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원(朴聖源)


박성원(朴聖源)                                                              PDF Download

1697(숙종 23)∼1767(영조 43) 조선중기의 문인․학자이다.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사수(士洙)이고 호는 겸재(謙齋). 도암(陶庵) 이재(李縡, 1680∼1746)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낙촌(駱村) 박충원(朴忠元, 1507∼1581)의 6대손이며, 증조는 박승임(朴承任), 조부는 박현주(朴玄冑), 부친은 학생(學生) 박진석(朴震錫)으로 별다른 관직을 역임하지 못했다. 때문에 박성원은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박성원”이라든가 “세력이 없는 인물”로 폄하되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박성원이 죽은 해인 1767년에 자신의 6대조인 박충원의 행장(行狀)을 지어 선조의 업적을 선양하려고 하였는데, 이것은 어디서 왔는지 모를 정도의 빈약한 가문의 내력을 가진 박성원에게 매우 필요한 작업이었을 것이다.

박성원은 1726년 29세 즈음에 이재의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노론의 중심인물로 성장하였다. 그는 스승인 이재와 마찬가지로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에 진출하였다. 1721년(경종 1) 24세에 생원시에 합격했고, 1728년(영조 4)에 별시문과의 을과에 급제한 후 언관으로서 사간원과 사헌부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박성원은 노론의 입장에서 영조의 탕평론(蕩平論)에 매우 비판적이었으며, 1744년(영조 20)에 영조가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는 것을 반대하는 등 11조목의 상소문을 오렸다가 영조의 노여움을 사서 남해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원래 ‘기로소’는 조선시대 70세 이상 연로한 고위 문신들을 예우하기 위해 설치한 관서이다. 나이가 70이 되면 기(耆)라 하고 80이 되면 노(老)라 하여 정2품 이상의 벼슬을 한 사람 중에서 70세 이상이 되어야 기로소에 들어갈 수 있었으니, 임금도 연로해야 여기에 참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영조는 이러한 조건에 해당되지 않았기 때문에 박성원은 영조가 기로소에 들어가는 것에 반대하였다.

이 때문에 영조의 노여움을 사서 남해에 위리안치되었는데, ‘위리안치’는 중죄인에 대한 유배형 중의 하나이다. 죄인을 유배 보내면서 여기에 더하여 행동반경을 제한하였으니, 유배간 곳의 집 둘레에 가시가 많은 탱자나무를 심어서 죄인을 그 안에 가두어 집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하는, 즉 오늘날의 말로 하면 유배에다 가택연금형이 더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탱자나무는 전라남도에 많았기 때문에 대개 죄인들은 전라도 지역의 섬에 유배되었다. 이 후 영조는 박성원을 지지하는 정언유(鄭彦儒)․박치융(朴致隆) 등도 ‘당파의 습성’이라고 비난하면서 귀양을 보내는 등 엄하게 대처하였다.

그러나 1749년 12월에 검의(檢擬)를 허락하는 명령이 내려와 관직에 추천되었으나, 1750년 어머니와 형, 형수가 연이어 사망하면서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1754년에 사헌부 장령으로 발탁되었고 1759년에는 사헌부 집의에 제수되었다. 1759년 8월에는 강서원(講書院)의 좌익선(左翼善)으로 당시 세손이었던 정조(正祖)를 가르쳤고, 1761년에는 정3품 유선(諭善)으로 임명되었다. 박성원은 어린 정조에게 ⌈소학⌋을 가르치면서 ⌈소학⌋을 읽는 것은 몸소 실천하기 위한 것임을 강조하였으며, 몸을 주재하는 마음과 그 마음을 주재하는 경(敬)을 중시하였다. 영조로부터 세손의 학문은 박성원의 힘이라는 칭찬을 듣기도 하였다. 이후 참판을 마지막으로 1676년에 봉조하(奉朝賀, 조선시대 전직 관원을 예우하여 종2품 이상으로, 나이가 70세가 되어 퇴임한 관리에게 특별히 내린 벼슬)가 되었는데, 이때 영조에게 수서(手書) 어제사전(御製謝箋)을 하사받았다.

정조는 어린 시절 자신에게 학문을 가르쳤고,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으로 인한 위태로운 시기를 함께 했던 박성원에게 돈독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박성원 사후에 문헌(文憲)이라는 시호를 내렸을 뿐만 아니라 자손들을 음직(蔭職)으로 등용하도록 하였다. 정조는 박성원을

“한 시대의 인물 중에서 엄선한 사람”

 

으로 평가하였고, 그의 저작인 「돈효록(敦孝錄)」과 「예의유집(禮疑類輯)⌋ 등을 왕명으로 간행토록 하였다.
돈효록」은 「효경(孝經)」․「서명(西銘)」․「경사(經史)」와 여러 문헌 가운데 효에 관한 각종 교훈과 고사를 가려내어 분류․편집한 책이다. 박성원은 효란 백성을 교화하여 풍속을 이루는 근본이요 백성을 보호하고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는 원동력으로 인식하고 국가적 차원에서 효를 실천하고자 하였다. 효에 관한 좋은 말이나 격언은 「효경」 이외의 다른 경전에도 많이 나오는데, 그것이 여러 책에 흩어져 있어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그러므로 그것을 모두 뽑아내어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후학들의 효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이 책을 저술하였던 것이다.

처음에는 「효경」의 뜻을 부연했다는 뜻으로 ‘효경연의(孝經衍義)’라고 제목을 붙였으나, 스승인 이재가 효행의 돈독함을 권장한다는 의미를 강조하여 ‘돈효(敦孝)’라고 이름 지은 것을 존중하여 그것을 그대로 책이름으로 하였다. 또한 박성원은 예서의 연구에 적극적인 힘을 기울였는데, 우리나라 여러 학자들의 예설을 종류별로 분류하고, 의심스러운 사항을 일일이 뽑아내고 조목마다 자신의 견해를 덧붙여서 「예의유집(禮疑類輯)」을 편찬하였다.

후에 정조는 그의 어제(御製)서문에서

“본조의 열성(列聖)이 유교를 진흥시킨 뒤 300년 동안 예에 밝은 선비들이 40∼50명에 이르렀다. 그들은 알기 어려운 고훈(古訓)이나 시변(時變)에 대해 질문하고 그 전거를 끌어들여 밝혀놓았는데, 다만 그 말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 갑자기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이에 박성원이 여러 곳에 있는 글들을 한데 모아 종류별로 분류하면서 관혼상제를 항목으로 정하고, 거기에 종법(宗法)과 잡례(雜禮)를 부록하여 「예의유집」이라는 이름으로 몇 권의 책을 만들었다.”

(「홍재전서」권8, 「예의유집서」)

 

이를 통해 이 예서가 국가적인 관심과 공인을 받아 간행 및 보급된 예서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박성원은 남해에 머문 2년 동안 스승인 이재와 지속적으로 서신을 교환하였다. 이재는 박성원의 유배지에서의 음식이나 잠자리를 걱정하면서도 독서에 힘쓸 것을 권면하였다. 박성원은 1746년 1월에 위리안치에서 풀려났는데, 그 해 10월에 스승 이재는 사망하였다.

이재는 평소 한천정사(寒泉精舍)를 지어 강학에 힘쓰며 낙론(洛論)의 학설을 중심으로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그의 제자들은 이재의 학문을 계승하면서 스스로 ‘천문(泉門)’이라고 자처하였다. 박성원은 당시 이재의 문하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로 인식되었으며, 이재 사후에는 이재의 ‘천문’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먼저 박성원에게 주어진 가장 큰 임무는 한원진의 「한천시(寒泉詩)」 비판에 대응하는 것이었다. 이재는 김창협(金昌協)의 학통을 계승하여 낙론의 영수가 되었는데, 호론(湖論)인 한원진(韓元震)․윤봉구(尹鳳九) 등과 심성론을 두고 논쟁을 벌였다. 이재는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과 성범심동론(聖凡心同論)을 주장하며 낙론의 입장을 대변하였다.

1746년 이재는 한원진의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의 오류를 지적하는 「한천시」를 지었다. 이듬해인 1747년에 한원진은 「제한천시후(題寒泉詩後)」를 지어 이재의 논리가 사람과 짐승, 유교와 불교, 중화와 오랑캐의 분별을 흐리게 한다면서 노골적으로 비판하였다. 이때는 이재가 이미 사망한 후였으므로 제자들이 이 논쟁에 참여하였는데, 이때 박성원이 중심 역할을 담당하였다. 박성원은 「한남당시발변설(韓南塘詩跋辨說)」을 지어 한원진이 이재의 「한천시」를 비판한 것을 재비판하였다. 또한 「심성설십이조(心性說十二條)」를 통해 낙론의 입장에서 호론의 심성론을 꼼꼼하게 비판하였다. 이처럼 박성원은 노론-낙론의 대표적인 학자인 이재의 고제(高弟)로서, 이재의 심성론과 예학을 가장 충실히 계승하면서 낙론의 정통성을 확인하는데 전력을 다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박성원이 사망한 후에 이재의 학통은 김창협의 손자인 김원행(金元行, 1702∼1772)에게로 이어졌다. 박성원은 도통에서 밀려나면서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였다. 박성원이 낙론의 도통에서 배제되는 이유는 아마도 그가 명망 있는 집안 출신이 아니었고, 또한 그가 계속 관직생활을 했다는 것이 산림(山林)의 성격과는 맞지 않는다는 인식도 있었을 것이다.

[참고문헌]: 「謙齋集」, 「謙齋日記」, 「承政院日記」, 「日省錄」, 「겸재 박성원의 예학과 「禮疑類輯」의 성격」(김윤경, 「한국문화」61,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201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