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진(李景震)

이경진(李景震)                                                           PDF Download

 

이경진(李景震, 1559년〜1594년)은 조선시대 선조 때의 문신이자 학자로, 황해도 해주 사람이다. 남부 참봉(南部參奉) 이선(李璿, 1524〜1570)의 아들이자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조카이다. 성혼(成渾)의 문인으로, 참봉(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임진왜란 때에는 율곡 이이의 부인 노씨를 모시고 고향으로 피난을 가기도 하였으나 향년 34세로 난중에 사망하였다.

1559년(1세)
아버지 참봉 이선(李璿)과 어머니는 종사랑(從仕郎) 곽연성(郭連城)의 딸 곽씨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등을 지낸 이원수(李元秀)이다. 율곡 이이(李珥)의 조카로, 율곡의 친형인 이선(李璿, 1524〜1570)의 아들이다. 성혼(成渾)에게서 수학하였으며 자는 성보(誠甫)이다. 본관은 덕수(德水)로 지금의 경기도 개풍이다. 이경진의 동생으로 이경항(李景恒)과 조덕용(趙德容)에게 시집을 간 누이가 있다. 동생 이경향도 성혼에게 배웠으며 참봉을 지냈다.

1564년(5세)
아버지 이선(李璿)이 과거 식년시(式年試)에 급제하여 생원(生員)이 되었다. 이후 남부 참봉(南部參奉)에 임명되었다.

1570년(11세)
부친 이선이 사망하였다. 향년 46세였다. 이선은 이원수와 신사임당의 4남 3녀 가운데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덕수(德水), 자(字)는 백헌(伯獻), 호는 죽곡(竹谷)이다. 1551년(명종 6년) 당시 한강의 수운을 담당하는 수운판관(水運判官)의 직위에 있던 아버지 이원수를 따라 동생인 이이와 함께 세곡을 운반하기 위해 평안도로 갔다.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 신사임당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후 이원수가 권씨를 후처로 들이자 이선은 아버지와 갈등을 빚어 한동안 회덕(懷德, 지금의 대전 대덕구 지역)으로 옮겨가 살기도 했다.

1584년(25세)
이해 2월(음력)에 작은 아버지 율곡 이이가 사망하였다.

1585년(26세)
선조 18년. 동인 정여립(鄭汝立) 등이 율곡 이이를 근거 없이 비난하였다. 이에 이경진은 다음과 같은 상소문을 올려 율곡을 옹호하였다.
“신이 듣건대, 정여립(鄭汝立)이 경연에서 신의 숙부(叔父)인 이이를 비방하여 배척했다고 합니다. 이에 신은 놀랍고 괴이하여 스스로 ‘세상에 어찌 이런 경우도 있는가? 다른 사람이 비난했다고 하면 말할 것이 없겠지만 정여립은 반드시 그럴 리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집안에 있는 편지를 열람하여 정여립이 숙부에게 보낸 편지를 찾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하 중략) 또 하나의 편지가 있는데, 그 대략을 말씀드리면 ‘생각건대 우리 임금께서 여러 의견을 물리치고 존형(尊兄, 율곡 이이)을 여러 사람들이 미워하는 가운데서 발탁하여 총재(冢宰)로 임용하여 의심하지 않았으니 이는 실로 한(漢)·당(唐) 이래 있지 않았던 성대한 일이다. 그것을 보고 듣는 사람이 누군들 감격하지 않았을까마는 저(정여립)의 기쁨이 더욱 컸습니다.’ 하였습니다. 이는 이이가 조정에 돌아온 뒤의 일입니다. 이 때부터 이이가 죽을 때까지는 겨우 한 달 사이인데, 어찌 (정여립과 이이 사이에) 절교(絶交)한 편지가 있었겠습니까.”
이러한 상소문을 읽고 선조 임금은 다음과 같이 답을 하였다.
“정여립의 행위는 인정에 가깝지 않아서 내가 처음에는 혹 떠도는 말에서 나온 것인가 여겼었는데, 뒤에 들으니 과연 헛말이 아니었으므로 그가 반측 무상(反側無狀, 배신을 잘하는)한 자라고 전교하였다. 그리고 자신에게 절교해야 할 까닭이 없다면 비록 다른 사람이 스스로 절교했다 한들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절교 여부에 대해서는 더욱 변명할 필요가 없다.”

1587년(28세)
율곡 이이의 문인인 이귀(李貴)가 율곡을 변호하는 상소문(변무소辨誣疏)을 올렸으나 중도에 전달되지 않아 이경진이 대신 전달하였다. 아울러 율곡 이이가 시류(時流)에 휩쓸리지 않는 인물임을 천명하였다.

1591년(32세)
전옥서참봉(典獄署參奉)에 임명하였으나 사양하였다.

1592년(33세)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작은 어머니인 이이의 부인 노씨(盧氏)를 모시고 고향 해주로 피난하였다. 노씨 부인이 적에게 화를 당하자 양덕현(陽德縣)으로 갔다가 다음해에 해주석담(海州石潭)으로 돌아갔다.

1593년(34세)
스승인 우계 성혼으로부터 강학을 받았다.

1594년(35세)
정월에 제릉참봉(齊陵參奉)에 임명되었다. 난중에 사망하였다.

<참고문헌>
선조실록 19권, 1585년 6월 16일자 기사
박정자, 「이경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