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인의 돌격대장 조헌


 

서인의 돌격대장 조헌

 

헌(1544-1592)은 의병장으로 알려져 있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조헌” 조에 의하면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당시 옥천에 있던 조헌은 휘하의 문인 이우(李瑀) 등과 더불어 의병 1,600여 명을 이끌고 파죽지세로 진격하는 왜적들과 맞섰다. 그리하여 8월 1일 영규(靈圭)가 지휘하는 승군(僧軍)과 함께 청주성을 수복하였다. 그러나 충청도순찰사 윤국형(尹國馨)의 방해로 의병이 강제해산당하고 불과 700명의 남은 병력을 이끌고 금산으로 행진, 영규의 승군과 합진해서, 전라도로 진격하려던 고바야가와(小早川隆景)의 왜군과 8월 18일 전투를 벌인 끝에 중과부적으로 모두 전사하였다. 후세에 이를 숭모하여 금산전투라 일컬었다.

1536년에 출생한 율곡에 비하여 8살이 연소한 조헌이 처음부터 율곡, 성혼, 송강 등과 교분이 깊었던 것은 아니었다. 조헌이 송강과 교분을 나누면서 율곡과 성혼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조헌의 행장에 이런 기록이 나온다.

신사년(1581)에 조헌(趙憲)이 전라 도사가 되었는데, 얼마 안 되어 공(송강)이 감사가 되었다. 이때는 조헌이 이발(李潑)ㆍ김우옹(金宇顒)과 더불어 교유하던 터라, 처음에 공을 헐뜯는 말을 믿고 그날로 병을 칭탁하여 벼슬을 버리고 가려고 하므로 공이 굳이 청하여 보고 말하기를,

“공이 나와 더불어 평소 잘 알지 못하는 터인데 무엇으로 그 흉칙스럽고 험한 줄을 아는가. 머물러서 나와 같이 일을 하다가 진짜 소인(小人)임을 알고 나서 떠나도 늦지 않소.”

하였으나 조헌이 듣지 않았다. 공이 다시 이이와 성혼에게 소개를 청하여 조헌과 같이 일할 것을 원하였다. 뒤에 교분이 날로 친밀해지니 조헌이 말하기를,

“처음에 내가 밝지 못해서 하마터면 공을 잃을 뻔했다.”

하였다.

조헌은 1567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568년(선조 1) 처음으로 관직에 올랐다. 당시 그와 교분이 있던 이발(1544-1589)은 1573년(선조 6) 알성문과에 장원하고 이듬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고, 이조정랑으로 발탁되었다. 김우옹(1540-1603)은 1567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동서로 분당이 된 후로 이발과 김우옹은 송강을 비롯한 서인을 매섭게 비판한 동인의 중진들이다.

선조 8년(1575)에 동서 분당이 된 후로 동인과 서인 사이의 반목과 질시는 해가 갈수록 심해졌다. 신사년(1581)이면 분당이 된 후로 6년이 되는 해인데, 당시 조헌이 전라도사가 되었을 때 전라감사로 송강이 임명되자 같이 일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기사는 동서 양당 간의 반목의 정도를 보여준다.

물론 이는 동서 양당의 반목의 정도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거니와, 송강을 소인으로 생각하고는 과감하게 관직을 버리고 낙향해 버린 조헌의 성품을 잘 보여준다. 조헌의 이와 같은 성품은 무자년에 5차에 걸쳐 상소를 한 데에도 드러난다.

무자년(선조 21년, 1588) 여름에 공주제독(公州提督) 조헌이 상소를 올렸다. 집이 가난하여 노자와 양식이 없었으므로 서울에 오지 못하고 감사에게 전례에 따라 전달하여 줄 것을 청하였는데, 감사가 상소 격식에 어긋나는 것이 많다 하여 받지 않고, 재소(再疎)ㆍ3소를 하여도 모두 받지 않았다. 당시 사람들이 그를 뼈에 사무치도록 미워하여 심지어 조헌(趙憲)이 평소 우거(寓居)하던 주인에게 심한 형벌과 문책을 하기까지 하였다. 노수신(盧守愼)이 일찍이 천산갑(穿山甲)을 조헌에게 주면서 잠잠히 있을 것을 암시하였으나 조헌이 듣지 않고 또 4소를 올렸는데, 공주(公州)의 무인 원상(元祥)이란 자가 감사에게 올리지 않고 조헌의 집에 돌려보내고 글을 가지고 갔던 향교의 종을 매질하기까지 하였다. 조헌이 또 5소를 올려서 그 상황을 갖추어 진술하였으나, 감사가 또 받지 않았다.

이 외에도 1589년 지부상소(持斧上疏)로 시폐(時弊)를 극론하다가 결국 길주 영동역(嶺東驛)에 유배되었고, 1591년 일본의 도요토미(豊臣秀吉)가 겐소(玄蘇) 등을 사신으로 보내어 명나라를 칠 길을 빌리자고 하여, 조정의 상하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옥천에서 상경, 지부상소로 대궐문 밖에서 3일간 일본사신을 목벨 것을 청하기도 했다.

선조 19년 병술년에 올린 소에서는 이이와 성혼의 학술이 바르고 나라에 충성하는 정성을 극력으로 진술하고, 동인들이 현명한 사람을 방해하며 나라를 그르쳤다고 하고, 서인이 은밀한 중상으로 배척받았다고 하는 내용을 일일이 거론하였는데, 수만 자(字)에 달했다.

또 선조 21년 무자년 정월에 올린 소에서는 노수신(盧守愼)ㆍ정유길(鄭惟吉)ㆍ유전(柳㙉)ㆍ이산해(李山海)ㆍ권극례(權克禮)ㆍ김응남(金應南)이 붕당을 만들어 나라를 병들게 한다 하고, 또 박순(朴淳)ㆍ정철(鄭澈) 같은 어진 이가 먼 지방에 버림당한 것에 대해 논하며, 또 송익필(宋翼弼)ㆍ서기(徐起)가 모두 장수의 재능이 있다고 논하기도 했다.

조헌은 정여립을 역적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훗날 이발이 정여립 모반 사건에 연류되어 옥에 있으면서 같이 갇혀 있는 사람에게

“내가 조헌의 말을 듣지 않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구나.”

하였다. 조헌이 일찍이 이발에게

“여립과 절교하지 않으면 장차 큰 화를 입을 것이다.”

하였기 때문이다.

 

실상 정여립 모반 사건 전에 정여립을 극구 배척하고 탄핵했던 이가 조헌이다. 그러하기에 이발에게도 정여립과 절교하지 않으면 장차 큰 화를 입을 것이라고 하였다. <일월록>에 생원 양천회(梁千會)가 올린 소를 기록하고서, 만약 역적 사건이 드러나기 전에 이 소장을 올렸다면 그 공적이 조헌과 서로 견줄 만한 것이라고 한 대목에서 드러나듯, 정여립 모반 사건 전에 정여립이 역모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고 그를 강력하게 성토한 이가 조헌이다.

그럼 무엇으로 조헌은 정여립이 모반을 할 것임을 알았다는 것인가? <일월록>에 이렇게 적혀있다.

조헌이 늘 말하기를,

“여립은 반드시 역적이 될 것이다.”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사람들이 묻기를,

“어떻게 그것을 미리 알았는가.”

하니, 조헌이 답하기를,

“여립이 일찍이 어전에 있을 때 자못 좋지 못한 말과 기색이 있었으므로, 임금께서 이르시기를, ‘여립은 패기가 많아서 옆에 가까이 있게 하는 데는 맞지 않는다.’ 하시면서 한참 동안 이윽히 보셨으나, 여립은 별로 두려워 하는 기색도 없더니, 물러 나와서 섬돌을 다 내려온 후에 눈을 부릅뜨고 뒤를 돌아다 보았으니, 이것이 역적이 아니고 무엇이냐.”

하였다.

조헌의 상소문은 꾸밈이 없고 직설적이라 그의 입장을 동조하는 자는 수긍할 수 있겠지만 논박을 당하는 당사자들과 동조자들이 보기에는 과도하고 일방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이는 그의 충직한 성품과도 관계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의병장으로 목숨을 기꺼이 바칠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의병장이란 전투를 지휘하는 지휘관으로서 사세를 예측하고 준비하는 능력이 있어야 할 것인데 이런 능력이 정여립의 모반을 예측한 데에서 발휘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