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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형수(閔亨洙, 1690-1741)


민형수(閔亨洙, 1690-1741)                                  PDF Download

 

형수는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할아버지는 민유중(閔維重)이고, 아버지는 좌의정 민진원(閔鎭遠, 1664-1736)이다. 민익수와는 사촌간이다.

조부 민유중은 숙종의 장인으로 인현왕후의 아버지이다. 노론에 속했고, 자의대비 복상문제 때 대공설을 지지했다. 딸이 숙종의 계비가 되자 여양부원군이 되었다. 경서에 밝아 명망이 높았다. 대사헌 민기중(閔蓍重)과 좌의정 민정중(閔鼎重)의 동생이다.

부친 민진원은 어머니가 좌찬성 송준길(宋浚吉)의 딸이고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숙종비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오빠이자 우참찬 민진후(閔鎭厚)의 동생이다. 1691년(숙종 17)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했으나, 1689년의 기사환국 이후 인현왕후가 유폐되고 노론 일파가 크게 탄압을 받던 때여서 등용되지 못하였다. 1697년 이광좌(李光佐) 등과 함께 홍문록(弘文錄)에 뽑히고 수찬(修撰)에 재등용되었다.

1715년 대사성으로 있으면서 ⌈가례원류(家禮源流⌋의 간행을 둘러싸고 노론·소론 간에 당론이 치열해지자 노론 정호(鄭澔)를 두둔하다가 파직, 문외출송(門外黜送)되었다.

1729년 중추부판사가 되어 「가족제복론 加足帝腹論」을 찬진(撰進)하였다. 그 뒤 당쟁을 종식시키려는 영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까지 소론과 타협하지 않고 소론을 배격하는 노론의 선봉장으로 활약하였다.

1730년 기로소에 들고 1733년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공은 1719년(숙종 45) 사마시에 합격하고, 1725년(영조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1726년 설서(說書)를 거쳐, 검열(檢閱)·봉교(奉敎)·겸설서·한림(翰林) 등을 역임하였다.

1729년(영조 4년) 정언(正言) 및 별겸춘추로서 정미환국 이후 노론의 거두인 아버지가 밀려나고 소론이던 이광좌(李光佐)가 좌의정으로 등장하게 된 사실을 신원(伸寃)하는 요건으로 이광좌를 소척하려 하였다가 이천현감으로 쫓겨났다.

그 뒤 1733년 부수찬이 되었으나, 다시 이광좌를 소척하다가 갑산(甲山)에 유배당했다. 이듬해 풀려나 1735년 부교리·교리·부수찬 등을 거쳐, 1736년 승지·대사간·금천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1739년 부사직(副司直)에 이르러서, 동생 통수(通洙)와 함께 다시 이광좌를 소척하다가 또 해남현에 찬배되었다. 뒤에 곧 풀려나 1740년 승지를 거쳐 도승지에 이르렀다.

1741년 형조참판을 거쳐, 함경감사 때는 북관의 진보(鎭堡) 설치에 힘을 기울였다. 아버지 민진원의 신원을 위하여 이광좌를 끈질기게 소척하려 하였고, 이로 인하여 자신이 또한 파란을 많이 겪었다.

민형수가 부친 민진원의 신원을 위해 배척한 이광좌(李光佐, 1674-1740)는 이항복의 현손으로 소론의 영수였다. 1694년(숙종 20)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관직을 시작하였다.

1721년(경종 1) 호조참판을 거쳐 사직(司直)에 있으면서 왕세제인 연잉군(延礽君, 영조)의 대리청정을 적극 반대하여 경종이 이를 취소하게 하는 등 경종 보호에 명분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나섰다.

1725년(영조 1)에는 영의정에 이르렀으나 노론의 등장으로 파직당했다.

1728년에 정미환국으로 소론정권이 다시 등장하자 영의정에 올랐다.

1730년에는 소론의 거두로서 영조에게 탕평책을 소하여 당쟁의 폐습을 막도록 건의했다.

1740년 영의정으로 재직하던 중 박동준(朴東俊) 등이 중심이 되어 삼사의 합계(合啓)로 호역(護逆)한 죄를 들어 탄핵을 해오자 울분 끝에 단식하다가 죽었다.

민형수가 정언이 되어 영조 5년에 올린 상소는 영조 4년에 일어난 무신난과 경종의 죽음에 대한 미묘한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 이는 노론의 수장이었던 부친 민진원을 변호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당시의 복잡한 정치적 뇌관을 건드리는 것이었기 때문에 영조로부터 지속적인 견책을 받았다.

“아! 지난해의 흉악한 역적의 변고는 어찌 차마 말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변란은 발생하는 날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연유하는 바가 있어서 일어나는 것이니, 진실로 폐단의 근원을 뽑아 화근(禍根)을 끊지 못한다면, 한때 조금 안정된 것은 믿을 수가 없어서 앞으로의 근심이 말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대개 일찍이 거슬러 올라가 논한다면 갑진년495) 대상(大喪)을 당했을 적에 편찮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는데, 갑자기 휘음(諱音)을 받들게 되었었습니다. 약원(藥院)에서도 시약청(侍藥廳)을 설치한 일이 없었고, 교문(敎文)에도, ‘한밤에 옥궤(玉几)에 기댔다496) ’는 말만 있었습니다. 그래서 온 나라 신민(臣民)들이 이르기를, ‘우리 임금께서 불행히 병이 없었는데 갑자기 홍서(夢逝)하셨다’고 하여 사모하여 통곡하며 망극(罔極)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갑절이나 더했었습니다. ……

조정 안에서는 또한 한 사람도 전하를 위하여 근본을 추구(推究)해서 분명하게 말을 하여 위로는 성상의 무함(誣陷)을 변석(辨釋)하고 아래로는 간사한 마음의 싹을 꺾어버리는 자가 없었습니다. ……신이 이런 때에 언관(言官)의 직책에 있으면서 어찌 명을 들은 즉시 달려나와서 극력 말을 하고 힘을 다해 논하여 전하께서 받으신 망극(罔極)한 무함을 남김없이 통쾌하게 풀어드리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아! 신자(臣子)가 된 사람으로서 임금과 어버이가 무함받음을 목도(目覩)하고 한마디 말도 변명(辨明)하지 못하고 있으니, 신(臣)은 진실로 인륜에 죄를 지은 사람입니다.”

 

이 소를 시작으로 민형수는 수차에 걸쳐 이에 대한 소를 올리고 그때마다 영조는 엄한 비답을 내린다. ⌈영조실록⌋ 9년에 민형수의 소와 관련한 사관의 평이 기록되어 있다.

“무신년 이후로 이광좌(李光佐)·조태억(趙泰億)의 죄를 성토한 것으로 이 상소처럼 엄정한 것은 없었다. 그런데 주상(主上)은 위를 무함한 흉언(凶言)이 오로지 이광좌가 병을 숨긴 사실과 조태억의 교문에서 비롯되었음을 알지 못하고, 이제 와서 애초에 변명할 무함이 없다고 하였으며, 민형수(閔亨洙)의 무리가 변무(辨誣)한다고 말한 것이 도리어 역적의 구실거리가 되었다. 이것을 혐의로 삼아 점점 더욱 격렬해져 심지어 지난 일을 제기하여 말이 무엄하다는 하교가 있기까지 하였으니, 민형수의 무리가 임금이 무함당한 것을 변명한다는 구실로 이광좌와 조태억의 죄를 얽어 놓은 듯함이 있었다. 한 번 말한 것이 겨우 들어가자마자 엄한 견책이 뒤따라 장차 의리가 밝혀지지 못하고 흉도(凶徒)가 그치지 않게 되었으니, 식자(識者)의 근심과 탄식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사관이 거론한 조태구(趙泰耉, 1660-1723)는 최석정(崔錫鼎)의 문인으로 소론의 핵심인사다. 1702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검열·지평·정언 등을 지냈고 1721년 호조참판으로 있으면서 최석항(崔錫恒)·이광좌(李光佐) 등과 함께 세제(世弟 : 뒤의 영조) 책봉과 대리청정을 반대하여 철회시켰다.
⌈영조실록⌋ 17년 조에 기록된 민형수의 졸기가 다음과 같다.

“민형수는 문충공(文忠公) 민진원(閔鎭遠)의 아들이다. 정언(正言)이 되어 이광좌(李光佐)의 휘질(諱疾) 한 죄를 논핵하였다가 임금의 비위를 거슬려 삭출당하였고, 옥당(玉堂)에 들어와서는 또 이광좌의 죄를 극언하였다가 갑산부(甲山府)에 귀양갔다. 오랜 시일이 지난 후 석방되어 승지로 발탁되고 곧바로 다시 형조 참판에 발탁되어 조정에서 바야흐로 마음에 들어 임용하려 하였는데, 민형수가 성격이 소직(疏直)하여 다른 사람과 더불어 말함에 진역(畛域)을 두지 않아서 조현명(趙顯命)의 유혹을 받아 위시(僞詩)를 들추어내어 국옥(鞫獄)을 이루게 되니 이에 민형수가 마음으로 통한(痛恨)을 하며 졸(卒)하였으므로 그 형(兄) 민창수(閔昌洙)가 진소(陳疏)하여 그 마음을 폭로하였다.”

 

<참고문헌>
『영조실록(英祖實錄)』
민족문화대백과사전

민익수(閔翼洙, 1690-1742)


민익수(閔翼洙, 1690-1742)                                  PDF Download

 

익수는 자는 사위(士衛)이고 호는 숙야재(夙夜齋)이며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관찰사 민광훈(閔光勳)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이고, 아버지는 민진후(閔鎭厚)이며, 대사헌 민우수(閔遇洙)의 형이다.

조부 민유중은 숙종의 장인으로 인현왕후의 아버지이다. 자의대비 복상문제 때 대공설을 지지했다. 딸이 숙종의 계비가 되자 여양부원군이 되었다. 노론에 속했다. 경서에 밝아 명망이 높았다. 대사헌 민기중(閔蓍重)과 좌의정 민정중(閔鼎重)의 동생이다.

부친 민진후(1659-1720)는 호는 지재(趾齋)이고 시호 충문(忠文)이다. 숙종 계비 인현왕후의 오빠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1681년(숙종 7) 생원이 된 뒤, 1684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正字)에 등용되었다.

1697년 충청도관찰사가 되었다. 대사간·강화부유수·형조참의·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하였다.

1718년 숭록대부에 올랐다. 내국제조(內局提調)로서 홍문관제학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뒤에 개성부유수를 지냈다.

공은 진사로서 세마(洗馬)의 자리에 올랐으나, 조정이 당론으로 소란스러운 것을 보고는 과거를 포기하고 동생 민우수와 함께 여강(驪江)으로 돌아가 은거하였다. 그 뒤 공조좌랑·사어(司禦) 등에 제배되었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1729년 재행(才行)으로 한덕필(韓德弼) 등과 함께 별천(別薦)에 올랐다가, 1737년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음보(蔭補)로 기용되었다.

1740년 지평(持平)으로 대직(臺職)에 올라 그해에 장령(掌令)으로 승진하였다. 그런데 같은 해 이른바 위시사건(僞詩事件)에 연류된다.

영조 16년(1740)에 위시사건과 관련하여 영조가 김원재(金遠材)를 친히 국문하면서,

“네가 임금을 범하여 근거 없는 시(詩)를 진신(搢紳)들 사이에 전파하였는데, 이는 너 같은 어리고 미련한 사람이 지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사주한 자가 있을 것이다. 사실대로 정직하게 공초하라.”

명한다.
이에 김원재가 이 시를 집에서 보관하게 된 내력을 말하길,

“그 시는 백망(白望)이 가지고 온 것으로, 어제(御製)라고 하면서 신의 집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전하여 주었는데, 또한 신의 아비가 세상에 살아 있었을 적에도 들었습니다. 성상께서 이미 이런 일이 없다고 하시니, 신이 어떻게 감히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공초한다.
아울러 이 시가 알려진 경우를 밝히는데,

“신의 아비가 직접 국가에서 받은 것이 아니고 백망이 전하여 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목릉(穆陵, 선조)께서 신의 집에 내사(內賜)한 어필(御筆)과 함께 봉함하여 보관해 두었었습니다. 그러나 당초에 다른 사람에게 전하여 보여 준 일이 없었는데, 김진옥(金鎭玉)·민익수(閔翼洙)는 지친(至親) 사이이기 때문에 보여 주었을 뿐입니다.”

라고 했다.
정조가 김원재로 하여금 위시(僞詩)를 외어서 고하게 했다.

“동국의 대현은 사계옹이고/지극한 행실은 또 서하공이 있다.

서하공의 후손에 김공이 있는데/ 충효와 학문이 조부와 같다.

마치 상(商)나라의 부열255) 이 은거한 것과 같고/

남양 땅에 제갈양이 은거한 것에 견줄 만하다.

태산 같은 높은 명성 들었으나 얼굴을 보지 못했는데/

지난밤에 갑자기 꿈속에서 만났네.

어느 때나 서로 만나 기쁨을 함께 할거나/

태평연월 누리면서 꽃밭에서 취하고 싶네.”

 

정조는 이 시가 정녕 거짓된 시라는 점을 거듭 밝히자, 김원재가 재차 말하길,

“신의 아비가 백망에게 속은 것인데 백망이 이 시를 어느 곳에서 얻었는지 신은 실로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시를 주고받을 즈음에는 신의 나이가 아직 어렸었으니, 무엇으로 연유하여 그것이 거짓인 줄 알았겠습니까? 단지 신의 집에서 전하여 오는 말만 들었을 뿐인데, 신의 어미가 을사년(정조 원년) 뒤에 비로소 이 시를 민익수(閔翼洙)에게 보였었으니, 민익수를 불러 물어 보면 혹시 그 진위를 변별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고 공초했다.
송인명 등이 민익수도 아울러 국문할 것을 청하였고 또 민형수(閔亨洙)가 위시(僞詩)를 깊이 믿었다는 것으로 죄를 가하려 했지만 정조가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이 시를 김원재 부친에게 전해주었다는 백망(白望)은 신임옥사에 관여된 인물이다. 신임옥사는 목호룡(睦虎龍)이 백망(白望)·오서종(吳瑞鍾)·정인중(鄭麟重) 등이 경종을 시해하고 이이명(李頤命)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음모를 꾸몄다고 거짓으로 고변하여 노론 4대신을 사사하게 하고 그 외 수백 명을 살해한 사건이다.

영조 16년에 위시사건이 발생하고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영조 18년에 민익수가 졸하였는데, ⌈영조실록⌋18년 조의 졸기는 다음과 같다.

전 사헌부 장령 민익수(閔翼洙)가 졸하였다. 민익수는 판서 민진후의 아들로, 자신을 단속하고 행실을 닦아 능히 그 가풍을 이었으며, 신축년·임인년 이후로는 과거 공부를 그만두었다. 대직(臺職)에 천거하여 제배하였으나 고사하고 끝내 명에 응하지 아니하다가 이때에 와서 졸하니,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

⌈영조실록⌋ 42년 조에는 영조가

“민익수(閔翼洙)는 참으로 대가(大家)의 사람이다. 당습(黨習)에는 비록 몰두하나, 그 사람은 어질다.”

라고 평했다.
⌈고종실록⌋ 12년 조에는 이최응이

“문충공(文忠公) 민익수(閔翼洙)는 일생동안 선정신(先正臣) 김장생을 존경하고 사모하였으며 학문은 극기(克己)하는 데 주력하였습니다. 신사년(1701)과 임오년(1702)의 사화 후에는 한결같이 임금의 무함을 밝히는 데 주력하였기 때문에 조정과 선림들이 명분과 의리의 영수로 대하였습니다. 영묘조(英廟祖)의 50년 동안 의리가 해와 별처럼 빛났던 것은 사실 문충공이 논의를 제창한 힘입니다. 영원히 조천(祧遷)하지 말도록 하여 높이 보답하는 뜻을 나타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고종이 윤허하였다.
<참고문헌>
『영조실록』
『고종실록』
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남유용(南有容, 1698-1773)


남유용(南有容, 1698-1773)                                  PDF Download

 

유용은 본관은 의녕(宜寧)으로 자는 덕재(德哉)이고 호는 뇌연(雷淵)·소화(小華)이다. 할아버지는 대사헌 남정중(南正重)이고 아버지는 동지돈녕부사 남한기(南漢紀)이고, 어머니는 청송심씨(靑松沈氏)이다. 이재(李縡)의 문인이다. 영의정 남공철(南公轍, 1760-1840)이 아들이다.

1721년(경종 1) 진사시에 급제하여 강릉참봉(康陵參奉), 영춘현감(永春縣監)을 지냈다. 1740년(영조 16)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에 등용된 후 여러 관직을 거쳤다. 1754년(영조 28) 원손보양관으로 있다가 다음해 『천의리편(闡義理編)』의 찬집당상(纂集堂上)을 겸하였고 이후 예문관제학, 좌부빈객, 대제학, 대사헌을 역임하였다.

1752년 가선(嘉善)으로 승계한 뒤 승문원제조·대사성·예조참판·예문관제학·홍문관제학 등을 거쳐, 1754년에 원손보양관(元孫輔養官)이 되어 뒤에 정조가 된 세손을 세살 때 무릎에 앉혀놓고 글을 가르쳤다. 이런 인연으로 정조는 그 은덕을 오래도록 잊지 못했다. 1757년(영조 33) 원손사부(元孫師傅)를 거쳐 예조참판으로 옮겼고 1764년(영조 40) 우빈객, 1767년 봉조하가 되었다.

1772년 ⌈명사정강(明史正綱⌋을 편찬했으나, 서법이 존주지의(尊周之義)에 심히 어긋난다고 하여 영조는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이는 그의 역사관이 성리학적 역사인식 방법을 극복하고자 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로 말미암아 장차 조선사기(朝鮮史記)를 편찬할 인물이라는 평을 받은 바 있다.

영조 33년(1757) 남유용이 원손사부로 있을 적에 영조가 원손을 불러 몇 가지를 시험하여 보고는 만족하면서, 하교하길,

“눈앞의 급선무 중에 원손을 보도하는 것보다 큰 것은 없다. 사부 남유용은 교도(敎導)하기를 잘하여서 성취(成就)시킬 희망이 있다. 마땅히 가장(嘉奬)하는 뜻을 보이기 위하여 호피 한 벌을 특별히 내린다.”

이어서

“지금 이것을 경에게 주는 것은 경으로 하여금 고비(皐比)를 깔고 앉은 스승이 되라는 것이니, 경에게 포장하려는 것이 아니고 종사(宗社)를 위한 것이다.”

라고 했다.

영조실록⌋ 49년에 남유용이 졸기가 기록되어 있다. 남유용이 담박하고 순정한 인물이라고 적고 있다.

“봉조하(鳳朝賀) 남유용(南有容)이 졸하였다. 남유용은 고 대제학 남용익(南龍翼)의 손자인데, 자(字)는 덕재(德哉)이고, 호는 뇌연(雷淵)이다. 형 남유상(南有常)과 더불어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 과거에 올라 승문원 부제학을 경유하여 세손보양관(世孫輔養官)·유선(諭善)을 거쳐 벼슬이 정경에 이르고 대제학을 지냈으며, 70세에 상소하여 물러가 쉬기를 청하니 봉조하를 제수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졸하였다. 사람됨이 탄이(坦夷) 하고 순실(純實)하여 세상 일에 담연하였다.

정조는 남유용이 원손보양관(元孫輔養官)으로 글을 가르친 공덕을 오래도록 잊지 못했다. 정조 16년 남유용의 아들 남공철이 과거에 합격하자 검교직각(檢校直閣) 서영보(徐榮輔)와 남공철(南公轍)을 불러 보았다.

남공철에게 이르기를,

“네가 보양관(輔養官)의 아들로서 지금 문과에 급제하였으니, 내 마음이 감격스럽다. 고 재상 서문청공(徐文淸公)은 너의 아비와 더불어 같이 내가 어렸을 때의 스승이었는데, 네가 서영보와 동시에 조정에 서게 되었으니, 매우 귀한 일이다.”

하고 전교하길,

“남 보양관(南輔養官)은 내가 3살 때부터 수학(受學)하였는데 무릎 위에 앉히고 성심으로 가르쳤으니, 내가 문자에 처음으로 향방을 안 것은 바로 남 보양관이 훌륭히 가르친 공로였다. ……내가 왕위에 오른 뒤에 비록 그 자손을 보살피기는 하였으나 어찌 그 공로를 보답하였다고 할 수 있겠는가. 지금 다행히도 그 아들이 문과에 급제하였으니, 그 가문을 위해 다행스러움이 적지 않다. 고 정승 서지수(徐志修)는 바로 남 보양관(南輔養官)과 더불어 같은 때 보양관의 임무를 맡고 있었는데 그 손자가 과거에 급제하던 날 관원을 보내어 제사를 지냈으니, 지금 어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고 봉조하(故奉朝賀) 남유용(南有容)의 집에 검교 직각(檢校直閣) 서영보(徐榮輔)를 보내어 제사를 지내도록 하라. 제문(祭文)은 내가 직접 짓겠다. 옷과 음식을 가지고 가서 그 부인의 안부를 물으라고 명하였다.”

 

남공철은 1780년(정조 4) 초시에 합격하고, 1784년에 아버지가 정조의 사부였던 관계로 음보로 세마를 제수 받았고, 이어 산청과 임실의 현감을 지냈다. 그러다 1792년 친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초계문신에 선임되었으며, 친우이자 후일의 정치적 동지인 김조순(金祖淳)·심상규(沈象奎)와 함께 패관문체를 일신하려는 정조의 문체반정 운동에 동참했고 그 뒤 순정한 육경고문(六經古文)을 깊이 연찬함으로써 정조 치세에 나온 인재라는 평을 받았다.

정조 때에는 주로 대사성으로서 후진교육 문제에 전념했다. 순조 즉위 뒤 『정종실록』 편찬에 참가했으며, 아홉 번씩 이조판서를 제수 받고, 대제학을 역임했다. 1807년(순조 7)에는 동지정사로서 연경에 다녀왔고, 1817년에 우의정에 임명된 뒤 14년간이나 재상을 역임했으며, 1833년 영의정으로 치사해 봉조하가 되었다.
<참고문헌>
『영조실록』
『정조실록』
안순태, 「뢰연(雷淵) 남유용(南有容)의 삶과 한시」,「한국한시작가연구」 17권, 2013
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종후(金鍾厚, 1721-1780)


김종후(金鍾厚, 1721-1780)                                  PDF Download

 

종후는 자는 자정(子靜)이고 본관은 청풍(淸風)이다. 호는 본암(本庵) 또는 진재(眞齋)이다. 할아버지는 참판 김희로(金希魯)이고, 아버지는 시직(侍直) 김치만(金致萬)이며, 동생이 김종수(金鍾秀, 1728-1799)이다. 민우수(閔遇洙, 1694-1756)의 문인이다.

스승 정암(貞庵) 민우수는 20세 전 사마시(司馬試)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21세 때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을 닦았다. 김창협과 권상하의 문인이다. 후에 1743년 사헌부지평이 되었고 1750년 통정(通政)으로 승차(陞差)하면서 공조참의 겸 원손보양관(元孫輔養官)이 되었다. 1751년 사헌부대사헌을 거쳐 성균관좨주·세자찬선(世子贊善)·원손보양관 등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김종후의 동생 김종수는 1768년(영조 44)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예조정랑, 부수찬(副修撰)을 지내고, 왕세손 필선(弼善)으로 성실히 보좌하였다. 이 때 외척의 정치 간여를 배제해야 한다는 의리론이 정조에게 깊은 감명을 주어, 뒷날 정치의 제1의리로 삼은 정조의 지극한 신임을 받았다.

영조가 죽자 행장찬집당상(行狀纂輯堂上)이 되었고, 그 뒤 승지·경기도관찰사·평안도관찰사를 거쳐, 규장각의 제도가 정비되면서 제학에 임명되었다. 1781년(정조 5) 대제학에 올랐고, 그 뒤 이조판서·병조판서를 거쳐 1789년 우의정에 올랐다.

1792년에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가 올라와 사도세자를 위한 토역(討逆)을 주장하자, 예전에 정조와 대담했던 내용인 “순(舜)·주공(周公)과 같은 대공지정(大公至正)의 도리로서 부모를 섬김이 효도”라는 소를 올려 이 논의를 가라앉혔다. 임성주(任聖周)·윤시동(尹蓍東)·김상묵(金尙默) 등과 친하게 교유했다. 정조는 윤시동·채제공과 더불어 3인을 자신의 의리를 조제하는 탕평의 기둥으로 지적하였다.

김종후는 어려서부터 사부(詞賦)에 능하여 문명이 있었고, 1741년(영조 17) 생원이 된 뒤부터는 성리학자로 알려졌다. 1776년 지평(持平)에 이어 장령(掌令)·경연관을 역임하였다. 이에 1778년 학행으로 천거되어 장령이 되고 경연관을 거쳐 자의(諮議)에 이르렀다.

그는 영조대 신임사화 때에는 장헌세자(莊獻世子)를 궁지에 몰아넣은 홍계희(洪啓禧)·김상로(金尙魯)‧김구주(金龜柱)와 입장을 같이 하였고, 장헌세자의 장인인 홍봉한(洪鳳漢)을 공격하였다. 그 뒤 김구주가 제거되자 원빈(元嬪)의 오빠인 세도가 홍국영(洪國榮)을 따랐다. 다시 원빈이 죽고 홍국영이 물러나자 소를 올려, 그에게 기만당하였다고 변명하였다.

정조 4년(1780)에 김종후의 졸기가 기록되어 있다. <정조실록>은 정조가 죽은 지 6개월 뒤인 1800년(순조 1) 12월에 이병모(李秉模)를 실록총재관(實錄憁裁官)으로 임명하고, 편찬에 착수해 1805년 8월에 완성되었다. 총재관은 이병모·이시수(李時秀)·서용보(徐龍輔)·서매수(徐邁修)였는데, 김종후에 대한 평가가 매우 박하다.

“장령 김종후(金鍾厚)가 졸하였다. 김종후의 자는 백고(伯高)인데, 우의정 김구(金構)의 증손(曾孫)이며 김종수(金鍾秀)의 형이다. 영조 때 경학과 품행으로 천거되었고 지금 주상이 즉위하여 경연관으로 누차 불렀으나 나오지 않았다. 항상 명의(名義)를 가지고 스스로 자랑하였었는데, 홍국영(洪國榮)이 축출될 적에 상소하여 보류하기를 요청하면서 몹시 사리에 어긋난 말을 하였으므로 식자들이 그의 창피함을 비웃었다. 이때에 이르러 졸하니, 특별히 은전을 베풀 것을 명하였다. 그에게 본암집(本庵集)이 있는데,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저서로는 『본암집』이 있고, 편서로 『가례집고(家禮集考)』, 『청풍세고(淸風世稿)』가 있다.
본암집(本庵集)』은 심환지(沈煥之)의 서문이 있고, 서(書)는 그의 스승인 민우수(閔遇洙)와 동문인 김자정(金子靜)·이경사(李敬思)·원인손(元仁孫)·홍자순(洪子順)·신광온(申光蘊)·임성주(任聖周)·강규(康逵)·이홍렴(李弘廉)·김원행(金元行) 등과 주고받은 서신이다. 주로 『대학』·『논어』·『맹자』·『주례』 등 경전에 관한 것과 태극·영(靈)·음양오행·성(性) 등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다. 잡저에도 「심기질변(心氣質辨)」 등 성리학적인 내용이 많이 들어 있다.

가례집고(家禮集考)』는 『가례』를 본문으로 삼고, 삼례(三禮: 儀禮·周禮·禮記)와 그 밖의 경전(經傳), 그리고 유학 및 그 이외의 여러 사상계열의 고전과 역사관계의 저술에서는 물론, 패림소설류(稗林小說類)에서까지 『가례』의 예절과 관계되는 사항을 두루 모아놓았다. 유교관계의 문헌에만 국한하지 않고 여러 분야의 자료까지 동원하여 사례의 관계사항을 추출해서 모아놓은 일은 전통적인 예절의 본질과 발달사정을 넓은 시야에서 고찰하고자 한 폭넓은 시야의 작업이기도 했다. 제자 임육(任焴)이 1801년(순조 1)에 간행했지만 널리 유포되어 이용되지는 못했다.

청풍세고(淸風世稿)』는 조선 후기의 학자 김극형(金克亨)·김징(金澄)·김구(金構) 등 삼대의 시문집으로 1779년(정조 3)에 동생 김종수(金鍾秀)와 합편하여 간행하였다. 이들은 김극형의 5대손이다. 권두에 김양행(金亮行)의 서문이 있다. 권1은 김극형의 『사천집(沙川集)』, 2·3은 김징의 『감지당집(坎止堂集)』, 권4는 김구의 『충헌집(忠憲集)』이 수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영조실록』
『정조실록』
⌈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원행(金元行, 1702-1772)


김원행(金元行, 1702-1772)                                  PDF Download

 

원행은 자가 백춘(伯春)이고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호는 미호(渼湖) 또는 운루(雲樓)인데 미호가 널리 알려져 있다. 아버지는 승지 김제겸(金濟謙)이다. 당숙인 김숭겸(金崇謙)에게 입양되어 종조부 김창협(金昌協)의 손자가 되었다.

김창협의 수제자인 이재(李縡)의 문인이자 조선 후기 집권 계층인 노론 가문의 후손으로 학통을 잇는 존재가 되어 조야(朝野)에 큰 영향력을 미치는 학자의 지위에 있었다. 당시 유수한 산림(山林)의 한 사람으로 명망이 높았다.

1719년(숙종 45) 진사가 되었으나, 1722년(경종 2) 신임옥사 때 조부 김창집이 노론 4대신으로 사사되고, 생부 김제겸과 친형인 김성행(金省行), 김탄행(金坦行) 등이 유배되어 죽음을 당하자 벼슬할 뜻을 버리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1725년(영조 1) 조부·생부·형 등이 신원된 후에도 시골에 묻혀 살며 학문 연구에만 몰두하였다. 그 후 여러 중책으로 불렀으나 모두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당시 호학 내부에서 한원진(韓元震, 1682-1751)과 이간(李柬, 1677-1727) 간의 논쟁이 구체화되고, 이후 호론과 낙론이라는 지역적 대립 구도가 뚜렷해지는 상황 하에서, 김원행은 낙론의 학술적 입장을 대변하였다. 본래 낙학의 연원이 되는 김창협을 비롯한 가학적 전통을 계승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대 낙론의 중심인물인 이재 문하에서 여러 학자들과의 학술 교류를 펼치며 자신의 성리학적 입장을 구체화하였다. 호락논쟁의 전면에서 학술논쟁을 주도하지는 않았지만, 18세기 중반 이후 낙론의 성리학적 입장을 구체화하는 중심인물로 활동하며 낙론계의 학문을 주도하였다.

김원행의 성리설 형성과 관련하여 가장 교유의 폭과 깊이가 깊었던 학자로는 송명흠(宋明欽, 1705-1768), 송문흠(宋文欽, 1710-1752) 형제와 임성주(任聖周, 1711-1788)를 꼽을 수 있다. 송준길의 현손이자 김원행과는 고종사촌 간이었던 송명흠·송문흠 형제, 송명흠 형제와 이종사촌이었던 임성주, 이들은 모두 이재 문하에서 동문수학하였다. 이들은 당시 호락논쟁의 주요 쟁점은 물론, 예학과 경학 등 다양한 학문적 주제에 대해 활발한 학술토론을 전개했다.

김원행의 인물성론(人物性論)을 비롯하여 심설과 명덕설 등은 그의 문인 박윤원(朴胤源, 1734-1799)을 거쳐 19세기 초반 낙론을 주도한 오희상(吳熙常, 1763-1833), 홍직필(洪直弼, 1776-1852)에게 이어졌고, 20세기 초반 낙론의 중심인물로 활약한 전우(田愚, 1841-1922)에게 계승되었다. 한말 영남학계의 중심 학자였던 이진상(李震相, 1818-1886)은 「서김미호인물성설후(書金渼湖人物性說後)」에서 ‘김원행의 성설은 대체로 지극히 정당하다’는 평가를 내렸다.

영조 38년에 영조가 주강(晝講)에서 ⌈대학⌋을 강하면서,

“문왕(文王)이 아들 노릇을 한 것은 효(孝)에서 그쳤는데 나도 효를 하고자 한다. 어제 진전(眞殿)에 전배하고 높은 곳에 올라 명릉(明陵)을 바라보고 왔다.”

또 영의정 홍봉한에게 말하기를,

“세손의 관대(冠帶)와 의양(衣樣)이 꼭 나와 같으니 참으로 귀엽다. 내가 백성들과 즐거움을 함께 해야 한다는 말로 가르쳤는데, 비록 장래에 학문의 성취함이 어떠할지는 모르겠으나 반드시 후덕(厚德)한 군자(君子)가 될 듯하니, 어찌 기특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홍봉한이

“왕손(王孫)이 이미 장성하였으니, 마땅히 봉작(封爵)하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라고 하자 전지를 내리겠다 하고, 왕손 교부(王孫敎傅) 김이안(金履安)에게

“네 아비는 교목세신(喬木世臣)인데, 어찌 와서 나를 보지 않는가? 네가 모름지기 내 뜻을 가서 전하여 반드시 와서 보게 하라.”

했다. 김이안은 김원행의 아들이다.
영조 48년(1772) 조에 김원행의 졸기가 나온다. 간략하지만 김원행의 학문과 인품을 잘 설명하였다.

“성균관 좨주 김원행이 졸하였다. 김원행의 자는 백춘(伯春)으로 안동(安東) 사람이다. 충헌공(忠獻公) 김창집(金昌集)의 손자인데, 문간공(文簡公) 김창협(金昌協)의 후(後)로 출계하였다. 출생하면서부터 특이한 자질이 있고 기개와 도량이 빼어나니 선배들이 모두 국기(國器)로 허여하였다. 임인년(경종 2년, 1722) 후부터는 산골에 물러가 살면서 오로지 위기(爲己)의 학문에 마음을 썼으니, 대개 문간공의 유서(遺緖)를 소술(紹述)한 것이다. 성명(性命)의 근본을 통견(洞見)하고 이기(理氣)의 묘(妙)를 깊이 탐구(探求)하였는데, 조용히 깊고 깊이 생각하더니 각각 그 극(極)을 이해하였다. 평소에 하는 사업이 평정(平正)·적실(的實)하고, 의리(義理)를 변별함이 엄확·명쾌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한 세상의 유종(儒宗)이 되었고 초선(抄選)이 되어 벼슬이 공조 참의·좨주·찬선(贊善)에 이르렀다. 성상의 권우(眷遇)가 융숭하여 정초(旌招)를 자주 내렸는데, 매양 그 정초가 아니면 가지 않는다는 의리로써 사양하며 종신토록 일어나지 않으니, 조야에서 애석하게 여겼다. 이때에 이르러 졸하였는데, 나이는 71세였으며 <미호집(渼浩集)> 약간 권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

미호집⌋은 서문과 발문이 없어 간행 연대는 알 수 없다. 서(書)에는 저자의 종장(宗丈)인 김시관(金時觀)과 성리설(性理說)에 관해 논란한 것, 유척기(兪拓基)와 예설에 대해 논한 것, 송명흠(宋明欽)·임성주(任聖周)·김종후(金鍾厚)·이완(李浣)·홍대용(洪大容) 등 당시의 많은 학자·문인들과 주고받은 서한들이 있다.

이 서한들에는 경의(經義)·심성(心性)·이기(理氣)·예설·사론(史論) 등에 관한 내용이 많아, 훈고학(訓詁學) 및 성리학에 관한 저자의 학문적인 영역이 광범위했음을 알 수 있다.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에서는 이간의 낙론(洛論)을 지지하는 입장이었으며, 예론은 김장생·송시열의 예설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영조실록」
박학래,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의 성리설(性理說) 연구(硏究) -18세기 중반 낙론(洛論)의 심성론에 유의하여」, 「민족문화연구」 71권,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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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행(金文行, 1701-1754)


김문행(金文行, 1701-1754)                                  PDF Download
문행은 자는 사빈(士彬)이고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증조부는 김수증(金壽增, 1624-1701)이고, 조부는 김창국(金昌國)이며, 부친은 돈령도정(敦寧都正)을 지낸 김치겸(金致謙)이다.

김수증은 김상헌(金尙憲)의 손자로 1650년(효종 1)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1652년에는 세마(洗馬)가 되었다. 1670년(현종 11)에는 지금의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영당리에 복거(卜居) 할 땅을 마련하고 농수정사(籠水精舍)를 지었다. 그 뒤 1675년(숙종 1)에 성천부사로 있던 중에 동생 김수항(金壽恒)이 송시열(宋時烈)과 함께 유배되자 벼슬을 그만두고 농수정사로 돌아갔다.

그 후 1689년 기사환국으로 송시열과 동생 김수항 등이 죽자, 벼슬을 그만두고 화음동(華蔭洞)에 들어가 정사를 짓기 시작하였다. 1694년 갑술옥사 후 다시 관직에 임명되어 한성부 좌윤, 공조 참판 등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모두 사퇴한 뒤 세상을 피해 화악산(華嶽山) 골짜기로 들어가 은둔하였다.

공은 1726년(영조 2) 증광사마시(增廣司馬試)에 진사 3등으로 합격하여 해주판관(海州判官)이 되었다. 1746년(영조 22)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 2등으로 급제하여 부교리(副校理)를 거쳐 다음해인 1747년 수찬(修撰), 겸사서(兼司書), 겸문학(兼文學), 부교리, 응교(應敎)를 역임했다. 1748년에는 사간(司諫), 보덕(輔德), 익선(翊善) 및 동지사서장관(冬至使書狀官)을 역임했다. 1753년에는 승지(承旨)에 올랐고, 좌승지(左承旨)와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다.

김문행이 부교리가 되는 과정이 영조 22년 “홍문관 도당록 회권” 항에 나온다. 영조가

“오직 인재를 가려 쓰는 과정에서 저절로 비율이 맞는다면 좋겠지만, 만약 서로 비율을 맞추려는 마음을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다면 곧 색목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문벌만으로 사람을 취하는 것은 아주 옳지 못하다. 권점을 받은 사람이 그 직책에 걸맞지 않을 것 같으면 경들을 문책하겠다.”

라고 했다. 이에 여러 신하들이 회권을 했는데, 6점에는 정순검(鄭純儉)·민백상(閔百祥)·김양택(金陽澤)·윤동도(尹東度)·김문행(金文行)이 뽑혔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6점이 최고점이다.
부교리로 임명 받은 김문행은 영조 22년 12월경에 종조부인 김창집(金昌集, 1648-1722)을 신원하는 소를 올렸다. 김창집은 김수항의 아들로, 숙종이 죽은 뒤 영의정으로 원상(院相)이 되어 온갖 정사를 도맡았다.

경종이 즉위해 34세가 되도록 병약하고 자녀가 없자, 영중추부사 이이명(李頤命), 판중추부사 조태채(趙泰采), 좌의정 이건명(李健命) 등과 함께 연잉군(延礽君, 영조)을 왕세자로 세우기로 상의해, 김대비(金大妃 : 숙종의 계비)의 후원을 얻었다. 1721년(경종 1) 다시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상소해, 처음에 경종은 대소 정사를 세제에게 맡길 것을 허락했으나 소론의 격렬한 반대로 실패하였다. 수개월 후 소론의 극렬한 탄핵으로 노론이 축출되고 소론 일색의 정국이 되었다. 곧 이어 소론의 김일경(金一鏡)·목호룡(睦虎龍) 등이 노론의 반역 도모를 무고해 신임사화가 일어나자, 거제도에 위리안치되었다가 이듬 해 성주에서 사사되었다.

김문행의 상소는 문제가 되었던 “삼자(三字)”와 “삼변(三變)”에 대한 신원이 나온다. 삼자는 신하가 임금을 선택한다는 ‘신택군(臣擇君)’이라는 말이다. 삼변은 경종 원년(1721) 세제(世弟)의 대리 청정 문제를 둘러싸고 노론측에서 처음에 대리 청정의 하교를 거두어 달라는 정청(庭請)을 베풀었다가, 경종이 뜻을 굽히지 않자 대리 절목(代理節目)을 정하여 연명으로 차자[聯箚]를 올리고, 소론의 조태구(趙泰耉)가 경종을 알현하자 이를 따라 들어가 대리 청정의 하교를 환수할 것[反汗]을 청하였는데, 소론측에서 이러한 정청·연차·반한을 삼변(三變)이라 하여 노론의 죄목으로 삼았다.

“신의 종조(從祖) 충헌공(忠獻公) 신 김창집(金昌集)이 40년 동안 조정에 있으면서 선대왕의 두터운 신임과 백발 단충(白髮丹忠)의 포장을 가장 많이 입어, 지우(知遇)에 감격한 나머지 죽음으로 보답할 것을 맹세하였습니다. 경묘(景廟)께서 병환이 위중하고 후사를 부탁할 사람이 없음에 이르러서는 밤낮으로 걱정하고 불안해 하다가, 마침내 두세 대신과 동심협력하여 위로 우리 자전(慈殿)과 경묘의 뜻을 받들어 드디어 큰 계책을 결정하였으나, 얼마 안 되어 화를 당하였습니다. ……

‘신택군(臣擇君)이라는’ 세 글자의 죄인은 신으로서는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만, 삼종(三宗: 효종, 현종, 숙종)의 혈맥은 오직 전하 한 분뿐이어서 노래를 부르고 송사를 하는 일반 백성들까지도 오히려 우리 임금의 아드님이라며 추대를 하였는데, 더구나 신의 종조(從祖)이겠습니까? 이 때문에 일찍이 민진원에게 대책을 결정한 일로써 말하기를, ‘오늘날 왕자가 많았다면 사변은 더욱 헤아리기 어렵겠으나, 우리 임금의 아드님은 오직 한 분뿐이고 또 천명과 인심이 이미 이리로 쏠리었으니, 다시 무엇을 염려하겠는가? 하였습니다. 민진원이 일찍이 이 말을 가지고 어전에 앙달하였으니, 대저 민진원의 충직한 성품으로 반드시 사사로이 아부하여 임금의 귀를 속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삼변(三變)의 설에 있어서는 그 때의 사세는 참으로 말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대개 대리 청정의 교명이 세제 책봉 초에 갑자기 내려졌으므로, 백관을 거느리고 감히 도로 거두어들일 것을 청하는 것은 사리상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하나, 비답이 간절하여 ‘〈세제가 옳은가?〉 좌우의 〈신하들이〉 옳은가?’라는 전교가 내려지기까지 하였으니, 곧바로 정청(庭請)을 철회하고 성명(成命)을 받드는 것 역시 사세로 보아 당연한 처사였으니, 이것이 정청을 연차(聯箚)로 바꾸게 된 동기입니다. 북문을 몰래 열고 역적 조태구가 갑자기 들어가니, 또 무슨 모양의 화를 일으킬지 몰라 다급하여 호흡을 다투는 판이었으니, 앞뒤로 함께 들어간 것은 뜻밖의 변고를 막자는 의도였으며, 절목(節目)을 작환(繳還)한 것 역시 눈앞의 다급한 사태를 미봉하자는 의도였습니다.

나라를 위하는 한결같은 정성은 참으로 변한 적이 없었습니다. 당시에 혹자가 이것을 가지고 질문을 하는 자가 있으면 문득 얼굴을 찌푸리고 길게 한숨지으며 말하기를, ‘지금의 세태를 보건대, 설령 성명을 봉행했더라도 하룻밤 사이에 변고가 없으리라고 보장하기 어려우니, 우선 화를 일으킬 수 있는 단서를 펴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이다.’ 하였습니다. 아! 앞뒤로 청하기도 하고 그만두기도 하며 사세에 따라 대응한 것들이 한편으로는 종사(宗社)를 위하자는 의도였고 한편으로는 성궁(聖躬)을 보위하자는 의도였으니, 실로 일분의 사심도 그 사이에 개입된 것이 없었다는 사실은 하늘의 해가 함께 밝혀 주고 있습니다. ……

전하께서 신의 종조를 표창한 일이 또한 많기는 하나, 오직 이 ‘세 글자’ 및 ‘삼변’의 설만은 지금까지 분변하지 않고 있음으로 인하여 경신년(영조 16년, 1740)의 비망기에 아직도 신하로서 차마 듣지 못할 말들이 많이 있으니, 지난날의 흉당들이 이를 구실로 삼아 무고를 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논하는 자들도 오히려 그때의 처사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찌 과거를 깨끗이 씻어버리려는 성상의 초심(初心)에 손상이 되지 않겠으며, 또 지하에서 품고 있는 억울한 원한이 그대로 남아 있지 않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이 일은 내가 깊이 알고 있다.”

하였다.
<참고자료>
⌈영조실록⌋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김면행(金勉行, 1702-1772)


김면행(金勉行, 1702-1772)                                  PDF Download

 

는 경부(敬夫)이고, 본관은 안동이다. 증조부는 여주목사를 지냈던 김수익(金壽翼)이고, 조부는 호조정랑을 지낸 김성후(金盛後)이다. 부친은 진산군수였던 김시민(金時敏)이고, 생부는 이조참판으로 추증된 김시서(金時敍, 1681-1724)이다. 김시서는 문중의 김창협과 김창흡 형제에게서 수학했다. 그는 1721년(경종 1) 증광사마시에 진사 1등으로 합격하였으나 남인이 조정의 정권을 잡고 있어서 벼슬 생활을 포기하고 은거하였다.

1755년(영조 31) 정시문과(庭試文科) 병과 2등으로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벼슬은 참판에 이르렀다. 아들 김이정(金履正)은 1765년(영조 41) 식년사마시에 진사 3등으로 합격하였고, 1771년(영조 47) 정시문과(庭試文科) 병과(丙科) 4등으로 급제하여 승정원승지(承政院承旨)가 되었다.

영조 32년에 정언이 되고, 35년에는 책례도감(冊禮都監)에 공이 있다하여 가자(加資) 되었다. 35년에 승지에 제배되어 소임을 다 하던 중에 38년 6월에 상소문을 접수하지 않은 건으로 찬배(竄配)의 처분을 받았다.

영조가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가뭄을 민망히 여겨 비가 오는가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헌납 박치륭(朴致隆)이

“신이 지난번 듣건대, 용안현감 이정(李瀞)이 상소를 안고 와서 올리다가 후원(喉院, 승정원)에서 물리침을 당하자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칼을 뽑아 정원 문 밖에서 스스로 목을 찔렀다고 합니다. 엄숙하고 깨끗해야 할 궁궐 안에 이처럼 변괴의 일이 있었는데도 끝내 보고하지 않았으니, 거의 옹폐(壅蔽)하는 데 가깝습니다. 청컨대 그때의 정원에 있던 승지(承旨)는 아울러 삭직을 명하소서.”

라고 하자, 영조가 죄가 삭직에 그쳐서는 안 된다. 멀리 찬배하라고 명하였는데, 그때의 해방(該房) 승지가 김면행이었다.

 

그러나 8월에 영조는 처분이 지나쳤다고 하고, 다음해 영조 39년에 대사간에 임명한다. 이후 승지와 대사간을 교대로 역임하던 중, 영조 47년 대사간으로 재임 중에 조엄(趙曮, 1719-1777)에 관한 일로 체직 당한다.

조엄은 문장에 능하고 경사(經史)에 밝았을 뿐만 아니라 경륜(經綸)도 뛰어났던 인물이다. 경상도관찰사 재임 시 창원의 마산창(馬山倉), 밀양의 삼랑창(三浪倉) 등 조창을 설치하여 전라도에까지만 미치던 조운을 경상도 연해 지역에까지 통하게 하여 세곡 납부에 따른 종래의 민폐를 크게 줄이고 동시에 국고 수입을 증가하게 하였다. 또한 통신사로 일본에 갔을 때 대마도에서 고구마 종자를 가져오고 그 보장법(保藏法)과 재배법을 아울러 보급하여 구황의 재료로 널리 이용되게 했다. 후에 제주도에서는 그의 성을 붙여 고구마를 조저(趙藷)라고 불렀다. 고구마라는 말 자체가 그가 지은 <해사일기(海槎日記)>에서 일본인이 ‘고귀위마(古貴爲麻)’라고 부른다고 기록한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영조 46년(1770) 조엄이 이조판서로 있을 때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의 천거로 특별히 평안도관찰사로 파견되어 감영의 오래된 공채(公債) 30여 만 냥을 일시에 징수하는 등 적폐(積弊)를 해소하는 수완을 발휘한다. 그러나 토호세력들의 반발로 탐학했다는 모함을 받아 곤경에 처한다.

이 건과 관련하여 영조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조엄의 함답(緘答)을 읽도록 명하였다. 비국 당상 신회(申晦)가 말하기를, “신이 관서(關西)에서 온 사람에게 상세하게 물어보니 3자의 설은 실제로 있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라고 대답한다.

대신(大臣) 및 여러 비국 당상들도 모두 신회의 말과 같았으나 영조가 여전히 의심스럽게 여겨 태천현감 이종영(李宗榮)과 전 의주부윤 홍억(洪檍)을 입시하도록 명하여 하문하였는데, 모두가 이런 일이 없었다고 대답한다. 또 전 서장관(書狀官) 이명빈(李命彬)을 불러다 사행(使行) 때 백성들이 정말로 눈물로서 간절히 하소연했는지의 여부를 물었는데, 이명빈 또한 울부짖는 자를 보지 못했다고 대답을 한다.

이때 김면행이

“3자의 설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매우 놀랍고 비참하게 합니다만 풍문은 믿을 수 없으며, 또한 마땅히 그대로 내버려 둘 수도 없으니, 청컨대 암행어사를 가려 보내어 염찰하고 사실을 조사하게 하소서.”

라고 한다. 영조는 암행어사를 보내는 것이 사체(事體)가 중대하므로 대신이 청할 바가 아니라고 책망한다. 이를 두고 정언 남주로(南柱老)가 김면행이 암행어사를 청한 것은 사체(事體)가 경솔하다고 하면서 파직을 요청하자 그대로 했는데, 조금 있다 김면행을 다시 우윤에 제배한다.

 

훗날 정조 8년에 정조가 하교하기를,

“기묘년(1759, 영조35) 책례 때의 상례(相禮)는 바로 참의 김면행(金勉行)이었는데 그의 아들 김이정(金履正)이 마침 승품(陞品)할 대상에 올랐으니 이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아직 후임이 차출되지 않은 상례에 전 교리 김이정을 의망(擬望)하여 들이라고 분부하라.”

라고 하였다.

 

정조는 효의왕후와의 사이에 자손이 얻지 못했다. 그러다 나인 출신인 의빈성씨와의 사이에서 문효세자를 얻는다. 이때가 1782년 9월로 정조의 나이 31세 때 일이다. 정조는 문효세자가 태어난 지 만 22개월째인 1784년 7월 세자책례를 올린다. 이는 조선왕조 역사상 가장 어린 나이의 세자책봉에 해당한다. 그러나 문효세자는 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조선왕조 역사상 가장 단명한 세자가 되고 말았다.

 

<참고 문헌>
⌈영조실록⌋
⌈일성록⌋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이재(李縡, 1680-1746)


이재(李縡, 1680-1746)                                           PDF Download

 

재는 김창협의 학통을 이은 수제자로서 노론 내 낙론학맥을 계승 발전시켰으며, 영조 치세 연간 노론 벽파의 중심인물로 활동한 문신이다. 영조 연간 의리론(義理論)을 들어 영조의 탕평책을 부정한 노론 가운데에서 준론(峻論)의 대표적 인물이며, 윤봉구(尹鳳九), 송명흠(宋命欽), 김양행(金亮行) 등과 함께 당시의 정국 전개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당시의 호락논쟁(湖洛論爭)에서는 이간(李柬)의 학설을 계승해 한원진(韓元震) 등의 심성설(心性說)을 반박하는 낙론의 입장에 섰다. 심정진은 「제미호선생문(祭渼湖金先生文)」에서 사도의 도통을 논하면서 중국에서는 맹자 이후로 이정과 주자를 들고 동방에서는 퇴계 이황, 율곡 이이, 우암 송시열을 이어서 도암 이재를 들었다. 그의 문하에 미호 김원행, 역천 송명흠, 녹문 임성주 등 출중한 제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숙종 경신년(1680) 9월 28일에 태어났다. 임신 중에 민부인이 달이 수중에 드는 꿈을 꾸었는데 광채가 방에 가득하였다. 5세에 고아가 되었는데 중부(仲父) 충숙공이 가르침을 심히 부지런히 하셨고 안으로는 민부인의 인도가 또한 엄격하였다. 일찍이 베틀에 임할 때 실을 짜서 쌓아야만 한 필을 이룬다고 하여 학문도 중간에 멈춰서는 안 된다고 훈계하니 명심하여 실추하지 않고 육예(六藝)와 학업을 일찍 성취하였다.

1702년(숙종 28)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가주서·승문원부정자를 거쳐 예문관검열이 되어「단종실록」 부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707년 문과 중시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문학·정언·병조정랑을 거쳐, 홍문관부교리에 임명되었다. 1709년 헌납·이조좌랑·북평사를 거쳐 사가독서(賜暇讀書)했고, 1711년 이조정랑으로 승진, 이어 홍문관의 수찬·부교리·응교·필선·보덕 등을 지내고 집의로 옮겼다. 1715년 병조참의·예조참의를 거쳐 다음해 동부승지가 되었다. 이어 호조참의를 거쳐 부제학이 되었을 때「가례원류(家禮源流)」의 편찬자를 둘러싸고 시비가 일자 노론의 입장에서 소론을 공격하였다. 이후 노론의 중심인물로 활약하였다.

1721년(경종 1) 예조참판, 강화부유수, 함경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산릉도감제조에 임명되어 토목의 일을 감독하여 다스리고 그 공로로 가의대부에 가해졌으며 대사헌·동지춘추관사를 겸하다가 실록청당상에 임명되었고, 이조참판에 제수되면서 실록청도청당상으로 승진하였다. 같은 해 예조참판을 거쳐 도승지가 되었으나 소론의 집권으로 삭직되었다.

신축년(1721) 겨울에 경종이 왕세제인 연잉군(훗날 영조)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자 소론 측에서 이를 강력하게 반대하고, 대신들이 백료를 이끌고 명을 거두기를 정청(庭請)했는데 참여하지 않고, “우리 왕께서 만일 병이 없고 후손을 낳을 바람이 있다면 진실로 후사를 미리 세울 필요가 없지만 이미 병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고 참결(參決, 세제인 영조에게 국정에 참여하여 결정하라는 명)하라는 명을 하였으니 다만 마땅히 받들어야 할 것이지, 어인 일로 억지로 다투어 論執하는가?”하였다. 얼마 후에 신임옥사에서 중부 충숙공 이만성(李晩成)이 조옥(詔獄)에 유폐되어 죽자 예로써 염장(斂葬)하고 인제 골짜기로 들어가 더욱 경전에 힘써 날마다 과정을 두었다.

1725년(영조 1) 영조가 즉위한 뒤 부제학에 복직해 대제학·이조참판을 거쳐 이듬해 대제학에 재임되었다.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 중심의 정국이 되자 문외출송(門外黜送) 되었으며, 이후 용인의 한천(寒泉)에 거주하면서 많은 학자를 길러냈다. 1740년 공조판서, 1741년 좌참찬 겸 예문관제학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직하였다.

여러 해 풍비(風痹)를 앓다가 병인년(1746)에 화전으로 돌아가는 것이 치료에 좋겠다고 하여 이에 가까운 고을의 벗들에게 편지를 써서 이별하였다. 발행(發行)하여 광주에 이르러 병이 심해져서 낙생촌사(樂生村舍)에서 영명했는데, 이때가 10월 28일이었다.

항상 율곡의

‘한 터럭이라도 성인에게 미치지 못하면 나의 일은 마치지 않은 것이다.’

라는 말을 애송하고

“율곡은 나의 스승이시다.”

했다. 율곡의 明通하고 쇄락한 운치에 스스로 묵묵히 계합한 바가 있었다.

 

효성이 지극하였는데, 일찍 아버지를 잃은 것을 애통해 하여 모부인을 섬김에 깊은 사랑이 뜻을 봉양하는 효성에 드러났다. 거상(居喪)에 미쳐서는 채소만을 먹고 흡혈(泣血)하며 애통하는 마음으로 예를 다하여 노쇠한 나이라고 하여 스스로 게을리 하지 않았다. 상례를 마치고 나서도 여전히 날마다 선영에 올라가 둘러보며 슬프게 살펴보았다. 말년에는 행보를 하지 못해 매번 견여(肩輿)를 타고 집 뒤의 작은 언덕에 올라가서 묘소를 바라보고 부복하였는데 그 언덕을 첨경대(瞻敬臺)라고 불렀다.

예학(禮學)에도 밝아 많은 저술을 편찬하였다. 용인의 한천서원(寒泉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도암집(陶菴集), 도암과시(陶菴科詩), 사례편람(四禮便覽), 어류초절(語類抄節) 등이 있다. 영조 을미년(1775)에 정조가 서무를 대신해서 들을 때 특별히 시장(諡狀)을 기다리지 않고 시호를 하사하여 문정(文正)이라고 하였다.

오희상(吳熙常, 1763-1833)이 이재의 묘표를 짓고 그 마지막에 총괄하여 다음과 같이 밝혀두었다.

“적이 논하건대 유자(儒者)의 일은 세 가지가 있으니 바른 진퇴, 정밀하게 발휘함, 크게 창명(倡明)하는 일이다. 셋이 갖추어진 연후에 비로소 성덕(成德)의 대현에 낄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선생은 비록 구학에서 뜻을 감추고 은거하였으나 종국(宗國)에 대한 근심은 간절하여 출사와 은거, 말과 침묵이 시대의 오륭(汚隆)에 관계되었다. 의리가 어두워지고 윤리강상이 서지 않으면 차라리 죽더라도 자정(自靖, 스스로 의리에 안주함)하여 후회하지 않았다. 민락(閩洛)이 이미 멀어 미언(微言)이 손상되자 이기와 심성에 대해 어지럽게 쟁송이 모이니, 이에 본원을 연구하고 진체(眞諦)를 지시하여 여러 어지러움을 꺾고 뭇 사람들의 미혹을 열어주었다.

이에 사도(師道)를 높이 들어 가르침을 널리 열고 순순히 인도하사 문채를 성대하게 일으켜 모범은 당시에 성행하였고 공리는 무궁한 후세에 미쳤으니, 체용을 겸전하고 중선을 다 갖추어 진실로 명세(命世)의 유종(儒宗)이라고 이를 만하다. 그런즉 선생은 비록 조정에서 예복을 입고 바르게 서서 치군택민(致君澤民)의 초심은 이루지 못했지만 필경에 성취한 바는 이와 같이 탁연하니 과연 누가 그렇게 한 것인가? 옛날 장경부(張敬夫)가 이르길 ‘회옹부자(晦翁夫子)가 한가한 생활을 하면서 학업을 궁구한 것은 아마도 하늘의 뜻일 것이다.’ 하였으니 거의 먼 후세에도 부절을 합친 듯하다. 오호라 성대하다.”

 

<참고문헌>
「영조실록」
김동준, 「도암 이재의 삶과 시문학」,「한국한시작가연구」 14호, 2010
민족문화대백과사전

권필칭(權必稱)


권필칭(權必稱)                                                             PDF Download

 

필칭(權必稱, 1721년∼1784년)은 선비집안의 후손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거쳐 충청도우후, 해남현감, 광양현감, 삭주부사, 창성방어사, 경상좌도 수군절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신분은 비록 무인이며, 무과에 급제한 관리였으나 유학자의 풍모를 잃지 않았으며, 사후에 ‘유장(儒將)’이란 칭송을 들기도 하였다. 일생동안 관직생활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도학에 힘써 유학자로 이름을 알리고 문집을 남겼다. 『주역』·『논어』 등 경학에도 밝았으며, 사부(詞賦)에도 능하였다. 김원행(金元行)·송명흠(宋明欽)의 문인이다.

 

1721년(1세, 경종 1년)
선비집안의 권수무(權壽武)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향은 단성현 북면 신등리의 단계 상촌이다. 5대 할아버지 권도(權濤, 1557∼1644)는 과거시험 문과에 합격하여 성균관 주서, 병조정랑 사간원 정언, 사간원 대사간 등을 역임한 인물이다. 권도의 사촌인 권집(權潗)과 권준(權瀹)도 비슷한 시기에 과거에 합격하여 안동 권씨는 명문 가문으로 불렸다. 자는 자평(子平), 호는 오담(梧潭)이다. 송명흠(宋明欽), 김원행(金元行)의 문인이다.

 

1726년(5세, 영조 2년)
소학⌋을 배우고 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1733년(12세, 영조 9년)
암자에 들어가 시(詩)와 부(賦)를 공부하면서 과거시험에 대비했다.

 

1735년(14세, 영조 11년)
평산 사람 신씨(申氏)의 딸과 결혼했다. 처가 집안사람들 중에도 무과로 관직에 나간 사람들이 많았다.

 

1743년(22세, 영조 19년)
생원시 초시에 합격했으나 2차 시험인 회시에서 낙방했다. 다음해 부친상을 당하였다.

 

1747년(26세, 영조 23년)
다시 생원시에 도전하여 초시에 합격하였으나 또 2차 시험인 회시에서 낙방했다.

 

1750년(29세, 영조 26년)
그동안 사마시를 두 번 봤으나 모두 낙방하여, 식년 무과에 도전하여 급제하였다. 총 합격자 431명 가운데 425등으로 매우 저조한 성적으로 합격하였다. 이즈음 권필칭의 집안에서 소유한 노비수는 약 20명(도망 9구 포함한 28구) 정도였다. 이후로도 평생동안 지속적으로 그 정도의 노비를 유지하였다.

 

1751년(30세, 영조 27년)
3월에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었다. 이 선전관은 무반의 관직 중에는 가장 요직 중 하나였다. 이후 훈련원 첨정(僉正) 등을 거쳐 충청우병마우후(忠淸右兵馬虞候) 청주진관(淸州鎭管)에 임명되었다.

 

1758년(37세, 영조 34년)
병조좌랑(兵曹佐郞)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759년(38세, 영조 35년)
동생 권필시(權必時)가 식년 무과에 급제하였다. 권필칭은 낙향하여 1년 정도 어머니를 모시고 독서에 열중하였다. 당시 본인의 거처에 “이락헌(二樂軒)”이라는 편액을 걸어 놓았다.

이러한 모습을 보고 어머니가 이렇게 말했다.

“너의 집안이 적막한 지 오래되었는데 무슨 뜻으로 벼슬하지 않는가? 늙은 어미가 걱정하지 않도록 해달라.”

이 말을 듣고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 당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내가 청주에서 돌아온 후 다시는 세상에 나갈 생각이 없었으나 억지로 나오게 되었네. 또 이것이 헛되이 노모의 바램을 저버리는 결과를 초래할까 걱정스럽구나. 구하려고 해서 얻을 수만 있다면 나는 사양하지 않겠다.”

고 자신의 심정을 드러냈다.

 

1760년(39세, 영조 36년)
서지수(徐志修)의 도움으로 서산(瑞山) 군수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2월, 장기(長鬐) 현감에 임명되었다.

 

1764년(43세, 영조 40년)
장기의 현감을 지내던 중 어머니 상을 당하여 사직하였다. 작년에는 둘째 동생이 사망하였는데, 이해 4월에 어머니가 사망하고, 9월에 셋째 동생도 사망했다. 3년 뒤에는 넷째 동생도 사망했다. 이 때문에 몇 년간은 관직생활을 하지 않았다.

 

1771년(50세, 영조 47년)
고성 현령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원인손(元仁孫)과 서지수(徐志修)의 천거로 산림유신(山林儒臣)의 예에 준하여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학문에 힘썼다. 이즈음 삼가(三嘉)에 오담정사(梧潭亭舍)를 짓고 자신의 학문적인 꿈을 펼치고자 하였다.

 

1772년(51세, 영조 48년)
해남 현감에 임명되었다. 다음해 함경남도 병마우후(兵馬虞侯) 북청진관(北靑鎭管)에 임명되었다.

 

1774년(53세, 영조 50년)
증광별시시관(增廣別試試官)으로 임명되었다.

 

1775년(54세, 영조 51년)
7월에 심환지의 추천을 받아 광양현감에 임명되었다. 11월에 겸임 순천부사에 임명되었다. 이때 집안의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북쪽으로 온 후에 ⌈근사록⌋만 수 백차례 읽었는데 의심나고 모르는 곳을 매번 누구와 함께 강론하고 물어야할지 모르겠다.”

라고 답답한 마음을 표현하였다. 이해에 백두산을 여행하고 다음과 같이 ⌈백두록⌋을 지었다.

“을미년(1775년) 5월 13일에, 나는 남병영(南兵營)의 우후(虞侯)로서 백두산으로 길을 떠났다. 이번 유람은 자항(玆航), 제인(濟仁), 황수(黃水), 종포(終浦), 웅이(熊耳), 호린(呼麟)등지를 거쳐서 갑산부(甲山府)에 도착하는 여정이다. 여기서부터 백두산까지는 모두 갑산부 경내이고, 허항령(虛項嶺) 북쪽으로는 무산부(茂山府)와 경계다. 남병영에서 후치령(厚峙嶺)까지는 110리, 후치령에서 갑산부까지는 170리, 갑산부에서 연지봉(臙脂峯) 까지는 350리, 연지봉에서 백두산 가장 높은 봉우리까지는 35리이다.

우리 일행은 불행히도 비가 쏟아지고 안개가 짙어서 비록 정상을 5리쯤 남겨 둔 곳까지밖에 가지 못했지만, 그 높이를 어림잡아 보건대 과연 백두산 높이가 300리라는 말이 거짓이 아니다.
다행히 때마침 산 동쪽 기슭이 맑게 개더니 붉은 해가 막 떠올랐다. 온 산이 영롱하게 빛나고 여섯 개의 높은 봉우리가 줄지어 늘어서 있다. 이에 갑산부에서 가져온 홍로주(紅露酒)를 꺼내 술잔에 가득 채워 한 잔 마시고는, 머리를 들어 산을 멀리 바라보며 길게 휘파람을 불기도 하고 손으로 가리키기도 했다. 이는 내 평생에서 가장 유쾌하고 웅장한 일이다.

정상 아래는 둘레가 2,000여 리쯤 되는, 그리 경사가 심하지 않은 언덕이다. 산의 몸체를 사람의 몸에 비유하면, 2,000여 리의 언덕은 백두산의 배와 장기에 해당하고, 평안도 지방은 오른팔에 해당하고, 함경도 지방은 왼팔에 해당하고, 강원도와 경상도 지방은 왼쪽 다리에 해당하고, 충청과 전라도 지방은 오른쪽 다리에 해당하고, 한라산과 대마도는 양쪽 발이 끝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두텁고 웅장한 기세를 쌓아 둔 산은 비단 우리 조선에만 처음 있는 것일 뿐 아니라 곤륜산(崑崙山) 외에는 온 천하를 통틀어도 비할 바가 없다.

옛말에 ‘뛰어난 인재는 땅이 영험한 덕택이다.(人傑地靈)’라는 말이 있는데, 단군 이래로 뛰어나고 이름나고 신이한 인재들이 우리나라에서 그 얼마나 많이 배출되어 중국의 인물들과 미명(美名)을 함께 일컬을 수 있었던가? 그것은 이 백두산이 정기와 신령을 잘 모아서 저절로 그리 된 것이 아니겠는가? (이하 생략)”

1776년(55세, 영조 52년)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 충주진영장(忠州鎭營將)에 임명되었다. 다음해 통정대부, 삭주(朔州) 도호부사(都護府使)에 임명되었다. 삭주부사에 임명하는 자리에서 , 정조는 권필칭에게

“관리로서의 치적은 전에 이미 들었다. 이번에도 마음을 다해 잘 다스려 그 명성에 부합하도록 하라.”

고 치하했다.

 

1779년(58세, 정조 3년)
아들 권엽이 사망했다. 삼가의 집을 정리하여 고향 단계 마을의 집으로 돌아갈 계획을 세웠다. 이듬해 단계 마을로 이사했다.

 

1781년(60세, 정조 5년)
평안도 방어사 창성(昌盛) 도호부사에 임명되었다. 이해에 ⌈수사첩록(隨思輒錄)⌋을 완성하였다. 수신에 관한 이 기록에서 그는 선비가 과거에만 전념하는 폐단을 비판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과거시험에서 선비의 풍습이 바르지 않은 지가 오래되었다. 향당에서 자호(自好)하는 선비는 오히려 부끄럽게 여겨 과거에 종사하고자 하지 않는다. 선비들은 진실로 뜻을 두어 일체의 과거 공부를 폐하고 집안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 힘써 옛 책을 읽고 자손을 가르치는 것이 좋다.”

1783년(62세, 정조 7년)
경상좌도 수군절도사 동래진(東萊鎭) 도절제사(都節制使)에 임명되었다.

 

1784년(63세, 정조 8년)
3월, 수영(水營) 관사에서 사망하였다. 저서에 ⌈오담문집(梧潭文集)⌋이 있다.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정해은, 「18세기 경상도 단성현의 한 양반 무과급제자의 사환과 처세」, 「조선시대사학보」26.

유한준(兪漢寯)


유한준(兪漢寯)                                                             PDF Download

 

저암공 유한준(兪漢寯)
저암공 유한준(兪漢寯)

한준(兪漢寯, 1732∼1811)은 영조 44년, 즉 1768에 진사시에 합격한 뒤 김포군수, 형주 주부(主簿), 군위 현감, 해주 판관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명문 집안인 기계(杞溪) 유씨(兪氏)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조상 대대로 송시열을 섬기는 가풍이 있었다. 그래서 당파적으로는 노론계 인물이라고 할 수 있으나, 그러한 당색에 얽매이지 않고 북인계 남인 실학자들의 견해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노장과 불교에도 이해가 깊었다.

성리학에서는 소론파의 견해도 받아들이는 등 개방적인 사유의 소유자였다. 그는 당대의 뛰어난 문장가로 평가되어 주변으로부터, “향후 백년간은 이러한 작품이 나오지 않을 것”, “일세를 독보하는 문단의 거장”이라는 등의 평가를 받았다.

그의 이러한 폭넓은 관심과 자유로운 정신은 그의 아들 유만주(兪晚柱, 1755~1788)에게로 이어졌다. 유만주는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고 33세로 사망하였으나, 그가 살아생전에 매일 같이 기록한 ⌈흠영일기⌋를 통해 조선시대 사회의 다양한 모습을 후세에 남기고 있다.

 

1732년(1세, 영조 8년)
4월 7일, 조선의 명문 집안인 기계(杞溪) 유씨(兪氏) 집안에서 태어나다. 부친은 진사 유언일(兪彦鎰, 1697∼1747)이며, 어머니는 창녕(昌寧) 성씨(成氏)이다. 증조할아버지 유명뢰(兪命賚)는 송시열의 문하생이었는데, 송시열이 사약을 먹고 사망하자, 평생 동안 은거하며 관직이 나아가지 않았다. 할아버지 유광기(兪廣基)는 예산 현감을 지냈으며, 부친 유언일(兪彦鎰)은 평생 포의로 지냈다.

 

1747년(15세, 영조 23년)
부친이 사망하였다. 향년 50이었다.

 

1748년(16세, 영조 24년)
10월, 부친을 잃은 슬픔을 못이기고 큰형 유한병(兪漢邴)이 사망하였다. 매부 김려행(金礪行)의 집이 있는 덕산(德山)에서 의탁하여 지냈다. 이해 안취범(安取範)의 딸 순흥안씨(順興安氏)와 결혼하였다.
이즈음 김이곤(金履坤)에게 시를 배우고 남유용(南有容)에게 문장을 배웠다. 유한준은 먼 친척인 박윤원(朴胤源, 1734∼1799), 박준원(朴準源, 1739∼1807) 형제와 어려서부터 같은 동네에서 글을 함께 배우고 평생 깊은 교유관계를 맺고 지냈다. 박유원은 미호 김원행에게서 성리학을 배우고 일가를 이루었으며, 박준원은 1787년 셋째 딸(가순궁 수빈 박씨綏妃朴氏)이 간택 후궁으로 궁중에 들어가 세자 순조(1790∼1834)를 낳아, 임금의 외할아버지가 되어 순조 시대 초년, 순조의 장인이 된 김조순(金祖淳)과 함께 국사를 관장하게 되었다.

 

1758년(26세, 영조 34년)
2월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다음해 어머니 행장(先妣行狀)을 지었다.

 

1762년(30세, 영조 38년)
단양 일대를 유람하였다.

 

1763년(31세, 영조 39년)
사마천(司馬遷)의 사기열전(史記列傳)처럼 우리나라의 인물을 소개하기 위해, 우선 동전표목(東傳標目)이란 목록을 구성하고 서문을 썼다.

유한준은 도(道)와 문(文), 즉 도학(성리학)과 문예(문장)를 구분하고 각각의 가치를 인정하였다. 그리고 문예의 모범을 육경이나 성리학 서적에서가 아니라, 사마천이나 반고로 대표되는 진나라, 한나라 때의 고문(古文)으로 보았다. 그는

“진한(秦漢) 이래 도술(道術)이 천하에 분열되어, 문장과 학문이 나뉘어 두 길이 되었다. 그리하여 유학자들은 각각 제가 사모하는 바를 좇아, 사모하는 바가 도학에 있으면 도학을 숭상하고, 사모하는 바가 문장에 있으면 문장을 숭배하여, 근원에서 멀어질수록 말단은 더욱 나뉘어졌는데, 이는 그 추세가 그런 탓이다.”

유한준은 이렇게 역사와 문장에 특별한 관심이 있었는데, 이러한 경향은 아들 유만주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1764년(32세, 영조 40년)
12월, 둘째 아들 유면주(兪冕柱)가 천연두에 걸려 만 5살의 나이로 죽었다.

 

1767년(35세, 영조 43년)
4월, 「에호부(殪虎賦)」를 지었다. 과거에 누차 응시하였으나 결과가 계속 좋지 못했다. 이즈음 문장이 주변에 소문이 나서

“향후 백년간은 이러한 작품이 나오지 않을 것”

이라는 말을 듣기도 하고,

“일세를 독보하는 문단의 거장”

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1768년(36세, 영조 44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다. 아들 유만주(兪晚柱)가 결혼했다. 며느리는 오재륜(吳載綸)의 장녀 해주 오씨다. 스승 뇌연(雷淵) 남유용(南有容)에게 「치사송(致仕頌)」을 올렸다.

 

1771년(39세, 영조 47년)
음직(蔭職)으로 종 9품의 동릉(東陵) 참봉(參奉), 즉 여주(驪州)의 영릉 봉사(寧陵奉事)에 임명되었다. 「청심루송(淸心樓頌)」, 「단궁난(檀弓難)」을 지었다.
다음해 사옹원 주부, 의금부 도사에 임명되었다.

 

1773년(41세, 영조 49년)

손자 유구환(兪久煥)이 태어났다. 봄에, 며느리 오씨(吳氏)가 출산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가을에 지평 안대제(安大濟)의 건의로 파면되었다.

 

1774년(42세, 영조 50년)
새로 이사한 곳을 읊은 「초당부(草堂賦)」를 지었다. 아들을 다시 장가보냈다. 새로 맞이한 며느리는 박치일(朴致一)의 장녀다.

 

1776년(44세, 영조 52년)
형주 주부(主簿)에 임명되었다가 승진을 하여 형조 낭관이 되었다.

 

1777년(45세, 정조 1년)
경상도 군위(軍威: 羅山, 赤羅) 현감으로 임명되었다. 이때 쓴 문장으로 「나산책(羅山策)」이 있는 데 일부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관리의 세 가지 정사(政事)는 전정(田政), 군정(軍政), 환곡(還穀)이니, 나라의 율령은 거역할 수 없다네. 백성들이 곡식을 해마다 반환해도 향리들이 쥐새끼처럼 곡식을 훔치네. (중략) 누런 띠풀 흰 갈대만 무성한데도, 마을사람에게서 고혈(膏血)을 쥐어 짜내고, 거친 모래와 자갈뿐인 땅인데도, 그 친족들까지 착취하네.”

“수령은 살피지 않고, 감사는 구휼(救恤)하지 않으며, 조정은 논의하지 않으니, 임금의 귀에 들리지 않네. 그런 까닭에 백성은 병들고 지쳐서 입과 배를 채울 겨를 없으니 예의를 어찌 돌보겠으며, 예의가 없으니 어찌 순수함이 있겠는가? 어디든 다 그렇지만 영남이 가장 심하고, 그렇지 않은 고을이 없지만 나산(羅山)은 갑절이라네.”

그는 이러한 문장과는 별도로 경상도 관찰사에게 다음과 같은 공문을 보내기도 하였다.

“본 현은 3,40년 이래 폐단이 해마다 늘어 정리할 수가 없습니다. 가장 차마 하기 어려운 것은 대체로 세 가지 폐단입니다. 첫째는 환곡이고 둘째는 군정(軍丁)이며 셋째는 결세(結稅, 토지세)입니다. 환곡의 폐단은 이렇습니다. 본 현은 아주 작은 방처럼 작고 초라하며 백성들의 집은 모두 텅 비어 있습니다. 가구 수는 2,800호에 불과한데 환곡세는 37,000석입니다.

이처럼 많은 환곡을 저 정도의 가구가 분담하니 이것이 소인국 사람에게 솥을 들어 올리게 하며 파리, 모기에게 산을 짊어지게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사방 들녘은 이미 가을이지만 관리들의 빚 독촉을 지탱하기 어려우니 지탱할 수 없으면 도망가고, 도망가거나 죽게 되면 친족이 대신 물게 됩니다. 해마다 친족에게 빚을 징수하고 매년 이웃 사람을 침해하니 죽음뿐인 우리 백성들의 삶이 슬플 뿐입니다. (이하 생략)”

아울러 그는

“대낮에도 뇌물이 행해지며 음지에서는 문서를 위조하여 관리들은 그것으로 처자를 배불리 먹이고 서리들은 술과 고기를 실컷 먹습니다. 진실로 기댈 곳이 있는 자들은 다른 사람을 먹이지 않고, 참으로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은 도리어 다른 사람을 먹입니다.”

라고 질타하고 흉년이 든 이 해 한해만이라도 환곡을 경감해주도록 호소하였다.

 

1778년(46세, 정조 2년)
풍기(豐基), 단양(丹陽), 경주 등지를 여행하였다. 아들 유만주는 자신의 일기를 ‘흠영(欽英)’이라고 이름지었다.

 

1779년(47세, 정조 3년)
6월, 영남 암행어사 황승원(黃昇源)의 보고에 따라, 군위현감으로써 지역을 잘 다스리지 못했다는 이유로 처벌을 받았다.

 

1782년(50세, 정조 6년)
이해 황해도 해주 판관(海州判官)에 임명되었다. 개성, 평양 등지를 여행하였다. 다음해 그동안 지은 시문(詩文)을 정리하였다. 스스로 편집하여 ⌈자저(自著)⌋라고 이름을 붙였다.

 

1784년(52세, 정조 8년)
봄에 아들 유만주가 해주와 평양으로 여행을 왔다. 아들이 여름 8월에 명동에 백칸 집을 사서 이사를 하였다고 하였다. 유한준은 집이 너무 크고 화려하여 반대하고 값을 내려서라도 집을 내놓으라고 연락했다. 아들은 9월에 과거시험을 보았는데 또 낙방을 하였다. 아들 유만주는 11월에 홍대용의 집에 가서 서

양 천문기기를 보고, 12월에 한양에 온 청나라 사신의 행렬을 구경하였다. 홍대용은 작년 겨울에 사망하였다.

 

1785년(53세, 정조 9년)
해주 판관의 직에서 해임되었다. 관내에서 일어난 옥사사건의 처리를 잘못하였기 때문이다. 익산 군수에 임명되었다. 여름에 명동의 집을 다시 팔고 창동의 작은 집으로 되돌아갔다. 부친 유언일(兪彥鎰)의 행장(行狀)을 지었다. 다음해 「가전(家傳)」을 지었다.

 

1787년(55세, 정조 11년)
둘째 손자 유돈환(兪敦煥)이 태어났다. 큰손자 병으로 유구환(兪久煥)이 죽었다. 아들 유만주는 과거시험에 또 응시하였으나 떨어졌다. 사도사(司䆃寺) 첨정(僉正)을 거쳐 부평(富平) 부사(府使)에 임명되었다. 생질 김리중(金履中)이 사망하였다.

 

1788년(56세, 정조 12년)
2월, 아들 유만주(兪晚柱)가 자식의 죽음을 슬퍼하다 만 33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유만주는 자신이 열심히 썼던 일기 ⌈흠영⌋을 미완성한 글이니 불태워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아들 유만주는 책 읽는 일을 매우 좋아했다. 비록 과거에 합격하지는 못했지만, 유교 경전과 역사책, 제자백가, 지리서, 패관잡설, 등 수 천권의 서적을 읽고 장차 역사가가 되는 것을 꿈꾸었다. 죽기 1년 전에도

“밤에, 사관(史官)이 되는 꿈을 꾸었다.”

(⌈흠영일기⌋, 1787년 3월 11일자)고 하였다.

이해 「광부이산영조천묘시말기(廣富二山營兆遷墓始末記)」를 지었다. 청주(淸州) 목사(牧使)에 임명되었다.

 

1791년(59세, 정조 15년)
아들 유만주의 유고를 모아 ⌈통원유고(通園遺藁)」를 만들었다. 그의 일기인 ⌈흠영일기(欽英日記)」를 정리하고, 두 유고집의 서문을 지었다.

유한준은 이렇게 썼다.

“아아! 재작년 오늘 저녁 너의 시신을 부둥켜안고서 뒹굴고 내던지며 하늘을 울부짖고 벽에 머리를 부딪친 것이 어제 같은데, 스물여섯 달이 흐르는 물과 같이 지나가 홀연 종사(終事)의 기일에 당하여 너의 빈소를 거두고 너를 부모의 묘 곁에 부장하다니, 아아 원통하도다! 이것이 어찌 너의 오늘의 일이란 말이냐?

내가 실로 지극히 미욱하고 지극히 어두우며 지극히 완고하여 죽지 않고 없어지지 않고서 여전히 밥을 먹고 여전히 살아 있구나! 살아 있다면 마땅히 너와 더불어 혼기(魂氣)를 가까이하고 상과 의자를 가까이 하여 대상의 일을 마쳐야 하였거늘, 도리어 무슨 마음에 뱃놀이하고 유람하여 이 비통함을 아침저녁의 제사와 삭망의 제사에 때에 맞추어 드러내지 않고서, 돌아와서야 이 저녁을 마친다는 말이냐. 아비가 되어 살아서는 자식에 대한 사랑을 다하지 못하고 죽어서는 자식에 대한 정을 다하지 못하니, 인간의 도리라고 할 수 있겠느냐? 아아, 애통하도다!(중략)

이제 너의 책을 내가 간행할 힘은 없지만 설령 간행할 힘이 있다고 해도 세상 누가 소유하여 아낄 자가 있겠느냐? 나 또한 석함에 넣어 묘 옆에 묻고서 후세를 기다리려고 하지만, 뜻과 함이 서로 다르지 못할까 두렵구나.

아아! 사람들 중에서는 실로 비록 장수하였으나 장수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인 자들이 있으니, 이는 칭송할 것이 못된다. 만약 네 책이 다시 나온다면, 네가 비록 요절하였지만 그 수명이 무궁할 것이니, 내가 비록 슬픈지 안 슬픈지 말하지 않는다고 하여도 또 어쩌란 말인가. 그러나 후세는 기대하기 어려우니 이 아픔이 더욱 깊다. 나는 실로 끝내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하겠구나!

아아, 애통하도다! 너는 죽고 나는 산 것이 3년이 되었다는 말이냐? 이 생애 어느 날 다시 아버지와 자식이 된다는 말이냐? 나는 이미 늙었다. 가슴 속에 얼음과 불을 끌어안고 있으니, 세상에 오래 살기를 바랄 수 있겠느냐? 죽는 날에 너희 부자와 함께 지하에서 노닐어, 여기서 다하지 못한 인연을 다시 이으려하니, 너는 잠시 기다리기 바란다. 말을 그치노라. 아아, 애통하도다!”

아들 유만주는 그의 일기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나는 누구인가? 『흠영』이 없다면 나라는 존재도 없다. 나는 역사책, 지도, 여행, 주렴, 다래를 좋아하며, 역사가가 되고 싶다. 하지만 스스로 돌아보고 헤아려 보아도 이미 두루뭉실하고 세상 물정을 몰라, 세련되게 꾸미기를 요구하는 세상의 규율에 너무나 맞지 않다.”

유만주의 ⌈음영일기⌋는 2015년 일부가 한글로 번역되어 출판되었다.(⌈일기를 쓰다⌋1, 2, 유만주 지음, 김하라 편역, 돌베개) 유만주의 ⌈음영일기⌋를 기리는 행사가 서울역사박물관 주관으로 <유만주의 한양 – 한양 선비의 한해살이, 1784, Ordinary day in Seoul>라는 제목으로 2016년 11월 25일부터 2017년 2월 26일까지 개최되었다.

 

1792년(60세, 정조 16년)
유언민(兪彥民)의 문집 ⌈석은집(石隱集)⌋의 서문을 지었다. 김이홍(金履弘)이 사망하였다.

 

1793년(61세, 정조 17년)
이즈음 김포 군수가 되었다. 다음해 불미스러운 일에 연루되어 감옥에 갇혔다가 석방되었다. 이즈음(1795년), 임윤지당(任允摯堂)의 유고에 서문을 지었다.

 

1796년(64세, 정조 20년)
8월, 사복사(司僕寺) 첨정(僉正)으로 임명되었다가 종3품의 강원도 삼척 부사(府使)로 부임하였다. 이때가 마지막 외직생활이었다.

 

1798년(66세, 정조 22년)
12월, 삼척 부사에서 해임되었다. 다음해 4월, 원자궁(元子宮)의 요속(僚屬)이 되었다.

 

1802년(70세, 순조 2년)
자저(自著)⌋를 다시 편집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판본은 ‘임술본(壬戌本)’이라 부른다. 장작 부정(將作副正)에 임명되었다가 강화(江華) 경력(經歷)에 제수되었다.

 

1808년(76세, 순조 8년)
이해에 강화도를 여행하였다. 「저수자명(著叟自銘)」을 지었다. 「자명」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자신은 처음 문장이 서툴렀을 때, 진나라 한나라의 고문만을 숭상하여 장자, 굴원, 사마천, 한유 등을 섭렵했으나 이후 50여년간 마침내 얻은 것은 없었다. 이제 늦게야 도(道)는 육경(六經)에 있고 사서(四書)에 온축(蘊蓄)되어 있음을 깨우쳤다. 이것을 너무 후회한다.

또 「자저」(권4)의 고시(古詩) 「내 친구(吾友)」라는 문장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나도 이미 늙었다. 화려하고 난폭한 언사가 이제는 권태롭다.
옛 성현들의 서적이 오히려 그 의미가 좋음을 이제 깨달았다.
이기(理氣)와 심성정(心性情), 주공(周公)과 공자, 정주(程朱)와 장재(張載),
그들의 도가 달과 태양처럼 밝고, 그들의 말이 실낱같이 상세하네.
이것이 그들의 문장과 언사가 만고불멸하는 이유겠지.”

1810년(78세, 순조 10년)
속자서(續自著)」를 편찬했다. 형조 참의에 임명되었으나 바로 사직하였다.
유한준은 연암(燕巖, 1737년∼1805년) 박지원과는 평생 반목하면서 멀리하였는데, 박지원이 사망한 뒤 다음과 같은 글(朴士能文集序)을 지었다.

“바야흐로 문장에 뜻을 둔 그 시절에 외람되게도 근재(近齋) 박영숙(朴永叔, 박윤원朴胤源) 및 연암(燕巖) 박미중(朴美中, 박지원朴趾源)과 친한 사이가 되었는데, 모두 젊은 시절의 일이다. 영숙은 처음에 고문을 짓는데 힘써 문장에 규칙에 딱 맞았다.

중년에는 인문입도(因文入道)하여 우뚝하니 유림의 표준이 되었다. 미중은 재능이 뛰어나 그 문장이 저절로 경지를 획득하였다. 그는 규칙에 따르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해학으로 도피하여 문장으로 유희를 삼았다. 대체로 두 사람 다 풍치가 있고 우아하며 걸출하다고 할 수 있겠다.”

1811년(79세, 순조 11년)
봄에 원자궁(元子宮)의 여속(僚屬)이 되었다. 이해 7월 28일, 사망하여 부평(富平)에 장사 지냈다.

참고문헌)
「유한준」<한국문집총간 인물연표(人物年表)>. 박경남, 「유한준 문학의 실학적 면모」, <한국실학연구> 26권, 2013. 김명호, 「박지원과 유한준」, <한국학보> 12권3호, 19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