇴계의 사상을 비교한 부분이다. 저자는 퇴계의 『무진육조서』(1568년)와 율곡의 『동호문답』(1569년), 『만언봉사』(1574년)를 비교하고 나아가 퇴계의 『성학십도』와 율곡의 『성학집요』를 비교 검토하였다. 이 장의 제목인 ‘군왕의 정치와 신하의 정치’는 바로 ‘군왕’을 주목한 퇴계의 사상과 ‘신하’를 주목한 율곡의 사상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맺음말의 제목인 ‘군왕의 마음과 신하의 도통’도 그러한 의미로 붙여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부록’으로 첨부된 ‘한국유학의 쟁점과 퇴계·율곡의 위상’은 퇴계와 율곡의 사상을 조망하면서 조선시대 유학사를 쟁점별로 소개한 것이다. 이 부록까지 읽어보면 이 책은 전체적으로 퇴계와 율곡의 문답을 키워드로 집필한 한권의 ‘조선시대 사상사’와도 같은 역작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