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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헌(趙憲: 1544년∼1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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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헌은 본관이 황해도 백천(白川)이다. 휘는 헌(憲)이며 자는 여식(汝式)이다. 호는 도원(陶原), 후율(後栗)이며 중봉(重峯)은 만년의 호이다. 조부 조세우(趙世佑)는 조광조의 문인으로 통진(通津)에서 김포 감정리로 세거지(世居地)를 옮겼다. 조부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부친은 성수침(成守琛) 문인으로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아 집안 형편이 항상 곤궁했다.

조헌은 토정 이지함, 우계 성혼, 율곡 이이의 문인으로 문묘에 종사된 해동 18현 중 한 사람이다. 교서관 박사, 호조 좌랑, 예조 좌랑, 보은 현감, 전라도 도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임진왜란을 맞이하여 금산전투에서 왜군과 싸우다 의병 700명과 함께 사망하였다.

조헌은 귀가 크고 키가 컸으며 눈동자가 별처럼 또렷하였다. 천성이 효순하고 태도가 순진하고 확고하였다. 어려서 모친을 여의고 계모의 사랑을 받지 못했으나 마침내 계모의 마음을 기쁘게 하였다.

학문을 좋아하여 항상 격앙하여 스스로 “하늘이 남자를 태어나게 한 것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했다. 살림이 몹시 가난하여 헤진 옷과 신발을 신고 스승을 찾아다녔는데 바람과 눈보라를 피하지 않았다. 집에 돌아오면 몸소 자기가 땔나무를 등에 져다가 부모를 위해 불을 지폈고 불빛에 비추어 글을 읽었다. 평소의 언행과 강습이 모두 위기의 학문 실천이었다. 대학의 ‘남의 자식 된 자는 효에 멈추어야 되고 남의 신하된 자는 공경에 멈추어야 된다.’ 대목에 이르면 세 번씩 반복하여 완미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요순과 탕무가 아니면 말하지 않았고 공맹과 정주가 아니면 배우지 않았다. 기상을 알 수 있다.

1565년(22세) 성균관에 유학하였다. 여러 유생들과 함께 보우를 논박하는 상소를 올렸다. 대궐 밖에 엎드려 임금의 응답을 기다렸는데 조헌만이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강직한 그의 성품을 알 수 있다.

1567년(24세) 명종 22년 가을 감시에 응시하여 삼장에 합격하였다.

1570년(27세) 선조 3년 파주목 교수가 되었다. 우계 성혼에게 학문을 청하였다. 특히 주역을 배우고자 했으나 성혼이 조목의 학문을 높이며 외우(畏友)라 칭하며 제자의 예로 대하지 않았다.

1571년(28세) 홍주목 교수가 되었다. 토정 이지함을 만나 배움을 청하였다. 가을에는 파주에서 율곡 이이를 만나 뵈었다.

1572년(29세, 선조 5년) 교서관 정자가 되었다. 선조가 전례대로 불사(佛寺)에 향(香)을 내려주자 선생이 상소하여 그 일이 불가하다고 극언했다. 선조가 노하여 장차 사형을 시키려고 했다. 관직을 삭탈하는 것으로 그쳤으나 직성(直聲)을 조정에 떨쳤다.

1577년(34세) 통진 현감으로 재직 중 잘못을 일으킨 노비를 장살하여 부평으로 유배를 당하였다. 다음해 부친상을 당하였으나 유배지에 있어서 장례에 참석하지 못하였다.

1580년(37세) 유배지에서 석방되었다. 윤4월 보령으로 가서 이지함의 상에 곡하였다. 가을에는 해주 석담으로 율곡선생을 찾아가 수개월간 강학하였다. 조목의 후율(後栗)이라는 호는 율곡을 존경하여 율곡(栗谷) 선생의 뒤를 잇는다는 뜻을 취했다.

1581년(38세, 선조 14년) 봄 공조 좌랑을 거쳐 전라도 도사가 되었다. 송강 정철이 본도의 관찰사가 되자 조헌이 정철을 헐뜯는 말을 듣고 그의 막하로 있고 싶지 않아 병을 핑계대고 벼슬을 그만두려 했다. 성혼과 이이의 권유로 만나게 되어 마침내는 금석처럼 변치 않는 교제를 맺었다.

1584년(41세, 선조 17년) 율곡이 사망하여 곡을 했다. 이이와 성혼의 지지를 받던 정여립이 이이, 성혼, 반순 등 서인의 주요 인물을 비판하고 동인으로 돌아섰다. 이발이 정여립에 동조하자, 조헌은 그와 절교하고 정여립의 소를 논박하는 상소문을 거듭 올렸다. 서인의 앞잡이로 몰려 배척받자 옥천으로 내려가 살 것을 결심했다. 겨울에 대계(臺啓)로 인하여 파직되었다. 옥천으로 옮겨 후율정사(後栗精舍)를 짓고 강학하며 후학 양성에 힘썼다.

1586년(43세) 공주목 교수가 되었다. 10월 만언소(萬言疏)를 올렸는데, 그 중에 “신이 이 세상에 스승으로 삼은 자가 세 사람으로 이이, 성혼, 이지함입니다. 세 사람은 학문의 나아간 바가 비록 각기 다르지만 그 청심과욕(淸心寡慾)하고 지극한 행실로 세상의 모범이 됨은 똑같습니다. 신이 일찍이 이 세 사람이 신에게 가르친 것으로써 선비들을 가르치려고 하였으나, 사설(邪說)이 성행하여 신이 이이와 성혼의 무리라는 말을 듣고서는 대부분 등을 돌려 달아났으며 꾸짖고 욕하는 말이 사방에서 일어났습니다. 신이 못난 까닭에 사우(師友)에게까지 욕이 미쳤으니 참으로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했다.

1589년(46세, 선조 22년) 4월 도끼를 지고 대궐에 나아가 만언소를 올렸으나 양사와 옥당의 차자를 올려 벌주기를 하므로 함경도 길주 영동역으로 유배되었다.

당시 조헌이 옥천에서 재를 넘으며 2천여 리 길을 가며 온갖 곤욕을 극도로 겪었으나 사기(辭氣)는 조금도 꺾인 적이 없었다. 영북 지방에 돌림병이 한창 극성하여 그곳을 지나다가 죽는 자들이 열이면 대여섯이나 되었다. 조헌의 아우와 두 하인도 모두 죽었는데, 극도로 슬프고 가슴이 아팠지만 걱정하거나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고 주변에 시체가 쌓인 가운데에서도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간혹 몸소 병자의 집에 찾아가서 약을 주어 살려내기도 하였는데 끝까지 병에 걸리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선생의 정기(正氣)는 여귀(厲鬼)도 감염시키지 못했다.” 했다.

1591년(48세, 선조 24년)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사신을 보내와 명나라를 칠 길을 내놓으라고 하여 조정에 소동이 일어났다. 이때(3월경) 조헌은 옥천에서 상경하여 도끼를 지고 대궐로 나아가 일본 사신을 참수하고 명나라에 보고할 것을 상소하였다.

상소가 대궐에 들어간 지 사흘이 지나도 아무 회보(回報)가 없자, 주춧돌에 머리를 짓찧으니 피가 얼굴을 덮을 정도로 흘렀다. 어떤 자가 그 자고(自苦)함을 비웃자 “내년에 산속으로 달아나 숨게 되면 반드시 내 말이 생각날 것이다.” 했다. 스스로 중국에 알릴 주문(奏文)과 유구(琉球)ㆍ대마(對馬)ㆍ일본(日本)의 유민들에게 유시하는 글과 현소(玄蘇)를 참수한다는 죄목 및 영남과 호남의 왜적을 방비하는 계책을 기초하였는데, 그 대개는 이전의 상소와 같았으되 말씨가 더욱 격절하였다.

1592년(49세, 선조 25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어머니를 청주 선유동으로 피신시키고 돌아왔다. 5월 격문을 지어서 병졸을 모집하였다. 제자 김절(金節), 김약(金籥), 박춘검(朴忠儉) 등과 함께 향병(鄕兵)을 소집하여 보은 차령에서 북상하는 왜적을 퇴각시켰다. 6월 제자 이우(李瑀), 김경백(金敬伯), 전승업(全承業)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약 1,600여명을 모아 8월 청주에서 영규(靈圭)의 승려군과 합류하여 왜적을 격파하고 청주성을 수복하였다.

충청도 순찰사 윤국형(尹國馨)의 방해로 의병이 강제 해산 당했다. 불과 700여명 남은 병력을 이끌고 금산으로 행진하였다.

8월 16일에 군대를 옮겨 금산으로 향하였는데, 어떤 자가 금산의 왜적들이 모두 정예군이고 수효도 수만 명이나 되므로 섣불리 건드려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조헌이 비문하며 맹세하기를, “군부(君父)가 지금 어디에 계시는데 감히 형세의 이둔(利鈍)을 말하는가?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되니 나는 한번 죽는 것만을 알 뿐이다.” 했다. 마침내 승장 영규와 더불어 군대를 연합하여 진격했다.

앞서 호남 순찰사 권율과 더불어 18일에 일제히 군대를 움직여 왜적을 협공하기로 약속하였는데 권율이 서신을 보내 기일을 바꾸었으나 이미 금산군의 십리(十里) 밖에까지 도달하였다. 왜적이 조헌의 군대 뒤에 후원군이 없음을 알아채고서 전열을 갖추지 못했을 때를 틈타서 맞받아 공격해왔다. 조헌이 군중에 명령하기를, “오늘은 단지 한번 죽는 일만 있을 뿐이니, 사생과 진퇴함에 있어 오직 의(義) 자에 부끄럽지 않게 하라.” 하자, 사졸들이 모두 명령한 대로 따르겠다고 했다.

한참 동안 힘껏 싸우자 왜적은 세 번이나 패배하여 거의 궤멸할 지경에 이르렀는데, 우리 병사들도 화살이 바닥나서 어쩔 수가 없었고 해가 저물어가니 사졸들은 맥이 풀렸다. 이에 조헌이 의기(意氣)가 자약(自若)하여 더욱 다급하게 독전(督戰)하니 왜적이 정예병을 모조리 투입하여 공격해왔다. 마침내 장하(帳下)에 들어가자 편비(褊裨) 서너 명이 있다가 탈출하게 하려고 뛰쳐나가기를 극력 청하였으나, 조헌은 웃으며 말안장을 풀면서 말하기를, “여기가 내가 순절할 곳이다. 장부는 한번 죽을 따름이니 난리에 임하여 구차하게 죽음을 면해서는 안 된다.” 하고서 북채를 당겨 북을 두드렸다. 사졸들이 앞 다투어 죽기를 각오하고 적에게 달려들었는데 심지어 빈주먹으로 서로 치고 때리면서도 오히려 자리를 떠나지 않았으며, 7백 명이 한 사람도 달아나 살아남은 자가 없었다. 왜적들도 죽은 자가 또한 그보다 더 많았으므로 기세가 마침내 크게 꺾이어 남은 병력을 거두어 진으로 돌아갔다.

곡성이 들판에 진동하였고 이에 시체를 쌓아 불에 태우니 사흘이 지나도록 불이 꺼지지 않았으며, 마침내 무주에 주둔하고 있던 왜적들과 함께 모두 달아났으므로 호서 지방이 그에 힘입어 온전하게 되었다. 전란이 일어난 이래로 왜적의 기세를 꺾고 진로를 막아낸 공이 이보다 나은 적이 없었다.

1603년 유생들이 금산의 순절(殉節) 장소에 순의비(殉義碑)를 세웠다.
1609년(광해군 1년) 충청도 유생들이 사액을 청하여 표충사(表忠祠)라는 사액을 하사받았다.
1649년(인조 27년) 문열(文烈) 시호를 받았다.
1656년(효종 7년) 신도비(神道碑)가 세워졌다. 김상헌(金尙憲)이 비문을 짓고 송준길이 글씨를 쓰고 김상용(金尙容)이 전액(篆額)을 썼다.
1666년(현종 7년) 호남 관찰사 민유중이 문집을 간행하였다.
1734년(영조 10년)6월, 조정에서 자손 중 적손(嫡孫, 큰집 자손), 지손(支孫, 작은 집 자손)을 가리지 않고 관리로 등용하라는 명을 내렸다. 『조천일기(朝天日記)』의 간행을 명하였다.
1740년(영조 16년)7월, 임금이 5대손 조혁(趙㷜)을 면담하고 선정(先正, 훌륭한 조상)의 행적에 대해 물어보았으며, 운각(芸閣, 서고)에 명하여 문집을 간행하여 자손과 서원에 보급하도록 명하였다.

신도비명이 그 삶의 정절을 고스란히 적었다. “하늘이 선(善)을 베풀어 중화(中華, 중국)라고 해서 풍족하게 주지 않고 이적(夷狄, 오랑캐)이라고 해서 인색하게 주지 않네. 선생께서 그것을 받으시어 효도는 자식들의 법이 되고 충성은 신하들의 법이 되었으니, 이 마음과 똑같은 자라면 누가 공경하고 감복하지 않으리오. 일은 만 갈래로 다름이 있고 이치는 간혹 하나가 아니기도 하네. 산 위의 구름은 쉽게 개이지만 임금의 총명은 오히려 미혹되었네. 포악한 물고기도 길들일 수 있으나 간사한 마음은 고치기가 어렵네. 임진년(壬辰年)ㆍ계사년(癸巳年)에 천지(天地)가 반복(反覆)되고, 선생의 일신(一身)이 홀로 인극(人極)을 담당하였네. 사신의 목을 베라고 위언(危言)하니 상하(上下)가 모두 실색(失色)하였네. 피눈물을 흘리며 대중에게 맹세하니 의로운 군사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네. 청주(淸州)에서 시전(試戰)하여 왜노(倭奴)들의 넋을 빼앗았네. 글을 올려 승전(勝戰)을 알리니 온 조정 사람들이 기뻐하였네. 재차 금산 전투에 나아가니 화살이 빗발치듯하였네. 사람은 용감하게 왜적을 죽이는데 하늘은 바야흐로 날씨가 나빴네. 구름 속에 짧은 해가 매몰되고 군사들은 촌철(寸鐵)조차 모자랐네. 부자(父子)가 분전(奮戰)하며 소리치매 하늘이 울부짖고 산악이 갈라졌네. 선생의 죽음을 남들은 몸을 위해 애석히 여기지만, 선생의 죽음을 나는 나라를 위해 애석히 여기네. 옛날에 전횡(田橫)의 무리들은 따라 죽은 자들이 오백 명이었지만, 지금 이에 순의(殉義)한 자들은 7백 명이나 되었네. 훌륭하도다 선생이여 만고토록 열렬하게 빛나리니, 신도비에 이름을 드리우매 홍필(鴻筆, 달필)이 아닌 게 부끄럽네.” 했다. ‘홍필이 아닌 게 부끄럽다’는 이 말이 가슴에 다가온다.

<참고문헌>

국역 조선왕조실록
국역 국조인물고
「조헌 행력」, 『한국문집총간 인물연표』(http://www.krpia.co.kr/)

정엽(鄭曄, 1563-1625) 2


정엽(鄭曄, 1563-1625) 2                                 PDF Download

 

정엽은 본관이 초계(草溪: 경남 함양군)이고 자는 시회(時晦), 호는 수몽(守夢) 혹은 설촌(雪村)이다. 조부는 찰방을 역임한 정선(鄭璇)이고, 부친은 진사 정유성(鄭惟誠)이다.

1565년(3세) 태어날 때 특이한 자질이 있어 3세에 글을 배웠다.

1566년(4세) 여러 아이들과 이웃집에서 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율곡(栗谷) 이이(李珥)와 임당(林塘) 정유길(鄭惟吉)이 비범한 정엽의 모습을 보고 성명을 물어보자 매우 분명하게 대답하였고 시를 배웠는지 물어보자 곧바로 틀리지 않고 대답하였으므로 온 좌석이 경탄하며 신동이라 했다.

1578년(16세) 선조11년 이산보(李山甫)의 딸과 결혼하였다. 이산보의 사촌으로 북인의 영수 인 이산해가 있고, 숙부가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이다. 이지함이 정엽을 보고 “후일에 반드시 큰 이름을 떨칠 것이다.” 했다. 정엽은 용모가 준수하고 기국이 웅걸했다. 이산보가 정엽에게 훌륭한 스승을 찾아 공부하라고 권유하자 송익필(宋翼弼)을 찾아가 배우고, 이어 성혼(成渾)과 이이(李珥)의 문하에 출입하여 배웠다. 이에 호방한 습관을 털어내고 단정함고 엄숙함으로 몸가짐을 가졌다. 경서의 뜻을 분석하고 공부의 목표를 분명히 살펴 여러 사람과 즐겁게 지내면서 유익한 바를 구하였는데, 더불어 교유한 사람들이 모두 다 당시의 유명한 사람들이었다.

1581년(19세)에 집에서 책을 지고 나와 도봉서원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학문에 매진하였다. 후일 정엽의 막역지우이자 그의 비명을 쓴 이정구와 함께 도봉서원에서 수학했다. 이정구가 4개월 동안 머물며 서로 학문을 강마하고 익혔는데 정엽이 이미 말을 천천히 하고 걸음걸이를 법도가 있게 하여 신심(身心)을 수렴한 것을 보고 매우 존경했으며, 그 마음이 오래되어도 여전히 시들지 않았다 했다.

1583년(21세)에 별시 문과에서 병과 12위에 올라 승문원에 선발되었다. 4년 뒤 1587년에 감찰, 형조 좌랑이 되었다. 1591년에는 할머니 상을 당하여 삼년상을 치렀다.

1596년(29세) 예조 정랑(禮曹正郞)으로 있다가 고급사(告急使)에 차출되어 명의 밀운 군문(密雲軍門)에 가서 병력을 요청하였다. 돌아와서 성균관 사성, 수원 부사에 임명되었다. 수원은 경기의 요새 성읍으로 새로 군사를 나누어 삼남(三南)의 큰 길목을 담당했다. 정성을 다하여 민정을 펼치니, 백성이 안도하여 부모처럼 떠받들었고 고을 백성들이 서천에서처럼 비석을 세워 덕을 칭송했다.

1598년(31세) 응교와 집의에 임명되어 시강원 필선을 겸했다. 이어 동부승지로 승진하여 우부승지에 이르렀다가 교체되어 형조 참의에 임명되었다. 동지사(冬至使)로 차출되어 연경(燕京, 지금의 북경)에 갔다가 돌아와 나주 목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돌아갔다. 그 뒤 도사 영위사가 되어 관서에 갔다. 앞서 기자헌(奇自獻)이 인척으로 벼슬길에 나와 은밀히 권력을 도모하려고 겉으로 선비를 좋아하는 척하였으므로 당시의 의논이 그를 이조 참판으로 추천하였으나 정엽은 평소 그의 사람 됨됨이를 미워한 나머지 불가하다고 하였다. 기자헌이 누차 정엽의 집에 들렀으나 한 번도 답례를 하지 않았는데, 이로 말미암아 기자헌이 크게 앙심을 품었다.

1602년(40세) 정인홍(鄭仁弘)이 권력을 잡아 성혼을 배척하였다. 성혼의 문인이었던 정엽도 함경북도 종성 부사로 좌천되었다. 다음 해 1603년 오랑캐 기병 수만 명이 갑자기 함경북도의 종성 아래에 접근했다. 정엽은 성루로 올라가 성 안의 백성들을 동원하여 군복을 입히고, 깃발을 많이 세워 조용히 기다렸다. 그러자 적병이 7일 동안 성을 포위하다가 수비가 있는 것으로 의심하여 떠나고 다만 한 사람만 붙잡혀갔다. 그 즉시 사실대로 조정에 보고하였다. 그런데 사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던 기자헌이 성을 완전히 지키고 적병을 물리친 공로는 거론하지 않고 결국 한 사람이 붙잡혀간 것을 죄안으로 꾸며서 의금부로 붙잡아다 국문한 다음에 동래로 귀양을 보냈다.

1612년(50세) 광해군 4년 도승지로 있을 때 왕의 경연에 자주 나갔다. 광해군이 경연을 소홀히 하는 것을 보고 직언을 하였다. 광해군은 간언을 듣고 그 다음날 경연에 나왔다. 경연에서 어떤 신하가 궁중의 말이 밖으로 나간다고 아뢰자 정엽이 말하기를, “신은 외부의 말이 궁중으로 들어오는 것을 우려한다.”고 하니, 소인배들이 눈을 흘겨보았다. 정엽은 호조참의로 강등되었다가 품계가 승진되어 참판에 올랐다.

1613년(51세) 다시 도승지가 되었다. 박응서(朴應犀)가 옥중에서 고변하자 이이첨(李爾瞻)의 무리들이 큰 옥사를 일으켜 국구(國舅)와 그의 세 아들을 죽이고 일시의 명류(名流)들이 체포되어 옥에 가득 찼다. 정엽이 동료들과 더불어 아뢰려고 하니, 동료들이 모두 벌벌 떨며 감히 대답하지 않았으므로 상소 한 장을 엮어 올리려 했으나 어머니가 만류하여 상소를 포기했다. 도승지를 물러났다.

1616년(54세) 동지의금부사가 되었다가 자헌대부로 승진하였다. 때마침 이정귀가 정엽과 함께 대비가 있는 경운궁으로 가서 서반(西班)의 관직에 서용된 것을 사은하려고 갔는데, 궁문을 폐쇄한 지 이미 수년이 되어 잡초가 뜰과 계단을 뒤덮어버렸으므로 서로 쳐다보며 눈물을 훔치었다. 그때 큰 가뭄이 들어 남문을 닫아버렸다. 정엽이 말하기를, “열린 문을 닫을 필요가 없고 닫힌 문을 열어놓으면 하늘이 반드시 비를 내릴 것이다.”고 하였는데, 그 말이 누설되었다. 이이첨이 매우 노하여 국문을 열려고 하니 어떤 사람이 이이첨에게 말하기를, “이는 한 번 해학을 해본 것 같다. 왜 말을 가지고 사람을 죽이려고까지 하는가?”라고 하자, 이이첨이 말하기를, “해학을 한 사람이 눈물을 흘린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노여움이 조금 풀려서 이정귀와 정엽이 모두 화를 면했다.

1617년(55세) 조정에서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해야 한다는 폐모론(廢母論)이 제기되자 반대하고 외직을 요청하여 양양 부사로 나갔다. 1년 후 백관들이 대궐에 나가 모후 폐위를 청하였다. 이때 같이 따라가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법망에 걸렸으나 정엽은 전 해에 이미 외직 벼슬로 옮겨 숨어살다가 화를 면했다.

1623년(61세, 인조 1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조정에 나가 강화도로 유배되는 광해군을 위해, “폐주(廢主)가 비록 스스로 하늘과 관계를 끊기는 하였으나 신하들이 일찍이 섬기었으니 마땅히 곡하며 전송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보다 앞서 정엽이 광릉(廣陵)에 있을 적에 어떤 서생이 은밀히 반정의 거사에 대해 고했는데, 정엽이 말하기를, “인륜이 이미 끊어져버렸으니 이때에는 종묘와 사직이 중요하다. 다만 한 번 차질이 생겨 선비가 모두 섬멸될 경우에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고 나라도 뒤따라 망할 것이다. 나처럼 사리에 어두운 선비는 마땅히 천지의 큰 분수를 지킬 뿐이다.” 했다. 이때에 이르러 그 말이 점차로 잘못 전달되어 정엽의 죄안(罪案)이 되어버렸으므로 병환을 핑계대고 향리로 돌아갔다. 여러 명인(名人)들이 정엽이 조정을 떠났다는 말을 듣고 모두 다 물러나가려고 하자 정엽을 배척한 사람이 크게 후회하여 옛날처럼 서로 사이좋게 지내면서 다 함께 국사에 힘쓸 것을 다짐하니 분분한 의논이 안정되었다.

이해 3월에 정엽을 지돈녕부사로 삼았는데, 사관이 “정엽은 자질이 영민하고 기국이 크며 또 경술(經術)에 능통하였고 관직에 임해 일을 처리하는 데 대단한 능력을 발휘하였다.” 기록했다. 이어 성균관 대사성을 맡았다. 당시 인조가 교화를 밝히고 선비의 풍습을 바로잡는 것을 급선무로 여겨 선비들의 명망이 있는 사람을 간택하여 사유(師儒)의 장으로 삼으려고 하였으나 적임자를 찾기 어려워 조정에 자문하니 대신이 입을 모아 정엽을 추천했다. 정엽이 학교의 제도를 상정(詳定)하여 대대적으로 학교와 재실(齋室)을 수리해놓고 선비들로 하여금 거처하면서 학문을 강론하고 날마다 책을 가지고 가르침을 받도록 하였는데, 모두 법도가 있어 볼만하였다. 그때 이조 참판의 자리가 비어서 정엽이 첫 번째 후보로 선발되었으나 인조가 정엽이 아니면 선비를 육성할 수 없다고 하여 윤허(允許, 허락함)하지 않았다. 그 뒤 인조가 대신에게 묻기를, “옛날에 실직(實職)을 맡으면서 대사성을 겸임한 사람이 있었는가? 정 아무개는 어찌 한 임무만 국한시킬 수 있겠는가?” 했다. 대사간에 임명하고 특별히 명하여 대사성을 유임하라고 했다. 이는 전에 없던 특별한 예우였다.

1624년(62세)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영상(領相) 이원익(李元翼)이 도체찰사(都體察使)가 되어 정엽을 부관으로 삼으려고 하니 조정의 의논이 두 사람이 다 나가서는 안 되므로 정엽은 조정에 있으면서 책략을 세워 대응하도록 하였다. 후에 이원익과 정엽은 모두 가지 않았다. 적병이 깊이 쳐들어와 도성의 민심이 술렁거리자, 정엽이 말하기를, “임금이 왕자와 대신으로 하여금 금중(禁中)에 들어가 숙직하게 하여 위태롭고 의심스러운 상황을 진정해야 한다.” 하였다. 이제(李瑅)가 변란 초기 세력을 불리지 못한 것이 이 때문이었다 한다. 송도가 함락되자 인조가 신하들을 불러 대책을 의논하였으나 도성을 지켜야 할지 떠나야 할지 결정되지 않았다. 대신 이하가 모두 감히 먼저 말하지 않자 정엽이 큰 소리로 말하기를 “나라의 존망이 호흡의 사이에 달려있는데, 어찌 대신이 얼버무리고 있을 때이겠는가? 도성은 지역이 넓고 커서 지키기 어렵고 강도(江都)는 바다 가운데 있으니, 남쪽 공주(公州)로 내려가 삼남(三南)의 군사를 모집하여 회복을 도모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니, 임금이 곧바로 그 의논을 따랐다.

1625년(63세) 병을 얻어 사망하였다. 부음을 들은 인조 임금은 매우 슬퍼하며 그에게 의정부 우의정의 벼슬을 내리도록 명하였다. 아울러 조회를 중지하고 채소 반찬을 들었으며 특별한 애도를 표했다. 정엽이 병환이 위독하자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고 사정(邪正)을 분변하는 것’을 요점으로 삼아 차자(箚子)를 엮었다. 그의 손자 정원(鄭援)이 대궐에 나아가 올리니 인조가 답하기를, “선경(先卿)이 남긴 차자를 보니, 죽음에 임해서도 임금을 잊지 않아 그 절실한 충직(忠直)이 보통보다 월등하였으므로 재삼 펼쳐서 읽어보고 내 매우 슬퍼 탄식하였다. 내가 비록 아는 것이 적고 사리에 어둡지만 감히 마음에 새기어 선경이 지하에서 소망한 것을 저버릴 수 있겠는가?” 했다.

그 유차의 대략은 이렇다.

“신은 질병이 침중하여 임금을 배알할 길은 없으나 임금의 잘못과 나라의 걱정이 마음에 걸려 잊기 어려운데 어찌 감히 소회(所懷)를 숨김으로써 큰 성은을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지금 백성에게 거두는 것이 절도가 없으므로 원근의 백성들은 탄식하고 있고 군대는 헛되고 장부만 있을 뿐이므로 전수(戰守)에 아무런 계책이 없으며, 기강이 해이해져 모든 직책이 실추되어 있습니다. 이 세 가지는 오늘날의 고질입니다만 신이 걱정하는 것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크게 걱정할 것은 오직 전하의 한 마음에 대한 그것입니다. 전하께서는 강론을 열심히 하지 않은 것이 아닌데 이치를 살피는 데에 정밀하지 못한 점이 있고, 사욕을 극복하는 일이 엄격하지 않은 것이 아니나 사심을 버리는 데에는 미진한 점이 있습니다. 그런 때문에 명령을 내리고 조처를 시행하는 데에 공과 사가 서로 뒤섞이고 하자와 과오가 마구 발생하니 신은 삼가 개탄하는 바입니다. 지금부터는 맹렬하게 허물을 반성하여 자책하시고 중앙과 지방에 고하여 널리 직언을 채취하되, 자신을 깨우치는 일에 언급된 것이라면 과감하게 고치고, 폐단을 개혁하는 일에 언급된 것이라면 단점은 버리고 장점은 취하소서. 또한 학문을 강론하는 자리에서나 한가히 계시는 가운데서는 신하들을 소대(召對)하여 백성을 안보하고 군사를 훈련하는 방법을 강론하셔서 먼 장래를 위하는 계책과 자손의 안락을 위하는 모책으로 삼으소서.”

<참고 문헌>

국역 조선왕조실록
국역 국조인물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홍천경(洪千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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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천경(洪千璟, 1553년〜1632년)은 조선시대 중엽에 남원교수, 첨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기대승(奇大升), 이이(李珥), 고경명(高敬命) 등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으며, 광해군 1년에 과거시험에 응시하여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김천일 장군을 도와 군량의 수집과 수송을 담당하고 정유재란 때는 권율 장군을 도와 명나라 사신에게 글을 보내거나 의병모집의 격문을 작성하는 등 문서를 관장하였다.

1553년(1세)
명종 8년에 아버지는 홍응복(洪應福)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풍산(豊山, 지금의 경북 안동), 자는 군옥(群玉), 호는 반항당(盤恒堂)이다.
어려서 기대승(奇大升), 이이(李珥), 고경명(高敬命) 등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다. 유학에 조예가 깊고, 충의 정신이 강했다.

1589년(36세)
이해 10월 기축옥사(己丑獄事) 사건이 일어났다. 정여립이 모반을 꾸민다는 고발로부터 시작된 이 사건은 정여립과 함께 수많은 동인들이 희생을 한 사건이다. 당시 서인의 영수 정철(鄭澈)이 이 사건을 조사, 지휘하였는데, 자신 당한 개인적인 원한과 서인들의 집단적인 분노를 이 사건으로 해소하고자 하였다. 동인의 편에 서 있던 윤선도는 자신의 저서 고산유고(제3권)에서 기축옥사와 관련하여 홍천경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논한 적이 있다.
“기축년(1589년, 선조 22년)에 옥사(獄事)를 조작할 당시에, 위관(委官)인 정철(鄭澈)과 동복(同福)의 소유(疏儒)인 정암수(丁巖壽)와 나주(羅州)의 사인(士人)인 홍천경(洪千璟) 등이 없는 사실을 있는 것처럼 날조하여 비단에 문채를 수놓듯 온갖 방법으로 얽어매었는데, 그때에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거론하여 하나의 죄안(罪案)으로 더 첨가하지 않았단 말입니까. 그리고 어찌하여 세월이 오래 지난 오늘에 와서야 이런 말이 있게 되었단 말입니까. 그 말이 진실이 아니고 실로 날조된 것임을 알기 어렵지 않습니다.”
그리고 윤선도는 홍천경의 인물됨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비판하기도 하였다.
“임오년(1582) 연간에 유몽정(柳夢鼎)이 나주 목사(羅州牧使)로 있을 당시에, 정개청(당시 나주교수羅州敎授)의 제자인 나주 사인(士人) 나덕준(羅德峻)과 나덕윤(羅德潤) 등이 대안동(大安洞)에 서재를 짓고 공부하는 장소로 삼았는데, 어느 날 나덕준 등이 향음주례(鄕飮酒禮)를 베풀고 정개청을 받들어 귀한 손님으로 모셨습니다. 유몽정 나주목사가 이 말을 듣고 가서 참관하면서, 그 성대한 예절의 모습을 찬미하며 탄식하기를 ‘고례(古禮)가 행해지는 광경을 오늘 보게 되었으니 어찌 성대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 고을은 바로 인재의 부고(府庫)인데 한갓 사장(詞章)만 힘쓰고 있으니, 모름지기 선생 같은 분을 얻어야만 사림의 기풍을 변화시킬 수 있겠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봉소(封疏)를 올려 위에 아뢰자, 정개청을 제수하여 나주 훈도(羅州訓導)로 삼았습니다.
이에 정개청이 재삼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자 어쩔 수 없이 억지로 몸을 일으켜 부임하였습니다. 그러고는 옛사람들이 전한 스승과 제자의 예법을 엄격하게 행하는 한편, 《소학(小學)》 및 《여씨향약(呂氏鄕約)》 등 성경현전(聖經賢傳)으로부터 《성리대전(性理大全)》ㆍ《심경(心經)》ㆍ《근사록(近思錄)》에 이르기까지 가르침을 베풀고, 틈틈이 《가례(家禮)》ㆍ《의례(儀禮)》ㆍ《예기(禮記)》 등 제서(諸書)를 가지고 정성스럽게 교도(敎導)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행한 지 1년 남짓 되는 사이에 효제(孝悌)와 예의(禮義)의 기풍이 향당(鄕黨)의 사이에 날로 자라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문인(文人) 재자(才子)로서, 한갓 글 짓는 것을 가지고 스스로 높은 체하는 자들이 집단으로 모여서 조소하고 희롱하기도 하였습니다. 또 교생(校生)인 홍천경(洪千璟)이라는 자가 자신의 글 솜씨를 뽐내며 한 번도 향교(鄕校)에 들어오지 않자, 정개청이 목사(牧使)에게 고하여 회초리로 다스렸으므로 그가 마침내 앙심을 품기에 이르렀는데, 정개청은 이를 개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윤선도는 홍천경이 정여립 모반사건의 조작에 관련되어 있다 증거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였다.
“아, 정개청이 자주 정여립과 산사에서 만나 모의하면서, ‘누구를 섬긴들 나의 임금이 아니겠는가.’라는 이야기까지 나왔다고 한다면,(이런 일이 있었다고 서인들이 고발한 것임-필자 주) 그 상황에 정말 의심할 만한 점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따라서 그 당시에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다면, 같은 마을의 홍천경(洪千璟) 등이나 이웃 고을의 정암수(丁巖壽) 등이 몰랐을 리가 결코 없는데, 나주에서 무함하여 보고할 때나 위관(委官)과 함께 죄를 얽어 만들 즈음에 어찌하여 이에 대해서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단 말입니까.”
미수(眉叟) 허목(許穆 1595〜1682)의 문집인 기언(記言)에 「정곤재(개청)의 사적」이 실려 있는데 여기서 허목도 다음과 같이 홍천경을 비판하였다.
“곤재(困齋) 선생 정씨는 휘가 개청(介淸)으로 선조 때의 징사(徵士)이다. 선생은 옛것을 독실하게 믿고 좋아하였는데, 은거하여 글을 가르치니 제자들이 날로 모였다. 선생이 제자를 거느리고 대안학사(大安學舍)에서 향음주(鄕飮酒)의 예를 행하자 목사 유몽정(柳夢鼎)이 가서 보고 감탄하기를 “삼대(三代)의 예가 여기에 있구나!” 하고, 그 훌륭함을 나라에 천거하여 주(州)의 훈도(訓導)로 삼았다. 선생(정개청)은 사제의 예를 엄격히 하여 교육하였는데, 한결같이 《소학(小學)》과 《남전향약(藍田鄕約)》을 따르고 관혼상제(冠婚喪祭)를 중히 여겼다. (당시) 향교의 생도 중에 홍천경(洪千璟)이란 자가 있었는데, 조소하고 가르침을 따르지 않으므로 목사(나주 목사 유몽정)가 그를 벌주었는데, 도리어 말을 꾸며 내어 비방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1592년(39세)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각처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1537년〜1593년)의 의병에 합류하여 군량의 수집, 수송 등을 담당하였다.

1597년(44세)
일본군들이 다시 침략해왔다.(정유재란) 도원수 권율(權慄)의 부대에 소속되어 문서를 관장하고, 의병모집의 격문을 작성하였다.

1609년(56세)
광해군 1년. 광해군이 선조의 뒤를 이어 즉위함에 따라 대북파의 이산해, 이이첨, 정인홍 등이 광해군을 지지한 공로로 중용되었다. 광해군은 직위 초에 당쟁의 폐해를 억제하기 위해서 서인과 남인 측 인사들을 함께 대우하였으나 대북파의 세력은 날로 드세어졌다. 이에 따라 이해 10월 11일 서인에 속했던 홍천경에 대해서 사간원은 광해군에게 다음과 같은 보고를 하였다.
“홍천경은 본시 성품이 음흉하고 간특한 사람으로서 어진 선비를 무함하다가 사림(士林)에 죄를 지어 잇달아 정거(停擧, 과거 응시자격 제한)를 당했으니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자입니다. 지난번 복시(覆試) 때에도 공론이 사라지지 아니하여 또 정거를 당해 첫 날에는 응시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곧바로 정거가 풀려 복시에 참여하였습니다. 대체로 정거를 해소하는 규례는 여러 사람의 의논이 합치된 뒤에야 할 수 있는 것인데 몇몇 사람이 멋대로 해소시켰으니, 이것은 옛 규례를 무너뜨렸을 뿐만 아니라 공론을 무시한 것이 그지없습니다. 따라서 그날 해소시키기를 주장한 사관(四館)의 관원들을 모두 파직시키소서.”
이러한 건의를 받고 광해군은 다음과 같이 답을 하였다.
“홍천경이 어떠한 사람인지 알지 못하지만 사람을 다루는 데 있어 너무 심하게 할 필요가 없는 것인데 어찌 영원히 버릴 수 있겠는가. (과거 응시자격 제한을) 풀어준 사관의 관원을 파직시키는 일에 관해서는 윤허하지 않는다.”
이러한 보고가 있고 3일 뒤 10월 14일 열린 광해군 등극 기념 증광 별시에서 홍천경은 갑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전적, 나주교수, 남원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이해 광해군 일기 10월 14일자 기사 제목은 「등극 증광 별시(登極增廣別試)에 〈응시자에게 책문(策問)을 시험보여〉홍천경(洪千璟) 등 33 명을 뽑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사관은 자신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사신(史臣, 사관)은 논한다. 현재 대간이 홍천경의 정거(停擧)를 해소시킨 일에 대해서 사관(四館)을 논핵하고 있는데 천경은 물의를 고려하지 않고 전시(殿試)에 들어갔으니 그의 사람됨을 알 수 있다.”
홍천경이 대인임을 칭찬하는 말이다.

1623년(70세)
음력 3월 12일, 광해군이 실각하고 인조가 등극하였다.(인조반정) 그동안 탄압을 받던 서인 일파가 동인의 대북파와 광해군을 몰아내고 능양군 이종(인조)을 옹립하였다.
이해 홍천경은 노인직(老人職)으로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1632년(79세)
인조 10년에 사망하였다. 월정서원(月井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작으로 반환유집(盤桓遺集)이 있다. 시가와 산문을 엮어 1914년에 간행한 시문집으로, 3권 1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문에는 임진왜란에 종군하면서 느낀 점, 그리고 종전 직후의 감회를 읊은 시들이 많다. 전란으로 인한 고통과 그 피폐에 대한 상심을 잘 표현하였다. 그 외에 명나라 사신에게 보낸 글들도 포함되어 임진왜란 당시 지식인들의 인식을 엿볼 수 있는 자료가 적지 않다.
조선시대 문신 양경우(梁慶遇, 1568년〜?)는 홍천경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사문 홍천경(洪千璟)의 호는 반환(盤桓)이다. 어릴 적부터 문장을 업(業)으로 삼아 남쪽 지방에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운수가 기이하여 뜻이 어긋나 나이 오십이 지난 후에야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오래지 않아 또 장원으로 급제하여 폐조(廢朝, 광해군) 때에 전라도 벽사 찰방(碧沙察訪)이 되었다. 그때 참의(參議) 이광정(李光庭)이 분사 지조(分司地曹)로서, 홍공(洪公, 홍천경)에게 곡식 모으는 임무를 맡겼는데, 다른 관원보다 훨씬 우수하게 곡식을 모은지라, 그 공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인조반정 후에는 시대의 버림을 받아 한 관직도 지내지 못하고 죽었으니, 슬프다.
그는 평생 시 짓는 것을 좋아하였는데, 가끔 기특하고 힘이 있었다. 과거 시험장에서 지은 작품은 붓을 휘두름에 바람이 이는 듯하였고, 시어(詩語)는 사람을 놀라게 하였으니 역시 한 시대의 호방한 재주였다.”

<참고문헌>
광해군일기광해군 1년, 1609년 10월 11일 기사
광해군일기광해군 1년, 1609년 10월 14일 기사
허목, 기언제26권 하편 세변(世變), 「정곤재(鄭困齋) 사적」, <한국고전종합DB>
윤선도, 고산유고(孤山遺稿) 권3, <한국고전종합DB>
김용국, 「홍천경(洪千璟)」,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8
이원구, 「반환유집(盤桓遺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5

홍천경(洪千璟)의 글씨(서간문)

윤동로(尹東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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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로(尹東老, 1550년〜1636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공조좌랑, 울산판관, 동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율곡 이이(李珥)에게 글을 배웠다. 23세 때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으며 45세 때 관직에 있으면서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공조좌랑에 임명되었으나 행동이 단정하지 못하고 회의에도 잘 참석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정유재란 때에는 삼도수군통제사의 종사관에 다시 기용되었으나, 사사로이 역마(驛馬)를 사용하였다는 이유로 도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의 탄핵을 받았다. 또 54세로 울산판관에 재직하고 있을 때는 백성들을 탄압한다는 이유로 처벌되기도 하여 관직 생활이 순탄치 못하였다.

1550년(1세)
명종 5년에 생원 윤언성(尹彦誠)과 조우신(趙又新)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파평(坡平, 지금의 경기도 파주), 자는 기중(期仲), 호는 수심당(水心堂)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윤수천(尹壽千), 할아버지는 윤임형(尹任衡)이다. 율곡 이이(李珥)의 문인이다.

1573년(23세)
선조 6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1595년(45세)
선조 28년 사과(司果)로 재직하고 있을 때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596년(46세)
공조좌랑에 임명되었다. 행동이 단정하지 못하고 공식 회의에도 잘 참석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6월 11일자로 사헌부에서 임금에게 올린 보고서에 다음과 같이 탄핵 사유가 적혀있다.
“공조 좌랑 윤동로(尹東老)는 【단정하지 않은 벗을 사귀고 멋대로 처신함】는 자신이 낭관(郞官, 육조六曹의 5・6품 하급 관원)의 반열에 있으면서 일이 많은 이 때에 허락도 받지 않고 사사로이 고향에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공식 회의 때마다 앓는다고 핑계하였으니, 파직하도록 명하시기 바랍니다.”

1597년(47세)
일본군이 다시 침략을 해왔다.(정유재란) 이때 그는 삼도수군통제사의 종사관에 다시 기용되었다. 하지만 도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의 탄핵을 받았다.
선조실록에 따르면 이 해 6월 19일자(음력) 지평 남이신(南以信)이 임금에게 보고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4도 도체찰사(四道 都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의 장계를 보건대, 통제사의 종사관 윤동로가 개인 일로 노복(奴僕)을 내보낼 때 역마(驛馬)를 지급하기까지 하였고, 도원수의 종사관 김택룡은 작미(作米)하는 것을 감독하기 위해 전라도에 있는데, 해당되는 복마(卜馬) 이외에 외람되게 역의 대마(大馬) 4필을 거느렸습니다. 요즘처럼 각역이 심하게 파괴된 때를 당하여 규정을 어기고 물의를 일으킨 점이 이처럼 극에 이르렀으니, 매우 놀랍습니다. 윤동로와 김택룡은 먼저 파직시키고 나서 조사하소서.”

1604년(54세)
울산판관에 재직하고 있었을 때 백성들을 심히 탄압한다는 이유로 처벌되었다.

1629년(79세)
인조 7년, 동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파흥군(坡興君)에 봉해졌다.
이기룡(李起龍)이 그린 <남지기로회도(南池耆老會圖)>에 윤동로가 참석한 모습이 보인다. 그는 이해 6월 5일(음력)에 숭례문(崇禮門) 앞에 있던 홍첨추(洪僉樞)의 저택에 열리는 기로회에 참석하여 장수를 기원하는 술상을 받았다. 이 때 참석자들은 윤동로를 포함하여 이인기(李麟奇), 이유간(李惟侃), 이호민(李好閔), 이권(李勸), 홍사효, 강인(姜絪), 이귀(李貴), 서성(徐㨘), 강담(姜紞), 유순익(柳舜翼), 심논(沈惀) 등 모두 12명이었다.

1636년(86세)
인조 14년에 사망하였다. (일설에 1635년에 사망하였다는 기록이 있음.)

<참고문헌>
선조실록 선조 29년 1596년 6월 11일자 기사
선조실록 선조 30년 1597년 6월 19일자 기사
김용덕, 「윤동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7

유해(兪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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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兪瀣, 1541〜1629)는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율곡 이이의 문인이다. 선조 때 식년시에 생원으로 합격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임진왜란 때에는 종묘에 안치된 신주를 모시고 임금을 따라 피난한 공으로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책록되었다.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등을 역임하였다. 1867년(고종 4년)에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하고, 정려를 세우도록 하였다. 당시 세워진 정려각이 충청남도 홍성군 홍동면에 보존되어 있다.

1541년(1세)
중중 36년에 참봉(參奉) 유필성(兪必成)의 아들로 태어났다. 유필성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창원(昌原)이며 참봉(參奉)을 지냈다. 유해의 자(字)는 숙부(淑夫), 호(號) 송암(松庵)이다. 이이(李珥)의 문인이다.

1576년(35세)
선조 9년 병자(丙子) 식년시(式年試)에 생원 3등으로 합격하였다.

1592년(51세)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생하였다. 이때 그는 종묘서 직장(宗廟署 直長)으로 종묘와 영녕전(永寧殿)에 모셔진 신주(神主)를 받들고 어보(御寶)와 제향의 도구 등을 수습하였다. 이어서 권희(權僖), 이산해, 조공규 등과 같이 임금의 뒤를 따라 의주까지 피난을 갔다.

1593년(52세)
해주(海州)의 백림정(柏林亭)에 신주(神主)를 봉안(奉安)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임명되었다. 이후 왜란이 종료된 뒤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책록(冊錄)되어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이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1629년(88세)
인조 7년에 사망하였다. 일설에 1631년에 사망하였다고 한다. 1867년(고종 4년)에 국가에서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하고, 정려를 세우도록 명했다. 시호는 충렬이다. 충청남도 홍성군 홍동면에 유해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서 충신각(정려각)이 세워져있다. 정려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 규모이며, 목조와즙(木造瓦葺) 건물로 내부에는 정려비와 현판이 보존되어 있다.

<참고문헌>
김학경, 「유해」,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우리마을 문화재 -홍동 상하금마을 유해 충신문」, <홍주신문>, 2016.8.10.

유공진(柳拱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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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진(柳拱辰, 1547년〜1604년)은 조선시대 종부시정(宗簿寺正), 우승지, 파주목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율곡 이이(李珥)와 우계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으며 1583년 율곡이 동인에 의해서 파면을 당하였을 때, 성균관 생원들을 모아 변호를 하는 상소문을 올렸다가 자신도 파면을 당하였다. 하지만 이 일로 선조 임금의 마음을 움직여 동인들이 오히려 유배를 당하는 등 고초를 겪었다. 이후 과거에 급제하여 이조정랑, 예조정랑, 사헌부 사간 등에 임명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군량의 조달과 수송에 큰 공을 세웠으며 전란 중에 공이 큰 문신 16명 중 첫 번째로 뽑혔다.

1547년(1세)
명종 2년, 선원전(璿源殿) 참봉(參奉) 유자(柳滋)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행(李荇)의 딸 덕수 이씨사이에서 2남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자는 백첨(伯瞻), 호는 이탄(鯉灘),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율곡 이이(李珥)와 우계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다. 호조 참의에 추증된 유수(柳璲)의 증손이며, 호조 참판에 추증된 유광식(柳光植)의 손자이다.

1570년(23세)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다. 성균관에 입학하여 대과를 준비하였다.

1575년(28세)
이즈음 동서 분당이 심화되어 동인과 서인이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서울, 경기 지역을 근거지로 한 기호학파와 영남을 근거지로 한 영남학파가 사상적으로도 대립하였다. 서인을 구성한 기호학파의 중심은 이이와 성혼이었으며, 동인을 구성은 영남학파의 중심은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이었다. 이에 따라 유공진은 자연히 서인에 합류하게 되었다.

1583년(36세)
성균관 생원 462명을 모아 스승인 이이·성혼의 무고를 밝히는 소를 올렸다. 이 상소문을 둘러싸고 동인과 서인 사이에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다. 유공진을 비롯한 백여명의 성균관 학생들이 과거 응시자격을 박탈당하고 유공진은 투옥되었다. 동인들은 병조판서로 있던 율곡 이이를 탄핵하였으나 주도자들이 오히려 비판을 받아 유배를 당하였다.(계미삼찬癸未三竄) 대사간 박승임(朴承任) 등 동인 측 주요 인물들이 선조의 분노를 산 결과 문책, 파직되었다.
감옥에서 풀려난 유공진은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91년(44세)
이조정랑에 임명되었다. 이해 서인 우의정 정철(鄭澈)이 세자책봉문제(建儲問題)로 파직을 당하여 강계로 귀양을 가자, 같은 당파라 하여 경원에 유배되었다.
이 당시 선조실록기록에는 사헌부에서 올린 보고서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이조 정랑 유공진(柳拱辰)은 인물이 거칠고 용렬하며, 검열 이춘영(李春英)은 인물이 경망스러워 재상의 집을 드나들었으니 이들을 함께 파직시키소서.”
선조 임금은 이에 건의한 대로 처리하라고 명을 내렸다.

1592년(45세)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정철과 함께 풀려났다. 예조정랑에 임명되었으며 세자시강원보덕을 겸하였다.

1593년(46세)
사헌부사간·사복시정·홍문관부응교 등을 역임하였다.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임명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즈음 조정은 광해군을 중심으로 한 분조(分朝, 별도의 조정)를 구성하였다. 유공진은 대신들과 함께 이를 취소해달라는 상소를 올렸다.
당시 명나라에 가서 명나라 총독에게 올린 상소문의 대략 내용은 최립의 간이집에 다음과 소개되어 있다.
“삼가 살피건대, 일본은 우리나라와 그동안 관계가 서로 나빴던 것도 아니고, 서로 원망을 맺을 만한 일도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일본에서는 자기들의 섬을 텅 비워 둔 채 군대를 총동원하여 소국(小邦, 우리나라)을 침입해서는 거의 몇 년 동안이나 화란을 끼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그들의 뜻이 또 노략질로만 끝내려는 것이 아니라, 기필코 우리나라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난 뒤에 우리의 땅을 병탄하려는 데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대개 수중(水中) 동물로서 육지의 해안을 따라 서식하고 있는 교룡(蛟龍)이나 악어(鰐魚)처럼 흉맹한 족속이라고나 해야 할 것입니다. 반면에 소국으로 말하면, 거의 2백 년 동안이나 아무 일없이 태평한 시대에 살고 있었으므로, 대비해 놓은 것이라고 해야 겨우 좀도둑의 도발을 막는 정도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이처럼 졸지에 지탱하지 못한 채 여지없이 패하여 나라를 잃어버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으니, 대체로 왜적이 바라는 형세가 십중팔구는 이미 이루어졌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멀리 굽어 살펴 주시는 (명나라의) 황제 폐하의 신령스러운 위엄에 힘입어 대군(大軍)이 마치 하늘에서 내려오듯 소방을 구원하러 오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평양성(平壤城)에 육박해서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은 사이에 승리를 거두고 수복하자, 왜적이 비로소 깜짝 놀라면서 두려워하게 되었으며, 도성을 점거하고 있던 자들도 그때부터 도망갈 마음을 갖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강화(講和)하자는 주장이 빚어지게 되었는데, 사실은 그들이 마음속으로 진정 원해서 그랬던 것이 아니요, 단지 군대의 위협을 완화시켜 보려는 술책일 뿐으로서, 잠깐 뒤로 물러났다가 다시 힘을 길러 독기(毒氣)를 부리려는 속셈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중략)
지금 소국의 형편으로 말하면, 팔도(八道)의 지방 어느 곳에도 밥 짓는 연기를 볼 수 없는 가운데, 겨우 살아남은 자들 역시 천 명 중에 열 사람밖에 되지 않고 백 명 중에 한 사람 정도밖에는 되지 않는 실정입니다. 게다가 두 해 동안이나 농사를 거의 망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지금에 와서도 아직 농사지을 엄두를 아예 못 내고 있는 실정입니다.
왜적의 칼날에 이미 목숨을 잃은 백성들이야 말할 것이 없다 하더라도, 지금 간신히 살아남은 백성들까지도 굶어 죽는 시체가 날이 갈수록 더욱 쌓여만 가는 가운데 서로 잡아먹는 지경에까지 이르러, 장차 모두 죽게 될 운명에 처해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다시 시일을 끌며 왜적과 대치하게 될 경우, 병력을 유지하고 식량을 마련하여 자력(自力)으로 구원받을 길은 전혀 없습니다.
(중략)
오늘날 소국의 양식이 부족한 것으로 말하면, 대개 병화(兵火)가 처음 일어났을 때보다도 심각합니다. 그래서 구병(舊兵)이나 신병(新兵)을 막론하고, 소국을 구원하러 온 군대에게 어떻게 공급할 도리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지난해에 산동(山東)의 곡식을 보내 주신다는 허락을 받았는데, 그 가운데에는 아직도 운송해 오지 못한 곡식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먼 지방에서 운송하다가 혹 뒤늦게 도착한다면 제때에 조달해서 쓸 수가 없을 것이니, 우선 요동(遼東)의 제위(諸衛)와 금주(金州) 등에 비축해 놓은 양식 수만 섬 정도를 꺼내어 중국의 가까운 곳에서 소국의 가까운 곳으로 보내도록 해 주시는 것이 어떨까 하고 감히 요청 드리는 바입니다. 그리하여 얼음이 풀리기 시작할 때부터 배에 실어서 소국의 연해(沿海) 지방에 교대로 풀어 놓게 한다면, 군대가 당장 먹을 식량이 떨어지는 걱정은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한 다음에는 또 계속해서 대대적으로 군대와 양식을 조발(調發)해서 만전을 기해야 할 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모등이 이미, 앞으로 몇 만의 군대와 양식이 필요할지 노야의 마음속에 이미 분명히 계책이 서 있을 것이라고 말씀드린 이상, 감히 누누이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장군께서 저희들의 발언을 중하게 여겨 주시리라고 감히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바야흐로 구제할 일을 깊이 생각하고 계실 이때에 혹 한 가지라도 도움이 될 말씀을 들려 드리고 싶은 마음에서 이렇게 말씀드리게 되었습니다. 저희들은 간절히 바라는 절박한 심정을 가누지 못한 채 죽음을 무릅쓰고 두 번 절하며 말씀을 올립니다.”

1594년(47세)
홍문관 응교에 임명되었다. 임금이 양명학 신봉자 이요(李瑤)를 불러들여 그 이론을 경청하고 있음을 우려하는 의견서를 올렸다. 선조 임금이 ‘앞으로 유의하겠다’는 답변을 하였다.

1596년(49세)
사섬시정(司贍寺正), 승문원 판교 등에 임명되었다.

1599년(52세)
관동지방의 사정에 밝다는 이유로 강원도의 조도 겸 독운어사(調度兼督運御史)에 임명되었다. 이에 군량의 조달과 수송에 큰 공을 세웠다. 이후에 종부시정(宗簿寺正)에 임명되고, 전공을 인정받아 숙마(熟馬) 한 필을 하사받았다.

1600년(53세)
비변사에서 전란 중에 공이 큰 문신 16명을 선발할 때 첫 번째로 뽑혔다. 승정원 우부승지에 임명되었다.

1601년(54세)
산릉도감 도청, 동부승지, 우승지 등에 임명되어 측근에서 임금을 모셨다.

1602년(55세)
동래부사로 임명되었으나 70이 넘은 부친을 봉양한다는 이유로 사직을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이후 서울에 가까운 파주목사로 임명되었다.

1603년(56세)
세자책봉 주청부사(奏請副使)로 임명되었다. 세자책봉을 위해 명나라에 갈 예정이었으나 당시 명나라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여 출발하지 못했다.

1604년(57세)
이해 1월에 서천(舒川)군수로 좌천을 당하였다. 이에 사임을 하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4월 25일, 사망하였다. 이조판서와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유족으로 안동 권씨 부인과 두 아들, 두 딸이 있다. 첫째 아들은 현감과 호조 정랑을 지냈고, 둘째 아들은 사용(司勇)을 역임했다.

<참고문헌>
선조실록, 선조 24년 1591년 윤 3월 6일 기사
최립, 간이집 제4권, 「사행문록(四行文錄)」, <고전종합DB>
정하명, 「유공진(柳拱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7년
진주류씨 대종회, 「승지공 류공진」, 진주류씨 역대인물전, 2006년

이경진(李景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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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진(李景震, 1559년〜1594년)은 조선시대 선조 때의 문신이자 학자로, 황해도 해주 사람이다. 남부 참봉(南部參奉) 이선(李璿, 1524〜1570)의 아들이자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조카이다. 성혼(成渾)의 문인으로, 참봉(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임진왜란 때에는 율곡 이이의 부인 노씨를 모시고 고향으로 피난을 가기도 하였으나 향년 34세로 난중에 사망하였다.

1559년(1세)
아버지 참봉 이선(李璿)과 어머니는 종사랑(從仕郎) 곽연성(郭連城)의 딸 곽씨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등을 지낸 이원수(李元秀)이다. 율곡 이이(李珥)의 조카로, 율곡의 친형인 이선(李璿, 1524〜1570)의 아들이다. 성혼(成渾)에게서 수학하였으며 자는 성보(誠甫)이다. 본관은 덕수(德水)로 지금의 경기도 개풍이다. 이경진의 동생으로 이경항(李景恒)과 조덕용(趙德容)에게 시집을 간 누이가 있다. 동생 이경향도 성혼에게 배웠으며 참봉을 지냈다.

1564년(5세)
아버지 이선(李璿)이 과거 식년시(式年試)에 급제하여 생원(生員)이 되었다. 이후 남부 참봉(南部參奉)에 임명되었다.

1570년(11세)
부친 이선이 사망하였다. 향년 46세였다. 이선은 이원수와 신사임당의 4남 3녀 가운데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덕수(德水), 자(字)는 백헌(伯獻), 호는 죽곡(竹谷)이다. 1551년(명종 6년) 당시 한강의 수운을 담당하는 수운판관(水運判官)의 직위에 있던 아버지 이원수를 따라 동생인 이이와 함께 세곡을 운반하기 위해 평안도로 갔다.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 신사임당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후 이원수가 권씨를 후처로 들이자 이선은 아버지와 갈등을 빚어 한동안 회덕(懷德, 지금의 대전 대덕구 지역)으로 옮겨가 살기도 했다.

1584년(25세)
이해 2월(음력)에 작은 아버지 율곡 이이가 사망하였다.

1585년(26세)
선조 18년. 동인 정여립(鄭汝立) 등이 율곡 이이를 근거 없이 비난하였다. 이에 이경진은 다음과 같은 상소문을 올려 율곡을 옹호하였다.
“신이 듣건대, 정여립(鄭汝立)이 경연에서 신의 숙부(叔父)인 이이를 비방하여 배척했다고 합니다. 이에 신은 놀랍고 괴이하여 스스로 ‘세상에 어찌 이런 경우도 있는가? 다른 사람이 비난했다고 하면 말할 것이 없겠지만 정여립은 반드시 그럴 리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집안에 있는 편지를 열람하여 정여립이 숙부에게 보낸 편지를 찾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하 중략) 또 하나의 편지가 있는데, 그 대략을 말씀드리면 ‘생각건대 우리 임금께서 여러 의견을 물리치고 존형(尊兄, 율곡 이이)을 여러 사람들이 미워하는 가운데서 발탁하여 총재(冢宰)로 임용하여 의심하지 않았으니 이는 실로 한(漢)·당(唐) 이래 있지 않았던 성대한 일이다. 그것을 보고 듣는 사람이 누군들 감격하지 않았을까마는 저(정여립)의 기쁨이 더욱 컸습니다.’ 하였습니다. 이는 이이가 조정에 돌아온 뒤의 일입니다. 이 때부터 이이가 죽을 때까지는 겨우 한 달 사이인데, 어찌 (정여립과 이이 사이에) 절교(絶交)한 편지가 있었겠습니까.”
이러한 상소문을 읽고 선조 임금은 다음과 같이 답을 하였다.
“정여립의 행위는 인정에 가깝지 않아서 내가 처음에는 혹 떠도는 말에서 나온 것인가 여겼었는데, 뒤에 들으니 과연 헛말이 아니었으므로 그가 반측 무상(反側無狀, 배신을 잘하는)한 자라고 전교하였다. 그리고 자신에게 절교해야 할 까닭이 없다면 비록 다른 사람이 스스로 절교했다 한들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절교 여부에 대해서는 더욱 변명할 필요가 없다.”

1587년(28세)
율곡 이이의 문인인 이귀(李貴)가 율곡을 변호하는 상소문(변무소辨誣疏)을 올렸으나 중도에 전달되지 않아 이경진이 대신 전달하였다. 아울러 율곡 이이가 시류(時流)에 휩쓸리지 않는 인물임을 천명하였다.

1591년(32세)
전옥서참봉(典獄署參奉)에 임명하였으나 사양하였다.

1592년(33세)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작은 어머니인 이이의 부인 노씨(盧氏)를 모시고 고향 해주로 피난하였다. 노씨 부인이 적에게 화를 당하자 양덕현(陽德縣)으로 갔다가 다음해에 해주석담(海州石潭)으로 돌아갔다.

1593년(34세)
스승인 우계 성혼으로부터 강학을 받았다.

1594년(35세)
정월에 제릉참봉(齊陵參奉)에 임명되었다. 난중에 사망하였다.

<참고문헌>
선조실록 19권, 1585년 6월 16일자 기사
박정자, 「이경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7년

임탁(任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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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탁(任鐸, 1544년〜1593년)은 조선시대 상서원직장, 제술관, 도감랑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선조 9년에 사마시에 급제하여 성균관에 들어갔으며, 행실이 독실하여 주변 선비들이 추종하였다. 율곡 이이(李珥)와 우계 성혼(成渾)의 문인으로 율곡과 우계가 탄핵을 받았을 때 그는 성균관의 유생들을 모아 변호하다 그 역시 탄핵을 받았다. 임진왜란 때에는 소모관(召募官)에 임명되어 경기도, 황해도, 강원도 등지에서 병사와 군량을 모집하였다. 선조 임금의 가마를 호위하여 도성으로 돌아온 뒤에는 명나라 장수들의 접대와 전후 처리에 전념하다 병을 얻어 사망하였다.

1544년(1세)
중종 39년 11월 원주목사 임몽신(任夢臣)과 송씨 부인 사이에서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풍천(豊川, 황해도 송화), 자는 사진(士振)이다. 할아버지는 내섬시 정(內贍寺正)을 지낸 임정(任楨), 증조할아버지는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낸 임유손(任由遜), 고조할아버지는 수안 군수(遂安郡守)를 역임한 임한(任漢)이다.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그는 성품이 아주 강직하다는 평을 받았으며 품행과 몸가짐이 매우 분명하였다. 학문을 좋아하고 행실이 독실한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찾아가서 교제를 하였다. 성리학을 공부하면서 매우 흥미를 가졌으나 집안의 어버이가 늙어서 과거 시험에 전념하느라 학문에 매진할 수가 없었다.
임탁은 어려서 할아버지 참판공의 집에서 자랐다. 참판공은 그의 착한 행실을 사랑하여 글을 지을 때 ‘효동(孝童)’이라 불렀다. 아버지의 상을 당하였을 때는 여막을 짓고 무덤 곁에서 지내면서 밥을 먹지 않고 죽을 먹으며 슬프게 통곡하였다. 뒤에 할머니의 상을 당하였을 때도 역시 예를 다하였다.
어머니가 연로하여 실명을 하고, 병이 위독해져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지냈는데, 임탁은 밤낮없이 눈물을 흘리고 의원을 찾아다니며 약방문을 물었으며, 직접 인분을 맛보며 간호하여 병을 낫게 하였다고 한다.

1576년(32세)
선조 9년 사마시에 급제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행실이 독실하여 주변 선비들이 추종하였다.

1583년(39세)
율곡 이이가 소인배들의 모함으로 삼사(三司)의 비판을 받았다. 이이를 변호한 성혼도 탄핵을 받자 유생들과 함께 이에 항의 소를 올렸다. 이때 임탁은 성균관장의(成均館掌議)로 있으면서 성균관의 여러 학생들을 모아 공동으로 상소를 올리고 율곡을 변호하였다. 이 덕분에 그는 반대파들의 비판을 받고 삼사의 탄핵을 받았다.

1587년(43세)
이조의 천거로 동몽교관(童蒙敎官), 와서별제(瓦署別提) 등에 임명되었다. 그가 동몽교관으로 있었을 때, 유성룡(柳成龍, 1542년〜1607년)은 드러내놓고 배척하고 화를 내기도 하였다.(선조수정실록 1587년 9월 1일 기사) 유성룡은 문신이며 성리학자로 승문원 권지부정자, 의정부 영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이황의 제자로 조목(趙穆), 김성일 등과 함께 글을 배웠으며 성리학에 정통하였다. 과거시험 합격하여 관료로 등용된 뒤에는 이산해와 가깝게 지내 동인으로 활동하여 서인들과는 대립하였다. 정여립의 난과 기축옥사를 경험한 뒤에는 온건파인 남인을 형성하고 강경파였던 이산해와 결별하였다.

1590년(46세)
이즈음 임탁에 대해 좋게 여기지 않는 자가 춘관(春官)을 관장하게 되어 그는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한참이 시일이 지난 뒤에 다시 별제(瓦署別提)에 임명되었다.

1592년(48세)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소모관(召募官)에 임명되어 군사 모집의 임무를 맡아 경기도, 황해도, 강원도 등지에서 병사와 군량을 모집하였다. 상서원직장(尙瑞院直長)에 임명되었다. 명나라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이 방한하였을 때, 내빈사(來賓使) 윤근수(尹根壽)의 추천으로 제술관(製述官)이 되어 이들을 맞았다.

1593년(49세)
선조 임금의 가마를 호위하여 도성으로 돌아왔다. 도감(都監)의 낭관(都監郎)에 임명되었다. 명나라 장수들을 접대하느라 오랫동안 수고를 한 탓에 몸이 상하여 다음 해 3월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사망 당시 그의 집안은 궁핍하여 장례용품을 구할 수 없었다. 겨우 친척과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장사를 지낼 수 있었다. 양주(楊州)의 도혈리(陶穴里) 사곡촌(笥谷村)에 장사 지냈다.
유족으로는 부인 신씨와 3남 2녀를 두었다. 신씨는 고령(高靈)의 충의위(忠義衛) 신맹영(申孟瀛)의 딸이며, 목사(牧使) 신영철(申永澈)의 증손녀이다. 장남 임헌지(任獻之)는 진사이며, 차남 임면지(任勉之)는 일찍 사망하였고, 삼남 임뇌지(任賚之)는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전적(典籍)에 임명되었다. 장녀는 진사 권길(權佶)에게 시집갔으며고, 차녀는 부사 한인(韓訒)에게 시집갔다.
김상헌은 묘지명에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다.
“공은 평생토록 검소하여 세속의 화려한 습속이 전혀 없었다. 꿋꿋하고 묵중하여 고요한 방에 나아가 똑바른 자세로 엄연하게 앉아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감히 비리를 청탁하지 못하였다. 성품이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여 친한 사람의 경우에는 위급함을 반드시 구해 주었고, 어진 사람일 경우에는 비록 소원한 사이더라도 급한 데 달려가기를 친한 사람과 같이 하였다. 일찍이 회시(會試)의 대책(對策)에서 이름이 선발자 명단에 들어 있었는데, 시험을 주관하는 자 가운데 한 사람이 옳지 못한 말을 늘어놓으면서 다른 사람의 시권(試卷, 답안지)을 뽑고 공의 시권을 탈락시켰다. 이에 그 말을 들은 자들이 ‘의당 올라가야 하는데 떨어졌다.’고 하였다. 그러나 공만은 홀로 얼굴빛과 말투에 드러내지 않았다.”

<참고자료>
권오호, 「임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7
김상헌(金尙憲), 청음집(제34권 묘지명), <한국고전종합DB>

조광현(趙光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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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현(趙光玹, 1553년〜1635년)은 조선 중기의 학자이며, 의병장이다. 선조 임금 때 진사가 되었으며 제릉참봉(齊陵參奉), 금성현령(金城縣令) 등에 임명되었다. 그는 동생과 함께 율곡(栗谷) 이이(李珥)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학문에 조예가 깊어 동문 중에서 가장 주목을 받았다.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이 동인의 공격을 받아 탄핵을 당하였을 때는 이귀(李貴) 등과 상소문을 올려 적극 변호하다 자신도 탄핵을 받았다. 임진왜란 때는 의병을 일으켜 싸우고, 선조 임금을 수행하며 의주까지 가는데 공을 세워 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고 호조좌랑에 임명되었다. 정묘호란 때도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1553(1세)
명종 8년에 태어났다.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계진(季珍), 호는 금탄(琴灘)이다. 이이(李珥)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으며 문하생 중 가장 촉망받는 인물이었다. 부친은 여절교위(勵節校尉)‧참봉 조사필(趙士弼)이며, 형은 조광숙(趙光琡), 동생은 조광위(趙光瑋)이다. 동생과 함께 율곡(栗谷) 이이(李珥)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율곡에게 글을 배울 때 그는 학문에 조예가 깊어 율곡의 칭찬을 들었으며 수백명의 율곡 문하생 중에 가장 주목을 받았다.

1582년(29세)
선조 15에 과거 식년시(式年試)에서 합격하여 2등으로 진사가 되었다.

1585년(32세)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成渾) 등이 동인의 공격을 받아 탄핵을 당하자 그들을 변호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이후 제릉참봉(齊陵參奉)과 금성현령(金城縣令) 등을 지냈다.

1587년(34세)
조광현은 이귀(李貴) 등과 함께 스승 이이가 억울하게 모함을 받는 일을 변호하기 위해서 상소를 하였다. 당시 동인과 서인간의 당쟁이 점차 치열해지고 율곡과 우계가 동인들의 근거 없는 공격을 받았기 때문에 이를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관리들이 중간에서 상소문을 막았는데 율곡 이이의 조카 이경진(李景震)이 다시 상소문을 작성하여 조광현 등이 올린 상소문과 같이 올렸다. 임금이 이귀를 불러 “너의 상소문을 보니 ‘경박하고 나서기를 좋아하는 무리들이 다투어 일어나 억지로 말을 끌어다 붙였습니다. 당시 심의겸(沈義謙, 당시 서인의 중심인물-역자주)의 문을 출입하면서 조석으로 서로 어울렸고, 노비처럼 비굴한 태도를 가진 무리들이 몸을 굽혀 들어가는 일도 적지 않았습니다.’고 하였다. 또 ‘전일 심의겸에게 달려가 아부하던 무리들이 일시에 동인(東人)들에게 정성을 바치면서
1587년에 올린 조광현의 상소문(<伸寃牛栗兩先生疏>)
반기를 들고 심의겸을 공격했습니다.’라고 하였는데, 도대체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것인가? 임금을 섬김에 있어서 감추는 일이 없는 것이 옛날의 도리이다. 너는 낱낱이 들어 대답하라.”고 명했다. 이에 이귀는 글을 올려 다음과 같이 해명하였다.
“세상을 떠난 스승 이이는 평생을 참됨 마음으로 나라를 걱정하였습니다. 그러나 한번 시론(時論)에 거슬리자 그릇된 비방이 백출(百出)하여 그것이 날마다 새롭게 생기고 불어났습니다. 이는 인심이 날로 격해져 사론(士論)이 허물어져서 그런 것입니다. 이 때문에 신은 은혜를 헤아리지 않고 다만 이이(李珥)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성세(聖世)에 밝힐 수 있다면 신이 비록 만 번 죄를 받아 죽더라도 역시 마음에 달게 여기겠습니다. 성상(聖上)께서 하문하신 전교를 보니, 이는 바로 저희들이 가슴에 품은 말을 모두 속이지 않고 아뢸 기회입니다. 신들이 상소문에서 이른바 ‘경박하고 나서기 좋아한다.’는 사람은 백유양(白惟讓)ㆍ노직(盧稙)ㆍ송언신(宋言愼)ㆍ이호민(李好閔)ㆍ노직(盧稷)입니다. 이런 무리들에 대해 만약 두루 진달(進達)하고자 한다면 어찌 이 몇 사람에 그치겠습니까. 전일에는 심의겸과 관계를 맺고 있다가 그가 권세를 잃자 도리어 심의겸을 공격한 자들은 박근원(朴謹元)ㆍ송응개(宋應漑)ㆍ윤의중(尹毅中)입니다. 이 자들의 경우는 족히 이를 것도 없거니와 또 심의겸과 서로 아는 처지로 이이에 비할 바가 아닌 자로서는 이산해(李山海)와 같은 자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만일 심의겸을 알았다는 이유로 이이의 죄를 삼는다면 먼저 이 사람들을 공격하는 것이 옳습니다. 단지 시론(時論)을 거스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들을 공격하지 아니하고 이이만을 논죄하니, 이것이 과연 임금을 섬김에 있어서 속이지 않는다는 것이겠습니까. 신들이 이산해(李山海)에게 유감이 있는 것은 이이가 심의겸과 같이 결탁하여 함께 일하지 않은 것을 다른 사람은 모른다고 하더라도 이산해는 반드시 알 것인데, 이산해는 이이와 평생을 사귀어 온 벗이건만 이이가 무고당하는 것을 좌시하며 지금까지 임금님의 앞에서 그 본심을 밝히는 말 한마디도 없습니다. 이는 필시 구원(九原)의 혼령이 유감스러워할 일입니다. 이산해가 심의겸에게 준 시(詩)에 따르면 ”봄이 찾아온 서울에서 거듭 서찰을 받아 보고, 산길 어두운 밤에도 익숙히 서로 맞이하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과연 심의겸을 알지 못하는 사람의 글이겠습니까? 이것이 신들이 상소문에서 이른바 ‘조석으로 서로 어울린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노비처럼 비굴한 태도를 지녔다.’는 자는 정희적(鄭熙積)입니다.”
선조 임금이 이 글을 읽고 ‘너희들의 뜻을 잘 알았다’고 답하였다.

1592년(39세)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종형인 참봉 조광윤(趙光玧)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싸웠다. 월천군(月川君)의 군사와 호응하여 적들을 참획(斬獲)한 공을 세웠다. 또 선조 임금을 보위하여 의주까지 가는데 공을 세워 원종공신(原從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1601년(48세)
11월 호조좌랑에 임명되었다.

1627년(74세)
인조 5년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켰다.

1635년(82세)
사망하였다. 아들로 부사과(副司果)를 역임한 조종전(趙宗傳)과 조종칙(趙宗侙)이 있다. 해주(海州)의 소현서원(紹賢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금탄유고(琴灘遺稿)』가 있다.

<참고자료>
선조실록, 1587년 3월 7일, 8일자 기사
김동섭, 「조광현(趙光玹)」,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한국학중앙연구원

심예겸(沈禮謙)

심예겸(沈禮謙)                                                           PDF Download

 

심예겸(沈禮謙, 1537년~1598년)은 조선시대 중엽에 활동한 관리이자 학자이다. 선조 3년 식년시에 생원(生員)으로 합격한 뒤, 관직에 나아가 한산군수, 성천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병조판서를 지낸 심충겸(沈忠謙)의 형이며, 판중추부사, 우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심열(沈悅)의 양아버지이다. 임진왜란 때에는 군량 보급에 공을 세우기도 하였으나 명나라 군대에 군량을 제때에 보급하지 못한 책임으로 곤장을 맞은 적이 있으며 나중에 간원의 탄핵을 받아 파직 당하였다.

1537년(1세)
중종 32년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 심강(沈鋼)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청송, 자(字)는 문숙(文叔)이다. 형제는 위로 형 둘이 있으며 아래로 동생 다섯이 있다.
젊어서 영일 정씨 정숙(鄭潚)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1569년(32세)
동생 심충겸(沈忠謙)이 아들 심열(沈悅, 1569년〜1646년)을 낳았다. 심열은 나중에 심예겸의 양자로 들어왔는데, 성장한 뒤 과거에 합격하여 판중추부사, 우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자는 학이(學而), 호는 남파(南坡),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저서로 남파상국집(南坡相國集)이 있다.

1570년(33세)
선조 3년 식년시에 생원(生員) 3등으로 합격하였다.

1571년(34세)
우계 성혼이 화담 서경덕(徐敬德, 1489년〜1546년)의 행장에 대해서 물어와 답해 주었다. 우계집 속집 제6권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송도(松都)에 사는 안경창(安慶昌)이 ‘집에 화담 선생의 행장이 있다’고 하기에 가져다 읽어 보니, 기재한 내용이 자세히 구비되지 못하였고 또 글에 오자가 많았으며, 문체가 기전체(紀傳體)이고 행장이 아니었다. 누가 지은 것인지 몰랐는데 뒤에 심문숙(沈文叔 심예겸沈禮謙)에게 물어보니 관찰사 박민헌(朴民獻)이 찬(撰)한 것이라고 하였다.”

1584년(47세)
우계 성혼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답신을 온 편지 속에 다음과 같은 글이 들어 있었다.
“이제 성은(聖恩)을 입어 품계를 뛰어넘어 크게 발탁되었으니, 황공하고 두려워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선비가 비록 실제보다 지나치게 소문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야 하나 또한 마땅히 분수를 편안히 여기고 뜻을 지켜 스스로 넘어지거나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저는 다만 놀랍고 두려울 뿐이니, 또한 일을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다만 작은 벼슬을 사양하고 큰 벼슬을 받는 것은 의리상 편안하지 못하니, 이 사이에 마땅히 제대로 조처해야 거의 한쪽에 치우치지 않을 것입니다.”

1586년(49세)
한산군수에 임명되었다.

1589년(52세)
아들 심열이 과거 시험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592년(55세)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당시 심예겸은 개성부(開城府)에 재직할 때였다. 그는 군량보급(軍糧補給)에 공을 세워 나중에 성천부사(成川府使)에 임명되었다.
이 당시 10월경에 심예겸 등이 모은 의병들을 지휘할 사람을 두고 진중에서 논의가 벌어졌다. 이 자리에 정창연, 윤두수, 이산보, 그리고 선조 임금 등이 있었다. 정창연(鄭昌衍)이 이렇게 제안했다.
“이정형(李廷馨)ㆍ김지(金漬)ㆍ심예겸(沈禮謙)이 군사를 모았는데 군중(軍中)에서 명망이 있는 사람을 장수로 삼을 것을 동궁(왕세자, 즉 광해군)에게 호소하였던 바, 동궁이 대신들에게 의논하기를 ‘성혼을 불러 장수를 삼으면 어떻겠는가?’ 하니, 대신들이 ‘군중이 호소해 온 바에 따라 하는 것이 옳다.’ 하였습니다. 이는 동궁께서 하신 일이 아닙니다.”
이에 이산보는 이렇게 제안하였다.
“이강(李綱)은 정승에는 합당하나 장수에는 합당하지 않았습니다. 성혼은 보도(輔導, 보좌)에는 합당하지만 장수에는 합당하지 못합니다.”
윤두수는 임금에게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직접 창과 방패를 잡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장막 안에서 계책을 세우는 것이 바로 장수의 임무입니다.”
선조 임금은 이들 대신들이 하는 말을 듣고만 있었다.

1593년(56세)
아들 심열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에 임명되었다. 심열은 성균관전적 등 삼사의 요직을 거쳐, 경기도·황해도·경상도·함경도의 관찰사를 지냈다.
이해 7월 심예겸은 간원(諫院)의 탄핵을 받아 파직을 당하였다. 이때 간원이 임금에게 건의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천(信川, 황해도 신천)지방은 쇠잔(衰殘)함이 너무 심한데, 새로 군수가 된 박명립(朴名立)은 나이가 많고 성질이 느려 회복의 책임을 감당할 수 없으니, 교체하시고 각별히 유능한 사람을 골라 임명하소서. 성천 부사(成川府使) 심예겸(沈禮謙)은 전에 개성 경력(開城經歷)이 되었을 적에 직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일이 있었으니, 파직하시고 유능한 사람으로 교체하시기 바랍니다.”
선조는 이러한 의견에 따라 심예겸을 파직하였다.
개성 경력으로 있을 때 심예겸이 직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일에 대해서는 대동야승에 다음과 같은 야사가 전해져 온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대의) 대군이 개성부에 이르러 매우 오래 있었는데 군량이 이미 다 되었다. 오직 수로를 따라 마른 풀을 강화도에서 가져오고, 또 배로 충청도와 전라도의 마초를 운반하여 조금씩 도착하였는데, 오는 대로 다 떨어지니 그 형세가 더욱 급하였다. 하루는 여러 장수들이 양식이 모자란다고 구실을 삼아 (명나라) 제독에게 회군을 청하니 제독이 매우 성내었다. 제독은 체찰사 유성룡ㆍ호조 판서 이성중(李誠中)ㆍ경기좌도 감사 이정형(李廷馨) 등을 뜰아래에 무릎 꿇리고 큰소리로 힐책하며 군법을 가하려 하였는데, 유성룡이 사죄하기를 마다 않고 눈물을 흘릴 뿐이니, 제독이 민망히 여기며 명나라의 여러 장수들에게로 화를 돌려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이 예전 서하(西夏)에 종군하였을 때에는 군중에서 수일 동안 밥을 먹지 못하고도 감히 돌아가자고 말하지 못하였는데 끝내는 큰 공을 이루었다. 지금 조선에 와서 우연히 수일간 양식을 대지 못하였는데 어찌 감히 문득 돌아가자고 하느냐. 너희들은 가려면 가라. 나는 적을 멸하지 않고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요, 오직 말가죽으로 시체를 싸서 가지고 갈 뿐이다.”
이에 여러 장수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였다. 유성룡 등이 사례하고 물러 나와서 시기에 맞지 않게 양곡을 방출한 죄로 개성 경력(經歷) 심예겸(沈禮謙)을 곤장으로 때렸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전라도에서 바다로 수송해 오는 쌀과 콩 2만 2천여 석과 황해도에서 수송해 오는 마초 수만 석이 후서강(後西江)에 닿아서 겨우 무사하게 되었다. 이날 저녁에 제독이 총병 장세작을 시켜 유성룡 등을 불러 위로하고 또 군사(軍事)를 의논하였다.
유성룡이 직접 지은 징비록에도 심의겸이 곤장을 맞은 일이 기록되어 있다.

1598(61세)
사망하였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참고자료>
선조실록, <한국고전종합DB>
대동야승(「재조번방지」), <한국고전종합DB>
한국학중앙연구원, 「심예겸 인물정보」, 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http://people.aks.ac.kr/)
김신호, 「심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8.
성혼, 우계집 속집 제6권, <한국고전종합DB>