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헌(趙憲: 1544년∼1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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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헌은 본관이 황해도 백천(白川)이다. 휘는 헌(憲)이며 자는 여식(汝式)이다. 호는 도원(陶原), 후율(後栗)이며 중봉(重峯)은 만년의 호이다. 조부 조세우(趙世佑)는 조광조의 문인으로 통진(通津)에서 김포 감정리로 세거지(世居地)를 옮겼다. 조부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부친은 성수침(成守琛) 문인으로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아 집안 형편이 항상 곤궁했다.

조헌은 토정 이지함, 우계 성혼, 율곡 이이의 문인으로 문묘에 종사된 해동 18현 중 한 사람이다. 교서관 박사, 호조 좌랑, 예조 좌랑, 보은 현감, 전라도 도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임진왜란을 맞이하여 금산전투에서 왜군과 싸우다 의병 700명과 함께 사망하였다.

조헌은 귀가 크고 키가 컸으며 눈동자가 별처럼 또렷하였다. 천성이 효순하고 태도가 순진하고 확고하였다. 어려서 모친을 여의고 계모의 사랑을 받지 못했으나 마침내 계모의 마음을 기쁘게 하였다.

학문을 좋아하여 항상 격앙하여 스스로 “하늘이 남자를 태어나게 한 것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했다. 살림이 몹시 가난하여 헤진 옷과 신발을 신고 스승을 찾아다녔는데 바람과 눈보라를 피하지 않았다. 집에 돌아오면 몸소 자기가 땔나무를 등에 져다가 부모를 위해 불을 지폈고 불빛에 비추어 글을 읽었다. 평소의 언행과 강습이 모두 위기의 학문 실천이었다. 대학의 ‘남의 자식 된 자는 효에 멈추어야 되고 남의 신하된 자는 공경에 멈추어야 된다.’ 대목에 이르면 세 번씩 반복하여 완미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요순과 탕무가 아니면 말하지 않았고 공맹과 정주가 아니면 배우지 않았다. 기상을 알 수 있다.

1565년(22세) 성균관에 유학하였다. 여러 유생들과 함께 보우를 논박하는 상소를 올렸다. 대궐 밖에 엎드려 임금의 응답을 기다렸는데 조헌만이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강직한 그의 성품을 알 수 있다.

1567년(24세) 명종 22년 가을 감시에 응시하여 삼장에 합격하였다.

1570년(27세) 선조 3년 파주목 교수가 되었다. 우계 성혼에게 학문을 청하였다. 특히 주역을 배우고자 했으나 성혼이 조목의 학문을 높이며 외우(畏友)라 칭하며 제자의 예로 대하지 않았다.

1571년(28세) 홍주목 교수가 되었다. 토정 이지함을 만나 배움을 청하였다. 가을에는 파주에서 율곡 이이를 만나 뵈었다.

1572년(29세, 선조 5년) 교서관 정자가 되었다. 선조가 전례대로 불사(佛寺)에 향(香)을 내려주자 선생이 상소하여 그 일이 불가하다고 극언했다. 선조가 노하여 장차 사형을 시키려고 했다. 관직을 삭탈하는 것으로 그쳤으나 직성(直聲)을 조정에 떨쳤다.

1577년(34세) 통진 현감으로 재직 중 잘못을 일으킨 노비를 장살하여 부평으로 유배를 당하였다. 다음해 부친상을 당하였으나 유배지에 있어서 장례에 참석하지 못하였다.

1580년(37세) 유배지에서 석방되었다. 윤4월 보령으로 가서 이지함의 상에 곡하였다. 가을에는 해주 석담으로 율곡선생을 찾아가 수개월간 강학하였다. 조목의 후율(後栗)이라는 호는 율곡을 존경하여 율곡(栗谷) 선생의 뒤를 잇는다는 뜻을 취했다.

1581년(38세, 선조 14년) 봄 공조 좌랑을 거쳐 전라도 도사가 되었다. 송강 정철이 본도의 관찰사가 되자 조헌이 정철을 헐뜯는 말을 듣고 그의 막하로 있고 싶지 않아 병을 핑계대고 벼슬을 그만두려 했다. 성혼과 이이의 권유로 만나게 되어 마침내는 금석처럼 변치 않는 교제를 맺었다.

1584년(41세, 선조 17년) 율곡이 사망하여 곡을 했다. 이이와 성혼의 지지를 받던 정여립이 이이, 성혼, 반순 등 서인의 주요 인물을 비판하고 동인으로 돌아섰다. 이발이 정여립에 동조하자, 조헌은 그와 절교하고 정여립의 소를 논박하는 상소문을 거듭 올렸다. 서인의 앞잡이로 몰려 배척받자 옥천으로 내려가 살 것을 결심했다. 겨울에 대계(臺啓)로 인하여 파직되었다. 옥천으로 옮겨 후율정사(後栗精舍)를 짓고 강학하며 후학 양성에 힘썼다.

1586년(43세) 공주목 교수가 되었다. 10월 만언소(萬言疏)를 올렸는데, 그 중에 “신이 이 세상에 스승으로 삼은 자가 세 사람으로 이이, 성혼, 이지함입니다. 세 사람은 학문의 나아간 바가 비록 각기 다르지만 그 청심과욕(淸心寡慾)하고 지극한 행실로 세상의 모범이 됨은 똑같습니다. 신이 일찍이 이 세 사람이 신에게 가르친 것으로써 선비들을 가르치려고 하였으나, 사설(邪說)이 성행하여 신이 이이와 성혼의 무리라는 말을 듣고서는 대부분 등을 돌려 달아났으며 꾸짖고 욕하는 말이 사방에서 일어났습니다. 신이 못난 까닭에 사우(師友)에게까지 욕이 미쳤으니 참으로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했다.

1589년(46세, 선조 22년) 4월 도끼를 지고 대궐에 나아가 만언소를 올렸으나 양사와 옥당의 차자를 올려 벌주기를 하므로 함경도 길주 영동역으로 유배되었다.

당시 조헌이 옥천에서 재를 넘으며 2천여 리 길을 가며 온갖 곤욕을 극도로 겪었으나 사기(辭氣)는 조금도 꺾인 적이 없었다. 영북 지방에 돌림병이 한창 극성하여 그곳을 지나다가 죽는 자들이 열이면 대여섯이나 되었다. 조헌의 아우와 두 하인도 모두 죽었는데, 극도로 슬프고 가슴이 아팠지만 걱정하거나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고 주변에 시체가 쌓인 가운데에서도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간혹 몸소 병자의 집에 찾아가서 약을 주어 살려내기도 하였는데 끝까지 병에 걸리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선생의 정기(正氣)는 여귀(厲鬼)도 감염시키지 못했다.” 했다.

1591년(48세, 선조 24년)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사신을 보내와 명나라를 칠 길을 내놓으라고 하여 조정에 소동이 일어났다. 이때(3월경) 조헌은 옥천에서 상경하여 도끼를 지고 대궐로 나아가 일본 사신을 참수하고 명나라에 보고할 것을 상소하였다.

상소가 대궐에 들어간 지 사흘이 지나도 아무 회보(回報)가 없자, 주춧돌에 머리를 짓찧으니 피가 얼굴을 덮을 정도로 흘렀다. 어떤 자가 그 자고(自苦)함을 비웃자 “내년에 산속으로 달아나 숨게 되면 반드시 내 말이 생각날 것이다.” 했다. 스스로 중국에 알릴 주문(奏文)과 유구(琉球)ㆍ대마(對馬)ㆍ일본(日本)의 유민들에게 유시하는 글과 현소(玄蘇)를 참수한다는 죄목 및 영남과 호남의 왜적을 방비하는 계책을 기초하였는데, 그 대개는 이전의 상소와 같았으되 말씨가 더욱 격절하였다.

1592년(49세, 선조 25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어머니를 청주 선유동으로 피신시키고 돌아왔다. 5월 격문을 지어서 병졸을 모집하였다. 제자 김절(金節), 김약(金籥), 박춘검(朴忠儉) 등과 함께 향병(鄕兵)을 소집하여 보은 차령에서 북상하는 왜적을 퇴각시켰다. 6월 제자 이우(李瑀), 김경백(金敬伯), 전승업(全承業)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약 1,600여명을 모아 8월 청주에서 영규(靈圭)의 승려군과 합류하여 왜적을 격파하고 청주성을 수복하였다.

충청도 순찰사 윤국형(尹國馨)의 방해로 의병이 강제 해산 당했다. 불과 700여명 남은 병력을 이끌고 금산으로 행진하였다.

8월 16일에 군대를 옮겨 금산으로 향하였는데, 어떤 자가 금산의 왜적들이 모두 정예군이고 수효도 수만 명이나 되므로 섣불리 건드려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조헌이 비문하며 맹세하기를, “군부(君父)가 지금 어디에 계시는데 감히 형세의 이둔(利鈍)을 말하는가?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되니 나는 한번 죽는 것만을 알 뿐이다.” 했다. 마침내 승장 영규와 더불어 군대를 연합하여 진격했다.

앞서 호남 순찰사 권율과 더불어 18일에 일제히 군대를 움직여 왜적을 협공하기로 약속하였는데 권율이 서신을 보내 기일을 바꾸었으나 이미 금산군의 십리(十里) 밖에까지 도달하였다. 왜적이 조헌의 군대 뒤에 후원군이 없음을 알아채고서 전열을 갖추지 못했을 때를 틈타서 맞받아 공격해왔다. 조헌이 군중에 명령하기를, “오늘은 단지 한번 죽는 일만 있을 뿐이니, 사생과 진퇴함에 있어 오직 의(義) 자에 부끄럽지 않게 하라.” 하자, 사졸들이 모두 명령한 대로 따르겠다고 했다.

한참 동안 힘껏 싸우자 왜적은 세 번이나 패배하여 거의 궤멸할 지경에 이르렀는데, 우리 병사들도 화살이 바닥나서 어쩔 수가 없었고 해가 저물어가니 사졸들은 맥이 풀렸다. 이에 조헌이 의기(意氣)가 자약(自若)하여 더욱 다급하게 독전(督戰)하니 왜적이 정예병을 모조리 투입하여 공격해왔다. 마침내 장하(帳下)에 들어가자 편비(褊裨) 서너 명이 있다가 탈출하게 하려고 뛰쳐나가기를 극력 청하였으나, 조헌은 웃으며 말안장을 풀면서 말하기를, “여기가 내가 순절할 곳이다. 장부는 한번 죽을 따름이니 난리에 임하여 구차하게 죽음을 면해서는 안 된다.” 하고서 북채를 당겨 북을 두드렸다. 사졸들이 앞 다투어 죽기를 각오하고 적에게 달려들었는데 심지어 빈주먹으로 서로 치고 때리면서도 오히려 자리를 떠나지 않았으며, 7백 명이 한 사람도 달아나 살아남은 자가 없었다. 왜적들도 죽은 자가 또한 그보다 더 많았으므로 기세가 마침내 크게 꺾이어 남은 병력을 거두어 진으로 돌아갔다.

곡성이 들판에 진동하였고 이에 시체를 쌓아 불에 태우니 사흘이 지나도록 불이 꺼지지 않았으며, 마침내 무주에 주둔하고 있던 왜적들과 함께 모두 달아났으므로 호서 지방이 그에 힘입어 온전하게 되었다. 전란이 일어난 이래로 왜적의 기세를 꺾고 진로를 막아낸 공이 이보다 나은 적이 없었다.

1603년 유생들이 금산의 순절(殉節) 장소에 순의비(殉義碑)를 세웠다.
1609년(광해군 1년) 충청도 유생들이 사액을 청하여 표충사(表忠祠)라는 사액을 하사받았다.
1649년(인조 27년) 문열(文烈) 시호를 받았다.
1656년(효종 7년) 신도비(神道碑)가 세워졌다. 김상헌(金尙憲)이 비문을 짓고 송준길이 글씨를 쓰고 김상용(金尙容)이 전액(篆額)을 썼다.
1666년(현종 7년) 호남 관찰사 민유중이 문집을 간행하였다.
1734년(영조 10년)6월, 조정에서 자손 중 적손(嫡孫, 큰집 자손), 지손(支孫, 작은 집 자손)을 가리지 않고 관리로 등용하라는 명을 내렸다. 『조천일기(朝天日記)』의 간행을 명하였다.
1740년(영조 16년)7월, 임금이 5대손 조혁(趙㷜)을 면담하고 선정(先正, 훌륭한 조상)의 행적에 대해 물어보았으며, 운각(芸閣, 서고)에 명하여 문집을 간행하여 자손과 서원에 보급하도록 명하였다.

신도비명이 그 삶의 정절을 고스란히 적었다. “하늘이 선(善)을 베풀어 중화(中華, 중국)라고 해서 풍족하게 주지 않고 이적(夷狄, 오랑캐)이라고 해서 인색하게 주지 않네. 선생께서 그것을 받으시어 효도는 자식들의 법이 되고 충성은 신하들의 법이 되었으니, 이 마음과 똑같은 자라면 누가 공경하고 감복하지 않으리오. 일은 만 갈래로 다름이 있고 이치는 간혹 하나가 아니기도 하네. 산 위의 구름은 쉽게 개이지만 임금의 총명은 오히려 미혹되었네. 포악한 물고기도 길들일 수 있으나 간사한 마음은 고치기가 어렵네. 임진년(壬辰年)ㆍ계사년(癸巳年)에 천지(天地)가 반복(反覆)되고, 선생의 일신(一身)이 홀로 인극(人極)을 담당하였네. 사신의 목을 베라고 위언(危言)하니 상하(上下)가 모두 실색(失色)하였네. 피눈물을 흘리며 대중에게 맹세하니 의로운 군사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네. 청주(淸州)에서 시전(試戰)하여 왜노(倭奴)들의 넋을 빼앗았네. 글을 올려 승전(勝戰)을 알리니 온 조정 사람들이 기뻐하였네. 재차 금산 전투에 나아가니 화살이 빗발치듯하였네. 사람은 용감하게 왜적을 죽이는데 하늘은 바야흐로 날씨가 나빴네. 구름 속에 짧은 해가 매몰되고 군사들은 촌철(寸鐵)조차 모자랐네. 부자(父子)가 분전(奮戰)하며 소리치매 하늘이 울부짖고 산악이 갈라졌네. 선생의 죽음을 남들은 몸을 위해 애석히 여기지만, 선생의 죽음을 나는 나라를 위해 애석히 여기네. 옛날에 전횡(田橫)의 무리들은 따라 죽은 자들이 오백 명이었지만, 지금 이에 순의(殉義)한 자들은 7백 명이나 되었네. 훌륭하도다 선생이여 만고토록 열렬하게 빛나리니, 신도비에 이름을 드리우매 홍필(鴻筆, 달필)이 아닌 게 부끄럽네.” 했다. ‘홍필이 아닌 게 부끄럽다’는 이 말이 가슴에 다가온다.

<참고문헌>

국역 조선왕조실록
국역 국조인물고
「조헌 행력」, 『한국문집총간 인물연표』(http://www.krpia.co.kr/)

정엽(鄭曄, 1563-1625) 2


정엽(鄭曄, 1563-1625) 2                                 PDF Download

 

정엽은 본관이 초계(草溪: 경남 함양군)이고 자는 시회(時晦), 호는 수몽(守夢) 혹은 설촌(雪村)이다. 조부는 찰방을 역임한 정선(鄭璇)이고, 부친은 진사 정유성(鄭惟誠)이다.

1565년(3세) 태어날 때 특이한 자질이 있어 3세에 글을 배웠다.

1566년(4세) 여러 아이들과 이웃집에서 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율곡(栗谷) 이이(李珥)와 임당(林塘) 정유길(鄭惟吉)이 비범한 정엽의 모습을 보고 성명을 물어보자 매우 분명하게 대답하였고 시를 배웠는지 물어보자 곧바로 틀리지 않고 대답하였으므로 온 좌석이 경탄하며 신동이라 했다.

1578년(16세) 선조11년 이산보(李山甫)의 딸과 결혼하였다. 이산보의 사촌으로 북인의 영수 인 이산해가 있고, 숙부가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이다. 이지함이 정엽을 보고 “후일에 반드시 큰 이름을 떨칠 것이다.” 했다. 정엽은 용모가 준수하고 기국이 웅걸했다. 이산보가 정엽에게 훌륭한 스승을 찾아 공부하라고 권유하자 송익필(宋翼弼)을 찾아가 배우고, 이어 성혼(成渾)과 이이(李珥)의 문하에 출입하여 배웠다. 이에 호방한 습관을 털어내고 단정함고 엄숙함으로 몸가짐을 가졌다. 경서의 뜻을 분석하고 공부의 목표를 분명히 살펴 여러 사람과 즐겁게 지내면서 유익한 바를 구하였는데, 더불어 교유한 사람들이 모두 다 당시의 유명한 사람들이었다.

1581년(19세)에 집에서 책을 지고 나와 도봉서원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학문에 매진하였다. 후일 정엽의 막역지우이자 그의 비명을 쓴 이정구와 함께 도봉서원에서 수학했다. 이정구가 4개월 동안 머물며 서로 학문을 강마하고 익혔는데 정엽이 이미 말을 천천히 하고 걸음걸이를 법도가 있게 하여 신심(身心)을 수렴한 것을 보고 매우 존경했으며, 그 마음이 오래되어도 여전히 시들지 않았다 했다.

1583년(21세)에 별시 문과에서 병과 12위에 올라 승문원에 선발되었다. 4년 뒤 1587년에 감찰, 형조 좌랑이 되었다. 1591년에는 할머니 상을 당하여 삼년상을 치렀다.

1596년(29세) 예조 정랑(禮曹正郞)으로 있다가 고급사(告急使)에 차출되어 명의 밀운 군문(密雲軍門)에 가서 병력을 요청하였다. 돌아와서 성균관 사성, 수원 부사에 임명되었다. 수원은 경기의 요새 성읍으로 새로 군사를 나누어 삼남(三南)의 큰 길목을 담당했다. 정성을 다하여 민정을 펼치니, 백성이 안도하여 부모처럼 떠받들었고 고을 백성들이 서천에서처럼 비석을 세워 덕을 칭송했다.

1598년(31세) 응교와 집의에 임명되어 시강원 필선을 겸했다. 이어 동부승지로 승진하여 우부승지에 이르렀다가 교체되어 형조 참의에 임명되었다. 동지사(冬至使)로 차출되어 연경(燕京, 지금의 북경)에 갔다가 돌아와 나주 목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돌아갔다. 그 뒤 도사 영위사가 되어 관서에 갔다. 앞서 기자헌(奇自獻)이 인척으로 벼슬길에 나와 은밀히 권력을 도모하려고 겉으로 선비를 좋아하는 척하였으므로 당시의 의논이 그를 이조 참판으로 추천하였으나 정엽은 평소 그의 사람 됨됨이를 미워한 나머지 불가하다고 하였다. 기자헌이 누차 정엽의 집에 들렀으나 한 번도 답례를 하지 않았는데, 이로 말미암아 기자헌이 크게 앙심을 품었다.

1602년(40세) 정인홍(鄭仁弘)이 권력을 잡아 성혼을 배척하였다. 성혼의 문인이었던 정엽도 함경북도 종성 부사로 좌천되었다. 다음 해 1603년 오랑캐 기병 수만 명이 갑자기 함경북도의 종성 아래에 접근했다. 정엽은 성루로 올라가 성 안의 백성들을 동원하여 군복을 입히고, 깃발을 많이 세워 조용히 기다렸다. 그러자 적병이 7일 동안 성을 포위하다가 수비가 있는 것으로 의심하여 떠나고 다만 한 사람만 붙잡혀갔다. 그 즉시 사실대로 조정에 보고하였다. 그런데 사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던 기자헌이 성을 완전히 지키고 적병을 물리친 공로는 거론하지 않고 결국 한 사람이 붙잡혀간 것을 죄안으로 꾸며서 의금부로 붙잡아다 국문한 다음에 동래로 귀양을 보냈다.

1612년(50세) 광해군 4년 도승지로 있을 때 왕의 경연에 자주 나갔다. 광해군이 경연을 소홀히 하는 것을 보고 직언을 하였다. 광해군은 간언을 듣고 그 다음날 경연에 나왔다. 경연에서 어떤 신하가 궁중의 말이 밖으로 나간다고 아뢰자 정엽이 말하기를, “신은 외부의 말이 궁중으로 들어오는 것을 우려한다.”고 하니, 소인배들이 눈을 흘겨보았다. 정엽은 호조참의로 강등되었다가 품계가 승진되어 참판에 올랐다.

1613년(51세) 다시 도승지가 되었다. 박응서(朴應犀)가 옥중에서 고변하자 이이첨(李爾瞻)의 무리들이 큰 옥사를 일으켜 국구(國舅)와 그의 세 아들을 죽이고 일시의 명류(名流)들이 체포되어 옥에 가득 찼다. 정엽이 동료들과 더불어 아뢰려고 하니, 동료들이 모두 벌벌 떨며 감히 대답하지 않았으므로 상소 한 장을 엮어 올리려 했으나 어머니가 만류하여 상소를 포기했다. 도승지를 물러났다.

1616년(54세) 동지의금부사가 되었다가 자헌대부로 승진하였다. 때마침 이정귀가 정엽과 함께 대비가 있는 경운궁으로 가서 서반(西班)의 관직에 서용된 것을 사은하려고 갔는데, 궁문을 폐쇄한 지 이미 수년이 되어 잡초가 뜰과 계단을 뒤덮어버렸으므로 서로 쳐다보며 눈물을 훔치었다. 그때 큰 가뭄이 들어 남문을 닫아버렸다. 정엽이 말하기를, “열린 문을 닫을 필요가 없고 닫힌 문을 열어놓으면 하늘이 반드시 비를 내릴 것이다.”고 하였는데, 그 말이 누설되었다. 이이첨이 매우 노하여 국문을 열려고 하니 어떤 사람이 이이첨에게 말하기를, “이는 한 번 해학을 해본 것 같다. 왜 말을 가지고 사람을 죽이려고까지 하는가?”라고 하자, 이이첨이 말하기를, “해학을 한 사람이 눈물을 흘린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노여움이 조금 풀려서 이정귀와 정엽이 모두 화를 면했다.

1617년(55세) 조정에서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해야 한다는 폐모론(廢母論)이 제기되자 반대하고 외직을 요청하여 양양 부사로 나갔다. 1년 후 백관들이 대궐에 나가 모후 폐위를 청하였다. 이때 같이 따라가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법망에 걸렸으나 정엽은 전 해에 이미 외직 벼슬로 옮겨 숨어살다가 화를 면했다.

1623년(61세, 인조 1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조정에 나가 강화도로 유배되는 광해군을 위해, “폐주(廢主)가 비록 스스로 하늘과 관계를 끊기는 하였으나 신하들이 일찍이 섬기었으니 마땅히 곡하며 전송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보다 앞서 정엽이 광릉(廣陵)에 있을 적에 어떤 서생이 은밀히 반정의 거사에 대해 고했는데, 정엽이 말하기를, “인륜이 이미 끊어져버렸으니 이때에는 종묘와 사직이 중요하다. 다만 한 번 차질이 생겨 선비가 모두 섬멸될 경우에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고 나라도 뒤따라 망할 것이다. 나처럼 사리에 어두운 선비는 마땅히 천지의 큰 분수를 지킬 뿐이다.” 했다. 이때에 이르러 그 말이 점차로 잘못 전달되어 정엽의 죄안(罪案)이 되어버렸으므로 병환을 핑계대고 향리로 돌아갔다. 여러 명인(名人)들이 정엽이 조정을 떠났다는 말을 듣고 모두 다 물러나가려고 하자 정엽을 배척한 사람이 크게 후회하여 옛날처럼 서로 사이좋게 지내면서 다 함께 국사에 힘쓸 것을 다짐하니 분분한 의논이 안정되었다.

이해 3월에 정엽을 지돈녕부사로 삼았는데, 사관이 “정엽은 자질이 영민하고 기국이 크며 또 경술(經術)에 능통하였고 관직에 임해 일을 처리하는 데 대단한 능력을 발휘하였다.” 기록했다. 이어 성균관 대사성을 맡았다. 당시 인조가 교화를 밝히고 선비의 풍습을 바로잡는 것을 급선무로 여겨 선비들의 명망이 있는 사람을 간택하여 사유(師儒)의 장으로 삼으려고 하였으나 적임자를 찾기 어려워 조정에 자문하니 대신이 입을 모아 정엽을 추천했다. 정엽이 학교의 제도를 상정(詳定)하여 대대적으로 학교와 재실(齋室)을 수리해놓고 선비들로 하여금 거처하면서 학문을 강론하고 날마다 책을 가지고 가르침을 받도록 하였는데, 모두 법도가 있어 볼만하였다. 그때 이조 참판의 자리가 비어서 정엽이 첫 번째 후보로 선발되었으나 인조가 정엽이 아니면 선비를 육성할 수 없다고 하여 윤허(允許, 허락함)하지 않았다. 그 뒤 인조가 대신에게 묻기를, “옛날에 실직(實職)을 맡으면서 대사성을 겸임한 사람이 있었는가? 정 아무개는 어찌 한 임무만 국한시킬 수 있겠는가?” 했다. 대사간에 임명하고 특별히 명하여 대사성을 유임하라고 했다. 이는 전에 없던 특별한 예우였다.

1624년(62세)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영상(領相) 이원익(李元翼)이 도체찰사(都體察使)가 되어 정엽을 부관으로 삼으려고 하니 조정의 의논이 두 사람이 다 나가서는 안 되므로 정엽은 조정에 있으면서 책략을 세워 대응하도록 하였다. 후에 이원익과 정엽은 모두 가지 않았다. 적병이 깊이 쳐들어와 도성의 민심이 술렁거리자, 정엽이 말하기를, “임금이 왕자와 대신으로 하여금 금중(禁中)에 들어가 숙직하게 하여 위태롭고 의심스러운 상황을 진정해야 한다.” 하였다. 이제(李瑅)가 변란 초기 세력을 불리지 못한 것이 이 때문이었다 한다. 송도가 함락되자 인조가 신하들을 불러 대책을 의논하였으나 도성을 지켜야 할지 떠나야 할지 결정되지 않았다. 대신 이하가 모두 감히 먼저 말하지 않자 정엽이 큰 소리로 말하기를 “나라의 존망이 호흡의 사이에 달려있는데, 어찌 대신이 얼버무리고 있을 때이겠는가? 도성은 지역이 넓고 커서 지키기 어렵고 강도(江都)는 바다 가운데 있으니, 남쪽 공주(公州)로 내려가 삼남(三南)의 군사를 모집하여 회복을 도모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니, 임금이 곧바로 그 의논을 따랐다.

1625년(63세) 병을 얻어 사망하였다. 부음을 들은 인조 임금은 매우 슬퍼하며 그에게 의정부 우의정의 벼슬을 내리도록 명하였다. 아울러 조회를 중지하고 채소 반찬을 들었으며 특별한 애도를 표했다. 정엽이 병환이 위독하자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고 사정(邪正)을 분변하는 것’을 요점으로 삼아 차자(箚子)를 엮었다. 그의 손자 정원(鄭援)이 대궐에 나아가 올리니 인조가 답하기를, “선경(先卿)이 남긴 차자를 보니, 죽음에 임해서도 임금을 잊지 않아 그 절실한 충직(忠直)이 보통보다 월등하였으므로 재삼 펼쳐서 읽어보고 내 매우 슬퍼 탄식하였다. 내가 비록 아는 것이 적고 사리에 어둡지만 감히 마음에 새기어 선경이 지하에서 소망한 것을 저버릴 수 있겠는가?” 했다.

그 유차의 대략은 이렇다.

“신은 질병이 침중하여 임금을 배알할 길은 없으나 임금의 잘못과 나라의 걱정이 마음에 걸려 잊기 어려운데 어찌 감히 소회(所懷)를 숨김으로써 큰 성은을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지금 백성에게 거두는 것이 절도가 없으므로 원근의 백성들은 탄식하고 있고 군대는 헛되고 장부만 있을 뿐이므로 전수(戰守)에 아무런 계책이 없으며, 기강이 해이해져 모든 직책이 실추되어 있습니다. 이 세 가지는 오늘날의 고질입니다만 신이 걱정하는 것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크게 걱정할 것은 오직 전하의 한 마음에 대한 그것입니다. 전하께서는 강론을 열심히 하지 않은 것이 아닌데 이치를 살피는 데에 정밀하지 못한 점이 있고, 사욕을 극복하는 일이 엄격하지 않은 것이 아니나 사심을 버리는 데에는 미진한 점이 있습니다. 그런 때문에 명령을 내리고 조처를 시행하는 데에 공과 사가 서로 뒤섞이고 하자와 과오가 마구 발생하니 신은 삼가 개탄하는 바입니다. 지금부터는 맹렬하게 허물을 반성하여 자책하시고 중앙과 지방에 고하여 널리 직언을 채취하되, 자신을 깨우치는 일에 언급된 것이라면 과감하게 고치고, 폐단을 개혁하는 일에 언급된 것이라면 단점은 버리고 장점은 취하소서. 또한 학문을 강론하는 자리에서나 한가히 계시는 가운데서는 신하들을 소대(召對)하여 백성을 안보하고 군사를 훈련하는 방법을 강론하셔서 먼 장래를 위하는 계책과 자손의 안락을 위하는 모책으로 삼으소서.”

<참고 문헌>

국역 조선왕조실록
국역 국조인물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