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을 편안하게 여긴 삶

가난을 편안하게 여긴 삶

새마을 운동과 가난

1970년대 ‘새마을 운동’의 노래 가사는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라는 말로 시작하여 2절의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 길도 넓히고’로 이어지다가, 3절의 ‘소득증대 힘써서 부자 마을 만드세.’라는 말이 등장한다. 그 운동이 일어난 배경 가운데 하나가 3절의 가사에서 보이듯이 가난 탈출이다. 물론 정치적 의도도 있었겠지만.
당시 가난한 원인 가운데는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으로 인한 열악한 경제환경과 경제적 불평등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산업 구조가 농업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농업인구의 비중이 매우 컸고, 다수의 농부는 영세농이어서 자급자족하기에도 부족한 형편이었기에 늘 가난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도시 노동자나 샐러리맨이라고 해도 특별히 나을 것도 없었다. 그래서 당시는 가난이 사회적 문제였고, 이 ‘새마을 노래’에도 그 탈출의 염원을 담았다.
가난이란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이다. 그것도 스스로 선택한 가난이 아니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 역사를 보면 청빈(淸貧)을 자청해서 실천한 선비들이 많다. 『대동야승』에서 소개하는 선비들의 프로필을 보면, 어김없이 효도하고 우애가 있으며 청렴했다는 말이 거의 꼬리표처럼 붙어 다닌다. 의례적 수사법 이전에 그런 문화와 제도가 있었다는 점의 반증이다.
청빈이란 말 그대로 ‘욕심 없이 깨끗하면서 가난하게 사는 삶’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부귀영화를 누리고 싶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 부귀영화의 이면에는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 요소도 동시에 지니고 있었기에 지혜롭게 청빈을 택하지 않았는지 추론할 수 있다. 전통 철학에는 이런 지혜를 항상 제공하고 있어서, 지혜로운 자는 그것을 생활화할 수 있었으리라. 물론 『소학』에도 그것을 장려하고 있다.
청빈 또는 청렴이라고 해도 모두 같은 양상을 띠고 있지 않다. 선비마다 벼슬이 있고 없음에 따라 다르게 등장한다. 그 모습을 살펴보고 왜 청빈하게 살았는지 그 사례를 살펴보자.

결이 다른 청렴과 청빈

조선 시대 이상적인 관료의 모범으로서 청백리(淸白吏)가 있다. 이것은 일정한 기준에 의하여 의정부에서 뽑아 관리에게 주어지는 명칭이다. 여기에는 관직 수행 능력 외에 여러 기준이 있는데 그 가운데 청렴(淸廉)·근검(勤儉)이 있고, 청백리에는 모두 217명이 있다.
이들은 모두 청렴했다는 것이 공통점이긴 한데 엄밀히 말하면 청렴과 청빈(淸貧)은 약간 다르다. 청렴은 욕심이 없고 깨끗한 것을 말하지만, 반드시 가난한 것을 일컫지 않는다. 반면 청빈은 거기에 가난이 첨가된다. 청빈보다 청렴의 외연이 넓다고 하겠다. 해서 청백리 가운데는 청빈한 사람도 섞여 있다. 대표적 청백리에는 맹사성·황희·최만리·이현보·이언적·이황·이원익·김장생·이항복 등이 있다고 하는데, 이들 모두가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가난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부유하게 산 것도 아니다.
『대동야승』에 등장하는 청백리 가운데 한 사람은 맹사성(孟思誠, 1360~1438)이 있는데, 권별(權鼈 : ?~?)의 『해동잡록(海東雜錄)』은 이렇게 전한다.
“공은 성품이 청백·간결하여 재물을 모으지 않고, 음식은 항상 녹(祿)으로 받은 쌀로 유지했다. 하루는 부인이 햅쌀밥을 바치니, 공이 ‘어디서 얻은 햅쌀이오?’라고 하니, 부인이 말하기를, ‘녹으로 받은 쌀은 너무 오래돼서 먹지 못하겠기에 이웃집에서 빌려온 것입니다.’라고 하였더니, 공이 성내며, ‘이미 녹미(祿米)를 받았으면, 마땅히 그것을 먹을 일이지 왜 빌려왔소?’라고 꾸중하였다.”
또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의 『필원잡기(筆苑雜記)』에는 그가 “정승이 되어서는 항상 문을 닫고서 손님을 만나지 않았다. 여름에는 소나무 그늘에 앉아 쉬고 겨울에는 창포 방석에 앉았으나 좌우에 다른 물건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청백·간결하고 단아하고 정중하게 지냈다.”라고 전한다. 이렇게 보면 맹사성은 검소하고 소박하게 살았지만, 끼니를 잇지 못하는 정도는 아니었다.
반면 청백리 가운데 유관(柳寬, 1346~1433)이라는 정승이 있는데 『필원잡기』에 등장하는 그의 행적은 이렇다.
“공은 공정하고 청렴하여 비록 최상의 지위에 있었으나, 초가집 한 칸에 베옷과 짚신으로 담박하게 생활하였다. 언젠가 한 달 넘게 장마가 졌는데, 곧은 삼 줄기처럼 집에 비가 줄줄 새었다. 공은 우산을 잡고 비를 가리며 부인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우산이 없는 집은 어떻게 견딜꼬?’라고 하자, 부인이 대꾸하기를, ‘우산 없는 집에는 반드시 미리 방비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공이 껄껄 웃었다.”
그렇다면 그가 왜 이토록 가난했을까? 나라에서 내리는 녹봉이 있을 터인데 그것으로 기본생활은 해결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 까닭을 알 수 있는 내용이 앞의 『해동잡록』에 전한다.
“조카를 친자식같이 길러 독서와 공부하는 방법을 가르쳐서, 과거에 급제하도록 하였다. 하인들을 분배할 때 조카를 형처럼 생각하여 더 많이 주니, 듣는 사람들이 모두 그 공평하고 청렴한 것을 우러러보았다. 녹봉과 음식을 받을 때면 매번 일가와 이웃들과 나누어 먹었다. 또 관(棺)을 후일에 쓰려고 만들어 두었다가 사촌 누이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는 그것을 주었다.”
바로 재물을 친척이나 이웃과 나누었기 가난하게 되었다. 당시는 생산력이 열악했기 때문에 집안사람 가운데 누가 잘되면 거기에 의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필자가 어릴 때까지도 그랬다. 그러니까 유관의 처지는 청렴하면서도 스스로 청빈한 경우라 하겠다.

공직자의 청렴과 공정

공직자가 청렴하면 자연히 공정할 수밖에 없다. 누구의 청탁이나 뇌물을 받고 부당한 일을 안 해도 되기 때문이다. 청백리라면 당연히 그랬겠지만 설사 청백리가 못되어도 그런 관리는 있을 듯싶다. 이이(李珥, 1536~1584)의 『석담일기(石潭日記)』에는 당시 벼슬한 선비 가운데 청렴한 자로 본인을 포함하여 박순(朴淳, 1523~1589), 이황(李滉, 1501~1570), 이준경(李浚慶, 1499~1572), 이후백(李後白, 1520~1578), 정인홍(鄭仁弘, 1535~1623), 이산해(李山海), 유성룡(柳成龍, 1542~1607), 김우옹(金宇顒, 1540~1603), 최영경(崔永慶, 1529~1590), 성혼(成渾, 1535~1598) 등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이산해의 일화를 소개하면 이렇다.
“이산해는 사사로이 찾아오는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오로지 공정한 도리로 사람을 등용했기 때문에 선비들의 담론이 그를 칭송하였다. 그런데 모친상을 당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김귀영(金貴榮)이 그 직책을 대신하자, 청탁하려는 무리가 그의 문간에 구름같이 모여드니 당시 사람들이 한탄하였다.”
또 이이는 경연 때 선조에게 “산해는 사람을 쓸 때 공론에만 따랐으므로 청탁이 일절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문 앞이 쓸쓸하여 가난한 선비의 집과 같았으며, 다만 착한 선비만을 보고 들어 벼슬길을 맑게 하는 데 힘썼습니다.”라고 하니, 선조가 “산해는 재능이 있으면서도 그것을 자랑하는 마음이 없어서, 나도 일찍이 덕이 있는 사람이라 하였소.”라고 전한다.
예나 지금이나 관리가 일을 공정하게 처리하려면 본인이 청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일이 먹히지 않는다. 그래서 일 처리가 공정하고 엄격하여 남을 두렵게 한 관원도 있었다. 앞의 『석담일기』에 보인다.
“정인홍(鄭仁弘)이 어버이를 뵈려 시골로 돌아갔다. 인홍은 사헌부에 있으면서 일을 엄격하게 처리하고 부정을 바로잡아 관원들의 업무 태도가 진작되었고, 거리의 장사치들까지도 감히 금지하는 물건을 밖에 진열하지 못했다. 한 무사가 시골에서 상경하여 어떤 이에게 말하기를, ‘정인홍은 어떻게 생겼는가? 그 위엄이 먼 지방까지 들리어 병사(兵使)·수사(水使)·수령(守令) 무리까지도 두려워하고 경계하니 참으로 장부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이이가 듣고 웃으면서 말하기를, ‘인홍이 사헌부의 관리가 되니 많은 사람이 꺼리고 미워하는데, 이 무사는 감히 칭찬하니 그가 바로 장부다.’라고 하였다. 마침 그가 어버이를 뵈려 시골로 돌아가니, 성안의 무뢰배가 모두 기뻐하기를, ‘이제야 어깨를 펴겠다.’라고 하였다.”
이는 해당 관서의 호랑이 같은 청렴한 관리 한 사람의 역할로 일시나마 나라의 기강이 잡힌 일화이다. 현재에도 이런 공무원이 많으면 국운이 크게 상승하겠다. 지금은 과거보다 부조리가 거의 없다고는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게 편의를 봐주고 느슨하게 처리하는 일도 있다. 건설이나 부동산 관련 허가 사항 하나만 봐도 금방 알 수 있다. 온갖 난개발로 국토가 쓰레기장이나 걸레처럼 변해가는 일이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니리라.
또 청탁을 거절하는 사례로서 『소학』의 가르침대로 실천한 이도 있다. 『해동잡록』에 등장하는 사례이다.
“이조 판서가 된 어효첨(魚孝瞻)이 해당 관리의 후보를 추천하는데, 이때 관행적으로 서로 아는 사람이 비밀리 명함을 들이므로, 공은 그것을 뒤집어 끝에다 ‘하늘이 알고, 귀신이 알고, 내가 알고, 자네가 아는데, 어찌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없겠는가? 그대는 돌아가 쉬어라.’라고 써주니, 그 후로부터 이런 일이 끊어졌다.”
여기서 ‘하늘이 알고’로 시작되는 ‘天知·神知·我知·子知’에 관한 글은 후한(後漢)의 양진(楊震)에 대한 고사로 『소학』에 등장한다. 그렇다고 조선 시대의 선비들만 청렴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잘 아는 ‘황금을 돌같이 보라’는 주인공인 고려말의 최영(崔瑩, 1316~1388) 장군의 고사에도 보인다. 성현(成俔, 1439~1504)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 실려 있다.
“공은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가 늘 ‘황금 보기를 흙같이 하라[見金如土].’라고 가르쳤으므로, 항상 네 글자를 큰 띠에 써서 종신토록 지니고 다녔다. 대신이 되었으나 남의 것을 조금도 취하지 않고 겨우 먹고사는 데 만족했다. 당시의 재상들은 손님을 초대하여 성대하게 차린 풍습이 있었는데, 공은 손님을 초대하되 한낮이 지나도록 음식을 내놓지 않다가, 날이 저물자 잡곡과 쌀을 섞어서 지은 밥에다 잡동사니 나물만 차렸다. 마침 손님들은 배고픈 참이라 그것도 남김없이 먹고는, ‘철성(鐵城: 최영의 봉호)의 집 밥맛이 좋다.’라고 하니, 공은 웃으며, ‘이것도 용병하는 술책이오.’라고 하였다. 그리고 ‘내가 탐욕이 있었다면, 내 무덤 위에 풀이 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풀도 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의 무덤은 경기도 고양에 있는데, 지금까지도 한 줌의 잔디도 없는 벌거벗은 무덤이어서, 흔히들 홍분(紅墳)이라고 한다.”

청빈한 삶과 선비의 즐거움

벼슬을 하면 그나마 호구지책을 해결할 수 있으니 다행이라 하겠지만, 벼슬도 없이 가난하면서도 깨끗하게 산 선비들이 있었으니, 이들이야말로 청빈하게 살았다고 하겠다. 벼슬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 사는 고명한 선비를 흔히 처사라 불렀는데, 서울에도 그런 분이 있었다. 『해동잡록』에 보인다.
“정지운(鄭之雲)은 가난하여 집이 없었다. 서울 사대문 안에 집을 빌려 살았으며, 아내가 길쌈을 하여 자급하였으므로 끼니를 잇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 때문에 걱정한 적은 없었다.”
정지운은 호가 추만(秋巒)으로 「천명도설(天命圖說)」을 지은 학자인데, 훗날 이것을 발단으로 사단칠정론이 전개되었다. 그야말로 청빈한 삶을 살았는데, 아내의 내조가 컸고, 가난이 그의 뜻을 꺾지는 못했다. 한편 지방에서 처사로 살면서 청빈했던 선비에는 조식(曺植, 1501~1572)·서경덕(徐敬德, 1489~1546)·성운(成運, 1497~1579) 등이 있는데, 『석담일기』에서는 성운에 대하여 이렇게 전한다.
“처사 성운이 죽었다. 그는 산림에 고요히 살며 시끄러운 세상을 사절한 지 40여 년이었다. 집과 조금 떨어진 경치 좋은 곳에 작은 집을 짓고, 한가한 날이면 소를 타고 가서 쓸쓸히 홀로 앉아 지냈고, 가끔 거문고를 두어 곡 타며 스스로 즐겼다. 거문고 소리를 듣고자 하는 사람이 오면 오히려 타지 않았다. 선(善)을 즐기며 학문을 좋아하였고 남과 다투는 일이 없었다. 살림살이에는 있고 없는 것을 묻지 않았으며, 간혹 끼니를 굶는 일이 있어도 편안하게 생각하였다. 여러 번 벼슬로 불렀으나 오지 않았다.”
벼슬에 나오지 않은 것은 벼슬에 뜻이 없어서라기보다 당시의 정치 상황 때문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조식이나 서경덕도 그러하다. 그러나 이들이 가난에도 불구하고 되레 후진을 양성하거나 유유자적 즐겁게 살 수 있었던 까닭은 평범한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사실 과거 선비들이 청렴하고 청빈하게 때로는 그것을 즐기며 산 까닭은 정치적 혼란에서 올바른 처세를 위해, 때로는 철학적 신념에서 나온 선택이다. 지면 관계상 그 철학을 여기서 다 밝힐 수는 없지만, 그것이 당사자에겐 참다운 길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 청빈은 자족(自足)의 삶이었다. 치우친 시세에 야합하는 일은 비루한 일이고, 군주제의 특성상 부귀영화는 언제나 위험부담이 있어 남의 시기를 사고 쉽게 구설수가 있다. 심하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기도 하다. 낮추고 겸손하고 청빈한 삶이 생명을 보전하는 처세술이 될 수 있다. 근원적으로는 인간의 탐욕은 끝이 없으므로 그것을 예방하기 위해 그랬을 수도 있고, 더 나아가 백성들의 소박한 삶에 동참하거나 만물[道]과 하나가 되어 가난마저도 즐기는 경지를 추구했으리라 본다. 하지만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 가족이나 아내가 있었다면 무척 고달팠을 것이다.

소박한 삶이 오히려 자유로울 수 있다

당시에도 평범한 보통 사람들은 물질적 욕망을 추구하는 일에 에너지를 쏟았다면, 부귀영화를 포기하고 되레 그 욕망을 줄이거나 최소화함으로써 자신의 신념을 추구한 선비들도 있었다. 가난을 탈출할 방도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스스로 청렴과 청빈을 택했다. 그 철학적 깊이를 잘 모르는 현대인이 그 태도를 함부로 재단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현대는 가난을 개인의 능력 부족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 능력 부족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대부분 출신 배경과 관련이 있다. 해서 그런 가난을 참는 일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다. 이들에게 과거 선비들의 청빈한 삶은 공허한 메아리가 될 것 같다.
하지만 오늘날도 청빈을 자발적으로 선택한다면 훌륭한 삶이 될 수 있다. 많은 소유가 되레 부담스럽고 거추장스럽다면 권장할만하다. 굳이 가난하게 사는 일이 어렵다면, 소박하고 단출하게 사는 것도 훨씬 자유롭고 행복할 여지가 충분하다. 이는 각자의 가치에 달린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