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 이황을 만나다.

파주와 율곡학 : 우계(성혼) 스토리텔링

 

스승 이황을 만나다.

 

강민우: 1568년(선조 원년) 가을 성혼선생은 서울에 거주하고 있던 이황을 찾아가 인사를 드립니다. 이황은 문과에 급제한 뒤로 여러 요직을 거쳤으나, 병약함을 이유로 여러 차례 귀향하기를 반복합니다. 선조가 즉위하자, 그를 다시 불러 의정부 우찬성(右贊成: 종1품)과 대제학(정2품) 등의 높은 벼슬을 내리고 경연에 참석하게 했습니다. 이황은 1568년 12월에 필생의 노작인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지어 임금에게 바치는데, 17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선조가 훌륭한 임금이 될 수 있도록 그 요령을 도표로 그린 책입니다. 원제목은 진성학십도차병도(進聖學十圖箚幷圖)입니다. 여기에서 ‘진(進)’은 임금에게 올린다는 뜻이며, ‘차(箚)는 내용이 비교적 짧은 글을 말하니, ‘임금께 성인이 되는 10가지 도설을 올리는 글로, 그림을 첨부한다’라는 뜻입니다.

성혼: 성학십도는 선조 임금으로 하여금 성왕(聖王)이 되게 하여 온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기를 간절히 바라는 우국충정에서 저술된 것입니다. 성학십도는 10개의 그림과 해설로 되어 있는데, 태극도(太極圖)·서명도(西銘圖)·소학도(小學圖)·대학도(大學圖)·백록동규도(白鹿洞規圖)·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인설도(仁說圖)·심학도(心學圖)·경재잠도(敬齋箴圖)·숙흥야매잠도(夙興夜寐箴圖)입니다.

강민우: 당시 이황은 68세의 노학자로서, 최고의 성리학자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기에 젊은 이이와 성혼도 그에 대한 존경심이 대단했더라구요.

성혼: 이이는 이미 23세 때 성주목사로 있던 장인을 만나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예안의 도산(陶山)에 있던 이황을 찾아가 인사를 드렸습니다. 이황은 35세 연하인 이이를 만나보고 “후생이 두렵다”하면서 그의 재능을 극찬했습니다. 저는 34세 때 처음으로 이황을 만났지만, 이황의 학문에 대한 숭상은 이이보다 강했습니다. 이이는 이황의 학문에 독창성이 부족하다고 비판했지만, 저는 이황의 학문과 언행이 주자학의 정맥을 이은 최고의 학자로 보았습니다.

강민우: 1572년(선조 5년)에 38세의 성혼과 37세의 이이가 여러 차례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이기설․사단칠정설․인심도심설 등에 대한 치열한 논쟁을 벌인 것도 따지고 보면 이황의 학설을 따르려는 성혼과 그것을 비판하려는 이이의 입장 차이가 바탕에 있었던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논쟁이 필요 이상으로 길어지는 이유는 이들 학설에 대한 견해차이라기보다는 이황의 권위에 도전하는 듯한 이이의 태도가 못마땅했기 때문인 것으로도 보여요.

성혼: 저는 이황을 지극히 존경하고 사모하여 항상 제자들에게 “마음을 간직하고 수습하는 것이 바로 심법의 요체이다”라고 하는 그의 심법을 중시합니다. 심법(心法)은 마음을 다스리는 공부방법입니다. 1569년(선조 2년)에 이황이 예안으로 돌아간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에 가서 전송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미 출발했다는 소식을 중도에 듣고 우계로 돌아왔습니다. 우계로 돌아와서 다음과 같은 시를 짓기도 했습니다.

기사년(선조 2년) 늦은 봄에 己巳春暮月

퇴계께서 홀연히 고향으로 가셨네 退溪浩然歸

서울에는 우러를 분 적어지고 京城少宗仰

선비는 의지할 곳 잃었네 士子失所依

대로(大老: 덕망이 높은 노인)께서 복이 없으시니 大老也無福

천운이 쇠미한 때가 되었네 皇天時運衰

산중에서 부질없이 탄식하며 山中空竊嘆

한밤중 눈물만 줄줄 흘리네 中夜涕漣而

강민우: 성혼선생은 36세에 네 번째 벼슬로 적성현감(종6품)에 제수되지만, 역시 임금에게 사은만 하고 곧바로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고향으로 돌아온 직후, 예안으로 물러나 있던 이황에게 편지를 올려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좋은지를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다죠. 그러나 이황은 병중에 있었고, 그해 11월 8일 향년 70세로 세상을 떠났으므로 답장을 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

성혼: 고향으로 돌아온 직후에 후학 교육에 힘쓸 것을 결심하고, 본가 동편에 3칸 남짓한 기와집을 지어 ‘우계서실’이라 불렀습니다. 본가 사랑채에도 아버지 성수침이 공부하던 ‘죽우당’이라는 서재가 있어서 이 방을 학생들의 공부방으로 사용했지만, 공간이 좁아 많은 학생들을 받아들이기에는 부족했습니다. 이미 30세 무렵부터 성혼의 학행을 듣고 조헌(趙憲)을 비롯한 원근의 학생들이 찾아와서 가르침을 청했습니다. 이런 이들이 많아지자 본격적으로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따로 학교를 세운 것입니다.

강민우: 성혼선생 자신은 초가집에 살면서 지와집으로 학교를 지은 것은 후생들에게 숙식하면서 공부할 수 있는 안락한 공간을 제공하려는 뜻이 담긴 듯합니다.

성혼: 당시 이이도 자주 벼슬을 버리고 파주로 귀향하여 후학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이이는 우계서실이 세워지던 해 10월에 처가가 있는 황해도 해주 야두촌(野頭村)으로 내려가 살 터전을 마련합니다. 고향인 율곡리의 임진강 나루터에서 해주까지는 뱃길이 있어서 그리 먼 곳이 아니었고, 이이의 처가가 부자여서 그 경제력을 빌릴 수 있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그 뒤 1578년(선조 11년)에는 경치가 좋은 야두촌의 석담(石潭) 계곡에 학교를 세워 ‘은병정사’라고 했는데, 우계서실보다는 8년이 늦게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우계서실도 이황이 1560년 예안에 세운 도산서당보다는 10년이 늦은 것입니다.

강민우: 우계서실이 만들어진 뒤에 많은 학생들이 몰려들자, 이듬해 봄에는 학생들이 지켜야 할 공동생활의 규칙에 해당하는 학규를 만들어 「서실의(書室儀)」라고 했다죠. 성균관의 유생들이 지켜야 할 학칙을 참고하고, 주희가 백록롱서원에서 만든 학규도 참고하여 22개조로 나누어 만들었던 것입니다. 주로 어떤 내용입니까?

성혼: 이 학규는 이이가 1578년에 제정한 「은병정사학규」보다 7년이 앞섭니다. 그 내용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서실에 들어온 자는 먼동이 틀 때 일어나서 스스로 침구를 개어 정돈해야 한다. ②나이 어린 자가 빗자루를 들고 방 안을 깨끗이 청소해야 한다. ③차례로 세수하고, 머리 빗고, 의관을 바르게 해야 한다. ④각자 독서하는 곳에 나아가서 서책을 정돈하고 책상에 단정하게 무릎 꿇고 앉아서 조용히 읽고 외우되, 어지러운 생각을 하지 말고 딴 일을 돌아보지 말아야 한다. 남들과 잡담을 나누지 말고 제멋대로 출입하거나 일어나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 ⑤밥을 먹을 때에는 나이 순서대로 앉아서 조용히 정돈할 것이며, 희롱하고 장난하며 음식을 다투지 말아야 한다는 등입니다.

강민우: 공동생활에서 지켜야 할 규칙들이군요. 이상의 내용으로 모두 22개 조항으로 이루어져 있구요.

성혼: 이상의 22개 조항은 서실에 들어온 자가 준수하여 각자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혹시라도 약조를 어기고 게으르고 방자하여 독서를 부지런히 하지 않거나, 남을 조롱하고 업신여겨 함부로 대하여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어른과 벗들을 공경하지 않고 남의 타이름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가 있으면, 여러 학생들이 즉시 의논해서 저에게 와서 알려 주도록 합니다.

강민우: 성혼선생이 만든 「서실의」의 내용을 한 마디로 말하면,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라는 말인 것 같습니다. 또 앉을 때의 순서는 나이순으로 하는데, 이는 신분 차별을 두지 않는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성혼 문하의 학생들은 노비를 제외하고는 신분 차별을 두지 않았다고 하죠.

성혼: 이 학칙을 이이가 8년 뒤에 해주에서 은병정사를 세우고 만든 「은병정사학규」와 비교해 보면, 22개 조항으로 이루어진 것을 비롯하여 「서실의」와 내용상으로도 서로 같은 점이 많습니다. 다만 「은병정사학규」는 내용이 한층 구체적입니다.

강민우: 우계서실의 생활 규범으로 「서실의」를 만들고, 같은 해 가을에 학생들이 알아야 할 공부의 지침서로서 위학지방(爲學之方)이라는 교재를 만들었다는데 어떤 내용입니까?

성혼: 이 책은 주자의 주자대전(朱子大全: 주자의 어록 등을 기록한 책)과 주자어류(朱子語類: 주자와 그 문인들의 문답을 기록한 책)에서 직접 아동 교육에 필요한 자료들을 뽑아 만든 것입니다. 책머리에서 저는 “공부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먼저 이것을 읽고 기본을 세워야 하므로 꼭 읽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당부했습니다. 뒤에 이름을 주문지결(朱門旨訣)로 바꾸었는데, 1577년(선조 10년)에 이이가 어린이들의 학습을 위하여 지은 격몽요결보다 6년이 앞섭니다.

강민우: 그렇다면 교육에 관해서는 이이가 성혼선생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다만 위학지방과 격몽요결의 내용이 어떻게 같고 다른지는 위학지방이 남아 있지 않아서 그 내용을 자세히 알 수 없어 아쉬울 뿐입니다. 성혼성생이 이이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비슷한 행보를 보이지만, 적어도 교육 사업의 일은 성혼선생이 이이보다 앞선 것 같습니다. 후학을 가르치는 학교인 우계서실(또는 우계정사)을 세운 것이 이이의 은병정사보다 앞서고, 학생들의 교육 지침서로 위학지방을 편찬한 것도 이이의 격몽요결보다 몇 년이 빠릅니다.

성혼: 저는 임진왜란 때 고향을 떠난 기간을 제외하고 죽을 때까지 우계서실에서 약 24년간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그 학생들의 수가 대략 90여명에 이릅니다. 그밖에도 이이와 성혼의 두 문하에서 공부한 학생이 대략 27명 정도이며, 송익필 등 다른 문하에서 함께 가르침을 받은 학생이 대략 18명 정도입니다. 그리고 신원이 확실치 않은 문인들이 80명에 이르니, 이들을 모두 합하면 대략 216명 정도입니다.

강민우: 성혼성생의 문하생 가운데 높은 벼슬을 받은 인물도 적지 않겠습니다.

성혼: 정엽․윤황처럼 학식과 덕망으로 이름을 떨치거나 성리학을 발전시킨 인물이 있고, 김장생․김집처럼 낮은 벼슬을 했거나 재야의 처사로 살면서 학문에 몰두하여 성리학을 전수한 인물도 적지 않습니다. 김장생․김집은 저처럼 성균관 문묘에 배향되어 제사를 받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또 이귀(李貴)처럼 인조반정을 주도했거나 조헌․김덕령(金德齡)․양대박(梁大樸)처럼 왜란 때 의병에 참여한 충신도 적지 않습니다. 그 가운데 조헌은 문묘에 배향된 인물입니다. 그밖에 문묘에 배향된 송준길․송시열․박세채 등도 저에게 직접 배우지는 않았지만, 저의 학통을 이은 학자들입니다. 이렇게 보면 조선 후기 6명의 문묘 배향자가 저의 학통을 이은 인물입니다. 그러나 정여립처럼 스승을 배반하고 반역에 가담한 인물도 있고, 인조 때 반정공신이던 김자점(金自點)처럼 반역죄로 처형된 인물도 있습니다.

강민우: 문묘에 배향된 인물답게 훌륭한 제자들이 매우 많습니다.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성혼선생의 학문세계에 관해 여쭤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