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면서 2 – 율곡사상 요약

#2. 시작하면서 2 – 율곡사상 요약

본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참고로, 이동준이 1996년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율곡 사상을 소개한 내용을 알기 쉽게 재구성, 요약하여 제공한다. 여기에는 학계에서 1990년대 초까지 연구된 율곡 사상의 연구 성과가 담겨 있다. 물론 이동준의 입장이 반영된 것인데, 그는 1975년에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에서 『16세기 한국 성리학파의 역사의식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바 있다.
이러한 내용을 꼼꼼하게 읽고 기억하여, 즉 여기에서 제공하는 정보를 지렛대로 삼아 본문에서 소개하는 6권의 단행본을 잘 읽어보면 율곡 철학의 전모 나아가 율곡 사상이 한국 사상사에서 차지하는 위상과 의미를 잘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1) 율곡은 자기 시대를 어떻게 보았는가?

율곡(1536년∽1584년)은 자신이 살던 16세기 후반의 조선사회를 ‘쇠퇴기’로 판단해 경장(更張), 즉 개혁이 요구되는 시대라 보았다. 그는 “시의(時宜)라는 것은 때에 따라 변통(變通)하여 법을 만들어 백성을 구하는 것”(『만언봉사』)이라 하고, 시의(時宜)에 따라 제도를 개혁한 사례로 세종 시대의 『경제육전(經濟六典)』이나 세조 시대의 『경국대전』을 들었다. 따라서 시대의 변천에 따른 법의 개정은 당연한 일이라고 보았다.

2) 율곡에게 성리학은 무엇이었는가?

율곡에게 성리학, 즉 주자학은 단순히 사변적인 철학이 아니었다. 그는 성리학의 이론을 전개함에 있어 ‘실공(實功, 실질적인 공적)’이나 ‘실효(實效, 실질적인 효과)’를 항상 강조하였다. 그리고 정치를 할 때, 현실의 상황(時勢)을 잘 파악하여 옳게 처리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정치는 시세를 아는 것이 중요하고 일은 실지의 일을 힘쓰는 것이 중요하다. 정치를 하면서 시의를 알지 못하고 일에 앞에 두고 실질적인 업적에 힘쓰지 않는다면, 비록 성현이 서로 만난다 하더라도 다스림의 효과를 거둘 수 없을 것이다”(『만언봉사』)고 하였다. 따라서 그는 항상 위에서부터 바르게 처신하여 기강을 바로잡고 실효를 거두며, 시의에 맞도록 잘못된 법을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율곡은, 성현의 도는 ‘시의(時宜)와 실공(實功)’을 떠나서 있지 않으므로 현실을 파악하고 업무를 잘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요(堯)·순(舜)과 같은 훌륭한 왕이나, 공자·맹자와 같은 훌륭한 성현이 있더라도 현실의 폐단을 고치지 않고서는 도리가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이 그는 진리란 현실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고, 그것을 떠나서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성리학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理)와 기(氣)를 불리(不離, 서로 떨어지지 않음)의 관계에서 파악하였는데, 이것이 율곡이 주장하는 성리설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율곡의 개혁사상은 율곡의 성리학 이론, 즉 이기론 자체에서 출발한 것이다.

3) 율곡의 사상이 성숙된 시기는 언제인가?

율곡은 29살이 되던 1564년에 과거(식년문과)에 합격하여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이후 8년 뒤, 37세가 되던 1572년에 그는 친구 성혼과 편지로 성리설에 대한 학문적인 논의를 벌였다. 그는 이전에도 성혼과 경학이나 성리학에 관한 문답을 교환하였으나 이때는 매우 본격적으로 논의하였다. 당시는 퇴계가 사망한 지 2년 뒤였는데, 1년간 모두 9차례에 걸쳐 서신을 주고받았다.
서신을 통한 이러한 논의는 이황과 기대승(고봉高峰 奇大升)의 논변처럼 율곡에게는 사상적으로 매우 중요한 자극이 되었다. 다만 이황과 기대승의 논변은 무려 13년에 걸쳐 이루어졌으나 성혼과의 논의는 단지 1년 사이에 이루어졌다. 대개는 성혼이 율곡에게 질문을 하고 율곡이 회답을 하는 것이었다.
성혼의 질의내용은 비교적 단순한 것으로, 주로 성리학의 핵심 주제였다. 성혼은 원래 퇴계와 기대승 사이에 오간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에 대해 기대승의 의견을 존중했다. 그러나 퇴계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 이와 기가 서로 발동함)의 도덕적 고민을 이해하고 그 취지에 수긍하게 되었다. 성혼은 이 문제를 어떻게 이해해야하는지 율곡에게 물었다. 율곡은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퇴계 외에도, 서경덕(徐敬德, 1489년~1546년)과 나흠순(羅欽順, 1465년~1547년,호는 정암整菴. 명나라의 철학자)에 대한 논평, 그리고 경전의 본래 의미와 송나라 시대 여러 유학자들의 성리설을 정리해서 보냈다. 이러한 답변을 통해서 율곡은 성리학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정리하고 심화시킬 수 있었다. 나중에 율곡이 발표한 『성학집요』나 「인심도심설」의 핵심내용은 이러한 논쟁을 통해서 정리, 발전되었다.

4) 율곡과 퇴계의 사상적 차이는 무엇인가?

율곡은 퇴계의 이원적(二元的) 이기론, 즉 이와 기가 각각 별도로 주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퇴계가 이와 기를 서로 대립적으로 이해하게 된 것은 퇴계 자신이 잇단 사화를 겪으며 형성된 것이다. 사회정치적 혼란과 부조리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그런 주장을 하게 된 것이다.
퇴계는 인간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는 공의(公義, 공적인 의리)와 사리(私利, 사적인 이익)의 분별이 명확하지 못한 데서 일어난다고 생각했다. 그가 천리(天理, 하늘의 이치)와 인욕(人慾, 인간의 욕심), 인심(人心, 인간의 마음)과 도심(道心, 도의 마음), 사단(四端, 네 가지 착한 마음)과 칠정(七情, 일곱가지 감정), 그리고 본연지성(本然之性, 본래의 성품, 즉 인간의 순수하고 착한 본성)과 기질지성(氣質之性, 기질의 성품, 기에서 나온 본성)을 대립적인 것, 즉 분리적인 것으로 보고 그 점을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 같은 자각을 반영한 것이었다.
퇴계에게 이발(理發, 이가 발동하는 것. 이의 주체성)과 기발(氣發, 기가 발동하는 것, 기의 주체성), 사단과 칠정, 그리고 도심과 인심은 각기 순수한 정신적 가치와 신체적·물질적 욕구의 두 방향을 뜻한다. 퇴계는 이와 기가 왕과 신하의 관계에 있으며, 인심(인간의 마음, 즉 신하의 마음)은 항상 도심(도의 마음, 왕의 마음)의 명령을 순종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관계가 뒤바뀌면 개인적으로는 도덕성의 상실을, 그리고 사회적으로는 윤리의 파멸과 정치의 타락을 초래하게 된다. 따라서 퇴계 자신은 혼탁한 정치현실을 떠나 학문을 닦음으로써 이론을 정립하여 후인들에게 도(道)를 전해주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았다.
이에 비해 율곡은 퇴계와는 전혀 다른 정치사회적 상황에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1565년에 오랫동안 섭정을 하면서 권세를 휘둘렀던 문정왕후가 사망하였다. 2년 뒤에는 선조가 명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율곡은 1564년부터 관직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그가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시기는 바로 새로운 변화의 시기였다. 그동안 탄압을 받았던 사림이 다시 복귀하고, 사람들은 사회적 상황을 개선하고 민생의 문제를 해결하며 국맥을 바로잡을 수 있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이에 따라 율곡은 현실의 개선 그 자체에서 학문적인 진리를 찾았다. 율곡이 리와 기를 불상잡(不相雜, 서로 섞이지 않음)의 대립이 아니라 불상리(不相離, 서로 떨어지지 않음)의 묘(妙)에서 파악하는 것도 이 같은 희망을 반영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율곡의 사칠론이나 인심도심설에 대한 해석도 퇴계의 이기 이원적인 논의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5) 인심(人心)은 ‘기’, 도심(道心)은 ‘리’인가?

율곡은 인간의 칠정(七情)을 형기(形氣)에 속한 것으로만 보지 않았다. ‘본연지성(本然之性)’ 또한 ‘기질지성(氣質之性)’을 떠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이와 기는 논리적으로 구별하는 것이지, 사실적으로 분리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율곡이 보기에 기란 단순히 ‘혈기의 기(血氣之氣)’로서 타락의 가능성만을 지닌 것이 아니다. 적극적인 의미도 가지고 있다. 기는 물질적인 것, 감성적인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영역, 심령이나 이성까지도 포괄한다. 기는 인간의 ‘본연의 성’을 엄폐(掩蔽)하는 것일 뿐 아니라, 본연지성을 드러나게도 하고 나아가 회복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리’ 만을 선한 것으로 보는 퇴계의 입장과 확연이 다른 점이다.
율곡은 “인심과 도심이 다 기에서 발동한 것이다. 기가 본연의 리(本然之理)를 따른다면 기가 원래 본연의 기(本然之氣)이다”라고 하였다. “기가 하늘의 명령을 따를지 여부는 모두 기가 하는 일이다. 그러니, 호발(이도 발동하고, 기도 발동하는)이 있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인심(人心, 인간의 마음)’이란 ‘구체(口體, 입과 몸)’를 위한 것으로서 그리고 도심은 ‘도의(道義)’를 위한 것으로서 서로 구별된다. 따라서 율곡은 인심은 기가 발동한 것이고, 도심은 리가 발동한 것으로 보는 퇴계의 입장과는 달리, 서로 다른 본질과 근원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하나의 마음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율곡의 주장에 따르면 인심은 성현이라도 면할 수 없으며, ‘먹을 때 먹고 입을 때 입는 것’이 바로 천리(天理)라고 하였다. 율곡은 인심이라 해도 그것이 알맞게 조절된 상태에서는 ‘인심 역시 도심이 된다’고 하였다. ‘도심’이라는 것이 어디 다른 세상에서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6) 율곡은 기 철학자인가?

조선의 기철학자, 즉 기를 일원적으로 보고 오직 ‘기’만을 모든 것의 근원으로 보는 철학자로 서경덕(徐敬德, 1489년~1546년, 호는 화담花潭)을 든다. 그런데 율곡도 ‘주기론(主氣論)’을 주장하는 것으로 보고 학문적으로 연관시켜 보는 경향이 있다. 서경덕과 율곡은 다 같이 기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특히 기의 불멸성, 능동성을 강조하며, 기의 측면을 전폭적으로 긍정한 점에서 그렇게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율곡은 서경덕이 이기의 불리(不離, 서로 떨어지지 않음)에 대한 이해는 깊고 투철하지만, 그 위에 뚜렷이 극본궁원(極本窮源, 본원을 철저하게 추구함)하는 리(理)의 측면이 있음을 몰랐다고 비판했다. 율곡은 ‘리’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것의 긍정적인 역할을 이해하였다.
율곡은 나아가 서경덕이나 송대의 장재(張載, 1020~1077, 호는 횡거橫渠이며 중국의 기철학자)가 기에 치우치고 이기를 혼동해 성현의 뜻에 묘계(妙契, 묘하게 와 닿는 생각)치 못하였다고 지적했다. 율곡은 또 서경덕의 유기론적(唯氣論的, 오직 ‘기’만을 중시하는 논의에 치중하는) 입장에 대해 ‘이통기국(理通氣局, 리는 만물에 통해 있지만 기는 사물이나 현상마다 국한되어 개별적으로 존재함)’을 모르는 소치라 하여 ‘한 모퉁이만 본 사람(見一隅者)’라 폄하했다.
서경덕은 궁극적인 존재를 ‘태허의 기(太虛之氣)’로 보았다. 그러나 율곡은 그렇게 보지 않고, ‘태극의 리(太極之理)’로 이해하였다. 율곡은 오히려 퇴계처럼 리와 기를 엄격하게 구별하고, 리가 기에 우월하다는 ‘이우위설(理優位說)’을 긍정하였다. 리와 기는 결코 혼동할 수 없는 것이며, 리는 기의 중추요 근저(根柢)이며 주재(主宰)라고 주장하였다. 아울러 리의 본체는 통일적 원리이지만 그것은 모든 사건과 사물에서 유행(즉 통행)하는 것이요 삼라만상이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 다만 퇴계와 다른 점은 퇴계가 리와 기를 각각 주체적인 것으로 보고 그것들이 각각 실질적인 동력으로 발용한다는 호발설을 주창한 데 대해, 율곡은 리와 기가 이합(離合, 떨어지고 합함)이 없으며, 선후(先後, 앞 뒤)도 없다는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 기가 발하고 리가 그것을 탄다고 하는 하나의 길 학설)을 주장했다.
퇴계는 리와 기를 처음부터 분리하여 이원적으로 파악했다. 하지만 율곡은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현상 그 자체를 떠나서 이발(理發, 리가 발동함)이 따로 있을 수가 없다고 본 것이다.
퇴계는 만유를 가능하게 하는 초월적 존재로서 리를 강조하고 그것이 독자적으로 발동이 가능한 주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 반면, 서경덕은 리를 기 자체에 작용상의 자율성이 존재한다고 보아 기의 실재성과 사실성을 강조하였다. 결국 퇴계는 ‘리’ 우위설을 논해 리의 구극성(究極性)을 강조하고 서경덕은 유기론자로서 기를 중시한 것이다. 서경덕과 퇴계 이황은 거의 동시대에 살았던 인물이지만 이와 같이 서로 매우 대조적인 견해를 견지하였다.
율곡은 이러한 서경덕의 주기론에 대해서는 ‘이통기국설’, 즉 리는 모든 사물에 통하지만 기는 어떤 사물에 국한된 것이라는 주장으로 대응했다. 그리고 퇴계에 대해서는 ‘기발이승일도설’, 즉 기가 발하면 리가 거기에 편승하여 하나의 현상이 된다는 논리로 대응했다.

7) 이기지묘(理氣之妙)란 무엇인가

‘이기지묘(理氣之妙)’은 ‘리와 기의 교묘함’ 혹은 ‘이기의 교묘한 결합’이라는 뜻으로, 율곡은 이러한 개념을 사용하여 리와 기의 두 영역을 완전히 긍정적으로 포괄하면서도, 동시에 양면의 극단을 함께 거부하였다. 즉 그는 기의 사실성과 리의 초월성을 인정하고 양자를 서로 분리할 수 없는 묘한 결합이라고 정의하였다.
율곡은 나아가 이기의 묘처(妙處, 기묘한 곳)야말로 알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설명하기도 어렵다고 하였다. 그는 태극과 음양, 리와 기의 관계는 하나 이면서 둘(一而二)이요, 둘이면서 하나(二而一)라는 기본 인식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이기는 하나(一)이면서 둘(二)이요, 둘(二)이면서 하나(一)이다. 이기가 혼연무간(渾然無間, 구별이나 차별이 없으며 서로 간에 틈이 없음)해 원래 떨어지지 않으므로 정자는 ‘기는 곧 도(器卽道)요, 도는 곧 기(道卽器)’라 했고, 떨어지지 않을지라도 혼연한 가운데 섞이지 않아서 하나의 사물(一物)이라고 할 수 없으므로, 주자는 ‘리는 스스로 리요, 기는 스스로 기’라고 한 것이다.”
율곡은 또 “리는 무형하고 기는 유형하다. 그러므로 리는 통(通)하고 기는 국한(局)된다. 리는 무위하고 기는 유위하므로, 기는 발(發)하고 리는 승(乘)한다. 무형무위(無形無爲, 형태가 없으며 하는 것도 없음)하면서 유형유위(有形有爲, 형태가 있으며 하는 것이 있음)한 것의 주인(主)인 것은 ’리‘이며, 유형유위하면서 무형무위한 것의 기(器, 도구)인 것은 기(氣)이다”(『성학집요』)라고 주장하였다. 율곡이 주장한 ’이통기국‘과 ’기발이승일도설‘은, 달리말하자면 보편적 원리와 특수한 사실을 상호관련 지어 파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8) 율곡 사상이 개혁을 지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율곡의 주장에 따르면 ‘리’는 모든 사물을 관통하고 있다. 그리고 ‘본연의 리’는 스스로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리’가 현실에서 변화하는 현상을 떠나 존재할 수는 없다. 즉, 현실과 관련된 ‘유행의 리(流行之理, 흐르고 움직이는 리, 즉 운행 변화하는 리)’를 떠나서 존재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는 말하자면, 보편적 원리가 각 사물의 개별적인 존재를 관통하고 있으며, 또한 구체적인 변화의 현상을 떠나서는 추구할 수 없다는 논리이기도 하다. 이것은 율곡이 성리(性理)와 실사(實事, 실재 사물)가 ‘혼융무간(混融無間, 둘 이상의 사물이 서로 섞여 완전히 융합되고 서로간의 간격이 없어짐)’한 관계임을 통찰한 결과이다.
이러한 논리를 발전시켜 율곡은 이른바 의(義, 의리)와 이(利, 이익)를 구별해 이원화하는 사고방식에서 벗어났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의리(義理)와 실리(實利)를 서로 ‘불가리(不可離, 떠날 수 없음, 즉 분리 불가능)’의 관계로 보았다. 그의 개혁사상은 이러한 논리에서 시작되었다.
율곡은 “옳음(是)과 그름(非)은 도(道)에서 병립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이로움(利)과 해로움(害)은 일(事)에서 함께 할 수 없다. 이해(利害)가 급하다고 옳고 그름의 소재를 돌아보지 않는다면 일을 처리하는 마땅함에서 어긋난다. 또한 옳고 그름을 생각해 이익과 해로움의 소재를 살피지 않는다면 응변지권(應變之權, 변화에 대응하는 처신)에서 어긋난다. …… 중(中, 중용)을 얻고 마땅함(宜)에 합하면, 즉 옳음(是)과 이익(利)이 그 가운데 있는 것이다. 진실로 국가를 평안하게 하고 민중에게 이로우면 다 행할 수 있는 일이요, 나라를 평안하게 하지 못하고 민중을 보호하지 못하면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시무칠조책(時務七條策)」)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옳고 그름을 가르는 규범의 문제와 이해관계를 따지는 현실 문제가 절절히 ‘득중(得中, 중용을 얻음)’, ‘합의(合宜, 마땅함에 부함됨)’함으로써, 보국과 안민이라는 차원에서 옮음(是)과 이익(利)의 조화라는 하나의 목표로 향한다고, 율곡은 주장하였다.

9) 무엇을 개혁할 것인가?

율곡은 당시 가장 큰 악법(弊法)으로 다음의 다섯 가지를 들어 설명하였다.(『동호문답』)

1) 일가절린(一家切隣, 세금을 못내는 가구는 이웃과 단절됨)의 폐해
2) 진상번중(進上煩重, 진상품이 번잡하고 무거움)의 폐해
3) 공물방납(貢物防納, 공물을 관리나 상인들에게 대신 납부함)의 폐해,
4) 역사불균(役事不均, 노역일이 균등하지 못함)의 폐해,
5) 이서주구(吏胥誅求, 관리들이 백성의 재물을 빼앗음)의 폐해

이들은 모두 민생에 관계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율곡의 지적은 당시의 시대상과 민중의 고통을 잘 파악하여 제시한 것이었다. 또 그는 국세조사와 같은 전국적인 규모의 조사를 실시해 실정에 알맞게 악법을 개혁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밖에도 그는 「만언봉사」·『성학집요』 그리고 수많은 상소문을 통해 정치·경제·문교·국방 등에 관하여 필요한 개혁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또한 그는 국정을 도모함에 있어서도 개인이나 일부 지도층으로부터 하향식으로 수행될 것이 아니라, 언로를 개방해 아래로부터의 중지(衆智)를 모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언로의 개통을 국가 흥망에 관계된 중대한 일로서 강조하였다. 그에 따르면 공론(公論)은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국민의 정당한 일반 의사가 곧 국시(國是)가 된다고 지적하면서, 언로의 개방성과 여론의 중요성을 피력했다. 또한 율곡은 경제사(經濟司)의 창설을 제의하였는데, 시무를 잘 알고 국사를 걱정하는 사람들 중 윤리성과 합리성을 겸비한 최고의 지성이 동원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0) 율곡이 후세에 미친 영향은 무엇인가?

율곡은 의리와 실리, 이념과 현실의 통합적 구상을 그의 철학과 함께 제시하였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나중에 ‘의리학’과 ‘실학’으로 전개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그의 사상은 조선 중기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의 역사 전개에서 후대에 끼친 영향을 깊이 관찰해야 한다. 율곡의 성리학 사상은 오늘날에도 ‘유심’과 ‘유물’, ‘주체’와 ‘상황’, 그리고 ‘현실’과 ‘이상’의 괴리로부터 양자의 조화와 발전을 도모하는 데에 새로운 방향을 던져준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