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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귀(李貴)-1


이귀(李貴)-1                                                        PDF Download

1557(명종 12)~1633(인조 11).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옥여(玉汝)이며, 호는 묵재(默齋)이며, 본관은 연안이다. 아명은 영용(盈龍)이며,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조정에서는 연평(延平)이라는 호칭을 많이 썼는데, 이는 연평부원군이라는 그의 직책에서 나온 것이다. 1557년 3월 1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증 영의정에 추증된 이정화(李廷華)인데, 아버지는 아들 이귀와 손자 이시백(李時白)의 영화롭고 높은 지위를 가짐에 따라 영의정에 증직된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귀가 출생한 다음 해, 3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안동 권씨로, 청송부사 권용(權鎔)의 딸이다. 4남 3녀를 낳았는데, 이귀가 막내아들이다.
이귀의 아명이 영룡인 것은 그의 어머니 태몽에 하얀 용이 물 항아리에 들어있는 것을 본 것에 따른다. 이귀가 2살 되던 해에 어머니를 따라 외가가 있는 전라도 익산으로 가게 된다. 이정귀(李廷龜)가 쓴 신도비문을 보면, 어머니 안동 권씨는 아버지를 잘 모르는 이귀에게 다음과 같이 아버지상을 기억시키려한 노력을 읽을 수 있다.

“돌아가신 어머니(외할머니)께서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너의 집은 원래 훌륭한 집안이다. 너의 할아버지 목사공이 기묘명인(기묘사화 때에 피해를 입은 사림들을 기묘명인이라 부른다)으로 매우 어지셨고, 모든 자식과 조카들이 다 바른 가르침을 삼가 지켜서 사람들이 ‘너의 집을 모범적 집안’으로 여겼다. 너의 아버지는 총명하여 보통 자식과 달랐으며, 효도와 우애가 극진하여 할아버지 목사공께서 매우 소중히 대하시고, 너의 아버지 또한 자식의 도리를 다하였다. 오직 판서 오상과 승지 유희림과 교분이 두터웠다.”

이처럼 이귀는 할아버지 양주목사와 아버지의 훌륭함을 어려서 어머니로부터 익히 듣게 된다. 이것으로 보면, 이귀의 어머니 안동권씨는 상당히 총명하고 부덕이 높은 분으로써, 자녀들의 교육과 훈도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그가 14세에 이르자, 시골 익산에서 학업을 위하여 어머니를 따라 서울로 상경한다. 14세 소년으로 서울에 온 이후, 이덕형(李德馨)․이항복(李恒福)을 만나 같이 공부하며 평생을 같이하는 친구가 된다. 특히 이항복과는 밤새워 놀다가 이별을 아쉬워할 정도로 절친한 사이가 된다. 그리하여 선조 말에서 광해군 때에 걸친 정치적 풍랑 속에서도 서로 의지하는 동지적 관계를 유지한다. 또한 이덕형과는 어려서 윤우신(尹又新) 문하에서 같이 배우면서 절친하게 지내게 되는데, 이 또한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는 사이가 된다. 이들과의 이러한 관계는 이귀가 스승인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을 동인의 공격으로부터 옹호하는 상소를 올리다가 정치적 곤경에 처했을 때에도 그대로 유지된다.
여기에서 잠시 오성과 한음으로 더 널리 알려진 이항복과 이덕형을 소개한다. 이항복과 이덕형은 다섯 살이라는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돈독한 우정을 나눈 수많은 일화가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이덕형의 문집인 『한음문고』와 그의 후손 이명교가 밝혔듯이, 둘은 과거장에서 처음 만났다. 특히 이덕형의 문집을 보면, 이덕형이 다른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가 총 110여 통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 중 이항복에게 보낸 편지만 무려 77통에 이른다. 특히 이덕형은 이항복을 ‘형’이라는 매우 격식 없는 호칭으로 부르고 있으며, “형도 내 마음 몰라요”라고 징징대는 편지도 남아 있다. 그런데 정작 이항복의 문집인 『백사집』에는 다만 이덕홍을 위해 지어준 시가 몇 수 남아있을 뿐, 이덕형에게 보낸 편지는 한 통도 실려 있지 않다. 20세가 되어 일생의 스승이 되는 이이와 성혼의 문하생이 된다. 당대의 대학자인 이이와 성혼을 스승으로 둔 것이다. 아마도 이귀의 넓고 해박한 지식과 지혜는 두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것으로 판단된다. 박세채(朴世采)는 이귀를 이이의 고제자(高弟子)라고 말한다. 그는 초기에 과거시험보다 학문에 뜻을 둔 공부를 하다가, 어머니의 권고로 과거공부를 하여 26세 되던 해에 생원시험에 합격하게 된다.
당시의 문과시험에는 사마시(司馬試) 혹은 생진과(生進科)라고 하는 소과시험과 문과라고 하는 대과시험이 있다. 또한 생진과는 생원과(生員科)와 진사과(進士科)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작문과 작시를 위주로 한 합격자는 진사(進仕)라고 하고, 경서 위주의 합격자는 생원(生員)이라 한다. 생원과 진사는 성균관에 입학하는 자격을 갖추게 될 뿐만 아니라, 사회적 지위를 인정받고 하급 공무원으로 임용되는 자격을 갖추게 된다. 이귀는 생원이 되어 성균관에서 공부하고, 후에 지방 수령으로 근무하던 도중에 다시 대과시험에 합격한다.
그는 1590년 34세에 강릉참봉으로 처음 벼슬길에 오른다. 강릉은 선조의 선왕인 명종의 능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능의 제기 등 모든 기물을 묻고, 의병을 모집하여 평양 행재소로 달려간다. 그의 큰형 이보(李寶)는 400명의 익산 의병장으로 진산전투에서 순절한다. 임진왜란 당시 이귀는 삼도소모관․삼도선유관․상서원직장․공조좌랑․유성룡의 종사관․장성현감․도총검찰관 등으로 맹활약한다. 왜란이 끝나고 김제군수․군기판관․체찰사소모관․형조좌랑․안산군수․양재찰방․백천군수․함흥판관 등으로 선조 때에 18년간 벼슬한다. 특히 정인홍(鄭仁弘)의 죄 10조목을 선조에게 상소하여 정인홍의 대사헌 임명에 반대한다.
1608년 선조가 서거하고 광해군이 집권할 때에도 함흥판관 차사원으로 서울에 있었으며, 이어서 당상관으로 숙천부사에 임명된다. 1612년 모친상으로 경기도 고양 원당에서 3년간 여묘살이를 한다. 여묘는 부모가 죽은 후에 무덤 근처에 초막을 짓고 기거하면서 무덤을 지키는 것을 말한다. 여막을 지어 여묘하는 풍습은 중국의 장례제도에 영향을 받아 우리나라에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전통사회의 여막의 규모나 구조는 알 수 없으나, 삼국시대 때부터 이미 시작되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증보문헌비고』의 「예고(禮考)」 <사상례조(私喪禮條)>를 보면, 삼국 중 고구려와 백제에서는 이미 부모 및 남편이 죽으면 3년간 상복을 입도록 법제화하였다고 한다. 여막의 풍속은 고려 말부터 배출된 주자학자들의 생활에서 더욱 두드러져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숭상하는 사대부가에서 효행의 상징으로 인식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여묘살이를 한 자에게 특별히 정려표가 주어졌다는 기록에서 보듯이, 일반 상민들은 물론 사대부가에서조차도 보편적으로 실행된 것은 아닌 듯하다. 다만 부모나 남편의 죽음을 당하여 탈상하는 3년간 상복을 입은 채 일상음식을 피하면서 묘 옆의 초가에서 죽은 자의 무덤을 지키는 것을 실천함으로써 효도를 다한다는 이상적 규범으로 널리 유포된 것으로 보인다.
이귀는 경기도 고양 농가에서 3만자에 이르는 「갑인함사(甲寅緘辭)」라는 장문의 상소를 광해군한테 올린다. 「갑인함사」는 1614년(광해군 6)에 정인홍 등이 그를 죽이려고 이이첨(李爾瞻)․박재(朴梓) 등을 사주하여 그의 관직을 삭탈하자고 도모하였는데, 그에 대해 함사로써 임금에게 변명한 내용이다. ‘함사’는 조선시대 관아에 직접 출두할 수 없는 경우 서면으로 진술하는 문서를 말한다. 그러나 광해군은 듣지 않는다.
1616년 친구인 해주목사 최기(崔沂)가 모함을 받아 재판이 진행 중인데, 친구의 의리로 만난 것이 화근이 되어 강원도 이천에 유배된다. 1622년 유배와 연금에서 해제된 이귀는 평산부사겸 방어사로 임명된다. 또한 1623년 3월 12일 새벽 2시 홍제원에 집결한 1,000여명의 반란군은 ‘강상윤리를 밝힌다’는 명분을 내걸고 반란에 성공한다. 이것은 인조반정(仁祖反正)을 가리킨다. 인조반정은 1623년 4월 11일(음력 3월 12일) 서인 일파가 광해군 및 대북을 몰아내고 능양군 이종을 옹립한 사건을 말한다. 이이첨․정인홍 등 대북파의 무고로 친형 임해군을 사사했으며, 1613년(광해군 5년) 계축옥사가 일어나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왕후를 폐비시켜 서궁에 유폐하였다. 이와 같은 광해군의 패륜 행위를 명분삼아 서인 김류․김자점․이귀․이괄․심기원 등은 반정을 일으켰다. 반란 후 이귀는 인조반정의 1등 공신이 된다. 경성호위대장․이조참판․동지의금부사․대사헌․개성유수․어영사․세자좌빈객․세자이사․지경연사․3차에 걸친 병조판서․이조판서․판의금부사․우찬성․좌찬성․연평부원군 등의 직책을 수행한다.
1633년 2월 후금 침략에 대비책을 논의하던 중 뇌졸중으로 쓰러져 1633년 2월 5일 7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영의정에 증직되고 인조의 묘정(廟廷)에 배향된다.
『조선왕조실록』에 연평부원군 이귀의 졸기(卒記)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졸기’는 돌아가신 분에 대한 마지막 평가를 뜻하는 말로, 『조선왕조실록』에도 당대 주요 인물이 숨지면 졸기를 실었던 것이다.

“연평부원군 이귀가 졸하였다. 이귀는 강개한 성품에다 큰 뜻을 품어 벼슬에 오르기 전부터 자주 글을 올려 국사를 말하였는데, 그 말이 수천마디나 되었다. 광해군의 정사가 어지러운 것을 보고 김류(金瑬)․신경진(申景禛)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서 정사훈(靖社勳: 인조 때 반란을 평정한 공적) 1등에 포상되고 연평부원군에 봉해졌다. 이조판서와 병조판서를 거쳐 좌찬성에 이르고, 충정(忠定)의 시호가 내려졌다. 이귀는 조정에 있을 때 알고는 말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간혹 흥분하여 임금 바로 아래의 최고 대신들을 꾸짖다가 여러 차례 임금의 꾸지람을 받기도 하였으나 고치지 못하였다. 마침내 죽자, 임금이 비통해하며 특별히 하교하기를 ‘연평부원군 이귀는 정성을 다하여 나라를 도왔다. 그 충직함이 세상에 비할 데가 없으므로 내 몹시 애석하게 여긴다. 장례에 쓰이는 물건을 평소의 수량보다 특별히 더 주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참고문헌]: 「묵재 이귀의 생애와 사상 연구」(이기희, 성균관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0),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의정(金義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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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5(연산군 1)~1547(명종 2). 조선 중기의 학자․문인.
자는 공직(公直), 호는 잠암(潛庵) 또는 유경당(幽敬堂)이며, 본관은 풍산(豊山)으로, 서울 장의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공조참판 김양진(金楊震)이며, 어머니는 양천허씨로 허서(許瑞)의 딸이다.
22세(1516)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고, 32세에 문과에 급제한 이래 홍문관 정자(正字)를 시작으로 여러 청요직(淸要職)을 거쳤다. ‘청요직’은 시대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개 사헌부의 장령 1인, 홍문관 당하관 12인, 이조전랑 6인, 예문관 한림 8인을 지칭한다. 이들은 결코 품계가 높지는 않았으나 고위직 관리를 견제하는 역할을 하였으므로 남다른 자부심을 가졌었다. 이 자부심의 배경에는 탐관오리의 자손이 후에 혹 사면을 받더라도 절대로 오를 수 없는 관직이라는 점도 한몫을 하였다. 그래서 2품(육조판서) 이상의 고위 관직에 오르지 못해도 청요직을 제대로 수행한 조상이 있다면, 그 가문은 명문가로 인정을 받았으며 백성과 선비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김안국(金安國), 이행(李荇) 등과 교유하였으며, 이때부터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김안로(金安老)와의 악연으로 인해 정치적 좌절을 겪었으며, 심정(沈貞)의 집안과 혼인한 일로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심정은 당시 신진사류들과 대립하던 훈구세력이었다. 심정이 1515년 이조판서에까지 승진하였으나 삼사(三司)의 탄핵을 받아 물러났다. ‘삼사’는 조선시대 언론을 담당한 사헌부․사간원․홍문관을 합하여 부른 말로, 언론삼사(言論三司)라고도 한다. 또한 1518년에는 형조판서에 올랐으나 조광조(趙光祖) 등 신진사류들의 탄핵으로 관직에서 물러났으며, 이어 연산군을 폐위하고 중종을 추대하는데 공을 세운 사람에게 내린 칭호인 정국공신(靖國功臣)도 삭탈되었다.
이에 심정은 조광조 등 신진사류에 대한 원한을 품고 있던 중 1519년 주초위왕(走肖爲王), 즉 ‘조씨(조광조)가 왕이 된다’는 말을 퍼트리며 남곤(南袞)․홍경주(洪景舟) 등과 함께 기묘사화를 일으키고 사류들을 숙청했다. 1527년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올랐으나, 복성군(福城君)의 옥사가 일어나자 김안로(金安老)의 탄핵으로 관직이 삭탈되고, 강서로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이항(李沆)․김극핍(金克)과 함께 신묘3간(辛卯三奸)으로 지목되어 죽음을 당했다.
그러나 김의정은 인종(仁宗)의 동궁 시절 세자시강원 사서(司書)를 지낸 것을 인연으로 인종이 즉위하자, 김인후(金麟厚)와 함께 측근이 되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인종이 즉위한지 7개월 만에 승하하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은거하여 스스로 ‘잠암’ 또는 ‘유경당’이라는 호를 하며 지내다가 병을 얻어 삶을 마쳤다. 경상도 예천군 광석산 선영에 묻혔다.
김의정은 조선 중기 뛰어난 문장과 의로운 삶의 행적으로 명망이 높았던 인물이다. 그가 생존했던 시기는 훈고세력과 사림세력 사이의 첨예한 대립으로 인해 네 차례의 사화(士禍)가 일어났던 혼란기였다. 사림들이 화를 당한 사건이라는 뜻으로 ‘사화’라고 부른다. 연산군 대부터 명종 대에 이르는 60여 년간의 기간은 사화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시기에 김의정은 『소학(小學)』․『심경(心經)』․『근사록(近思錄)』 등의 독서를 통해 끊임없이 학문에 힘썼으며, 평생 의리에 부합하는 삶을 살았다. 그가 창작한 문학작품에는 이러한 그의 학문과 의리정신이 오롯이 담겨있다.
이에 많은 사람들은 김의정의 삶과 문학에 대해 매우 높이 평가하였다. 남곤(南袞, 1471~1527)은 김의정의 뛰어난 재주를 후진 문학자들 가운데 제일로 꼽았으며,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은 김의정의 문장과 절의는 세상에 영원히 전해져야 할 것이라고 칭송하였으며,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은 김의정을 상서로운 세상에 높이 나는 봉황에 비유하였다. 아울러 조광조(趙光祖, 1482~1519)는 김의정의 「천형부(踐形賦)」에 대해 문장과 논리가 모두 지극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평가하였으며, 정사룡(鄭士龍, 1491~1570)은 「기강부(紀綱賦)」에 대해 작품의 논리가 매우 훌륭하니 평소 실천의 독실함을 볼 수 있다고 평가하였다.
여기서는 김의정이 특히 부(賦)의 창작에 탁월했다는 평가에 근거하여, 그의 ‘부’ 작품을 소개한다.
김의정의 ‘부’ 작품에는 유가적 도리를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가 곳곳에 드러난다. 김의정의 부 작품에 나타나는 유가적 도리의 실천의지는 쉼 없는 공부를 통해 축적한 학문적 소양이 그의 작품 속에 발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김의정의 부를 ‘수신(修身)의 의지’라는 주제에 기초하여 살펴본다.
‘수신’은 유가적 실천항목 가운데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이고, 『대학』의 팔조목에 의하면 수신을 위해 이루어야 할 공부가 격물․치지․정의․정심이다. 『대학』은 사서(四書) 가운데 하나로, 그 내용은 크게 삼강령(三綱領)과 팔조목(八條目)으로 나눌 수 있다. 삼강령은 밝은 덕을 밝히고(明明德), 백성을 친애하며(親民), 최고의 선한 경지에 도달하는 것(止於至善)을 말한다. 또한 팔조목은 사물에 나아가는 격물(格物), 지식을 이루는 치지(致知), 뜻을 진실하게 하는 성의(誠意), 마음을 바르게 하는 정심(正心), 몸을 닦는 수신(修身), 집안을 가지런히 하는 제가(齊家), 나라를 다스리는 치국(治國), 세상을 화평하게 하는 평천하(平天下)를 말한다.
김의정은 이 항목들의 중요성과 실천의지에 대해 여러 작품에서 언급하였다. 「환우부(寰宇賦)」에서는 우주의 진실하고 쉼 없는 운행을 본받아 인간도 스스로 힘쓰고 쉬지 않는 자강불식의 자세로 마음을 수양하여 중화(中和)를 이룰 것을 주장하였다. 중화는 『중용』에 나오는 말로써, 감정이나 성격 등이 지나치거나 치우치지 아니함을 말한다. 희로애락(喜怒哀樂), 즉 기쁜․성냄․슬픔․즐거움의 감정이 아직 사람의 행동에 나타나지 않는 상태를 ‘중’이라 하며, ‘화’는 그러한 것이 이미 행동으로 나타나 절도에 맞음을 말한다. 이러한 중화의 덕이 지극히 이루어지면, 세상이 안정되고 만물이 모두 순조롭게 이루어진다.
또한 「뇌전부(雷電賦)」에서는 번개나 우레와 같은 외부의 어떠한 변화에도 동요되지 않고 잘 대처할 수 있는 것은 본인의 마음을 제대로 다스리는 것에서 비롯함을 피력하였다. 「방예부(放麑賦)」에서는 선행을 베풂에 시비판단이 명확하게 선행되어야 하는데, 이것은 격물․치지와 연계하여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다. 이 외에도 「검각부(劒閣賦)」․「무광지자황부(務廣地者荒賦)」 등에서는 통치자가 수신을 이루어 덕치(德治)를 시행해야만 국가를 온전하게 통치할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천형부(踐形賦)」는 『맹자』「진심(盡心)」에 보이는 “사람이 지닌 형색(形色)은 천성(天性)이니, 오직 성인의 경지에 이른 뒤라야 형색을 실천할 수 있다.”(形色, 天性也, 惟聖人然後可以踐形.)라는 말에 착안하여 창작한 것이다. 조광조의 논평을 참고하면, 이 작품의 창작 시기는 그의 나이 19세 이전으로 유추할 수 있다. 하늘로부터 음양의 이기(二氣)와 오행(五行)을 그대로 품부 받은 인간은 그 자체로 온전한 존재이지만, 각자 자신의 본래 모습을 제대로 살피지 않고 품부받은 대로 살아가지 못함을 개탄하며, 동시에 천형(踐形)을 실현할 것과 나아가 정심(正心) 공부를 통해 본성을 보존할 것을 주장하였다.
우리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형색이 바로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니, 우리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는 각자의 형색을 발현하는 것이다. 우리 몸에 있는 눈․코․입․귀는 각각 나름의 기능이 있으니, 어느 하나 헛되이 있는 것은 없고, 그것 자체가 바로 하늘이 우리에게 부여한 도덕적 준칙이다. 그러므로 나의 형색을 제대로 발현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하늘이 나에게 부여한 이치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김의정은 맹자가 언급한 ‘천형’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천형’을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자신의 마음을 바로 하여 본성을 보전하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요컨대 스스로 법도를 다해야 하니, 어찌 꼭 형체를 실천할 필요가 있으랴? 진실로 나의 이 본성을 다한다면, 형체가 저절로 따라서 드러나리라. 형체는 드러나 눈으로 볼 수 있지만, 이치는 묘하게 숨었으니 마음으로 터득해야 한다오. 마음에서 찾지 않고 형체에서 찾는다면 또한 덕을 다할 수 없다네. 천(踐)이라는 한 글자는 아무런 뜻이 없는 것이 아니네. 이것은 없는 것을 책하여 있기를 바라고, 고요한 것을 두드려 소리를 얻음과 같다오. 돌아보면 바로 여기에 있으니, 그 뜻이 더욱 깊다네. 실천하면 참다운 내가 있고, 실천하지 않으면 참다운 내가 없다네. 마음을 따라 사지(四肢)를 관장하여야 좌지우지할 수 있으니, 이렇게 한 뒤에야 터럭 하나와 머리칼 한 올도 혼연하여 나의 마음을 막지 않으리니. 저 신령한 혼(魂)이 백(魄)을 떠나면 마음이 멋대로 날아가 방종하고, 오직 육체만이 홀로 남아서 마치 빈산의 말라죽은 나무와 같네. 비록 귀와 눈으로 보고 듣더라도 모든 이들은 그것이 빈껍데기 인줄 안다네. 나는 이를 슬퍼하고 두려워하여 이 가르침을 지켜 날마다 살피노라.”

사람이 타고난 형색(품성)을 실천하고 본성을 지극히 해야 함을 강조한 부분이다. 자신의 본성을 제대로 보존한다면, 형색은 저절로 발현될 수 있다. 마음을 보존하지 못한 형색은 방종하게 되고, 그것은 마치 텅 빈 산의 말라죽은 나무와 다를 바가 없다. 비록 사람의 형체는 갖추었다고 하더라도, 그 실상은 한 덩어리 혈기로 이루어진 몸뚱이일 뿐이요, 물건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이처럼 마음을 바로 하지 못하여 본성을 보존하지 못하게 됨은 그 무엇보다 애통한 일이다. 때문에 김의정은 날마다 자신의 마음을 살피고 자신을 성찰할 것을 다짐하였던 것이다.
김의정의 부는 어려운 시어를 구사하지 않고, 경전의 내용을 쉽게 풀이하는 가운데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조광조는 이 작품의 문장과 논리를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고 인정한 것이다.

[참고문헌]: 「잠암 김의정 賦문학 연구-작품에 형상화된 주제 의상을 중심으로-」(김진경, 『우리어문연구』38, 우리어문학회, 2010),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발(李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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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4(중종 39)~1589(선조 22). 조선 중기의 문신.

이발의 자는 경함(景涵), 호는 동암(東菴)이며, 본관은 광산이다. 아버지 이중호(李仲虎)는 예조참판․전라관찰사를 역임하였으며, 어머니 해남윤씨는 최산두(崔山斗)․유성춘(柳成春)과 더불어 호남 3걸이라고 불리는 윤구(尹衢)의 딸이다. 1544년(중종 39)에 해남의 백련동 외가에서 네 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윤의중(尹毅中)의 사위이며, 고산 윤선도(尹善道)의 고모부이다. 이발의 처조카인 윤선도는 정여립(鄭汝立)의 옥사에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음에도 연루되어 온 가족이 몰살되었기 때문에 서인에 대한 뿌리 깊은 원한을 품게 된다. 정여립 옥사는 기축옥사(己丑獄事)라고도 부른다. 기축옥사는 조선 선조 때의 옥사로, 1589년 10월의 ‘정여립이 역모를 꾸민다’는 고발로부터 시작되어 정여립과 함께 3년 여간 그와 연루된 많은 동인이 희생된 사건이다.
1568년(선조 원년)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1573년(선조 6) 9월에 알성문과에 장원급제하여 호당(湖堂)에 들어갔다. 호당은 독서당으로, 조선시대에 국가의 중요한 인재를 길러내기 위하여 건립한 전문 독서연구기구이다. 그 뒤 이조정랑․대사간․대사성․부제학 등을 역임한다. 경학과 문장에 뛰어났으며, 조광조의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이념으로 삼아 선비들의 여론을 주도하고, 임금이 공부하는 곳인 경연(經筵)에 출입하면서 왕도정치를 제창하고 국가의 기강을 확립한다.
왕도정치는 맹자(孟子)가 주장한 정치사상이다. 무력이나 강압과 같은 물리적 강제력으로 다스리는 패도정치와 대비되는 것으로서, 인(仁)과 덕(德)을 바탕으로 도덕적 교화를 중시하는 정치를 말한다. 맹자는 “힘으로 사람을 복종시키면 마음으로는 복종하지 않게 되고, 덕으로 사람을 복종시키면 진심으로 따르게 되니, 덕에 의한 왕도정치를 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중국의 유가들이 가장 이상으로 삼았던 정치사상이다.
조광조의 지치주의란 조선중기의 학자이자 정치가인 조광조가 추구한 이상적 정치이념을 가리키는 말이다. ‘지치’란 『서경』「군진(君陳)」편 ‘지치형향 감우신명(至治馨香 感于神明)’에서 따온 것이다. 잘 다스려진 인간세계의 향기는 신명을 감동시킬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지치’가 조광조에 의해 하늘의 뜻이 실현된 이상사회의 건설을 목표로 하는 정치적 실천운동으로 구체화된 것이다. 유가에서의 이상사회는 하나라․은나라․주나라의 삼대를 가리킨다. 따라서 지치주의란 이상적 정치이념으로써 당시의 백성들을 하나라․은나라․주나라 삼대의 백성들로 만들려는 이상정치의 현실적 실천운동이다. 『서경』은 사서삼경 가운데 하나이다. 사서삼경은 유교의 기본 경전인데, 사서는 『대학』․『논어』․『맹자』․『중용』을 말하며, 삼경은 『시경』․『서경』․『주역』을 이른다.
이조전랑으로 있을 때에는 자파의 인물을 등용함으로써 사람들로부터 원망을 샀으며, 동인의 거두로서 정철(鄭澈)의 처벌문제에 강경한 입장을 주도하였다. 이 때문에 이이(李珥)․성혼(成渾) 등과도 교분이 점점 멀어져 서인의 미움을 받았다고 한다.
이발은 1589년(선조 22)에 기축옥사로 교외에서 ‘죄를 기다리던’ 중 잡혀서 두 차례 모진 고문을 받고, 그해 12월에 매에 맞아 죽었다. 동생 이급(李洁)도 연좌되어 죽었고, 그의 82세 노모와 10세의 아들도 이때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 이발과 이길의 재산이 몰수되었으며, 이들의 죽음은 서인에 대한 동인의 감정이 더욱 악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여기에서 ‘죄를 기다리는 것’은 보통 석고대죄(席藁待罪)라고 부른다. ‘석고대죄’는 죄지은 사람이 거적에 꿇어앉아 윗사람의 처분을 기다리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처벌을 자청하는 것이다. “이놈, 네 죄를 알렸다. 저놈에게 곤장 백 대를 쳐라.” 이런 처분을 기다린다는 뜻이다.
석고대죄는 보통 속옷 차림에 가깝도록 의관을 벗고 하는데, 몹시 수치스러움을 느끼는 것 자체가 큰 벌이다. 죄를 처분할 사람이 결단할 때까지 밤이 깊든, 눈비가 오든 그대로 있어야 한다. 조선시대 정조의 아버지이고, 회고록인 ‘한중록’을 남긴 혜경궁 홍씨의 남편이며, 아버지(영조)와의 갈등으로 뒤주에서 굶어죽은 사도세자가 억울하게 석고대죄를 많이 했다고 한다.
인조 2년(1624) 동생인 이길과 함께 죄가 면해지고 관작이 복원되었으며, 몰수한 재산은 되돌려졌다. 숙종 26년(1694)에는 이발과 이길의 절개와 행실을 기려 그 옛 마을에 정문(旌門)을 세우게 하였다. ‘정문’은 충신․효자․열녀 등을 표창하기 위하여 그 집 앞에 세우던 붉은 문이다.

여기서는 이발의 학문경향을 동인과 서인의 분당, 나아가 남인과 북인의 분당을 둘러싼 논점을 통하여 소개하겠다. 즉 성종(成宗)대 이래 비교적 단일한 색채를 유지하던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다시 동인이 각각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진 원인이 무엇인지를 이들의 학문경향과 연결시키겠다는 것이다.
분당의 원인은 야사(野史)에서 전해지듯, 단순히 서로 간의 사사로운 감정 대립에서 생긴 것이 아니다. 이것은 정파와 학파 사이의 갈등과 투쟁이 다양한 모습으로 전개되는 가운데 각각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거나 또는 학문적 우위를 차지하려는 의도에서 찾을 수 있다.
16세기는 주자학에 입각한 유교적 가치관과 도덕규범이 보편화되는 시기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주자학 이외에 다양한 학문경향이 공존하는 시기였다. 즉 주자학적 사유체계의 정착과 함께 새로운 사유체계의 모색이 다양하게 시도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또한 이 시기가 주자학의 강경한 논리에 사로잡혀 있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다. 여기에서 사회․경제의 발전과 시대상황이 변동됨에 따라, 주자학에 입각한 현실인식과 대응방법뿐만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 비(非)주자학에 입각한 현실인식과 대응방법에 대한 지식인들 내부에 이견이 생기는데, 이것이 결국 정치입장과 정치이념의 차이로 확대되기에 이른다.
물론 전체적으로 보면, 그들 학문의 공통분모는 성리학의 이기론(理氣論)이었다. 그러나 학자와 학파에 따라 이기설에 대한 해석과 이해를 달리하고, 궁극적으로 주자학과 비주자학이라는 서로 상반되는 학문경향이 공존하며 갈등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
서인은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그 중심으로 하였으며, 동인은 이들에서 제외된 다양한 학파의 집합체였다. 동인 내부에는 이황(李滉)과 조식(曺植) 그리고 서경덕(徐敬德)의 학문적 전통을 계승한 이들이 다양하게 포진하고 있다. 때문에 이황과 조식 또는 이황과 서경덕의 사상적 차이가 제자들에 이르러 표면화되고, 급기야 중앙정계에서 남인과 북인이라는 두 세력으로 갈라지게 된다.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진 이후에는 단일 붕당으로서의 ‘동인’의 동질성은 더 이상 부각되지 않게 된다.
북인의 학문적 연원이라 할 서경덕과 조식은 기적(氣的) 사유에 기초하여 정치․사회의 운영론을 모색한다. 서경덕은 성리학 이해에 있어서 주희의 입장보다는 소옹(邵雍)과 장재(張載) 등 북송 성리학자들의 이론을 받아들여 세계의 시원과 운동의 원리를 ‘기’를 중심으로 파악하는 기일원론적(氣一元論的) 세계관을 체계화한다. 이것은 당시 조선학계에 존재하고 있던 다양한 형태의 기적인 사유를 종합하고 체계화한 것으로서, 이선기후(理先氣後)․이본기말(理本氣末)에 입각하여 ‘리’를 사상의 중심에 세우는 주자학(=이학)과는 그 근본에서부터 성격을 달리하는 사유이다. 이에 바탕하여 서경덕과 그의 후학들은 다양한 형태의 기론적 사유를 수용하는데, 이들이 대부분 소옹의 상수학(象數學)에 밝으며, 노장사상이나 양명학에 대해서도 친화적인 태도를 보인다.
조식의 학문도 서경덕의 학문과 유사한 면모를 지닌다. 그가 노장학을 숭상한다거나 양명학을 수용하였다는 세간의 평가는 ‘기’를 중심으로 하는 그의 사상적 면모를 부각시킨 것이라 하겠다.
북인은 대체로 서경덕과 조식의 학문 전통을 계승하는 가운데, 서울․호남과 경상우도 지역을 근거지로 학문 활동을 펼친다. 이들은 서경덕과 조식에게서 직접 배운 제자들이거나 혹은 재전 제자들이다. 호남지역을 근거지로 하여 영향력을 발휘하던 이발은 모두 서경덕의 학문과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이발은 서경덕의 학문에 연원을 둔 김근공(金謹恭)․민순(閔純)의 문하에서 배웠고, 부친인 이중호 또한 민순에게서 배웠다. 이발의 친구이자 사돈인 홍가신(洪可臣) 또한 민순의 제자였다. 또한 이발은 조식의 고제인 최영경(崔永慶)과 가장 친하였으며, 직접 최영경과 정여립과의 만남을 주선하기도 한다.
이발과 사승관계나 친교를 맺는 인물 중 김근공․민순․홍가신은 서경덕 문인이며, 최영경․김우옹은 조식 문인의 대표적 인물이다. 이발은 비록 조식과 직접적인 사승관계에 있지는 않았지만, 조식의 문인들과 학문적 교류가 왕성하다. 이렇듯 이발은 서경덕 문인과 조식 문인과 고르게 두터운 친분을 유지하였는데, 이는 이발의 학문이 서경덕과 조식 학풍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음을 시사해준다고 하겠다.
서인들이 정여립 역모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은 북인계의 주요 인물을 처벌하여 그들의 정치력을 붕괴시키는 방향으로 이루어졌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북인 내부에 존재하는 비주자학적 학문경향을 척결하는데 의도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유성룡(柳成龍)을 비롯한 남인들은 서인의 옥사처리를 관망하거나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여 북인세력의 불만을 사게 된다. 이발이 정여립을 이조전랑으로 추천하였을 때, 이황의 문인인 이경중(李敬中)은 정여립의 사람됨을 이유로 반대하여 무산시킨 일이 그것이다. 예컨대 기축옥사 당시 정여립 역모에 대해, 유성룡 등 남인은 정여립이 일찍부터 ‘훌륭한 선비(善士)’가 아님을 알고 가까이 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반면 정여립을 ‘아름다운 선비(佳士)’로 추대했던 이발․정인홍․정언신․백유양 등 북인은 역모가 조작된 모함이라는 상반된 입장을 보인다.
정여립을 둘러싼 학자들 간의 상반된 평가는 남인과 북인 붕당의 중요한 빌미가 된다. 서인들은 정여립을 역모 혐의와 별개로 사상적으로 주자학을 벗어난 이단(異端)적 인물로 평가한다. 또한 남인들도 정여립을 ‘훌륭한 선비’가 아닌 인물로 경시한다. 이처럼 정여립에 대한 평가를 둘러싸고 서인과 남인이 친화적 모습을 보였던 것은 아마도 조식․서경덕 학파에 비해 이황학파가 이이․성혼학파의 주자학적 정치론을 공유하였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이렇게 볼 때, 북인과 서인, 북인과 남인이 서로 대립하는 중요한 계기 중의 하나는 정여립을 둘러싼 정치적․학문적 견해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기축옥사에서 북인이 많이 죽은 것은 정여립이 북인이었기 때문이다”라는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의 지적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정여립은 북인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때문에 정여립에 대한 상반된 입장은 단순히 정여립 개인에 대한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니라, 그가 내포하는 북인의 학문이나 정치사상에 대한 평가를 달리하는 데서 기인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북인은 학문방법, 정치론, 현실인식 등에서 서인은 물론 남인과도 서로 대비되는 모습을 강하게 드러냈던 것이다.
이로써 기축옥사는 북인과 서인뿐만 아니라, 북인과 남인 간의 정치적․학문적 특성을 명확히 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서경덕․조식의 기론적 사고에 근거한 정여립의 사상과 그 사상에 동조하는 북인은 이이학파의 서인이나 이황학파의 남인과는 달리, 주자학과는 다른 정치성향을 모색한다. 이발의 학문 또한 이러한 ‘기’를 중심으로 세계와 인간을 이해함으로써 주자학 이외의 다른 학문까지도 폭넓게 포용하는 비주자학적 학풍을 견지한 북인의 학문적 전통 속에서 조명해야 할 것이다. 이발은 서경덕․조식의 학풍 속에서 당시 시대적 과제를 고민하고 정국의 실천방안을 모색하였던 북인의 대표적인 학자요 관료였던 것이다.

[참고문헌]: 「동암 이발의 학문경향과 정치활동-청신정치의 청산을 둘러싼 동인과 서인의 갈등을 중심으로-」(김정신, 『호남문화연구』46, 호남학연구원, 20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