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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 내부의 갈등

현종실록의 율곡 선생 이야기

 

조정 내부의 갈등

현종 즉위년, 즉 1659년 가을이 지나고 겨울(음력 12월 1일).

임금에 등극하고 어수선한 분위기가 다소 가라앉은 시기에 태학생(성균관 재학생) 윤항 등이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을 문묘에 종사할 것을 청하였다. 문묘(文廟)란 공자를 모시는 사당이다. 이곳에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유학자들도 함께 그 위패를 모신다. 종사(從祀)란 제사를 지낸다는 뜻이다. 신주(神主)나 위패를 모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배향(配享)이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임금은 윤항 등의 청원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러한 상소문을 연이어 다섯 차례나 올렸으나 임금은 모두 불허하였다.

서인의 입장에서 편찬된 현종개수실록을 보면 이러한 상소문에 대해서 좀 더 상세한 기록이 있다. 임금이 율곡 등의 문묘 종사를 불허한 것은 “선조(先朝, 효종임금) 때 허락하지 않았던 일을 경솔하게 처리할 수 없다.”라는 이유였다. 그리고 문묘 종사 요청 상소문은 윤항 등 외에도 파주 유생들과 황해도 유생들이 여러 차례 상소문을 올렸다고 한다.

이를 본 관리들, 즉 부제학 유계 등도 임금에게 율곡 등의 문묘 종사를 요청하였다.(현종개수실록, 현종즉위년 12월 5일) 이들이 올린 문서를 보면 율곡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소개한 문장이 보인다.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와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 두 현신(賢臣)은 그 도덕과 공적이 아직도 분명히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유학을 공부하는 선비들이 누차 임금님에게 상소하여 저희들이 전해드렸습니다. 저희들이 덧붙여 평소 저희 부형과 사우(師友, 같은 스승을 모시는 친구들. 동문들)로부터 들은 것을 가지고 아뢸까 합니다.”

이어서 유계 등은 다음과 같이 율곡 선생을 칭송하였다.

“이이(율곡)는 상지(上智, 몹시 뛰어난 지혜)의 자질과 중용의 덕에 맞는 행동의 소유자로서 지행(知行: 지식과 행동)이 병진(並進: 함께 나아감)하고 체용(體用)이 모두 갖추어졌기 때문에 언론에 나타난 것과 저술에 드러난 것이 원대하고 뛰어나 정미롭고 밝으며 두루 융해시켜 탈속한 감을 느끼게 합니다. 그 분이 조정에 임했을 때의 태도를 말하건대 항상 임금을 요(堯) 순(舜)처럼 되게 하려는 것과 이 세상을 경륜하여 구제하려는 것으로 자신의 임무를 삼았습니다. 임금을 바로잡으려는 그의 정성과 백성을 구제하려는 그의 뜻이 그가 소장을 올리고 아뢰는 사이에 간절히 드러나고 있으니, 이는 마치 맑게 갠 하늘의 태양처럼 모든 사람이 우러러보는 바입니다.”

유계 등이 올린 상소문에는 이러한 문장이 구구 절절히 이어지고 성혼에 대해서도 칭송의 말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임금에 오른 지 아직 반년도 되지 않았던 젊은 임금은 이러한 문장을 받아들고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 현종개수실록은 당시 관리들에게 했던 임금의 말을 이렇게 전한다.

“두 현인에 대한 사실은 (지난번에 이미 올린) 유생들의 소장에도 빠짐없이 실려 있었다. 그대들은 내가 모른다고 생각하는가? 선조(先朝, 효종 임금) 때에도 (율곡 등의 문묘 종사는) 어렵게 여기던 일인데, 그대들이 어떻게 몇 구절 적힌 1척(尺)의 종이쪽지로 나의 마음을 감동시키겠는가?”

짜증 섞인 반응이었다. 계속되는 문묘 종사 요구에 젊은 임금은 짜증 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현종실록에는 실리지 않은 것이나 서인들이 편찬한 현종개수실록(즉위년 9월 5일)에 현종의 성격에 대해서 효종(현종의 아버지)이 말한 내용이 이렇게 실려 있다.

“세자(현종)가 매우 현명한데 비록 부자간이라 하더라도 어찌 그 장단점을 모르겠는가? 그는 성질이 온순하고 효성스러운 데다가 또 견고한 의지가 있으니 바로 문치(文治)로 국가를 보존할 어진 임금이 될 것이다.”

성질이 온순하고 어질다는 것이다. 다만 ‘견고한 의지’가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공부나 도적적 수양에 대한 견고한 의지라고 볼 수도 있으나, 달리 말한다면 ‘자기주장’이 강하고, 자기가 뜻하는 바에 대한 고집이 적지 않은 편이였다고 해석할 수 있다. 서인들의 계속되는 문묘 종사 요청에 대해서 “그런 몇 자의 문장으로 어떻게 나를 설득시킬 수 있겠는가?”하고 한 답변을 보면 그런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효종의 말은 효종이 사망하던 해, 송시열과 독대한 자리에서 한 것이었다. 효종은 자기 아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을 이었다.

“그(현종)는 깊은 궁중에서 생장하여 병가(兵家 : 군대에 관한 일)의 일을 알지 못하니, 억지로 어려운 일을 책임지울 수 없으며 또 마마를 치르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어린아이처럼 보호하고 있다. 또 질병이 잦고 아직껏 자식이 없어 매우 마음이 쓰인다. 또 생각건대 나이가 어려 혈기가 안정되어 있지 않아서 정력을 아끼지 못해 자식 노릇을 제대로 못하고(즉 아이를 낳지 못하고-필자) 또 학문에 방해가 될까 두렵다. 그래서 내가 최근에 별도로 궁궐 한 쪽에 집 한 채를 지어 그(세자, 즉 현종)가 거기에서 독서하게 하는 한편 또 조심성 있는 한 늙은 환관을 뽑아 함께 그곳에서 기거하게 해 놓았다. 나는 이곳에 있으면서 우리 부자가 서로 지켜보고 있다. 그리고 세자가 때때로 그 안에 들어가게 하고 있다. 부자간의 일은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 어렵지만 경(독대하고 있는 송시열)은 골육과 같기 때문에 이처럼 숨기지 않은 것이다.”

효종은 송시열과 독대하던 자리에서 이렇게 세자에 대한 비밀스러운 일도 드러내놓고 말했다. 효종은 당시 북벌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북으로 군대를 몰고 나가 청나라 오랑캐를 정벌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그래서 문치에 어울리는 세자의 성격에 대해서 다소 불만을 섞어 송시열에게 말했던 것이다.

효종은 아들에 대한 기대는 포기하고 “오늘날의 일(북벌의 일)은 내 자신이 하지 못하면 장차 할 수 없게 된다. 세자(현종)의 성격으로는 국가를 안전하게 보존하기에 충분하다. 그래서 지극히 어렵고 위태로운 일(북벌의 일)을 바라지는 못하지만, (나라에) 근심은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송시열은 당시 효종 임금과의 대화 내용이라고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현종개수실록 현종 즉위년 9월 5일조, 우경섭 : 219-244)

임금이 이렇게 송시열에게 물었다.

“”내가 마음속으로 크게 고민하는 바가 있는데, 이제 경에게 물어서 결정하겠다. 오늘날의 큰 근심은 두 현인(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을 종사(從祀)하는 문제보다 더 큰 것이 없다. 내가 일찍이 피차에 대해 백방으로 미봉하여 겨우 안정시켜 바야흐로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이 논의가 갑자기 다시 일어난다면 풍파가 크게 일어나 오래도록 진정되지 않을 것이니, 일을 해치는 것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겠는가? 경은 이 일의 시비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송시열이 이렇게 답변했다.

“이는 쉽게 말로 결단할 것이 아닙니다. 두 현인을 종사하라는 요청은 온 나라가 같은 말을 해온 지 이미 수십 년이 되었습니다. 이는 공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직 몇 사람(남인 관료들 혹은 남인 선비들을 지칭함)이 그들 선배들의 논의를 답습하여 감히 다른 말을 하고 있습니다. 신의 생각에 종사는 막중한 전례(典禮)이니 만일 경솔히 의논할 수 없다고 한다면 그래도 괜찮지만 만약 두 현인을 무고하고 모욕한다면 결단코 이는 도리에 어그러진 무리입니다. 두 현인의 도덕이 어떠한지는 논하지 않더라도 이미 훌륭한 선배인데 후배가 어찌 감히 그렇게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율곡과 성혼의 문묘 종사를 반대하는 것은 이해하겠지만, 이들 두 현인에 대한 모욕적인 비난이나 근거 없는 무고는 도리에 어긋나는 행동이라고 역설한 것이다.

당시 효종 임금이 송시열과 독대를 한 것은 주목적이 북벌 준비였다. 문묘 종사 건에 대한 협의가 아니었다. 임금은 당시 조야의 존경을 한 몸에 받으며 특히 서인 관료와 유생들을 이끌고 있었던 송시열에게 북벌을 위한 준비를 같이, 함께하자는 제안을 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참고로 당시 효종은 송시열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늘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오늘날의 큰일이다. 저 오랑캐(만주족 청나라)가 틀림없이 멸망할 형세이다. 옛날의 한(汗, 만주족의 우두머리, 군주를 뜻함) 때에는 형제가 매우 번성하였으나 지금은 점차 소모되었고, 예전의 우두머리 때에는 인재가 매우 많았으나 지금은 모두 용렬한 자들뿐이며, 이전의 우두머리는 오로지 무예를 숭상하였으나 지금은 무예가 점차 폐지되어 제법 중국의 일을 본받고 있다.”

이때는 1659년(음력 3월 11일)이었다. 당시는 만주족이 1644년에 북경에 진입하여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15년이 지난 때였다. 이 15년 동안에 만주족은 중국 전역을 정복해나가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한족 문화의 영향을 받아 만주족 고유의 강인한 기상이 상실되고 있었다. 효종은 다시 말을 이었다.

“이는 바로 그대가 이전에 내게 말해 준 주자(朱子)의 이른바 ‘오랑캐가 중원을 차지한 경우 사람들이 그들을 중국 제도로 가르치면 오랑캐는 점차 쇠약하게 된다.’는 것이다. 지금 만주족의 우두머리가 비록 영웅이라고는 하지만 주색에 빠짐이 이미 심하니, 그 형세가 오래지 못할 것이다. 오랑캐 안의 일을 내가 자세히 생각해 보았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나에게 군사를 육성하지 말라고 하지만 내가 듣지 않았다. 그 이유는 천시(天時)와 인사(人事)가 어느 날 이처럼 좋은 기회가 다시 올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효종은 형인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가 생활하면서 만주족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의 약점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잘 준비해서 북벌을 감행한다면 어렵지 않게 자신이 뜻한 바를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 임금은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군사적인 구상을 송시열에게 이렇게 털어놓았다.

“날쌘 포수 10만을 양성하여 아들처럼 사랑하고 돌보아서 모두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병졸이 된 연후에, 그들에게 틈이 있기를 기다렸다가 그들이 예기하지 못할 때에 바로 관외(關外, 중국 산해관의 동쪽, 즉 만주지역)로 나아가면, 중국(한족)의 의사와 호걸 중에 어찌 호응하는 자가 없겠는가? 곧바로 관외로 나아가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은 이유는 오랑캐들이 군비를 갖추지 않아 요동 심양(瀋陽) 천리에 활을 잡고 말을 탈 줄 아는 자가 전혀 없어서 마치 무인지경에 들어가는 것과 같아서이다.”

요동 지방의 정세에 대한 효종의 이러한 판단은 상당히 정확한 것이었다. 청나라는 그 지역을 자기들 민족의 탄생지라 하여 신성한 곳으로 정하고 한족들도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 이어서 임금은 이렇게 말했다.

“또 하늘의 뜻으로 헤아려 보건대 우리나라의 세폐(歲幣, 매년 받아들이는 공물)를 오랑캐들이 모두 요동 심양 지방에 두었는데, 하늘의 뜻이 다시 우리나라를 위해서 쓰고자 하는 듯하다. 또 우리나라 사람 중 포로로 잡혀간 사람이 몇 만 명인지 모르는데, 어찌 내응하는 자가 없겠는가? 오늘의 일은 오직 하지 않는 것이 걱정이지 성공하기 어려움은 걱정거리가 안 된다.”

이렇게 자신 있게 제안했으나 송시열의 답변은 맹랑한 것이었다.

“그러다 나라가 망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임금이 말했다.

“자네가 나의 뜻을 시험해보는 것인가? 큰 뜻을 품고 큰일을 일으키면서 어찌 만전을 보장하겠는가? 대의가 이미 분명하다면 망하는 것이 뭐가 부끄럽겠는가? 더욱 천하 만세에 빛이 날 것이다. 또 하늘의 뜻이 있으니, 내 생각에 망할 염려는 없을 것 같다.”

송시열의 나이는 당시 52세였다. 효종의 나이는 40세. 송시열에 비하면 아직 젊은 나이였기 때문에 “망하는 것이 뭐가 부끄럽겠는가?”라고 패기 있게 말한 것이다. 임금은 젊은 패기만 가지고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었다. 효종은 주저하는 송시열에게, 자신의 꿈이 절대로 허황된 것이 아니라고 다음과 같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말했다.

“하늘이 나에게 부여해 준 것(천성)이 그다지 용렬하지 않고, 또 나로 하여금 일찍부터 환난을 겪어서 잘하지 못하는 바를 잘하게 하였다. 또 나로 하여금 일찍부터 활·말·진법의 일을 익히게 하였으며, 또 나를 저들 나라로 들어가게 해서 그 곳 안의 형세 및 산천(山川)·도리(道里 : 길과 마을)를 자세히 익히게 했다. 또 나로 하여금 오랫동안 그곳에 있게 하여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게 하였다. 나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하늘의 뜻이 나에게 있어 막막하지만은 않다고 여긴다.”

효종이 같이 일할 사람을 잘못 고른 것 같다. 송시열은 글을 읽는 학자지, 진법을 익힌 무인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효종의 생각이나 경험에 비추어보면 송시열은 그 생각의 폭이나 경험이 비할 바가 아니었다. 국제 정치나 군사적인 측면에서 효종이 훨씬 더 뛰어났다는 것이다. 하지만 효종의 말은 송시열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위험한 것이었다. 국가를 멸망으로 이끌 수도 있고, 오랑캐이긴 하지만 청나라 쪽에서도 이일을 알면 가만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 글만 아는 국내의 유생들 중 북벌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임금은 송시열에게 이렇게 부탁했다.

“신하들 가운데 이 일(북벌)을 함께 할 자가 없고 내 나이가 점차 많아지므로 항상 의욕이 없고 사는 즐거움을 모르고 있었다. 경(송시열)이 올라온 후부터 점차 좋은 생각을 두게 되었지만 그대 역시 고립되어 있으니 매우 염려된다. 경은 당론(黨論, 편당을 지어 논쟁을 벌이는 일)을 하지 않아서 이 때문에 피차 모두 경을 도와주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경과 뜻을 같이하고 도가 부합되어 항상 골육의 형제처럼 지낸다면 저절로 호응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내가 10년을 기한으로 하는데 10년이면 내 나이 50이 된다. 10년 안에 이루지 못하면 뜻과 기운이 점차 쇠약해져 다시는 가망이 없게 된다. 그 때에 이르면 나 역시 경이 돌아가는 것을 허락할 터이니, 그 때에 경 역시 물러가도 된다.”

송시열의 도움이 이 일에 꼭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임금은 이런 말도 하였다.

“내가 내방(왕비의 방)에 들어갔을 때에는 혈기가 손상될 뿐만 아니라 의지 역시 게을러지고, 일 처리 역시 부당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또 옛 사람의 수명의 길고 짧은 것은 보건대 이(성적인 욕망)에 관계된 경우가 많으니, 참으로 게으름을 부리지 않아야 하는 일과 같다. 때문에 내가 주색(酒色)을 매우 경계하여 몸에 가까이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내가 심기(心氣)가 항상 맑은 것을 깨닫겠고 몸 역시 완건(完健)하니, 10년만 빌려준다면(즉 하늘이 내게 10년의 시간만 허용해준다면) 성공하든 실패하든 간에 마땅히 한번 해 보겠다. 경은 마땅히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은밀히 의논해야 한다.”

송시열은 임금의 이러한 제안에 확실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임금의 마음은 이미 정해진 것 같았다. 송시열은 그런 임금 앞에서 주자의 말을 인용하여 나라의 기강을 세우는 일이나, 농민을 보호하는 일, 혹은 당시 율곡 등의 문묘 종사를 언급하거나 강빈(소현세자의 부인)의 역모사건 문제를 다시 들춰내거나 하였다. 하지만 두 사람의 이야기는 무언가 서로 화합되지 않고 다람쥐 쳇바퀴 돌듯 겉돌고 있었다.

임금은 “내가 밤낮으로 노심초사하는 것은 오직 군사를 양성하는 한 가지 일뿐이다.”, “이제부터 마땅히 모든 일을 경과 은밀히 의논하겠다.”는 등의 말도 하였다. 하지만 송시열은 반응은 불분명했다.

“신은 결코 그럴 만한 인재가 아닙니다. 그렇게 여기신다면 전하께서 신을 매우 모르시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이미 큰 뜻이 계시고 또 신을 버리고자 하지 않으시니, 신이 어찌 감히 물러나 떠날 마음을 갖겠습니까. 마땅히 목숨을 걸고 약속하겠습니다. 그러나 신은 참으로 쓰기에 알맞은 재능이 없으니, 전하께서는 단지 신을 유악(帷幄: 기밀을 의논하는 곳) 가운데 두시고 때때로 의심된 일을 물으신다면, 신이 어찌 감히 어리석은 재주나마 다하지 않겠습니까?”

두 사람간의 비밀스러운 대화를 마치면서 임금은 송시열에게 “오늘 나눈 이야기는 비록 묻는 자가 있더라도 누설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이러한 독대가 있고 나서 두 달쯤 지난 뒤, 효종은 얼굴에 난 종기를 치료하다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였다.

효종이 사망하고 뒤를 이은 현종은 부친의 염려대로 북벌에 대해서는 소극적이었다. 조정은 송시열과 송준길이 이끄는 서인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서인 관료들은 기회만 되면 현종에게 율곡 선생의 훌륭한 점을 어필하였다.

예를 들면 이 해(1659년, 현종 즉위년) 겨울에 임금과 신하들이 같이 중용을 펼쳐들고 공부하던 때였다. 이 자리에서, 여름까지 임금에게 글을 가르쳤던 송준길이 이렇게 물었다.(현종개수실록 즉위년 11월 24일 기사)

“어제 같이 읽은 내용이 매우 많고 번잡한데 (임금님께서는) 다 이해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임금이 이렇게 답했다.

“아직 많이 읽지는 못하였으나 무릇 글이란 많이 읽을수록 그 뜻이 점점 분명해지지 않는 것 같구나.”

이 말을 듣고 송준길이 이렇게 말했다.

“독서를 할 때는, 처음에는 뜻이 분명한 것 같지만 많이 읽을수록 도로 애매해지는 법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좋은 소식입니다.”

그리고 같이 여러 신하들은 임금과 중용을 읽어 내려갔다. 그러다 인심(人心) 도심(道心) 및 사단칠정설(四端七情說)과 관련된 내용이 나왔다. 이에 송준길이 다시 임금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이 (예전에) 이와 관련된 내용을 분명하게 설명하는 저술을 하였습니다. 임금께서 이 글을 보지 않으시면 안 됩니다. 대체로 글 가운데 오묘한 뜻에 대해서는 대략이나마 그 요령을 잡은 것처럼 느껴져야만 연신(筵臣 : 임금에게 경연 자리에서 강의를 하는 신하)이 강설할 때 바야흐로 의심이 풀려지면서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율곡(이이)과 우계(성혼)의 사단칠정설 등과 관련된 문장을 꼭 읽어보시라고 권한 것이다. “이 글을 보지 않으시면 안 됩니다.”라고 스승인 송준길이 아직 미성년자인 임금 제자에게 강권하였으니, 나이어린 임금으로서는 부담스러운 숙제였던 셈이다.

10일 쯤 뒤에 임금은 부친 효종의 신위를 모시는 여막에 행차를 하였다. 이 자리에서 당시 이조 판서였던 송준길과 장악정(掌樂正) 이유태 등을 면담하였다. 이유태(李惟泰, 1678-1684)는 전 해(1658년, 효종 9년)에 송시열과 송준길의 천거로 지평에 임명된 인물이다. 이 해에 시강원진선·집의를 거쳐 현종 즉위 후에는 공조참의와 동부승지를 역임하였다. 임금은 이 자리에서 이유태가 항상 부모 곁을 떠나는 것을 걱정하고 있으니 여름철에 그 동생을 경기도 근처에 근무하게 하여 그의 걱정을 덜어주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송준길에게 물었다. 송준길은 궁궐 바깥에서도 그러한 이야기들이 있으나 자신은 감히 임금께 그런 건의를 하지 못했다고 보고했다.

이유태가 임금의 그러한 뜻을 듣고, “성상(임금)께서 그렇게까지 배려해주시니 더욱 황공하옵고 또 국가 체통에 손상이 있을까 염려됩니다.”라고 말하며, 임금에게 이러한 제안을 하였다.

“나라 다스리는 방법은 백성의 수를 반드시 알아야 할 수 있습니다만, 여씨(呂氏)가 만든 향약(鄕約)은 주자(朱子)가 손질하였고 우리나라에서는 선정신 이이(李珥)가 역시 그것을 논하였습니다. 진실로 그것만 잘 밝힌다면 호패(號牌, 호패법)를 꼭 시행할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부국강병을 꾀하는 것은 비록 패도(霸道)이고 우리나라가 실현하려고 하는 것은 바로 왕도(王道)이지만, 역시 그 향약을 근간으로 하여 우리에게 알맞게 손질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병든 어머니 곁으로 돌아가 뵙고, 글을 써서 다시 말씀을 드리겠다고 하였다. 송준길은 이를 듣고 임금에게 이렇게 말했다.

“성상께서 이유태를 붙잡아두고 싶어 그렇게 특별한 조치를 취하시는데, 이유태가 어떻게 물러가겠습니까? 나랏일이 어려운 이때 당연히 함께 협력하여 어려움을 해쳐나가야 할 것입니다. 더구나 송시열이 지금 내려가려고 하고 있어 그 말을 듣고 사방에서는 혹시 성상께서 그(송시열)에 대한 예우가 그전 같지 않은가 의심하고 있습니다. 신의 생각이 지나친 것인지는 모르나 지금을 두고 나라의 존망이 달려 있는 위급한 때라고 하여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송준길은 인사 문제를 언급하면서 몇몇 관리들을 추천하였다. 추천한 관리들은 모두 서인 쪽 관리들이었다. 임금은 이유태의 의견을 물어보고 대부분 송준길의 제안을 따랐다. 이를 본 남인 측 사관은 임금의 조치에 불만을 표하고 다음과 같이 현종실록에 자신의 생각을 적었다.

“송준길이 한 마디 하자 대신들이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였다. 이 시기의 일들이 대체로 이 모양이었다.”

대신들이 서인 관료들의 위세에 눌려 있고 임금도 서인들의 장단에 놀아나고 있다는 뜻이었다.

 

현종 즉위식의 모습

현종실록의 율곡 선생 이야기

 

현종 즉위식의 모습

1659년은 조선의 제 18대 국왕 현종이 즉위한 해다.

이해 여름(6월 28일)에 그는 창덕궁에서 18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아버지 효종은 6월 23일(음력 5월 4일) 창덕궁 대조전에서 사망했다. 향년 39세였다. 이날 저녁 한양에 큰 비가 내렸다.

젊은 임금 현종이 부친의 죽음을 슬퍼하는 검정 곤룡포를 입고 평천관(平天冠)을 쓴 즉위 모습은 현종실록에 다음과 같이 생생히 묘사되어 있다.

많은 관료들이 동서로 나뉘어 차례대로 의식에 맞게 줄지어 서 있었다.

새 임금이 창덕궁 인정문(仁政門)의 어좌(御座)에 이르렀다. 그는 동쪽을 향하여 한참 동안 서 있었다. 이에 도승지가 꿇어앉아 어좌로 속히 오를 것을 청하였다. 하지만 임금은 응하지 않았고, 대신 김수항이 종종걸음으로 나아가 어좌에 오르시도록 요청하였다. 이 역시 임금은 따르지 않았다. 또 다른 관리가 총총히 걸어 나와 급히 예조 판서 윤강에게 앞으로 나아가 꿇어앉아서 임금께 다시 요청하도록 하였다. 그때까지도 임금은 따르지 않았다. 이번에는 영의정 정태화가 종종걸음으로 나와 두세 번 어좌로 오를 것을 요청 드렸다. 임금은 그제야 비로소 어좌에 올라 남쪽을 향하여 섰다. 영의정 정태화가 다시 다가가 어좌로 올라가 앉을 것을 청하니, 임금이 이렇게 말했다.

“이미 이 자리에 올랐으면 앉은 것이나 다름이 없지 않은가?”

임금은 이어서 흐느끼기 시작했고 좌우도 모두 울며 차마 쳐다보지 못하였다.

정태화가 임금께 의식대로 할 것을 요청했다. 임금이 비로소 앉아서 관리들의 하례를 받고 등극의 예를 마쳤다. 이어서 그는 기다란 곤룡포를 이끌고 인정문 동쪽의 협문으로 들어가 인정전 동쪽 뜰로 올라갔다. 그리고 궁전 밖의 동편 거느림채를 돌아 인화문(仁和門)을 들어갔다. 임금을 따라 이어지는 통곡의 소리가 궁궐 바깥까지 들렸다.

돌아가신 효종의 시신은 아직 궁궐에 있었다.

궁궐의 다른 한 쪽에서는 왕실 가족들이 모여서 통곡을 하고 있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돌아가신 효종 임금의 어머니가 상복을 몇 년간 입어야하는 지에 대한 문제로 관리들 사이에서 격론이 벌어지고 있었다. 소위 예송논쟁이 일어나고 있었다.

효종 임금의 어머니란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를 말한다. 효종의 부친 인조시대에는 장렬왕후라고 불렸던 여성이다.

현종 시대에는 이렇게 상복 입는 문제를 두고 서인과 남인 사이에 두 차례의 예송(禮訟, 예를 둘러싼 공개적인 논란)이 있었다. 이는 일견 단순한 논의였지만 국왕의 정통성과도 관련되었고, 또 집권 세력의 권력 유지와도 관련되었기 때문에 몹시 격렬하게 논의가 전개되었다. 현종이 즉위한 해, 즉 1659년의 예송은 1차 예송이라고 부르며 기해년이었기 때문에 기해예송이라고도 불린다.

당시 일반 양반(사대부)들의 집안에서는 장남의 어머니는, 장남이 사망할 경우 3년상을 지내며 상복을 3년간 입었다. 차남이 사망할 경우에는 1년상으로 끝났다. 서인 관료들은 자의대비도 1년간 상복을 입으면 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자의대비는 이미 장남 소현세자가 사망할 당시(1645년) 3년상을 치룬 적이 있었다. 소현세자의 동생에 해당하는 효종이 사망했으니 1년만 입는 것이 당연했다. 그리고 조선에서는 아들이 죽을 경우 대개 1년 상을 하였다.

그러나 남인 관료들은 임금은 일반 사대부들과 달리 특별한 존재이므로, 일반 사대부의 의례를 따를 필요가 없이 3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봉림대군으로 불리던 왕세자가 임금으로 등극하였으니 이미 적장자로서의 권위가 인정되었다고 봐서도 3년상이 당연하다고 주장했다.

두 집단의 주장은 서로 일리가 있었지만 새임금은 즉위 당시 아직 나이도 어리고 당시 집권세력이 서인들이었기 때문에 엉겁결에 서인들의 말을 따라 자의대비 상복 기간은 1년으로 하라고 결정하였다. 서인 측의 승리였다. 이때 서인들의 중심에 서서 예송 논란을 이끌었던 사람들은 송시열과 송준길이었다. 반대편, 즉 남인들의 중심은 윤휴와 허목이었다.

자의대비는 나중에 며느리인 효종의 부인, 즉 인선왕후가 사망할 때 또 상복 입는 문제로 논란의 중심이 된다. 자의대비(장렬왕후)가 이렇게 자꾸 자식들의 사망과 상복 문제에 관련되었던 것은 매우 어린 나이에 인조의 두 번째 부인(계비, 새 중전)으로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인조의 첫 번째 부인은 인열왕후 한씨(韓氏)였다.

장렬왕후가 인조의 계비로 정식 책봉될 때는 1638년(인조 16년)으로 당시 14세의 나이였다. 당시 인조 나이가 43세로 인조 보다 29살이나 어렸다. 그래서 그녀는 인조의 장남인 소현세자, 둘째인 봉림대군(효종)보다도 더 어렸다. 손자인 현종과 비교하면 16살 위였다. 이러한 이유로 자의대비는 아들인 소현세자나 효종, 그리고 며느리인 효종의 부인 인선왕후가 사망했을 때 입어야 하는 상복 때문에 문제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이다.

새 임금은 등극하고 나서 한 달 쯤 뒤부터 학질을 앓기 시작했다. 약방에서 약을 지어 올렸으나 먹지 않았다. 그 뒤 4개월 가까이, 어린 임금은 돌아가신 부친을 너무 지나치게 애도하여 몸이 상했다. 여름에 이르러서는 한 달이 넘도록 시름시름 앓았으며 기력이 쇠하여졌다. 아버지 효종이 승하하기 전부터 임금은 부친의 병간호와 나라 일에 대한 걱정으로 이미 몸이 쇠약해 있었다.

이후 현종은 1년쯤 뒤부터 안질과 종기로 고생을 하였으며 또 발에도 종기가 나서 침을 맞기도 하였다. 머리에 종기가 난 일도 있어 뜸을 떴고, 손과 발에도 가려움증이 있었고 상처가 생겼다. 머리, 발, 목 등 곳곳에 종기가 나서 뜸을 뜨고 침을 맞았다. 부스럼과 눈병도 자주 걸렸다. 감기, 습창으로 고생하기도 하고 입술에 부스럼이나 물집이 생기기도 했다. 안면에 종기가 생겼으며 가슴과 등에도 종기가 생겨서 고생하였다. 나중에는 온양 온천으로 행차하여 온천욕으로 몸을 다스리기도 하였으나 효과가 그리 길게 지속되지는 않았다.

임기 말, 20대 후반에는 턱 아래에 응어리가 생기고, 목에도 아픈 부분이 생겼다. 천식으로 매일 뜸을 떠야 했으며, 기관지나 폐도 쇠약해졌다. 29살(현종 10년) 때는 다리에 마비 증상이 있어 걷기가 불편해지기도 했다. 골반, 허벅지, 장딴지 부위 등 여기저기에 문제가 생기기도 하였으며 좌골 신경통의 증상도 생겼다. 턱 아래 좌우에는 알 수 없는 응어리가 생겨서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다. 피부가 수척해져 탕약도 잘 마시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림프절 종창과 갑상선종의 증상이 있었으며 맥도 허약해지고 구역질을 하였다. 임금은 이해 5월경부터 가을까지 식사를 거의 하지 못해서 몸이 몹시 수척해졌다. 얼굴 곳곳에 종기가 부어오르고 고름이 흐르기도 하였다. 이러한 증상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이해웅 등, 230-233쪽 참조)

『현종실록』과 『현종 개수실록』

『현종실록』의 율곡 선생 이야기

 

『현종실록』과 『현종 개수실록』

현종(顯宗, 1641년 ~ 1674)은 조선의 제18대 임금이다.

1659년 6월 28일(음력 5월 9일)부터 1674년 9월 17일(음력 8월 18일)까지 약 15년간 국왕의 자리에 있었다. 현종의 앞 임금은 그의 부친 효종이며, 뒤 임금은 아들 숙종이다.

현종 시대는 율곡 이이(李珥, 1536년 ~ 1584년) 선생이 사망한지 이미 70여년이 지난 때였다. 하지만 조정에서는 여전히 율곡 선생에 관한 논의가 벌어지거나 율곡 이 남긴 가르침을 회상하는 관료들의 발언이 그치지 않았다.

『현종실록』(http://sillok.history.go.kr/)을 ‘李珥(이이)’라는 한자 이름으로 검색해보면 모두 57건이 검색된다. 현종의 재위 기간이 15년이었기 때문에 연평균 4건 정도 언급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남인 관료 학자들이 주동이 되어 편찬한 『현종실록』이 이 정도이며, 율곡을 스승으로 모시던 서인 관료 학자들이 주로 편찬한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을 살펴보면 율곡 관련 기사가 모두 96건이나 된다. 연평균 6건이 넘는다.(『현종개수실록』이란 『현종실록』을 다시 수정, 편찬한 실록이라는 뜻이다.) 현종 시대에도 율곡의 영향력이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참고로 부친 효종 시대를 살펴보면 『효종실록』에 32건의 율곡 관련 기록이 보이며, 아들 숙종 대(『숙종실록』)의 율곡 관련 기록은 총 192건이다.

현종 시대는 대부분의 기간 동안 서인 관료들이 집권을 하였다. 하지만 현종 말년에 예송 논쟁 과정 중에 서인들이 세력을 잃고 남인이 권력을 잡게 되었다. 이 직후에 현종이 사망하여 실록 편찬의 권한이 남인 관료들 손에 들어갔다. 이 때문에 숙종 임금 초기에 편찬된 『현종실록』은 다분히 남인들의 정치적 입장이 반영되었으며 반대파인 서인들은 상대적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거나 업적이 폄하되고 또 서인들에게 불리한 기록들이 실록에 게재 되었다.

그러나 숙종 6년(1680년)에 남인이 실각을 하고 다시 서인들이 권력을 잡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를 경신환국(庚申換局)이라 한다. 권력을 다시 잡게 된 서인 관료들은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편찬된 『현종실록』을 비판하고 이를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고쳐 쓴 『현종개수실록』을 편찬하였다.

『현종실록』과 『현종개수실록』을 서로 비교 연구한 전윤주(2018)는 양자 간의 차이를 분석한 뒤 다음과 같이 정리한 바 있다.

1) 서인들은 남인이 편찬한 『현종실록』 중에서 자신들에게 불리한 내용을 삭제하고 유리한 내용은 역사적 사실로 만들고자 하였다.

2) 서인들은 『현종실록』의 기록을 자신들의 입장에서 바로잡기 위해 내용을 추가하거나 축약 또는 삭제의 방법을 사용하였다.

3) 서인 측에 우호적인 인물은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적대적인 인물들은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또 『현종실록』이 사실을 기록하지 않고 잘못된 점을 바로잡기 위해 인물의 졸기(卒記 : 사망한 사람에 대한 평가 기록, 혹은 사관이 공직자들에 대해서 사후에 쓴 기록)를 수정하기도 하였다.

4) 『현종개수실록』은 기록의 양을 늘리고 사론의 양을 줄이는 방법으로 개정되었다. 사론 중에는 단어와 문장을 변화시킨 경우가 가장 많으며, 해당 기록들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날짜와 순서를 정리한 경우도 있었다. 또 없던 사론을 추가하거나 ‘校(교정하다)를 통해 수정한 경우도 있었다.

『현종실록』과 『현종개수실록』은 이러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서인들이 스승으로 모신 율곡 선생의 기록을 살펴볼 때는 주의해야한다.

『현종실록』은 아무래도 율곡 선생을 평가 절하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에 『현종개수실록』은 매우 높여서 다소 과대평가를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두 기록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율곡 선생은 당시 선비들이나 학자 관료들 사이에 그리고 국왕이 기본적으로 존경을 해야할만한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서인 관료들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위한 『현종실록』도 율곡 선생을 근거 없이, 심하게 비판하거나 깎아 내린 경우는 거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