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필주의 ‘리’ 이해

 

박필주의 이해

 

강민우: 안녕하세요. 박필주 선생님. 먼저 선생님에 대한 간단한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박필주: 저의 이름은 박필주(朴弼周, 1680~1748)입니다. 본관은 반남이니, 반남 박씨의 후손입니다. 자는 상보(尙甫)이고 호는 여호(黎湖)이며 사람들이 여호 선생이라 부릅니다. 군수를 지낸 박태두(朴泰斗)의 아들입니다. 영조 때 국가에서 서원을 철폐한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때에 임금에게 상소를 올려 기자(箕子)·공자(孔子)·주자(朱子) 등 세 성인의 서원은 철폐하지 말 것을 간청하기도 했습니다. 저의 시호는 문경(文敬)입니다.

강민우: 거두절미하고 박필주선생의 학문세계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선생님은 다양한 학설들이 대두되던 18세기의 인물로서, 이단상 계열의 끝자락을 장식한 대표적인 낙론계열의 학자로 평가됩니다만. 특히 낙론계열은 충청도 지역의 노론인 호론과 구분되는 서울·경기 지역의 노론을 말합니다. 또한 호론이 후에 위정척사사상에 영향을 준 것과 달리, 노론은 북학사상과 개화사상에 영향을 주었다지요. 게다가 낙론이라고 하면, 호론과 상대하여 전개한 18세기 학술논쟁인 인물성동이론이 떠오릅니다.

박필주: 인물성동이론은 율곡학파 내에서 호론과 낙론으로 나누어져 사람의 성과 사물의 성이 같은가 다른가를 두고 논변을 벌인 학술논쟁입니다. 사람의 성과 사물의 성이 같다고 보는 쪽을 동론(同論)이라 하고, 다르다고 보는 쪽을 이론(異論)이라고 합니다. 동론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이간(李柬)을 들 수 있고, 이론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한원진(韓元震)을 들 수 있습니다. 이들의 견해가 심화되면서 주변의 학자들까지 동조함으로써 학파적 대립양상을 띠게 됩니다. 호서(湖西: 충청도)지방의 학자들이 한원진의 이론에 동조하고 낙하(洛下: 서울 부근)지방의 학자들이 이간의 동론에 동조함으로써 ‘인물성 동이논쟁’이라는 명칭 외에 ‘호락논쟁’이라는 별칭을 갖게 됩니다. 전자에 속한 대표적인 학자들로는 한원진 외에 윤봉구(尹鳳九)․채지홍(蔡之洪)․위백규(魏伯珪)․송능상(宋能相) 등이 있고, 후자에 속한 대표적인 학자들로는 이간 외에 김창흡(金昌翕)․이재(李縡)․박필주(朴弼周)․어유봉(魚有鳳)․김원행(金元行) 등을 들 수 있습니다.

강민우: 이 문제에 대한 정미한 논쟁이 조선유학자들에 의해 전개되고, 이에 조선유학사의 3대 논쟁 중의 하나인 인물성동이 논쟁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들의 논쟁은 근 2백 여 년에 걸쳐 조선 후기 성리학의 주요 논점으로 다루어졌던 것이죠.

박필주: 그렇습니다. 저는 낙론계열에 속합니다. 낙론계열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사람의 성과 사물의 성이 같다는 동론을 주장합니다. 중용의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 하늘의 명령으로 부여해준 것을 성이라 한다)’에 나오는 주자의 주석에 근거하면, 사람과 사물은 모두 기로써 형체를 이루고 리 또한 부여받습니다. 성리학의 주요 명제인 성즉리(性卽理: 성은 곧 리이다)에 근거하면, 이때 부여된 리가 곧 성이므로 사람이든 사물이든 똑같이 하늘로부터 리를 부여받으므로 사람의 성과 사물의 성이 모두 같습니다.

강민우: ‘사람의 성과 사물의 성이 같다’는 동론을 주장하는 낙론과 대비하여 ‘사람의 성과 사물의 성이 다르다’는 이론을 주장하는 호론의 특징에 대해서도 아울러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박필주: 호론은 맹자집주(孟子集註)와 대학혹문(大學或問)에 나오는 주희의 주석에 근거하여 인성과 물성이 다르다는 이론을 주장합니다. 맹자집주는 맹자라는 책에 주자가 해석을 더한 책이며, 대학혹문은 대학이라는 책에 주자가 해석을 더한 책입니다. 맹자집주와 대학혹문에 따르면,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리는 동일하더라도 기질의 차이에 따라 사람의 성과 사물의 성이 달라집니다. 왜냐하면 성은 리가 형체에 부여된 이후를 말하며, 리가 형체에 부여된 이후는 형체에 해당하는 기질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성’의 개념을 낙론처럼 ‘성즉리’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기질에 내재된 이후의 단계로 파악함으로써 사람과 사물의 기질적 차이가 곧 성의 차이로 이어진다고 봅니다. 그래서 치우치거나 막힌 기질을 얻은 것은 사물이 되고, 바르고 통한 기질을 얻은 것은 사람이 됩니다. 치우치거나 막힌 기질을 얻은 사물은 바르고 통한 기질을 얻은 사람처럼, 인․의․예․지의 성을 온전히 가질 수 없습니다. 반대로 바르고 통한 기질을 얻은 사람은 치우치고 막힌 기질을 얻은 사물과 달리, 인․의․예․지의 성을 온전히 가지게 됩니다.

강민우: 성리학에서 말하는 성이란 사람 또는 사물 안에 들어있는 리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이 성은 보는 관점에 따라 기질 속에 내재하는 본원적인 리에 초점을 맞출 수도 있고, 개체적인 특성에 초점을 맞출 수도 있겠네요. 동론에서는 본원적인 리에 초점을 맞추어 본연지성을 성으로 이해한다면, 이론에서는 개체적인 특성에 초점을 맞추어 기질지성을 성으로 이해한 것이죠. 여기에서 ‘본원적’이란 기질을 제외한 리만을 가리킨 것을 말하고, ‘개체적’이란 기질 속의 리를 아울러 가리킨 것을 말합니다.

박필주: 성이란 천지의 리가 사람 또는 사물 속에 내재한 이후를 말하니, 이때 사람 또는 사물 속에 내재하는 리만을 가리킬 수도 있고, 형체를 이루는 기질 전체를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기질 속에서 리만을 가리켜서 성을 말하면 본연지성이 되고, 기질을 포함해서 말하면 기질지성이 됩니다. 낙론은 주로 본연지성의 의미에서 성을 말하고, 호론은 주로 기질지성의 의미에서 성을 말합니다. 그래서 낙론은 성에 비록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의 구분이 있지만, 중요한 것은 본연지성이라고 하여 본연지성의 관점에서 사람의 성과 사물의 성이 같다는 동론을 전개합니다. 반면 호론은 성의 개념을 기질에 내재된 이후의 단계로 파악하고, 기질지성의 관점에서 사람의 성과 사물의 성이 다르다는 이론을 전개합니다.

강민우: 결국 이들 논쟁의 쟁점은 성의 개념을 어떻게 규정하는지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낙론은 본연지성을 성의 개념으로 이해하고, 호론은 기질지성을 성의 개념으로 이해하듯이 말이죠. 그래서 이들은 모두 관점에 따라 동론으로도 볼 수 있고 이론으로도 볼 수 있음을 인정한 것이죠.

박필주: 낙론계열이라는 말에 알 수 있듯이, 저는 ‘성’이 동일하다는 입장에서 리의 보편성에 주목합니다. 그래서 성을 ‘이치의 총회’로 규정하고, 사람과 사물에는 모두 하나의 리가 갖추어져 있으므로 ‘리’는 동일하다는 인물성 동론을 지지합니다. ‘리의 총회’라는 표현에서처럼 사람과 사물의 성은 그 근원에서 보면 모두 동일하다는 논리입니다. 이것은 ‘성은 곧 리이다’는 성즉리(性卽理)의 입장을 견지한 것으로써, 사람과 사물이 모두 천지의 리(또는 동일한 하나의 리)를 부여받아 존재하며, 다만 기질의 맑고 탁함 여부에 따라 차이가 날 뿐이라는 것입니다. 성은 모두 동일하나 기질의 차이에 따라 사람과 사물로 구분되고, 또한 사람 속에서도 성인과 어리석은 사람,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 등으로 구분됩니다. 예컨대 기질이 맑으면 사람이 되고, 기질이 탁하면 사물이 됩니다. 또한 기질이 맑은 가운데서도 바르고 통하면 성인이나 착한 사람이 되고, 기질이 맑은 가운데서도 치우치고 막히면 어리석은 사람이나 나쁜 사람이 됩니다.

강민우: 기질의 차이에 따라 사람의 성과 사물의 성이 달라진다는 것은 낙론이든 호론이든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박필주: 그렇습니다. 낙론은 성이 곧 리라는 일원(一源)의 관점에서 사람의 성과 사물의 성이 같다고 주장하고, 호론은 기 속에 들어있는 리가 성이라는 관점에서 사람의 성과 사물의 성이 다르다고 주장합니다. 그렇다고 낙론이 기와 분리된 리를 성이라고 주장한 것은 아닙니다. 기질에 내재된 리로서의 성에도 본래 리에 해당하는 본연지성의 특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든 사물이든 모두 리를 온전히 가지고 있지만, 다만 겉으로 드러날 때 차이가 날 뿐입니다. 사람의 기질은 맑기 때문에 부여받은 리를 그대로 드러낼 수 있으나, 사물의 기질은 탁하기 때문에 부여받은 리를 그대로 드러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반면 호론은 리가 기(형체) 안에 내재되어 성이 되므로 기질적 차이에 따라 리를 부여받은 성에도 차이가 없을 수 없습니다. 기질이 맑은 사람은 온전한 성을 얻으며 기질이 탁한 사물은 치우친 성을 얻으니, 결국 기질의 차이가 성의 차이를 결정합니다.

강민우: 결국 박필주 선생님은 성의 측면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것이라 할 수 있겠군요. 이때 성은 지극히 순수하고 지극히 깨끗하여 절대 공활한 세계인 형이상자입니다. 이것은 이 리를 담고 있는 그릇인 형이하자의 기질과는 분명히 구분됩니다.

박필주: 저는 이황의 ‘사단은 이발이고 칠정은 기발이다’는 호발설에 대하여 일정부분 수용합니다. 특히 이이가 반대했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는 소종래(所從來)에 따른 구분을 인정하기 때문에 이황의 ‘사단은 리에 근원하므로 이발이 되고 칠정은 기에 근원하므로 기발이 된다’는 주장이 가능하다고 전제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사단과 칠정을 모두 ‘기발이승일도’로 이해하는 이이의 대해 비판적인 입장입니다. 다만 ‘이발이기수지(理發而氣隨之)’와 ‘기발이이승지(氣發而理乘之)’라는 말에서 리와 기를 분개(또는 불상잡)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은 말뜻에 미진한 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강민우: 이황의 ‘사단은 근원은 리이고 칠정은 근원은 기이다’는 소종래에 따른 근원적 구분에 대해, 이이는 이황이 이원(二源)의 오류를 범한다고 비판했다고 들었습니다.

박필주: 이이는 이황의 말처럼 ‘사단의 근원은 리이고 칠정의 근원은 기’라면, 사단과 칠정으로 발하기 이전에 이미 본원에 두 개의 근원이 있게 되므로 옳지 않다고 지적합니다. 예컨대 정으로 발하기 이전인 성의 상태에 이미 사단의 근원인 리와 칠정의 근원인 기가 각각 따로 있다가, 성이 발하여 정으로 드러날 때에 사단은 리에서 나오고 칠정은 기에서 나오는 셈인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의 성에 두 개의 근원(二源)이 있게 되고, 결국 사람의 성은 둘이 됩니다. 사람의 성은 결코 둘이 될 수 없으며 하나일 뿐입니다. 성은 하나이며, 하나의 성이 발하여 하나의 정이 됩니다. 이때의 정은 칠정에 해당하며, 칠정 가운데 선한 부분만을 가리켜서 사단이라고 말할 뿐입니다. 그래서 이이는 이러한 이원(二源)의 문제를 사람이 말을 타는 것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사단의 근원은 리가 되고 칠정의 근원은 기가 된다’면, 이것은 마치 사람과 말이 집을 나서기 이전에는 각각 따로 있다가, 집을 나서면서 사람이 말을 타는 것에 해당한다고 비판합니다.

강민우: 이러한 사고는 박필주선생도 이이처럼 리와 기가 서로 떨어질 수 없다는 ‘불상리’의 관점을 전제한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이이가 이황을 비판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이이는 ‘이발이기수지(理發而氣隨之) 기발이이승지(氣發而理乘之)’라고 하면, ‘리가 발하고 나서 기가 따르고, 기가 발하고 나서 리가 타는’ 것이 되어 리와 기 사이에 시간적 선후 간격이 생긴다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리가 발하고 기가 따르거나 기가 발하고 리가 타는 것은 동시에 이루어지는 일이므로 ‘이발이기수지 기발이이승지’의 표현은 옳지 않다는 것이죠.

박필주: 그래서 저는 이황의 ‘사단은 이발이고 칠정은 기발이다’는 호발설은 인정하면서도, ‘이발이기수지 기발이이승지’의 표현에 대해서는 미진하다고 지적한 것입니다. 이러한 견해 차이가 생긴 이유는 사단과 칠정이라는 개념설정의 범위가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칠정은 감정의 처음과 끝, 머리와 말단을 말한 것이고, 사단은 처음 발할 때의 단서일 뿐입니다. 저는 사단은 처음 발할 때의 단서이고 칠정은 감정의 전체로 구분합니다.

강민우: 사단칠정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이황과는 분명히 구분되고, 오히려 이이의 해석과 유사해 보입니다. 이황이 사단과 칠정을 대립하는 서로 다른 별개의 정으로 본다면, 이이는 정은 칠정 하나이고 그 가운데 선한 정만을 가리켜서 사단이라고 보았죠. 이이가 사단칠정에서 ‘칠정은 정의 전체이고 사단은 그 가운데 선한 부분만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은 박필주선생의 ‘칠정은 감정의 전체이고 사단은 처음 발할 때의 단서’로 보는 것과 매우 유사합니다.

박필주: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단과 칠정에 대한 개념 정의는 이이의 견해와 비슷합니다. 그렇다고 이이의 견해를 모두 묵수․계승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볼 때, 저는 이이의 견해도 일정 부분 받아들이고 이황의 견해도 일정 부분 받아들이는 절충적 자세를 취합니다. 그래서 후대에는 저를 절충파로 분류하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율곡학파 내의 이단상 계열의 특징이고 합니다. 이상으로 ‘리’의 이해 전반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강민우: 지금까지 박필주선생의 ‘리’의 설명에 대해 깊이 감사드립니다.

박필주: 별말씀을요. 도움이 되셨는지 그저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강민우: 지금까지 이단상 선생님, 김창협 선생님, 김창흡 선생님, 임영 선생님, 박필주 선생님을 모시고 율곡학파의 이단상 계열이 지향하고 있는 리에 대한 이해를 살펴보았습니다. 이들이 취하고 있는 ‘리’의 의미는 대체로 ‘도리’의 드러남으로 해석하고, 퇴계학파와 율곡학파의 핵심 요지들을 수용하여 자신들의 안목에서 재해석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단상 계열은 김창협․김창흡․임영․박필주 등으로 낙론 계열의 학자들로서 ‘이발’의 이해에서도 보다 열린 자세를 취하는 특징을 보입니다. 김창협은 사단과 칠정의 차이가 ‘기의 기틀(氣機)’의 발동 여부에 있다고 봅니다. 칠정은 ‘기의 기틀’이 발동한 것이고, 사단은 ‘기의 기틀’을 배제하고 도리가 드러난 것만을 지칭한 것으로 파악합니다. 이것은 사단마저도 ‘기발’로 해석하는 이이의 이론과 분명히 구분됩니다. 여기에서 ‘기의 기틀’은 기의 작위에 해당하므로 그대로 기발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편, 김창흡선생님은 존재론적 시각에서 보면, 이 우주의 만물이 생생하여 그치지 않고 변화가 무궁한 것은 ‘수설’이고, 또한 남녀가 서로 마주 서고, 사람과 물건이 마주 서고, 강한 선악과 부드러운 선악이 마주 서 있는 것이 ‘횡설’이라는 프레임을 제시하는 동시에, 선은 ‘도리가 드러난 것’으로 이해합니다. 이것도 이황이 ‘사단은 기라 발한 것이므로 선하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므로 악으로 흐르기 쉬운 것’으로 대립시켜 해석하는 것과 유사합니다. 임영은 이이의 ‘이기불상리’에는 찬성하고, ‘기발이승일도’에는 반대하는 입장을 견지하는데, 이는 이황의 ‘호발설’을 긍정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박필주는 이황의 ‘이발’을 근원(소종래)에서 본다면 가능하다고 전제합니다. 그러나 ‘이발이기수지’와 ‘기발이이승지’라는 말은 분개의 의미가 있으므로 미진하다고 진단합니다. 이것은 이이의 리와 기가 함께 있다는 ‘불상리’를 전제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단상 계열이 추구하는 ‘리’에 대한 이해는 ‘이발’이라고 하는 이황의 입장을 완전히 도외시하거나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가 드러난 것’으로 파악함으로써 능동적․실천적 대상으로 삼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때 ‘도리가 드러난 것’은 이황이 말하는 ‘이발’의 의미와 유사하니, 결국 이들은 리와 기가 서로 떨어질 수 없다는 ‘불상리’를 전제하면서, 동시에 이황의 이발을 인정하는데 그 특징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참고문헌>

황의동, 기호유학연구, 서광사, 2006

황의동, 한국유학사상연구, 서광사, 2011

유연석, 「우계 후학의 율곡 성리학 이해와 비판」, 율곡사상연구제23집, 율곡연구원, 2011

김승영, 「율곡학파의 이단상 계열이 이해한 ‘리’의 의미」, 동양철학39, 한국동양철학회,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