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유선(趙有善:1731~1809)


조유선(趙有善:1731~1809)                                PDF Download

 

관은 직산(稷山), 자는 자순(子淳), 호는 나산(蘿山). 개성(開城) 출신으로, 할아버지는 첨중추부사(僉中樞府事) 조창유(趙昌愈)이며, 아버지는 조성제(趙聖躋)이다. 김원행(金元行)의 문인으로, 1771년(영조47)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성현(聖賢)의 학문에 뜻을 두어 개성(開城) 나산(蘿山)에 의숙(義塾)을 세우고 학자들과 교유하면서 유학(儒學)을 공부하였다.

1788년(정조12)에 57세 나이로 혜릉 참봉(惠陵參奉)이 된 뒤에 서부봉사(西部奉事), 청하현감(淸河縣監), 익산군수(益山郡守)를 역임하고, 1797년에 진산군수(珍山郡守) 등을 거치면서 학문을 장려하고 예의를 가르쳤으며 관리가 지켜야할 법도의 확립을 위해 힘썼다.

그는 스승인 김원행(金元行)의 학설을 이어받아, 명덕(明德)과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에 대하여 낙론(洛論)의 입장을 지지하면서 호론(湖論)을 비판하였다. 그리하여 ‘서경(西京)의 수백년 이래 1인이다.’라는 칭송을 받았으며, 많은 학도들을 가르쳤다. 그의 사후 15년이 지난 1824년(순조24)에 영돈녕 김조순(金祖淳)의 상소에 의거하여 그를 승지(承旨)에 추증하였다.

저서에는 《나산집(蘿山集)》이 있고, 스승인 김원행의 명을 받아 지은 《고정유사(考亭遺事)》, 《사우연원록(師友淵源錄)》 등이 있다. 사시(賜諡)는 문간(文簡)이다. 그가 장원서 봉사(掌苑署奉事)로 있을 때, 조정에서 윤대(輪對)를 거행한 직후에 성삼문(成三問)의 옛집을 보상해주기를 청하기를,

“본서(本署)는 바로 고 충신 성삼문(成三問)의 옛집이니, 드러나게 표창하여 주는 방도가 있는 것이 합당합니다.”

라고 하자, 상이 이르기를,

“충정공(忠正公)의 집도, 위(魏)나라 정공(鄭公)의 옛집을 보상해 돌려준 고사에 따라 선조(先朝)에서 특명으로 해사(該司)에게 사서 주도록 하셨다. 하물며 충문공(忠文公)의 집이겠는가. 지난번에 이 일로 경연관에게 물었더니, 배상하여 돌려줄 만한 곳이 없다고 하여 아직 논의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대의 말은 자기가 맡은 직책을 가지고 간언(諫言)하는 원칙에서 나온 것이니, 물러가 제거(提擧)와 상의하여 우선 그 옛 사실을 기록해서 청사에다 현판으로 내걸도록 하라.”

하였다. 이는 《정조실록》의 15년 6월 11일의 기사내용이다. 이와 같이 충신을 기리는 그의 평소 생각을 진달한 것인데, 다행스럽게도 임금은 이를 직임을 다한 건의로 간주하여 수용하였다. 위에서도 언급하였거니와, 영돈녕 김조순(金祖淳)이 조유선 형제에게 포증(褒贈)해 줄 것을 아뢴 내용이 《순조실록(純祖實錄)》의 24년 9월7일조에 구체적으로 수록되어 있어 다시 그 전문을 살펴보기로 한다.

“연전에 송경(松京) 유생(儒生)의 무리들이 고 군수(郡守) 조유선(趙有善), 고 참봉(參奉) 조유헌(趙有憲) 형제가 학문에 독실하고 조행(操行)에 힘썼다는 것으로 포증(褒贈)해 주기를 우러러 청하였기에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라는 명이 계셨으나 아직껏 회계(回啓)하지 않고 있습니다. 신이 서쪽에서 올라올 때에 본부의 인사들이 떼를 지어 와서 만나보고는 다시 전의 말을 거듭해 전해 아뢰기를 바랐었습니다. 대개 이 두 사람의 실상(實狀)은 과연 그 상소와 같았으니, 포미(褒美)하는 아름다운 은전(恩典)이 있어야 합당합니다. 특별히 즉시 회계(回啓)하기를 명하여 한 고장 인사들로 하여금 보고 흥기하도록 함이 좋을 듯하므로 감히 우러러 품달하오니, 이 모두를 대신에게 물으소서.”

이 글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그는 아우 조유헌과 함께 학문에 독실하고 조행(操行)이 남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생들이 적극적으로 그를 포증해 줄 것을 간청하고, 이를 영돈녕 김조순이 수용하여 임금에게 상소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결국 이 일로 인하여, 조유선에게는 승지(承旨)를 증직하였고, 그의 아우 조유헌에게는 참의(參議)를 증직하였으니, 그의 행적에 관한 것은 확연히 입증된 셈이다. 실제로 그가 남긴 작품을 통해 또 다른 측면에서 그의 사람됨을 엿볼 수 있다. 그 중에 요즘을 사는 우리들에게 적잖은 교훈을 주는 글이 있어 소개하기로 한다.

“세간에 바보스럽고 무식한 이들이 처자를 사랑할 줄만 알고 부모는 잊고 지낸다. 입을 옷과 먹을 음식이 생기면 반드시 처자와 나누면서 집에 계신 부모는 추위와 굶주림을 면하지 못하여도 돌보아 염려하지 않는다. 이러고도 사람이라 할 수 있겠는가. 까마귀는 미물이지만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는 성의가 있다. 지금 사람들은 부모의 은혜를 생각하지 않고 효도하고 봉양하는 도리에 힘쓰지 않는다. 심지어 부모의 뜻을 거역하고 패악한 말까지 하니, 이는 새만도 못한 것이다. 어찌 슬픈 일이 아닌가.
옛말에 이르기를,

“자식을 키워 봐야 비로소 부모의 은혜를 안다.”

하였다. 지금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일지라도 자식을 사랑할 줄 모르는 자는 없다. 그런데, 이를 돌이켜 부모의 은혜를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저 처자만 먹일 줄 알고 부모는 춥고 굶주려도 내버려둔다.
대체로 자식이 부모를 섬기는 도리는, 설령 먹고 입는 것을 넉넉하게 해 드리더라도 마음을 편하게 해 드리지 못하면 불효가 되는 법인데, 더구나 의복과 음식으로 봉양하는 것마저 정성을 다하지 않는 자의 경우이겠는가. 3천 가지 죄 가운데 불효가 가장 크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자식이 부모에게 불효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극명하게 전달해 주는 글이 아닐 수 없다. 이 몇 가지 사실로 조유선이 어떤 사람인가는 충분히 파악할 수 있을 듯하다. 이 글을 계기로 삼아 이 시대를 사는 우리가 다시 한 번 부모에 대한 효도를 어찌해야 되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특히 어린이의 인성교육 차원에서 이러한 부분이 심도 있게 논의되어 교육전반에 반영이 되어야 할 줄로 믿는다.

<참고문헌>
– 《나산집(蘿山集)》
– 《매산집(梅山集)》
– 《정조실록(正祖實錄)》
– 《순조실록(純祖實錄)》
– 《국조인물지(國朝人物志)》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박찬선(朴燦璿)(1735~1796)


박찬선(朴燦璿)(1735~1796)                              PDF Download

 

의 자는 순옥(舜玉)이고, 호는 운영정(雲影亭)이며 본관은 진원(珍原)이다. 3,4세의 어린 나이에 이미 《천자문》을 읽었으며, 유년기(幼年期)에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서책를 읽고 문리(文理)를 깨쳤다는 소문이 나자, 고을 현감인 한만경이 그 소문을 듣고 와서 보고는 문방지구(文房之具)를 넉넉히 선사하였다. 문장(文章)뿐만이 아니라 서예(書藝)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남다른 효성이 있었다.

1765년(영조41)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에 입격하였고, 동궁책례일(東宮冊禮日)에 실시한 어제연구(御製聯句)에 참여하여 장원한 부상으로 병풍을 하사받기도 하였다. 종제인 찬영과 함께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자신의 독서와 자질(子姪)의 교육에 힘썼다.

김원행의 아들 삼산재(三山齋) 김이안(金履安),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 이재(頤齋) 황윤석(黃胤錫) 등과 교유하면서 경사(經史)와 예문(禮文)에 대하여 많은 논의를 거쳐 학문을 연마하였다. 치산(治産)의 근검(勤儉)으로 흉년에 대비하여 걱정을 덜게 하였고, 고향 마을에 무너져 내린 효자의 정려(旌閭)를 극력 보수하여 수축하였고, 향약(鄕約)을 제정하여 풍속을 교화하고자 하였다. 1796년(정조20)에 62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그의 문집 《운영정유고(雲影亭遺稿)》 1권 1책은 신연활자본으로 1954년 고흥에서 출간되었다.

<참고문헌>
– 《미호집(渼湖集)》
– 《정조실록(正祖實錄)》
– 《이재유고(履齋遺稿)》 해제

박윤원(朴胤源:1734∼17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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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후기의 성리학자로, 본관은 반남(潘南)이며, 자는 영숙(永叔)이고, 호는 근재(近齋)이다. 공주판관(公州判官) 박사석(朴師錫)의 아들인 그는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과 가까운 집안사람으로,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과 함께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의 문하에서 동문수학하였는데,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책을 한 번에 수십 줄씩 읽었다 한다.

그리하여 그는 김원행과 김지행(金砥行)의 문하에서 공부를 깊이 하여 학자들로부터 크게 추앙을 받았다. 특히 정조 임금이 당대의 저명한 학자였던 그와 지속적으로 서신을 교환하며 경전(經傳)을 그 중에 《주역(周易)》의 의미에 대하여 묻고 답한 어찰이 현존하여 당시의 상황을 대변해 주고 있다.

1792년에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선공감역(繕工監役)에 임명되었으나 바로 사퇴하였고, 1798년에 원자(元子)를 위하여 강학청(講學廳)이 설치되자, 서연관(書筵官)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거절하였다. 집이 가난하여 비와 바람을 피할 수 없는 형편이었으나, 끝내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노년에 삼청동(三淸洞)의 교하정(晈霞亭)을 매입하여 그 곳에서 살았는데, 사방에 창을 내어 탁 트인 전경을 바라보며 운치 있는 삶을 영위하였다고 한다.

그는 당시 소개되던 서학(西學)의 폐해가 도교(道敎)나 불교(佛敎)보다도 크다고 하여 배척하고, 오직 경전의 훈고(訓誥)와 성리학에 몰두하였다. 김창협(金昌協)과, 이재(李縡), 김원행(金元行)의 학통을 계승한 적전(嫡傳)으로, 다시 문하(門下)의 홍직필(洪直弼)에게 전수하여 신응조(申應朝), 임헌회(任憲晦), 조병덕(趙秉德) 등으로 이어지는 조선 후기 성리학의 중요한 학파를 형성하였다.

그는 평생 성리학을 연구하던 학자로 거처에 문을 제외한 세 방향의 창에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글을 적어 두고 살았다 한다. 그의 동문인 오윤상(吳允常)과는 친분이 두터웠으므로 서로 만나면 학문에 대하여 의견을 나누는 일이 많았다 한다.

그는 심설(心說)에서 ‘심(心)은 기(氣)’라고 하였다. 《대학(大學)》 장구(章句)의 ‘허령불매조(虛靈不昧條)’의 경의에 대한 해석에서 그는 ‘허령’의 ‘기’가 ‘심’이 된다고 하여 ‘심시기(心是氣)’의 주기적(主氣的) 입장을 취하였다. 이기설(理氣說)에서는 ‘이가 기에 앞서 존재한다(理在氣先).’고 생각하여 주리적(主理的) 경향을 보이기도 하였다.

또한 예학(禮學)에 관해서도 깊은 연구와 해박한 지식이 있었다. 그의 문인으로는 홍직필을 비롯하여, 이재의(李載毅), 정도일(丁道一), 어석중(魚錫中) 등 다수가 있다. 생을 마감한 뒤에 대사헌(大司憲)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근재집(近齋集)》과 《근재예설(近齋禮說)》이 있다.

<참고자료>
– 《근재집(近齋集)》
– 《매산집(梅山集)》
– 《전고문헌(典考文獻)》
– 《조선유교연원(朝鮮儒敎淵源)》
– 《조선유학사(朝鮮儒學史)》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이안(金履安:1722~17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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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는 원례(元禮), 호는 삼산재(三山齋)이고, 시호(諡號)는 문헌(文獻)이다. 김상헌(金尙憲)의 후손으로, 김창협(昌協)의 증손자이며 김원행(金元行)김원행(김元行): 낙론(洛論)을 지지하는 대표적인 학자로, 그의 문하에서는 순수 성리학자들과 일부 실학자가 배출되었다. 그는 신분이나 지역, 직업에 차별을 두지 않고 학생을 받아들였다. 그의 학통을 이은 제자로 아들인 이안(履安)과 박윤원(朴胤源), 오윤상(吳允常), 홍대용(洪大容), 황윤석(黃胤錫) 등이 있다.의 아들이다.

조선 후기의 집권계층인 노론(老論)의 후손이자 당대의 학자였던 아버지에게서 글공부를 하여 1762년(영조38)에 학행(學行)으로 천거를 받았다. 그리하여 민이현(閔彝顯),김두묵(金斗默), 조림(曺霖) 등과 함께 경연관(經筵官)에 기용되었고, 1781년(정조5) 에는 충주목사(忠州牧使)를 지냈으며, 1784년(정조8)에는 지평(持平), 보덕(輔德), 찬선(贊善) 등을 거쳐 1786년(정조10)에는 좨주(祭酒)가 되었다.

당시 북학파(北學派) 학자 홍대용(洪大容)과 박제가(朴齊家) 등과 교유를 맺어 실학에 관심을 보이기도 하였다. 특히 홍대용과는 같은 연배로서 교우관계가 두터웠다. 그는 또 아버지 김원행의 문하에 출입하던 성리학자 박윤원(朴胤源), 이직보(李直輔), 오윤상(吳允常) 등과 교유하여 성리학자로도 명망이 있었으며, 예설(禮說)과 역학(易學)에도 조예가 깊었다.

홍재전서(弘齋全書)》 37권에는 당시 지평이었던 김이안에게 내린 돈유문(敦諭文)이 수록되어 있다. 명문가의 후손인 그를 조정으로 불러들이는 정조의 정성어린 마음이 잘 드러나 있는 글이다. 이 글을 통해서 그가 당시 사람들로부터 어떤 평가를 받고 있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그대가 유현(儒賢)으로 천거 받은 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지난날 내가 세손으로 있을 때에 그대의 부친이 나의 찬선(贊善)이 되었는데, 우리 선대왕께서 주연(胄筵)에다 두고 나의 부족함을 채우게 하고자 구원(丘園)으로 여러 차례 초치하는 교서를 내렸으나 나를 멀리하려는 마음을 돌리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영원히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으니, 이것을 생각할 때마다 그리워하는 마음이 더욱 일어난다.

아, 현자(賢者)의 태어남은 세덕(世德)에 매여 있는 것이 아니라서 공사장에서 등용한 사람도 있고 밭두렁에서 일으킨 사람도 있지만, 시례(詩禮)의 업을 이어받고 가정의 가르침에 물든 것으로 말하자면 또한 속일 수 없는 점이 있다. 호명중(胡明仲)에게는 문정(文定)이 있었고, 사마강(司馬康)에게는 단명(端明)이 있었으니, 이러한 아비 밑에 이러한 아들이 있었던 것이 지금까지도 유문(儒門)의 성대한 일로 전해 오고 있다.

지금 그대는 명문대가의 유예(遺裔)로서 지행(志行)과 경술(經術)을 보면 물어보지 않아도 고 찬선의 아들임을 알 수가 있다. 여론을 조사해 본 결과 의견이 한결같아 다른 말이 없었으니, 그대가 비록 음직(蔭職)에 머물러 있고자 하더라도 이렇게 은연중에 드러나는 데야 어찌하겠는가. 더구나 문정공(文正公),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의 시호이다. 문충공(文忠公),문충공(文忠公): 김수항(金壽恒)의 시호이다. 충헌공(忠獻公),충헌공(忠獻公): 김창집(金昌集)의 시호이다.
문간공(文簡公)문간공(文簡公): 김창협(金昌協)의 시호이다.의 도덕과 명절(名節)은 대대로 사람들에게 알려졌으며 기쁨과 슬픔을 나라와 함께하였으니, 그대가 비록 은거하며 곤궁하게 지내고자 하여도 대대로 국록(國祿)을 먹어온 의리를 어찌하겠는가.

유술(儒術)을 높이 장려하고 풍교(風敎)를 도타이 숭상하는 것은 열성조(列聖朝)에 전해 내려온 가법(家法)이다. 돌아보건대 내가 자나 깨나 잊지 못하는 한 생각은 오직 선조(先祖)의 뜻을 계승하는 데 있다. 그러나 내 정성이 부족한 탓에 한 번도 현사(賢士)를 초치하여 우리 조정을 빛내본 적이 없었는데, 작년에 유유현(兪儒賢)유유현(兪儒賢): 유언집(兪彦鏶)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 또 서거하니 현자의 거처가 마침내 비어버렸다.

내가 이 때문에 두려워하여 정부와 전조(銓曹)에 명하여 회의하여 선비를 추천하게 하였더니, 그대가 과연 가장 먼저 이 선발에 들었으므로 내가 실로 기뻐서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대는 빠른 시일 안에 길에 올라 애타게 기다리는 나의 바람에 부응하도록 하라.”

이 내용은 《일성록(日省錄)》에도 그대로 수록되어 있다. 임금이 신하를 예우하여 초치하는 한 사례로 볼 수 있는 정성어린 글이 아닐 수 없다. 이는 곧 그가 명문가의 후손으로서, 가학(家學)을 통하여 몸에 익힌 학술(學術)을 기반으로 삼아 조정에 나와서 임금의 선정(善政)을 펴는데 보탬이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서 이루어진 한편의 글인 것이다.

그리고 그의 저서에는 《의례경전기의(儀禮經傳記疑)》, 《계몽기의(啓蒙記疑)》, 《삼산재집(三山齋集)》 12권이 있다. 그의 문집인 《삼산재집》에는 시(詩) 158수와 서(書) 130여 편이 수록되어 있으며, 〈상원답교기(上元踏橋記)〉는 정월 보름날의 답교 풍습에 관한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 또한 그의 저술 중에 〈화이변 華夷辨〉은, 화이란 주거지역이 아니라 인물과 종족으로 논해야 하므로 우리나라를 이(夷)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산의생론(散宜生論)〉, 〈낙로설(落鹵設)〉, 〈미발기질설(未發氣質說)〉, 〈계몽기의(啓蒙記疑)〉, 〈중용기의(中庸記疑)〉 등 13편도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의례경전기의(儀禮經傳記疑)〉는 1767년 6월 6일부터 10월 6일까지 〈의례(儀禮)〉를 읽고 의심나는 부분에 대하여 자신의 견해를 적은 글이다. 이 문집은 국립중앙도서관, 규장각, 장서각 등 기관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 《삼산재집(三山齋集)》
– 《영조실록(英祖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조선유교연원(朝鮮儒敎淵源)》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네이버 지식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