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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와 로맨스

선비와 로맨스

인간의 욕망과 ‘내로남불’

오늘날 정치 현장에서 여야 정당이 서로 비판할 때 자주 사용하는 말 가운데 ‘내로남불’이라는 것이 있다. 곧 ‘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불륜이다.’라는 말을 가리킨다. 로맨스는 대체로 청춘 남녀가 꿈꾸는 일이지만, 때로는 기혼자들 사이에서도 벌어진다. 해서 오래전부터 소설과 영화와 드라마의 소재였다. 그것은 인간 삶의 동력이자 에너지로서 욕망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이에 딱 맞는 적당한 일화가 있다. 성현의 『용재총화』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옛날에 어떤 기생이 어버이를 여의고 절에서 여러 기생과 함께 재(齋)를 올렸다. 한 젊은 스님이 채소를 썰다가 문득 벽에 기대어 섰기에, 주지 스님이 그 까닭을 물었다. 그가 말하기를, ‘아름답게 단장한 기생들을 보니 마음이 산란하고, 정이 발동하여 참을 수 없어 그럽니다.’라고 하자, 주지 스님이 말하기를, ‘쓸데없는 소리 마라. 오늘 기생의 재에 누군들 정이 움직이지 않겠느냐?’라고 하였다.”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욕망이 일어남은 당연한 일이다. 『필원잡기』에 정몽주도 일찍이 “여색을 좋아함은 인지상정이다. 공자께서도 말하기를, ‘(수양하기를) 아름다운 여색을 좋아하는 것처럼 하라.’라고 하셨으니, 공자도 여색이 좋음을 알지 못하였던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남녀의 연애 사건으로서 로맨스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으나, 이 또한 사회 질서를 위한 적절한 규범이 있으니 함부로 할 수 없는 문제였다. 더구나 성리학에 종사하는 선비로서는 하나의 경계의 대상으로서 금기였을 것이다. 결국 이 문제는 도덕적 관념과 본능 사이에서 다양한 변주가 생길 수밖에 없다. 조선 선비들의 삶 속에서 어떻게 표출되고 있는지 살펴보자.

가장 손쉬운 로맨스 대상

조선의 사대부라면 집안에 노비라고 부르는 하인 또는 종이 적게는 한두 명 많게는 수십 명씩 거느리고 산다. 노비도 재산처럼 물려받고 물려주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예쁘고 젊은 여자 하인은 간혹 주인의 첩이 되기도 했다.
아무리 거느리던 여자 종을 사랑한다고 해서 첩으로 삼는 문제는 단순하지 않았다. 부인이 묵인하거나 허락해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마저도 적당한 명분, 가령 본부인에게 아들이 없다거나 병이 있거나 늙어 부부생활이 곤란할 때 가능했다. 그렇지 않고 일방적으로 첩을 들였다간 갈등을 피할 수 없고, 그 피해는 젊은 첩이 고스란히 떠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사랑하는 젊은 하인을 첩으로 맞이하기 위해 모종의 꼼수를 부리기도 하였다. 권별의 『해동잡록』에 보이는 권람(權擥, 1416~1465)의 일화가 그것이다.
“권람에게 젊은 여자 하인이 있었는데, 태도와 얼굴이 뛰어나게 아름다워 그는 늘 마음속에 그녀를 품고 있었으나, 부인이 무서워 감히 어찌하지 못하였다. 한명회에게 그 일을 상의하니, 그가 말하기를, ‘상사병을 앓는 것처럼 하자.’라고 하였다. 권람이 그의 말처럼 하고 있는데, 한명회는 밤중에 몰래 와서 회화나무꽃 삶은 물을 전해주며, 온몸에 이것을 발라 황달 증상같이 만들게 하였다. 며칠 후에 또 한명회가 와서 울며 말하기를, ‘내 친구가 죽겠구나. 맥박은 느리고 기운이 이렇게 약해서야 금방 곧 쓰러지겠구나. 부인은 어찌 한 젊은 여종을 아껴 주인의 목숨을 살리지 않는고?’라고 하였다. 부인이 곧 알아차리고 드디어 날을 택하여 여자 하인을 첩으로 삼았다. 다음날 한명회가 다시 가니, 권람이 말하기를, ‘대사는 이미 이루어졌다.’라고 하고, 둘이 서로 낄낄대고 웃었다.”
한명회는 계유정난을 모의하여 수양대군을 왕으로 만든 책략가이다. 친구가 사랑하는 젊은 여종을 첩으로 만든 술책이었다. 아마도 부인이 모르는 척 속아주었을 것이다. 그래도 이 정도는 귀여운 일이고, 무리하게 젊은 여종을 첩으로 만든 경우는 허다하다. 가장 손쉬운 로맨스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쉬운 대상은 기생이었다. 남녀유별 사회에서 기생만은 드러내 놓고 남성과 어울릴 수 있었다. 그런데 기생이라고 해서 모두가 아무 남성과 사랑을 나누지 않았다. 대표적인 경우가 황진이였고, 그녀처럼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하고만 로맨스를 이루려는 기생도 있었다. 그 사례가 『용재총화』에 보인다.
“손님을 거절하였다는 이유로 볼기를 맞은 수원 기생이 여러 사람에게 말하기를, ‘어우동(於宇同)은 음란한 짓을 좋아하여 죄를 얻었는데, 나는 음란하지 않다고 하여 죄를 얻었으니, 조정의 법이 어찌 이처럼 다른가?’라고 하니, 듣는 사람들이 모두 옳은 말이라 하였다.”
이 기생은 춘향처럼 아무에게나 몸을 허락할 수 없다는 의지가 있는 듯하다. 하지만 모든 기생이 이렇지는 않았다. 대다수는 권력과 재력이 있는 사대부의 첩이 되어 안정적 삶을 누리는 것이 꿈이었다.
한편 기생을 첩으로 맞아들일 형편이 안 되었던 선비들 가운데는 그 헤어짐을 못내 아쉬워하거나 그리워하기도 하였다. 『해동잡록』의 사례이다.
“박신(朴信)이 일찍이 관동안렴사(關東按廉使)가 되어 강릉 기생 홍장(紅粧)을 사랑했었는데, 강릉 부윤 조운흘(趙云仡)이 거짓으로 홍장이 벌써 죽었다고 전하니, 박신은 슬픈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였다. 조운흘이 박신을 초청하여 경포대에 나가 놀았는데, 몰래 홍장을 단장시키고 그림을 그린 배를 준비시켰다. 그리고는 처용(處容)을 닮은 아전과 홍장이 거기에 탔다. 그 배가 천천히 포구로 들어와 물가에 돌아다니니, 조운흘이 박신에게 말하기를, ‘이 땅은 옛날 신선의 유적이 있어, 지금도 신선이 오가는 일이 있습니다. 혹 꽃핀 아침이나 달 밝은 저녁이면 사람이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바라볼 수는 있어도 가까이하지는 못합니다.’라고 하니, 박신이 말하기를, ‘산천은 이와 같고 풍경이 특이하다.’라고 하면서, 눈물을 글썽거리며 자세히 배 안을 보니 곧 홍장이었다. 온 좌석이 크게 웃으며 즐겁게 놀다가 파했다.”
상대를 그리워하는 남성을 놀려주기 위한 계책이었다. 관리로서 외지에 나가 기생과 사귀는 일이 흔했다. 능력이 있으면 첩으로 데리고 왔었지만, 대부분 아쉬움만 남기고 헤어졌다.

순간의 로맨스 그리고 약속과 배신

한순간 욕정에 못 이겨 상대 여성을 범하고 팽개치는 일은 진정한 로맨스가 아니다. 사실 ‘춘향전’도 그것을 경계한다. 또는 처음부터 그럴 의도는 없었으나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 사례도 있다. 『용채총화』의 일화이다.
“홍재상(洪宰相)이 아직 이름이 알려지지 못한 때였다. 길을 가다 비를 만나 조그만 굴속으로 달려 들어갔더니, 그 안에 집이 있고 17~18세 정도의 어여쁜 여승이 홀로 앉아 있었다. 공이 ‘어째서 홀로 앉아 있느냐?’라고 물으니, 여승은 ‘세 여승과 같이 있사온데 두 여승은 양식을 탁발하러 마을로 내려갔습니다.’라고 하였다. 공은 마침내 그 여승과 정을 통하고 약속하기를, ‘아무 달 아무 날에 그대를 맞아 집으로 돌아가리라.’라고 하였다. 여승은 이 말만 믿고 매양 그날이 오기를 기다렸으나, 그날이 지나가도 나타나지 않자 마음에 병이 들어 죽었다. 공이 나중에 남쪽 지방의 절도사가 되어 진영(鎭營)에 있을 때, 하루는 도마뱀 같은 조그만 동물이 공의 이불을 지나가니, 곁에서 모시던 아전이 그것을 죽여버렸다. 다음날에도 조그만 뱀이 들어오므로 아전은 또 죽여버렸다. 또 다음날에도 뱀이 방에 들어오니 공은 비로소 전에 약속했던 여승의 화신이 아닌지 의심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위세를 믿고 아예 없애버리려고 명하여 죽여버렸더니, 이 뒤로는 매일 올 뿐만 아니라, 나올 때마다 몸뚱이가 점점 커져서 마침내 큰 구렁이가 되었다. 공은 군영에 있는 모든 군졸을 모아 칼을 들고 사방을 둘러싸게 하였으나 구렁이는 여전히 포위를 뚫고 들어왔다. 군졸도 들어오는 대로 다투어 찍어버리거나 장작불 가운데 집어던졌다. 하지만 그래도 없어지지 않았다. 이에 공은 구렁이를 함 속에 넣어 방 안에 두고, 낮에 변방을 순행할 때도 함을 짊어지고 앞서가게 하였다. 그러다가 공의 정신이 점점 쇠약해지고 얼굴빛도 파리해지더니 마침내 병들어 죽었다.”
전설 같은 이 이야기를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르겠으나, 어떤 사실과 경계하는 일이 잘 배합된 이야기로 보인다. 조선 시대 여승은 억불정책의 여파로 하찮은 존재였다. 아무리 하찮은 존재라도 로맨스는 신중해야 하고, 한번 한 약속은 꼭 지켜야 한다는 교훈이 들어 있다. 사대부들의 비뚤어진 하룻밤 풋사랑을 경계하였다.

삼각관계

흔히 로맨스를 거론할 때 삼각관계가 등장한다. 한 사람을 두고 두 사람이 경쟁할 때 벌어지는 일이다. 조선 시대에도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고 심지어 송사까지 이어지는 일도 있었다. 이런 인간사가 어딘들 없겠는가? 먼저 『해동잡록』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옛날에 한 중신(重臣)이 변방에 장군으로 나가서 무뢰배 한 사람을 데려다가 막하(幕下: 주장이 거느리는 사람)로 삼자 사람들이 그것을 이상히 여겼다. 얼마 안 되어서 무뢰배가 가벼운 군율을 범하니 담당 장수가 심문하고 장군에게 품의(稟議)하였더니, 장군이 판결하기를 ‘극형에 처하라.’라고 하였다. 그가 물러나 방문 밖에 서서 혹시 다른 분부라도 있을까 하여 기다리고 있는데, 마침 장군이 장막 안에서 옆으로 돌아누우면서 하는 말이, ‘에이! 고약한 놈이로고. 저 젊은 놈이 나의 사랑하는 여자를 훔쳤지.’라고 하였다.”
사실 그 무뢰배는 장군의 연적이었다. 아마도 곁에 두고 감시할 의도로 그 무뢰배를 막하에 두었던 모양이다. 가벼운 군율로 극형에 처하는 것도 연적임을 반증한다.
한편 삼각관계의 압권은 대윤(大尹)과 소윤(小尹)의 싸움이 한창일 때 윤원형의 당이었던 임백령(林百齡)과 윤임 사이의 일이다. 저자 미상의 『을사전문록(乙巳傳聞錄)』의 사례이다.
“임백령이 윤임과 한마을에 있으면서 일찍이 기생 옥매향을 두고 서로 다투었다. 임백령이 질투하고 미워하여 윤임을 역모로 몰았으니, 을사년의 화는 여기에서 출발한다. 또 윤임을 죽인 뒤에 그의 처첩을 종으로 만들어 공신들에게 나누어 줄 적에, 임백령이 옥매향을 자기의 종으로 삼기를 원했으니, 마침내 그의 계책을 이룬 것이다. 세상에서는 이 일로 더욱 그의 간사하고 악독함을 분하게 여겼다.”
삼각관계의 연적이 정치적 투쟁과 복수의 동기 가운데 하나로 이어진 사건이다.

여색을 멀리하는 사람

그런데 로맨스고 뭐고 아예 병적으로 여성을 멀리한 사람도 있었다. 무슨 곡절이나 사연이 있을 것이지만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엄숙한 도덕의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해당하는 사람의 성격 또는 취향이다. 이는 여러 선비의 말에 보이는데, 김정국(金正國, 1485~1541)은 “남녀의 정욕은 타오르기 쉽고 막기 어려운 것이니, 마땅히 근신해야 할 일은 이보다 더한 것이 없다.”라고 하였고, 강희맹(姜希孟, 1424~1483)은 “남녀가 한 방에 자주 있으려고 하면 음란의 해가 심하다.”라고 하였다.
또 『용재총화』에도 여러 사례를 섞어 소개한다.
“음식과 남녀는 사람들의 큰 욕망인데도 지금 여자를 모르는 사람이 셋 있다. 제안(齊安)대군은 참으로 아름다운 아내를 두었으나 항상 말하기를, ‘부녀자는 더러워서 가까이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하여, 부인과 마주 앉지 않았다. 생원 한경기(韓景琦)는 한명회의 손자인데, 마음을 닦고 성품을 다스린다는 구실로, 문을 닫고 홀로 앉아 그 아내와 서로 말한 일이 없었다. 간혹 여자 하인의 소리라도 들리면 막대기를 들고 내쫓았다. 김자고(金子固)에게는 외아들이 있었는데 어리석어서 콩과 보리를 구별하지 못하고, 남녀의 일도 알지 못하므로 자고는 그 후손이 끊어질 것을 염려하였다. 그 일을 아는 여자를 단장시켜 함께 자게 하고 남녀의 정을 가르치려 하니, 그 아들은 놀라 상 밑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그 뒤에는 족두리 쓴 여자만 보면 울면서 달아났다.”

삶의 에너지로서 욕망의 분출과 그 처리

조선 선비들의 로맨스의 특징은 혼인 전의 젊은 청춘의 그것이 아니라 대체로 기혼자 남성 중심으로 벌어진 일이다. 그 원인 가운데 하나는 대개 부모가 정해준 사람과 혼인해야 했으니 각자의 취향과 무관한 일이어서, 부부생활에 완전히 만족할 수는 없어서이다. 그래서 그 대상이 주로 기생이었고, 다음으로 거느리던 여자 하인이다. 기생은 오늘날 연예인과 매춘부를 포함한 그 범위가 넓었는데, 분 바르고 눈썹 짙게 그리며 시와 음악과 춤에 능했으니, 적어도 재주와 외모상 자기 부인과 비교가 안 되었을 것이다. 젊은 여자 하인은 나이 든 부인보다 젊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로맨스로 곤경에 천한 일도 잦아 파란만장한 인생의 무늬를 더했다.
아무튼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남성 중심의 일방적 로맨스이다. 외견상 부창부수(夫唱婦隨)라는 도리 또는 ‘음을 누르고 양을 돕는’ 억음부양(抑陰扶陽)의 문화 속에서 여성이 적극적으로 나오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대상인 여성이 지체 높은 양반의 첩이라도 되면, 약간의 신분 상승과 아울러 안정적 삶을 누릴 수 있어서, 완전히 일방적인 강요만이라고 할 수 없다. 선비들의 로맨스는 남성의 적극적 ‘대시’와 여성의 수동적 ‘기대’ 속에 양자의 욕망이 적절히 섞이면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물론 음란과 색욕을 경계한 선비들도 있어서, 수양하여 불미스러운 일에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욕망을 억제하든 거기에 빠지든 결국 인간의 본능을 어떤 방식으로 처리하느냐의 문제이고, 그것은 해당 제도와 문화가 어디까지 허용하느냐 또는 무엇을 귀하게 여기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남녀의 문제는 강력한 삶의 에너지를 분출한다. 어떤 이념이나 제도로 막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어서, 욕망의 적절한 배출구가 필요하다. 과거의 풍습을 전근대적 악습이라고 비판하기에 앞서, 왜 그것을 묵인했는지 통찰이 필요하다. 현대의 우리는 또 다른 이념에 사로잡혀 그걸 억압하고 있지 않은지, 아니면 그걸 비웃기라도 하듯 그때보다 더 문란하지 않은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조선 최고의 술꾼

조선 최고의 술꾼

한국인의 음주문화

인류가 언제부터 술을 마셨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역사적으로는 기원전 3150년경 부장한 포도주 단지가 이집트 파라오의 무덤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니, 그 역사가 깊어 그보다 오래전부터 마셨을 것이다. 세계에서 술을 많이 마시는 나라 가운데서 한국을 제외한다면 우리나라 주당들이 매우 섭섭하겠다. 2017년 기준으로 한국인이 한 달에 한 번 이상 폭음한 비율만 봐도 남자는 52.7%, 여자는 25.0%로 높은 편에 속한다고 한다.
하기야 우리 고대 역사에서부터 제천의식 후의 음주 가무가 있지 않았던가? 게다가 유교가 들어온 후 제사 뒤에 마시는 음복도 음주문화에 한층 이바지했을 것이다. 최근 한국인의 일상과 문화 코드를 조사한 연구에 따르면, 성인 한국인이 즐기는 것에는 나이와 상관없이 ‘음주·가무’가 가장 빈도수가 높았다는 점은 우리의 문화 유전자 속에 그것이 뿌리 깊게 박혀 있다고 하겠다. 그래서 술집이나 노래방이 성행하고, 코로나19 유행에도 그곳이 전파의 매개가 되기도 하였다.
이는 우리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라 조선 시대에 외국인들도 그렇게 생각했다. 서거정의 『필원잡기』에 따르면 이렇다.
“유구국(琉球國)의 사신이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조선에 와서 놀라운 일 세 가지를 보았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사신을 접대하는 관원이 큰 술잔으로 셀 수 없이 대작하여 한 섬의 술을 마실 수 있었으니, 세 번째로 놀라운 일이었다.’라고 하였다.”
그것만이 아니다. 술은 집에서나 관청에서나 마셨던 모양이다. 이이의 『석담일기』에 따르면 “강사상(姜士尙)이 죽었다. 그는 집에 있으나 관청에 있으나 하는 일 없이 단지 술 마시기만을 좋아하였다.”라는 기록이 그것이다.
술은 분명 좋은 점이 있으나 과하면 좋지 않으니 양면성이 있다. 좋아하더라도 경계해야 할 대상이 음주이다. 조선 전기 음주문화와 그 실태를 살펴보고, 오늘날의 경계로 삼아보자.

누가 최고의 술꾼일까?

『대동야승』에는 음주 관련 기록도 꽤 등장한다. 음식에 대식가가 있는 것처럼 술에도 대단한 술꾼들이 있었다. 우선 『필원잡기』의 기록을 보면 수양대군의 수하였던 홍윤성(洪允成)은 주량이 커서 종일 마셔도 취한 적이 없었고, 또 성현의 『용재총화』에서는 그가 날마다 잔치를 벌였는데, 초대받은 사람들이 그의 위력에 눌려 만취하여 말을 거꾸로 타고 집에 돌아갈 지경이었다고 전한다.
이 홍윤성에 못지않은 사람도 있었다. 같은 책에 등장하는 홍일동(洪逸童)이 그 주인공이다.
“홍일동이 일찍이 진관사(眞寬寺)에서 놀 적에 떡 한 그릇과 국수 세 주발과 밥 세 바리때와 두붓국 아홉 주발을 먹었다. 산 밑에 이르니 대접하는 사람이 있어, 또 찐 닭 두 마리와 물고기국 세 주발과 생선회 한 쟁반과 술 마흔 잔을 먹으니, 보는 이들이 대단하게 여겼다. 하지만 평상시에는 단지 미숫가루와 전술[물 타지 않은 술]을 먹을 뿐이고 밥은 먹지 않았다. 뒤에 홍주(洪州)에 가서 폭음 뒤에 죽었는데, 사람들은 배가 터져 죽었다고 의심하였다.”
아무리 많이 먹어도 배가 터질 일은 만무하고, 술로 인해 죽었을 것이다. 이 홍일동 다음이라고 말하면 섭섭할 인사가 또 있다. 홍일휴(洪日休)가 그 주인공이다. 성현의 『용재총화』에 실려 있다.
“그는 중국어에 능통하여 여러 번 북경에 왕래하였다. 일찍이 사신이 되어 남방으로 갔다가 하룻저녁에 술을 여러 말[斗] 마시고 그만 죽었다. 김수온(金守溫)이 그를 슬퍼하여 시를 지어 추모하기를,

실컷 마실 때는 천 잔의 술을 중히 여기고 痛飮千杯重
덧없는 인생은 한 털만큼 가볍다. 浮生一羽輕

라고 하였다.”
앞의 두 분 모두 폭음으로 목숨을 잃었다. 또 평소의 과음으로 죽은 이도 있다. 앞의 같은 책에 보인다.
“이효식(李孝植)은 민보익(閔輔翼)과 한 동리에 살았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모여 취하도록 마셨다. 두건이 벗어져 맨머리가 되면서도 매일 술 마시자고 약속하였다. 민보익은 황달에 걸려 얼굴이 먹처럼 시커멓게 되었는데도 되레 술을 끊지 않아, 내가 늘 책망하였다. 민보익은 근무 중에 몰래 술을 마시면서 판서가 알지 못하도록 당부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죽었다. 이효식은 몹시 슬퍼하다가 민보익이 죽은 지 며칠 안 되어 죽었다. 두 분은 술을 삼가지 아니하여 서로 이어서 세상을 떠나니, 술이 사람에게 끼친 화가 심각하다.”
요즘 식으로 보면 음주로 인한 지방간에서 간경화로 진행하여 황달이 온 모양이다. 그래도 마셨으니 어찌 살겠는가? 같이 술을 마신 사람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그래서 과음은 언제나 경계의 대상이다. 좀 기이한 사례이지만 술이 세면 독약에도 잘 죽지도 않은 모양이다. 그 일화는 이중열(李中悅, 1518~1547)의 『을사전문록(乙巳傳聞錄)』에 등장한다.
“임형수(林亨秀)의 주량이 한이 없었다. 사약을 내렸을 때 독약을 넣은 술을 열여섯 주발까지 먹어도 취하지 않았다. 다시 더 독한 술 두 주발을 먹어도 취하지 않으므로, 이에 목을 매어 죽였다. 그 고을 사람들이 울며 이르기를, ‘공의 억울함을 천지신명까지도 알아주어 공이 잠깐이라도 이 세상에 머물게 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모두 술이 센 분들이다. 필자는 여기서 누가 최고의 술꾼인지 판단하기 힘들다.

술을 진정으로 사랑한 분들

사대부들이 술을 마실 때는 대체로 시와 음악과 춤과 기생이 빠질 수 없었다. 그것들은 묶어 실행하는 한 세트였다. 하지만 음주 자체만 즐기는 분들도 있었다. 권별이 『해동잡록』의 기록이다.
“윤회(尹淮)는 성품이 술을 좋아하였다. 한 번은 집에서 잔뜩 취해 있는데 세종이 급히 부르기에 주변 사람들이 부축해 일으켜 말에 태웠으나 취하여 깨지 않았다. 하지만 임금의 앞에 이르자 조금도 취한 기색이 없었고, 교지(敎旨)를 기초하라고 명령하니 붓 놀림이 나는 것 같았다. 모두 임금의 뜻에 맞아 참으로 천재라고 하였다. 세종께서 그 재주를 아껴 술을 마실 적에는 석 잔을 넘지 못하도록 명하였다. 그 뒤로부터 공은 반드시 큰 그릇으로 석 잔을 마셨다.”
술을 많이 마셔도 제 할 일을 잘한 경우이다. 술을 마시는 일을 그만두게 할 수 없어 석 잔만 마시라 하니, 큰 잔으로 대체한 그것을 누가 말리겠는가? 이륙의 『청파극담』에도 술을 좋아하는 이가 등장하는데 정인지(鄭麟趾)가 그 주인공이다.
“정인지가 일찍이 말하기를, ‘술은 노인의 젖이다. 곡식으로 만들었으니 마땅히 사람에게 유익할 것이다. 내 평생에 밥을 먹을 수 없었으니, 술이 아니었더라면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있을까?’라고 하였다. 서달성(徐達城)과 이평중(李平仲)과 손칠휴(孫七休)도 또한 술로써 밥을 대신했다. 오장(五藏)의 강약이 다르고, 또 술도 술술 들어가는 곳이 따로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술을 마시는 사람은 반드시 술에 지게 되어, 술을 끊으려 하여도 끊지 못하고, 술기운이 없게 되면 다시 마시어 정신이 이미 안에서 사라진다.”
술을 밥처럼 먹는 사람들을 소개하고, 알코올 중독을 경계하였다. 또 욕심을 버리고 평생 술만 마시고 간 사람도 있다. 정홍명(鄭弘溟, 1592~1650)의 『기옹만필(畸翁漫筆)에 보인다.
“윤광계(尹光啓)는 남도의 문사이다. 한평생 시와 술로 즐기며 명예나 재물에는 담담하였다. 일찍이 벼슬을 따라 도성 안으로 들어와서 인왕산 아래에 집을 짓고, 꽃을 심고 약초를 기르면서 조금도 풍진 세상의 기운이 없었다. 날마다 그의 외사촌 정봉(鄭韸)과 이웃에 살며 서로 마주 앉아 술을 들면서 세월을 보냈다. 이웃에 술집이 있었는데 날마다 가져다 마시되 값을 묻지 않았고, 술집 주인 역시 언제 갚을지 묻지 않았다. 그러다가 배가 남쪽에서 쌀을 싣고 강가에 와 닿으면, 쌀을 술집에 보내면서 수효를 계산하지 않았다. 정봉은 세상일과 인연을 끊고 문밖을 나서지 않았다. 윤광계가 세상을 떠난 후 그는 살맛을 잃고 병과 술에 잠겨 있다가 겨우 60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임종 시에 술을 가져오게 하여 멀거니 보다가 작은 술잔을 못마땅하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이 늙은이가 한평생 이것만을 좋아했는데, 지금 떠나가면서 어찌 한 방울만 마시겠느냐?’라고 하며, 다시 큰 술잔을 가져오게 하여 두 잔을 마신 뒤 쓰러져 베개를 벤 채 가고 말았다.”
정말로 술을 좋아한 사람들이다. 특히 벼슬까지 마다하고 술과 함께 유유자적한 삶, 죽는 순간에도 두 잔을 연거푸 마셨으니 정말로 술을 사랑했다고 하겠다. 술꾼들은 흔히 술에 대한 무용담(?)을 자랑하곤 하는데, 이 정도가 돼야 그래도 진정한 술꾼이라 하지 않겠는가? 술집에서 외상도 문제 삼지 않고, 갚을 때도 값을 따지지 않았다니 알만하지 않은가? 하지만 단순히 술이 좋아서 마신 것이 아니라 건강을 위해 마시는 사람도 있었다. 같은 책에 보인다.
“김영휘(金永暉)는 한평생 문을 닫고 양생(養生)하며 수련하는 방법을 매우 좋아하였다. 집 둘레에 구기자를 가득 심고, 그 뿌리와 가지를 좁쌀과 함께 쪄 밥을 지으며, 그 잎과 열매로 나물을 하고 술을 빚어서 항상 먹고 마셨다. 때로는 뜻이 맞는 친구가 오면 얼른 내놓고 권하였다. 나이 60이 못되어 아무 병도 없이 세상을 떠났다. 영남 사람 곽재우(郭再祐)가 일찍이 말하기를, ‘우연히 난리 중에 김영휘를 만나서 양생법을 알았다.’라고 하였다.”
양생법이란 주로 선가(仙家)에서 생명과 장수·건강을 지키는 방법이다. 아무 병 없이 세상을 떠났다는 말은 신선이 되었다는 은유적 표현이다. 신선은 죽은 경우에도 된다고 믿었다. 아무튼 술을 절제하며 마셨다는 말이다.
그런데 ‘신발주’를 아는가? 몇십 년 전에 잠깐 유행했던 일로서, 결혼식이 끝난 뒤풀이 자리에서 신랑 친구들이 구두에 술을 부어 신랑에게 마시게 했던 짓궂은 장난인데, 그 원조라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앞의 『필원잡기』에 등장한다.
“이사철(李思哲)이 젊어서 여러 친구와 삼각산의 절에서 놀 때, 각각 술 한 병씩을 가졌으나 술잔이 없었다. 그때 권지(權枝)가 새로 만든 말 가죽신을 신었었는데, 이사철이 먼저 그 신에 술을 따라 마시니 여러 선비도 차례로 마셨다. 서로 보며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가죽신을 술잔으로 삼은 유래가 우리로부터 고사(故事)가 될 것이니, 이 또한 좋지 않은가?’라고 하였다. 뒤에 이사철이 귀하게 되어 권지에게 말하기를, ‘오늘 금잔의 술맛이 산에서 놀 때의 가죽신 잔보다 못하구려.’라고 하였다.”

술을 경계하라

술이란 좋은 점도 있지만 자칫하면 건강도 잃고 실수하는 일도 생긴다. 그래서 술을 경계하여 아예 끊거나 조심하는 일도 생겼다. 앞의 『해동잡록』에 실려 있는 일화이다.
“정여창(鄭汝昌)이 중년에 소주를 마시고 광야에 쓰러져서 밤을 지내고 돌아오니, 어머니가 매우 걱정되어 밥을 굶었다. 이때부터 제사 뒤의 음복 이외는 절대로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성종이 술을 내린 적이 있었는데 정여창이 땅에 엎드려 아뢰기를, ‘신의 어미가 살았을 때 술 마시는 것을 꾸짖어서, 신이 다시는 마시지 않을 것을 굳게 맹세하였사오니, 감히 어명을 따르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니, 임금이 감탄하여 이를 허락하였다.”
그는 한 번 한 약속을 당사자가 죽어도 지키는 도학자다운 면모를 보였다. 한편 술을 경계하는 말을 술잔에 새겨 후손들에게 훈계하는 사람도 있었다. 심수경의 『견한잡록』의 기록이다.
“나의 당질 심일승(沈日昇)이 사옹원(司饔院) 참봉으로서 나에게 말하기를, ‘술에 대한 시를 지어 보내 주시면 잔에 그 시를 써서 구워 만들겠다.’라고 하기에 내가 써주기를,

술의 덕은 참으로 읊을 만하며(酒德眞堪頌)
얼큰히 취하면 큰 화목을 기른다(醺醺養太和).
술잔에 내 훈계를 부치노니(巵觴我寓戒)
오직 원하건대 많이 들지 말기를(唯願酌無多)

라고 하였더니, 심일승이 그 시를 새겨 술잔을 구워 보냈다. 대개 이 시는 나의 자식이나 조카를 훈계하고자 한 것이지, 타인에게야 어찌 준수하기를 바라리오. 술의 재앙은 비참하니, 몸을 보호하고자 하는 자라면 어찌 유념하지 않겠는가?”
저자 심수경은 여든 살이 넘게 장수했으며 83세에 관직에서 은퇴했고, 75세와 81세 때에 젊은 첩을 통해 아들을 낳아 노익장을 과시했으니, 아마도 술을 절제했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

우리의 삶과 음주

지금까지 우리 조상들의 에너지 넘치는 파란만장한 음주 사례를 살펴봤다. 술을 매개로 삶의 에너지가 다양하게 분출하였고, 도덕적 이념을 지키기 위해 절제하는 일은 극히 일부 인사에 한정되었고, 나라에서도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술을 금하지는 않았다.
오늘날 이런 술 문화 때문인지 그동안 음주로 인한 과실은 관대한 처벌을 내렸다. 해서 음주운전이 줄어들지 않고, 잘못을 저지르고도 술에 취해 한 일이라고 둘러댄다. 경각심이 필요하다. 아무리 이성적인 사람이라도 조금만 방심하면 과음하게 되고, 그래서 실수하거나 건강을 해친다. 술로 인한 사회적 비용도 만만찮다.
나이 든 사람은 대개 술을 조심하는 경향이 있다. 젊을 때 술에 많이 얻어맞아 그런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까닭이다. 늦었지만 그래도 조심하지 않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본다. 젊은이들은 이런 점을 귀담아들었으면 좋겠다. 건강을 잃기 전이나 실수를 하기 전에 예방하는 일이 최선의 방책이기 때문이다.

소인들의 전성시대

소인들의 전성시대

사화와 권간

우리 역사에서 선비들이 집단으로 화를 당한 일을 사화(士禍)라 부른다. 이는 무고한 선비들이 화를 당했다는 의미의 도덕적 규정으로 선조 때부터 나온 용어이다. 중등학교에서 국사를 배울 때 흔히 4대 사화로 불리는 것에는 연산군 때의 무오(1495)·갑자사화(1504)와 중종 때의 기묘사화(1519) 그리고 명종 때의 을사사화(1545)가 있다. 그런데 이렇게 대표적인 몇 가지만 언급하면 사실을 제대로 못 볼 위험성이 있다. 이외에도 크고 작은 사화가 무수하게 있어서 많은 선비가 희생당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여러 사화가 일어나는 이유는 설명하기 좀 복잡하다. 시기에 따라 성격이 다소 다르지만, 조선 전기에는 주로 성리학의 이념과 『소학』적 실천 방식을 엄격하게 적용하려는 사림(士林)과 보수적 기득권을 지닌 훈구파와 외척들의 정치·경제적 갈등, 때로는 왕권 강화와 권력을 지닌 간신들의 전횡과 관련이 있다. 교과서에서 그것을 싸잡아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이라 설명하고 있다.
4대 사화에 한정해 본다면 이를 주도하는 인물이 있다. 연산군 때의 유자광(柳子光, ?~1512)과 임사홍(任士洪, ?~1506), 중종 때의 남곤(南袞, 1471~1527)과 심정(沈貞, 1471~1531), 그리고 명종 때의 윤원형(尹元衡, ?~1565)과 이기(李芑, 1476~1552) 등이 있다. 당시 선비들은 이들을 권력을 지닌 간신이라는 의미로 권간(權奸) 또는 소인(小人)이라 불렀다. 소인이라는 말은 군자(君子)와 더불어 예부터 고전에 등장하고, 특히 『논어』에서 이 둘을 비교하여 다양한 정의를 내리지만, 그 가운데 핵심적 표현에는 “군자는 의에 밝고 소인은 이익에 밝다.”라는 말이 있다.
『대동야승』의 여러 기록에는 사화를 주도한 사람들을 소인이나 권간 또는 간신 등으로 표현하여 자주 등장한다. 이른바 ‘간신전(奸臣傳)’이라는 별도의 책을 엮어도 될 정도로 그 사례가 풍부하다. 이 글은 지면 관계상 간단히 다루고자 하며, 이들이 왜 그런 엄청난 사건을 일으켰으며, 그것을 일으킨 동기의 단면을 고찰하고, 어떤 이념이나 관념이 현실 세계에서 어떻게 실천 또는 저항 당하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유자광과 임사홍

연산군 조정에서 간신으로 불리는 두 사람을 고르라면 단연코 유자광과 임상홍을 의심할 사람은 별로 없겠다. 그도 그럴 것이 많은 문헌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자광에 대한 기록은 여러 문헌에 보이지만, 『해동잡록』·『동각잡기』·『해동야언』에 자세하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대략 이렇다.
일단 그는 서자였다. 그것은 그가 신분상 차별을 받았으며,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고, 때로는 출세를 위해 무리수를 둘 수밖에 없음을 시사한다. 그의 행적을 종합하면 그런 부분이 분명히 감지된다. 『해동야언』에는 몸이 날래고 힘이 세며 원숭이같이 높은 곳을 잘 타고 다녔고, 어려서부터 무뢰배가 되어서 도박을 하여 재물을 다투고, 새벽이나 밤에도 노상에 다니며 놀다가 여자를 만나면 붙들어서 강간하곤 하였다고 전한다.
그는 처음에 군졸(軍卒)로 출발하였는데, 세조 때 이시애의 난이 일어났을 때 토벌을 상소하여 발탁되었다. 그 후 난이 끝나자 출세 가도에 오른다. 그리고 예종 때 남이(南怡, 1441~1468) 장군이 역모를 일으킨다고 고변하여 그 공으로 무녕군(武寧君)에 책봉되었다.
성종 때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이 함양 군수로 있을 때 건물의 현판에 쓴 유자광의 시를 유치하게 여겨 떼어낸 적이 있는데, 유자광은 이른 매우 분하여 여겼으나 당시는 김종직의 영향이 컸으므로 도리어 아부하여 사귀었다고 전한다.
그 후 김일손(金馹孫, 1464~1498)의 사초로 촉발된 그 사건에서 유자광은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의 숨은 뜻을 해석해 사화가 확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사초가 문제 된 까닭은 사관인 김일손이 당상관이었던 이극돈의 행위를 비난하는 글이 거기에 들어 있었고, 그것을 본 이극돈이 김일손의 흠을 찾은 빌미가 김종직의 「조의제문」이다.
그러니까 사화가 촉발된 동기는 사초의 문제로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신구(新舊) 신하들의 정치적 알력, 개인적 보복심리와 출세욕 등이 어우러진 일이라 하겠다. 곧 유자광이 민감한 정치적 국면을 주도한 가장 근본적인 동기는 서자라는 신분의 낙인을 극복하고 출세하려는 욕망, 그리고 김종직을 비롯한 그 제자들에 대한 묵은 원한이다.
한편 임사홍은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의 일을 거론하여 갑자사화를 주도한 장본인이다. 그는 효령대군의 손녀와 혼인하였고, 두 아들 또한 왕실의 사위가 되었다. 당시 그의 권력이 너무 강해질 것이라는 우려에서 대간(臺諫)의 비판을 많이 받았다. 그가 왕실과 지나친 혼맥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성종의 총애를 받고 있었지만, 이런 대간의 비판으로 유자광과 함께 크게 활약하지 못했고, 둘 다 귀양을 갔다 온 경험이 있다.
연산군이 즉위하자 그가 총애한 성종의 사위였던 아들 임숭재(任崇載, ?~1505)와 며느리 휘숙옹주의 연줄로 막강한 권력자가 되었다. 정계로 돌아온 임사홍이 자신을 쫓아냈던 이들을 향해 피비린내 나는 복수의 칼을 겨눴던 일이 생모인 폐비 윤씨 문제로 일으킨 갑자사화였다. 바로 그 동기는 자신의 권력욕을 좌절시키고 유배까지 가게 한 선비들에 대한 보복이었다.

남곤과 심정

남곤과 심정은 기묘사화를 주동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남곤은 「유자광전(柳子光傳)」을 쓸 정도로 나름의 간신에 대한 경계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사화를 일으킨 장본인이 되었다는 게 참 아이러니하다. 이에 대해 『해동야언』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유자광전」은 남곤이 자광의 죄악을 기록하는 데 정성을 다하더니, 기묘년에 이르러서는 자광이 한 일을 모방하여 밤에 북문을 열게 하여, 당시 깨끗한 선비들을 한 그물로 다 없앴으니, 그가 한 짓을 찾아보면 무오년 일(무오사화)보다 심하다. 이것은 남곤이 이 전(傳)을 지으면서 스스로 자기의 죄악을 적은 것이다.”
남곤이 유자광과 다를 바 없다는 주장이다. 남곤은 원래 김종직의 문인이었고, 개혁적인 성향으로 대신들을 탄핵하다가 투옥되기도 하였다. 그는 훗날 예조 판서가 되었고 조광조(趙光祖, 1482~1519)와 대립하였다. 예조 판서는 주로 문장에 능한 사람이 맡는데, 문장은 의리와 수신(修身)을 중시하는 도학자들이 의리와 거리가 먼 사장(詞章)의 학문이라 여겨 배척하였다. 이런 학문 경향으로 자연히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는 표면적인 것에 불과하고, 그 내부는 개혁적 젊은 관원과 보수적 대신들 간의 갈등이었다. 그것이 정치적으로 드러난 사건이 조광조의 개혁정치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기묘사화였다.
이이의 『석담일기』에는 남곤에 대해서 이렇게 평가하였다.
“죽은 남곤의 관작을 삭탈하였다. 남곤은 젊을 때 문명(文名)이 세상에 울렸으나, 출세에 급급하여 박경(朴耕)이 모반한다고 무고하여 그를 죽게 했다. 이로 인해서 깨끗한 언론에 용납되지 않았으며, 마침내 심정과 함께 조광조를 모함하여 바른 사람들을 모두 쫓아내었다.”
반면 이런 평가도 있다. 『월정만필』에 기록된 김안국의 말이다.
“남곤이 기묘년 선비들을 죄에 빠뜨릴 때 그의 본의는 그 기세를 죽이기 위해 파직시켜 내쫓으려 했을 뿐, 애당초 살해할 의사는 없었다. 그러나 혹시 왕께서 말을 들어 주지 않을지 염려하여, 일부러 장황하게 죄를 만들어 임금의 귀가 솔깃해지기를 바랐다. 그런데 중종이 그 말을 지나치게 믿고 극히 무겁게 처분하였으므로 조광조 등이 마침내 그 생명을 보전하지 못하였다. 남곤이 비록 이것을 후회는 하면서도 자기가 설치한 함정을 자기가 도로 구해낼 수 없었으므로, 그들의 죽음을 눈으로 보고 한평생 한스럽게 여겼다.”
이 글의 마지막 내용은 남곤이 죽기 전에 자기가 쓴 글을 모두 불태우면서 “누가 이 글을 읽을 것인가?”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자신이 한 일을 후회했다는 뜻에서 그랬다는 해석이다.
한편 심정도 남곤과 함께 안로(安璐: ?~?)가 편찬한 「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에 전(傳)으로 기록될 만큼 기묘사화의 주도적 인물이다. 그 기록에 따르면,
“말과 용모가 교활하고 아첨이 넘쳤다. 자칭 꾀를 잘 내고 임기응변에 능하다 하니, 사람들이 지혜 주머니라 하였다.”
라고 하니 술수에 능한 인물로 보인다. 그는 중종반정에 가담하여 공신이 되었고, 자연히 개혁파의 개혁 대상이기도 하였다. 곧 조광조 등이 공신들의 위훈삭제(僞勳削除)를 요구하여, 반정공신들로부터 심한 반발을 받았다. 이에 경빈박씨(敬嬪朴氏)를 통하여 ‘조씨가 나라를 마음대로 한다.’라는 말을 궁중에 퍼뜨리고, 남곤·홍경주(洪景舟) 등과 모의하여 왕을 움직여, 기묘사화를 일으켜 선비들을 일망타진하였다.
하지만 훗날 경빈 박씨의 동궁 저주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관련 사실이 드러나게 되어, 강서(江西)로 귀양 갔다가 사사(賜死)되었다. 「기묘록보유」의 ‘심정전(沈貞傳)’에서는 그가 경빈박씨와 정을 통했다고 전하며, 경빈박씨는 중종반정을 주도한 박원종(朴元宗, 1467~1510)의 수양딸이다.

윤원형과 이기

이덕형(李德泂, 1566~1645)이 쓴 『죽창한화(竹窓閑話)』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우리나라의 백 년 이전의 일은 비록 감히 알 수가 없지만, 중고(中古) 이래 권간이 권력을 휘둘러 선비들을 죽인 것이 적지 않다. 그런데도 그 세력이 꺾이거나 그들이 죽은 지 오래되어야 비로소 그 일을 의논한다. 기묘년의 남곤·심정과 을사년의 이기·윤원형의 일이 바로 그렇다.”
기묘·을사사화의 원흉을 가리키는 지적이다. 율곡 이이는 을사사화가 일어난 한 세대 아래 살았기에 그의 글에 자주 등장한다. 『석담일기』 속의 기록을 간략히 요약하면 이렇다.
“원형은 문정왕후의 동생이며 사람됨이 음흉·독살스럽고 재물을 탐했다. 인종이 돌아가자 명종이 즉위하였다. 윤원형 등이 그 기회에 이기·정순붕(鄭順朋)·임백령(林百齡) 등과 음모하고 말을 만들어 퍼뜨려 큰 옥사를 일으키니, 당시 선비들 가운데 그 화를 면한 사람이 드물었다. 윤원형은 서울에 큰 집 10여 채가 있었고, 그 안에는 재물이 넘쳐날 지경이었으며, 분수 넘치게 의복과 수레를 마치 대궐 안의 그것처럼 하였다. 또 본처를 내쫓고 첩 난정(蘭貞)을 매우 사랑하여 아내로 삼아, 그녀의 말이면 다 들어주었다. 뇌물을 받아들이고 수탈하는 것도 그녀의 충동질 때문이다. 그가 권력을 잡은 지 20년 동안 사림은 분함을 품고서도 감히 처단하지 못했다.”
윤원형은 문정왕후가 죽은 뒤 첩 난정과 함께 귀양 가서 죽었다. 여기에서는 말하는 ‘큰 옥사’란 이른바 소윤인 윤원형이 대윤인 윤임(尹任, 1477~1545) 등을 몰아낸 정권투쟁에서 선비들이 화를 입은 을사사화를 말한다. 그것이 끝난 뒤에도 여파는 계속되었다. 이른바 ‘양재역 벽서’ 사건으로 많은 선비가 희생되고, 수년간 윤원형 일파의 음모로 화를 입은 반대파 선비들은 100여 명에 달한다. 겉으로는 왕실 외척 간의 싸움으로 보이지만, 이전처럼 사림과 훈구파의 대립이자 일종의 복수극이었다.
한편 이기는 장인인 군수 김진(金震)이 부정한 관리여서 그 영향으로 젊을 때 좋은 관직에 진출하지 못하고 외직으로만 전전하였다. 그러다가 그동안의 고생한 공으로 병조 판서에 임명하려고 하자 반대가 있었으나 승승장구하여 우의정에 이르렀다. 하지만 대윤 일파가 득세하자 윤임 등이 부적합하다고 탄핵하여 병조 판서로 강등되었다. 이에 원한을 품고 윤원형과 결탁하여 을사사화를 일으키고 명종 4년에 영의정에 올랐다. 그를 반대한 사림은 거의 모두 숙청되었다. 그가 받은 훈록(勳祿)은 선조 초년에 모두 삭탈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들 후손 가운데 바른길로 간 이들이 있다. 임사홍의 아들 임희재(任熙載, 1472~1504)는 김종직의 문인으로 연산군을 풍자하다가 죽임을 당했는데, 임사홍도 그의 죽음에 동조했다고 한다. 심수경(沈守慶, 1516~1599)은 심정의 손자로 훗날 명성이 자자해 할아버지의 허물이 그로 인해 덮어졌다고 전한다. 또 당시 이기 등을 비판하고 이황(李滉)·정황(丁煌) 등의 많은 선비를 구하여 준 이원록(李元祿, 1514~1574)은 권신 이기의 조카였다.

군자와 소인

간신이 처음부터 간신은 아닐 것이다. 어찌 보면 이들도 시대의 희생물이다. 서얼 출신으로 인한 따돌림과 차별에 대한 빗나간 출세욕이 그렇게 만들고, 이념에 따른 현실 인식에서 젊은 선비들의 이들에 대한 비난과 냉대가 분노를 키웠다고 보겠다. 신진 선비들은 관념이나 이념에 철저하였지만, 현실의 벽은 그만큼 더 두꺼워서 좌절을 맛볼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경험이다.
하지만 간신으로 지목당한 사람들은 거의 말로가 좋지 않다. 비록 약아빠진 처세로 천수를 누렸다 해도, 훗날 뜻있는 선비들과 희생당한 후손들이 억울하게 죽은 일을 밝히고 바로잡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의 평가를 두려워하게 만든다.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문제이다. 온갖 권모술수와 줄타기와 요령으로 살아도 후세 역사가의 날카로운 필봉을 피하기는 어렵다. 그걸 알고 매사를 엄중하게 처신하는 자가 군자이고, 눈앞의 부귀영화에 눈멀어 무리수를 두는 자가 소인이리라.
소인이 득세한 데에 대한 반성도 없지 않다. 『해동야언』에 보인다.
“대개 군자가 형벌을 시행할 때는 항상 지나치게 너그러운 데서 일이 잘못되고, 소인의 보복하는 데는 반드시 상대를 전멸시키고 나서야 그만둔다.”
이는 우리 현대사에서 그대로 반복되는 문제이다. 국민 화합이니 뭐니 하면서 역사 청산을 철저하게 하지 않은 데서 생기는 현상이다. 상대가 진정성 있게 뉘우치고 반성해야 사면과 복권을 시킬 수 있는데, 항상 섣부른 결정에서 폐단이 생긴다. 그로 인한 사회적 갈등 비용은 고스란히 국민의 몫이다.

가난을 편안하게 여긴 삶

가난을 편안하게 여긴 삶

새마을 운동과 가난

1970년대 ‘새마을 운동’의 노래 가사는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라는 말로 시작하여 2절의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 길도 넓히고’로 이어지다가, 3절의 ‘소득증대 힘써서 부자 마을 만드세.’라는 말이 등장한다. 그 운동이 일어난 배경 가운데 하나가 3절의 가사에서 보이듯이 가난 탈출이다. 물론 정치적 의도도 있었겠지만.
당시 가난한 원인 가운데는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으로 인한 열악한 경제환경과 경제적 불평등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산업 구조가 농업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농업인구의 비중이 매우 컸고, 다수의 농부는 영세농이어서 자급자족하기에도 부족한 형편이었기에 늘 가난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도시 노동자나 샐러리맨이라고 해도 특별히 나을 것도 없었다. 그래서 당시는 가난이 사회적 문제였고, 이 ‘새마을 노래’에도 그 탈출의 염원을 담았다.
가난이란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이다. 그것도 스스로 선택한 가난이 아니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 역사를 보면 청빈(淸貧)을 자청해서 실천한 선비들이 많다. 『대동야승』에서 소개하는 선비들의 프로필을 보면, 어김없이 효도하고 우애가 있으며 청렴했다는 말이 거의 꼬리표처럼 붙어 다닌다. 의례적 수사법 이전에 그런 문화와 제도가 있었다는 점의 반증이다.
청빈이란 말 그대로 ‘욕심 없이 깨끗하면서 가난하게 사는 삶’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부귀영화를 누리고 싶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 부귀영화의 이면에는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 요소도 동시에 지니고 있었기에 지혜롭게 청빈을 택하지 않았는지 추론할 수 있다. 전통 철학에는 이런 지혜를 항상 제공하고 있어서, 지혜로운 자는 그것을 생활화할 수 있었으리라. 물론 『소학』에도 그것을 장려하고 있다.
청빈 또는 청렴이라고 해도 모두 같은 양상을 띠고 있지 않다. 선비마다 벼슬이 있고 없음에 따라 다르게 등장한다. 그 모습을 살펴보고 왜 청빈하게 살았는지 그 사례를 살펴보자.

결이 다른 청렴과 청빈

조선 시대 이상적인 관료의 모범으로서 청백리(淸白吏)가 있다. 이것은 일정한 기준에 의하여 의정부에서 뽑아 관리에게 주어지는 명칭이다. 여기에는 관직 수행 능력 외에 여러 기준이 있는데 그 가운데 청렴(淸廉)·근검(勤儉)이 있고, 청백리에는 모두 217명이 있다.
이들은 모두 청렴했다는 것이 공통점이긴 한데 엄밀히 말하면 청렴과 청빈(淸貧)은 약간 다르다. 청렴은 욕심이 없고 깨끗한 것을 말하지만, 반드시 가난한 것을 일컫지 않는다. 반면 청빈은 거기에 가난이 첨가된다. 청빈보다 청렴의 외연이 넓다고 하겠다. 해서 청백리 가운데는 청빈한 사람도 섞여 있다. 대표적 청백리에는 맹사성·황희·최만리·이현보·이언적·이황·이원익·김장생·이항복 등이 있다고 하는데, 이들 모두가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가난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부유하게 산 것도 아니다.
『대동야승』에 등장하는 청백리 가운데 한 사람은 맹사성(孟思誠, 1360~1438)이 있는데, 권별(權鼈 : ?~?)의 『해동잡록(海東雜錄)』은 이렇게 전한다.
“공은 성품이 청백·간결하여 재물을 모으지 않고, 음식은 항상 녹(祿)으로 받은 쌀로 유지했다. 하루는 부인이 햅쌀밥을 바치니, 공이 ‘어디서 얻은 햅쌀이오?’라고 하니, 부인이 말하기를, ‘녹으로 받은 쌀은 너무 오래돼서 먹지 못하겠기에 이웃집에서 빌려온 것입니다.’라고 하였더니, 공이 성내며, ‘이미 녹미(祿米)를 받았으면, 마땅히 그것을 먹을 일이지 왜 빌려왔소?’라고 꾸중하였다.”
또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의 『필원잡기(筆苑雜記)』에는 그가 “정승이 되어서는 항상 문을 닫고서 손님을 만나지 않았다. 여름에는 소나무 그늘에 앉아 쉬고 겨울에는 창포 방석에 앉았으나 좌우에 다른 물건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청백·간결하고 단아하고 정중하게 지냈다.”라고 전한다. 이렇게 보면 맹사성은 검소하고 소박하게 살았지만, 끼니를 잇지 못하는 정도는 아니었다.
반면 청백리 가운데 유관(柳寬, 1346~1433)이라는 정승이 있는데 『필원잡기』에 등장하는 그의 행적은 이렇다.
“공은 공정하고 청렴하여 비록 최상의 지위에 있었으나, 초가집 한 칸에 베옷과 짚신으로 담박하게 생활하였다. 언젠가 한 달 넘게 장마가 졌는데, 곧은 삼 줄기처럼 집에 비가 줄줄 새었다. 공은 우산을 잡고 비를 가리며 부인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우산이 없는 집은 어떻게 견딜꼬?’라고 하자, 부인이 대꾸하기를, ‘우산 없는 집에는 반드시 미리 방비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공이 껄껄 웃었다.”
그렇다면 그가 왜 이토록 가난했을까? 나라에서 내리는 녹봉이 있을 터인데 그것으로 기본생활은 해결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 까닭을 알 수 있는 내용이 앞의 『해동잡록』에 전한다.
“조카를 친자식같이 길러 독서와 공부하는 방법을 가르쳐서, 과거에 급제하도록 하였다. 하인들을 분배할 때 조카를 형처럼 생각하여 더 많이 주니, 듣는 사람들이 모두 그 공평하고 청렴한 것을 우러러보았다. 녹봉과 음식을 받을 때면 매번 일가와 이웃들과 나누어 먹었다. 또 관(棺)을 후일에 쓰려고 만들어 두었다가 사촌 누이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는 그것을 주었다.”
바로 재물을 친척이나 이웃과 나누었기 가난하게 되었다. 당시는 생산력이 열악했기 때문에 집안사람 가운데 누가 잘되면 거기에 의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필자가 어릴 때까지도 그랬다. 그러니까 유관의 처지는 청렴하면서도 스스로 청빈한 경우라 하겠다.

공직자의 청렴과 공정

공직자가 청렴하면 자연히 공정할 수밖에 없다. 누구의 청탁이나 뇌물을 받고 부당한 일을 안 해도 되기 때문이다. 청백리라면 당연히 그랬겠지만 설사 청백리가 못되어도 그런 관리는 있을 듯싶다. 이이(李珥, 1536~1584)의 『석담일기(石潭日記)』에는 당시 벼슬한 선비 가운데 청렴한 자로 본인을 포함하여 박순(朴淳, 1523~1589), 이황(李滉, 1501~1570), 이준경(李浚慶, 1499~1572), 이후백(李後白, 1520~1578), 정인홍(鄭仁弘, 1535~1623), 이산해(李山海), 유성룡(柳成龍, 1542~1607), 김우옹(金宇顒, 1540~1603), 최영경(崔永慶, 1529~1590), 성혼(成渾, 1535~1598) 등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이산해의 일화를 소개하면 이렇다.
“이산해는 사사로이 찾아오는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오로지 공정한 도리로 사람을 등용했기 때문에 선비들의 담론이 그를 칭송하였다. 그런데 모친상을 당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김귀영(金貴榮)이 그 직책을 대신하자, 청탁하려는 무리가 그의 문간에 구름같이 모여드니 당시 사람들이 한탄하였다.”
또 이이는 경연 때 선조에게 “산해는 사람을 쓸 때 공론에만 따랐으므로 청탁이 일절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문 앞이 쓸쓸하여 가난한 선비의 집과 같았으며, 다만 착한 선비만을 보고 들어 벼슬길을 맑게 하는 데 힘썼습니다.”라고 하니, 선조가 “산해는 재능이 있으면서도 그것을 자랑하는 마음이 없어서, 나도 일찍이 덕이 있는 사람이라 하였소.”라고 전한다.
예나 지금이나 관리가 일을 공정하게 처리하려면 본인이 청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일이 먹히지 않는다. 그래서 일 처리가 공정하고 엄격하여 남을 두렵게 한 관원도 있었다. 앞의 『석담일기』에 보인다.
“정인홍(鄭仁弘)이 어버이를 뵈려 시골로 돌아갔다. 인홍은 사헌부에 있으면서 일을 엄격하게 처리하고 부정을 바로잡아 관원들의 업무 태도가 진작되었고, 거리의 장사치들까지도 감히 금지하는 물건을 밖에 진열하지 못했다. 한 무사가 시골에서 상경하여 어떤 이에게 말하기를, ‘정인홍은 어떻게 생겼는가? 그 위엄이 먼 지방까지 들리어 병사(兵使)·수사(水使)·수령(守令) 무리까지도 두려워하고 경계하니 참으로 장부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이이가 듣고 웃으면서 말하기를, ‘인홍이 사헌부의 관리가 되니 많은 사람이 꺼리고 미워하는데, 이 무사는 감히 칭찬하니 그가 바로 장부다.’라고 하였다. 마침 그가 어버이를 뵈려 시골로 돌아가니, 성안의 무뢰배가 모두 기뻐하기를, ‘이제야 어깨를 펴겠다.’라고 하였다.”
이는 해당 관서의 호랑이 같은 청렴한 관리 한 사람의 역할로 일시나마 나라의 기강이 잡힌 일화이다. 현재에도 이런 공무원이 많으면 국운이 크게 상승하겠다. 지금은 과거보다 부조리가 거의 없다고는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게 편의를 봐주고 느슨하게 처리하는 일도 있다. 건설이나 부동산 관련 허가 사항 하나만 봐도 금방 알 수 있다. 온갖 난개발로 국토가 쓰레기장이나 걸레처럼 변해가는 일이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니리라.
또 청탁을 거절하는 사례로서 『소학』의 가르침대로 실천한 이도 있다. 『해동잡록』에 등장하는 사례이다.
“이조 판서가 된 어효첨(魚孝瞻)이 해당 관리의 후보를 추천하는데, 이때 관행적으로 서로 아는 사람이 비밀리 명함을 들이므로, 공은 그것을 뒤집어 끝에다 ‘하늘이 알고, 귀신이 알고, 내가 알고, 자네가 아는데, 어찌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없겠는가? 그대는 돌아가 쉬어라.’라고 써주니, 그 후로부터 이런 일이 끊어졌다.”
여기서 ‘하늘이 알고’로 시작되는 ‘天知·神知·我知·子知’에 관한 글은 후한(後漢)의 양진(楊震)에 대한 고사로 『소학』에 등장한다. 그렇다고 조선 시대의 선비들만 청렴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잘 아는 ‘황금을 돌같이 보라’는 주인공인 고려말의 최영(崔瑩, 1316~1388) 장군의 고사에도 보인다. 성현(成俔, 1439~1504)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 실려 있다.
“공은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가 늘 ‘황금 보기를 흙같이 하라[見金如土].’라고 가르쳤으므로, 항상 네 글자를 큰 띠에 써서 종신토록 지니고 다녔다. 대신이 되었으나 남의 것을 조금도 취하지 않고 겨우 먹고사는 데 만족했다. 당시의 재상들은 손님을 초대하여 성대하게 차린 풍습이 있었는데, 공은 손님을 초대하되 한낮이 지나도록 음식을 내놓지 않다가, 날이 저물자 잡곡과 쌀을 섞어서 지은 밥에다 잡동사니 나물만 차렸다. 마침 손님들은 배고픈 참이라 그것도 남김없이 먹고는, ‘철성(鐵城: 최영의 봉호)의 집 밥맛이 좋다.’라고 하니, 공은 웃으며, ‘이것도 용병하는 술책이오.’라고 하였다. 그리고 ‘내가 탐욕이 있었다면, 내 무덤 위에 풀이 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풀도 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의 무덤은 경기도 고양에 있는데, 지금까지도 한 줌의 잔디도 없는 벌거벗은 무덤이어서, 흔히들 홍분(紅墳)이라고 한다.”

청빈한 삶과 선비의 즐거움

벼슬을 하면 그나마 호구지책을 해결할 수 있으니 다행이라 하겠지만, 벼슬도 없이 가난하면서도 깨끗하게 산 선비들이 있었으니, 이들이야말로 청빈하게 살았다고 하겠다. 벼슬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 사는 고명한 선비를 흔히 처사라 불렀는데, 서울에도 그런 분이 있었다. 『해동잡록』에 보인다.
“정지운(鄭之雲)은 가난하여 집이 없었다. 서울 사대문 안에 집을 빌려 살았으며, 아내가 길쌈을 하여 자급하였으므로 끼니를 잇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 때문에 걱정한 적은 없었다.”
정지운은 호가 추만(秋巒)으로 「천명도설(天命圖說)」을 지은 학자인데, 훗날 이것을 발단으로 사단칠정론이 전개되었다. 그야말로 청빈한 삶을 살았는데, 아내의 내조가 컸고, 가난이 그의 뜻을 꺾지는 못했다. 한편 지방에서 처사로 살면서 청빈했던 선비에는 조식(曺植, 1501~1572)·서경덕(徐敬德, 1489~1546)·성운(成運, 1497~1579) 등이 있는데, 『석담일기』에서는 성운에 대하여 이렇게 전한다.
“처사 성운이 죽었다. 그는 산림에 고요히 살며 시끄러운 세상을 사절한 지 40여 년이었다. 집과 조금 떨어진 경치 좋은 곳에 작은 집을 짓고, 한가한 날이면 소를 타고 가서 쓸쓸히 홀로 앉아 지냈고, 가끔 거문고를 두어 곡 타며 스스로 즐겼다. 거문고 소리를 듣고자 하는 사람이 오면 오히려 타지 않았다. 선(善)을 즐기며 학문을 좋아하였고 남과 다투는 일이 없었다. 살림살이에는 있고 없는 것을 묻지 않았으며, 간혹 끼니를 굶는 일이 있어도 편안하게 생각하였다. 여러 번 벼슬로 불렀으나 오지 않았다.”
벼슬에 나오지 않은 것은 벼슬에 뜻이 없어서라기보다 당시의 정치 상황 때문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조식이나 서경덕도 그러하다. 그러나 이들이 가난에도 불구하고 되레 후진을 양성하거나 유유자적 즐겁게 살 수 있었던 까닭은 평범한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사실 과거 선비들이 청렴하고 청빈하게 때로는 그것을 즐기며 산 까닭은 정치적 혼란에서 올바른 처세를 위해, 때로는 철학적 신념에서 나온 선택이다. 지면 관계상 그 철학을 여기서 다 밝힐 수는 없지만, 그것이 당사자에겐 참다운 길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 청빈은 자족(自足)의 삶이었다. 치우친 시세에 야합하는 일은 비루한 일이고, 군주제의 특성상 부귀영화는 언제나 위험부담이 있어 남의 시기를 사고 쉽게 구설수가 있다. 심하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기도 하다. 낮추고 겸손하고 청빈한 삶이 생명을 보전하는 처세술이 될 수 있다. 근원적으로는 인간의 탐욕은 끝이 없으므로 그것을 예방하기 위해 그랬을 수도 있고, 더 나아가 백성들의 소박한 삶에 동참하거나 만물[道]과 하나가 되어 가난마저도 즐기는 경지를 추구했으리라 본다. 하지만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 가족이나 아내가 있었다면 무척 고달팠을 것이다.

소박한 삶이 오히려 자유로울 수 있다

당시에도 평범한 보통 사람들은 물질적 욕망을 추구하는 일에 에너지를 쏟았다면, 부귀영화를 포기하고 되레 그 욕망을 줄이거나 최소화함으로써 자신의 신념을 추구한 선비들도 있었다. 가난을 탈출할 방도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스스로 청렴과 청빈을 택했다. 그 철학적 깊이를 잘 모르는 현대인이 그 태도를 함부로 재단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현대는 가난을 개인의 능력 부족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 능력 부족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대부분 출신 배경과 관련이 있다. 해서 그런 가난을 참는 일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다. 이들에게 과거 선비들의 청빈한 삶은 공허한 메아리가 될 것 같다.
하지만 오늘날도 청빈을 자발적으로 선택한다면 훌륭한 삶이 될 수 있다. 많은 소유가 되레 부담스럽고 거추장스럽다면 권장할만하다. 굳이 가난하게 사는 일이 어렵다면, 소박하고 단출하게 사는 것도 훨씬 자유롭고 행복할 여지가 충분하다. 이는 각자의 가치에 달린 일이다.

조선 시대 여성의 삶

조선 시대 여성의 삶

삼종지도와 칠거지악

근대 이후 우리나라에서 여성학을 공부하거나 여성단체에서 유교를 비판할 때 그 대표적 대상이 되었던 내용 가운데는 삼종지도(三從之道)와 칠거지악(七去之惡)이 있다. 모두 『소학』에 등장한다. 삼종지도란 여자가 어렸을 때는 아버지를, 시집가서는 남편을, 남편이 죽으면 아들을 따르는 도리를 말한다. 칠거지악이란 부인을 버릴 수 있는 일곱 가지 이유인데, 부모에게 순종치 않고 아들이 없으며 행동이 음란하고 질투하며 나쁜 병이 있고 말이 많으며 남의 물건을 훔치면 내보내도 된다고 한다. 다면 여기에도 조건이 있는데, 부인에게 돌아갈 곳이 없거나 시부모의 삼년상을 치르거나 처음엔 부부가 가난했으나 나중에 부귀하게 되었을 때는 버릴 수 없다고 한다. 이것을 삼불거(三不去)라고 부른다.
삼종지도는 여성에게 주체적 삶을 허락하지 않는 도리로 남성에게 종속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다. 칠거지악 가운데 특히 아들이 없어 내보낸다는 것은 어이가 없다. 아들이 없는 원인이 부인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기에 참으로 고약하다. 질투 또한 그러하다. 남편이 외도하거나 첩을 맞이했을 때 질투하지 말라는 법과 같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런 규범을 엄격하게 지키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인간의 삶은 사사건건 규정대로 진행되지 않는다. 『소학』의 이 가르침이 실제 삶에서는 악용·변형·무시되기도 한다. 관념의 실천은 글자 그대로 진행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글에서는 조선 전기 여성의 삶, 곧 딸과 부인과 어머니의 역할로서 삶이 어땠는지 제한된 자료에서나마 간단히 들여다보고자 한다. 조상들의 삶의 에너지가 어떻게 분출되고 있는지 살펴보자.

여성 교육과 여성의 재능

『대동야승』에는 여성의 교육을 어떻게 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사안에 따른 훈계 정도가 고작이다. 일반 교육은 아마도 『소학』의 내용을 따랐을 것이다. 거기에 보면 열 살 이전에는 남녀 모두 기본생활에 필요한 예절과 기능을 배운다. 열 살부터 남녀가 크게 달라지는데, 일단 여자는 규문 밖에 나가지 않으며 어른을 따라 길쌈과 제사 음식 장만 등을 배우고, 열다섯 살에 비녀를 꽂고 스무 살에, 큰 사정이 있으면 스무 세 살에 시집간다고 한다.
여성의 교육 내용은 대부분 집안 살림에 관한 일이다. 주로 길쌈과 음식 만들기가 그것이다. 만약 부잣집 사대부의 딸이 아니라면 농사도 병행했을 것이다. 그 외 어머니나 집안 어른으로부터 여인이 갖추어야 할 규범도 배웠을 것이다.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닌 모양이다. 아버지로부터 교육받는 경우도 허다했다. 권별(權鼈 : ?~?)의 『해동잡록(海東雜錄)』에 이런 기록이 있다.
“신숙주는 가훈을 지어 딸들에게 교훈하기를, ‘규문(閨門: 부녀자가 거처하는 곳) 안에서는 사사로운 은혜가 의리를 가려 지나치게 친해지기 쉽다. 버릇없이 지나치게 친해지면 공경하고 삼가는 마음이 이완되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교만하고 질투하고 방자하게 되어 못 하는 일이 없어지니, 부부 사이에 틈이 벌어지는 일도 이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또 성현(成俔, 1439~1504)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는 딸들에게 옛날이야기를 통해 바깥 구경을 삼가도록 한 어떤 원님의 이야기도 등장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효과적인 교육 방식도 있는데 앞의 『해동잡록』에 전한다.
“정여창(鄭汝昌)은 몸가짐을 매우 엄하게 하여 종일토록 단정히 앉고, 비록 무더위 가운데서도 처자가 그의 속살을 보지 못하였다.”
이는 몸으로 보여주는 교육이다. 올곧은 선비라면 대체로 이랬을 것이다. 윤리나 도덕 교육은 말로 하는 것보다 직접 실천해 보여주는 것이 효과가 크기 때문이다.
어떻든 규범 위주의 이런 교육은 여성의 재능을 썩히는 일이다. 드물지만 글을 가르친 사례도 있다. 사실 조선 시대 여인이 글을 아는 경우는 흔치 않다. 훈민정음의 등장으로 언문을 익히기도 했지만, 한문을 배워 글이나 시를 짓고 그림과 음악을 배우는 일은 기생을 제외하고는 매우 이례적이다. 심수경(沈守慶, 1516~1599)의 『견한잡록(遣閑雜錄)』에 이런 기록이 있다.
“부인이 문장에 능한 일은 중국에서는 기이한 일이 아닌데,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물어 기이하다. 김성립(金誠立)의 처 허씨(許氏: 허난설헌)는 바로 재상 허엽(許曄)의 딸이며, 허봉(許篈)의 여동생 허균(許筠)의 누나이다. 허봉과 허균도 시에 능하여 이름이 났지만, 그 누이 허씨는 더욱 뛰어났다. 호는 경번당(景樊堂)이며 문집도 있으나, 세상에 유포되지 못하였고 일찍 죽었으니 아깝다. 조원(趙瑗)의 첩 이씨와 정철(鄭澈)의 첩 유씨 또한 이름이 났다. 논평하는 자들은 늘 ‘부인은 마땅히 술과 음식이나 의논할 것인데, 양잠과 길쌈을 집어치우고 오로지 시 읊기를 일삼는 것은 아름다운 행실이 아니다.’라고 하나, 내 생각은 그 기이함에 감복할 뿐이다.”
또 어숙권(魚叔權, ?~?)의 『패관잡기(稗官雜記)』의 기록은 이례적으로 당시 여성의 재능을 키워주지 않음을 크게 한탄한다.
“우리 동방의 담론은 옛날부터 부녀자의 직책은 음식을 만들고 길쌈을 하는 것뿐이다. 글과 글씨의 재주는 그들에게 마땅한 것이 아니라 하여, 비록 타고난 재주가 남보다 출중한 사람이 있어도 꺼리고 숨겨 힘쓰지 않았으니 한탄할 일이다. 삼국시대에는 알려진 사람이 없고, 고려 5백 년 동안에는 다만 용성(龍城) 기생 우돌(于咄)과 팽원(彭原) 기생 동인홍(動人紅)만이 시 지을 줄을 알았고, 조선에는 정씨(鄭氏)·성씨(成氏)·김씨(金氏)가 있는데, 김씨는 시 편이 있어 세상에 전한다. 지금 강릉에 신씨(申氏: 신사임당)가 있는데,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려 포도와 산수화는 절묘하여 평가하는 사람들이, ‘안견(安堅: 조선 초기 화가) 다음이다.’라고 하였다. 아! 어찌 부인의 필치라 해서 소홀히 해서야 되겠으며, 또 어찌 부인이 마땅히 할 일이 아니라 하여 책망할 것인가?”
여기 소개한 ‘부녀자의 직책’이란 “암탉이 울어서 재앙을 가져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라는 말과 함께 『소학』에 등장한다. 이 기록은 여성의 재능을 계발시키지 못한 풍토를 한탄한 말이다. 그러니까 『소학』의 가르침을 곧이곧대로 따라야 한다는 생각이 없음을 알 수 있다.

남편의 외도와 아내의 질투

『소학』에 보면 “예법을 갖추어 혼인하면 처(妻)가 되고 예법을 따르지 않고 맞이하거나 시집가면 첩(妾)이 된다.”라고 하였다. 첩을 언제부터 두었는지 알 수 없으나 적어도 고대로부터 왕이 여러 부인과 첩을 둔 일부다처에서 유래한 것은 확실하다. 그래서 첩을 핑계로 외도하는 남성들이 참 많았다. 기생이나 거느리던 하인을 첩으로 삼는 경우는 다반사요, 가난한 평민의 딸을 첩으로 맞이하기도 했다.
『대동야승』에는 기생과 첩 얘기가 약방의 감초로 등장한다. 이럴 때마다 부인들의 속은 새까맣게 탔을지 아니면 풍속이 그러니까 태연하게 넘어갔을지 알 수 없지만, 대부분 전자에 해당할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남성이 그랬다고 착각하면 안 된다. 도학자들은 남녀의 구별을 엄격히 지켰고, 드물지만 여성을 혐오하여 멀리한 사람도 있었다. 이 문제는 또 다른 주제여서 다른 곳에서 다루겠다.
그런데 첩과 기생 제도를 두고, 또 집안의 잡다한 일을 여성이 도맡아 하는 근거를 전통 철학에 빗대 말하는 것도 있다. 『패관잡기』의 기록이다.
“동쪽의 수(數)에서 천(天)의 수는 3이고, 지(地)의 수는 8이기 때문에 여자는 많고 남자는 적다. 한 남자가 첩 두서너 명 거느리기까지 하고, 비록 천한 여자라도 과부로 있는 사람이 있으니 이것이 그 증거이다. 모든 관청이나 사가에서 밥을 짓고 제사 음식을 준비하는 자가 모두 여인인 것은 한갓 습속이 그러할 뿐 아니라, 실로 남자가 적고 여자가 많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이론적 설명은 『한서예문지』에 보이기 시작하고,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충렬왕 때 박유(朴褕)의 상소에 보이는데, 훗날 이익(李瀷, 1681~1763)의 『성호사설』에서 군색한 말이라고 비판한다. 이 설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통의 수리(數理)를 알아야 하는데, 이는 짝수를 양수, 홀수를 음수로 보고 하도(河圖)에서 동쪽의 수가 양수 3과 음수 8이라는 데서 기원하며, 그 동쪽을 우리나라로 보니까 이런 해석이 가능했다. 물론 음과 양은 각각 여성과 남성을 상징하기도 하여 말도 안 되는 견강부회한 설명이다. 당시 남자가 적고 여자가 많은 까닭은 전쟁이나 노역, 정치적 역모 사건 등에서 남성이 많이 희생당한 것도 그 원인 가운데 하나이다. 전근대 사회는 어디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유럽과 일본도 그랬다.
어쨌든 당시 관습은 남편의 외도와 첩을 들이는 문제에 관대하였지만, 사대부 집안의 처녀는 당연히 첩보다는 처가 되기를 원했다. 이와 관련해 박동량(朴東亮, 1569~1635)의 『기재잡기(寄齋雜記)』에 첩이 아닌 정식 부인이 두 명인 사람도 있었다. 그 사연은 이렇다.
“세조 때 홍윤성(洪允成)이 고을을 순행하다가 양주(楊州)에 당도했을 때 행차를 구경하는 한 처녀를 마음에 두고, 그날 저녁 그 아비를 불러 첩으로 달라고 협박하였다. 그 집안사람들이 모두 모여 울면서 ‘따르자니 사족으로서 남의 첩이 되어 가문을 보전할 수 없고, 안 따르자니 위력과 권세 아래 생명이 가엾게 될 것이다.’라고 통곡하였다. 그 처녀는 일단 가족을 안심시키고, 홍윤성에게 당당하게 정식 혼례를 치르면 아내가 되겠다고 말하여, 드디어 간단한 예를 갖추어 부인이 되었다. 이때 홍윤성에게는 이미 부인이 있었는데도, 세조가 그녀를 ‘제수’라고 불렀다.”
세조가 그런 것은 그가 홍윤성을 동생처럼 아꼈기 때문이다. 훗날 유산 문제로 두 부인이 송사로 다툴 때, 세조의 이 말이 증거가 되어 둘째 부인이 불이익을 당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편 부인들의 질투는 대체로 크게 드러내지는 않았는데, 예외도 있었다. 이륙(李陸, 1438~1498)의 『청파극담(靑坡劇談)』에 이런 이야기도 있다.
“광주목사 최운해(崔雲海)에게 후처가 있었는데, 그 여자는 질투심이 강하고 매우 사나워 하인들이 그녀의 눈과 귀가 되어 주인의 동정을 살폈다. 하루는 누런 옷을 입은 아전이 목사의 책상 앞에 엎드리고 있는 모습을 하인이 멀리서 바라보고, 그 아전을 기생으로 잘못 알고 후처한테 달려가 알려 주었다. 후처는 매우 노하여 문틈에 숨어 칼을 쥐고 살피고 있는데, 목사가 어두워질 무렵 문에 들어서자 칼을 빼 목사의 옷자락을 베었다. 목사는 매우 놀라서 객사로 돌아가자 그의 처가 더욱 노하여 말하기를, ‘늙은 놈의 머리를 베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라고 하고, 마구간에 들어가 남편이 아끼는 큰 말을 베어 죽였다.”
참으로 대단한 질투라 하겠다. 이례적인 일이어서 기록에 남은 것으로 보인다.

지혜로운 어머니의 가르침

앞서 소개한 삼종지도는 천편일률적으로 적용되지는 않은 모양이다. 아버지가 일찍 죽으면 어머니가 교육을 주도할 수밖에 없다. 잘 알다시피 퇴계 이황은 일찍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그 어머니가 아들들이 과부의 자식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도록 엄격하게 교육했다고 한다. 그것은 아마도 『소학』의 “과부의 자식 가운데 재능이 뛰어나지 않으면 친구로 사귀지 않는다.”라는 말을 익히 알고 있었고, 또한 과부의 자식에게 걸핏하면 배운 게 없다고 빈정대기 때문이리라.
또 어머니가 다 자란 아들을 훈계하거나 지혜로운 가르침을 펼친 경우도 적지 않았다. 『해동잡록』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다.
“김일손(金馹孫)의 형이 함양 군수로 나갔을 때 어머니의 병을 간호한 일이 있었다. 관청의 약재로 약을 지어 보냈더니 이씨 부인이 불쾌히 여기면서, ‘어찌 관청 물건을 사가에 두겠느냐?’라고 꾸짖기에, 꾸려서 도로 보냈다고 한다.”
공사를 분명히 가려서 처신하라는 가르침이다. 또 같은 책에 정여창(鄭汝昌)의 어머니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그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홀어머니를 모시고 있었다.
“어머니는 의(義)가 아닌 걸로 정여창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았으므로, 어머니는 잘못하는 법이 없었다. 아들도 그 말씀을 순종하지 않은 적이 없으니, 사람들이 이를 일러 온 집안이 의를 행한다고 하였다.”
아들이 반듯한 뒤에는 그런 어머니가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런 어머니로부터 받은 교육의 사례는 앞의 『견한잡록』에도 보인다.
“나는 13살에 부친이 별세하였으므로 어머니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그 후 성장해서 벼슬과 명망이 알려지자, 어머니를 잘 모시고 은혜 갚을 뜻을 항상 품고 있었다. 어머니는 평생 교훈이 엄격하였다. 내가 모든 관청이나 고을의 송사에 한 번이라도 뇌물을 받고 간청을 들어주는 일이 없어서, 비난하고 헐뜯는 말을 듣지 않았던 것은 실로 낳아 주신 부모를 욕되게 않게 해서이다.”
자신에 대한 기록이니 비록 과장이 없을 수는 없으나 이 말은 진실인듯하다. 저자 심수경(沈守慶)은 중종 때 기묘사화를 일으킨 사람 가운데 하나인 심정(沈貞, 1471~1531)의 손자이다. 당시 이런 심수경을 두고 “손자의 덕행으로 할아버지의 허물을 가리고 말았다.”라는 말이 떠돌았을 정도였다. 굳이 이런 사례만이 아니더라도 훌륭한 자식 뒤에는 반드시 이름 없는 훌륭한 어머니가 있었다.

내 삶을 찾아서

옛날 여인들은 누구의 아내와 누구의 어머니 역할만 해 왔고, 공식적 이름은 성(姓)밖에 없어 자신의 삶을 갖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하기야 최근까지도 여성들은 집안일을 돌보며 남편과 자식의 뒷바라지를 해 왔다. 직장이 있어도 그랬으니, 남편의 성공 뒤에는 항상 아내의 내조가 있었다. 반면 여성이 성공하려면 가정을 포기하거나 남편의 특별한 배려가 있어야 가능했다.
이제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도 이전과 달라져서, 남편이든 아내든 각자의 삶을 주체적이고 성공적으로 가꾸기 위해서는 서로의 협조가 필요하다. 성공이라는 게 꼭 외형적인 그것만이 아닐지라도 그렇다. 그게 힘들고 거추장스럽다면 혼인하지 않는 게 낫다. 하지만 인생은 서로 협력하고 양보하고 때로는 남을 위해 희생하는 데서 더 큰 보람과 가치가 있고, 배움도 더 많은 법이다. 각자가 선택할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