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선(柳永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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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년(고종 30)∼1960년. 근현대의 유학자.

본관은 고흥(高興)이며, 자는 희경(禧卿), 호는 현곡(玄谷)이다. 유영선은 갑오개혁과 동학혁명이 일어나기 한 해 전인 1893년에 전라북도 고창에서 태어나, 나라가 망하는 것을 지켜보았고 일제강점기에 청장년의 시기를 보냈다. 그리고 광복을 맞아(53세) 인생의 후반기를 보냈으니 일생의 대부분을 혼란기에서 보낸 셈이다.

아버지는 유기춘(柳其春)이고 어머니는 광주 이씨이다. 5세 때 할아버지에게서 『소학』을 배웠고, 12세 때는 할아버지를 따라 당시 고부 영주산에서 강학 활동을 하고 있던 전우(田愚)를 찾아가 스승의 예를 행하고 문하에 들어갔다. 당시 전우는 영남의 곽종석과 함께 조선 말기의 끝자락을 장식한 호남의 대표적 유학자였다. 처음 전우에게 나아갔을 때에, 전우는 유영선의 나아가 어리기 때문에 몇 년을 기다렸다가 공부할 것을 권하였다. 그러나 유영선이 눈물을 흘리며 떠나지 않자 전우가 제자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18세 때에 전우와 함께 군산도에 들어갔다가 나라가 망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이에 유영선은 스승을 모시고 산속으로 들어가 통곡하며 침식을 잊으니 목이 메이고 말이 막혀서 몸을 보전하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20세 때(1912)에는 전우를 따라 계화도로 옮겼으며, 이때부터 성기운(成璣運)․권순명(權純命)․오진영(吳震泳) 등과 전우의 문집을 정리하기 시작했고, 28세 때인 1920년 11월에 전우의 문집을 완성하였다. 이렇게 전우를 모시면서 배운 공부는 유영선의 학문적 성취와 성리설에 대한 견해를 굳건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30세(1922) 때 전우가 죽자 심상(心喪, 마음으로 하는 상례) 1년을 입었다. ‘심상’은 상복은 입지 않으면서 상중에 있는 것과 같이 처신하는 것을 말한다. 심상은 대체로 제자가 스승을 위해 하는 것으로, 스승과는 혈연관계가 없지만 슬퍼하는 마음이 친자식 못지않기 때문에 심상을 한다.

당시 전우를 모신 제자들이 천여 명에 이르렀는데, 그 가운데서도 화도(華島) 삼주석(三柱石)이라 불렸다. ‘화도 삼주석’이란 전우의 문하를 지탱하는 세 돌기둥이란 뜻이니, 당시 전우의 수많은 제자들 가운데 특히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전우의 문인에 관한 내용은 1962년에 나온 『화도연원록(華嶋淵源錄)』이 가장 자세하다. 이 연원록은 「관선록(觀善錄)」․「급문(及門)」․「존모록(尊慕錄)」으로 분류되어 있는데, 여기에 등록된 인원이 모두 2,338명으로 전우의 직전제자 범위에 든다고 볼 수 있다. 유영선의 학문이나 사상 형성에 있어서, 특히 조부인 유지성(柳志聖)의 영향이 컸다. 그는 손자인 유영선을 일찍부터 맡아 가르쳤고, 자손들의 교육을 위해 수천 권의 서책을 집안에 마련할 정도로 교육열이 대단하였다고 한다.

유영선이 전우의 문하에 나아가 수학함으로써 이이-송시열-이재-김원행-홍직필-임헌회-전우로 이어지는 기호학파 낙론계열의 주요한 학통을 계승한다. 조부인 유지성은 간재와 친밀할 뿐만 아니라 학문적 교유도 잦았다. 아버지 유기춘은 임헌회의 문하에서 배웠는데, 이러한 집안의 학문 배경으로 인해 유영선은 임헌회와 전우의 학문을 어려서부터 접할 수 있었다. 더구나 조부가 직접 전우에게 교육을 부탁함으로써 유영선은 전우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19년을 한결같이 수학하여 그의 학통을 이었다. 말년에는 자비를 들여 현곡정사를 지어 후학들을 양성하였는데, 전국에서 찾아온 제자들의 수가 수백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대표적인 제자로는 신사범(申思範)․임종수(林鍾秀)․정헌조(鄭憲朝)․유제경(柳濟敬) 등이 있다.

유영선의 대표적인 저작으로는 「태극도설」․「기질명덕설」 등과 관련하여 주고받은 서신을 분류하여 『성리유선(性理類選)』(44세, 1936)을 편찬하였으며, 『담화연원록(潭華淵源錄)』(48세, 1940)을 지어 공자와 주자를 계승하여 이이-송시열……전우로 이어지는 도학의 학통을 정리하기도 하였다. 이 외에 집안 자손들을 가르치기 위한 저서로 『훈자편(訓子編)』․『규범요감(閨範要鑑)』 등이 있다. 특히 예학에 밝았는데, 『사례제요(四禮提要)』(60세, 1952)는 관혼상제의 예학에 관해 총 정리한 저술이다.

“관혼상제는 인간이 인간되는 도리로써 한번 예를 잃으면 오랑캐로 돌아가고, 두 번 예를 잃으면 짐승에 가깝게 된다”

라고 하여 관혼상제를 따를 것을 강조하였다. 그의 사후에 아들에 의해 『현곡집』(1978) 32권 16책이 출간되었다. 유영선은 고창에 용암사를 건립하고 전우의 영정을 봉안하였는데, 그가 죽은 후에 이 용암사에 배향되었다.

유영선은 집안의 학문 배경과 전우를 사사하면서 성리학을 자신의 주요 학문으로 삼았다. 유영선의 성리학적 특징은 기호학파의 전통적 입장인 ‘리는 무위(無爲)하고 기는 유위(有爲)하다. 성은 무위하니 리이고 심은 유위하니 기이다’는데 근거하여 자신의 성리학 이론을 전개한다. 성리학은 이 세상의 존재를 리와 기의 범주로 설명한다. 리는 원리 또는 법칙을 가리키고, 기는 구체 사물을 가리킨다. 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고 만져지고 호흡되고 생각되는 모든 것은 기의 영역에 포함된다. 반면 리는 이러한 기가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는 이유 또는 근거가 된다. 이처럼 리는 원리이고 법칙의 개념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으며 냄새도 없는 개념이다. 때문에 이러한 리의 성질을 ‘무위(無爲)’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말 그대로 함이 없다는 것으로, 작용의 성질을 갖지 않는다는 말이다. 반대로 기는 구체 사물이기 때문에 작용의 성질을 가지므로 유위(有爲)라고 말한다. 즉 어떤 행함이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리의 개념을 두고 조선의 유학자들은 정의를 달리한다. 유영선처럼 리를 철저히 ‘무위’의 개념으로 해석하는 학자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리를 지나치게 ‘무위’의 개념으로 해석할 경우 리는 말 그대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또는 할 수 없는 쓸모없는 존재가 되고 만다는 것을 우려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래서 리의 무위성을 강조하기 보다는, 리가 실제로 이 세상의 모든 기적 존재를 주재하는 주재성 또는 능동성을 강조하게 된다. 실제로 기의 세계를 주재하기 때문에 능동적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리에 능동적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리가 실제로 인간의 심의 작용을 주재하여 인간의 마음이 올바르게 작용하도록 돕게 된다. 예를 들어 사람의 경우, 사람의 몸을 주재하는 것은 마음인데, 이 마음이 몸을 주재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리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들은 리의 실제적 주재성을 확립하여 현실세계의 혼란을 야기하는 기의 활동을 철저히 차단해나갈 것을 강조한다. 율곡의 학문과 이론을 계승한 율곡학파에서 주로 전자를 주장한 반면, 퇴계의 학문과 이론을 계승한 퇴계학파에서는 주로 후자를 주장한다.

유영선을 율곡계열의 학자로 그의 이론은 철저히 ‘리가 무위하고 기가 유위하다’는데 근거하여 전개된다. 리는 무위하므로 작용하는 것은 전적으로 기의 몫이 된다. 따라서 성리학에서의 주요 이론인 리의 동정(動靜, 움직이고 고요한 것)문제 또한 반대한다. 동정하는 것은 결코 리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유영선은 ‘성은 무위하므로 리이고, 심은 유위하므로 기이다’는데 근거하여 자신의 심성이론을 전개한다. 이 과정에서 심과 성을 서로 다른 별개의 물건으로 구분하고, 성은 높고 심은 낮다는 ‘성존심비(性尊心卑)’의 이론을 전개한다. 성은 형이상의 개념이기 때문에 높은 것이 되고, 심은 형이하의 개념이기 때문에 낮은 것이 된다는 것이다. 또한 성은 순수한 리이기 때문에 순선한 것이지만, 심은 리와 기가 합쳐져 있기 때문에 선과 악이 함께 한다. 또한 심은 유위한 작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기로 규정하고, 심은 기이므로 항상 성을 근본으로 삼을 것을 강조한다. 이것이 바로 스승인 전우 ‘심본성(心本性)’의 이론적 요지이며 또한 유영선의 성리학적 특징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심본성’은 심은 어디까지나 성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심은 기이니 선과 악이 함께 있으므로 항상 순선한 성을 표준으로 삼아야 악으로 빠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영선은 왜 심이 성을 근본으로 삼을 것을 강조하는가.

이것은 당시에 심을 리로 규정하여 판단과 행위의 기준으로 삼는 당시 ‘심즉리’를 주장하는 심학파들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다. 심학파의 대표적인 학자가 바로 ‘심즉리’를 주장한 이진상(李震相)과 그의 제자 곽종석(郭鍾錫)이다. 이들은 인간의 선한 행위의 근거를 직접 심에서 구함으로써 그 실천을 더욱 강조하고 보편화시킨다. 이들처럼 심을 리로써 규정할 경우, 자칫 심이 내리는 판단이 자의적으로 해석됨에 따라 현실의 모든 일들을 주관적으로 판단되어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 예컨대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이 결국 옳은 일이라고 판단하게 되는 것과 같다. 따라서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객관적 기준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고, 나의 생각과 판단을 그대로 실천하면 된다. 그러나 내 마음의 생각과 판단이 옳다는 이러한 주장은 자칫 지나치게 주관적인 경향에 빠져서 객관적인 기준을 상실할 우려가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므로 나의 입장에서 옳다고 판단되는 일이 상대방 입장에서 그른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객관적인 표준이나 기준이 애매모호해진다는 말이다.

때문에 유영선은 어떤 일에서나 도덕규범에서나 객관적 표준을 수립할 것을 강조한다. 그 객관적 표준은 바로 심이 성을 근거할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나의 마음이 곧장 리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마음이 성에 근본할 때만이 리가 된다는 것이다. 이때의 리는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객관적 도덕표준을 가리킨다. 이에

“성을 높여서 스승으로 삼는 것은 바른 학문이 되고, 심을 믿고 자만하는 것은 이단의 학문이 된다”거나 “심은 기에 속하니 심이 감히 멋대로 써서는 안되고 반드시 성으로 근본을 삼으니, 이것이 학문의 바뀔 수 없는 정론이다”

라고 강조한다. 심은 어디까지나 기이기 때문에 심을 믿고 자만하면 이단의 학문에 이르게 되니, 반드시 성을 스승으로 삼아 따르고 높여서 성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심본성’을 주장하고, 이러한 ‘심본성’에 근거하여 성은 심보다 더 근본적이라는 ‘성존심비’를 주장한 것이다.

 

[참고문헌]: 『현곡집』(유영선, 여강출판사, 198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사상사에서 간재학의 위치」(금장태, 『간재학논총』1, 간재학회, 1994)

이보림(李普林)-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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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고종 7)∼1972년. 근현대의 유학자.

경상남도 김해 출신. 본관은 전주. 자는 제경(濟卿), 호는 월헌(月軒)이다. 이 글에서는 이보림의 학문관을 소개한다.

이보림의 학문 가운데 가장 빛을 발하는 것은 <지심설(持心說)>이다. 그는 젊은 사람들이 단지 문자에만 관심을 둘 뿐이고, 몸과 마음이 지니는 법도에 대해서는 조금도 유념하지 않는 것을 우려한다.

“문자를 아는 것은 말단인데 배우려 하고, 몸과 마음을 지니는 법은 근본인데 유념하지 않으니, 이게 무슨 도리인가. 또 문자를 알려고 해도 먼저 몸가짐을 단정하게 하고 마음가짐을 경건하게 하여야 말소리를 듣는 대로 마음에 통하여 문자를 쉽게 알고 쉽게 기억한다. 비유하면 땅이 굳어야 물이 새지 않고, 통이 견고해야 물이 새지 않는 것과 같다.”

이것은 글자를 배우기 전에 먼저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바르게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으로, 몸가짐을 단정하게 하고 마음가짐을 경건하게 하고나서 책을 대하면 문자를 쉽게 알고 기억도 좋아진다는 말이다.

그래서 학문은 근본을 세워야 하고, 학문의 근본은 ‘지심(持心)’에 있다고 강조한다.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며, 사람과의 접촉을 바르게 하고, 일처리를 바르게 하며, 처세를 바르게 하는 것, 이 다섯 가지 바른 자세 중에서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는 것이 근본이다. 근본이 바르면, 그 나머지는 바르지 않을까 걱정할 필요가 없다.”

즉 온갖 행실의 근본은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는데 있으며, 반대로 마음가짐이 바르면 그 나머지 것들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이보림은

“의복을 아름답게 하고, 음식을 아름답게 하고, 집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이 모두 제 몸을 아름답게 하는 것만 못하다. 제 몸을 아름답게 하려면, 먼저 제 마음을 아름답게 해야 한다. 마음을 아름답게 하는 도리는 다른 게 없다. 먼저 제 욕심을 버리고서 고요할 적에 텅 비고 밝으며 움직일 때에 바르고 곧음이 바로 그 방법이다.”

라고 하였다. 즉 일상생활의 모든 것을 아름답게 하는 것은 몸을 아름답게 하는 것만 못하고, 또한 몸을 아름답게 하는 것은 마음을 아름답게 하는 것만 못하다. 이것은 일체의 어떤 것보다도 마음을 아름답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이다. 이어서 마음을 아름답게 하는 방법으로, 고요할 때에 마음을 텅 비고 밝게 하는 것과 움직일 때에 바르고 곧게 하는 것을 제시한다.

여기에서 ‘고요할 때’란 마음이 외부 대상에 의해 생각이나 의식과 같은 작용이 일어나지 않을 때를 말하고, ‘움직일 때’는 마음이 외부 대상에 의해 생각이나 의식과 같은 작용이 일어난 때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마음이 아무런 생각이나 의식작용이 일어나지 않은 상태이므로 ‘고요하다’고 하는 것이고, 마음이 생각이나 의식작용이 일어난 상태이므로 ‘움직인다’고 하는 것이다. 성리학에서는 이러한 고요할 때와 움직일 때의 마음 상태를 미발(未發)과 이발(已發)이라는 용어로 표현한다. ‘미발’이란 아직 생각이나 의식작용이 일어나지 않은 상태를 말하고, ‘이발’은 생각이나 의식작용이 이미 일어난 상태를 말한다. 또한 이러한 미발의 상태를 성(性)이고 하고 이발의 상태를 정(情)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따라서 마음은 작용이 일어나기 이전의 ‘성’의 상태와 작용이 일어난 이후의 ‘정’의 상태를 모두 포괄하고 있으므로 ‘심통성정(心統性情)’이라고 부른다. ‘심통성정’은 성리학의 주요한 명제이다. 심이 성과 정을 모두 통괄한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이보림은 마음을 바르게 하는 방법으로 고요할 때의 텅 비고 밝게 하는 것과 움직일 때의 바르고 곧게 할 것을 강조한다. 이것은 ‘미발’과 ‘이발’을 관통하는 마음공부를 강조한 것이다.

이어서 이보림은 이러한 마음을 바르게 하는 마음공부를 바람 앞의 등불에 비유하여 설명하기도 한다.

“마음이란 바람 앞에 등불을 지키느라 종이로 막고 있는 것처럼, 조금이라도 소홀하면 등불이 곧장 꺼지고 만다. 사람의 마음가짐도 이러하다. 조금이라도 관찰하지 아니하면 마음이 곧장 어둡고 흩어진다.”거나 “마음가짐은 촛불을 들고 있는 것과 같다. 조심조심하여 조금도 방심하지 아니하여 사물이 다가올 적에 항상 우뚝하게 주장하여 일에 따라 바뀌지 않고 물건에 따라 옮겨가지 않으면서, 오직 지극한 선을 착실하게 밟아가야 한다. 이곳의 공부는 매우 정밀하여 쉽사리 말할 수 없다. 이렇게 오래도록 계속하여 실행해나간다면, 안자(顔子)의 ‘3개월간 인을 어기지 않는다’는 공부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이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쉽게 꺼질 수 있는 위태로운 물건이다. 왜냐하면 마음이란 좋은 것을 보면 곧장 마음이 좋은 것에 빼앗기고, 예쁜 것을 보면 바로 마음이 예쁜 것에 빠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이 마음은 항상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하며 조금도 방심해서는 안된다. 항상 마음이 사물에 끌려가지 않도록 우뚝이 지킬 수 있어야 지극한 선을 실천해나갈 수 있다. 따라서 마음을 지키는 공부는 매우 어려우며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어려운 공부를 오래도록 쉬지 않고 지속해나갈 수 있으면 중국의 성현인 안자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 이 구절은 『논어』「옹야」편에 나오는 글로, 공자는 인을 체득하고 실천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음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안자의 어짊을 칭찬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안회는 그 마음이 석 달 동안 인(仁)에서 떠나지 않지만 그 나머지는 하루 또는 기껏해야 한 달 동안 인에 생각이 미칠 따름이다.”

비록 인을 실천하고 체득하는 일이 어렵지만, 이러한 마음공부를 오래도록 실천해나갈 수 있으면 안자와 같은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이다.

이처럼 이보림은 어려운 난세에 처하여 굳건한 신념을 가지고 이를 솔선하여 지켜나가는 것이 학자의 책무라고 여기고, 이를 실천하는데 앞장섰다. 그러한 학자의 책무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 마음을 바로잡는 ‘지수’의 공부가 수립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이를 평생 실천해나갔다. 이런 점에서 이보림의 생애와 학문은 변화와 변혁을 다반사로 여기는 오늘날에 있어서 한번쯤 회고될 필요가 있다.

 

[참고문헌]: 「월헌 이보림의 생애와 학문」(정경주, 『간재학논총』4, 간재학회, 200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월헌선생문집』(보경문화사, 1995)

 

이보림(李普林)-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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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고종 7)∼1972년. 근현대의 유학자.

경상남도 김해 출신. 본관은 전주. 자는 제경(濟卿), 호는 월헌(月軒)이다. 중종의 다섯 번째 아들인 덕양군(德陽君) 기(岐)의 후손이다. 경종조 신임사화(辛壬士禍) 때 여주에서 김해로 피난한 이춘흥(李春興)의 7대손이다.

이보림은 조선의 국운이 기울여 가던 1903년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골상이 비범한데다가 행동이 단정하여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놀지 않고 항상 어른들 곁에 가까이 모시고 있으면서 응대하거나 무릎을 꿇고 절하는 법도를 익혔다. 그래서 조부 농은공(農隱公)이 사랑하고 아껴서 조상의 무덤 아래에 제숙소(齊肅所)를 짓고, 거기에 선생(서당의 훈장)을 불러서 가르쳤다. 몇 년이 지나지 않아 한문의 구두(띄어 읽기)를 뗄 줄 알았으며, 청소년의 나이에 이미 경전과 역사서의 서적을 대략 섭렵하였다.

한문은 오늘날 글처럼 띄어쓰기가 이루어져 있지 않고 모든 글자가 붙어 있기 때문에 문장과 문장 사이 또는 구절과 구절 사이를 적당히 끊어 읽을 줄 아는 것이 중요하다. 다시 말하면, 이보림이 어려서 ‘구두를 뗄 줄 알았다’는 말은 어느 정도 문장의 의미를 파악하였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아버지가방에들어가신다’라고 할 때,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신다’가 아니라 ‘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신다’고 문장을 구분해볼 줄 알았다는 것이다. 또한 경전은 주로 유가의 기본 경전인 사사(四書)와 오경(五經)을 가리킨다. ‘사서’는 『논어』․『맹자』․『대학』․ 『중용』을 말하고, ‘오경’은 『시경』․『서경』․『예기』․『역경』․『춘추』를 말한다. 특히 『대학』과 『중용』은 원래 『예기』 속의 두 편명을 각각 독립시켜 별도의 책으로 만든 것이다. 중국 송대의 주희는 이들 사서를 자기 식으로 해석하여 ≪사서집주≫라고 하고, 다른 모든 경서류보다 먼저 배워야 하는 책으로 규정하였다.

이보림은 1920년 봄에 부친의 명을 받들어 서해의 계화도로 은거하여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던 간재(艮齋, 1841∼1922)를 찾아뵙고, 거기에 모여든 수많은 학자들과 함께 수학함으로써 간재 문하의 제자가 되었다. 간재는 영남의 곽종석(郭鍾錫, 1846∼1919)과 함께 조선 말기를 장식한 호남의 대표적 유학자이다. 전우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친 엄혹한 한말 시절에 수많은 제자를 길러내고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전우 문하에서 특히 서진영(徐震英)․권순명(權純命)․유영선(柳永善) 등과 뜻이 맞아서 침식을 잊으며 학문을 연마하였다. 전우가 죽자, 변산의 진계정사로 가서 서진영을 따라 배웠는데, 서진영 역시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마침내 오진영(吳震英)이 강학하던 호서의 망화재로 가서 수년 동안 그를 모시고 학문하였다.

일제의 식민통치가 강화되어 단발령을 내리고 호적을 새로 고치는 등 일제의 핍박이 가속화되자, 이보림은 당시의 시세를 통탄하며

“우리가 오늘날 구차스럽게 살고 있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니, 오직 수사선도(守死善道) 네 글자의 부적을 이마에 붙여두어야 하겠다.”

라고 하였다. ‘수사선도’는 죽음을 무릅쓰고 훌륭한 도를 지킨다는 뜻으로, 공자의 『논어』「태백」편에 나오는 말이다. 공자는 배우는 즐거움을 말하여

“독실하게 진리를 믿고 배우기를 좋아하고, 죽음으로 선한 도를 지키며, 위태로운 나라에는 들어가지 않고 어지러운 나라에는 살지 않으며, 천하에 도가 있으면 나타나고, 도가 없으면 숨어야 한다. 나라에 도가 있을 때는 가난하고 천한 것이 부끄러운 일이며, 나라에 도가 없을 때는 부하고 귀한 것이 또한 부끄러운 일이다.”

라고 하였다.

이보림은 공자의 이 구절을 인용하여 공자와 맹자 이래 3000년간 전해지는 유교의 도학정신을 지켜나갈 것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도학정신을 지켜나가는 일이 조선의 500년 사직을 지키는 것 이상으로 중요하다고 인식하였다. 이에

“도를 세우는 일은 선왕의 법복(法服)을 입고, 선왕의 법언(法言)을 말하며, 선왕의 도덕을 실행함에 있으니, 지금 세상에 살면서 옛 날의 도를 밝히는 것이 곧 그것이다”

라고 강조한다. 여기에서 ‘옛날의 도’는 공자와 맹자 이래 전해져 내려오는 유학의 도학정신을 말한다. 이러한 수도(守道)의 정신에서 당시 힘을 떨치던 일본이나 서구열강을 오랑캐로 규정하고 배척하였다. 이에 서재를 열어 원근의 학생들을 모아 가르쳤는데, 집이 좁아 모두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처럼 이보림은 일생을 통하여 시속의 변화에 영합하지 않고 의연하게 전통을 지키려는 신념으로 일관했다.

한편 여기에서 그 시대의 단발령과 관련된 일화를 소개한다. 일본은 한국인의 정신과 반일정서를 말살하려는 의도에서 단발령을 단행하였다. 한국에는 머리를 소중히 여기는 전통이 있었는데, 이것은 신체발부(身體髮膚)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감히 훼손하지 않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라는 유교의 가르침에서 유래된 것이다. 많은 선비들은 ‘손발은 자를지언정 두발을 자를 수는 없다’고 분개하여 정부가 강행하려는 단발령에 완강하게 반대하였다. 물론 이보림은 단발을 거부하는 당위성에 대해서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이보림은 단발령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어떤 자가 말하기를 ‘무릇 신체발부는 모두 부모님의 소유이니 그 소중함은 머리카락이든 몸이든 한 가지인데, 이제 머리카락과 몸을 그렇게까지 구분하느냐’고 질문하였다. 이보림이 말하였다. ‘그렇지 않다. 몸이 비록 중하지만 실은 일개 고깃덩어리에 불과하다. 머리 위의 터럭 하나에는 중화(華)와 오랑캐(夷)의 구분이 걸려있다. 그 소중함이 어찌 몸의 백배 정도뿐이겠는가. 무릇 오랑캐(夷)는 곧 사람이 아닌 짐승이다. 머리카락이 남아 있으면 몸이야 비록 죽더라도 중화(華)의 명분은 남아있고, 머리카락을 깎으면 몸이 비록 살아남더라도 짐승이란 명분이 이미 성립된다. 부모의 소중한 몸을 짐승과 같은 곳으로 돌리는 것이 과연 옳겠는가. 오호라. 내 머리카락 하나를 보존할 수 있으면 비록 몸이 천번만번 부서져 조각날지라도 삶과 죽음에 유감이 없을 것이다. 다만 몸을 보존하는 것을 중하게 여겨서 짐승과 같은 지경으로 돌아가는 것에 비한다면 어찌 하늘과 땅의 차이만 있겠는가.”

이것은 어떤 사람이 ‘손발을 자를지언정 두발을 자를 수 없다’는 당시의 시속에 대해, 손발도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이고 두발도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인데, 어째서 손발을 자르는 것은 괜찮고 두발을 자르는 것은 안된다고 하는지에 대해 질문한 것이다. 이러한 질문에 이보림은 두발은 중화에 해당하고 몸은 오랑캐에 해당한다는 화이(華夷)의 관계로써 대답한다. 몸은 오랑캐와 같은 짐승의 명분에 해당하고 머리카락은 중화의 명분에 해당하기 때문에 ‘손발을 자를지언정 두발은 자를 수 없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보림은 ‘화이’를 다음과 같이 구분하였다.

“높다란 관을 쓰고 상투를 틀고 비녀 꽃은 것은 화(華)요, 머리를 깎고 이마를 밀어버리는 것은 이(吏)이다. 사당을 세워서 조상을 제사하는 것은 ‘화’이고, 시신을 불사르고 제사를 폐하는 것은 ‘이’이다. 동성과 혼인하지 않는 것은 ‘화’이고, 형수 제수나 누이와 관계하는 것은 ‘이’이다. 폐백을 받지 않고서는 친하지 아니함은 ‘화’이고, 남녀가 스스로 짝을 구하는 것은 ‘이’이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임금에게 충성하는 것은 ‘화’이지만, 아버지와 군주를 시해하는 것은 ‘이’이다. 이런 것들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오호라. 요즈음은 어찌 된 세상인지 ‘이’로써 ‘화’를 어지럽히며, ‘화’이면서 ‘이’로 들어가니, 이는 천하의 첫 번째 큰 변괴이다. 무릇 의리를 가진 자라면 ‘이’를 물리치는데 급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글을 통해 아무리 시대가 변한다 하더라도 사람의 삶에는 시대를 넘어서 변하지 않는 가치가 있고, 이러한 가치를 굳게 지키는 것이 지식인의 본분이라는 신념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보림은 해방 후 강상윤리를 지키며 후학들을 가르치는 일에 종사하다가 1972년 70세로 세상을 마쳤다. 저서로는 『월헌집』16권이 있다. 1986년에 고향의 유림들이 김해시 장유의 덕정에 명휘사(明輝祠)를 건립하여 그의 신주를 모시고 있다.

 

[참고문헌]: 「월헌 이보림의 생애와 학문」(정경주, 『간재학논총』4, 간재학회, 200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월헌선생문집』(보경문화사,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