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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사이 우정과 신뢰

친구 사이 우정과 신뢰

수평적 인간관계와 신뢰

오륜은 우리 전근대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규범이지만 대부분 수직적 관계를 규정하는 윤리였다. 곧 부모와 자식, 임금과 신하, 남편과 아내, 어른과 아이의 관계가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그 가운데 오직 붕우유신(朋友有信)만큼은 수평적 윤리에 속한다.
붕우유신은 믿음 곧 신뢰를 강조한다. 신뢰로 해석되는 신(信)의 유학적 의미는 내면의 성실을 따라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 또는 자세이다. 여기서 내면의 성실성은 다름 아닌 충(忠)이다. 그래서 둘을 합쳐 충신(忠信)이라 불렀고, 『논어』에서 강조하였다. 내면이 성실하고 충실한 사람은 자연히 남이 신뢰하게 되어 있다. 신뢰는 성실한 내면의 결과라 하겠다.
오늘날 민주 사회에 적용되는 윤리의 성격은 수평적이다. 적어도 공적 사회생활에서 수직적 윤리를 강조하면 자칫 고리타분한 ‘꼰대’라는 소리를 듣거나 따돌림을 당한다. 겨우 가족 내에서 적용되지만, 그마저도 가족 간의 유대나 화목이 깨어질 수 있어 점차 사라지고 있다.
그래서 나이와 성별과 출신과 상관없이 평등한 사회를 지향하고 있다. 이때 신뢰가 없으면 사회가 유지될 수 없다. 그 옛날 공자도 ‘신뢰가 없으면 나라가 설 수 없다.’라는 무신불립(無信不立)을 말했지만,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변함없는 가치이기도 하다. 인간관계는 물론, 조직의 유지와 관리, 경제활동, 설득과 협상 등에서 신뢰가 깨어지면 일이 성사될 수 없기 때문이다. 기업의 가치도 신뢰가 있다면 더 올라갈 것이다. 신뢰는 비단 친구 사이만이 아니라 부자(父子), 남녀, 사제(師弟), 상급자와 하급자, 선배와 후배, 동료, 생산자와 소비자 등의 모든 관계에서 적용된다.

친구의 덕을 사귐

친구를 왜 사귀는가? 글쎄 이런 질문을 하면 다들 의아해하겠다. 특별한 목적의식 없이 사귀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리라. 대개 같은 학교·종교·지역·직장 등에서 자연스럽게 사귄다. 그래도 뭔가 끌려서 사귀었을 것이다. 자기에게 잘해주어서 잘생겨서 또는 생각이나 취향과 가치가 같아서 사귀었을 것이다. 유유상종이라 했으니 자연스러운 일이다.
『맹자』를 보면 “친구를 사귀는 일은 그 덕을 사귀는 것이다.”라는 말이 보이는데, 조선조 사대부들도 이랬을까? 죽마고우처럼 자연스럽게 사귀는 일도 있겠지만, 성인이 된 후의 사귐에는 이 말은 분명 일리가 있다. 친구 잘못 사귀어 낭패를 보거나 불행하게 된 사람들을 보라! 『소학』에서는 증자(曾子)의 말을 빌려 “친구를 통해 인(仁)을 돕는다.”라고 했고, 맹자의 말을 인용하여 “선의 길로 권면하는 일이 친구를 사귀는 길이다.”라고 하였고, 공자의 말을 빌려 “충고하여 선의 길로 인도하되 듣지 않으면 그만두어 욕되지 않게 하라.”라고 말해주고 있다.
조선의 선비들은 친구를 사귈 때 이런 가르침에 충실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친구에 대한 이런 관념은 이후 사람들의 행위를 통해 구체적으로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그 사례를 통해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자.

충고하여 선으로 인도하라

성인이 되어 친구를 사귈 때는 상당히 조심스럽다.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당장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달콤한 말이나 아첨하는 말에 속아 사기를 당하거나 낭패를 본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조상들도 그랬을 것이다. 일단 믿음직한 사람은 자기에게 아첨하는 사람보다 충고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 충고를 통해 우정이 더 깊어질 수 있다. 다음은 권별(權鼈 : ?~?)의 『해동잡록(海東雜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정여창(鄭汝昌)이 안음(安陰) 현령으로 있을 때 김굉필(金宏弼)이 찾아갔더니, 그가 금으로 된 술잔 하나를 만들어 두었다. 그것을 보고 김굉필이 책망하기를, ‘자네가 이런 소용없는 일을 할 줄 생각하지 못했네. 뒷날 반드시 이것이 사람을 그르칠 것이네.’라고 하였다. 과연 그 뒤에 사람들은 고을 원님이 이 일로써 장물죄를 지었다고 하였다. 김굉필은 정여창과 뜻과 도가 같아서 특별히 서로 사이가 좋았다. 서로 만날 적마다 도의를 연마하고 고금 일을 토론하여 때로는 밤을 새우기까지 하였다.”
친구에게 허물이 있을 때 충고하는 것이 진정한 도리였다. 또 친구의 허물을 넌지시 충고한 사례도 있다. 성현(成俔, 1439~1504)이 지은 『용재총화(慵齋叢話)』에 보인다.
“이극배(李克培)와 백씨(伯氏: 저자 성현의 큰형인 成任)는 아주 절친한 사이였다. 이극배는 도승지이고 백씨가 우승지였는데, 이극배가 어느 기생을 사랑하여 자취를 감추자 백씨가 간 곳을 알아내고 시를 지었다.

관아가 파하여 돌아올 때 날이 저물려는데(衙罷歸來日欲低),
명화(기생의 이름)와 국사(이극배의 自號) 둘이 서로 만났구나(名花國士兩相擕).
뉘 집의 골목 안에 수레를 숨겼는가(誰家巷裏藏車駕)?
사온서(司醞署: 술을 담당한 관서)의 동쪽이요, 예부(禮部)의 서쪽일세(司醞東邊禮部西).

이런 시를 몰래 벽에 붙여두었는데, 이극배가 이를 보고 떼어내 소매 속에 넣어버렸다. 이로부터 더욱 뜻이 서로 맞았다. 이극배의 관직이 바뀔 때 세조가 ‘공을 대신할 자가 누구냐?’고 물으니, 그가 아뢰기를, ‘성(成) 아무개보다 나은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하여, 백씨가 도승지에 등급을 뛰어넘어 제수되었다.”
이 사례는 친구 사이의 장난으로 보이나, 그것을 통해 기생집에 출입하지 말라는 은근한 충고였다. 그로 인해 두 사람 사이가 더욱 가까워졌다는 내용이다.

아름다운 우정과 신뢰

친구를 사귈 때 친구의 도움을 받자는 식으로 사귀면 곤란하다. 사기꾼의 전형적인 수법에 말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올바르게 친구의 덕을 보는 경우는 우정과 신뢰의 결과일 뿐이다. 흔히 옛날 어른들이 하신 말씀 가운데 ‘너보다 나은 사람을 사귀라.’라는 당부도 덕이나 인품을 두고 말했다면 옳다. 다시 강조하지만, 친구의 은덕을 입는 일은 그 결과일 뿐이다. 그런 사례가 앞의 『용재총화』에 보인다.
“둔촌(遁村) 이집(李集)은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이 나서, 그가 사귀는 사람은 모두 당시에 영웅호걸이었다. 세상일을 비판하다가 그 말이 신돈(辛旽)에게 미쳤다. 신돈이 몰래 해치려고 하자, 그는 아버지를 모시고 도망갔다. 동갑인 친구 천곡(泉谷) 최원도(崔元道)가 영천(永川)에 산다는 말을 듣고 그를 찾아갔다. 최원도가 매우 후하게 접대하고 3년 동안 밖에 못 나가게 하였다. 마침 둔촌의 아비가 세상을 떠났는데, 최원도는 장례의 모든 일을 자기 아비와 똑같이 하여 그 어머니 무덤 옆에 장례를 지내게 하였다.”
이에 대한 보충 설명이 필요하다. 사실 이집의 본명은 따로 있다. 그가 이름을 ‘집(集)’ 자로 바꾼 것은 『맹자』에서 호연지기를 기르는 방법으로써 말한 ‘의를 모은다’라는 집의(集義)에서 따온 글자이고, 자도 호연(浩然)으로 바꾸었다. 맹자의 가르침을 따르겠다는 강한 의도가 숨어 있다. 당연히 친구를 사귀는 목적을 앞의 맹자가 말한 “친구를 사귀는 일은 그 덕을 사귀는 것이다.”라는 점에 두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겠다. 이는 상대방 최원도의 덕이 이미 훌륭했음을 말해준다. 그 덕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에 화를 피해 그의 집으로 피난을 갔고, 또 그런 믿음에 어긋나지 않게 최원도는 3년 동안 숨겨주고 묘지까지 양보한 우정을 발휘하였다. 친구를 사귐에 상대 친구의 인품과 덕이 더욱 돋보이는 사례라 하겠다.
이런 우정과 신뢰는 고명한 사대부들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보통 사람들에게도 있었다. 이기(李墍, 1522~1600)의 『송와잡설(松窩雜說)』에 나오는 사례이다.
“성과 이름을 알 수 없는 강릉의 군사 세 사람이 선조 때에 북방의 국경을 지키고 있었다. 마침 전염병이 크게 번져 세 사람이 차례로 병들었다. 최후에 한 사람이 급기야 죽었다. 남은 두 사람은 서로 말하기를, ‘우리는 같은 고향 사람으로서 천 리 길을 같이 왔다가, 한 막사에서 같이 누워 같은 병으로 서로 간호하면서 의지하였는데, 살아서 같이 왔다가 죽어서 버리고 돌아가는 일은 인정과 도리상 참기 어렵다.’라고 하고, 막사 뒤에다 장사지냈다. 그 후 병역을 마치고 돌아갈 때 두 사람은 그 시체를 번갈아 짊어지고 먼 길을 고생스럽게 걸었다. 죽을 고비를 겪으며 한 달이 넘어서야 돌아왔다. 그의 아비가 그 은덕에 감사하여 술과 과일을 약간 갖추고 두 사람을 초청하여 사례하고자 하니, 두 사람은 끝내 마다하면서, ‘우리는 대접을 받고자 한 일이 아닙니다. 만약 한 끼 밥이라도 신세를 진다면, 당초에 서로 돌보던 뜻이 헛되게 됩니다.’라고 하였다.”
평소의 우정과 신뢰가 이런 결과를 가져왔다. 병사들의 우정을 전우애라고 부른다. 언젠가 미국이 명분 없는 전쟁을 할 때 병사들도 그것을 알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들이 싸우는 이유가 국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전우를 위해서라고 한다. 싸우지 않으면 전우가 죽거나 다치기 때문이다.

죽마고우와 우정에 거는 기대

죽마를 탄 벗 곧 어릴 때 같이 놀던 친구를 죽마고우(竹馬故友)라고 한다. 그런 친구가 나이 들면서 소원해지기도 한다. 각자의 삶과 처지와 지적 수준, 그리고 뜻과 가치관이 달라서 자연히 멀어지기 때문이다. 완전히 절교하지는 않았지만 대개 그런 친구가 더러 있다. 옛이야기를 보면 죽마고우 가운데 왕이 되고 신하가 된 사례도 있다. 앞의 『해동잡록』의 기록이다.
“박석명(朴錫命)은 어릴 때 태종과 한 이불에서 잤다. 석명이 꿈에 자기 옆에 누런 용이 있어 보이므로, 깨어 보니 곧 태종이었다. 그 일을 기이하게 여겨서 서로 사귐이 더욱 두터웠다. 훗날 태종이 즉위하고 석명은 승지가 되었는데, 태종이 이르기를, ‘누가 그대를 대신하여 승지의 임무를 맡기면 좋겠는가?’라고 하니, 석명이 답하기를, ‘조정의 신하 가운데 적당한 자가 없으나, 오직 승추도사(丞樞都事)로 있는 황희(黃喜)가 진실로 마땅한 사람입니다.’라고 하므로, 드디어 그를 승지로 삼았다. 황희는 훗날 이름난 재상이 되니, 세상 사람들은 박석명이 사람을 알아볼 줄 안다고 하였다.”
어릴 때 한 이불에서 잤다는 사실은 매우 친한 죽마고우임을 알 수 있다. 태종은 단지 죽마고우라는 이유로 박석명을 특별 대우한 것은 아닌 모양이다. 그만한 능력이 있어서 썼다는 사실은 황희를 알아보는 박석명의 식견에서 증명된다. 죽마고우가 끝까지 함께 하기는 쉽지 않다.
또 우정이 매우 깊어 거의 동시에 죽은 인물도 있다. 이이(李珥, 1536~1584)의 『석담일기(石潭日記)』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이후백은 노진(盧禛)의 절친한 친구였는데 그가 죽으니 너무 슬퍼하였다. 이때 후백은 휴가를 받아 고향에 성묘하러 갔었다. 마침 노진과 동향이었으므로 그의 무덤 앞에 전(奠: 제물을 올리고 제사 지냄)을 하고 집에 돌아와 하룻밤을 앓다가 죽으니, 사림이 매우 애석하게 생각하였다. 노진과 이후백이 서로 이어 죽으니, 당시 여론이 정2품에 사람이 없다 하였다.”
이후백의 죽음이 우연의 일치인지 알 수 없으나, 당시 사람들은 그들의 남다른 우정을 알고 있었기에 그들의 죽음을 그것과 연관시켰으리라. 아니면 친구의 죽음이 너무 슬퍼 병을 얻어서 죽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좌우간 당시의 문화에서 볼 때 정상적인 친구 사이의 우정에 대해서 사람들은 그 신뢰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 사례로 앞의 『송와잡설』에서는 이렇게 전한다.
“신숙주는 세종 때에 집현전 학사였고, 그로 인해 성삼문과는 더욱 친하였다. 세조 때 성삼문 등의 거사 계획이 발각되었던 날 저녁에 신숙주가 자기 집에 돌아오니, 중문(中門)이 활짝 열렸고 부인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방으로 행랑으로 두루 찾다가, 부인이 홀로 다락에 올라 손에 두어 자 되는 베를 쥐고 들보 밑에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가 그 까닭을 물으니 부인이 답하기를, ‘당신이 평소에 성삼문 등과 형제보다 더 친하였기에 지금 성삼문 등의 옥사가 발각되었음을 듣고서, 당신도 틀림없이 함께 죽을 걸로 생각했소. 당신이 죽었다는 소문이 들려오면 자결하려던 참이었는데, 당신만 홀로 살아서 돌아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하였소.’라고 하였다. 신숙주는 말문이 막혀 몸 둘 바를 몰랐다. 상고하건대, 이 일은 선비들 사이에 미담으로 전해오던 것이지만, 잘못 전해 듣고서 쓴 것이다. 부인은 그해 정월에 죽었고 육신(六臣)의 옥사는 그해 4월에 일어났으니, 이러저러한 말이 어찌 있을 수 있겠는가?”
이는 기록자의 지적대로 누가 잘못 전한 것일 수도 있지만, 이야기의 의도는 정말로 우정이 돈독한 친구 사이라면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등져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부인의 행동과 말을 통해 알려 주고 있다. 기독교 성서에서도 예수도 따르는 자들에게 스스로 친구라고 하였으니, 친구 사이의 신뢰라는 것이 어떤 것이겠는가?

사귈 친구의 덕이 있는지 어떻게 알까?

앞에서도 말했지만, 신뢰 또는 믿음은 비단 친구 사이만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지켜야 하는 보편적 가치이다. 심지어 나와 대립적 입장에 선 사람이더라도 인간적 신뢰가 쌓이면 선을 넘는 비열한 짓은 안 한다. 『삼국지』 같은 옛이야기를 조금만 읽어봐도 그렇다.
현대인들 가운데는 조그만 이익을 앞두고 남을 속이는 것은 물론이고, 오랫동안 사귀었던 친구를 배신하는 일도 다반사다. 그러고 보면 친구라고 해서 다 참된 친구는 아닌 모양이다. 이럴 때 우리 조상들이 지켰던 원칙으로서 그 덕을 살펴보고 친구를 사귀어야 좋을 것 같다. 하지만 사귈 대상인 친구가 덕이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아느냐고 되물을 수 있겠다. 바로 자기에게 덕이 있어야 상대에게 덕이 있는지 없는지 금방 간파할 수 있다. 그 덕이 인간의 성품을 간파할 수 있는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어린 사람이라면 그 질문에 타당성이 있겠으나, 나이 든 사람이 그렇게 묻는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인생 공부를 더 하라고 권하고 싶다.

부부와 남녀의 도리

 

부부와 남녀의 도리

열녀는 두 지아비를 고쳐 맞지 않는다

앞의 글에서 충절을 소개할 때 주로 남성의 그것에 대해 말하였다. 전통사회에서는 남자들이 사회활동을 담당하였으므로 국가나 주군에 대한 충성이 요구되었고, 그것이 여성에게는 자연히 남편에 대해 지조 또는 정절(貞節)을 지켜야 하는 쪽으로 전개되었다. 물론 『소학』에도 소개하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말이 “열녀는 두 지아비를 고쳐 맞지 않는다.”라는 것으로, 그 사례와 함께 실려 있다.
해서 남편과 아내 사이의 윤리에는 오륜 가운데 부부유별(夫婦有別)이 있고, 삼강(三剛) 가운데 부위부강(夫爲婦綱)이 있다. 전자는 남녀의 분별을 강조한 윤리이고, 후자는 일에 있어서 남편이 아내의 기준이 된다는 말이다. 후자와 유사한 말에는 부창부수(夫唱婦隨)가 있는데, 남편의 주장에 아내가 따르는 것이 부부의 화합을 위해 좋다는 말이다. 후자는 남편이 몸을 닦아 항상 올바르게 처신해야 한다는 전제가 들어 있다.
조선 전기의 학자 어숙권(魚叔權, ?~?)의 『패관잡기(稗官雜記)』에 보면, 정문(旌門)을 세워 효자와 열녀를 표창하여 권장하는 일은 옛날부터 있어 온 제도라 소개하고, 정절이라는 것은 남편이 죽은 뒤에 죽을 때까지 절개를 지킨 여인에 대해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당시 조선의 부인들은 “모두 수절을 했으므로, 반드시 특이한 행실이 있고 난 뒤에야 정문을 세웠으니, 절부(節婦)·열부(烈婦)·정절(貞節)·정렬(貞烈)의 구분이 없다.”라고 말하고 있다. 쉽게 말해 『대동야승』에 소개되는 사례는 대개 특별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사대부 여인이라면 거의 예외 없이 정절을 지켰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근대화 이후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장유유서와 함께 이 부부유별과 부위부강을 아주 고약한 윤리로 여겨 유교의 악습으로 평가한다. 현대적 관점에서 볼 때 그렇게 평가하는 일은 무리가 아니나, 과거의 어떤 문화도 현대의 잣대로 보면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한때 우리가 선진국으로 부러워했던 서양문명도, 아니 현대의 우리도 부정적 모습이 분명히 있다. 여기서 정절과 남녀 문제를 다시 들여다보고자 하는 의도는 어떤 관념 또는 사상이 삶을 지배하는 현장에서 그것이 어떻게 변주되고 있는지 살핌으로써, 조상들의 삶을 읽어 보자는 점이다. 그럼으로써 거기서 표출되는 에너지와 역동성이 현대의 우리에게 무얼 던져주는지 찾는다면 큰 행운일 것이다.

신의로서 지킨 절개와 첩의 절개

죽은 남편에 대한 약속을 저버릴 수 없어 끝내 절개를 지킨 사례 가운데 하나가 권별(權鼈 : ?~?)의 『해동잡록(海東雜錄)』에 등장한다.
“조지서(趙之瑞)는 연산군이 일으킨 사화 때 그도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을 알았다. 아내 정씨(鄭氏)와 술을 마시고 결별하면서, ‘내가 지금 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 같으니,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신주(神主)를 어찌하면 좋겠소?’라고 하니, 정씨는 울면서 말하기를, ‘죽더라도 보존하겠소.’라고 하였다. 드디어 조지서는 죽임을 당했고 그 집은 몰수되었다. 정씨는 정몽주의 증손녀이다. 그 아버지가 말하기를, ‘시댁이 이미 망했으니 우리 집으로 돌아와 일생을 마치지 않겠느냐?’라고 하니, 정씨는 이를 거절하며 말하기를, ‘죽은 남편이 저에게 조상의 신주를 부탁하기에 저는 그것을 승낙하였으니, 어찌 도중에 그것을 저버리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중종반정 후에 드디어 옛집을 회복하고 떳떳이 제사를 받드니, 온 고을 사람들이 칭송했다. 당시 진주목사 이우(李堣)가 그 내막을 잘 알았으므로 임금에게 아뢰어 그 집에 정문을 세웠다.”
후세 사람들은 정몽주의 증손으로서 피는 못 속인다고 칭찬하였는데, 정씨 부인의 정절은 남편과의 약속을 굳게 지킨 일과 관련된다. 공교롭게도 이 사례는 『소학』의 한나라 진(陳) 땅의 효부(孝婦) 이야기와 거의 같다. 또 같은 책에 이런 이야기도 있다.
“안규(安圭)는 황해도 연백 사람인데, 집에 불이 났을 때 그의 어머니 원씨는 남편의 신주를 안고 엎드렸다. 그때 안규도 타오르는 불 속에 뛰어들어 어머니를 업고 신주를 안고 나올 때 머리카락이 모두 타버렸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열녀의 정문을 세워주었다.”
그런데 이런 열녀 이야기는 정식 부인이나 조선 여인만의 그것도 아닌 모양이다. 성현(成俔, 1439~1504)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 나오는 고려 말의 이야기이다.
“조반(趙胖)은 누이동생을 따라 원나라에 가서 살았다. 그런데 그 집 여종이 예쁘고 글도 알아서 첩으로 삼았다. 그러다가 명나라 군대가 쳐들어와 원나라 황제가 북쪽으로 피난 가니, 조반은 누이를 따라갈 수 없어 고려로 오고자 하였다. 그는 주위의 말을 듣고 피난이 힘들까 봐 그 여자를 버렸다. 여자가 울면서 3일 밤낮으로 뒤따라오니 발이 부르터졌다. 그때 강 위에 높은 누각이 있었는데, 여자가 갑자기 거기에 올라가 물속으로 투신하여 죽었다. 조반이 그 절개에 탄복하여 언제나 비통하게 여겼다.”
아무리 첩이지만 한때 사랑했던 여인을 버린 것도 그렇고, 그 여인이 강물에 투신한 까닭이 적에게 욕을 당하지 않고 절개를 지키기 위한 것인지 억울해서 그랬는지 알 수는 없으나, 그 해석이 절개라고 여겨 애통하게 지낸 일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이 일을 기록한 사람도 절개라고 믿고 있는 점은 그런 문화 속에 살고 있으니, 달리 생각할 여지가 없었던 것 같다.
아무튼 이처럼 목숨을 버리고 절개를 지킨 가장 많은 경우가 전란 때 적으로부터 욕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임진왜란 때 수많은 열녀가 등장한 것도 그런 까닭이다.

과부의 수절

남편에 대한 절개의 윤리는 자연히 과부가 수절해야 한다는 풍습으로 이어진다. 앞의 『패관잡기』에서 당시 “조선의 부인들은 모두 수절했다.”라는 말의 행간에서 읽어낼 수 있는 점은 과부의 재가를 원칙적으로 금지했다는 점이다. 다음은 이 책에 나오는 주장이다.
“죄를 짓고 온 가족을 이끌고 변방으로 이주한 자가 죽으면 장사를 치르자마자, 아내 없는 백정이나 관노가 관청에 고하여, 그 죽은 자의 아내를 자기 아내로 삼으려고 한다. 그러면 수령이 위협하여 그들에게 시집가게 한다. 과부더러 절개를 지키게 하지는 못할지언정, 어찌 차마 그 뜻을 빼앗고 시집을 가게 한단 말인가? 퇴폐한 풍속이 이보다 큼이 없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과부의 수절을 당연시한 주장이다. 또 같은 책에 이런 이야기도 보인다.
“하정(河挺)의 첩 강씨(姜氏)는 수절하여 개가하지 않기로 손가락을 잘라 스스로 맹세하였다. 뒤에 그 어머니가 몰래 사람을 시켜 강제로 데려가더니, 신혼의 사랑이 이전보다도 더 깊었다. 늘 규방 안에 함께 거처하면서, 마치 목을 서로 기대고 있는 원앙새보다도 더 사이가 좋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비웃었다.”
사람들이 비웃은 까닭은 재가한 것도 좋은 일이 아닌데, 그녀가 스스로 맹세한 약속을 깨트렸다는 데 있을 것이다. 이로 보면 과부의 재가를 원칙적으로 금했으나 엄격하게 적용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재가한 과부의 자식은 벼슬길에 나올 수 없다고 법으로 정했다.
그렇다고 모두 과부의 수절을 찬성하지는 않았다. 이기(李墍, 1522~1600)의 『송와잡설(松窩雜說)』에 나오는 비판이다.
“제왕의 법이란 모두 인정에 근본을 둔다. 우리나라의 법에 알 수 없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 여자의 정절은 극히 권장할 만한 것이나, 나이 젊은 과부는 모두 재가하지 못하고, 재가하여 낳은 자식은 벼슬길도 막고 간음하여 낳은 것으로 단정해 버리니, 이것이 과연 인정에 가까운 것일까? 인정에 어긋나고 천리(天理)를 어긴 일이 이보다 큰 것이 없으니, 성인의 법이 아닌 듯하다.”
말인즉 인정상 젊은 과부의 재가를 금하지 않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조선 후기에 오면 실학자를 중심으로 이를 적극적으로 주장하게 되고 갑오개혁 때 폐지된다.

남편의 절개?

한편 과부만 수절한 것은 아니다. 매우 드문 일이기는 하지만 선비들 가운데도 그런 분이 있었다. 앞의 『송와잡설』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은 학문이 깊고 몸가짐이 곧았다. 37살의 젊은 나이에 아내를 잃었다. 아이들에게 좋지 못한 일이 생길까 봐 재혼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첩도 두지 않고, 21년을 쓸쓸히 홀로 살면서 아이들이 장성하여 혼인할 때까지 기다렸다. 공은

어미 잃은 아이들이 눈앞에 밟혀(失母兒童在眼前)
곤궁하게 20여 년 분수를 지켰네(困窮知分卄餘年).
시렁 위에 쌓아 둔 천 권 책을 의지했고(但憑架上堆千卷)
주머니가 한 푼도 모자란 채로(也任囊中欠一錢).
늙기까지 새살림 장만하지 못했는데(到老不成新活計)
죽게 되어 옛 인연 공연히 생각하네(殘生空憶舊寅緣).
혼인을 다 시키니 남은 한은 없어라(已終婚嫁無遺恨).
이제야 편안하게 구천을 향할 수 있으리(方得安然向九泉)!

라는 시를 지었다.”
내용을 보면 열녀 못지않다. 원천석을 자식을 위해 수절을 했다고 보는데, 현대에도 이런 남성들이 주변에 더러 있다. 또 아내와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다른 여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용재총화』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정구(鄭矩)와 정부(鄭符)는 모두 정양생(鄭良生)의 아들이다. 모두 음악에 조예가 있었다. 부인이 혹 시골에 내려가면 정부는 홀로 집에서 구름과 먼 산을 바라보고 거문고를 타며, 노래 부르는 일을 즐거움으로 삼았을 뿐, 분 바르고 눈썹 그린 기생들 사이에서 술 취한 일이 없었다.”
이런 일도 일종의 남편의 아내에 대한 신의를 배신하지 않는 일이라 하겠다.

보통의 남편과 아내

흔히 우리는 조선 시대 사대부의 부부관계가 근엄하고 엄격하게 ‘부부유별’을 잘 지켰을 것이라고 상상하는데, 꼭 그러지만은 않은 것 같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사가 관념과 이념대로 굴러가지는 않는다. 평범한 삶이라면 예나 지금이나 반복되는 일도 많다.
그 가운데 하나가 남편의 바람기와 아내의 투쟁(?)이 삶의 무늬를 더한다. 남자들은 아내가 있는데도 첩을 맞이하곤 했는데, 이것은 오늘날의 일부일처제와 다른 문화이다. 굳이 문화라고 하는 이유는 당시 그 일을 크게 비난하거나 역겹게 생각하지 않았고, 왕으로부터 미관말직의 사대부도 능력만 있으면 첩을 둘 수 있었다. 일부다처제를 허용했기 때문이다. 물론 첩의 자식에게 벼슬을 주지 않는 제한 사항이 있어 크게 장려한 일은 아니지만, 첩 자체는 흉이 되지 않았다. 이런 첩의 문제로 아내들은 골머리를 앓았을 것이고, 질투 또한 있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좀 우스운 사례이지만 이제신(李濟臣, 1536~1584)의 『청강선생후청쇄어(淸江先生鯸鯖瑣語)』에 이런 이야기가 등장한다.
“김효성(金孝誠)은 사랑하는 여인이 많았고, 부인도 질투가 대단히 심했다. 어느 날 그가 밖에서 들어오다가 부인 자리 곁에 검정 물을 들인 모시 한 필이 있는 것을 보고, ‘이 검은 베는 어디다 쓸 것인데 부인 자리 곁에 놓았소?’라고 물었다. 부인이 정색을 하고, ‘당신이 여러 첩한테 빠져서 본 마누라를 원수같이 대하므로, 저는 스님이 될 마음을 굳게 먹고 이것을 물들여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가 웃으며, ‘내가 여색을 밝혀서 기생·의녀(醫女)로부터 유부녀, 천한 사람, 관기의 우두머리, 바느질하는 종을 막론하고 얼굴만 예쁘면 반드시 사통하여 왔으나, 여승은 아직 한 번도 가까이해본 적이 없소. 그대가 여승이 된다면 내가 원하던 바이오.’라고 하니, 부인은 마침내 한마디도 못 하고 옷감을 내동댕이쳤다고 한다.”
이 정도면 어느 부인인들 질투하지 않겠는가? 한편 부인만 아니라 남편도 질투했다. 『용재총화』에 실려 있는 이야기이다.
“신재추(辛宰樞)는 성품이 매우 급하였다. 파리가 밥그릇에 어지럽게 몰려들어 좇아도 다시 모여들자, 재추는 성질이 나서 그릇을 땅에 던져버렸다. 부인이 ‘하찮은 벌레를 놓고 어찌 이다지도 화를 내시오?’라고 하니, 재추는 눈을 똑바로 뜨고 꾸짖기를, ‘파리가 네 서방이냐? 어째서 두둔하느냐?’라고 하였다.”
이걸 굳이 따지면 질투가 아닐 수 있지만, 그의 말투에 질투가 섞여 있다. 무의식의 발로이리라.

관념은 신념을 통해 실천으로

유교적 관념에 교화되거나 그것이 신념으로 굳어진 사람은 남녀 관계의 구분을 엄격히 지켰음을 금방 알 수 있다. 『해동잡록』에서 김정국(金正國, 1485~1541)은 “부부가 혼인하여 백 년을 같이 살 때 남편은 아내를 위해 생각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할 것이며, 남편은 더욱 노여움을 참고 아내는 더욱 순종해야 가정의 법도가 무너지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그 당시에 있어서 부창부수의 참된 의미이다. 때로는 분별이 지나쳐 너무 엄격한 사람도 있었다. 윤기헌(尹耆獻, 1548~?)의 『장빈거사호찬(長貧居士胡撰)』에서는 “효도로 이름난 송인수(宋麟壽)가 장가드는 날 저녁에도 등불을 밝히고 글을 읽으니, 사람들이 글 미치광이라고 지목하였다.”라는 말이 보일 정도이다.
요즘 부인만의 정절과 부부유별을 강조하는 일은 시대에 맞지 않는다. 전근대 사회에서 여성의 절개를 높이고, 남녀를 구별하는 일이 당시 사회·경제적 배경에서는 바람직한 일이 될 수 있겠으나, 이런 문제는 역사적 조건과 함께 인간의 주체적 자각과 실천 속에서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남녀 구별은 오늘날 전혀 쓸모없는 일일까? 차별이 아니라 모종의 역할 구분으로서 말이다. 찾아보기 바란다. 아니면 옛날처럼 음란을 예방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일일까? 그렇다면 삶의 파탄을 예방하는 일이 될 수도 있겠다. 그 가운데 하나로서 성폭력과 성추행의 의혹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는 누구나 스스로 경계하는 가르침으로 여기면 좋겠다.

형제의 난과 우애

형제의 난과 우애

왕자의 난과 이숙번의 예견

오륜은 인간관계에 등장하는 다섯 가지 종류로서 어버이와 자식, 임금과 신하, 어른과 아이, 부부, 친구 사이의 윤리를 규정하는데, 여기에 이상하게 형제 사이를 규정하는 윤리가 없다고 오해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런 오해는 『소학』을 펼쳐보면 금방 풀린다. 바로 장유유서(長幼有序) 속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스승과 제자의 윤리도 이 범주에 들어간다.
혹자는 형제의 윤리가 어째서 장유유서 속에 들어 있는지 의아해할 수 있겠다. 이는 옛날의 형편을 알아야 풀리는 문제이다. 곧 다산(多産)을 중요시했고, 오늘날보다 혼인 시기가 상대적으로 빨랐으며 또 피임 기술이 없었던 옛날에는 자녀를 많이 낳았다. 가까이는 60~70년 전만 해도 형제자매가 적게는 4~5명, 많게는 9~10명에 이른다. 이렇게 되다 보니 장남 또는 장녀와 막내의 나이 차이는 20살이 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 가운데는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형이 부모처럼 막내를 키우는 집안도 있었다. 더구나 일부다처를 허용했으므로 형제의 나이 차이는 더 벌어진다.
이런 배경에서 형은 동생을 사랑하고 동생은 형을 공경해야 하는 형우제공(兄友弟恭)이라는 우애(友愛)의 윤리가 등장한다. 그러니까 형제의 나이 차이가 커서 그 윤리가 자연히 장유유서의 범주에 들어가게 되었다. 해서 효도와 함께 효제(孝悌)라는 말도 등장하였다.
이렇게 우애를 강조하는 일이 사대부들의 삶 가운데 하나였지만, 조선 왕가는 개국하면서부터 위신에 손상을 가져왔다. 바로 두 차례나 벌어진 속칭 ‘왕자의 난’이라는 사건 때문이다. 모두 왕위 계승을 두고 형제들 사이에 벌어진 살육전이었다.
이 사건과 관련해 윤근수(尹根壽, 1537~1616)의 『월정만필(月汀漫筆)』에는 이런 고사가 있다.
“이숙번(李叔蕃)은 수양대군이 어릴 적에 그를 보고 말하기를, ‘어린애의 눈동자가 너무도 그의 할아버지를 닮았구나. 모쪼록 형제끼리 우애하고 너의 할아버지를 본받지 말라.’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할아버지는 태종이고 숙번은 그의 수하다. 하지만 이런 비극이 태종에게만 해당하겠는가? 세조도 당사자이지만, 조선왕조 역사에서 왕위 계승을 두고 보이지 않게 형제끼리 때로는 부자 사이에도 벌어지는 일이었다. 곧 권력 앞에 우애가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이는 현대에도 벌어지는 일이다. 재벌 집안의 유산상속을 두고 현대판 왕자의 난으로 반복되었다. 보통의 집안에서도 부모의 유산 분배를 두고 서로 싸워 형제끼리 남처럼 지내는 분들도 적지 않다.
상황이 이런데 유가(儒家)들은 권력투쟁이나 유산 분배를 앞에 두고 우애를 강조하면 잘 해결될 것이라고 정말로 믿었을까? 오늘날 우애의 필요성과 가치는 어디서 찾아야 할까? 조상들의 우애 사례를 살펴보고, 그것이 현재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아보자.

설포와 목융의 우애

형제끼리 사이좋게 잘 지내라는 말을 사람들이 순순히 따랐을까? 막연하고 추상적인 규범보다는 구체적인 사례를 보여주는 일이 더 낫지 않았을까? 그렇다. 그래서 『소학』에 그 몇 가지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그 가운데 효자로 이름난 설포(薛包)의 우애가 있다.
“설포가 부모의 상을 치룬지 얼마 되지 않아 아우의 아들이 재산을 나누어 따로 살기를 요구하였다. 설포는 말리지 못하여 재산을 반씩 나누게 되었다. 노비 가운데 늙은 자를 두고 조카에게 ‘나와 함께 일한 지 오래되었으니 너는 부릴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고, 농토와 농막은 거칠고 기울어진 것을 차지하면서 ‘내가 어렸을 때부터 관리하던 것이니 마음에 미련이 없다.’라고 하였으며, 낡고 깨진 물건을 차지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평소에 입고 먹던 것이니 몸과 입에 편안하다.’라고 하였다. 아우의 아들이 여러 번 그 재산을 없앴는데, 그때마다 다시 도와주었다.”
설포의 아우가 일찍 죽었던 모양이다. 그는 아우를 생각해서 조카에게 재산을 양보하고 도와주기까지 하였다. 또 하나 이야기는 목융(繆肜)의 우애이다.
“한나라 사람 목융이 어렸을 때 아버지를 여의고, 사형제가 생업을 함께 하였다. 자라서 각각 아내를 맞이하였는데, 동생의 아내들이 재산을 나누어 따로 살기를 요구하고, 또 자주 다투는 말이 있게 되었다. 목융은 분하고 한탄하는 마음을 깊이 품고, 방문을 닫고 스스로 자기 몸에 매질하였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융아, 네가 몸을 닦고 행동을 삼가서 성인의 법도를 배운 것은 장차 풍속을 바로잡으려는 것인데, 어찌하여 자기 집안조차 바르게 하지 못한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아우들과 그의 아내들이 그 말을 듣고 모두 머리를 조아려 사죄하여, 마침내 집안이 화목하게 되었다.”
이 역시 재산 문제로 생긴 갈등을 맏아들인 목융이 스스로 반성하면서 우애를 회복한 고사이다. 조선 시대 사대부라면 이 고사들을 익히 알았으리라. 어떤 사례가 있는지 알아보자.

동생들에게 양보한 재산

『소학』으로 공부의 기초를 다지고, 성현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려던 조선의 선비들은 대체로 우애를 잘 지켰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 가운데 눈에 띄는 사례는 정여창(鄭汝昌, 1450~1504)의 고사이다. 권별(權鼈 : ?~?)의 『해동잡록(海東雜錄)』에 등장한다.
“정여창이 형제자매와 더불어 노비와 전토를 나눌 때, 먼저 늙고 약한 자와 메마른 것을 차지하였지만, 한 매부가 오히려 못마땅하게 여기자 문득 자기 것을 주었다. 선생의 마음 씀씀이는 남을 속이지 않았는데, 일찍이 여러 딸에게, ‘뒷날 시집가면 동서들을 반드시 공경하고 삼가야 하며, 오직 형제의 환심을 잃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라고 가르쳤다.”
바로 앞의 ‘설포’ 고사의 재현이다. 이런 사례는 또 있는데, 같은 책 속의 내용이다.
“최숙함(崔叔咸)은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가 논밭과 남녀 종들을 분배하고자 하니 숙함은 메마른 땅과 노쇠한 종들만 차지하고, 좋은 것은 두 형제에게 주었다. 지방 사람들이 칭송해서 말하기를, ‘유금류와 설포 같은 사람은 천년을 우러러 존경할 만하거늘, 하물며 숙함은 혼자서 두 사람의 좋은 점을 겸하고 있어서랴!’라고 했다.”
‘유금류’는 『소학』에서 어버이의 대변을 맛볼 정도로 이름난 효자이고, ‘설포’는 앞서 소개했다. 적어도 사대부들은 그들의 사례를 알았으므로 그처럼 아니 그들보다 더 철저히 우애를 실천하려고 했을 것이다. 심지어 형제가 한두 명도 아니고 10명인 경우도 있었다. 이륙(李陸, 1438~1498)의 『청파극담(靑坡劇談)』에 보인다.
“처사(處士) 성담수(成聃壽)는 형제자매가 10명이나 되었다. 부모가 돌아가자 삼년상을 마치고 형제들을 모이게 한 다음 재산을 분배하였다. 물건 가운데 괜찮은 것은 곧장 ‘아무에게 주어라.’라고 말하고, 노비 가운데 착실한 자가 있으면 곧장 ‘아무에게 주라.’라고 말했다. 부서지고 변변치 못한 물건을 보게 되면, ‘이것은 부모님의 뜻이니 내가 가져야겠다.’라고 하였다. 누이동생에게 집이 없어서 본집을 주고자 했는데, 여러 아우가 말리면서, ‘부모님이 계시던 집은 장자에게 전해져야 합니다.’라고 하니, 담수가 말하기를, ‘다 같은 부모의 자식으로 나만 홀로 집을 가질 수는 없다.’라고 하고, 곧 가지고 있던 무명을 내어다 팔아 누이동생의 집을 사는 자본으로 주니, 동생 인수도 가재를 팔아 도와주었다. 두 형이 마음을 모아 그 철없고 어린 동생들을 차례로 장가들이고 출가시키니, 온 집안에 이간하는 말이 없었다.”
참으로 대단한 우애가 아닌가? 이런 일이 아마 중국에 있었더라면 크게 회자 되었으리라. 하지만 언제나 미담 사례만 있지 않다.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의 『필원잡기(筆苑雜記)』에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
“동원공(東原公) 함우치(咸禹治)가 일찍이 전라도 감사가 되었는데, 어떤 양반집 형제가 서로 큰 가마솥을 가지려고 관청에 소송하였다. 함공이 노해서 아전에게 명하여 크고 작은 두 가마솥을 급히 가져오게 하고 말하기를, ‘마땅히 깨뜨려서 골고루 나누어 주겠다.’라고 하니, 두 형제가 복종하고 분쟁을 마침내 중지하였다.”
이 판결은 솔로몬의 지혜를 방불케 한다. 솥단지를 두고 다툰 못난 형제도 있었다는 사례이다. 어찌 모든 사람을 성현의 가르침대로 교화시킬 수 있었겠는가? 어느 시대든 그늘은 늘 있는 법이다.

스승처럼 친구처럼 지낸 우애

우애의 사례는 굳이 유산 분배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일은 아니다. 형을 스승처럼 섬긴 우애도 있다. 세인들이 ‘토정비결’의 저자로 믿고 있는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 1517~1578)의 고사이다. 이이(李珥, 1536~1584)의 『석담일기(石潭日記)』에 보인다.
“이지함은 천성적으로 효도하고 우애가 있어 형제간에 재물을 함께 나누어 쓰고, 사사로이 감추는 것이 없었으며, 재물을 가벼이 여겨 남의 급한 사정을 잘 도왔다. 그의 형 이지번(李之蕃)이 세상을 떠나자 이지함이 부모상을 당한 것처럼 애통히 여기고 기년복(期年服: 일 년 동안 입는 상복)을 입은 뒤에도 또 심상(心喪; 상복을 입지는 않으나 마음으로 슬퍼함)을 지냈다. 이를 보고 누가 예법이 지나치다고 의심하자, 이지함이 말하기를, ‘형은 나의 스승이니, 내가 스승을 위하여 심상 3년을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것만이 아니다 친구처럼 지낸 우애도 있다. 이기(李墍, 1522~1600)의 『송와잡설(松窩雜說)』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근세 유명한 재상 가운데 우애로 칭찬받는 이는 오직 재상 안현(安玹)과 이준경(李浚慶) 두 집뿐이다. 이준경은 사랑을 중시하여 형 판서 이윤경(李潤慶)과 친구처럼 지내며 우애하였다. 앉으면 무릎을 맞대고, 누우면 베개를 가지런하게 하였다. 말하며 웃을 적에는 ‘너’ ‘나’ 하며 장난치기도 하였다. 윤경이 죽자 준경은 제복(制服)을 입고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슬퍼하였다.”
또 우애를 해치지 않도록 지혜롭게 산 형제도 있다. 윤기헌(尹耆獻, 1548~?)의 『장빈거사호찬(長貧居士胡撰)』에 등장하는 김안국(金安國)과 김정국(金正國)의 사례이다.
“김안국(金安國)과 김정국(金正國) 형제는 소인배에게 배척을 받아 시골에 살고 있었다. 서로 늘 왕래하며 형제의 집에 유숙하였다. 어떤 때로는 한 달 동안 묵었다. 작별할 때 안국이 정국에게 말하기를, ‘내 이미 연로하고 그대 또한 병이 많은데, 어찌 오래 살기를 바라겠는가? 서로 만나면 기쁘고 헤어지면 슬픈데, 함께 살며 여생을 마칠 수 없겠는가?’라고 하니, 정국이 말하기를, ‘저의 뜻은 좀 다릅니다. 형제가 같이 사는 일은 참으로 기쁜 일이나, 양가의 하인들 사이에 다른 말이 없을 수 없고, 부인들은 성질이 편벽하여 오해하기는 쉽고 풀리기는 어려우니, 만약에 반목이 생긴다면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서로 각각 따로 사는 것보다 못할 것입니다. 오래 떨어져 있으면 생각나고, 서로 만나면 즐거우니 우애의 정은 날로 더욱 두터워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 가운데 더러는 정국의 말에 이치가 있다고 하였다.”
김안국과 김정국 형제는 지방관으로 있을 때 『소학』의 보급과 교화에 힘쓴 분이다. 김정국의 말은 현실적으로 매우 합당하다. 비록 두 사람 사이에 우애가 있더라도 하인들 사이에 갈등이 없을 수 없고, 또 부인들은 피 한 방울 안 섞인 사실상의 남이니 형제만큼 우애를 기대하기도 어려운 것이 또한 현실이다. 그 점을 간파한 정국의 판단은 매우 지혜롭다고 하겠다.

우리에게 우애란 무엇일까?

『해동잡록』에 앞의 김정국의 말이 실려 있다. “골육지친(骨肉之親)에 형제만 한 것이 없는데, 무지한 사람들은 조그마한 이해(利害)를 다투다가 마침내는 원수가 되니, 금수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서로 싸우고 화목하지 못한 자는 이웃이 다 함께 배척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같은 책에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에 대해서, “선생은 동생과 우애가 심히 돈독하여, ‘한 몸의 지체라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고, 같이 한 담 안에 살면서 출입하는 데 두 문이 없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처럼 옛 선인들은 우애를 중요하게 여겼는데, 이는 당시의 문화 속에서 자연히 우러나오는 일이지만, 무엇보다 그것이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가치 가운데 하나였기에 국가와 사대부들이 강조하였을 것이다. 특히 유학의 큰 범주로 본다면 우애는 『대학』 팔조목의 제가(齊家)에 해당하는 문제로서 사대부라면 마땅히 지켜야 할 가치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애는 어떠한가? 기성세대의 양상은 크게 세 종류로 나누어진다. 우애 있고 화목하게 잘 지내는가 하면, 그럭저럭 티격태격하면서 지내는 집안도 있고, 유산 싸움으로 서로 남남이 되어 원수처럼 지내는 집안도 있다. 사람들 가운데는 유산이 없는 가난한 집안 출신 형제 사이에 훨씬 우애가 있다고 수군댄다. 우애가 깨지는 가장 큰 이유는 재산 문제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 『소학』에서 그토록 강조했을 것이다.
그런데 젊은 세대는 과거처럼 형제가 많지도 않아서 한 가구당 두어 명 정도, 그나마 외톨이이거나 없는 집도 있으니, 우애라는 말이 필요하지 않을 날도 멀지 않았다. 우애만이 아니라 친척을 일컫는 용어, 가령 고모, 이모, 삼촌 따위도 부르지 못하는 사람도 있겠다.
하지만 그 우애의 정신이 다른 식으로 변형되어 나타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바로 앞서 잠깐 언급한 장유유서이다. 이걸 말하면 젊은이들이 펄쩍 뛰겠지만, 이 덕목을 굳이 나이에 따른 차별이나 구별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좀 더 다른 차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다시 말하면 ‘어른다운 사람에 대한 존중’으로 재해석해 보면 어떨지 제안해 본다. 나이를 먹어도 이른바 ‘나이값’ 못하는 사람은 하찮은 취급을 당할 수밖에 없는 일이고, 나이가 어려도 판단과 행동이 어른 못지않게 훌륭하다면 그를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거에는 어쩔 수 없이 사회질서 유지 차원에서 나이에 따라 그랬지만, 오늘날에는 질서 유지를 넘어서 고급문화의 정착을 위해 필요한 일이 될 수도 있다. 선진국에 걸맞는 선진문화로 뒷받침해야 하지 않을까?

『대동야승(大東野乘)』을 통해 본 조선 시대 선비 이야기 Ⅱ


『대동야승(大東野乘)』을 통해 본 조선시대 선비 이야기 Ⅱ

 

한국인에게 효도란?

이야기를 시작하며

‘역사 속 유교 이야기’ 시리즈에서 다루는 ‘『대동야승(大東野乘)』의 선비 이야기’의 이번 주제는 조선 시대의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핵심 윤리를 다룬다. 그 가운데 가장 영향력을 지닌 가치가 ‘오륜(五倫)’을 중심으로 『소학(小學)』에서 제시하는 것들이다. 그와 관련된 10가지 주제를 골라 그 사례를 소개한다.
이 글의 서술 방식은 윤리적 가치나 철학적 원리의 연역을 자제한다. 사상이란 그것을 표방하는 논리에서 본다면 매우 추상적이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현실에서는 매우 구체적이고 경험적이며 다양한 모습을 드러난다. 이 글은 유교의 가치가 현실에 어떻게 적용되고 받아들여지고 있는지, 그 사상의 목적에 비해 인간의 삶과 에너지가 어떤 식으로 표출되는지, 조선 시대 선비들의 삶을 통해 그 역동성을 살펴본다. 철학자 칸트의 말처럼 생활 감정이나 실감으로 보장되지 않는 이론(가치)은 공허하며, 이론으로 방향을 부여받지 못하는 삶은 맹목적이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면서 필자로서 가장 조심해서 다루고 자제했던 점은 정통 유교의 관점에서나 현대의 가치관으로 과거를 비판하는 일이다. 이른바 문명의 이름으로 동서고금의 다양한 문화현상을 성급하게 재단하지 않듯이 우리 조상들의 그것도 존중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고, 그 시대의 문화와 삶을 읽어내는 것이 되레 유익한 일로 보인다.

낯설지 않은 효도

한국인에게 효도는 낯설지 않다. 조선 시대에 유교가 사실상 국교의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서양 여러 나라에서 기독교 풍습이 전혀 낯설지 않은 것과 같은 맥락이다. 전근대 사회에서 유교든 기독교든 나름의 장단점이 있었는데, 그 단점만 크게 부각하여 비판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이 효도 또한 편견 없이 들여다볼 것을 제안한다.
효도를 포함한 오륜이 크게 강조된 것은 아마도 조선을 건국한 이념이 성리학(性理學)을 사상적 배경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성리학은 추상적인 철학이어서 현실에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사대부나 민중의 현실을 이끌어나갈 실천적 교과서가 필요했는데 그것이 바로 『소학』이다.
조선에 성리학을 정착시킨 장본인들은 모두 하나같이 『소학』의 가르침에 충실했다. 길재(吉再, 1353~1419), 김숙자(金叔滋, 1389~1456), 김종직(金宗直, 1431~1492), 정여창(鄭汝昌, 1450~1504), 김굉필(金宏弼, 1454~1504)을 비롯하여 조광조(趙光祖, 1482~1519), 김안국(金安國, 1478~1543), 김정국(金正國) 등의 선비들은 그 가르침에 충실했을 뿐만 아니라, 그 보급에도 앞장선 인물들이다. 조정에서 간행한 『삼강행실도』와 『오륜행실도』도 이 『소학』의 가르침을 보급하기 위해서였다. 윤리적 가치를 실천하는 현장에서 『소학』을 단순히 어린아이들이 배우는 교과서 정도라고 생각하면 큰 오해이다.
『소학』의 내용 가운데 효도에 관한 몇 가지 고사가 있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에는 추운 겨울에 얼음을 깨고 물고기(잉어)를 잡아 봉양한 왕상(王祥)의 효도, 도적도 감동한 강혁(江革)의 효도, 며느리가 이가 빠진 시어머니에게 젖을 먹여 봉양한 이야기, 아비의 병세를 알기 위해 대변을 맛본 유금류(庾黔婁), 부모의 상을 당하여 몸이 상할 정도로 슬퍼하고 죽을 먹고 삼년상을 치른 하자평(何子平) 등이 그것이다. 조선조 선비들이 삶이 어땠는지 알려면 이 효도의 사례를 꼭 기억해두면 좋겠다.
현대 한국인들에게 효도가 낯설지 않은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전통이기도 하지만, 과거 1970년대 유신정권에서 학교 교육과 언론을 통해 충효(忠孝)를 무척 강조하였고, 또 각종 드라마나 영화 또는 대중가요, 소설, 전래동화의 주제가 되기도 하였으며, 한자나 한문을 배우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접하는 가치이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특이하면서도 감동적인 효도의 사례

『소학』을 보면 효도의 방법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부모가 살았을 때, 돌아가셨을 때, 그리고 돌아가신 이후의 제사 등에 대해서 매우 구체적으로 성현의 말과 그 사례까지 소개한다. 조선 시대 사대부 선비들은 그 내용을 잘 지켰다고 확신한다. 『대동야승』에 소개하는 인물의 프로필을 보면 부모께 효도하고 형제들과 우애하며 청렴하게 살았다는 진술이 거의 예외 없이 등장하는 점이 그 근거이다. 하지만 이런 소개는 거의 누구나 하는 일이어서 어쩌면 형식적인 언급이 되고 만다.
해서 『대동야승』에 자세히 등장하는 사례는 특별한 경우이다. 오늘날도 평범한 일은 뉴스거리가 되지 않는다. 뉴스는 물론 드라마나 영화의 소재가 되는 것은 일상적인 일과 거리가 먼 이례적인 경우이다. 앞으로 소개하는 일도 그렇다.
먼저 남효온(南孝溫, 1454~1492)이 쓴 『추강냉화(秋江冷話)』에 이런 이야기가 등장한다.
“청주 사람 경연(慶延, ?~?)은 그의 아버지가 겨울에 병이 들어 생선회가 먹고 싶다고 하여서 냇가에 나가 얼음을 깨고 그물을 쳤다. 고기를 잡지 못하자 울며 말하였다. ‘옛사람은 얼음을 깨뜨려서 고기를 잡았다는데, 지금 나는 그물을 치고도 고기를 못 잡으니 내 정성이 하늘을 감동하게 하는 일이 막혔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두건과 버선을 훌렁 벗고 얼음 구멍에 서서 하룻밤을 새웠더니 검은 잉어가 잡혔다.”
이와 유사한 이야기는 권별(權鼈 : ?~?)의 『해동잡록(海東雜錄)』에도 전한다.
“강릉 사람 이성무(李成茂)는 어머니가 병들어 물고기를 먹고자 하였는데, 냇가에 나가니 홀연히 얼음이 깨지고 고기가 튀어나왔다. 그것을 어머니께 가져다드렸고,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서 그 자손에게 세금을 면제해 주도록 했다.”
이 이야기들은 앞서 소개한 ‘양상’의 조선판 고사이다. 이와 유사한 이야기는 얼마든지 있다. 가령 율곡 이이(李珥, 1536~1584)의 『석담일기(石潭日記)』에 소개하는 송인수(宋麟壽, 1499~1547)의 고사도 그러하다. 그 이야기는 이렇다.
“송인수는 충성과 효도가 모두 지극하였다. 어릴 때 어머니를 잃었는데 그때는 예법을 아직 배우지 않아 감정에만 치우쳐 너무 슬퍼하였다. 그가 엎드려 울었던 자리는 눈물에 젖어 썩기까지 했다. 제비가 여막(盧幕)에 집을 지어 부화한 새끼가 모두 흰색이었는데, 사람들은 그의 효성이 지극하여 감응된 것이라 하였다. 그 후 조정에 서게 되니 명망이 일대에 높았다.”
또 『해동잡록』에는 이런 이야기를 전한다.
“정승우(鄭承雨)는 양주(梁州) 사람이며 왜구들에게 잡혀가 비전주(肥前州)에서 팔린 몸이 되었다. 그때 어머니가 70여 살이었는데, 그는 어머니의 생사를 늘 걱정하여 고기를 먹지 않았다. 왜구들이 그것에 감동하여 양식을 주어서 돌려보내니 모자가 서로 만나게 되었다. 또 동래 사람 김득인(金得仁)은 9년을 묘막에서 지냈는데, 왜구가 거기에 와서 보고 감동하여 칭찬하고 쌀과 미역을 주고 갔다. 성종 때에 정문(旌門: 효자·충신·열녀를 표창하기 위해 그 집 앞에 세운 붉은 문)을 세우고 벼슬을 주었다.”
이 이야기는 도적도 감동하였던 ‘강혁’의 이야기와 유사하다. 이 외에도 고려 때 몽골군에게 붙잡혀간 어머니를 되찾아온 김천(金遷)이라는 효자 이야기도 있다. 효도라는 보편적 가치에 비록 도적이라 할지라도 감동했다는 이야기다.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의아하지만 이런 효자도 있었다. 『해동잡록』에 보인다.
“개성 사람 김구손(金龜孫)은 어머니가 돌아가자 아버지가 후처를 얻었는데 춥지 않게 맛있는 음식으로 정성껏 받들었고, 아버지에게 난 종기를 빨아서 낫게 했다. 뒤에 아버지가 죽자 묘 옆에 여막을 짓고 지내면서 아침저녁으로 상식(上食: 상을 치를 때 죽은 이의 영전에 올리는 밥)이 끝나면 집에 가서 계모를 3년 내내 보살펴주었다. 효성이 위에 알려져서 정문을 세우고 세금을 면제해 주었다.”
치료를 위해 종기를 빠는 일은 흔히 전통 의술에 있는 일이다. 친모는 물론 계모까지 잘 보살피는 일도 효도 가운데 하나인데, 앞의 ‘왕상’의 고사에도 등장한다. 이보다 더 심한 이야기도 등장한다. 엽기적이지만 참고 읽어 보기 바란다. 앞의 책에 나온다.
“연안(延安) 사람 김자렴(金自廉)은 어머니가 죽고 상이 끝났는데도 오히려 조석으로 상식을 올렸다. 아버지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종기를 빨고 똥을 맛보기도 했다. 특별히 나라에서 절충장군(折衝將軍)을 제수했다.”
대변을 맛본 일은 앞의 ‘유금류’의 고사에 나온다. 그가 그랬던 까닭은 의원이 “병이 심하거나 그렇지 않은 정도를 알려면 오직 대변이 달고 쓴 것을 맛보는 방법밖에 없다.”라는 말에 근거하고 있다. 기독교인들이 『성서』를 믿듯이 선비들 가운데는 『소학』을 그렇게 믿었을 것으로 판단되는 대목이다. 이 외에 『해동잡록』 속에는 무수한 사례가 등장하는데, 특이한 것 몇 가지를 소개하겠다.
“만경(萬頃) 사람 김맹방(金孟倣)은 아버지가 종기로 앓았는데 종아리 살을 베어 약으로 드리니 병이 나았다. 그 아들 인호(仁好)도 어머니가 종기를 앓자 또한 종아리 살을 베어 드렸다. 성종이 불러 보고 서부참봉(西部參奉)을 시켰다.”
“평양 사람 김경리(金景利)는 아버지가 미친병에 걸려 몇 달이 되어도 낫지 않자 오른쪽 손가락을 잘라 약에 타서 드리니 병이 바로 나았다.”
“김윤손(金允孫)은 그의 아버지가 호랑이에게 물려갔는데, 호랑이를 쫓아가 목덜미를 껴안고 입을 틀어막아 때려죽이고 아버지를 살렸다.”
“충주 사람 하숙륜(河叔倫)은 어머니가 문둥병에 걸렸는데, 엉덩이 살을 잘라 술에 타 드리니 병이 나았다. 후에 병이 재발하여 다시 손가락을 잘라 태워서 드리니 병이 완전히 나았다. 중종이 명하여 정문을 세웠다.”
“창성(昌城) 사람 김을시(金乙時)는 성안에 불이 나서 그 집에까지 번졌다. 아버지가 병으로 일어날 수 없자 김을시가 타오르는 불길 속에 뛰어들어 아버지를 업고 나오다가 부자가 다 불에 타 죽고 말았다. 나라에서 쌀을 내리고 정문을 세웠다.”
심지어 이런 일도 있었다고 전한다.
“고려 때 운제현(雲悌縣) 사람 차달(車達)은 삼 형제가 같이 어머니를 모셨다. 그의 아내가 어머니에게 불순하였으므로 아내를 버렸다. 두 동생이 모두 아내를 얻지 않고 어머니를 섬기니, 임금이 명하여 모두 부역을 면제하도록 하였고 『고려사』에 실려 있다.”
이 정도에 이르면 그 사례 속의 정성이나 끈질긴 면에서 『소학』의 그것을 능가한다. 이것이 엽기적이고 지나친 효도로 보이나, 필자가 보기에는 당시 뚜렷한 의학적 대안이 없었던 시대적 배경 속에서 취할 수밖에 없었던 행위로 보인다. 『소학』 속의 중국인들보다 더 철저하고 치열했던 점은 우리 한민족의 끈기와 저력, 강인한 에너지의 소산으로 보고 싶다. 그 힘이 적절한 방향으로 인도된다면, 세계의 중심에 설 날도 머지않았다.

효도는 유교만의 전유물인가?

혹자는 이런 지나치게 보이는 효도 행위를 두고 유교적 이념에 세뇌된 사람들의 비뚤어진 효도라고 비판할지 모르겠다. 나라에서 벼슬도 주고 세금도 면제하고 정문(旌門)도 세워주니 빗나간 효심의 발로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 지적이 완전히 틀렸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이는 어쩔 수 없이 당대의 가치가 현실에 적용될 때 나올 수밖에는 없는 일이다. 긍정적 결과와 함께 부정적 그것도 마찬가지이리라. 마치 오늘날 자본주의 체제에서 경제활동의 자유가 주어지다 보니, 부동산투기처럼 노동보다 불로소득을 통해 재산을 증식하려고 하여 온갖 폐단이 속출하는 일과 유사하다.
또 혹자는 유교가 사회질서 유지를 위해 효도를 인위적으로 너무 강조하여 이런 일을 초래했다고 비판할 수 있겠다. 이 논리도 다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공자가 춘추시대 사회질서 유지를 위해 인(仁)을 강조하고, 그 실천 방법으로 효제충신(孝弟忠信)을 말했으니, 공자 사상의 의도를 보면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더구나 송 대 성리학이 태동하는 배경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효도를 유교가 강조했다고 해서 유교만의 전유물일까? 특히 『소학』의 등장으로 인해 강조된 것일까? 필자는 유교, 특히 성리학의 전유물은 아니라고 본다. 다시 『대동야승』에서 그 사례를 살펴보면 이미 신라 시대의 효도 이야기가 등장한다. ‘손순매아(孫順埋兒)’의 고사가 그것이다. 이는 『삼국유사』에 나오지만 『해동잡록』에도 보이고, 성리학이 들어오기 이전의 고려 때의 효자 이야기도 『소학』과 무관하다.
더구나 왜구도 효도를 가상히 여겼다는 점은 어떤 문화를 초월한 보편적 가치임을 암시한다. 왜구가 유학을 알았는지 알 수 없지만 말이다. 게다가 기독교 모세 십계명 가운데 다섯 번째 계명도 ‘네 부모를 공경하라’이다. 이렇게 보면 표현과 방식의 차이는 있어도 부모를 공경하는 일, 곧 효도는 문화를 초월하여 어느 지역에나 있을 수 있는 행위와 가치임을 알 수 있다.

우리에게 효도란 무엇인가?

현대 한국인들에게 효도란 무엇일까? 요즘 세태를 보아 참 껄끄러운 질문임은 분명하다. 지금 나이가 60세 이상인 분들은 이 효도에 관해서 스스로 ‘끼인 세대’라 부른다. 이들은 부모를 나름대로 잘 모셨지만, 정작 본인들은 자식들이 그렇게 모실 것이라 기대하지 않는다고 한다. 가끔 인터넷 여론을 보면 효도가 전근대적 유교의 케케묵은 유산, ‘꼰대’들이나 떠드는 쓸데없는 주장쯤으로 치부한다.
효도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문화와 방법은 달라도 부모의 자식 사랑이 전제된 자식의 부모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없거나 미숙할 경우 불효이다. 풍기 군수였던 주세붕(周世鵬, 1495~1554)은 아버지가 생전에 홍시를 즐겼으므로 자기는 종신토록 차마 홍시를 먹지 못했다고 한다. 『해동잡록』 속의 사례이다. 이처럼 사람이 늙으면 자연히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이 간절하다. 사람에 따라서는 그때 겨우 효자가 되기도 한다. 왜 그럴까?

충절이 무엇이기에 목숨과 바꾸는가?


충절이 무엇이기에 목숨과 바꾸는가?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

고려말 성리학이 들어오고 조선 시대 『소학』의 보급으로 효도 못지않게 강조된 윤리가 충성과 절의, 곧 충절(忠節 또는 忠義)이다. 이 충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조선의 정치 현장과 조상들의 삶 또한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여말선초(麗末鮮初) 왕조 교체기에 생긴 일, 단종 복위 운동, 외침을 당했을 때의 국난극복 등 그 동력의 원천은 이와 관련이 있다. 더 나아가 근대 전환기부터 시작된 독립운동도 얼핏 보면 군주제의 전통적 가치와 무관하게 보이지만, 그 충성의 대상이 근대적 국가공동체로 바뀌었을 뿐, 충성이라는 내면적 가치는 바뀌지 않았다. 우리 독립운동가치고 유학적 소양이 없는 사람은 많지 않다.
전근대 사회에서 충절이 널리 보급된 것도 『소학』의 영향이 크다. 거기에 이런 말이 있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지아비를 고쳐 맞지 않는다.”
이 말은 전국시대 왕촉(王蠋)이 죽으면서 한 말이다. 연나라 장수 악의(樂毅)가 제나라를 쳐서 이기고, 왕촉의 명성을 듣고 그를 부르니, 왕촉이 이와 같은 말을 남기고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고 한다. 이 말이 후세에 모범이 되어 많은 충신과 열녀가 나오게 되었다고 전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근본적인 물음 ‘왜 두 임금을 섬기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 열녀도 그러한데 이 문제는 별도로 다룬다.
아무튼 현대의 우리로서는 도대체 충성이란 무엇인지, 꼭 필요한 가치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요즘 사람들은 윗사람이나 공동체에 대한 충성을 말하면 대개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다. 개인의 자유와 이익을 공동체의 그것보다 우선시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말로 이런 충절이란 박물관으로 보내야 할 가치인가? 현대적으로 인간의 삶을 인도할 아무런 가치가 없고, 단지 조상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키워드 수준에서 만족해야 할까?

여말선초와 충절

한국인이라면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1337~1392)와 야은(冶隱) 길재(吉再, 1353~1419)를 모르는 사람은 없겠다. 한때 초중등 교과서에 충신의 대명사로 소개하고, 국문학사에서 의미 있는 시조를 남기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두 분 다 충신으로 평가하지만, 정몽주는 죽임을 당했고 길재는 살아남았다. 그 차이를 살펴보자.
성현(成俔, 1439~1504)이 지은 『용재총화(慵齋叢話)』에 나오는 고사이다.
“포은이 고려 말에 시중(侍中)으로서 충성을 다해 나라를 돕는 것을 자기의 일로 삼았다. 혁명할 즈음에 천명과 인심이 모두 새로운 왕을 추대하는 쪽에 있었지만, 공만 홀로 의연히 고려를 배반하지 못할 기색을 하고 있었다. 평소에 서로 잘 아는 스님이 있었는데, 공에게 말하기를, ‘시사(時事)를 알만한데, 공은 어찌 고집만 피우고 고생합니까?’라고 하니, 공은 ‘사직을 맡은 사람이 감히 두 마음을 가질 수 있겠는가? 이미 나의 처신이 정해져 있다.’라고 하였다.”
바로 여기서 ‘두 마음을 가질 수 없다’라는 표현은 앞의 ‘왕촉’의 말과 다르지 않아 『소학』의 이 말이 이미 확고한 신념이 되었다. 혹자는 정몽주가 위화도회군 이후의 정치 상황에 동조해 놓고, 혁명의 막바지에 와서 동참에 거부하는 일은 이율배반이라고 지적하지만, 적어도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는 그의 명분 자체는 설득력이 있다.
정몽주를 죽였다는 보고를 받은 태조는 화를 내며 아들에게 이렇게 탄식한다. 이정형(李廷馨)이 지은 『동각잡기(洞閣雜記)』에 보인다.
“우리 가문은 본래부터 충효로 이름났는데, 네가 마음대로 대신을 죽였으니, 남들은 내가 모르는 일이라 하겠는가? 부모가 자식에게 경서(經書)를 가르치는 까닭은 충신과 효자가 되기를 바란 일인데, 네가 감히 불효한 짓을 이처럼 하였으니, 내가 약을 먹고 죽어버리고 싶다.”
태조 역시 충효의 가치와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이 가치가 인륜의 근간이라는 점을 익히 알 수 있다. 역대 왕들도 비록 정치적 방향이 달라도 그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이(李珥 : 1536~1584)의 『석담일기(石潭日記)』의 기록이다.
“전에 김종직(金宗直)이 성종에게 아뢰기를, ‘성삼문이 충신입니다.’라고 하였더니, 성종이 놀라 낯빛이 변하므로, 종직이 천천히 아뢰기를, ‘불행히 변고가 생기면 신이 성삼문이 되겠습니다.’라고 하니, 성종의 안색이 펴졌다.”
성종은 수양대군의 후손이므로 당시 누구든 성삼문의 단종에 대한 충절을 입에 담는 일을 껄끄럽게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성종 자신도 성삼문처럼 자기에게 충성하는 신하가 있어야 한다는 점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길재는 정몽주처럼 죽임을 당하지도 또 스스로 죽지도 않았다. 『동각잡기』의 기록이다.
“길재는 공양왕이 즉위하자, 벼슬을 버리고 선산(善山)으로 돌아가 홀어머니를 봉양하였으므로 고을에서 그의 효성을 칭찬하였다. 태종이 그 소문을 듣고 길재를 불러 벼슬을 내리려고 하였으나 길재가 사양하며 말하기를, ‘저하께서 옛정을 잊지 못해 저를 부르셨는데 저는 벼슬할 뜻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태종이 말하기를 ‘자네가 말한 것은 불변하는 강상(綱常)의 도리이니, 의리는 빼앗기 어려운 것이다. 부른 사람은 나이지만 벼슬을 내리는 사람은 주상이니 주상께 사직함이 옳다.’라고 하자, 길재가 정종에게 사직하는 상소를 올려 말하기를, ‘신은 듣건대, 여인은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고 신하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바라건대 향리로 놓아 보내어 신이 두 임금을 섬기지 않으려는 뜻을 이루게 하여 주시고, 늙은 어미를 봉양하다가 여생을 마치도록 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정종이 그 절의를 가상히 여겨 예우하여 보내고, 뒤에 세종이 즉위하자 태종이 상왕으로 전교하기를, ‘길재가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하니 참으로 의로운 선비이다. 들으니 그에게 아들이 있다 하니 불러 벼슬을 주어 그 충의를 표창하라.’라고 하였다.”
길재의 말에서 『소학』을 소환하고 있다. 물론 왕도 자기 조정에 벼슬하지 않아도 그 뜻을 가상히 여기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것이 옳고 바른 길이라는 점을 익히 배워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도 하지만 충절은 신하에게 필요한 덕목이다. 바로 전통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 효도와 함께 없어서는 안 될 가치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정몽주와 길재의 차이는 무엇일까? 길재도 이미 고려가 망할 줄 알았다. 윤근수(尹根壽, 1537~1616)의 『월정만필(月汀漫筆)』에 이런 기록이 보인다.
“길재는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남의 도리를 이색(李穡)에게 물었다. 그가 대답하기를, ‘지금 시대에는 제각기 제 뜻대로 행할 뿐이다. 그러나 우리 대신들은 국가와 고락을 같이해야 하므로 떠나버릴 수 없지만, 너는 떠날 수 있다.’라고 하였다.”
당시 정몽주는 시중이라는 재상의 지위에 이르렀으므로 이색의 말대로 떠나서는 안 되고, 고려와 고락을 같이해야 했다. 만약 떠났다면 스스로 자기모순에 빠졌을 것이다. 고려 조정에서 녹을 먹고 높은 지위에 올랐으니, 그 조정을 위해 의리를 지키는 일은 도리상 옳다. 바로 여기서 죽을 줄 알면서 끝내 자기 태도를 버리지 않았던 일은 앞의 ‘왕촉’의 고사에 더 가깝다. 그가 옳다고 믿는 합당한 명분으로 역성혁명에 가담하지 않은 이상, 죽음은 이미 예고된 일이었다.
이런 모습에서 어떤 이념이나 가치가 사람의 태도를 확고하게 결정하는 힘이 크다고 하겠다. 당시 충절이 현실에서 그렇게 작용하였다.

충절은 사대부만의 전유물인가?

충절은 흔히 사대부에게 해당하는 일로 아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사대부가 아닌 사람이 실천하는 가치이기도 하였다. 윤기헌(尹耆獻, 1548~?)의 『장빈거사호찬(長貧居士胡撰)』에 환관 주처신(朱處臣)에게 술 취한 연산군이 춤을 추자고 협박해도 추지 않자, 팔과 다리를 차례로 잘라도 끝내 거절하므로 그를 호랑이 밥으로 던졌다고 한다. 그가 거절한 까닭은 자기가 모시는 군주에게 허물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고 전한다. 또 같은 책에는 하인의 충절도 등장한다.
“선비 박인수(朴仁叟)는 평양 사람으로 세종 때에 급제하였는데, 단종 복위 운동 때 죽었다. 그의 며느리가 홀로 죽지 않고 살아남았는데, 마침 임신 중이었다. 세조가 말하기를, ‘아들을 낳으면 죽여라.’라고 하였다. 그의 여종 한 사람도 임신 중이었는데 며느리에게 말하기를, ‘마님께서 딸을 낳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만약 둘 다 아들을 낳게 되어도 저의 자식으로 대신 죽음을 받게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윽고 주인은 아들을 낳고 종은 딸을 낳았다. 자식을 서로 바꾸어 종이 자기 자식이라 하였으니, 즉 지금 박충준(朴忠俊)은 바로 그의 후손이다. 대구에 산다.”
주인의 가문을 위해 자기 자식을 희생하려던 하인의 이야기이다. 그에게 강요한 것이 아니지만 하인이 스스로 그렇게 한 일은 주인에 대한 충성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충성의 가치가 하나의 사회적 문화로 작용한 사례이다.

충과 효의 갈등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다. 충절과 효도라는 두 가치가 갈등을 일으킬 때 무엇이 우선인가? 앞의 길재의 경우는 둘 다 지킬 수 있었지만, 정몽주의 경우는 만약 그때까지 부모가 살아있었다면 효도를 포기해야 한다. 사람이 살다 보면 가치 갈등을 많이 겪는다. 부모가 반대하는 사람과 혼인하려고 할 때도 그렇고, 직장 일과 가족 일의 갈등도 그러하다. 다음은 임진왜란 때 있었던 일로서 신흠(申欽, 1566~1628)의 『상촌잡록(象村雜錄)』에 보이는 고사이다.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이 성을 지키다가 죽었는데, 죽기 전에 자기 아버지에게 편지를 쓰기를, ‘외로운 성은 달무리처럼 포위를 당했고, 모든 고을은 빼앗겼으니, 군신(君臣)의 의리는 중요하고, 부자(父子)의 은혜와 정은 가볍습니다.’라고 하였다.”
일제 강점기 독립을 위해 부모와 가족을 돌보지 못하고 싸우신 분들이 모두 여기에 해당한다. 광복 후에도 친일파와 그 후손들은 잘살았지만, 독립운동가 출신들은 빈곤과 싸우며 제대로 대우받지 못했으니, 오늘날 가치관 혼란도 이와 무관하지 않으리라. 장차 나라가 위태로울 때 가족의 부양을 팽개치고 충성을 다할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누구에 대한 충성인가?

지금까지의 사례에서 보면 충절의 대상은 왕과 같은 한 개인만이 아니다. 여기서 충(忠)이 갖는 철학적 의미를 굳이 부연하고 싶지는 않지만, 일차적으로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져야 하는 마음가짐과 관련이 있다. 곧 주희(朱熹)가 주석했듯이 ‘자기를 다하는 것’이다. 그게 뭘까? 자기를 속이지 않고 그가 옳다고 믿는 바를 최선을 다해 실천하는 일이 곧 충이다. 충을 두 임금이나 두 주인을 섬기지 않는 데만 한정한다면 그 참된 의미를 상실한다.
현대의 어떤 일본 학자는 “주군이 주군답지 않아도 신하는 신하답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말이 일본의 전통에서는 강조되었다고 하는데, 일본의 신하는 주군답지 않아도 결코 떠날 수 없었다. 조선의 경우는 꼭 그렇지 않다. 『소학』에 “임금은 예의로 신하를 부리고, 신하는 충성으로 임금을 섬긴다.”라는 말이 있듯이 군신 관계에는 의리를 무척 강조하여, 그것을 위반하면 신하는 임금을 떠날 수 있고, 벼슬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일종의 계약 관계이다.
이때 선비들의 충이란 임금 개인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 대한 것이다. 이순신(李舜臣)의 충도 그렇고, 앞의 송상현(宋象賢)도 그렇고, 많은 의병도 그렇다. 전시가 아닌 평상시에도 공동체를 위한 충성은 발휘되었다. 허봉(許篈 : 1551~1588)의 『해동야언(海東野言)』에 보인다.
“허후(許詡)는 영의정 허조(許稠)의 아들로서, 대대로 충효 가문의 사람이다. 경기 감사로 갔는데, 그때 마침 큰 흉년이 들어서 백성은 굶어 죽을 지경이었으나, 수령들이 구제할 방법을 몰랐다. 허후가 글을 올려 한강의 창고 곡식을 풀어서 백성을 돕자고 청하였지만, 왕이 윤허하지 아니하자, 그는 대궐의 뜰에 엎드려 울부짖으며 애통해하였다. 그러자 그 좌우에 있던 사람도 따라서 흐느꼈다.”
이는 백성을 위한 충성이다. 그 충성이 바로 공동체의 안녕으로 이어진다. 허조만이 아니라 이런 종류의 충성은 매우 많다. 임금은 다만 공동체를 책임지고 대표하는 사람이므로 형식적으로는 그 대상이 된다. 오늘날도 기관장의 명을 따르는 일은 그 개인에게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 하는 일이다. 그래서 기관장의 부당한 명령이나 압박을 거부하는 일도 충성이다. 언젠가 어떤 공직자가 말하기를 “나는 조직에 충성하지 어느 한 개인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라고 했는데, 그도 충성의 의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조직이 과연 국민의 사랑을 받도록 탈바꿈하기 위해 그 자신이 얼마나 충성했는지 전혀 알려진 바 없다.

우리에게 ‘충’이란

삼국시대와 같은 고대에도 충절의 사례가 적지 않았다. 이로 보면 충절 또한 인간이 살아오면서 공동체의 유지와 번영을 위해 헌신해야 하는 보편적 가치임을 의식·무의식적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은혜와 보살핌이 없다면 충성도 요구할 수 없으니, 어디까지나 자발적인 행위였다. 다만 이것이 공동체가 아닌 한 개인의 야욕과 특정 집단을 위해 맹목적 충성으로 변질하였을 때 갈등과 분쟁이 생겼을 뿐이다. 안타깝게도 권력투쟁 현장에서 그런 사례를 자주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진정한 충성이 아니다.
현대의 우리는 국가공동체가 위기에 빠졌을 때 과거 의병이나 독립운동가처럼 목숨까지 내놓고 충성할 수 있을까? 어떨지 예단할 수 없으나 공동체에 대한 사랑은 이어지고 있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그런 충절의 에너지가 우리 민주주의가 위기에 봉착했을 때, 이를 지키려는 대다수 시민의 무의식 속에 면면히 이어져, 지금의 대한민국이 선진국 대열에 합류할 수 있었던 동력이라 믿고 싶다.

율곡의 개혁정책과 후세를 위한 저술

 

(12)율곡의 개혁정책과 후세를 위한 저술

강민우: 율곡 선생님이 벼슬길에 나가 활동하던 16세기 후반의 명종(明宗) 말기와 선조(宣祖) 때는 이미 선비들이 화를 당하는 사화(士禍: 士林의 禍)와 임금의 외척이 정권을 잡고 나라를 다스리던 세도정치(勢道政治)가 끝나고 사림(士林)이 정치의 중심세력이었던 사림정치시대였습니다. 이때는 훈구(勳舊)․외척(外戚)이 집권하는 동안 누적된 현실의 폐단을 해결하고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는 것이 당시 정치를 담당한 사림들의 당면과제였습니다.

율곡: 저는 당시의 당면과제로 경장(更張)을 주장하면서, 성리학이 추상적 관념체계에 안주하거나 예법의 형식적 절차에 집착한 것이 아님을 강조했습니다. 저의 경장론(更張論)은 성리학의 가치질서에 근거하여 사회적 이상을 추구하기 위한 하나의 구체적 현실정치입니다.

강민우: 이념과 현실의 일관적 인식이 조선사회를 이끌어가던 동력이었다는 말씀이십니다. 선생님의 경장론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말씀해주십시오.

율곡: 경장론은 정치․사회적 폐단이 누적되었을 때 나라의 정신과 문화를 일신해야 한다는 개혁안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저의 경장론은 현실의 당면과제로서 법과 제도의 개혁을 추구하면서도, 언제나 임금(君)과 백성(民)을 근본으로 하는 개혁을 전제합니다.

강민우: 제도개혁의 효율성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을 중시하는 정책이라는 말씀이시군요.

율곡: 저는 현실의 폐단에 눈을 뜰수록 그 해결의 근본에 해당하는 기강을 정립하고 공론을 확장시켜나갈 것을 강조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도덕을 근본으로 삼는 관점과 실무를 긴급한 과제로 인식하는 관점 사이에서 어느 한쪽에 기울어지기 보다는 양자의 통합을 추구했던 것입니다.

강민우: 당시 유학자들은 예학을 정립하여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의리론(義理論)을 강화하여 이념적 통합을 유지하려는 방향으로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성리학의 기본원리인 도덕적 내지 정신적 근본을 튼튼히 하는 사회체제를 유지하자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율곡: 사회현실의 모순이 갈수록 심화되고 성리학 이념의 대응논리가 한계를 드러내었을 때, 비록 소수이지만 조선후기 유학자들의 일부는 성리설이나 의리론에서 관심을 돌려 사회제도의 새로운 질서를 찾으려 했습니다. 이들이 이른바 ‘조선후기 실학’의 학풍을 형성하였던 것입니다.

강민우: 율곡선생님은 조선시대 성리학을 대표하는 탁월한 학자 중의 한 분입니다. 그러나 16세기를 살았던 선생님의 학문과 사상은 한국사상사의 한 장을 장식하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소중한 교훈과 의미를 남겨준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선생님의 학문은 성리학의 형이상학적 세계에 독자적이고 명석한 통찰을 발휘한 것으로 높이 평가됩니다.

율곡: 저는 결코 성리설의 분석에만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저는 인간 심성의 근원과 현상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인격형성의 방법과 인격의 이상형을 찾고자 했습니다. 인간의 인격적 역량을 확보하고, 나아가 사회현실 속에서 구체적인 당면문제를 해결하는 지혜와 방법에 주목했습니다.

강민우: 이 점에서 선생님의 학문은 관념적 성리학이 아니라 ‘실학적 성리학’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율곡: 사회를 이끌어가는 주체로서 인간의 역할을 중시하면서, 무엇보다도 인격의 모범형(또는 이상형)으로 선비의 이념을 실현하는 ‘참된 선비(眞儒)’를 추구했습니다. ‘참된 선비’란 “세상에 나아가면 한 시대에 도를 행할 수 있고, 물러나면 만세에 가르침을 베풀 수 있는”(「東湖問答」) 인격을 말합니다.

강민우: 스스로 성인이 되겠다는 결심으로 학문에 진력하고, 이 학문의 기반 위에서 당시의 조선사회를 도가 실현되는 이상사회로까지 끌어올려보겠다는 율곡선생님의 포부였다고 생각합니다.

율곡: 저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경연강의나 상소문을 올려 명종 임금과 선조 임금에게 이상사회에 대한 신념을 불어넣으려고 하였으며, 현실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노심초사 대책을 모색하였습니다.

강민우: 선생님은 그 시대에서 ‘참된 선비’의 인격이 지닌 의미를 밝혔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바로 ‘찬된 선비’의 한 모범을 이루었다고 하겠습니다.

율곡: 혼란과 부패에 빠져있는 나라의 기강을 세워야 한다는 근본과제를 위해, 무엇보다 나라의 근본인 백성들의 안정된 생활기반의 확보가 절실했습니다. 이를 위해, 저는 추상적 원칙론이 아니라 구체적 현실의 폐단이나 시급한 개혁과제(時務)를 제시하며, 동시에 법률과 제도의 수정이나 보완의 차원이 아니라 근본적 개혁을 추구하는 ‘경장’의 논리를 강조했습니다.

강민우: 선생님은 이러한 개혁의 과제를 역사적 사실을 통해 실증하고 경전의 이념을 통해 확인해나갔던 것입니다. ‘계승’과 ‘개혁’이라는 두 가지 과제는 어떤 사회 어떤 시대에서나 요구되는 주제이지만, 무엇을 계승할 것인지와 어떻게 개혁할 것인지를 판단하는 명확한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 바로 율곡정신의 빛나는 대목이라 생각합니다.

율곡: 저는 앞선 시대에 사회개혁을 통해 이상정치를 실현하고자 시도하다 좌절당한 조광조(趙光祖)를 ‘참된 선비’의 모범으로 삼고, 선비들이 정치의 주도적 역할을 하는 사림(士林)정치시대에서 다시 한번 정치개혁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현실과 관습에 안주하려는 임금과 신하들의 대세에 밀려 저 또한 좌절을 겪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강민우: 그래서 자신의 시대에 도를 행할 수 없다는 한계를 인식하고, 물러나 후학을 가르쳐 교육을 통해 만세에 가르침을 펴고자 하여, 해주(海州) 석담(石潭)을 중심으로 강학활동을 벌이셨던 것이군요.

율곡: 그때 제자들을 가르치는 강학활동만 하였던 것이 아닙니다. 저는 42세(1577) 때 해주에서 강학을 하면서, 한편으로 「해주향약」을 제정하여 백성들의 풍속을 교화하는 계몽활동을 하고, 다른 한편으로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저술하여 교육의 이념을 밝히고 학교제도의 기준을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나서 학문이 아니면 사람다운 사람이 될 수 없다. 이른바 학문이란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요즘 사람들은 학문이 일상생활에 있는 줄을 모르고 망령되이 높고 멀어 행하기 어려운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하여 특별한 사람에게 미루고 자기는 자포자기하니, 얼마나 가엾은 일인가.”(「擊蒙要訣序」) 학문이란 일상에서 인간의 도리를 밝히는 것일 뿐입니다.

강민우: 격몽요결에는 주로 어떤 내용이 담겨있습니까.

율곡: 격몽요결에서 가장 중요한 곳은 제1장의 ①뜻을 세우는 입지(立志)입니다. “처음 배우는 이는 먼저 뜻을 세우되 반드시 성인(聖人)이 될 것을 스스로 기약해야 하며, 조금이라도 자기 자신을 별 볼일 없게 여겨 그만두려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된다.…뜻을 세우는 것과 밝게 아는 것과 독실하게 행하는 것이 모두 나 자신에게 달려있으니, 어찌 다른 데서 구하겠는가.”

강민우: 선생님은 무엇보다도 학문의 출발점으로서 성인이 되겠다는 자기 목표를 정립할 것을 강조하십니다.

율곡: 그렇습니다. 이어서 ②‘옛 습관을 바꿀 것(革舊習)’, ③‘자신을 지킬 것(持身)’, ④독서(讀書), ⑤‘부모를 섬김(事親)’, ⑥‘상례제도(喪制)’, ⑦‘제사의례(祭禮)’, ⑧‘가정생활(居家)’, ⑨‘사람을 접대함(接人)’, ⑩‘벼슬살이(處世)’의 10장에 걸쳐 배우는 사람이 실천해야할 조목을 구체적으로 제시했습니다.

강민우: 격몽요결은 후세에 초학자들에게 널리 읽혔으며, 권시경(權是經)이 외숙인 조목(趙穆)에게 격몽요결을 드렸더니, 조목이 이를 읽고서 “이 책은 천하 만세에 행해질 만한 것이지, 어찌 동방에만 행해지고 말 책인가.”(趙穆, 「遺事」)라고 칭찬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은 격몽요결이 퇴계학파 안에서도 매우 중시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율곡: 저의 책이 인기가 있었나 봅니다.

강민우: 특히 선생님의 제자인 조헌(趙憲)은 격몽요결을 중시하여 항상 가지고 다녔으며, 길을 가다가 만나는 선비들에게 격몽요결을 보여주면서 “자신을 닦고 일에 대응하는 요령이 잘 갖추어져 있으니 선비로서 반드시 읽어야 한다”라고 하거나, 또한 밤을 새워 베껴서 책으로 전해주기도 하였다고 합니다.(「重峯行狀」) 후에 1788년 정조임금은 강릉에 보존되어 있던 선생님의 친필본 격몽요결을 보고 감동하여 친히 서문을 지은 일화도 전합니다. “이문성(李文成: 율곡)은 내가 존중하고 사모하는 분이다. 그 분의 전서(全書)를 읽고서 그 인품을 상상할 수 있었다. 요즈음 강릉에 그분이 손수 쓴 격몽요결과 남긴 벼루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얼른 가져다가 보았다. 점(點)과 획(畫)이 새롭고 시작과 끝이 한결같아 뛰어난 자품과 시원한 기상이 책을 펼쳐보는 순간 감지되어 이문성과 2백여 년의 시대차가 있다는 사실을 잊었다.”(「御製栗谷手草本擊蒙要訣序」) 이러한 사실은 격몽요결이 초학교육에 중요함을 정조임금에 의해 크게 인식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율곡: 과찬이십니다.

강민우: 선생님이 돌아가신 뒤에 선생의 학문과 덕망을 사모하여 황해도 지역에 많은 서원이 세워졌습니다. ①소현서원(紹賢書院)은 율곡선생이 해주 석담에 건립했던 강학처인 은병정사(隱屛精舍)를 모태로, 율곡선생 사후 2년 뒤(1586)에 김장생․박여룡 등의 문인들에 의해 세워진 서원입니다. 율곡선생을 배양한 최초의 서원이며, 지역의 이름을 따서 석담서원(石潭書院)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은병정사는 광해군 2년(1610)에 ‘소현서원’으로 사액되면서 율곡학파의 중심 서원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황해도 지역의 서원들은 소현서원을 모범으로 삼은 것이 많으며, 율곡선생을 모신 서원으로는 소현서원 이외에도 ②연안부(延安府)의 비봉서원(飛鳳書院), ③배천(白川)의 문회서원(文會書院), ④황주(黃州)의 백록서원(白鹿書院), ⑤안악(安岳)의 취봉서원(鷲峯書院), ⑥재령(載寧)의 경현서원(景賢書院), ⑦장연(長淵)의 용암서원(龍巖書院), ⑧송화(松禾)의 도동서원(道東書院), ⑨은율(殷栗)의 봉암서원(鳳巖書院), ⑩봉산(鳳山)의 문정서원(文井書院), ⑪문화(文化)의 봉강서원(鳳岡書院), ⑫서흥(瑞興)의 화곡서원(花谷書院), ⑬신천(信川)의 정원서원(正院書院) 등 13곳이 있습니다.
그밖에 경기도에는 ①파주의 율곡 묘소 아래 광해군 7년(1615)에 세운 자운서원(紫雲書院)과 ②풍덕(豐德)에 숙종 원년(1675)에 창건된 귀암서원(龜巖書院) 두 곳이 있습니다. 강원도에는 ①강릉에 인조 14년(1636)에 창건된 송담서원(松潭書院)이 있습니다. 충청도에는 ①황산(黃山)에 문인 김장생이 주도하여 세운 죽림서원(竹林書院)과 ②청주(淸州)에 선조 3년(1570)에 창건된 신항서원(莘巷書院) 두 곳이 있으며, 경상도에는 ①청송(靑松)에 숙종 24년(1678)에 창건하여 율곡을 주향으로 모시고 김장생을 배향한 병암서원(屛巖書院)이 있습니다. 또한 평안도에는 ①선천(宣川)의 문공서원(文公書院)과 ②숙천(肅川)의 덕수서원(德水書院) 두 곳이 있으며, 함경도에는 ①함흥(咸興)의 운전서원(雲田書院)이 있습니다. 전국에 모두 22곳 서원에서 주향이나 배향으로 제사를 드리고 있습니다.(「院享錄」)

율곡: 저를 기리는 서원이 전국에 이렇게 많을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정말 영광입니다.

강민우: 율곡선생님은 비록 49세라는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학자요, 정치가요, 외교가요, 교육자요, 행정가로서 한 시대를 이끌어가며 시대정신을 밝히신 분입니다. 저는 이제야 선생님께서 5천원권 지폐에 들어간 이유가 짐작됩니다. 지금까지 저의 두서없는 질문에 많은 가르침을 주신 율곡 선생님께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오늘의 질문은 여기까지로 하고 마치겠습니다. 다음에 또 다른 만남을 기약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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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세계-천지․만물․인간

 

(11)학문세계-천지․만물․인간

강민우: 율곡선생은 성을 기질 속에서 이해하니, 이것은 기(또는 기질)를 중시한다는 말의 다른 표현인 것처럼 보입니다. 먼저 기가 있어야 비로소 성이 기 속에 내재할 수 있을 테니 말이죠. 이러한 이유에서 율곡선생을 주기론(主氣論)으로 평가하셨던 것 같습니다. 율곡선생은 기(또는 기질)를 어떻게 이해하셨습니까.

율곡: 기질에는 바르고 치우친 차이(正偏), 통하고 막힌 차이(通塞), 맑고 탁한 차이(淸濁), 순수하고 잡박한 차이(粹駁) 등 다양한 차이가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기질이 지닌 성질의 차이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지극히 바르고 지극히 통하는 기질을 얻은 것은 천지입니다. 치우치고 막힌 기질을 얻은 것은 사물입니다. 또한 바르고 통하는 기질을 얻었으나, 동시에 맑고 탁하며 순수하고 잡박한 정도에서 무수한 차이를 보이는 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강민우: 인간이 바르고 통하는 기질을 얻은 것은 천지의 지극히 바르고 지극히 통하는 기질을 얻은 것과 비교하면, 수준의 차이가 보입니다. 인간의 수준이 천지의 지극함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말씀입니까.

율곡: 천지(하늘)와 인간 사이에 기질의 바르고 통하는 정도의 차이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기질이 바르다(正)는 온전성에서 하늘과 일치하며, 통한다(通)는 소통성에서 하늘과 일치합니다. 이것은 하늘과 인간이 소통하고 일치함을 기질에서 확인시켜주는 것입니다. 또한 만물의 치우치고 막힌 기질은 인간의 바르고 통하는 기질과는 분명히 구분됩니다.

강민우: 만약 ‘성이 기질과 분리될 수 없다’는 율곡선생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과 만물 사이에 기질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은 바로 성의 차이를 의미하는 것이겠습니다. 기질이 맑으면 기질 속에 들어있는 성도 기질에 가려지지 않고 잘 드러날 것이고, 기질이 탁하면 탁한 기질에 가려져서 기질 속에 들어있는 성도 잘 드러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율곡: 저는 기질의 차이와 더불어 그 성이 지닌 성격의 차이에 주목합니다. 천지는 기질이 지극히 바르고 지극히 통하므로 성도 정해져서 변하지 않습니다. 만물은 기질이 지극히 치우치고 지극히 막혔으므로 역시 성이 정해져서 변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인간은 바르고 통한 기질을 얻었으므로, 지극한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도 있고 지극한 수준으로 떨어질 수도 있는 가변적 존재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말한 “인간의 기질에는 맑고 탁하거나 순수하고 잡박한 정도에 다양한 차이가 있으므로 기질이 변할 수 있다.”(「答成浩原」)는 뜻입니다.

강민우: 결국 인간의 기질이 변한다는 것은 인간의 성(性: 성품)도 변할 수 있다는 말이겠습니다. 왜냐하면 성은 기질 속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인간이 지닌 기질 속의 성이 변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의 악한 현실을 반영하기 위한 설명이기도 하겠습니다.

율곡: 인간이 기질의 다양한 차이에 따라 성이 변할 수 있다면, 인간 사이에도 여러 차별상이 있게 됩니다. 저는 기질 속의 성이 지닌 차이에 따르는 인간의 차등에 주목합니다. 기질을 그릇에 비유하고 성을 물에 비유할 때, 성인은 깨끗한 그릇 속에다 물을 담은 경우이고, 중인(衆人: 일반인)은 그릇 속에 모래와 진흙이 있는 경우이며, 하등인은 진흙 속에 물이 있는 경우라 하겠습니다.(「論心性情」)

강민우: 율곡선생은 감정이 절도에 맞는지 여부도 성인․군자․상인(常人: 보통사람)이라는 인격의 차등을 구분하기도 하셨지요.

율곡: 성인은 감정이 절도에 맞지 않음이 없으며, 군자는 감정이 간혹 절도에 맞지 않으나 의식은 절도에 맞지 않음이 없으며, 상인(보통사람)은 혹은 감정이 절도에 맞으나 의식이 맞지 않기도 하고 혹은 감정이 절도에 맞지 않으나 의식이 절도에 맞기도 합니다. 제가 인격의 차등을 강조하는 것은 신분적 계급의 정당성을 옹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질의 자기변혁을 통한 인격의 향상을 추구하기 위한 것입니다.

강민우: 선생님은 짐승(禽獸)의 성에 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가졌었죠.

율곡: 물과 그릇의 비유에서 볼 때, 짐승의 성은 물과 결합된 진흙 덩어리로서 끝내 맑게 할 수 없는 경우입니다. 물에 비유된 짐승의 성은 이미 물기가 말라버린 진흙 덩어리이므로 맑게 할 수 없지만, 물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그 속에 물기가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짐승의 성은 마치 물기가 진흙으로 막혀있는 것처럼 기질에 막혀있지만, 성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論心性情」)

강민우: 선생님은 짐승의 성이 부분적으로 통하는 경우가 있지만, 인간처럼 기질과 그 성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고 보셨습니다.

율곡: 만물 가운데서 초목은 완전히 막혀있는데 비해, 짐승은 혹 한 가지 길에 통하기도 합니다. “범이나 이리에는 부모․자식의 친애함이 있고, 벌이나 개미에는 임금․신하의 관계가 있으며, 기러기에는 형제의 차례가 있고, 비둘기에는 부부의 구별이 있으며, 벌레는 때를 기다리는 믿음이 있지만, 모두 변하고 통할 수가 없습니다.”(「答成浩原」)

강민우: 18세기 초에 기호학파 안에서 ‘사람의 성과 사물의 성이 같은지 다른지’를 논변한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에서 보면, 율곡선생의 기질 속에서의 성에 대한 이해는 ‘인성과 물성이 다르다’는 이론(異論)의 입장을 취하는 듯합니다.

율곡: 동론이든 이론이든 중요한 것은 인간은 자신의 기질과 성을 변화시키는 수양의 실천과정이 요구된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천지나 만물과 달리, 성이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성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인간의 성을 변화시키는 주체는 바로 그 자신의 마음입니다. 마음은 ‘텅 비고 영명하며 환하게 밝아서(虛靈不昧)’ 모든 이치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탁한 기질을 맑게 하고 잡박한 기질을 순수하게 할 수 있습니다.

강민우: 그래서 선생님은 성학집요(聖學輯要)에서 기질의 차이에 따라 인간에게 나타나는 다양한 양상을 분석하고, 이에 따른 기질의 변화방법을 제시하였던 것이군요. 그 내용을 간단히 말씀해주십시오.

율곡: “‘기질이 맑고 형질이 순수한 자(氣淸而質粹者)’는 알고 행함을 힘쓰지 않고도 할 수 있으니, 더 이상 보탤 것이 없습니다. ‘기질이 맑고 형질이 잡박한 자(氣淸而質駁者)’는 알 수는 있지만 행할 수가 없으니, 몸소 행하는데 힘쓰기를 독실하게 하면 실천을 이루어 약한 자도 강하게 될 것입니다. ‘형질이 순수하나 기질이 혼탁한 자(質粹而氣濁者)’는 할 수는 있으나 알 수가 없으니, 학문에 힘쓰기를 반드시 정밀하게 하면 지식에 통달하여 어리석은 자도 밝아질 것입니다.”(聖學輯要)

강민우: 선생님은 인간의 기질을 세 가지로 구분하십니다. 첫째는 ‘기질이 맑고 형질이 순수한 자’로서 힘쓰지 않고도 알고 행할 수 있으니, 성인의 경지입니다. 다음으로 보통 사람에는 두 가지 양상이 있습니다. 하나, ‘기질은 맑으나 형질이 잡박한 자’는 지성이 뛰어나 알 수 있지만 의지가 약하여 실천할 수 없는 경우로서, 이때 행하는데 힘쓰면 실천을 이루어 유약한 의지도 강하게 바뀔 수 있습니다. 또 하나, ‘형질은 순수하나 기질이 혼탁한 자’는 의지가 강하여 실천할 수 있지만 지성이 약하여 알 수 없는 경우로서, 이때 배우는데 힘쓰면 지식이 성취되어 어리석은 자도 지혜롭게 바뀔 수 있습니다. 이처럼 율곡선생은 불완전한 기질을 변화시켜 나가는 방법을 다각도로 제시하셨습니다.

율곡: 비록 인간이 선을 지향하지만, 탁하고 잡박한 기질이 마음을 속박하고 물욕이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렇지만 성을 보존하고 기질을 교정하여 변화시키는 것은 인간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이때 자신을 변화시키는 행위를 ‘수양’이라고 합니다. 게다가 인간은 이러한 수양행위를 통해 ‘천지를 자리잡게 하고 만물을 양육하는(位天地育萬物)’ 이상적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강민우: 수양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주로 누구를 표준으로 삼습니까.

율곡: 성인은 하늘(天地)을 준칙으로 삼고, 중인(衆人: 보통 사람)은 성인을 준칙으로 삼습니다.(「答成浩原」) 중인의 수양방법은 성인이 이미 성취한 법도를 증험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인이 인격적 모범이 가야할 발자국을 남겨주었으므로, 중인은 하늘을 직접 마주하기 전에 자신보다 먼저 성취한 성인을 모범으로 삼고 이를 따라가는 실천이 요구됩니다.

강민우: 지금까지 율곡선생의 매우 독특한 개성과 선명한 인식을 보이는 심성론의 성격을 알아봤습니다. 그 특징을 간단하게 요약해주셨으면 합니다.

율곡: 저의 심성론은 무엇보다도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이론입니다. 리․기와 같은 추상적 관념론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매우 구체적인 방법으로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합니다. 인심도심론이나 사단칠정론과 같은 것도 공허한 논쟁을 일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현실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때문에 저는 하나의 통합된 인간의 주체로서 심성론을 이해합니다. 인간의 심성이 사단-칠정, 인심-도심, 본연지성-기질지성 등 이원론의 형식으로 갈라지는 것에 반대하고, 일원론의 통합적인 사유를 강조합니다.

강민우: 퇴계선생이 사단과 칠정을 각각 이발과 기발로 해석하는 즉 이발이기수지(理發而氣隨之)와 기발이이승지(氣發而理乘之)에 반대하고, 사단과 칠정 모두 기발 하나만을 인정하는 ‘기발이승일도(氣發理乘一途)’를 주장하셨군요.

율곡: 사단과 칠정이 구분되는 서로 다른 별개의 정이 아니라, 하나의 정이라는 것입니다. 정은 칠정 하나이며 그 가운데 선한 부분만을 지목하여 사단이라고 말할 뿐입니다.

강민우: 이러한 심성론은 그대로 수양론의 근거와 방법으로 연결되는 것이겠죠.

율곡: 저는 자신의 기질과 성품의 변화를 통하여 추구하는 이상적 인간상으로 성인(聖人)에 주목합니다. 수양론은 인간의 심성과 도덕 실천 사이의 중요한 연결고리입니다. 특히 의(意: 의식)는 대학의 성의(誠意)와 같은 수양론의 체계와 연결되며, 그 작업이 성학집요의 편찬체계에 자세히 나타나 있습니다.

강민우: 조선시대의 국시인 유교는 성리학을 그 철학적 기반으로 하며, 이 성리학은 16세기 중엽 퇴계선생과 율곡선생을 통하여 절정을 이루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일부에서는 성리학을 중세적 관념철학의 한 양상으로 규정하고 사회현실의 문제와 유리된 것으로 파악하려는 입장도 있습니다. 율곡선생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율곡: 한 시대의 사회이념으로 규정되었던 철학이 그 사회적 관심과 연결될 수 없다면, 올바른 해석의 태도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시대의 변화를 이끌어가기도 억제해가기도 하며, 그 시대의 사회의식을 형성했던 중추로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조선사회에서 성리학은 단순히 송대(宋代) 이기(理氣)철학을 되새김질한 것만이 아니라, 그 시대의 사회적 요구 속에서 전개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강민우: 선생님과 퇴계선생은 성리설에서 뚜렷한 입장 차이를 보여서 율곡학파(기호학파)와 퇴계학파(영남학파)라는 두 봉우리를 이루었지만, 그 성격은 시대현실 속에서 두 분의 고뇌와 사색을 통하여 발견했던 해답이라 할 수 있겠군요.

율곡: 퇴계선생이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의 입장에서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 즉 ‘이발이기수지(理發而氣隨之)’와 ‘기발이이승지(氣發而理乘之)’를 주장한 것도 거듭된 사화(士禍)를 거치는 시대 속에서 정의와 불의가 대립된 사회현실을 인식한 사실과 연관시킬 수 있습니다. 퇴계선생의 성리설에는 현실 속에 악의 문제를 외면할 수 없음에도, 악에 매몰되지 않는 순수한 선의 근원성을 확보하려는 의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강민우: 선생님이 퇴계선생보다 한 세대 뒤에 태어나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의 입장에서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주장한 것 역시 명종(明宗) 말기와 선조(宣祖) 초기에 훈구(勳舊)세력의 몰락과 더불어 새로운 사회의 가능성을 찾는 시대적 분위기와 연관시킬 수 있겠습니다.

율곡: “선비가 뜻을 펼 수 없을 때는 홀로 자신을 착하게 하고(獨善其身), 뜻을 펼 수 있을 때는 아울러 천하를 착하게 한다(兼善天下).”(맹자「진심상(盡心上)」)라는 맹자의 말처럼, 그 시대의 사회상황에 따라 삶의 태도가 결정됩니다.

강민우: 여기서 퇴계선생의 이원론적 입장이 ‘홀로 자신을 착하게 하는 것’에 속한다면, 율곡선생의 일원론적 입장은 ‘아울러 천하를 착하게 하는 것’에 속한다고 대조해 볼 수도 있겠습니다. 계절에 비유하면, 퇴계선생은 겨울에 해당하고 율곡선생은 봄에 해당할 것입니다. 겨울철에는 바깥 추위가 맹위를 떨치므로 더욱 단단히 생명을 감싸고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봄이 와도 씨앗의 껍질만 지키고 있다면, 생명은 위축되고 소멸될 위험이 있습니다. 이때는 오히려 껍질을 깨고 바깥세계에로 뻗어나가야 합니다. 바깥세계는 이미 생명의 적이 아니라, 자기실현의 무대인 것입니다. 이 바깥에서 햇볕과 물기와 영양소를 섭취해야 생명이 성장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성리설이 이원론이거나 일원론으로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시대적 전개과정에서 이원론일 수도 일원론일 수도 있는 것이겠군요.

율곡: 사회현실이나 시대상황이 철학적 입장에 영향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전적으로 결정을 준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 시대가 그 철학을 결정지은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정신이 현실을 파악하고, 이 현실과 이상을 조화시키는 방법으로서 철학(성리설)을 제기하였던 것입니다. ‘기발이승일도설’은 현실의 기가 리에 선행하는 것이라거나 기만이 작용하고 리는 무력하다는 것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기의 현실을 떠나서는 리의 실현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며, 모든 기의 작용 속에는 그 근거로서 리가 내재함으로써 리를 벗어나지 않는 기의 현실을 확립하려는 것입니다.

강민우: 18세기 조선시대 유학자 정약용은 “퇴계의 성리설이 인성론적이라면, 율곡의 성리설은 우주론적이다.”(與猶堂全書, 「理發氣發辨」)라고 하여, 두 입장을 대조시키기도 하였군요.

율곡: 퇴계선생의 이원론이 ‘현실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라면, 저의 일원론은 ‘현실을 개선하기 위한 것’으로 대조시키는 것이, 시대적 맥락에서 양자의 입장을 보다 연속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강민우: 선생님의 일원론은 이기론에 대한 형이상학적 규정이기도 하지만, 사회현실의 당위적 과제이기도 한 것입니다.

율곡: “리는 작용이 없고(無爲) 기는 작용이 있다(有爲)”는 관점에서 ‘기발이승일도설’을 주장한 것은 다양한 현상 속에 리(理: 이치)라는 근원성을 내재시키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회현실의 세찬 물길 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신념의 철학입니다.

강민우: 율곡선생님은 사회현실의 격류를 벗어나 강 언덕에 자리 잡은 것이 아니라, 그 격류 속으로 뛰어들어 물길을 바로잡음으로써 ‘리가 타고 있다’는 이승(理乘)의 과제를 실현하였던 것이군요.

율곡: 그렇다고 하겠습니다.

강민우: 선생님의 학문세계는 이 정도로 마치고, 이어서 개혁정책에 대해 여쭤보겠습니다.

율곡의 학문세계: 인심도심론과 사단칠정론

 

(10)율곡의 학문세계: 인심도심론과 사단칠정론

강민우: 이제부터는 율곡선생의 학문에 대해 여쭤보겠습니다. 율곡선생의 학문적 중심을 이루는 이론이 심성론(心性論)입니까.

율곡: 그렇습니다. ‘심성론’은 주자학의 기본 개념인 태극(太極)-음양오행(陰陽五行) 또는 리(理)-기(氣)의 사유구조에 근거하여, 심(心: 마음)․성(性: 성품 또는 본성)․정(情: 감정)을 해석하는 이론입니다. 특히 조선시대 성리학은 심성론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정밀한 토론을 전개하는 것을 학문의 핵심과제로 삼았습니다. 심․성․정의 개념을 리와 기에 분속시켜 해석하면서 주리설(主理說) 또는 주기설(主氣說)의 입장을 취하는 관념적 논쟁을 전개했습니다.

강민우: ‘주리설’과 ‘주기설’은 무슨 뜻입니까.

율곡: 성리학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리와 기의 구조로 설명합니다. 이때 리는 원리․이치 등에 해당하고, 기는 기질․형체 등에 해당합니다. 주리설(主理說)은 말 그대로 리를 중심으로 하여 해석한다는 뜻입니다. 물론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리와 기가 함께 있지만, 함께 있는 가운데 리가 주가 된다는 것입니다. ‘주기론’ 역시 마찬가지이니, 리와 기가 함께 있는 가운데 기가 주가 된다는 것입니다.

강민우: 리가 주가 되면 어떻고 기가 주가 되면 어떻습니까.

율곡: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심성론은 도덕적 주체로서 인간에 대한 이해를 추구합니다. 인간에 내재되어 있는 도덕적 근거를 인식하고, 도덕적 실천의 가능성과 방향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주리(主理)와 주기(主氣)와 같은 인식방법이 매우 중요합니다.

강민우: 결국 심성론은 ‘인간의 도덕실현을 위한 실천적 관심’에서 출발한 것이군요.

율곡: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강민우: 먼저 마음이란 무엇이며, 마음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궁금합니다.

율곡: 마음은 성(性: 성품)․정(情: 감정)․의(意: 의식)로 이루어진 하나의 통합적 주체입니다. 성․정․의가 모두 독립적 실체가 아니라 마음을 구성하는 하나의 양상입니다. “마음이 아직 발동하지 않은 상태를 ‘성’이라 하고, 이미 발동한 상태를 ‘정’이라 하며, 발동하여 헤아리는 것을 ‘의’라 한다.”(「答成浩原」) 마음은 성․정․의의 주체이므로 아직 발동하지 않거나 이미 발동하거나 헤아리는 것은 모두 마음입니다.

강민우: 성․정․의는 마음의 다양한 전개과정에서 드러나는 양상(모습)을 가리키는 말이겠군요. 마치 한 사람이 집에서는 가장이요, 직장에 가면 기능공이요, 상점에 가면 손님이 되는 것과 같은 의미라고 할까요.

율곡: 물론 성․정․의 사이에는 아직 발동하지 않는 것(未發)과 이미 발동한 것(已發)이라는 차이가 있고, 성에서 정․의로 발동하여 나오는 연속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정․의는 모두 마음이 드러내는 양상에 불과합니다.

강민우: 또한 율곡선생은 마음을 “성과 기질이 합하여 한 몸의 주재가 되는 것이다”(「人心道心圖說」)라고 정의하여, 마음과 몸의 관계를 이해하기도 하셨습니다.

율곡: 이때 ‘마음이 몸을 주재하고 몸이 마음의 주재를 받는다’는 인식은 마치 임금과 신하의 관계처럼 구별이 엄격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마음과 몸을 엄격하게 이원적으로 분리하는 것에 반대합니다. 실제로 몸(身)은 신체라는 부분적 의미와 함께 몸과 마음을 합친 전체적 의미를 지닙니다. 이 때문에 ‘주리’라고 하여 리(성)만을 중시하는 것에 반대한 것입니다.

강민우: 몸과 마음을 분리시키지 않고 하나의 통합된 구조로 인간존재를 이해한다는 말씀이십니까.

율곡: 그렇습니다. 이러한 일체성(또는 통합성)의 중시는 저의 성리설을 관통하는 관점입니다. 저는 리․기의 관계에서도 “리와 기는 본래 합치된 것이요, 처음 합하는 때가 있지 않다. 리와 기를 둘로 보려는 것은 모두 도(道)를 알지 못하는 자이다.”(「答成浩原․理氣詠呈牛溪道兄」)”라고 했습니다.

강민우: 이것은 바로 리․기가 서로 분리되지 않고, 마음(心)․몸(身)이 서로 떨어져있는 것이 아니며, 성․정․의가 독립된 존재가 아님을 강조하는 일원론의 입장이라는 말씀이군요.

율곡: 임심(人心)․도심(道心) 역시 마음의 작용이 지향하는 가치에 따른 차이이지, 인심과 도심이 두 마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강민우: 그렇지만 주자는 “마음은 하나인데, 성명(性命)의 올바름에 근원하기도 하고, 형기(形氣)의 사사로움에서 생겨나기도 한다.”(「中庸章句序」)라고 하여, 인심과 도심의 관계에서 성명과 형기, 올바름(正)과 사사로움(私)이라는 대립된 구도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율곡: 마음이 발동할 때에 도덕적 가치를 위하여 발동하는 것을 ‘도심’이라 하고, 신체적 욕구를 위하여 발동하는 것을 ‘인심’이라 하여, 대립적 가치의식을 내포합니다. 그럼에도 인심과 도심은 “처음부터 두 마음이 아니요, 다만 발동하는 자리에 두 단서가 있을 뿐입니다.”(「人心道心圖說」) 다시 말하면, 인심과 도심은 마음의 독립된 두 존재양상이 아니라, 두 가지 상반된 가치에로 지향하는 것일 뿐입니다.

강민우: 인심과 도심은 마음이 지향하는 방향이 바뀌는데 따라 언제든지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바뀔 수 있다는 말씀이군요. 인심이었다가 도심이 될 수 있고, 도심이었다가 인심이 될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율곡: 이것이 바로 ‘인심과 도심이 서로 시작과 끝이 된다’는 인심도심상위종시설(人心道心相爲終始說)의 내용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성명(性命)의 올바름에서 곧바로 나왔으나 혹 따르지 못하고 사사로운 생각이 사이에 끼어들면, 이것은 도심으로 시작하였다가 인심으로 끝맺는 것이다. 형기(形氣)에서 나왔으나 그릇됨을 알고 욕심을 쫓지 않으면, 이것은 인심에서 시작하였다가 도심으로 끝맺는 것이다.”(「答成浩原」) 인심이 도심으로 바뀌거나 도심이 인심으로 바뀔 수 있는 근거는 의식(意)을 통해 헤아리고 판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강민우: 그래서 율곡선생께서 “인심과 도심은 정․의를 포함하여 말한 것이다.”(「答成浩原」)라고 하여, 심․성․정 외에 ‘의’를 강조하셨군요.

율곡: ‘의(의식)’의 기능인 헤아림이 인심과 도심을 자각하고 서로 변하게 하는 근거가 됩니다. 형기의 사사로움을 지향하는 ‘인심’도 성명의 올바름을 지향하는 ‘도심’에 상반되지 않도록 제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을 다스리는 과제입니다.(「人心道心圖說」). 올바른 가치를 지향하는 도심은 지켜야 하며 확충시켜야 합니다. 그러나 욕심에 빠지기 쉬운 위태로운 인심은 정밀하게 살펴야 합니다. 이때 정밀하게 살피는 것이 바로 의(意)의 작용입니다. 정밀하게 살피는지 여부에 따라 인심․도심의 상태는 상반된 결과를 초래합니다. 마음이 형기의 작용을 지각하고 자세히 살펴서 올바른 이치를 따르게 하면, ‘인심이 도심의 명령을 듣는’ 결과를 낳고, 정밀하게 살피지 못하고 마음이 지향하는 데로 맡겨두면 ‘인심은 더욱 위태롭고 도심은 더욱 미약하게 되는(人心愈危, 道心愈微)’ 결과를 낳습니다.

강민우: 인간은 대상적 가치가 다른 만큼 마음의 지향이 인심과 도심으로 갈라져 나타나는 것은 필연적인 현상이지만, 그럼에도 마음은 인간의 주체이므로 자신의 마음을 대상에 지배되도록 맡겨두어 악(惡)에 빠지게 해서는 안된다는 말씀이군요.

율곡: 그렇습니다. 심성론에서 인심도심설의 출발점과 귀결점은 바로 올바른 가치를 지향하고 사사로운 데 빠지지 않도록 마음을 다스리는데 있습니다. 여기서 저는 ‘도심으로 절제하여 인심이 도심의 명령을 듣는 조건’에서는 인심과 도심이 하나로 일치하는 것임을 강조합니다.

강민우: 인심․도심은 그 정도로 하고 사단칠정론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율곡: 마음이 사물에 감응하여 발동하면 정(情: 감정)이 되는데, 이것은 아직 발동하기 이전의 상태인 성(性: 성품)이 발동하여 정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마치 나무에서 땅 속의 뿌리와 땅위의 가지 사이의 관계처럼, 한 마음에서 성이 발동한 것이 정이요, 모든 정은 성에 근본을 두는 일체입니다. 또한 이때의 정에는 맹자「공손추상(公孫丑上)」에서 말한 ‘측은․수오․사양․시비의 사단(四端)’과 같은 도덕적 감정이 있고, 예기「예운(禮運)」에서 말한 ‘희․로․애․락․애․오․욕의 칠정(七情)’과 같이 일반적 감정이 있으나, 모두 성에 뿌리를 둡니다.

강민우: 사단이 선한 정을 가리키는데 비해, 칠정은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는 정을 모두 가리키니, 결국 둘은 도덕적 가치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는 말씀이군요. 사단과 칠정은 무엇을 말하는지 그 구체적 내용에 대해 궁금합니다.

율곡: 측은(惻隱)은 불쌍히 여기는 정이고, 수오(羞惡)는 자신의 잘못을 부끄러워하거나 남의 잘못을 미워하는 정이며, 사양(辭讓)은 말 그대로 양보하거나 사양하는 정이고, 시비(是非)는 옳고 그름을 판별할 줄 아는 정을 말합니다. 또한 희(喜)는 기쁨, 노(怒)는 분노, 애(哀)는 슬픔, 구(懼)는 두려움, 애(愛)는 사랑, 오(惡)는 미움, 욕(欲)은 욕심을 말합니다.

강민우: 율곡선생은 사단과 칠정의 관계를 어떻게 보셨습니까.

율곡: 저는 사단과 칠정의 관계를 두 방향으로 갈라져 나간 대립적 감정이 아니라, 칠정 가운데서 선한 감정만을 가리켜서 ‘사단’이라 하는 하나의 정으로 파악합니다. 실재하는 감정은 칠정 하나이니, 사단과 칠정은 모두 하나의 근원인 성(性: 성품)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성이 발동하여 정으로 드러나는 과정에서, ‘절도에 맞느냐 절도에 맞지 않느냐’에 따라 선악의 차이를 드러낼 뿐입니다.

강민우: 이것이 퇴계선생의 사단칠정론과 분명한 차이를 보이는 곳이겠군요.

율곡: 사단․칠정의 정을 이기론(理氣論: 리와 기의 형식)으로 설명할 때, 퇴계선생은 사단을 ‘리가 발동하고 기가 따르는 것(理發而氣隨之)’이라 하고, 칠정을 ‘기가 발동하고 리가 타고 있는 것(氣發而理乘之)’이라 하여 사단=이발, 칠정=기발이라는 대립관계로 이해합니다. 이것을 칠대사(七對四)라고도 부릅니다. 이와 달리, 저는 사단․칠정이 모두 ‘기가 발동하고 리가 타고 있는 것(氣發理乘一途)’이라 하여 칠정이 사단을 포괄하는 포섭관계로 이해합니다. 이것을 칠포사(七包四)라고도 부릅니다.(「答成浩原」)

강민우: 율곡선생은 인간 감정의 통합성에 주목하여 인간의 감정이 둘로 갈라져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겠요. 이러한 통합적 사고는 리와 기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율곡: 리와 기의 성격을 규정하여 “발동하는 것은 기이고, 발동하게 하는 것은 리이다”(「答成浩原」)”라고 하여, 비록 리와 기가 개념적으로 서로 구별되지만 실제로 분리될 수 없는 일체임을 강조합니다. 다만 선악의 문제에서 보면, 리는 순수한 선(理本純善)으로 도덕적 기준이 되지만, 기는 맑거나 탁한 차이가 있으니(氣有淸濁), 리의 순수한 선을 그대로 실현시키기 어렵습니다. 리를 깨끗한 물에 비유하면, 기는 깨끗하거나 더러운 물그릇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기(또는 기질)는 리를 담는 그릇이다.”(「人心道心說」)

강민우: 선과 악이 갈라지는 원인은 기가 발동할 때에 기의 맑고 탁함에 따라 달라지는데, 이때 맑은 기가 발동하면 선이 되고, 탁한 기가 발동하면 악이 된다는 말씀이군요. 여기에서 선악의 조건으로 기의 맑음과 탁함의 문제가 제기된다는 말씀이십니다.

율곡: 저는 선악의 도덕성은 인간의 판단과 선택으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가지는 기질의 조건에 주목합니다. 예를 들어 사물의 경우는 막히고 치우친 기질이 고정되어 있어서 변화시킬 수 없으나, 오직 사람만은 마음이 ‘텅 비고 영명하며 밝아서(虛靈不昧)’ 기질의 맑거나 탁함 또는 순수하거나 잡박함(淸濁粹駁) 따른 차이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강민우: 여기에서 율곡선생은 수양의 방법으로서 ‘기질을 교정하여 바로잡는’ 교기질(矯氣質)의 이론을 제시하셨군요.

율곡: 저는 ‘교기질’의 방법을 마치 어린아이가 거문고를 익히는 것에 비유합니다. 처음 어린아이가 거문고를 탈 때는 그 소리를 듣기가 매우 괴롭겠지만, 쉬지 않고 노력하여 음률을 이루고 마침내 지극한 경지에 이르면, 그 소리가 맑고 조화로워서 말할 수 없이 아름답게 됩니다.(聖學輯要)

강민우: 인간이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 자신의 탁하고 잡박한 기질을 맑고 순수하게 바로잡으면, 선한 도덕성과 밝은 지혜를 발휘할 수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율곡: 또한 인간의 존재는 기질로 형성되며, 성은 바로 하늘의 이치(理)가 인간의 기질 속에 부여된 것입니다. 기질에서 보면 심(心: 마음)․성(性: 성품)․정(情: 감정)이 모두 기질이지만, 이치에서 보면 어떤 기질에도 그 근거로써 이치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성에 대해서도 본연지성(本然之性: 본연한 성품)과 기질지성(氣質之性: 기질 속의 성품) 사이의 관계를 사단과 칠정의 관계와 같은 구조로 이해합니다. 실재하는 성품은 ‘기질지성’이며, 그 속에서 오로지 이치만을 가리킨 것(單指)이 바로 ‘본연지성’입니다.

강민우: 율곡선생은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기질 속에 성이 함께 갖추어져 있다’는 기질 속에 성을 포괄하고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군요.

율곡: 저는 기질을 그릇에 비유하고, 성을 물에 비유합니다.(「論心性情」) 실재하는 인간의 성은 마치 그릇에 담긴 물처럼 기질 속에 들어있는 것으로 이해함으로써 기질과 성의 통합된 모습을 강조합니다. 다시 말하면, 기질의 변화를 통하여 선의 실현을 추구함으로써 도덕적 책임을 지는 주체적 인격성을 강조합니다.

율곡이 당대 인물을 평하다

 

(9)율곡이 당대 인물을 평하다

강민우: 선생님은 퇴계를 만나 가르침을 받기도 하고 스승으로 존경하기도 하면서 퇴계의 학문(성리설)과는 다른 입장에 서 있었던 만큼, 비판적 견해도 드러냈던 것으로 보입니다.

율곡: 저는 35세(1570) 때 퇴계선생이 돌아가시자, 그의 인물에 대해서는 “성품은 온순하고 옥처럼 순수하였다.…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남과 사양하거나 받아들임의 절도에서는 털끝만큼의 어긋남도 없었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학문에 대해서는 “의리가 정밀하여 한결같이 주자(朱子)의 가르침을 따랐고, 여러 학설에 두루 밝아 널리 통달함을 얻었다.”(경연일기)라고 하여, 그의 온화하고 겸허한 풍모와 의리에 어긋남이 없는 강직한 지조를 높이 평가했습니다.

강민우: 선조 임금 즉위 초에 이상정치(至治)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퇴계선생이 임금의 덕을 성취시켜야 한다는 것이 선비들의 중론이었고, 선조 임금도 퇴계선생을 불렀으나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때 율곡선생은 퇴계선생에 대해 ‘실제로 한 시대의 정치를 이끌어가기에는 역량이 부족하다’고 비판했다지요.

율곡: 이때 저는 “퇴계는 스스로 재주와 지혜가 큰 일을 감당할 수 없으며, 또한 쇠퇴한 시대에 선비가 일하기 어렵다고 여기고서 작록(爵祿: 벼슬과 녹봉)을 사양하고 물러나고자 하였으나, 임금의 마음을 다스려 보겠다는 정성이 부족하다.”(경연일기)라고 했습니다. 퇴계선생이 물러나기를 힘쓴 것은 겸양의 뜻이 아니라, 실제로 임금의 마음을 다스려보겠다는 정성이 부족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강민우: 그럼에도 선생님은 퇴계와 조광조를 크게 높이셨다지요.

율곡: 저는 43세(1578) 때 해주 석담에 은병정사(隱屛精舍)를 짓고 주자의 사당을 세웠습니다. 이때 저는 “우리나라에서 도학을 제창하고 요순(堯舜)시대와 같은 이상정치를 자신의 책임으로 삼은 사람으로는 정암(조광조)과 같은 이가 없으며, 주자문하의 이루어진 법도를 지키면서 몸소 행하고 마음으로 터득하여 후생의 모범이 된 사람으로는 퇴계(이황) 같은 이가 없다.”(「연보」)라고 하여, 주자의 사당에 조광조와 퇴계를 배향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강민우: 또한 조광조와 퇴계를 문묘(文廟: 공자의 신위를 받드는 사당)에 종사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셨고요.

율곡: 성균관의 유생들이 상소하여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이언적․이황 등 다섯 현인을 문묘에 종사하기를 청하였을 때, 선조 임금은 경솔히 결정할 수 없다고 보류하였습니다. 이때 저는 “고려왕조에서 종사할만한 사람으로는 정몽주(鄭夢周) 한 사람뿐이다. 설총(薛聰)․최치원(崔致遠)․안향(安珦)은 도학에 관계가 없으니, 이 세분은 다른 곳에서 제사지내는 것은 옳지만 문묘에 배향함은 잘못이다.…오직 조광조는 도학(성리학)을 제창하여 후인들을 이끌었으며, 퇴계는 의리에 침잠하여 일대의 모범이 되었으니, 이 두 분만 종사하고자 하면 누가 불가하다고 하겠는가.”(경연일기)라고 하여, 조광조와 퇴계를 이 시대 도학을 대표하는 인물로 강조했습니다.

강민우: 그러면서도 퇴계는 독창성이 부족하다고 지적하기도 하셨죠.

율곡: 퇴계선생은 성현의 말씀을 준수하고 실행한 자이지만, 그가 스스로 발견한 곳은 보이지 않습니다. 서경덕(徐敬德)은 자기의 견해는 있으나, 그 한 쪽만을 본 자입니다. 결국 우리나라 도학의 시조로서 조광조를 들 수 있으며, 퇴계는 학문적 규모를 갖추었지만 독창성이 결여되었고, 서경덕은 독창적이지만 부분에 한정되는 한계를 지녔습니다.

강민우: 율곡선생은 조광조를 최고의 인물로 평가하시는 듯합니다.

율곡: 퇴계선생은 이 시대 유가의 종주(宗主)로서, 조광조 뒤로는 그에 비할 사람이 없습니다. “퇴계의 재주와 역량은 조광조를 따르지 못하나, 의리를 깊이 연구하여 정밀함을 다한 것에서는 조광조가 그를 따르지 못할 것입니다.(경연일기)”

강민우: 재주와 역량에서는 조광조가 퇴계를 앞서지만, 의리와 정밀함에서는 퇴계가 조광조를 앞선다는 말씀이시군요.

율곡: 저는 조광조의 제자 백인걸(白仁傑)에게 “자품(資稟: 타고난 성품)을 논하면 조광조가 월등히 낫지만, 조예(造詣: 지식이 깊은 경지에 이름)로 말하면 퇴계가 낫다”(경연일기)”라고 하여, 조광조와 퇴계 사이에 도량과 학문에서 각각 장단점이 있음을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강민우: 명나라 때 대표적인 학자 나흠순(羅欽順)과 퇴계, 그리고 서경덕의 관계에 대해서는 비교를 하셨더군요.

율곡: 퇴계선생은 나흠순의 학설이 주자와 다르다고 비판하였지만, 저는 나흠순의 학설이 창의적이라고 좋아했습니다. 제가 친우 성혼(成渾)에게 보낸 편지에서 “요사이 정암(나흠순)․퇴계(이황)․화담(서경석) 세 선생의 학설을 보니, 정암이 최고요, 퇴계가 다음이며, 화담이 그 다음이다. 그 중에 정암과 화담은 ‘스스로 깨달은 맛(自得之味)’이 많고, 퇴계는 ‘본받는 맛(依樣之味)’이 많다.”(「答成浩原」)라고 하여, 학설의 우열을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퇴계는 ‘본받는 맛’이 많으므로 그 말이 구애가 있고 조심하였으며, 화담은 ‘스스로 깨달은 맛’이 많으므로 그 말이 즐겁고 호방하였다. 조심하였기 때문에 실수가 적고 호방하였기 때문에 실수가 많으니, 차라리 퇴계의 ‘본받음(依樣)’을 취할지언정 화담의 ‘스스로 깨달음(自得)’을 본받아서는 안된다.”(「答成浩原」)라고 하여, 이들의 학문적 특징과 한계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기도 했습니다.

강민우: 이러한 율곡선생의 평가에 대해, 조선 말기 율곡학파의 학자인 김평묵(金平默)은 “퇴계의 학문은 매우 순수하고 정대한데, 그 이유로는 정자․주자를 독실히 믿고서 벗어나지 않는데 있다. 만약 중국에 있었다면 마땅히 이동(李侗: 주자의 스승)과 진덕수(陳德秀: 주자의 제자) 사이에 있을 것이니, 어찌 나흠순과 같이 논할 수 있겠는가.”(金平默, 「大谷問答」)라고 하여, 나흠순보다 퇴계가 월등하게 뛰어남을 강조하였습니다.

율곡: 이것은 주자의 이론체계와 일치할 것을 중시하는 김평묵의 입장과, 주자의 이론체계에 대해 창의적으로 해석할 것을 중시하는 저의 입장적 차이를 보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강민우: 선생님은 조식(曺植, 1501~1572)에 대해서도 그 지조와 기상은 높지만, 학문이나 세상을 경륜할 역량은 부족하다고 비판하셨습니다.

율곡: 저는 영남의 강우(江右)지역을 대표하는 유학자 조식에 대해서는 “조식은 세상을 피하여 홀로 서서 뜻과 행실이 높고 깨끗하니, 진실로 한 시대의 일민(逸民: 학문과 덕행이 있으면서도 세상에 나오지 않고 묻혀 지내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학문과 저술을 보면 실제로 체득한 견해가 없고, 상소한 것을 보아도 역시 세상을 경륜하고 백성을 구제하는 방책은 못된다. 이로 보아 비록 그가 세상에 나왔다고 하더라도, 능히 나라를 다스렸다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문인들이 그를 추종하여 도학군자(道學君子)라고 하는 것은 실상에 지나친 말이다.”(경연일기)라고 평가했습니다.

강민우: 또한 기대승(奇大升, 1527~1572)에 대해서도 높은 기개는 인정하면서 자만에 빠져 남을 용납하는 덕이 없다고 비판하셨다지요.

율곡: 김계휘가 기대승이 어떤 사람인지 물었을 때, 저는 “기대승은 한 세상을 덮을 듯하니 역시 비상한 선비이다. 다만 자부함이 너무 지나쳐 겸허하게 남을 받아들이는 의사가 없어 반드시 사림(士林)의 지지를 받지 못할 것이니, 어떻게 큰 일을 할 수 있겠는가.”(경연일기)라고 평가했습니다. 또한 기대승의 학풍에 대해서도 “널리 읽고 잘 기억하여 담론하면 온 좌중을 굴복시켰다.…그의 학문은 박식함에 힘쓸 뿐이고 마음을 다잡고 실천하는 공부는 없다. 이기기를 좋아하는 병통이 있으며 자기에게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선비와 화합하지 못하고 아첨하는 자가 많이 따랐다.”(경연일기)라고 하여, 독선이 강한 인물로 평가했습니다.

강민우: 때문에 백인걸(白仁傑) 역시 기대승에 대해 “자신감이 너무 지나쳐서 반드시 나라 일을 그르칠 것이다”라고 평가했던 것이겠습니다. 기대승이 죽었을 때 어떤 사람이 “사문(斯文: 유교)이 불행하여 이 사람이 갑자기 죽었다”라고 하자, 율곡선생은 “사문이 다행하여 기대승이 일찍 죽었다”라고까지 심하게 말씀하셨군요.

율곡: 한마디로 저는 기대승과 성리설에서 일치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그의 인물에 대해서는 상당히 거부감을 가졌습니다.

강민우: 퇴계의 대표적 제자인 유성룡(柳成龍, 1542~1607)에 대해서도 학식과 언변이 뛰어나지만 공사(公私)의 분별이 확실하게 못하다고 비판하셨죠.

율곡: 저는 유성룡에 대해 “재주와 식견이 있으나, 다만 한 마음으로 공무를 받들지 못하고 때로는 이해관계를 돌아보는 뜻이 있다.”(경연일기)”라고 평가했습니다. 언제가 저는 “유성룡이 재주와 기개는 참으로 아름답지만,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시기하는 병통이 있어서 나와 함께 일하려 하지 않는다. 우리 무리가 죽고 나면 반드시 그 재주를 인정할 것이다”라고 말한 적도 있습니다.

강민우: 유성룡은 율곡선생의 탁월한 식견에 시기심을 가져 살았을 때는 반대하다가 죽은 다음에야 율곡선생의 선견지명을 칭찬했다는 것이군요. 실제로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후에, 유성룡이 나라 일을 담당하면서 율곡선생의 선견지명과 재능을 칭찬했다지요. 이 말을 듣고 율곡의 친우 성혼(成渾)은 “유성룡은 본래 그러하다. 그가 어찌 율곡의 어짊을 몰랐겠는가. 다만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싫어해서 죽은 뒤에 인정하는 것이니, 그것이 무슨 도움이 있겠는가.”「연보초고」)라는 기록도 있습니다.

율곡: 이와 유사한 일을 남명(曺植)이 시로 읊기도 했습니다.

사람이 바른 선비 좋아하는 것이 人之好正士,
호랑이 가죽 좋아하듯 하네. 好虎皮相似.
살았을 때는 죽이려 들다가 生前欲殺之,
죽은 뒤에야 아름답다 일컫는구나. 死後方稱美.

강민우: 율곡선생은 당대의 인물에 대해 매우 폭넓은 평가를 남겨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평가하다보면, 그 사람의 단점에 대한 평가가 상대방에게 너무 아프게 주어질 수도 있으며, 또한 객관적인 평가에 엄격할수록 온전한 사람이 남아 있기가 참으로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군왕에서부터 초야의 선비에 이르기까지 앞 시대의 인물과 당대의 인물에 대한 폭넓은 평가는 율곡선생의 업적 가운데 하나라 하겠습니다.

황주 기생 유지(柳枝)를 사랑하다

 

(8) 황주 기생 유지(柳枝)를 사랑하다

강민우: 선생님은 밤낮으로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였던 정치가요, 자신을 닦고 학문을 연마하였던 학자였지만, 또한 벗과 어울려 술과 유람을 즐기고 꽃과 자연을 사랑하였던 시인이기도 하였다고 들었습니다.

율곡: 저는 술을 마시고 방탕하게 취하는 일은 없으나, 반가운 벗들과 어울려 술잔을 기울이며 시를 읊는 운치를 즐깁니다.

강민우: 선생님은 꽃에 대해서도 세심한 애정을 보이셨지요.

율곡: 진(晉)나라 때 유명한 시인 도연명(陶淵明)이 사랑했던 국화꽃에 애정을 가졌으며, 술잔에 국화꽃잎을 띄우고 지었던 시가 있습니다.

서리 속의 국화를 사랑하기에 爲愛霜中菊,
노란 꽃잎 따서 술잔에 가득 띄웠네. 金英摘滿觴.
맑은 향기 술맛을 돋우고, 淸香添酒味,
수려한 빛깔 시인의 정취를 적셔주네. 秀色潤詩腸. (「泛菊」)

강민우: 서리 속에 핀 국화를 보면서 국화의 꽃잎을 술잔에 담아 함께 마시다가, 국화꽃의 맑은 향기에 도취되어 시적인 정취가 솟아난 것으로 보입니다.

율곡: 저는 도연명이 국화 꽃잎을 따며 읊었던 시나, 굴원(屈原)이 국화꽃을 맛보았다는 시를 생각하면서, 국화와 정담을 나누었던 것 같습니다.

강민우: 꽃은 아니지만 ‘말을 알아듣는 꽃(解語花)’으로 일컬어지는 것이 기생입니다. 율곡선생이 황해도 황주(黃州) 기생 유지(柳枝)와 얽힌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사실입니까.

율곡: 제가 39세 10월부터 40세 3월 사이에 황해도 관찰사로 있는 동안, 황주로 순찰을 나갔을 때 기생 유지를 처음 만났습니다. 유지는 선비의 서녀(庶女: 첩의 딸)로서 어머니가 기생이어서 기생이 되었는데, 당시 16세가 채 못되는 어린 기생이었습니다. 유지는 잠자리도 제공하는 방기(房妓)로 와서 저를 모셨는데, 참으로 자색이 고왔습니다.

강민우: 그 뒤로 율곡선생님이 원접사(遠接使)로 사신을 맞이하러 지나가는 길이나, 둘째누님을 뵙는 일로 황주를 왕래할 때면, 유지가 언제나 선생님을 모시고 싶어했다지요.

율곡: 제가 촛불을 밝히고 더 이상 가까이 하지는 않았지만, 「유지사(柳枝詞)」를 지어주면서 은근하게 정(情)을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강민우: 후인들은 이러한 율곡선생의 태도에 대해 ‘사이좋게 어울리면서도 방탕하지 않았다’고 평하기도 합니다.(李有慶; 「遺事」) 유지에 대한 기록은 율곡문집에 실려 있지 않지만, 후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논의한 일이 있습니다. 박세채(朴世采)에 따르면, “율곡이 47세 때 원접사로 황주에 도착했을 때 황주 군수가 유지라는 재주와 자색이 뛰어난 기생을 침실로 보냈는데, 율곡은 유지에게 ‘너의 재주와 자색을 보니 매우 사랑스럽지만, 다만 한번 사사롭게 만나면 의리상 마땅히 데리고 살아야 하니, 이것은 내가 할 수 없다’라고 하면서 내보냈다고 한다. 그 후에 율곡이 해주에 살 때 유지가 밤중에 멀리서 찾아왔는데, 율곡은 「유지사」 한편을 지어주고 물리쳤다”는 내용입니다.

율곡: 그런 소문이 있었군요. 사실 저는 40세의 중년으로 16세의 어린 유지를 처음 만났을 때 시를 지어주었고, 48세 때에도 24세의 성숙한 유지를 앞에 두고서 밤새 정담을 나누며 「유지사」와 3편의 시를 지어주었습니다. 그 가운데 첫째 수의 시를 한번 읊어보겠습니다.

타고난 자태 가냘퍼 선녀처럼 어여쁘고, 天姿綽約一仙娥,
십년을 알고지내니 정분도 깊어졌네. 十載相知意態多.
오(吳)땅 소년처럼 마음이 목석같아서가 아니라, 不是吳兒腸木石,
다만 병든 쇠약한 몸이라 향기로운 꽃 사양하네. 只緣衰病謝芬華. (「제목없음」)

강민우: 이 시를 보면 율곡선생이 유지를 깊이 사랑하셨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 시도 율곡문집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았지만, 당시에 율곡선생의 친우들 사이에는 잘 알려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율곡선생의 유지와의 사랑에 대해서는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이어서 율곡선생께서 당대의 인물들에 대해 다양한 평가를 하셨다고 들었는데, 그 내용에 대해 여쭤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