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성 한문·한자 교육 – 격몽요결(초급1반) 2학기 3차수업


화요일(초급1반) – <격몽요결> 인성 한자·한문 지도자 양성 강좌 모습

2017년 11월 14일 화요일 인성 한자·한문 지도자 양성 2학기 3차 강좌를  함현찬 선생님의 강의로  진행하였습니다

격몽요결(화요일) 인력양성강좌 2학기 3차수업

신기선(申箕善: 1851~1909)


양원 신기선(申箕善: 1851~1909)                    PDF Download

 

그는 조선 말기의 학자이자 문신으로, 그의 본관은 평산(平山)이며, 자는 언여(言汝), 호는 양원(陽園)· 노봉(蘆峰)이다. 희조(羲朝)의 아들인 그는 임헌회(任憲晦)의 수제자로, 개화파(開化派)이면서도 독립협회(獨立協會)와 대립관계에 있었으며, 단재 신채호(申采浩)에게 영향을 준 인물이다. 그는 동료이자 친구인 신성우(申星雨)가 자신의 손자인 신채호의 영특함을 알아보고, 맡겨오자, 그에게 많은 책을 읽게 하여 개화에 눈을 뜨게 하였고 그를 성균관에 입학시켜 진보적 유학경향을 접한 뒤 유교학문의 한계를 깨닫고 봉건유생의 틀에서 벗어나 민족주의적 세계관을 갖게 하는 길잡이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또 그는 1877년 대과별시(大科別試)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뒤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로 관직생활을 시작하여 1878년에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을 역임하고 1879년에 홍문관 부교리(弘文館副校理)를 역임하였으며 1881년에는 시강원 문학(侍講院文學) 등을 지냈다. 1882년에 통리기무아문 주사(統理機務衙門主事)를 거쳐, 다시 시강원 문학(侍講院文學)이 되어 기무처(機務處)에 나아가 수시로 영의정과 국정을 의논하였다. 관제개혁(官制改革) 때 통리내무아문 참의(統理內務衙門參議)가 되었다. 개화당(開化黨) 인물들과 밀접하게 교류했기 때문에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 때 개화당 내각에 이조판서 겸 홍문관제학으로 참여하였다.

이 때문에 1886년에 전라도 여도(呂島)에 유배되어 위리안치(圍籬安置: 죄인을 배소(配所)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가시로 울타리를 만들고 그 안에 가두어 두는 제도)되었다. 1894년 갑오경장으로 풀려나 호조 참판을 거쳐 김홍집(金弘集) 내각의 공무대신(工務大臣)이 되었다. 1895년 군부대신(軍部大臣)에 임명되면서 육군부장(陸軍副將)이 되었고, 중추원 부의장(中樞院副議長)을 역임하였다.

1896년에 항일의병(抗日義兵)의 항전(抗戰)이 치열하게 전개되자 남로선유사(南路宣諭使)가 되어 지방에 내려가 선유활동을 하였다. 학부대신(學部大臣)이 된 뒤에 단발령, 양복 착용, 국문과 태양력(太陽曆) 사용, 청나라에 대한 조공폐지(朝貢廢止) 등을 반대하다가 독립협회(獨立協會)로부터 공격을 받았고, 얼마 뒤 사직하였다. 1897년에 다시 중추원 부의장(中樞院副議長)을 지냈다. 1898년에 법부대신(法部大臣)이 되었을 때 나륙법(拏戮法)과 대역참형(大逆斬刑)을 복구하려다 다시 독립협회로부터 맹렬한 비난을 받고, 탄핵되어 면직되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899년에 또다시 학부대신에 임명되었다.

그 뒤 의정부 참정을 역임하고, 1900년에는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과 중추원 의장(中樞院議長)을 역임하였다. 1901년에 비서원경(秘書院卿)과 법부대신과 의정부찬정(議政府贊政)을 역임하고, 1902년에는 군부대신 등을 역임하였다. 1903년에 철도원 총재(鐵道院總裁)가 되었으며, 1904년 보안회(保安會)의 회장이 되어 항일운동을 전개하다가 일본경찰에게 붙잡히기도 하였다.

의정부 참정(議政府參政)을 거쳐 1905년에 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을 역임하고, 1906년에 홍문관 학사(弘文館學士)를 역임하였으며, 1907년에는 장례원 경(掌禮院卿)과 수학원장(修學院長) 등을 지냈다. 같은 해에 민병석(閔丙奭), 이용직(李容稙) 등과 함께 유도(儒道)로써 체(體)를 삼고 신학문으로 용(用)을 삼아 신구사상(新舊思想)의 합일을 목적으로 하는 대동학회(大東學會)를 창립하고 회장이 되었다. 저서로는 《양원집(陽園集)》과 《유학경위儒學經緯》가 있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참고문헌>
《양원집(陽園集)》
《일성록(日省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고종실록(高宗實錄)》
《양원집(陽園集)》
《대한제국관원이력서(大韓帝國官員履歷書)》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
<신기선(申箕善)의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연구>, 권오영, 청계사학, 1984.

홍낙명(洪樂命:1722~1784)


신재 홍낙명(洪樂命:1722~1784)                      PDF Download

 

조선 중기의 문신인 그의 자는 자순(子順), 호는 신재(新齋)이며, 본관은 풍산(豊山)이다. 홍중기(洪重箕)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홍석보(洪錫輔)이고, 아버지는 예조판서 홍상한(洪象漢)이며, 어머니는 어유봉(魚有鳳)의 따님이다. 그는 외할아버지로부터 수학하였다.

그는 1741년(영조17)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754년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1757년에는 정언(正言)과 사서(司書)를 역임하고, 1762년에 강동현령(江東縣令)를 역임하였다. 이듬해에 부응교(副應敎), 필선(弼善), 응교(應敎), 교리(校理)를 지냈다. 1764년에는 부제학(副提學)을, 이듬해에는 참판(參判)과 참의(參議)를 역임하고 1766년에는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 1768년에 승지(承旨)가 되고, 이듬해에 이조참의(吏曹參議)를 거쳐, 1773년에는 대사헌(大司憲)을 지냈다.

정조(正祖) 즉위년(卽位年)에 강화유수(江華留守)를 거쳐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이 되고, 1778년(정조2)에 형조판서(刑曹判書)를 거쳐, 이듬해인 1779년에는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지냈다. 정조의 즉위 초에 세도가인 홍국영(洪國榮)의 친척이라 하여 높은 벼슬에 매번 천거하였으나 그는 병환을 이유로 들어 정계(政界)에서 물러나 있었다. 그러다가 1780년에 홍국영이 실각하자, 다시 등용되어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과 의정부우참찬(議政府右參贊)이 되었고, 그 뒤에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경사(經史)에 밝았고 특히 《소학(小學)》을 애독하였으며, 만년에 퇴계(退溪)이황(李滉)과 중국의 팔대문장가(八大文章家)의 한 사람인 한퇴지(韓退之)를 사숙하여 경서(經書)와 문장(文章)에 심취하였다.

저서는 《신재문집(新齋文集)》 6권과 《소학초록(小學抄錄)》, 《경술편(敬述篇)》, 《기락편(旣樂編)》, 《유은록(儒隱錄)》, 등을 남김으로써 학문뿐만 아니라 문학에도 뛰어나 주목할 만한 글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의 문집은 간행되지 못하고 연세대학에 필사본 한 질만 보관되어 있는 실정이어 그동안 그에 대한 활발한 연구는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18세기 정국을 주도한 명문 남양 홍씨 집안사람으로 대제학을 지내고 판서까지 역임하였으니, 청요직을 다 누렸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는 누구나 쉽게 하는 양반다리를 하지 못하였다. 양반의 상징이라 할 양반다리를 할 수 없었기에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맹자》에 나온 대로, 손가락 하나라도 남과 같지 못하면 천리를 멀다 하지 않고 고치려 든 것처럼, 10일이고 20일이고 꾸준히 연습을 하고, 또 여러 가지 다른 자세를 취하여 자신에게 알맞은 양반다리를 해보고자 하였다. 그러나 시간만 허비할 뿐 되지 않았다. 결국 자신의 다리 구조 때문에 양반다리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맹자는 무명지(無名指) 하나가 펴지지 않으면 고치려 들면서, 마음이 남과 같지 못하면 걱정할 줄 모르니, 이는 작은 것만 알고 큰 것은 알지 못하는 것이라 개탄한 바 있다. 이 말을 그는 위안으로 삼았다. 비록 양반다리를 하지는 못하지만, 남보다 눈이 밝고 귀가 밝으며, 말도 잘할 뿐만 아니라 이치를 잘 분별할 줄 아는 마음을 지닌 것을 다행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잠시였을 뿐 그는 다시 마음을 고쳐먹었다. 광대들이 각고의 노력을 통하여 기예(技藝)를 익힌 다음 공연을 하게 되면 사람들은 남들이 감히 따라 할 수 없는 일이라 여긴다. 하지만, 이는 타고난 재주가 그러한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노력의 결과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광대가 먹고 살기 위하여 남들이 하지 못하는 재주를 가지게 되었지만, 자신은 신체구조를 탓하면서 누구나 하는 양반다리조차 하지 못하는 것은 노력이 부족한 때문이라 여겼다. 맹자가 이른 대로, 하지 않은 것이지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여기고 생각의 변화를 가지게 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신체 조건이 원활하지 못한 것을 통하여 학문의 경우 역시 실천궁행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이점을 깊이 연구하여 실천해 나가도록 노력하였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영조실록(英祖實錄)》
《정조실록(正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연천집(淵泉集)》
《한국계행보(韓國系行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사료해설집》, 신석호, 한국사학회, 1964

홍재구(洪在龜:1845~1898)


손지 홍재구(洪在龜:1845~1898)                      PDF Download

 

강원도 춘천 출신으로, 자는 사백(思伯), 호는 손지(遜志), 본관은 남양(南陽)이며, 1881년에 일어난 신사척사운동(辛巳斥邪運動) 때 순절한 홍재학(洪在鶴)의 친형이다.

그는 일찍이 아우 홍재학과 함께 양평에 거주하는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1868년 이항로 사후에는 그 적전(嫡傳)을 계승한 중암(重菴) 김평묵(金平默)을 사사하고서 그의 사위가 되었다. 1876년에는 김평묵을 따라 가평군 귀곡(龜谷)으로 이주하였다가 1891년에 김평묵이 세상을 뜨자, 횡성(橫城)으로 옮겨가 이곳에서 후학(後學)을 양성하며 일생을 그렇게 보냈다.

그는 또 1876년에 개항(開港)과 관련한 문제를 놓고 조정과 민간에서 논의가 격렬하게 일어나자, 상소의 주최가 되어 유인석(柳麟錫), 윤정구(尹貞求), 유기일(柳基一) 등 화서학파(華西學派) 48인과 함께 <경기강원양도유생논양왜정적잉청절화소(京畿江原兩道儒生論洋倭情迹仍請絶和疏)>를 올려 강화(講和)를 반대하는 상소를 주도적으로 전개하였고, 1880년에는 복합 상소 운동 당시에 상소문을 작성하였으며, 1881년의 신사척사운동 때에는 홍재학이 상소의 주최가 된 <관동유소(關東儒疏)>를 실제로 집필하는 등 화서학파로서 위정척사운동의 전면에서 활약한 바 있고, 1896년 고종(高宗)을 환궁(還宮)시키기 위한 계획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는 화서학파 중 중암계열(重庵系列)이며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의 위정척사 이론을 충실히 계승한 인물로, 1886년 이항로의 심설(心說)을 둘러싸고 화서학파 내에 김평묵과 성재(省齋) 유중교(柳重敎) 양인을 정점으로 격렬한 논쟁이 일어났을 때 그는 유기일(柳基一) 등과 함께 김평묵의 입장을 지지함과 동시에 유인석 등 유중교 계열의 인물들과 극단적인 대립관계를 노골화함으로써 중암(重庵), 성재(省齋) 이후 화서학파의 선두적인 위치에 서 있던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청일전쟁 이후 일제 침략이 가속화되는 시국 상황에서 유중교 계열의 화서학파 인물들이 적극적인 항일투쟁의 전면에 투신했던 경향과는 처신의 방편을 달리하여, 유기일 등과 함께 ‘자정수의(自靖守義)’의 입장을 견지하였다. 그리하여, 화서학파의 두 파 가운데 한 파인 중암학파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그의 학문과 행적은 사상사 혹은 독립운동사에서 주목되고 있다. 하지만, 대학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지은 시문의 대부분은 산일(散逸)된 것으로 추정되며, 일부 간찰(簡札)정도만이 강원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현전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그의 저서로 알려진 《정속신편(正俗新編)》이 있는데, 이는 해외로 밀반출된 사실이 밝혀져 지난 수년 전에 연구논문이 발표되기도 하였다. 이 책은 현재 프랑스 교육부 직속 파리 제3대학 주관 하에 있는 도서관(Bibliotheque interuniversitaire des Langues orientales)에서 운영하는 고문서고(古文書庫)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이 책이 국내 학계에 소개된 것은 여진천 신부가 교회사를 연구하면서 2002년 횡성교안(橫城敎案)과 관련된 연구 중 이 책의 소재를 프랑스에서 확인하여 최초로 소개하면서 부터이다.

그러나 이 책에 대한 번역이 이루어지지 않아 본격적인 연구가 지연되었고, 전체적인 내용에 대한 고찰보다는 당시 천주교와 서양의 기술에 대하여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가를 타진하는 정도에 그쳤을 뿐이다. 일부 학계에서는 이 저서를 홍재구가 직접 경험한 천주교의 빠른 유행과 서양기술 등 서세동점(西勢東漸)을 통해 철저한 척사론 입장을 대변한 책으로 소개한 바 있다.

그는 1862년에 발발하였던 진주민란(晉州民亂)이 도화선이 되어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퍼져 나간 농민항쟁(農民抗爭)을 직간접으로 영향을 받은 듯하다. 그리하여 대외적으로 점차 세력을 키워온 천주교의 교세 확장과 강제적 개항에 따른 외래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라는 이질적 문명을 서부열강의 도전으로 인식하고 강력히 외양(外攘)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그가 보고 경험한 서양기술의 비판은 주관적 견해가 강한 면도 있다. 그것은 결국 그의 주장이 서양의 기술이 조선백성들의 이용후생(利用厚生)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열강들의 효과적 침략과 천주교 등 문화적 확산에 기인할 뿐이라는 시각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러한 시각은 그 당시에 밀려오는 외세의 변화를 시대의 위기로 보았다는 점에 기인한 것이라 하겠다.

그가 저작한 《정속신편(正俗新編)》의 내용에 대하여 학계의 일부 시각을 대략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예를 들면 《소학(小學)》이나 《대학(大學)》의 학문방법과 대체로 유사한 면이 있기는 하나 그 마지막이 사람의 처세지의(處世之義)를 나타내는 처세를 제외하면 정가(正家)와 거향(居鄕)에 머무르고 있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이 책이 경세적(經世的)인 목적보다는 향리(鄕里)의 주변을 단속하는데 더욱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고 당시 중암의 유배와 함께 중암과 성재, 의암 계열의 학문적 견해로 분화되는 학파의 내적 원인도 있었기 때문이라고 조심스럽게 추정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화서학파의 주요인물로 중암과 성재의 사후에 차지하는 비중이 오히려 대단히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저서 또는 문집이 한동안 제대로 소개되지 않아 그에 대한 연구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참고문헌>
《용서고(龍西稿)》, 유기일(柳基一), 1898.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필사본)
《매천야록(梅泉野錄)》, 국사편찬위원회(國史編纂委員會), 1955.
《기려수필(騎驢隨筆)》, 국사편찬위원회(國史編纂委員會), 1955.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네이버지식백과》

황진(黃璡: 1542~1606)


서담 황 진(黃璡: 1542~1606)                              PDF Download

 

그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경미(景美), 호는 서담(西潭)이다. 황징(黃澄)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황준원(黃浚源)이고, 아버지는 황탕경(黃湯卿)이며, 어머니는 오결(吳潔)의 따님이다.

진사(進士)에 급제한 뒤에 1574년(선조7)에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주서(注書), 공조정랑(工曹正郎)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에 의주목사(義州牧使)로 재직하면서, 의주로 몽진해 온 선조(宣祖)를 잘 공양하고 모신 연유로 그 해 8월에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하였다. 그 이듬해에 의주목사로서 명나라 원병(援兵)을 접대하는 소임과 병량(兵糧)을 수운(輸運)하는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았으나 선조의 비호를 받아 무사하였다. 그 해 7월에는 공조참판(工曹參判)의 재임 중에 주청사(奏請使)의 신분으로 명나라에 가서 진병(進兵)과 철병(撤兵) 등을 요청한 바 있다.

그리고 11월에는 사은사(謝恩使)로서 다시 명나라에 가서 주청(奏請)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그는 국경에서 배회하다가 봉황성(鳳凰城)에 이르러 임의대로 사행(使行)길을 바꾸어 용천(龍川)에서 머물렀다. 그러던 중 조정의 독촉을 받고 경략지(經略地)에 도착함으로써, 명나라 원병이 늦게 파병되는 실책을 범하기도 하였다.

그로 인하여 잠시 문책을 받았으나 1594년 6월에 다시 전주부윤(全州府尹)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전주수비를 감당할 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대간의 탄핵을 받고 체직되었다. 1595년에 의주부윤(義州府尹)이 되고,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에는 또다시 명나라 원병의 접반관(接伴官)이 되었다.

그 뒤에 1599년에는 행호군(行護軍)으로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정헌(正憲)으로 승계한 뒤에 부호군(副護軍), 형조판서(刑曹判書), 공조판서(工曹判書), 우참찬(右參贊),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예조판서(禮曹判書) 등을 역임하였다. 인망(人望)은 다소 부족하였으나 임진왜란 당시에 선조가 의주(義州)로 몽진하였을 때 극진히 대접했다는 것 때문에, 중대한 실책이 여러 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관력(官歷)은 비교적 평탄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임진왜란 당시에 대명관계(對明關係)에서 전반적으로 활약이 컸다는 일반적인 평가를 받는다. 평안도 안주(安州)와 의주의 선위사(宣慰使)로 재임할 때 지은 38수의 시(詩)가 수록된 《서담공서정록(西潭公西征錄)》이 후세에 전해오고 있다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네이버지식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장석(韓章錫:1832~1894)


미산 한장석(韓章錫:1832~1894)                      PDF Download

 

생애 및 가계

그의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자는 치수(稚綏) 또는 치유(稚由)이고, 호는 미산(眉山), 경향(經香), 삼관자(三觀子)로 썼는데, 경향은 젊었을 때의 호이고 미산은 늘그막에 썼던 호이다. 그가 17세 되던 어느날 꿈을 꾸게 되었는데, 꿈속에 한 석실(石室) 안으로 들어가자, 경서(經書)와 사서(史書) 등의 서적이 좌우에 가득하고 운향(芸香)이 자욱이 풍겼으며 경향각(經香閣)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그는 이 꿈을 꾸고 난 뒤에 그의 독서하는 곳을 경향관(經香館)이라고 하고 또 호를 경향이라 썼다고 한다.

그리고 미산은 청주(淸州)에 있는 산 이름인데, 그의 선조인 한성우(韓聖佑: 1633~1710)가 태학생(太學生)으로 있을 때 자의대비(慈懿大妃)의 상복 문제로 촉발된 제2차 예송(禮訟) 논쟁에서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관직을 삭탈당하고 유배되자, 180여 명의 유생들과 함께 그를 변호하는 상소를 올리고 물러나 살던 곳이다. 한성우의 8세손인 그는 53세 되던 해에 고향인 아산(牙山)으로 옮겨가서 살며 선조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잊지 않기 위하여 거처하는 집을 ‘미산서실(眉山書室)’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호로 삼았던 것이다. 이는 훗날 더 늙으면 미산으로 다시 돌아가 여생을 마칠 생각으로 그렇게 한 것이라 한다. 삼관자라는 호를 쓰게 된 데 대한 내역은 자세하지 않으나, 그가 25세(1856, 철종7) 되던 해에 〈삼관자자서(三觀子自序)〉를 지은 것으로 보아 아마도 젊은 시절부터 이 호를 사용한 듯하다.

그는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을 지내고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에 추증된 한현모(韓顯謩)의 후손으로, 고조(高祖)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내고 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에 추증된 한후유(韓後裕)이며, 증조(曾祖)는 통덕랑(通德郞)을 지내고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된 한용정(韓用鼎)이며, 조부(祖父)는 태인현감(泰仁縣監)을 지내고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된 한원리(韓元履)이다. 부친은 공조참판(工曹參判)을 지낸 하석(霞石) 한필교(韓弼敎)이며, 모친인 풍산홍씨(豊山洪氏)는 의정부 좌의정(議政府左議政)을 지낸 연천(淵泉) 홍석주(洪奭周)의 따님이며, 부인인 한산이씨(韓山李氏)는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낸 이겸재(李謙在)의 따님이다.

그는 1832년(순조32) 12월 17일에 서울 소정동(小貞洞)에서 태어났다. 4살 때부터 모친에게 《사략(史略)》을 배울 수 있었던 것은 모친이 당대의 문장가로 명망이 높았던 홍석주의 딸이었기 때문인데, 모친 역시 어린 나이에 이미 《소학(小學)》과 사서(四書) 및 역사서 등을 공부하여 상당한 학식을 쌓았으므로 자식을 직접 교육할 수 있었던 것이다. 8세가 되던 해에는 외조부인 홍석주에게 나아가 공부하였다. 그가 17세 되던 해에 한산이씨(韓山李氏)와 혼인하였으며 이 해에 처음으로 반시(泮試)에 응시하고 자신의 서실(書室)을 경향관이라고 하였다.

그가 19세 되던 해에 증광 생원시(增廣生員試)에 합격하였으나 부친이 탄핵을 받게 된 연유로 회시(會試)에는 응시하지 못하였다. 그의 부친 한필교가 재령군수(載寧郡守)를 지낼 때의 사건에 연좌되어 이 해에 파직당하고 문의현(文義縣)으로 귀양 갔다가 해를 넘기고 돌아왔는데, 이는 황해도 암행어사 신석희(申錫禧)가 전 병사 김상우(金相宇)를 비롯한 여러 관리들의 죄상을 들추어내어 벌을 주어야 한다고 서계(書啓)한 일에서 비롯된 때문이었다.

23세 되던 해에 봉서(鳳棲) 유신환(兪莘煥)을 찾아가 그의 문하에서 《대학(大學)》을 비롯하여 여러 성리서(性理書)를 수업하였는데, 당시에 함께 동문수학한 사람으로 계운(溪雲) 김낙현(金洛鉉), 단번(丹樊) 윤치조(尹致祖), 진암(縝菴) 박홍수(朴洪壽), 경당(絅堂) 서응순(徐應淳), 장우(丈藕) 윤치담(尹致聃), 천식(泉食) 민영목(閔泳穆), 파강(巴江) 윤병정(尹秉鼎), 소산(素山) 이응진(李應辰) 등이 있다.

그는 25세 되던 해에 상시(庠試)에서 장원하였으며, 27세 되던 해의 3월에 정시(庭試)에 합격하고 9월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다. 이해 12월에 장남 한광수(韓光洙)가 태어나고, 31세 되던 해의 정월에 차남 한창수(韓昌洙)가 태어났으며, 이해 3월에 성균관 재임(齋任)에 천거되고 얼마 후에 장의(掌議)에 임명되었다. 33세 되던 해의 3월에 맏딸이 태어났는데 그는 후에 이범팔(李範八)에게 시집갔다. 8월에 증광문과(增廣文科) 초시(初試)에 합격하였다.

35세 되던 해의 9월에 광주(廣州) 부곡(富谷)의 병사(丙舍)로 이주하여 살았다. 36세 되던 4월에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으며, 11월에는 둘째 딸이 태어났는데 후에 그는 서상규(徐相珪)에게 시집갔다. 37세 되던 5월에 부친이 신천 군수(信川郡守)로 재직하던 중의 일로 암행어사의 장계(狀啓)에 의해 무함을 당하여 파직이 논의되자, 이에 인혐(引嫌)하여 동몽교관에서 체직시켜달라는 사직 상소를 올렸다.

그는 또 39세 되던 해에 선공감 봉사(繕工監奉事)에 임명되었다가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로 전직되고 다시 얼마 후에 전생서 직장(典牲署直長)으로 승진하였다. 이해 12월에 셋째 딸이 태어났는데, 그는 후에 협판 박승봉(朴勝鳳)에게 시집갔다. 40세 되던 해의 12월에 감제(甘製)에서 합격하고 전시(殿試)에 곧바로 응시하였다. 41세 되던 해의 4월에 정시(庭試)에 나아가 병과 제15인으로 합격하였다.

47세 되던 해의 4월에 부친상을 당하였고, 50세 되던 해의 7월에 모친을 모시고 양근(楊根)의 덕고정(德皐亭)으로 이사하였다. 52세 되던 해의 8월에 모친을 모시고 다시 아산(牙山) 황곡산장(篁谷山莊)으로 이사하였는데, 55세 되던 해의 5월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삼년상을 마치고 57세 되던 해에 형조판서(刑曹判書)가 되고, 이어 대제학(大提學), 협판 내무부사(協辦內務府事), 의정부 당상(議政府堂上), 우부빈객(右副賓客),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규장각 제학(奎章閣提學) 등을 역임하였다.

63세 되던 해의 1월에 좌참찬(左參贊)을 역임하고, 5월에 좌부빈객(左副賓客)이 되었으나 병으로 체직되었다. 그해 7월 15일에 대사동(大寺洞) 집에서 별세하였다. 1898년(고종35)에 효문(孝文)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았으나, 1910년(순종4)에 문간(文簡)으로 개시(改諡)하였다.

묘소는 원래 경기도 군포읍(軍浦邑) 산본리(山本里)로, 현재의 군포시 산본동에 있었는데, 1931년 경기도 시흥군(始興郡) 동면(東面) 독산리(禿山里)인, 현재의 서울시 금천구(衿川區) 독산동(禿山洞)에 예장(禮葬)하였다가 광복 이후에 경기도 의왕시(義旺市) 이동(二洞) 창말[倉村]로 이장하였다.

그는 본부인에게서 2남 4녀를 두었고 측실부인에게서 1남을 두었다. 장남 한광수는 일찍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매우 어리석어 동료들로부터 웃음거리가 되었고, 차남 한창수는 출세에 급급하여 부친이 어찌하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한장석에게 아들이 없는 것과 같다는 말까지 하였을 정도이며, 한창수는 일제로부터 남작(男爵)의 작위를 받는 등 친일 행적으로 오명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는 당대의 최고의 문신(文臣)으로 대제학(大提學)을 역임하였다. 동시대의 명성이 있었던 운양(雲養) 김윤식(金允植), 하정(荷亭) 김영수(金永壽) 등과 교유하였으며, 특히 유신환(俞莘煥) 문하에서 동문인 경당(絅堂) 서응순(徐應淳)과 가장 친교가 깊었다 한다. 미산에게 영향을 준 선배로는 환재(瓛齋) 박규수(朴珪壽), 연재(淵齋) 윤종의(尹宗儀), 경대(經臺) 김상현(金尙鉉) 등을 지목할 수 있다. 특히 김상현과의 교유를 보여주는 다수의 수창시(酬唱詩)와 편지 등이 전해오고 있다. 후배인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과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 등과도 교유가 있었던 것으로 전한다.

 

문집의 편찬 및 간행

그의 문집인 《미산집(眉山集)》은 저자의 두 아들 한광수와 한창수가 집에 보관하고 있던 초고본(草稿本)를 김인식(金寅植)에게 교정을 부탁하여 1907년에 연활자(鉛活字)로 간행한 초간본이 있고, 그 뒤에 차남 한창수가 증보 재편한 것을 손자 한상기(韓相琦)가 1934년 경성(京城)에서 연활자로 간행한 중간본이 있다. 이 중간본의 분량은 14권 7책으로 총 644판(板)이며, 반엽(半葉)은 11행 22자로 되어 있다.

그가 40세 때인 1871년에 지은 〈자서(自序)〉에

 “어린 시절 습작했던 고문(古文)과 시에 《만리초정(萬里初程)》 8권, 《화석고(花石稿)》 2권, 《요산집(樂山集)》 2권이 있다.”

라고 기술하고, 이어

“이는 모두 처음 말을 배우던 때에 지은 것이어서 가락에 맞는 것이 하나도 없으니 상자 속에 묶어 두었다가 화롯불에 태워버리고자 하였다.”

라고 한 것으로 보아 그의 사후에 정식으로 간행한 이 문집 말고도 남긴 작품이 상당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의 문집 중 《삼관갑고(三觀甲稿)》 7권은 그의 나이 17세 때부터 24세 때까지 지은 작품을 수록한 것이며, 《경향관을고(經香館乙稿)》는 24세 때부터 40세 때까지 지은 시작품 3권과 산문 6권을 수록한 것이다. 또 그밖에 저술로 《경의차록(經疑箚錄)》, 《산수유기(山水游記)》, 《필담(筆談)》 등도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문집의 내용 및 구성

미산집》의 내용과 구성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권수(卷首)에는 신응조의 〈미산집서(眉山集序)〉, 유신환의 〈삼관필경서(三觀筆耕序)〉와 저자의 〈자서(自序)〉가 수록되어 있고, 이어 전체 목차인 〈총목(總目)〉이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권1~3은 시(詩), 권4는 서(書), 권5는 서(書), 소(疏), 계(啓), 권6은 응제문(應製文), 권7은 서(序), 권8은 기(記), 권9는 제발(題跋), 명(銘), 찬(贊), 잠(箴), 상량문(上樑文), 강의(講義), 권10은 잡저(雜著), 권11은 제문(祭文), 애사(哀辭), 비(碑), 묘갈(墓碣), 권12는 묘지(墓誌), 권13은 묘표(墓表), 행장(行狀), 시장(諡狀), 가장(家狀)을 수록하였고, 권14는 부록으로 연보(年譜)가 수록되어 있다. 다시 13권의 말미에 김인식의 〈미산선생문집발(眉山先生文集跋)〉을 수록하였고, 부록인 14권 연보 끝에는 이용신의 〈연보발(年譜跋)〉이 수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그의 문집은 방대한 양과 짜임새 있는 규모로 분류하여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신응조의 서문에

“그의 문(文)은 경전에 근거하여 말이 뜻을 전달하고 이치는 순조로우며, 시(詩)도 또한 연원이 깊은데다 고체(古體)에서 더욱 뛰어났다.”

라고 품평하고 있는 내용을 통하여 그의 학문세계를 대략은 짐작할 수 있겠다. 그런데 유신환의 〈삼관필경서〉가 첫머리에 실려 있어서 본 문집 《미산집》의 서문인 것처럼 보이기는 하나 다소 거리가 있는 듯하다. 유신환은 이 서문에서 주로 저자의 외조부인 홍석주의 훌륭한 점을 위주로 거론하고 한장석에 대하여 미숙한 점을 지적하면서 홍석주를 본받으려면 더욱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는 필시 《삼관필경》이 그가 25세의 젊은 나이에 지은 글을 모아 놓은 것이었기 때문에 그 글에 국한하여 언급한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그가 직접 지은 〈삼관자자서(三觀子自序)〉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 실제 작품은 후대에 전해오지 않는다.

시(詩)는 연대순으로 편차를 나누었는데 중간본의 경우 초간본처럼 간지를 자세히 기록하지는 않았다. 권1에는 사부(辭賦)인 〈경천대사(擎天臺辭)〉, 〈백어부(白魚賦)〉 2편과 시(詩) 140제(題)가 실려 있다. 〈경천대사〉는 이경남(李景南)이 명(明)나라가 망한 뒤에도 명나라 황제 태조(太祖), 신종(神宗), 의종(毅宗)의 기일(忌日)이 돌아오면 경천대에 올라가 제사를 지내며 대명의리(大明義理)를 지켰는데, 그 후로도 자손들이 대대로 그 의리를 지켜 오는 것을 찬양한 내용을 담고 있다.

백어부〉는 책을 햇볕에 거풍(擧風)하다가 책속에 서식하고 있는 좀을 발견하고서 좀의 생태와 해악(害惡)을 열거한 다음, 사람 중에도 좀과 같이 해악을 일삼는 사람들이 많으니, 이를 경계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는 병서(幷序)에서 직접 밝힌 대로 이상은(李商隱)의 〈슬부(蝨賦)〉, 육구몽(陸龜蒙)의 〈후슬부(後蝨賦)〉, 나은(羅隱)의 〈추충부(秋蟲賦)〉, 구양수(歐陽脩)의 〈증창승부(憎蒼蠅賦)〉와 같은 풍자의 기법을 모의(模擬)한 것으로 장문(長文)의 글을 구사하였다. 실제 작품의 중간 중간을 생략하고 그 일부를 살펴보기로 한다.

 

조화의 신이 만물을 만들어 냄에
夫惟大專之槃物

온갖 사물을 잉태하여 생성하나니
孕萬品而生成

혹은 형상을 비슷하게 만들고
或以形而肖化

혹은 기를 모아서 생겨나게 하네
或以氣而聚生

영물과 추물을 모아 나란히 아우르고
彙靈醜而竝凾

크고 작은 것을 합해 무리를 만드네
合洪纖而爲黨

—–중략—–

지렁이는 마른 흙에서 뭔가를 하고
螾何爲於槁壤

물고기는 서로 강과 호수에서 잊고 살건만
魚共忘於江湖

유독 지극히 작은 이 물건만은
獨此物之至眇

아무것도 없는 데에 의탁하여 몸을 이루어
托無有而成軀

알도 아니며 태도 아닌 것이
不卵不胎

제 무리를 번식시켜가며
寔繁其徒

사물에 따라 잘도 변화하니
遇物善變

찾아내어 잡을 수가 없네
不可捉摸

—–중략——

나무뿌리가 충실하면 벌레가 들어오지 않고
夫木根實則蟲不入

현인을 등용하면 아첨꾼은 절로 멀어지는 법
賢人用則佞夫自遠

군자는 이것을 응용하여
君子以之

문지도리의 동정을 살피네
覽戶樞之動靜

좋은 목재 버려지는 것이 아까우니
惜杞梓之見棄

기미를 미리 살펴 싹을 꺾어야 하네
燭幾折萌

이렇게 처음부터 경계하는 것이
以謹于始

도의 근본이라네
道之本也

혹자는 좀이 아름다운 글월을 먹고
或謂蠧魚咀嚼英華

육예에 푹 빠져
沈浸六藝

문인의 오랜 사귐을 얻는다 하건만
得文人之夙契者

아아,
嗚呼

비루한 선비는 진부한 얘기나 하고
曲士談陳腐

소인배 유자는 글귀나 지키며
小儒守章句

전각과 조충에만 공력을 쏟느라
工篆刻與雕蟲

마른 대를 태우고 토끼를 잡아대며
汗枯竹而殺兎

고금을 매몰시키고
陸沈古今

세상일을 쓸데없는 것으로 만들어
弁髦事務

문자의 숲에서 살고 죽다가
生死於文字之林

인의의 길에서 꿈을 깨니
夢覺於仁義之路

천지간의 한 마리 좀이 분명 아니랴
顯非天地之一蠧耶

 

위에서 보듯이 미물인 좀과 같은 행위를 하는 사람이 이 인간 세상에 숫하게 많다는 사실을 고발하는 내용이다. 이는 비루한 짓을 하면서 소인배의 행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부류의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려주는 한편의 글이 아닐까 싶다. 이어서 시의 경우는 사육신(死六臣)의 절의를 찬양한 〈육신전을 읽고[獨六臣傳]〉라는 작품이 맨 첫머리에 수록되어 있다. 이 작품도 잠시 살펴보기로 한다.

 

당우시대 선양할 때 이일 저일 많았지만
唐虞禪受事多端

여섯 선비 충절 같이 단사처럼 밝았으랴
六士危忠炳若丹

동학사 푸른 단풍 숲엔 가을밤 혼백이요
鶴寺靑楓秋夜魄

집현전엔 옥홀 들던 그 옛날의 반열인데
集賢玉笏舊時班

무왕 당시 천하에는 이산 우뚝 하였거늘
武王天下夷山屹

성조의 궁중에선 큰 칼만이 차가웠으니
成祖宮中景劍寒

늠름해라 군신 부자 그 의리가 드높아서
凜凜君臣父子義

천년 두고 머리털이 모자를 찌르게 하네
令人千載髮衝冠

위의 글은 사육신의 절의에 대한 것을 백이숙제와 대비하여 자신의 소회를 적은 작품이다. 그런데 미산의 시 작품은 전반적으로는 지인들과의 교유시가 압도적으로 많다. 그 형태는 증별시(贈別詩), 차운시(次韻詩), 만시(輓詩), 수시(壽詩), 산수(山水)나 누정(樓亭)을 유람하며 읊은 시 등 다양하게 나타난다. 특히 외가에 대한 생각이 각별하였는데 외종조인 해거(海居) 홍현주(洪顯周)에 대한 축수시(祝壽詩)나 그와 증답한 작품이 많이 보인다.

권2에는 159제(題)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당시의 대왕대비인 신정왕후(神貞王后)의 만수무강을 축원하는 〈대왕대비전연상시(大王大妃殿延祥詩)〉를 비롯하여, 관직 생활의 일면을 읊은 작품들이 다수 있다. 한편으로는 개경(開京), 평양(平壤) 등지를 유람하며 지은 기행시를 비롯하여, 후금(後金)의 포로가 되어 가서 적군의 실정을 탐지하여 보내주려다가 강홍립(姜弘立)의 고발로 처형당한 김경서(金景瑞) 장군에 대한 추모시, 영선사로 일본에 가는 김윤식, 종사관으로 천진(天津)에 가는 윤태준(尹泰駿) 등에게 준 증별시 등이 있다. 특히 2권에는 부친을 그리워하며 지은 시, 또는 부친의 작품에 화운한 시가 많아 깊은 효심을 확인할 수 있다.

권3에는 106제의 시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여전히 교유시가 압도적으로 많은 가운데 함경도 관찰사를 지낸 것을 계기로 왕래하던 도중의 기행시(紀行詩)나 임무 수행 중의 소회 등을 읊은 작품이 다수를 차지한다. 그중에 〈큰길가에 선정을 기리는 거사비가 곳곳마다 숲을 이루었으니 즉석에서 읊어 개탄을 드러내 보이다[官途善政去思之碑在在成林口占示慨]〉라는 작품은 조선 후기에 백성들을 착취하고도 관례에 따라 선정비를 남발해서 세우던 폐습을 비판하는 내용으로, 권필(權韠)의 〈충주석(忠州石)〉이나 이상적(李尙迪)의 〈길 가의 거사비를 읊다[題路傍去思碑]〉에 비견될만한 풍자문학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준다. 〈옥소정에 새로 날이 개어 연구를 짓다[玉簫新晴聯句]〉라는 작품은 교유시의 한 측면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한장석 자신이 먼저 한 연을 시작하여 취농(醉農) 이교선(李敎善), 아들 한광수(韓光洙), 죽계(竹溪) 세 사람이 돌아가면서 연구(聯句)를 지은 것인데, 모두 14회 반복하고 마지막으로 한장석 자신이 마무리하여 모두 57련(聯)의 장편 연구를 이루었다. 그리고 이 당시 대제학은 표정(杓庭) 민태호(閔台鎬), 한장석, 하정(荷亭) 김영수(金永壽)로 이어졌는데, 〈문원의 옛 벼루를 태학사들이 차례로 서로 전수했는데 이름을 전심연이라 불렀으며……[文苑古硯太學士遞相傳受號曰傳心硯……]〉라는 작품에서 자신의 뒤를 이은 대제학 김영수에게 대제학의 상징인 벼루를 전해주며 사라진 풍습을 복원하는 내용을 읊기도 하였다.

권4에는 편지글인 서(書)가 별지(別紙)를 포함하여 31편이 수록되어 있다. 이 중 서응순과 주고받은 편지가 5편으로 가장 많다. 〈외종숙 원천 홍공께 올리는 편지[上從舅原泉洪公書]〉는 홍길주(洪吉周)의 아들인 홍우건(洪祐健)에게 보내는 편지인데, 장인 홍석주의 마지막 역작인 《학강산필(鶴岡散筆)》을 교정하고 편차한 일을 보고하면서 홍석주의 학덕을 기리고 추모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순명에게 보내는 편지[與李舜命書]〉는 이설(李偰)의 금강산 기행시집인 《봉래창수록(蓬萊唱酬錄)》에 발문을 쓰고 그 감격을 전하는 글인데, 말미에 가을이 되면 자신도 금강산을 유람하고 싶은데 함께 동행할 수 있겠는지 묻는 편지이다. 《봉래창수록》에 대한 발문은 9권에 〈서봉래창수록후(書蓬萊唱酬錄後)〉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김계용이 왕양명을 논한 편지에 답하다[答金季用論王陽明書]〉는 양명학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상대방에 대하여 우려하면서

“오직 총명한 사람은 독서하기도 어렵고 도리를 깨닫기도 어렵다. 왕양명은 미리 스스로 성현에 대적하는 허다한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자연히 책과 도리에 들어가기 어렵다.”

라고 주자(朱子)가 언급한 말을 빌어 왕양명의 총명함을 한편으로 인정하면서도 그 해악을 경계하였다.

권5에는 서(書)와 소(疏)와 계(啓)가 실려 있는데, 서는 10편, 계는 1편, 상소문이 21편 수록되어 있다. 서간문은 경대(經臺) 김상현(金尙鉉)에게 돌아가신 모친의 묘지(墓誌)를 써 달라고 부탁한 편지와, 묘지를 지어준 것에 대해 감사하는 편지를 나란히 수록하였다. 여기 감사하는 편지 뒤에는 지어준 묘지에 대하여 수정을 요구하는 별지가 수록되어 있다. 내용을 살펴보면, 문장의 흐름 문제를 지적한 것도 있고 자신을 공(公)으로 부른 것을 감당하기 어려우니 군(君)으로 불러 달라는 겸손한 태도를 보이는가 하면, 모친의 생전 행적에 대해 우선시하고 싶은 점 등등 매우 세밀한 부분까지 윤문해 달라는 요구 사항을 담고 있다.

그 뒤에는 김상현의 편지 원문도 부록으로 실었다. 〈이원지에게 답한 편지[答李爰止書]〉는 경전의 내용에 대한 질문에 답한 것인데, 물(物)의 개념, 〈언잠(言箴)〉의 내용에 대한 질문, 주자(朱子)가 말한 ‘전심치지(專心致志)’에서 치지(致志)의 뜻, 계신공구(戒愼恐懼)가 미발(未發)인지 이발(已發)인지 여부 등 경학(經學)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가 담겨 있다. 〈윤주현에게 답하는 편지[答尹周賢書]〉는 당대의 명사인 윤희구(尹喜求)가 조부 윤치응(尹致膺)의 묘도문(墓道文)을 부탁한 것에 대하여 공사다망해서 늦어진 점을 사과하면서, 내용을 충실하게 하는데 참조할 수 있도록 보계(譜系)와 행장(行狀)의 초고를 인편에 보내달라는 부탁의 글이다. 이때 지은 묘도문은 《미산집(眉山集)》 권11에 〈동부승지윤공치응묘갈명병서(同副承旨尹公致膺墓碣銘竝序)〉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상소문은 거의 대부분이 사직소(辭職疏)인데 대사성, 이조 참의, 홍문관 제학, 협판군국사무, 이조 참판, 대제학, 경기 감사 등을 사양하는 글이다. 유일하게 실린 계(啓) 1편은 함경도 관찰사가 되었을 때 함경도 여섯 고을의 금광(金鑛)을 혁파하고 영흥(永興)의 이미 견감(蠲減)된 포흠(逋欠)에 대해서는 다시 징수하지 말 것을 간청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권6에는 응제문(應製文) 33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옥책문(玉冊文), 시책문(諡冊文), 전문(箋文), 교서(敎書), 친제문(親祭文), 치제문(致祭文), 반교문(頒敎文) 등을 수록하였다. 이는 대부분 대제학으로서 임무를 수행하면서 지은 것들이며 문체(文體)의 성격상 변려문(騈儷文)이 많은데, 난해한 고사와 전고 투성이어서 매우 어려운 글임을 직감할 수 있다.

권7에는 서(序) 33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송서(送序)와 시문집(詩文集)에 대한 서가 대부분이고 그밖에 수서(壽序)가 3편 실려 있다. 〈명청삼십사가문초서(明淸三十四家文抄序)〉, 〈명문속선서(明文續選序)〉는 저자가 편찬한 책에 대한 서문이고, 〈보도서(譜圖序)〉는 자기 집안의 족보인 《청주한씨보도(淸州韓氏譜圖)》의 서문인데 뒤에 부록으로 시조 한란(韓蘭)으로부터 저자의 아들 대까지의 보도(譜圖)와 인물에 대한 기록을 첨부하였다. 〈남행집소서(南行集小序)〉는 1869년 익산(益山)에 귀양 가 있던 부친을 찾아뵙고 다시 서울로 돌아올 때까지 25일간 1,060리를 다녀오면서 지은 근체시와 고시 38편을 수록한 〈남행집(南行集)〉에 대한 서문이다. 〈삼관자자서(三觀子自序)〉는 젊은 시절인 25세 때 지은 것으로, 스승 유신환의 ‘문에 나아가 도를 구하라[卽文求道]’라는 가르침에 따라, 선비가 문(文)을 통해 도(道)를 구하는 것이 마치 농부가 밭을 갈고 수확을 기다려 먹는 것과 같다고 여겨 자신의 시고를 ‘필경(筆耕)’으로 명명하였다는 내용을 담은 글이다.

권8에는 기(記) 26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주로 누정기(樓亭記)와 산수 유람기(遊覽記)이다. 이 중 〈유수락산기(遊水落山記)〉는 1868년 4월에 이병익(李秉翼)과 그의 일가인 이선익(李璿翼), 이웃의 서생(徐生)과 함께 일행을 이루어 수락산 옥류동(玉流洞), 은선동(隱仙洞), 영지동(靈芝洞) 등을 유람하고 그 흥취를 기록한 글이다. 〈강남간사록(江南幹事錄)〉은 1874년 2월에 원자(元子)가 탄생한 경사를 기념하기 위하여 시행한 증광시(增廣試)에서 전라좌도(全羅左道) 경시관(京試官)에 차임되어 화순(和順)과 임실(任實)에서 시험을 주관한 다음 화순 동복(同福)의 적벽(赤壁), 광주(光州)의 무등산(無等山) 등을 유람하고 여산(礪山), 목천(木川), 성환역(成歡驛), 오산점(五山店), 과천(果川)을 거쳐 도성에 들어올 때까지의 41일 동안 1,947리를 다녀온 기록이다.

돌아오는 과정에 장성(長城)에 들러 오랫동안 흠모하던 칠순(七旬)이 넘은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을 찾아뵈었다. 이때 지은 일련의 시들이 권1에 〈호남 시사의 행차를 출발하다[發湖南試士行]〉이하 10여 수가 실려 있다. 그중 〈장성부에 묵다[宿長城府]〉라는 작품에서 주석으로,

“이 여행에서 산으로는 백양산(白羊山)을 보았고 인물로는 징사(徵士) 기정진을 뵈었는데, 모두 지난날 사모해왔던 대상들이다.”

라고 하여 그 감격을 특기(特記)하였다. 〈36동유람기[遊三十六洞記]〉는 그가 1875년 8월부터 1877년 12월까지 황해도 용강 현령(龍岡縣令)으로 근무할 때 유람한 기록을 담은 글이다. 문성강(文城江)이 서쪽으로 흘러 능성강(能成江)이 되어 평안도 삼등면과 황해도 수안군과의 경계를 지나는데 바로 이 능성강변에 강물과 기암괴석이 어우러져 36곳의 경승을 이루어 ‘삼십육동천’이라 부르는 명승지가 되었다. 이 때 지은 일련의 시들은 권2에 실려 있다. 〈미산서실기(眉山書室記)〉는 저자가 1884년 4월에 용문산(龍門山)을 유람하고, 8월에 모친을 모시고 아산(牙山)의 황곡산장(篁谷山莊)으로 옮겨 거처하면서 자신의 서실 이름을 지은 내력을 적은 글이다.

권9에는 제발(題跋) 32편, 명(銘) 6제(題) 8편, 찬(贊) 3편, 잠(箴) 1편, 상량문(上梁文) 4편, 강의(講義) 3제(題) 5편이 실려 있다. 제발은 서후(書後), 제후(題後), 문집발(文集跋), 연보발(年譜跋) 등이다. 그중 〈항해집발(沆瀣集跋)〉과 〈숙수념후(孰遂念後)〉는 항해 홍길주의 문집에 대한 발문으로, 그들의 교유 관계와 문학 세계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글이다.

연보발(年譜跋)은 선친 한필교(韓弼敎)의 연보와 선친이 생전에 편찬한 8세조, 5세조, 조고(祖考), 백부(伯父)의 연보에 대한 발문이다. 〈연천집산서목록후발(淵泉集散書目錄後跋)〉은 외조부 홍석주의 문집인 《연천집(淵泉集)》을 1876년에 편찬 간행한 다음, 홍석주의 저술 가운데 이름만 남아 있고 책은 없어진 것, 이미 간행된 것, 미처 간행되지 못했으나 전할 만한 것 21종을 ‘사고전서존목제요(四庫全書存目提要)’의 예에 따라 목록을 만들고 여기에 발문을 붙인 것이다. 명(銘) 중에서 〈청라연명(靑蘿硯銘)〉은 아주 짧은 소품이지만 병서(幷序)와 함께 3편이며, 강의는 〈동궁논어강의(東宮論語講義)〉가 3편이다. 상량문 중 〈경성전상량문(慶成殿上樑文)〉과 〈정선당상량문(正善堂上樑文)〉은 응제문으로 대작(代作)한 것을 수록하였다.

권10에는 잡저(雜著) 22편이 실려 있다. 그중 다수는 예서(禮書), 사서(史書), 문집(文集), 공양전(公羊傳), 태극도(太極圖) 등 여러 서적을 읽고 지은 독후감 성격의 글이 많다. 〈독대례의(讀大禮議)〉는 명나라 세종(世宗)이 무종(武宗)의 적통을 이어 황제가 된 뒤에 아버지 흥헌왕(興獻王)을 예종(睿宗)으로 추존한 것이 잘못되었음을 말하고 아울러 각종 대례(大禮)에 대해 논변한 글이다. 〈정론(政論)〉은 용법(用法), 선거(選擧), 친현(親賢), 위군(爲君), 전제(田制), 심관(審官)에 대한 저자의 논변이다. 〈김열부전(金烈婦傳)〉은 명천(明川)의 사인(士人) 박종윤(朴宗允)의 처 김씨가 남편의 억울한 옥사를 바로잡기 위하여 5년간 장례도 치르지 않는 등 갖은 노력 끝에 옥사의 시말을 바르게 한 전말을 기록한 내용의 글이다.

권11에는 제문(祭文) 29편, 애사(哀辭) 2편, 비(碑) 3편, 묘갈(墓碣) 8편이 수록되어 있다. 제문은 유신환에 대한 〈제봉서유선생문(祭鳳棲兪先生文)〉, 종형수 박씨에 대한 〈제종형수박씨문(祭從兄嫂朴氏文)〉, 외할아버지에 대한 〈제외왕고묘문(祭外王考墓文)〉와 〈제외구묘문(祭外舅墓文)〉 등이 수록되어 있는데, 대부분 운문(韻文)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특히 4언 고체(古體)가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애사는 서응순의 처 박유인(朴孺人)에 대한 것과 친구 이위(李偉)에 대한 내용을 수록하였다.

비는 시조 태위공(太尉公) 한란(韓蘭)의 유기비음기(遺基碑陰記), 양헌수(梁憲洙)와 구완식(具完植)의 신도비명이다. 양헌수는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로즈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가 흥선대원군의 프랑스 신부 처형을 빌미로 조선을 침략해오자, 강화도 정족산성(鼎足山城)에서 프랑스군을 격퇴한 장군이다. 구완식은 1882년 임오군란 때에는 호위장(護衛將)으로서 충주로 피신한 명성황후(明成皇后)를 봉영(奉迎)한 인물이다. 묘갈은 박종여(朴宗輿), 김이일(金履一), 윤치응(尹致膺), 민치상(閔致庠), 한몽린(韓夢麟), 이언저(李彦著), 이겸재(李謙在), 김창희(金昌熙)에 대한 내용을 수록하였다.

권12에는 묘지(墓誌) 13편이 수록되어 있다. 외조부 홍석주, 종형 한윤석(韓胤錫), 자형 이승구(李承九) 등 일가친척과 김기형(金璣衡), 김상현(金尙鉉), 김병덕(金炳德) 등의 묘지명이다. 이 중 홍석주에 대한 묘지는 저자가 지극히 존경하던 인물이었던 연유로 다른 사람의 묘지에 비해 몇 배에 달하는 장편의 글을 남겼다. 양적인 것이 존경의 표상을 대표하지는 않지만 존경하다보면 관심을 갖기 마련이고 관심을 갖다보면 그만큼 보고들은 것이 많아서 할 말이 많을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 여긴다.

권13에는 묘표(墓表) 5편, 행장(行狀) 4편, 시장(諡狀) 1편, 가장(家狀) 2편이 실려 있다. 묘표는 문헌공(文獻公) 조성하(趙成夏), 부친 한필교와 모친 풍산 홍씨, 동녕위(東寧尉) 김현근(金賢根), 이윤(李潤)에 대한 것이며, 행장은 이인설(李寅卨), 연재 윤종의, 백모(伯母) 완산 이씨(完山李氏), 석지(石芝) 이시우(李時愚)에 대한 것이며, 시장은 계운(溪雲) 김낙현(金洛鉉), 가장은 선고(先考)와 선비(先妣)의 것이다. 말미에 1898년에 지은 김인식의 발문이 실려 있다.

권14는 부록(附錄)으로, 이용신(李庸信)이 지은 연보(年譜)와 〈연보발(年譜跋)〉이 실려 있다. 연보 안에 한장석을 대상으로 아들 한광수(韓光洙)가 지은 가장과, 이설(李偰)이 지은 묘갈과 묘표, 김돈희(金敦熙)가 지은 묘지명, 이용원(李容元)이 지은 신도비명 등이 포함되어 있다.

 

마무리

미산은 위에서 본바와 같이 방대한 양의 문집을 남겼으며, 또 다양한 분야의 글을 저술하였다. 게다가 학문 연원과 당시 대제학까지 지낸 이력이나 교유했던 인물들의 면면을 고려해 볼 때 주목해 볼만한 인물임에 틀림이 없다. 그런데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인물인 운양(雲養) 김윤식(金允植)에 견주어 보면 그동안에는 학계에서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 경향이 있는 듯하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최근 들어 모기관에서 그의 문집을 완역하여 여러 연구자들에게 제공함에 따라, 상당한 관심을 가지게 된 점이라 하겠다. 이제 앞으로 좀 더 많은 연구자들의 깊은 관심과 심도 있는 연구가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다시 한 번 가져본다.

 

<참고문헌>

《일성록(日省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미산집(眉山集)》, 한장석(韓章錫).
《고담일고(孤潭逸稿)》, 이순인(李純仁).
《기원집(杞園集)》, 어유봉(魚有鳳).
《신독재전서(愼獨齋全書)》, 김집(金집).

유상준(柳相浚:1853~1895)


경당 유상준(柳相浚:1853~1895)                      PDF Download

 

그의 본관은 고흥(高興)이며, 자는 백명(伯明), 호는 경당(敬堂)이다. 아버지는 계은(溪隱) 유낙연(柳樂淵)이다. 1853년 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高敞郡) 고수면(古水面) 봉산리(蜂山里)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 유진룡(柳鎭龍)이 전라남도 영광군(靈光郡) 불갑면(佛甲面)에서 살다가 이곳으로 옮겨와서 살았다고 한다.

그는 타고난 성품이 순박하고 인정이 많으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여섯 살 때인 1858년(철종9)부터 가학(家學)으로 문리(文理)를 얻었으며 문장에도 능하였다. 그는 나이 22세 되던 1874년(고종11)에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충청남도 공주의 상로리(上蘆里)에 거주하는 전재(全齋) 임헌회(任憲晦)의 문하에 입문하였고, 그 이듬해에 스승의 허락을 받아 주자(朱子)의 영정(影幀)을 참배하였다. 이때 지은 시(詩)가 있으며, 그 해에 <망향정사실기(望鄕亭事實記)>를 짓기도 하였다.

1876년(고종13) 스승 임헌회가 세상을 뜨자, 장례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와 매년 스승의 기일(忌日)이 돌아오면 제사를 지냈으며 심상(心喪: 상복(喪服)은 입지 않으나 상제(喪制)와 같은 마음으로 근신(謹身)하는 일)으로 3년을 지켜 냈다. 또한 매일 아침 주자(朱子)의 영정(影幀)에 참배하고 난 뒤에 글을 읽거나 글을 짓는 일을 생활화하니, 향리(鄕里)의 사람들이 모두 그를 본받았다고 한다.

1882년 4월에 그는 간재(艮齋) 전우(田愚)를 방문하여 스승의 문집을 간행하는 건으로 의사를 개진하였으나, 11월에 있을 스승의 제사 때 다시 논의하기로 하고 돌아온 사실이 있다. 그가 31세 되던 1883년(고종20)에 드디어 스승 임헌회의 문집 간행을 완성하여 행의를 바르게 지키는 선비다운 면모를 보였다.

그는 살아생전에 혼정신성(昏定晨省: 아침저녁으로 부모의 안부를 살피는 일)을 철저하게 실천한 효자였으며, 사서(史書)에 심취한 영향이 있었는지 그는 평생토록 청나라 연호를 쓰지 않았다. 또한 그는 특히 《소학(小學)》과 《근사록(近思錄)》 등을 손에서 내려놓지 않고 공부했던 근실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평상시에 극기(克己)로 분노를 다스리고 명(銘)을 써 붙여 놓고 엄격하게 자신을 다스렸으며, 시문(詩文) 짓기를 즐겨하지 않았으나, 가례(家禮)의 법도를 지키고 후진(後進)의 양성(養成)에 정성을 다하였다.

타고난 기상은 약한 편이었으나 꾸준히 의연한 기상을 스스로 길러 냈으며, 향교에서 여러 차례 그의 학덕을 천거하려 했으나 단호히 거절하였다. 그는 모친의 장례를 치를 때도 가풍을 지켜, 문상하러 온 조문객들에게 술과 고기를 대접하지 않고 식상(食床)을 마주한 채 옛 가르침을 담론으로 나누는 미덕을 지켜 냈다.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과 간재(艮齋) 전우(田愚) 등과 교류가 깊었다.

그가 43세 되던 1895년(고종32)에 아버지를 두고 자신이 먼저 죽는 것은 불효라고 통곡하면서 죽으니, 그의 부친인 계은공(溪隱公)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찍 죽은 자식을 애석하게 여겨 그의 문하생으로 하여금 그의 유문(遺文)을 수집하여 정리하게 하고 간재(艮齋)에게 서문(序文)을 부탁하여 2권 1책으로 된 《경당유고(敬堂遺稿)》를 간행하였다. 묘소는 전라북도 고창군(高敞郡) 고수면(古水面) 봉산리(蜂山里)에 안치되어 있다.

<참고문헌>

《경당유고(敬堂遺稿)》, 1897.
《모양지》, 유호석, 양사재, 1963.
《고창삼향지》, 고창삼향지편찬위원회, 1991.
《고창군지》, 고창군지편찬위원회, 1992.
《고창의 성씨》, 이기화 편저, 고창문화원, 2002.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